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17. 마음관찰3 (20080108)

담마마-마까 2020. 1. 6. 13:18

https://youtu.be/HMdL9Xzyc7k

 

* 기초수행17. 마음관찰3 (20080108)

 

··· 그래도 숙제를 내준 거는 숙제는 해야 될 거 아냐?

처음에 뭐 하라 그랬어요,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할 때? (수행자 대답)

세 가지를 비교를 해보라고 그랬죠!

 

일단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걸 느끼고 알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걸 하나씩 하나씩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알 때는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몰라야 되는 거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알 때는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몰라야 되는 거고. 코도 마찬가지고 모든 감각기관은 하나씩 하나씩 알 수 있도록 먼저 해봐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마음들을 어떻게 조절을 하고 마음들을 어떻게 수행해나가고, 어떻게 행복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은,

두 번째로 해야 되는 것이 밖에 있는 대상에 마음을 쏟을 것이냐? 그러니까 밖에 있는 대상, 밖에서 들리는 소리, 밖에서 나는 냄새 이런 것들에 마음을 쏟아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이 용이하냐?

 

그렇지 않으면 밖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은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내가 아는 겁니다. 감각기관을 접해가지고. 그러면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어가지고 관찰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냐? 그러니까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밖의 소리에 집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귀에다가 집중을 하는 것. 대상이 보이면 그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눈에다가 마음을 두고, 코에다가 마음을 두고 이런 식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하는 것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용이하냐? 그걸 한번 판단해보고.

 

그렇지 않으면 어쨌든 밖의 대상과 눈 두 개가 부딪쳐가지고 내가 아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그 마음에다가,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는 것이 대상을 다스리기에 용이하냐?

이 세 가지를 먼저 해봐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대상을 다스리기가 용이합니다.

탐 진 치라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들, 이런 것을 다스리기에 가장 용이한데 처음부터 그게 잘 안되거든. 그러니까 마음을 밖에다 두지 말고 우선 내 감각기관에다 두어라. 그래서 대상이 보이면 마음을 대상에 뺏기지 말고 눈에다 두고,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다 마음을 두지 말고 귀에다 두고, 이런 모든 것들을 일차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 내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관찰을 하는 연습들을 하라는 게 첫 번째 날엔가 얘기했던 부분입니다. 맞습니까? 그걸 한번 해보라는 거라.

 

(수행자 질문)

소리 들리는 것이 귀에서 소리 들릴 거 아닙니까? 귀에다 마음을 두라는 거라. 귀에다가 '소리들림'하고 마음을 둘 거 같으면 적어도 마음의 동요가 밖의 소리에다가 두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동요가 덜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귀에다가 둘 것 같으면 그 소리가 어쨌든 파동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들어와서 내가 안단 말입니다. 이미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것은 밖의 소리가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고 그 소리가 귀를 통해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거는 어차피 이렇게 들어오게 돼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갖다가 내가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러니까 아는 마음에다 알아차릴 거 같으면 가장 좋은데 그게 잘 안 되거든. 잘 안 되기 때문에 우선은 밖에다가 마음을 뺏기지 말고 이 귀에다가 집중을 먼저 하라는 겁니다.

그 훈련은 뭐냐면 마음을 밖으로 뺏기지 말고 내 몸에서 관찰하는 연습들을 자꾸 하라는 겁니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 냄새 맡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내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다른 걸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없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거든. 그러면 마음을 밖에 안 뺏길려면, 감각기관에다가 알아차림을 둘 것 같으면 적어도 마음이 흩어지지는 않는다 하는 겁니다.

왜? 대상을 이렇게 볼 것 같으면 이 대상보고 요 대상보고, 소리도 이 소리 들리고 저 소리 들리고 각각의 소리들에 마음이 자꾸 뺏겨버린다는 겁니다.

그러지 말고 여기 통해서 들어오는 것만 일단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그 오소리의 비유를 스님이 자주 합니다.

