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16. 마음관찰2 (20080104)

담마마-마까 2020. 1. 6. 13:12

https://youtu.be/1bcas-YqYZ4

* 기초수행16. 마음관찰2 (20080104)

 

··· 뭐 어쨌든 그걸 알아야 세 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경험해 볼 거 아니라.

마음을 밖의 대상, 여섯 가지 대상에 알아차림을 하는 경우.

또 한 가지 경우는 뭐라 그랬습니까? 밖의 대상에 마음을 알아차리지 말고 내 몸, 눈이나 코나 귀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알아차림을 두는 방법.

또 한 방법은?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아는 방법.

 

어쨌든 밖에 대상이 있을 거 같으면 그 대상을 갖다가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그 대상은 눈을 통해서 들어오니까 눈에 알아차림을 두는 방법이 있고, 대상이 눈을 통해서 들어와서 아는데 아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세 가지 방법으로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 차이점을 알아야 뭘 할 거 아니라? 공부들 집에 가서 자꾸 해야됩니다.

여섯 가지 대상(六境),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 여섯 가지 아는 마음(六識) 이것을 자꾸 공부를 해야만이 내 마음을 어디다 두는 것이 탐진치(貪瞋癡)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갖다가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됩니다.

절대 밖의 대상에다 마음을 두어서는 쉽게 내가 알아차리지를 못할 뿐아니라 그 대상에 내가 휩쓸려가기가 쉽다는 거라. 그걸 알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을 저번 시간에 나눠준겁니다. 그렇게들 공부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대신 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되도록이면 명칭을 붙이지 말고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마음은 이런 호흡을 관찰하는 것하고는 다르게 아주 바쁘게 움직입니다. 굉장히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 알아차리는 마음 하나하나도.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처음에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릴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에 의해서 집중력이 생기면 대부분 사람들이 잘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집중력이 생기는 것이 좋아가지고 집중력에 끄달려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생기면 생길수록 알아차림을 더 강화해야 된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왜? 집중력이 생기면 고요해지기 때문에! 고요해지면 마음은 대상에 자꾸 붙잡혀 있을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알아차림은 느슨해져버리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느슨해져버리면 고요함만 있어가지고는 절대 수행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되요? 착칵 잠에 빠져버리고 혼침에 떨어져 버리는 거라.

 

이 혼침과 알아차림은 어떤 면에서는 백짓장 한 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고요하게 되고 대상을 명확하게 더 알고 더욱더 대상에 몰입한다 싶을 때는 빨리 마음을 내어서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자꾸 해줄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대상 자체가 뭉뚱그려져 보이게 됩니다.

뭉뚱그려져 보여진다는 것은 집중력이 더욱더 강화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대상 자체는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앞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나서, 다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 그걸 알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거라. 알아차림이 약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잘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꼭 수행을 해나갈 때는 그런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게 될 때는 꼭 무당들 작두 탄다고 그러죠. 칼날 위에 서있는 그런 기분으로 해야 됩니다.

단조로우면 마음이 흥미를 잃습니다. 대상을 잃어버리면 방황을 하게 되든지 아니면 그것조차도 잃어버릴 거 같으면 쉽게 대상에 함몰돼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는 양극단으로 빠지는 거기 때문에 그걸 잘 이렇게 조정을 해나가야 됩니다.

 

대상은 언제든지 변화해 나갑니다. 마음도 변화해 가고! 단지 내가 알아차리는 마음이 그 대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마음을 내지 못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상의 변화를 갖다가 계속적으로 알도록 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은 단조롭고 쉬우면 흥미를 잃어버리거든.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대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라.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알아차림으로써 지속해주질 않으면 마음은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그 생각을 항상 하도록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더 나아가서 두 번째 단계로 해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마음이 세 갈래가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탐심과 진심과 치심! 그러죠!

그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벗어난 마음이 또 있고 그렇게 치면 여섯 가지가 됩니다.

어쨌든 탐 진 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구분들을 많이 합니다.

 

이번 시간은 두 번째 시간으로 그 마음을 어떻게 내가 알아차려 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해나가겠습니다.

