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심소 7가지(촉,수,상,사, 심경일성, 명근, 마음새김) [법문교재]

담마마-마까 2020. 2. 8. 12:56

AÑÑASAMĀNA-CETASIKA : 동타심소(同他心所) [법문교재]

 

인간의 삶의 방법을 말하는 불교 심리학은 마음 기능의 선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이나 악의 입장에서 보면, 선도 악도 아닌 심소가 있습니다.

바로 안냐사마-나 쩨따시까, 이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다른 심소의 성질을 받아 선으로도 악으로도 되는 심소로써 이 동타심소는 13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정심과 연결되면 삿다 와도 같을 수 있고, 불선심과 연결되면 웃닷짜 와도 같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 동타심소는 기본적인 마음의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동타심소는 모든 마음에 반드시 있는 최소한 필요로 하는 마음의 기능인 심소 7가지와 모든 마음에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닌 잡심소 6가지의 2종류로 크게 분류되고 있습니다.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심소, 즉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심소 7가지부터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심소 (삽바 찟따 사--라나 쩨-따시까) 7가지

 

1. phassa ( 팟사접촉 接觸 )

 

6가지 감각기관인 눈마음에 그 각각의 대상인 모양소리냄새접촉법이라는 6가지가 부딪치는 것을 말합니다.

팟사는 접촉하는 것, 맞닿는 것입니다.

 

각각의 감각 기관에 닿는 대상은 각각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은 색깔과 형태라는 모양에만 접촉합니다. 밖에 있는 감각대상 전체는 아니고 그 아주 일부분인 모양만 접촉합니다. 보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도 필요합니다. 대상에 너무 가까워져도, 대상으로부터 너무 멀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정량의 빛도 필요하고, 빛의 종류나 본인의 시력에 의해서도 보이는 방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간의 눈은 자외선이나 적외선에는 접촉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귀는 소리, 코는 향기, 혀는 맛, 신체는 열이나 딱딱함, (마음)은 법(개념)으로, 한정된 조건아래에서 접촉합니다.

 

눈으로 무엇인가 대상을 볼 때는 반드시 마음(viññana윈냐나인식 작용)이 일어납니다. (cakkhu)과 물질대상(rūpa)과 인식(viññāṇa) 이라는 3가지가 갖추어진 것에 팟사(phassa)라고 하는 심소가 생깁니다. 즉 마음이 대상을 알려고 하면 접촉이라는 연결고리로 인해 알게 됩니다. 인식 작용살아 있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로 살아 있는 눈을 뜨면 무엇인가가 보인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순간순간 생멸 변화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마음이 발생하는 모든 순간에 반드시 무엇인가의 대상과 접촉을 취하고 있습니다.

 

6개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정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모양과 소리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 그러한 정보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계속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모양도 빛으로 흘러 와 눈에 부딪칩니다. 소리도 물결로서 흘러오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맛도, 신체에 닿는 것도, 같습니다. 고정된 실체가 감각기관에 닿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으로, 접촉하는 것은 계속 흐르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불멸의 영혼등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개의 채널에 여섯 종류의 데이터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지만, 오관(안이비설신)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인식할 뿐이지만, 다양한 번뇌와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6번째의 뜻(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은 있는 것에도 없는 것에도 접촉합니다.

 

우리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 모든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 「당신」 「동물」 「」 「오늘」 「어제」 「내일등등, 그것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디에 실재하는 것일까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울거나 싸움하거나 기뻐하거나 좋아하게 되거나 싫게 되거나 하고 있는 것은, 마음속에서 만들고 있는 환상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있다라고 착각하여 분노나 욕구로 많은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머릿속에서 만든 환상을 좋아한다」 「싫다라고 자꾸 부풀려, 매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실은 감정의 메아리에 접촉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알기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면, 팟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소리를 느끼면 거기에 팟사가 있었습니다. 잘 마음 집중할 수 있었다면, 거대한 팟사가 나와 부딪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접촉한다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인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위빳사나에서는 팟사를 매우 중요한 마음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2. vedanā ( -다나-느낌 )

 

6(안이비설신의)에서 접한 정보를 느끼는 기능

 

