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13. 느낌관찰5 (화) (20071127)

담마마-마까 2020. 1. 4. 12:56

https://youtu.be/MhdJotYOMbk

 

* 기초수행13. 느낌관찰5 (화)(20071127)

 

통상적으로 사념처를 수행하는데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이 몸에 대한 관찰 다음에 설해져 있습니다.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몸에 대한 관찰이 어느 정도 있고 나면, 느낌에 대한 관찰, 그다음에 마음에 대한 관찰, 그다음에 법에 대한 관찰 이렇게 가는 순차적인 방법이 있고, 또 네 가지를 통틀어서 관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과 마음에 대한 것을 통틀어서 관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느낌에 대한 관찰을 떼어서 지금 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고 있으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생생하게 파악을 하게 됩니다. 우선 좌선을 하고 있으면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리 통증이나 등의 통증이나 아니면 가려움이나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통증을 느끼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몸에서 이러한 느낌들이, 그것도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면 보통 그 느낌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이렇게 조건반사적으로 하는데, 수행은 이러한 자극에 대해서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 자체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다리의 통증이나 등의 통증이나 가려움이 있을 때 견디어 낼 수 있을 때까지 견뎌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견디는 것이, 무작정 견디려하면 못견디어 나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견디면서 느낌 자체를 관찰하면서 그 느낌의 변해가는 속성, 본질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견딜 때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생각들 이런 것들을 관찰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것이 안 될 때는 관찰 대상을 호흡이라든지 아니면 자애라든지 이런 것으로 바꾸어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야 만이 이 고통스런 느낌들을 끝까지 관찰해나갈 수 있고 그 고통스러운 것들을 견디어 내서 그 특성들을 갖다가 알아나가게 됩니다.

 

모든 느낌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느낌들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지고 조건이 없어져버리면 사라져간다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내 스스로의 관찰, 일어나는 느낌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이것을 확인하고 이해해야 됩니다. 이런 이해가 생겨버리면 고통을 견뎌내는 힘도 강해지고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무덤덤한 느낌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도 엷어져서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집중이 잘되면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도 관찰해야 될 대상일 뿐인 것이지 붙잡고 집착할 대상은 아닙니다.

수행 중에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들도 관찰해야 될 대상이지 붙잡고 집착할 대상이 아닙니다.

좋고 싫은 경험들, 느낌들은 결국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생겨나서 사라진다는 것,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것들을 가지지 않고 관찰을 해나가야 만이, 거기에서 지혜가 성숙해나가서 깨달음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갖가지 작업들로 느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안이비설신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외부의 대상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로 개방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극들을 받아서 그것을 소화를 못 시켜나가고 있습니다. 마음은 이렇게 쏟아져 들어오는 자극들로 인해서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 우리 일상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그 즐거운 느낌을 더 얻을려고 하고,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괴로움을 없애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겁니다. 마음속에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집착하고 성내고 하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착하고 성내는 것은 '마음의 번뇌'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번뇌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에 인해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감각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느낌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느낌 자체가 아니라 느낌에 대해서 일어나는 집착과 거부감입니다. 그래서 추우면 추운 것에 대해서 육체에서 느끼는 불쾌한 느낌이 생겨나고, 이 불쾌한 느낌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짜증이 생기고 불쾌지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느낌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느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일상에서 경험되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면 이렇게 탐욕과 성냄이라는 마음의 번뇌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느낌으로 인해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또 잘 이해해서, 느낌 뒤에서 일어나는 생각, 마음, 번뇌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힘을 이 느낌을 통해서 키워나가야 됩니다.

 

겨울에는 추운 것이다 하는 것은 누구든지 상식으로 알고 있는데, 상식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이 추위를 정신적으로 견디어 내는 힘이 생겨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겨울이 지나고 나면 여름이 온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듯이, 느낌도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견디어 내는 힘이 생기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느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그 느낌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처음 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느낌들은 내가 수행을 하면서 함께 가야 할 손님일 뿐입니다. 둑카웨다나(dukkha vedanā)-고통스런 느낌.

그게 가벼운 통증이든 무거운 통증이든 또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든 그래서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든 이것은 어차피 나와 함께 가야 할 손님입니다. 손님은 손님으로서 대접을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그 괴로운 느낌들을 통해서 괴로움의 진정한 실체에 대해서 접근하게 되면 그 느낌으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이러한 느낌들은 항상 무상 고 무아에 해당이 되게 돼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거는 비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좌선 중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으면 생기는 것이 괴로운 느낌입니다. 시간이 차츰 가면 적응이 되게 됩니다. 몸이 고통을 적응하기까지가 문제지 그것을 적응하고 나면 그 고통의 산을 넘어서게 됩니다.

