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14. 느낌관찰6 (무상·고·무아) (20071204)

담마마-마까 2020. 1. 5. 00:18

 https://youtu.be/EeEwpjFWJ7M

* 기초수행14. 느낌관찰6 (무상·고·무아) (20071204)

 

··· 부처님이 얘기한 진리는 무상·고·무아입니다.

무상·고·무아!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대부분 무상하다고 생각 안 하죠? 항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고통이라고 생각을 안 하죠? 고통이 있고 즐거움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무아,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 안 하죠? 뭔가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걸 부처님이 뭐라고 하냐 하면 "덮여있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하고 그럽니다. 어리석음에 덮여있든 아니면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든 덮여져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스님들 복장을 보면 몸매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릅니다. 스님도 그렇죠? 이걸 잘 모른단 말이라. 이거 왜 그런지 아세요? 덮여져 있어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드러나는 옷을 입었을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신경을 써야 되고 자기 자신도 신경을 써야 되니까 열심히 가꾸고 해서 만들어내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를 갖다가 속여버리는 거라. 다른 사람도 물론 속이지만.

그걸 부처님께서 "덮여져있는 것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보지 못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무상(anicca)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항상한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통 '산따띠' '산따나(saṇtāna)' 라고 해서 '연속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도 연속하는 것 같고 또 마음도 연속하는 것 같고 이 몸도 연속해서 살아가는 것같이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걸 갖다가 '산따띠'라고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산따나(saṇtāna)'라 해서 '상속한다. 연속한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닛짜(anicca)'라고 하는 '무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전깃불이 들어와 있으면 항상 들어와 있는 것처럼 연속한다고 생각을 하고, 꽃이 피어있으면 항상 저렇게 아름답게 꽃이 피어있으니까 똑 조화같이 그렇게 영원히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렇진 않죠? 전깃불도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고 있고, 이어지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있게 되어있고, 꽃도 끊임없이 변해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마찬가진데, 그래서 연속한다는 생각을 일단은 버려야 만이 무상을 갖다가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걸 '덮여있는 것을 가려내는 것이다. 벗겨내는 것이다' 하고 그럽니다.

 

'고통이다, (dukkha 둑카)라고 하는 것을 보통 착각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몸이 편안하다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이리야 빠타(iriyāpatha)'라 해가지고 '처신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한참 수행하다가 고통스러우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요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거든. 움직이면 고통이 제거된단 말이라. 그러니까 처신하는 방법으로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움직여버리니까 편안하다고 느끼는 거라. 편안하다고만 느끼지만 않을 거 같으면 아! 고통스럽구나 하는 사실을 알 건데,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몸을 처신하는 방법으로 하는 거라.

마음도 괴로우면 어떻게 해?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거든. 즐거운 걸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좀 나쁜 사람들은 마약을 한다든지 뭘 한다든지 술을 먹는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즐거움을 택하는 방법을 아는 거라.

 

일시적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즐거움도 항상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바뀌어 나갑니다. 그런 것은 수행에서도 도움이 안 되고 진리의 덮여져있는 것을 발견해내는 데도 도움이 못 된다 하는 거라. 편안하다고 느껴버릴 것 같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라. 무조건 편할 걸 찾아서 이렇게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게으름만 늘어나지고, 또 게으름만 늘어나지면 어떻게 됩니까?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을 안 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천신이 되는 것들도 그렇게 썩 현명한 방법이 못 된다고 하는 것은 편안하고 행복하니까! 편안하고 행복해 봐? 공부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가? 안 생겨나는 거라. 진리를 발견하고 내가 이렇게 덮여있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그 편안함이 오래가는 것도 아니고, 천신의 생활이 계속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어쨌든 생멸을 하게 돼있다는 거라. 생멸을 하게 돼있는 건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편안할려고만 자꾸 노력해가지고 이런 걸 해결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틀림없이 나중에 가면 후회를 하게 된다 하는 거라.

이 몸은 항상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항상 일으켜야 됩니다. 단지 그 고통을 벗어날려고 하는 방법을 찾아야 되는 것이, 그 벗어날려는 방법을 편안할려고 찾으면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

무아 아낫따(anattā)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없냐는 거라. 그렇게 착각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라. '두께(ghana)' 때문이라는 거라.