느끼는 것을 마음의 기능으로서 심소의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다나-느꼈다라고 의식화되기 이전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그것을 느끼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빛이 눈에 들어와 그것을 느끼면 보입니다. 느끼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귀에는 여러 가지 소리가 들어오지만, 그러한 소리에 대해서 웨-다나-라고 하는 느끼는 기능이 일어난 소리만을 인식합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으로 우리에게는 관계가 없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심한 말을 들었다고 해도 그 소리를 귀가 느끼지 않으면 마음에 분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소리를 느껴 마음이 강렬하게 반응하면, 강렬한 분노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이 느낌이라고 하는 심소는, 인간 번뇌의 근본이 되는 매우 소중한 심소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미혹은 이 느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마음이 그것을 방치할 수가 있다면 고민은 사라져 버립니다. 즐거울 때에서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어느 개념에 의해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에 집착이 없는 경우는 별로 즐겁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으면 과연, 느낌에 근거해 갈애가 있고, 갈애로부터 근심이 태어난다.라고 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느낌은 매우 중요한 심소로서, 불교의 심장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만큼까지 중요한가라고 하면, 」 「영혼」 「진아라고 하는 강렬한 오해가, 이 느낌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 접해 그것을 느끼는 것은 자연법칙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은 큰 실수를 범해 버립니다. 무슨 일인가하면, 라고 하는 괴물이 인식 안에 얼른 비집고 들어가 버립니다.

예를 들어 눈에 정보가 접하면 빛의 물결이 눈에 부딪쳐 눈이라고 하는 감각 기관이 그것을 느꼈다라고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고 나는 보았다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사건이므로 나는 보았다」 「나는 들었다라고 분명히 의식화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았다」 「들었다라고 느낀 순간에 라고 하는 주어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yaṁ vedeti taṁ sañjānāti(양 웨--띠 땅 산자--) 그가 느낀 것, 그것을 그는 안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고 하는 주어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가 안 것은 그가 느낀 것뿐이며, 실제 밖의 세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느낀 것은 각각의 주관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모두 함께 이 그림을 감상합시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느낀 것을 아는 것이니까 내가 시계를 보았다라고 하는 일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가 눈을 뜨자 무엇인가가 눈에 닿아 어느 감각이 태어났다. 나는 그 감각을 인식했다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합니다. 실제는 라고 하는 것도 없는 것이어서 생겨난 감각으로부터 인식이 생겼다라고 하는 것이 보다 딱 맞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느끼는 것에 의해 근심」 「즐거움」 「불고불락(不苦不樂)이라고 하는 삼종의 느낌을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심이라고 해도 다양한 근심이 있고, 느낄 때에 각각 다르게 근심을 느낍니다. 즐거움, 불고불락도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수 없는 무수한 감각이 있게 됩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다만 순간순간 생멸 해 나가는 무수한 웨-다나-이며, 그 무수한 웨-다나-로부터 생기는 속박을 없앨 수가 있으면, 거기에 마음의 평온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3. saññā ( 산냐-지각 )

 

6(안이비설신의)에서 접한 정보를 구별하는 기능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 그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마음속에는 약간의 기능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산냐-(지각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대상이 눈에 닿으면 눈이 그것을 느낀 순간에, 말이나 사고하기 이전에, 마음은 얼른 그것을 구별합니다.

구별기능이 없으면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구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인식한다고 하는 것이므로, 생명에 있어 산냐-는 매우 중요한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비슷하게 닮은 종류의 연필 두 자루를 보여주면, 우리는 좀처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음에 구별할 수 있도록 잘 기억해 두세요.라고 말하면, 어딘가 차이는 없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어떻게든 구별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산냐-를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산냐-를 사용해 구별합니다.

 

우리는 흥미가 있는 대상을 향해 산냐-를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귀에는 상대방의 이야기 소리 이외에도 많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그러한 관계없는 소리는 무시하고 있습니다. 즉 산냐-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산냐-가 일어나지 않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산냐-는 훈련에 의해 날카롭고 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를 궁리하면서 산냐-의 기능을 강력하게 만듭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스스로 거기에 생각을 달라붙게 하여 의문이나 반론을 만들면 산냐-가 많이 일어나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새로운 산냐-를 계속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볼 때에도, 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감각 기관에 동일한 것이 접하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대상도, 감각 기관도 끊임없이 변화하여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같은 사람을 두 번 본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같은 소리를 2번 듣는다는 것도 없습니다. 모두 한번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 누군가와 말한 것을 수십 차례 반복하여 생각해 내도, 생각해 낼 때 마다 마음에 접하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비슷한 것을 두 번, 세 번 인식하면 같은 것이다라고 착각합니다. 망상, 개념이라고 말해지는 인식 개념이 일어나 마음대로 개념을 만들어 버립니다.