 

좌선 중에 고통스런 느낌이 생길 때는 제일 먼저 그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때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보지 않으면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더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고통스런 느낌을 싫어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마음을 오래도록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오래도록 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여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하면서 그 마음을 관찰하고 나서 마음이 고요해졌다 싶으면, 통증이 있는 곳에 가서 자세하게 그 통증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통증이 가지는 성품은 아주 다양하게 있습니다. 쑤시고, 뜨겁고, 아프고, 화끈거리고 하는 여러 가지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보도록 해야 됩니다. 통증은 절대 통증이라고 뭉뚱그려서 오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되어 있으면, 그 통증에 마음을 기울이면 이 통증을 이렇게 각각의 것으로 객관화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쑤실 때 '통증'이라고 하지 않고 '쑤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뜨거울 때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뜨겁다'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만이 그 통증들이 사라지는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몸이 비록 아프다고 하더라도 마음 까지 아프지 않게 돼서 그 통증이 급격하게 경감돼는 것들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일상생활 중에서 화가 난 마음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차릴 때

화가 났다고 '화가 남'하고 알아차려도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설혹 잠깐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잠깐의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그 위세에 눌려서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지,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잠재의식 속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있을 때 그 대상을 관찰한다고 해도 절반은 알아차리고 절반은 화를 일으키는 대상을 알기 때문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경우가 됩니다.

 

왜? 그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느낌이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이렇게 움켜쥐는 상이 일어나게끔 되어서 생각을 일으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화가 일어나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됩니다. 명확하게 말하면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그와 같이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알아차리지 않으면 다시 화가 일어나는 것이 불쑥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이미 마음이 평온하게 돼있을 거 같으면 그 화가 일어나는 것을 부드럽게 맞아들입니다.

손님을 맞아들이듯이 받아들입니다. 나하고 관계없는 것으로! 그래서 '어! 왔는가'하고 알아차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나의 가족을 맞을 때는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더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손님을 맞을 때는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대상을 맞을 때는 이렇게 객관적으로 나그네를 맞듯이 맞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게 되면 화가 일어나는 것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부드럽게 그냥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 왔는가'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니가 왜 또 화가 일어났는가'하고 맞아들이면 곤란하게 됩니다.

 

가슴에 두근거리는 것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화가 일어나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맞아들여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압박을 받은 상태에서 화가 일어나는 것을 맞아들일 거 같으면 가슴이 아프고 두근거리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것은 알아차림의 힘도 약해지고 지혜도 일어나지지 않게 되는 겁니다. 또한 대상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알지도 못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화도 고통스런 느낌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성품입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구나 하고 받아들여서 그냥 알도록 하면 됩니다. 그것을 '절대 앞으로 나는 화를 일으키지 않겠다' 하고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차라리 화가 일어날 때 방황하는 마음을 보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겁니다. 화가 일어나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그 화를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알아차리다 보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알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화가 일어난 것을 내가 결국 바르게 알아차리지 못했고, 바르게 노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화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늘상 내게 되어있는 겁니다.

그 화가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거릴 이유는 없습니다. 툭 던져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화는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면 됩니다.

싫어하는 것들이라고 알면서도 그것이 괴로운 느낌이란 것을 알면서도, 화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집착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럴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화가 일어날 때 내 마음의 상태를 관찰해서 마음에 두근거림이 있구나, 그런 상태가 있구나 하고만 알도록 해보십시오.

이렇게 알아차리는 거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렇게 알고 나서 화가 일어나는 느낌을 일어나는 곳에 그 느낌을 가만히 주시만 하도록 하면 화를 다스려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작용인 느낌이 꼭 가슴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에서도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두통입니다.

마음 때문에 두통이 생겼다 할 거 같으면 마음의 작용인 느낌입니다. 괴로운 느낌입니다. 이런 두통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가슴에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가슴을 관찰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통증이 머리에서 통증이 있으면 머리에서 보도록 해야 됩니다. 이 머리의 통증이 마음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신체적인 통증 때문에 상기가 되어서 일어나는 통증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관찰할 때는 머리나 가슴을 관찰대상으로 합니다.

괴로운 느낌들이나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과 이 생각을 분리할 때, 가슴을 관찰하고 머리를 관찰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통증이 계속되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싫어하는 마음을 계속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통증이 있는 한은 항상 싫어하는 마음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런 싫어하는 마음을 볼 때만이, 알아차릴 때만이 통증을 내가 제압할 수가 있습니다.

 

싫어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마음을 통증이 일어나는 곳, 다리면 다리 머리면 머리로 가서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해보십시오. 그 전과는 다르게 통증을 알 수가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싫어하는 마음을 관찰할 때 가슴으로 보라 하는 것은 머리로 볼 때는 그 느낌이 강렬하게 일어나지만 가슴으로 느낄 때는 많이 약화 된 상태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보는 것들이 용이할 수가 있습니다.

 

통증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두근거림도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은 항상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고 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객관화해서 자꾸 살피도록 해서 대상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일어난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에 빠지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그 느낌이 싫고 좋다고 해서 피하거나 집착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괴로워서 피하고 힘들까 봐서 피하는데, 그렇게 피하기 때문에 괴롭고 피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는 이것이 누구의 괴로움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괴로운 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이 괴로울 뿐인 것이지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로 인해서 겁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뭘 가지고 피해야 되는가? 느낌은 느낌일 뿐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어쩌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그냥 있는 느낌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집착함이 없이 알아차릴 때 이러한 느낌들을 극복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화가 일어났을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이 느낌을 알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 의지가 있을 때만이 일어나는 느낌들에서 객관화할 수가 있습니다.

화살을 두 번 세 번 맞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