 

'가나(ghana)'라 해가지고 두께! 우리 몸은 대념처경에서 몇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럽니까? 서른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럽니다. 피부 살갗부터 해가지고 머리털 이빨 뭐 쭉 다 이렇게 분해할 거 같으면 그렇게 서른두 가지로, 아니면 또 다른 데는 다른 방법으로 이렇게 무수하게 나눌 수 있단 말입니다. 그 낱낱을 볼 거 같으면 그것 하나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죠? 그런데 실제 수행에서 그렇게 해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을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실제 두께감을 느낄 거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착각을 한다는 거라.

 

한번 봅시다. 두께라고 하는 것들이, 만약에 살점이 여기 있다. 살점 요거 하나 떼어내 가지고 여기 내놓으면 어때요? 이거 시퍼렇게 변해가지고 만약에 꼬들꼬들해졌다. 이거 내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하거든.

그런데 요렇게 만져가지고 그 똑같은 살점이 이렇게 느껴진다. 그럴 거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내꺼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거라. 똑같은 건데. 이게 두께감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이 두께감은 어느 때든지 나옵니다. 얇든 두껍든 그것은. 그래서 만지면 이렇게 만져진단 말이라.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나'가 있다고 착각을 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앞에 두 개는 일찍 떨어져 나가는데 맨 마지막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관념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라한이 됐을 때 떨어져 나갑니다. 그마만큼 어렵다고 그럽니다. 어쨌든 실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거든. 이렇게 접촉하고 만져지고 느껴지고 하는 두께감으로 인해가지고 이렇게 합니다.

 

이 세 가지에 덮여져 있기 때문에 그걸 우리는 '차다나(chādana)'라 해서 '덮개에 인해서 가려진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빨리 이것들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항상(恒常)한다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할 거 같으면 '아! 내가 이 무상에 대한 것들을 놓쳤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되는 거고.

또 내가 편안하길 바란다 할 거 같으면 '아! 고통에 대한 것들을 놓쳤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하고.

또 내가 두께감을 갖다가, 그러니까 뭔가 만져지는 것을 지각한다 할 거 같으면 '아! 나라고 하는 착각을 계속 일으키고 있구나' 하고 자꾸 판단을 해서 그걸 깨부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이라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쭐라 빤다까 라고 하는 분이 있었거든요. 이 분은 굉장히 머리가 나빴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공부하자 그러면 죽도록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왜냐하면 외우질 못하니까! 뭘 하나 얘기해 놓으면 그걸 외워야 되는데 외우질 못하니까 공부하기가 그렇게 싫은 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 쭐라 빤다까 보고 바보라고 그럽니다. 하도 외우질 못하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그리 생각 안 했거든. 단지 그 쭐라 빤다까가 외우는 것들을 잘 못한다는 것뿐인 것이지 그 스님이 여러분들보다 행동거지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그렇게 쭐라 빤다까를 자꾸 놀리고 바보라고 하느냐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스님들이 탁발을 나가는 때가 있었습니다. 공양청을 나갔습니다.

 

공양청을 나가면 공양청을 하는 조건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신도가 지정을 합니다. 만약에 사원에 스님들이 스무명이 있다 하면 사원에 있는 "스님들 전체 다 오십시오"하고 공양청을 할 때가 있고, 안 그러면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면 "사원에 스님 다섯 명만 공양청을 오도록 하십시오." 하기도 하고.

그런데 사원에서는 만약에 전체가 아니고 다섯 명씩 오라 한다, 아니면 한 명만 오라 한다, 두 명만 오라 한다, 이렇게 할 경우에는 순번을 이렇게 정해놓습니다. 이번엔 다섯 명이 갔다, 그러면 다음에는 6번부터 해가 또 세 명이면 8번까지 나가고, 그다음에는 9번부터 나가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돌아가면서 하도록 돼있는데, 이날은 이 신도가 사원에 있는 전체 스님들 다 오시라고 이렇게 하는 거라.

당연히 쭐라 빤다까도 따라가야 됩니다. 사람들이 쭐라 빤다까하고 같이 가기가 부끄럽거든. 바보하고 같이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쭐라 빤다까 보고 "니 오지 마라" 하고 놔둬버리고 간 거라.

 

그때 부처님이 거기 가기 전에 이 쭐라 빤다까에게 얘기했습니다.