 

수행은 뭐로 가지고 합니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고 하는 오온(五蘊)으로 하는 겁니다.

물질인 이 몸(), 그다음에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는 마음과 마음작용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물질(色), 그다음에 식(識)이라고 하는 마음, 그리고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는 수상행(受想行)이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 이 세 가지로써 수행을 해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탐심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뭐로 압니까? 수상행이 바른 것이냐, 바르지 않는 것이냐? 그것으로써 구분이 돼 나가집니다.

 

그래서 근본 뿌리의 마음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수상행을 어떻게 내가 관찰을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느낌을 관찰하는 것들이 있고. 그다음에 관념, 우리 생각들 이런 것들을 관찰해나가는 것들이 있고. 그다음에 의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 관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거는 뭐로 관찰을 하는 겁니까? 수상행은? 마음으로 관찰을 하는 거죠! 마음으로 관찰하는 이 세 가지를 관찰함으로 해서 그 뿌리를 갖다가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그런 패턴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처님은 몸은 뭐로 보라고 그랬습니까?

'몸은 물거품과 같이 보라.'고 했습니다. 몸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톡 떨어지고 나면 물거품이 일어납니다. 거품이 항상 있는 것 같아도 그다음 물이 톡 떨어지면 앞에 있던 물거품은 탁 소멸되어버립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아주 하잘 것 없는 폭포에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이 보라하고 얘기를 합니다.

 

마음은 어떻게 보라고 했습니까?

'한 여름날 더울 때 아지랑이와 같이 보라.' 아지랑이는 멀리서 볼 거 같으면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뭔가가 실체가 있을 거 같지만 가까이에서 볼 거 같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물거품과 아지랑이와 같이 보라'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경전에 그렇게 봐가지고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느 비구니 한 분도 마음이 예리해지고 아주 날카롭게 됐을 때 걸어가는 상태를 분명하게 알고 자기의 처소로 들어가는데 들어가다가 처소 끝에서 빗물이 땅바닥으로 톡 톡 떨어지는 걸 봤어요. 그걸 보다가 그 바닥에 통통 튀면서 물방울이 이는 모습을 보고 아! 몸이란 게 저렇게 무상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비구니도 있고, 아지랑이를 실체가 없는 마음으로 봐서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대상이든지 대상 자체를 그냥 여러분들 일반적인 눈으로 볼려고 자꾸 하지 말고, 부처님이 가르친 법의 눈으로 볼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만이 수행에 진전이 있어집니다.

 

자!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알아차려야 할 대상은 오온이라고 그랬습니다.

왜 그러면 오온이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그랬습니까?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걸 뭐라 그럽니까? 빠라맛타라고 그러죠!

빠라맛타(paramattha)는 네 가지가 있죠! 네 가지가 뭡니까? 물질, 마음, 마음의 작용, 그다음에 닙바나!

닙바나는 지금 여러분들이 체험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걸 제외하고 나면 뭡니까? 물질과 마음과 마음작용은 색(色), 식(識), 수상행(受想行) 이겁니다. 오온이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고, 그게 실재하는 겁니다. 그 외에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paññatti)이라고 그럽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 이런 것들도 전부 관념인 거죠! 수행해나갈 때 관념적으로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이유가 그런 겁니다. 실재 대상을 보고 하면서도 관념에 빠져버릴 거 같으면 실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어제 저녁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수행을 해나갈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사대요소에 대한 것들이 들어가지도록 해야 되는 거고.

왜? 사대요소는 뭡니까? 몸입니다. 몸의 실재하는 성품입니다. 그래서 몸의 빠라맛타가 드러나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고, 그러고 나서 그게 되고 나면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다. 조건 따라서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서 사라진다는 것.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거라.