오소리를 잡을 때는 굴을, 다섯 굴을 막아버리고 한 굴 입구만 딱 열어놓고, 그 굴 입구를 가만히 지켜만 볼 거 같으면 오소리가 그 굴을 통해서 다시 나오게 돼있다는 말이라. 그렇게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고 이 감각기관을 다 열어두어버리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어디로 빠져나갈지 몰라요. 절대 오소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해야 되는 것이 감각기관은 여섯 개가 다 열려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하나씩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을 할 동안에는 일단 먼저 보는 것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래서 다섯 개의 구멍은 전부 다 닫아버리고 하나의 구멍만 열어놔 놓고 그 구멍을 관찰하는 연습을 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하더라도 이 다섯 개의 구멍을 닫아놓고 한 개의 구멍을 열어놓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그 구멍에다가 마음을 이렇게 두고 볼 것이냐? 아니면 멀리서 오소리가 그 구멍을 통해서 씨익 나오고 나면 내가 잡을 것이냐? 오소리가 이미 구멍 밖으로 튀어나와 버리고 날 거 같으면 그걸 잡기가 힘듭니다. 마음이 밖에다 쏠려버릴 거 같으면 구멍을 다 막아버리고 하나의 구멍을 딱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멍은 다 막았다고 하더라도 멀리서 내가 오소리가 튀어나오고 나면 잡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미 흩어져버린다는 거라. 어디로 튈지를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밖으로 둘 거 같으면 마음은 항상 대상 따라서 튀어버립니다. 다른 데로 달아나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멍 입구에서 잡는 방법이 가장 용이한 방법이다 하는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뭡니까? 다른 데는 다 막았으니까 손을 집어넣어서 오소리를 잡는 것이 가장 좋지. 대상을 알 경우에 아! 저 안에 오소리가 있구나 확신을 가질 것 같으면 내가 손을 집어넣어가지고 오소리를 잡으면 그만이라는 거라. 그러면 내가 알 거 같으면 그 아는 것을 알아차려버리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거는 바로 잡을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우선 입구에서 잡아라 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날에 한 것이고, 둘째 날에 한 거는 뭡니까?

마음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수상행이 같이 일어난 것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수상행이 같이 일어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내가 알았다는 것을 내가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느낌을 알아차리든지 생각을 알아차리든지 그다음에 의도를 알아차릴 거 같으면 가장 좋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아상(我相)들, 상들에 대해서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다음에 어떤 것이든 행위를 할 경우에 몸이나 말이나 생각으로 행위를 할 경우에 그 행위에 앞서서는 항상 의도가 앞선다 하는 것. 행위, 몸으로 움직이기 전에는 의도를 내야 움직여지는 거고, 말을 할 때도 의도를 내야 움직여지는 거고, 생각을 할 때도 의도를 내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를 알아차릴려고 하라.

 

그런데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좀 힘이 드니까 우선 몸이나 말을 할 때 먼저 몸의 행위에 앞서서 의도가 앞선다는 사실을 알고, 말을 할 때도 의도가 앞선다는 사실을 알고 관찰을 하라. 그래서 말을 할 때는 귀에다가 마음을 두고 아니면 입술에 다가 마음을 두고 이렇게 관찰을 하고. 행위를 할 때는 행위를 하는 것에 따라서 움직이고 나아가고 할 때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먼저 의도를 보라. 그래서 의도가 먼저 앞서서 행위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가 일어난 것을 눈치를 채고 나서 행위를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그런 식으로 훈련을 단계적으로 해나가게 됩니다.

 

오늘은 조금 더 넘어가서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을 해보니까 수행이 잘 되는 것은 아니죠?

수행은 잘 안 되는 겁니다. 수행의 속성이 그런 겁니다. 잘 될 거 같으면 수행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겠죠. 수행은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배운 것들을 자꾸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없어져 버릴 것 같으면 수행은 퇴보하게 돼있는 겁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참 오묘한 것이지만은 자꾸 연습하려는 강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마음 한 번 가만히 보십시오. 뭐든지 자꾸 움직일려고 그럽니다. 뭐든지. 그거는 뭡니까? 생각을 예를 들어보자. 생각을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생각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않고 있다면 끊임없이 자기가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강한 열의를 지닌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열의를 지녀서 자꾸 만들어냅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뒤집어서 얘기할 거 같으면 마음은 의도를 내게 돼있다는 겁니다. 마음은 의도를 내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부처님이 말하는 건 "마음이 앞선다. 모든 행위에 마음이 앞선다!" 마음이라는 건 원래 그런 겁니다.