"부처님! 나는 이렇게 잘 못 외웁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니가 우리가 다 가고 나서 없거든 청소를 해라. 청소를 하면서, 청소를 하면 지금음 막 더러워져 있단 말이라. 그러면 더러운 느낌들이 들 것이다. 그 더러운 부분을 청소를 하다 보면 한쪽은 또 깨끗해지거든. 그러면 깨끗한 느낌도 들것이다. 그 느낌에 대해서 관찰을 하라 합니다. 요렇게 돼있는 걸 요렇게 밀면 깨끗해지고, 더러운 것이 깨끗해지고, 더러운 것이 깨끗해지고 이렇게 될 것이다. 그 느낌을 관찰하라.

그러면서 그와 같이 마음도 오염되어 있으니까 마음이 오염되어 있는 것을 그렇게 깨끗하게 청소를 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른다" 하면서 가르쳐준 게 여러 마디로 가르쳐주면 또 못 외울거란 말이라.

 

딱 두마디만 하라. "라조 하라낭(rajoharaṇaṁ)" "라조 하라낭(rajoharaṇaṁ)" "더러움을 깨끗이 하자. 더러움을 깨끗이 하자."

그러니까 마음을 깨끗이 하자라는 그런 뜻이라. 그러니까 요기에 딱 보고 "라조"하면서 밀고 "하라낭"하면서 땡기고, 또 요쪽에 가서 "라조"하면서 밀고 "하라낭"하면서 땡기고, 더럽고 깨끗해지고, 더럽고 깨끗해지고 하는 거라. 신기하거든. 재밌거든. 어쨌든 밀기 전에는 분명히 더러웠는데 착 당기면 깨끗해져가고, 더러운 걸 보고 느끼고, 깨끗한 걸 보고 느끼고 이렇게 자꾸 관찰하는 거라. 그러는 사이에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느낌에 대해서만 관찰했는데.

 

그리고는 신도 집에 가는데 인원수를 파악해보니 한 명이 없거든. "쭐라 빤다까 어디 갔느냐, 왜 안 왔느냐" 하고 부처님이 넌지시 물어봅니다. "아! 걔는 우리가 오지마라 했습니다." 부끄러워가지고 오지 마라 했다는 거라.

부처님이 얘기를 할 동안에 "쭐라 빤다까를 데려와야 되겠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공양청은 전체를 다 부른 거니까. 그러니까 그 소리를 쭐라 빤다까가 이미 사원에서 듣고 후루룩 날아 그 자리에 갑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거든. 어떻게 저렇게 멍청한 사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자기들은 똑똑하다고 해도 깨달음에 못 이르렀는데 어떻게 저렇게 멍청한 사람도 깨달음에 이르렀을까?

 

다른 것이 없다 하는 거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 그다음에 몸, 마음, 법에 대한 것들을 관찰만 하면 깨달음에 이릅니다. 이 쭐라 빤다까는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을 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른 거다. 그런데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운다고 하더라도 실제 자기가 그렇게 체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 쭐라 빤다까가 아무리 바보였지만 그 느낌에 대한 관찰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 거다. 그와 마찬가지다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와 같습니다.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말고 하나를 알더라도 똑바로 알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통 그렇게 잘 안 하죠?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좋아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아이고! 빨리 좀 없어졌으면'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 업이 됩니다. 업이!

 

가장 유명한 목갈라나 존자-목련 존자도, 목련존자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열반에 들 때 어떻게 열반에 들었는지 아십니까? 몽둥이로 두드려 맞아가지고 죽습니다. 그 유명한 부처님의 양대 제자 중에 한 분인 목련존자가!

과거생에서 그랬다고 그럽니다.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같이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눈이 멀었거든. 눈이 안 보이거든. 그러니까 목련존자가 온 시중을 다 해야 하는 거라. 목련존자가 다른 일을 못해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어떻게 돼요? 아이고,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싶거든. 자꾸 싫은 마음이 드는 거라. 그래가지고 결국에는 이 어머니를, 눈을 못 보니까 어떻게 돼요? 다른데 어디 갖다 놔 버릴 거 같으면 찾아오지를 못한다는 거라. 결국 그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도 아들을 걱정하면서 내 아들은 어떻게 됐을까? 내 아들은 어떻게 잘살고 있을까? 걱정하면서 죽거든.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눈먼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거라.

 

그 마음이 어떤 거라? 싫은 것들을 배척할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거라. 그게 원인이 돼가지고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그렇게 맞아가지고 죽게 되는 거라. 원인 결과는 분명한 겁니다.

그것이 내가 뗄려고 하더라도 뗄 수가 없는 게 원인 결과입니다. 설혹 여러분들이 이 수행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싫어하는 느낌들이나 좋아하는 느낌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고 그 기복들을 최대한 줄일려고 해야 됩니다.