마음이라는 게 뭡니까? 통칭해가지고 수상행식을 다 얘기합니다. 그것도 조건 따라서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느낌도 아픈 느낌으로 인해서, 몸이라고 하는 아픈 느낌으로 인해서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고, 그 느끼는 것도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물질과 비물질, 몸과 마음의 연속일 뿐이다 하는 사실을 빨리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돼야 만이 몸이든 마음의 작용이든 마음이든 이것들은 영속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갖다가 통찰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그러한 것들 어떤 것에도 실체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야 만이 닙바나의 첫 시작점에 이르게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닙바나를 체험해서 그것도 실재하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돼서 그것을 통상적으로 빠라맛타(paramatt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깨달음에 이른 분들도 닙바나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뭘 대상으로 합니까? 오온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그 깨달음 열반이라고 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체험해나가고 살아가는 것들은 이 오온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살아가지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그래서 얘기했잖습니까?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과거 전생에 무수한 선근공덕을 쌓았고 수행을 해가지고 불환과에 이른 상태에서 신의 몸을 받았을 경우에는 그것은 바로 열반을 체험을 하지만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시 또 신으로 태어나든지 인간으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악귀로 태어나든지 다시 또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래서 인간의 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는 걸 바라지 말아야 됩니다.

 

부처님도 열반의 상태로서 45년간을 살아오신 겁니다. 뭐로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까? 오온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깨달은 분들도 오온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고, 여러분들도 살아가는 것은 오온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거 같으면 되도록 빠라맛타로 살아가는 것이 낫지 실재적인 것으로! 관념적인 빤냣띠로 살아가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않다 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항상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자! 그러면 어쨌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상행(受想行)을 거느리고 일어나게 됩니다.

느낌만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까? 뭉뚱그려서 생각해봅시다.

어쨌든 내가 느낌(受, vedanā)을 안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이 일어나 있죠!

아! 이것이 아픈 느낌이다 하는 걸 갖다가 아는 것은 뭡니까? 아! 내가 과거에는 요런 경험으로 인해서 요런 다리가 아픈 것이다 하고 알 거 같으면 이것은 상(想, saññā)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일어난 것들 행위 자체는 행(行, saṅkhāra)입니다.

 

그러면 느낌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어차피 수상행식(受想行識)이 같이 일어난 겁니다. 같이 일어나고 그걸 알아차리면 느낌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수상행식도 같이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수상행식은 따로 구분될 수가 없는 겁니다. 같이 일어났다가 같이 사라집니다.

그 얘기는 알아차리는 것을 느낌(受)을 알아차리든 아니면 상(想)을 알아차리든 의도(行)를 알아차리든 하나를 알아차리면 다른 것들도 같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같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의 패턴이 어느 쪽으로 하는 것이 빠른가 하는 것은 스스로가 판단을 해야 됩니다.

느낌(受)을 관찰하는 것이 용이한 사람이 있고,

또 마음이 조금 예리한 사람들은 의도(行)를 관찰하는 것이 더 빠른 사람이 있고,

안 그러면 관념(想)들 '나는 이런데..' 하는 그런 관념에 많이 빠지는 사람들, '나는 정선생이다. 니는 학생인데 너는 나에게 인사해야 되는데...' 하는 그런 상(想)들에 많이 빠져있는 사람들은 그걸 관찰대상으로 할 수 있는 거라.

그건 인제 각자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그 수상행(受想行)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식(識)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그럼 그 식()이 탐진치의 식이냐, 아니면 탐진치가 없는 식이냐를 구분 짓는 거는 수상행(受想行)으로써 구분 지을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자! 그러면 느낌에 대한 것들의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목련 존자가 등이 아파가지고 아픈 느낌이 일어나서 굉장히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이 [봇장가 숫따, bojjhaṅgā sutta]라고 하는 걸 얘기합니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인들]!

여러분들한테는 아마 목요일 저녁에 그 부분은 나중에 다 설명이 되어나갈 겁니다. 그리고 지금 목요일 낮에 담마스쿨 할 때 37조도품 지금 들어갈려고 시발단계에 있죠? 그때도 얘기가 될 부분이고, 자세하게 나오진 않고.

어쨌든 그 느낌이 일어났으면 느낌을 명확하게 보고 알아라고 해가지고 그 느낌을 극복해나갑니다. 부처님이 아플 때도 마찬가지였고, 가섭 존자가 아플 때도 마찬가지였고.