 

그러면 수행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안 되는 것을 자꾸 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가장 용이한 것은 뭡니까?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지가 만들어내는 거라. 열의를 가지고 지가 뭔가 자꾸 하게끔 돼있는 거라. 그러면 이걸 그냥 순일하게 '지가 뭐 우짜는가 한번 보자'하고 그냥 따라가다 보면 알게끔 된다는 거라.

하루는 잘 안 되기도 하고, 또 하루는 잘되기도 하고, 또 뭐 한 시간 동안에 십 분은 잘되기도 하고 뭐 오십 분은 안 되기도 하고, 그리하겠지. 그리하더라도 잘 되는 것만 있을 수는 없지. 잘 되는 것만 있을 것 같으면 그거는 수행한다고 할 필요도 없는 거라. 잘 안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수행을 계속적으로 한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잘 될 때 어떻게 합니까?

보통 우리는 뭔가 깨달았다 하고, 법을 얻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거는 아니죠!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되든 잘 안 되든 수행은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놓치지만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반드시 해낼 수가 있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해나가야 됩니다.

 

단지 내가 지금 해나가고 있는 이 방법이 바른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만 판단하면 됩니다.

그 바른 근거를 가지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나 스님의 이런 법문을 통해서 얘기하는 것들을 반조를 자꾸 해봐가지고 아! 내가 바르게 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갖다가 알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을 관찰하는 것에는 되도록이면 스님이 명칭을 붙이지 마라 하고 첫 시간에 얘기를 했습니다.

느낌이나 몸에 대해서는 명칭을 붙이라 하면서, 마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부가 되기 전에는 명칭을 붙이지 마라 한 거는 그마만한 이유가 있죠!

통상적으로 예를 들어봅시다.

통증이라는 느낌이 있다, 그러면 실제적인 통증이 있고, 통증을 알아차리는 마음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명칭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실제적인 통증 하고, 그 통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하고 두 가지만 있으면 되는데 명칭을 붙이면 어떻게 됩니까? 세 가지를 해야 되는 거라. 세 가지가 일치돼야 만이 명확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적인 통증을 볼 때는 명칭이 붙으면 오히려 번거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나 몸이나 느낌에 대한 것은 이것은 자주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오늘 몸이나 내일 몸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호흡도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이더라도 그 통증이라는 것도 급격하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명칭을 붙이더라도 마음을 거기에다가, 대상에다가 붙들어 매어주기 위해서는, 명확하게 그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오히려 용이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는 거라.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바뀝니다.

굉장히 자주 바뀌고 이동이 많은 대상입니다. 그런데 명칭을 붙일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실제적인 대상은 이미 요만큼 가 있는데 명칭은 요기 붙이고 있는 경우들이 허다하게 일어난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관찰할 때는, 처음에 할 때는 명칭을 되도록 붙이지 마라. 아주 미세한 것이기 때문에 관념적인 명칭을 붙여서 마음을 보기에는 힘이 드는 부분이 많다 하는 겁니다.

 

이렇게 가만히 저기 하늘 한 중앙을 한번 볼 거 같으면, 신경쓰지 말고 가만히 볼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저쪽 다리 위로 차가 한 대 지나가고, 그다음 또 차가 한 대 오고, 구름이 또 뒤에 있고, 또 어떨 때는 새가 날고 이런 것이 보입니다. 마음을 관찰할 때는 이와 같이 해야 됩니다.

앞에 차가 지나가면 '차가 보임, 차가 보임, 차가 보임'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뒤에 오는 것들은 못 봅니다. 빠르게 빠르게 변해나가기 때문에! 그러니까 저기 있는 걸 그냥 그대로 그냥 하늘에 있는 새, 달, 해 이런 것들을 그냥 본다고 생각을 하고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기본 포인트입니다. 마음을 관찰할 때는!