 

짝쿠빨라(Cakkhupala) 라고 하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수행하다가 눈이 멀어버렸어요. 경전에는 눈이 먼 사람이 이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몇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수행하다가 눈이 멀었는데 왜 이렇게 눈이 멀었냐 하면, 눈이 멀어도 어쨌든 아라한이 되긴 됐는데,

그 짝쿠빨라 스님도 과거생에 안과 의사였어요. 눈을 고쳐주는 의사였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내 눈을 좀 고쳐주시오" 하고 얘길하는데 참 아름답거든 여자가. 그러니까 이 여자를 좋아하게 돼가지고 이 여자를 취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는 거라. 그래가지고 제안을 합니다. "내가 니 눈을 고쳐줄 거 같으면 내하고 같이 살래?" 그러니까 청소하고 집안일 하고 이러라고 하지만 사실은 같이 살자는 거지 뭐. 그리할래? 하니까 이 여자는 돈이 없으니까 우선 눈을 고쳐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인제 눈을 고쳐줍니다.

 

눈이 점점 더 나아가는 거라. 그런데 이 여자는 걱정이 되는 거라. 눈만 나으면 그 사람 노예가 되다시피 해야 되는거라. 그러니까 이 여자는 눈이 나아가고 있는데도 점점 안 좋아진다고 얘길 하는 거라. 그런데 의사가 가만히 보니까 자기는 점점 낫는다고 생각이 되는데 이 환자가 점점 안 좋아진다고 하니까 거짓말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을 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이 여자 눈을 진짜 멀게끔 만들어버립니다. 그것도 집착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이생에서 자기가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눈이 멀어.

 

좋아하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집착, 아까 목련존자 같은 경우는 싫어하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배척할려고 하는 마음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분명하게 과보들이 이렇게 나타난다고 하는 거라. 과거 생까지 넘어갈 필요도 없이 여러분 지금 이생에서도 당장 그렇습니다.

그게 부처님 진리입니다. 분명하게 드러나지게 돼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11시니까 오전입니다. 통상적으로 수행해보면 오후보다 오전이 수행 잘 되죠! 그렇습니까?

부처님 당시 때 인도에도 그런 미신이 있습니다. '오전은 행복한 시간이고 오후는 괴로운 시간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오전에 행복한 시간에 수행할 거니까 수행 좀 잘 되겠지? 어쨌든 미신이지만 그런 미신을 믿어서는 또 안 됩니다. 행복하고 괴롭고 하는 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일상생활이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듯이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걸 갖다가 부처님은 뭐라 그래요? "아주 나쁜 방법이다" 하고 그럽니다. 인도 같은 경우에는 그런 것으로 점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시간에 태어나느냐 아니면 불행한 시간에 태어나느냐 해가지고 아이의 장래를 점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어떤 것까지 있느냐 하면 인도는 쥐가 많거든. 쥐가 막 어딜 갉아먹을 거 아니라. 만약에 나무를 갉아먹었다, 그러면 그 나무를 가만히 보고 갉아먹고 나서 나머지 남아있는 것 그걸 가지고 점을 치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거기 있는 사람들 운명을 점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너는 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뭐 어쩌기도 하고 이렇게 하고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그걸 쓸데없는 미신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절대 출가한 사람들은 그런 점치는 행위- 점치는 행위라는 것은 뭘 이용해가지고 점을 치는 걸 얘기하는 것만 아니고 '니는 뭐 어찌 될 것이니까 뭘 어찌해라' 하고 얘기하는 것들 그것들을 통괄적으로 다 얘기합니다.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스님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래서 뭐 단편적인 예를 들면 '당신은 뭐 하면 잘 될거니까 뭐 하라' 이렇게 얘기를 하기도 하고.

 

부처님이 단언을 해놨습니다. "출가한 사람들이 그런 것 할 거 같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하고. 부처님 제자 아니라는 얘기지.

그걸 '띠랏차나 윗자'라고 합니다. 가축과 같은, 동물과 같은 걸 신앙하는, 믿는 그런 자와 마찬가지다. 아주 하잘 것없는 자라고 표현들을 부처님이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거를 믿어서는 안 되지만 어쨌든 오전에는 수행이 잘된다 할 거 같으면 오전에는 수행을 잘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좌선을 하고 경행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쨌든 좋은 것들이나 싫은 것들 어느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붙잡고 하는 것들을 피하도록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