 

느낌은 항상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생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생멸하는 이치를 명확하게 볼 거 같으면 느낌에 대한 관찰은 용이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인의 성향들로 봤을 때 느낌()에 대한 관찰이 다른 것들보다도 더 용이하게 잘 해나갑니다. 왜? 앉아있기 좋아하니까. 수행한다 그러면! 앉아서 수행할 거 같으면 어쩔 수 없이 느낌들은 많이 일어나집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많이 일어나는 게 뭡니까? 생각입니다. 뭐 좀 할라 그러면 이놈의 생각이 막 일어나거든. 상(saññā)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또 용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도는 어느 정도 공부가 되지 않으면 참 하기 힘들죠?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고 하는 것은!

그래서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어느 정도, 스님이 서너 단계로 나눠서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두 번째 단계를 하고 있는데 이 단계를 거치고 날 것 같으면 의도를 관찰하기가 좀 용이해집니다. 그때 돼서는 의도(sankhāra)를 관찰하도록 그렇게 하시면 되고,

우선 첫 번째는 느낌(vedanā)과 상(saññā) 이것을 관찰대상으로 한다 하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연경이! 지금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고 있어? 응? 따뜻한 느낌? 그래. 따뜻한 느낌이 일어났다. 엉덩이 쪽에서 따뜻한 느낌이 일어났다. 그때 느낌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지금 무슨 마음인가 하는 걸 갖다가 관찰해야 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지금 무슨 마음인가?

따뜻한 느낌이면 어떻게 됩니까? 대부분 좋아하거든. 추울 때는?

더울 때 따뜻한 느낌이 일어나면 싫어하겠지마는 추울 때는 따뜻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면 어떻게 합니까?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따뜻하게 있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항상 지금 어떤 마음인가? 탐심이 있는 마음인가? 집착이 있는 마음인가? 집착이 없는 마음인가? 하는 걸 관찰을 해야 됩니다. 집착이 있는 마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집착하지 않아야 되겠지.

그럼 느낌이라고 하면 느낌에 대한 관찰만 할 거 같으면 따뜻한 느낌을 볼 거 같으면 어떻게 돼? 따뜻한 느낌에서 일어나는 요소들을 내가 알게 됩니다. 따뜻한 느낌은 따뜻하다고 하는 풍대의 요소로만 내가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풍대의 요소는 어떻게 됩니까?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게 됩니다. 그럴 거 같으면 그것을 관찰할 거 같으면 적어도 따뜻한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집착의 마음, 탐심의 마음은 버려버리게 되는 거라.

 

어떤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느낌은 그 느낌이 일어났을 때 무슨 마음인가?

탐 진 치가 있는 마음인가? 아니면 그것이 없는 마음인가? 탐심(貪心)이 있는 마음인가, 탐심이 없는 마음인가? 진심(瞋心)이 있는 마음인가, 진심이 없는 마음인가? 어리석은 마음(癡心)인가, 아니면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인가? 하는 걸 갖다가 항상 먼저 구분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앞에 것이라고 할 거 같으면 빨리 마음을 전환시켜줘야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관찰이 안 될 때는 대상을 바꿔버려야 됩니다. 그걸 계속 관찰한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탐진치에 더욱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느낌이 일어날 때는 어떤 마음인가 하는 걸 갖다가 먼저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마음이 평온하게 됩니다. 평온하고 고요해지지 않으면 그 느낌을 정확하게 관찰해내질 못하는 거라.

그래서 먼저 느낌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거에 빠지지 않도록, 먼저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가 하는 걸 갖다가 먼저 생각을 하고 그 마음을 관찰해야 됩니다. 그 마음을! 지금 현재 일어난 마음을! 그러고 나서 그 느낌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상(想), 산냐(saññā)죠!