 

마음을 관찰할 때는 '순간순간 들여다 본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순간순간 이렇게 변해나갑니다. 차도 이렇게 쭉 가죠? 사실은 쭉 가는 것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착착착착 가게 돼있습니다. 그냥 그걸 순간순간 따라가면서 본다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뒤에 오는 것들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할려고 하지 마라라는 거라. 강제적으로 '저놈을 내가 한번 봐야지' 하고 쭉 따라가다 보면 뒤에 오는 걸 못 본다는 거라. 그래서 강제적으로 뭘 할려고는 생각하지 마라.

 

마음을 관찰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강제적으로 하지마라!

그다음에 이걸 마음을 자기가 콘트롤 할려고 하지 마라. 통제하지 마라. 그리고 조작할려고 하지 마라.

명칭을 붙일 경우에는 조작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걸 내가 마음을 통제할려고 그럽니다. 통제할려고 해서 통제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가 되고 나면 지 스스로 통제가 돼나가지만 그러기 전에는 절대, 마음을 붙잡는다고 붙잡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하지말고 조작할려고 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마음을!

 

그리고 저것을 관찰할려고 해서 일부러 일으킬려고 하고 시험하지 말아라.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냥 흘러가게 놔둬버려. 그런데 안 된다고 그걸 다시 흐르는 걸 갖다가 역으로 돌려가지고 다시 한번 해본다 할 거 같으면 그건 이미 안 된다는 거라. 마음은 이미 시시각각으로 자꾸 흘러가버리는 강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거 같으면 그건 냅둬버리고 그다음 거를 하면 돼. 그래서 안 될 때는 그 안 되는 것을 갖다가 인위적으로 자꾸 만들어가지고 일으켜가지고 시험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긴장이 들어가질 거 같으면 안됩니다.

마음이 긴장이 돼있을 거 같으면 몸도 긴장이 돼있을 뿐아니라 대상을 보는데 명확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네 가지는 마음을 보는 관찰을 할 때 명심을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통제하지 말아라.

한국사람들이 가장 병폐가 뭐냐하면 마음을 붙잡아 둘라고 한다든지 이렇게 통제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통제할려고 하고 뭔가 수행한다고 할 거 같으면 막 이렇게 뚫어보듯이 하는 긴장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만 조심할 거 같으면 마음을 관찰하기가 좀 수월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한때 부처님의 시자 노릇을 했던 분이 있습니다.

메기야라고 하는 스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마음이 일어나면 마음을 진정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이 메기야도 마찬가지라. 수행하고 싶은 생각이 꿀떡같이 일어나거든.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 시봉해야 되는 거라. 물 떠오라 하면 물 떠와야 되고 이렇게 시봉을 하다 보니까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이 일어나는데 고게 귀찮거든. 누가 다른 사람이 또 부처님을 시봉하는 사람이 와야 자기가 그 시봉하는 자리에서 물러나가지고 수행하러 갈 건데, 시봉하는 사람이 뭐 급히 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만약에 내일 온다 오늘 당장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걸 못 참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나는 수행하러 가겠다. 그럼 내일 누가 오니까 내일 가라. 안 되는 거라. 그럼 니 가고 싶으면 가라. 그런데 그 마음으로 가지고는 수행을 못한다. 하는 거라. 그런데도 수행하고 싶으니까 어떻게 돼? 가서 수행을 하는 거라. 뭐 수행이 됩니까? 그 마음으로 가서? 안 되는 거라.

마음은 여러분들도 잘 알겠지만 쉽게 흥분이 됩니다. 쉽게 긴장도 돼버리고, 또 쉽게 마음은 게을러져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흥분되고 긴장되고 게을러지는 마음만 잘 다스릴 거 같으면 수행은 용이해집니다. 그런데 보통 그걸 못하기 때문에 수행이 잘 안 되는 거라.

 

그럴러면 수행은 본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강제적으로 하지 말고 긴장하지 말고 그리고 물 흐르듯이 그냥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게을러지지 않거든.