조금 전에는 웨다나(vedanā) 했고 지금은 산냐입니다. 상(想)은 뭡니까?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무언데, 어쩐데..'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어제 질문 중에서 숩빠붓다 얘기가 나왔었죠? 데와닷따의 아버지고 야소다라의 아버지. 그래서 데와닷따가 부처님한테 조카입니까? 예? 매제? 매젭니까?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두개 다 맞다고 스님이 설명을 한 적이 있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숩빠붓다 왕에게는 두 명의 아들 딸이 있는데 하나는 부처님한테 부인이 돼서 가버리고, 그렇게 되면 부인의 오빠니까 어떤 관계가 있을 거고.

그런데 그 숩빠붓다 왕은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 하고는 형제간이거든. 형제간이 되니까 그러면 데와닷따 하고는 또 사촌 간이 됩니까? 사촌 간이 되고 이렇게 되어있는 건데, 그럴 거 같으면 이론적으로 따지더라도 부처님보다는 아버지뻘이죠 숩빠붓다가!

 

그럼 부처님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쟤가 내 조칸데'하는 생각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서 부처님한테 예경을 올리더라도 그 생각이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예경을 못 올리는 거라. 예경을 못 올리니까 부처님이 아무리 애길한다고 하더라도, 법문한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조카에게 뭔 얘길 듣겠어? 그런데 그렇진 않죠!

법의 경지로 봤을 때는 훨씬 뛰어나신 분이라는 거라. 그러면 그런 사량분별의 마음을 버려버렸을 거 같으면 법의 스승으로써만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절을 못 올릴 이유도 없고 법문을 못들을 이유도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다들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이 일어날 때,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그런 생각들이 일어날 때, 그 마음들을 잘 알아차리고 그 마음이 의도하는 것이 뭔가 하는 걸 볼려고 해야 됩니다.

숩빠붓다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경드리기 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라. 법문 듣기 싫다는 마음이라는 거라.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경도 못하고 법문도 못 듣는 거라. 그래서 어떤 생각이 일어났을 경우라도 그 생각이 일어나면 그때 일어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걸 갖다가 보려고 해야 됩니다.

 

내가 다나(dāna)를 하기 위해서, 여기는 목요일하고 일요일하고 다나(보시)를 합니다. 스님께 탁발을 올린단 말이라. 그럼 와서 공양물을 올리면서 '스님! 이 변변찮은 음식을 스님 바리때 속에 넣어 공양올리나이다.' 이렇게 하면서 '이와 같은 공덕으로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며 손을 뗀단 말이라.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마음에 '우리 자식들이 잘되기를', 또 어떤 사람은 '스님 이거 공양 잡숫고 열심히 수행해가지고 우리들 잘 지도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내가 하고 있는 동작에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넣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각각 다 다릅니다. 생각이 안 일어날 수가 없죠!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는 즉시 그때의 마음이 뭔가 하는 것을 갖다 알아차려야 됩니다. 알아차려보니까 아, 내가 공양올리는 게 내 새끼 잘되기 위해서 욕심 때문에 공양올린다. 그럼 퍼뜩 정신을 차려야 돼! '아! 이건 아니지' 탐심이 일어나는 마음들을 가지고 공양을 올려가지고는 그건 자기한테 효과가 없는 거라. 그럼 생각이 일어날 때 그렇게 퍼뜩 알 거 같으면 '아! 다나의 목적이 이게 아니구나' 하고 마음을 돌이켜서 빨리 다른 마음들을 내게 돼있다는 거라. 생각이 일어날 땐 항상 이와 같이 해야 됩니다. 그때 어떤 마음인가?

이해하겠습니까?

 

자! 그래서 지금 느끼는 마음들이 탐진치의 마음인가 아니면 탐심의 반대인 관용의 마음, 진심의 반대인 자애의 마음, 치심의 반대인 지혜의 마음인가? 어떤 마음의 작용인가? 어떤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서 이 행위를 하고 있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도록 해서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다음에 의도, 의도는 여러분들이 좀 보기가 힘이 드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무슨 일을 하는데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있고, 마지못해서 막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도를 관찰할 때 최고 먼저 주안점을 두어야 되는 게 뭐냐면 행위를 하고 나서 어떤 얼굴로써, 어떤 마음으로 내가 그 행위를 했는가 하는 걸 반조를 한번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 인상 찡그리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 좋은 의도 안 내고 행위한 겁니다. 그런데 편한 마음으로 좋은 마음으로 의도를 가지고 했을 경우에는 기분 좋게 돼서 얼굴도 잘 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를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해야 될 게 행위를 할 때나 행위를 하고 나서 내 얼굴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봐야 됩니다.