자꾸 돌릴려고 할 거 같으면 긴장도 되고, 억압하게 되고, 또 그것이 안 될 때는 '아이고 마 안 한다'하고 포기해버리는 거라. 게을러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안정되지 않는 마음으로는 어떤 수행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바르게 마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리고 이 수행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확신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만이 한번 마음먹은 거에 대해서 꾸준하게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찟다 핫다라고 하는 분도 그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수행한다고 이렇게 해보니까 안 되거든. 에이 뭐 이렇게 할 거 같으면 그냥 환속 해버릴란다. 환속해서 집에 가버립니다. 집에 가도 그 마음으로 가정일이 잘 됩니까? 집에 가도 또 재미가 없거든. 그럼 또다시 출가를 하는 거라. 이렇게 여섯 번을 왔다갔다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집에 딱 가서 보니까 마누라가 널브러져갖고 누워있는데 그렇게 추해보일 수가 없는 거라. 이때까지 다섯 번 집에 왔다갔다 한 것은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애착 때문이거든. 마누라에 대한 애착, 자식에 대한 애착. 애착이 있으니까 출가 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니까 돌아오는 거라. 마음이 자꾸 이동하는 거라.

 

그런데 마지막 여섯 번째 집에 가서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그렇게 추해 보이는 거라. 이 몸이 참 더러운 것이다. 그리고 참 무상한 것이구나. 낮에까지만 해도 그렇게 예쁘고 했는데 힘들게 뭐하고 나서 쓰러져 자는 모습을 보니까 금방 몇 시간도 안 됐는데 그렇게 추해 보이거든. 참 무상한 것이구나. 이렇게 변해가는 것이구나 하는 걸 알고, 그러고 나서 그 무상한 성품을 알고 인제는 다시 출가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면서 이 수다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절에 와서 나 인제 다시 출가하겠다 하니까 스님들이 안 받아줄라고 하는 거라. 니놈 머리깎는다고 이놈의 삭도가 다 닳아 없어졌다. 여섯 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매 깎고 또 깎고 이렇게 해주는 것 때문에 다 닳아 없어졌으니까 인제는 출가하지 마라. 또 얼마나 있을려고 출가를 하느냐.

이번에는 내가 진짜 마음먹고 왔으니까 받아주십시오. 그래 마지막 속는 셈 치고 한번 더 해줍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도 다시 환속을 안 하거든. 이상해가지고 부처님한테 와서 저 찟다 핫다가 좀 이상합니다. 인제는 환속을 안 하고 아주 잘합니다.

 

이미 걔는 마음을 다스렸기 때문에 그렇다. 마음이 방황하고 게으름에 빠질려고 그러고 긴장되고 하는 그런 것들을 이미 다스리고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그러한 법에 대한 이해를 했다는 거라. 이리 무상한 것이구나. 이렇게 더러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갖다가 이해를 했기 때문에 다시는 환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찟다 핫다는 아라한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냐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는 마음들을 잡을 수가 있다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럴 겁니다.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끊임없이 마음은 변해갈 겁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 여러분들에게 설명할려고 하는 이 수행이 중요한 겁니다.

일어난 마음들을 알아차리는 것!

일어난 마음들을, 그것이 어떤 일어난 마음이든지 일어난 마음들을 갖다가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일어난 마음을 설혹 못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저번에 수행의 포인트는 뭐라 했습니까? 다시 되돌리지 마라고 그랬죠. 강제적으로 하지 마라. 그냥 냅둬. 냅두면 다시 또 마음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왜? 마음은 항상 이동하게 돼있으니까!

 

그래서 일어난 마음을 내가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보이는 대상으로 인해서 눈을 통해서 들어와서 안다, 일어난 마음입니다.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알아차림을 계속 지속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대상은 항상 자꾸 바뀝니다, 그러면 그 눈을 통해서 그 일어나는 마음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합니다, 계속 지속적으로, 그러면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할 거 같으면 계속적으로 마음은 따라가게 돼있다는 거라.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이게 마지막, 이게 근본적으로 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기본 조건을 갖춰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알아차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조건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이걸 하기가 힘들다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단계부터 천천히 스님이 단계적으로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고, 탐진치에 물들어 있는 마음이 있고, 탐진치에 물들어 있지 않은 마음들도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그 뒤에 일어납니다.

그 뒤에 일어나는 마음으로 인해서 앞에 일어난 마음은 사라져버립니다.

아무리 악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인해서 이 마음은 이미 사라져버립니다.

이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 마음이 사라져야 이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그럴 거 같으면 아무리 악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선한 마음이나 아니면 수행하는 마음으로 돌려나갈 수 있는 게 이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을 좀 자세하게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