 

걸어갈 때 경행을 하면서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고, 아주 경쾌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아주 경쾌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기 싫은 걸 갖다가 억지로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 힘들게 이렇게 하는 거라.

의도로 인해서 일어나는 몸의 반응들입니다. 사실은 의도가 없으면 그런 행위들이 일어나지지 않죠? 그런데 그 의도가 지속적으로 쭉 이루어져 왔다고 할 거 같으면 문제가 굉장히 큰 거라. 그러니까 찡그린 얼굴이 점점 더 많아져서 보기 싫은 얼굴이 되는 거고. 뭐 경행 하라 그럴 거 같으면 경행 하기가 우선 싫어져 버리는 거라. 그냥 좌선만, 편안하게 좌선만 하고 싶거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구의(身口意)로 구분을 해가지고 의도를 관찰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몸은 어떻습니까?

지 혼자서 뭘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마음이 일어나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그냥 나무토막과 마찬가집니다. 마음이 일어나지기 전에는 이 나무토막과 마찬가지라. 마음이 일어나서 몸이 움직이려고 할 거 같으면 좋은 의도를 가질 거 같으면 좋은 마음이 일어날 겁니다. 그럼 좋은 행위들을 하게 돼있는 거라. 나쁜 의도일 거 같으면 나쁜 마음이 일어나서 나쁜 행위를 하게 돼있다는 거라.

몸은 그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하는 행위가 좋은 행위인가, 나쁜 행위인가를 먼저 관찰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찡그리면서 수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답답해하면서 걸어가고 있는지 하는 걸 관찰을 해서 그 의도를 관찰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말을 할 때, 말을 할 때 어떻습니까?

막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게 대부분입니다. 말을 할 때는 항상 말을 하면서 그 소리가 자기한테 들립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귀에다가 알아차림을 두도록 해야 됩니다. 자기의 말소리를 자기가 듣게 된다는 거라. 그 마음을 갖다가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자기가 듣기에도 내가 성질나서 푹 소리를 지르는 소리는 지가 듣기에도 별로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화가 나서 막 지르는 소리는 자기가 듣기에도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거라.

고요한 마음으로, 좋은 마음으로 말을 할 경우에는 그 소리는 자기가 듣기에도 좋습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났을 경우는! 그래서 귀에다가 마음을 집중해서 알아차릴 거 같으면 내가 듣기 싫은데 다른 사람도 듣기 싫은 거라. 내가 듣기 좋으면 다른 사람도 듣기 좋은 거고.

 

그러면 말을 할 때 마음을 갖다가 귀에다가 두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말은 조심하게 되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조금 더 예리해지면 귀에다가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입술에다가 둡니다.

입술이 달싹달싹할 때의 느낌. 입술이 달싹달싹할 때 일어나는 행위를 가지고 관찰을 해나갑니다. 입술이 바르르 떨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에서 부드러운 느낌들이 일어나는지, 이런 걸 가지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할 수 있게끔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신의 목소리의 상태,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말하면 마음의 상태를 알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의업, 의도(, saṅkhāra)!

어떤 행위든 의도 없이 행위가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법 없죠? 그래서 그 의도를 갖다가 이 행위를 하기 전에 아! 내가 이거 좋은 마음으로 하는가, 아니면 나쁜 마음으로 하는가 하는 걸 마음을 관찰을 먼저 하고 나서 행위를 할 것 같으면 당연히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버려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행위를 하기 이전에 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의도로 이 행위를 하게 되는가 하는 걸 먼저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탐진치가 있는 마음, 없는 마음 하는 것은 다음 시간에 연속해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