개념, 지식, 기억 등은 모두 산냐-의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내가 있다」 「영혼이 있다등과 같이 착각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가장의 원흉은 웨-다나-(느낌)라고 하는 감각 작용이지만, 이 산냐-도 착각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개념이나 지식, 기억 등에 의해 내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똑같은 이름이니까,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것도 완전한 생각으로 단순한 산냐-의 덩어리에 자신이라는 동일성을 만들어 버립니다. 산냐-에 의해 무상이 안보이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기 때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냉정하게 보면, 같은 것은 이름이라는 개념뿐이지 신체도, 생각도, 좋고 싫음도, 완전히 다릅니다. 막연히 변함없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순간순간 다양한 산냐-가 태어나 사라지고, 태어나 사라져 계속 흘러갈 뿐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변함없는 것」 「 」 「영혼등은 없습니다.

다만 멈추는 일 없이 생멸을 반복해, 흘러가는 산냐-라고 하는 마음의 기능이 있을 뿐입니다.

 

 

4. cetanā ( -따나-의지 )

 

행위의 동기기능. 의지. 의도, 자극

 

마음에는 항상 마음이 하나 일어났다 사라지면,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는 잠재력, 의지력과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손을 들면, 그대로 계속 올리든지, 멈추든지, 내리든지, 무엇인가 이어집니다. 어떤 것을 할 때 거기에는 ~을 하고자함이라고 하는 의지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언제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심소로서의 쩨-따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쩨-따나-는 모든 마음에 일어나니까, 거대한 힘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눈을 뜨면 자동적으로 무엇인가가 보입니다. 그때라도 마음이 보고 싶은 의도가 있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과 눈이 만나며 거기에는 쩨-따나-의 기능이 있습니다. 인식해 보려고 할 경우에도 상당한 쩨-따나-가 일어납니다. 서고 싶다라고 생각하자 마자 서는 경우는 쩨-따나-가 강하게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수록 쩨-따나-가 강하지는 않습니다.

 

그처럼 행동을 일으킬까, 일으키지 않을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따나-가 결정합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는, 그것을 생각하고 싶기 때문에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둘 때는, 그만두고 싶기 때문에 그만둡니다. 어떤 경우에도 쩨-따나-라고 하는 심소가 일어납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쩨-따나-인 것입니다. 마음은 항상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식하고 싶기 때문에 인식하고 있는 것에서 만나며, 거기에 의지가 일어납니다. 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대담한 행위만이 업이고 보통 일상의 행동은 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볼 때,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손을 들 때, 손을 내릴 때, 우리는 업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므로 행동하는 의지가 업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있다면, 책을 읽고 싶다라고 하는 의지가 쭉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읽고 있습니다. 거기에 업의 기능이 있습니다.

 

-따나-에는 업이 되는 쩨-따나-, 업이 되지 않는 쩨-따나-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쩨-따나-는 업이 되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있자 무엇인가가 보였을 경우는 업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보려고 보면 거기에 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인식한 순간에, 의지도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 의지가 강해지면 업이 됩니다. 약한 쩨-따나-는 일으키는 것만으로 사라져 버려 행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강한 쩨-따나-는 마음에 에너지로서 축적되어 갑니다. 그 축적된 에너지가 업이 됩니다.

그래서 의도로써 자극, 격려하여 몸과 말과 마음이라는 문으로 업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행위가 일어나기 위한 기초가 되는 행위를 업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부딪쳐 굴렀다고 합시다. 아프다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쩨-따나-가 일어나 아픔을 느끼지만, 그것은 업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욕구나 분노의 감정이 들어가자마자 업이 됩니다. 같은 것에서도 나쁜 업이 되는 경우도 있고, 좋은 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딪친 사람에게 화를 내면 나쁜 업이 됩니다.

상처를 입었으니 변상하라라고 고함치거나 하면 욕구나 분노로 인해 나쁜 업이 됩니다. 반대로 상대를 배려하여 걱정했다면 좋은 업이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는 경우는,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이런 쩨-따나-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좋은 업을 만들까, 나쁜 업을 만들까라고 객관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좋을 방향으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좋은 쩨-따나-의 에너지는 자꾸 길러 강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심소를 이해하는 것은,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증장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의 기능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5. ekaggatā (-깍가따- : 심경일성 心境一性)

 

인식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기능

 

생명은 순간순간 항상 무엇인가를 인식해 살아가지만,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에 인식 대상으로 향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심경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 간 인식 대상으로 집중하는 기능입니다. 우리는 보거나 듣거나 맛보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의 집중이 심경일성입니다.

 

이 집중이 없으면 인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다양한 곳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를 집중력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집중이 한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 집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심경일성은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에는 항상 일어납니다.

 

모든 것에는 다양한 무수한 측면이 있습니다. -깍가따-는 인식하는 순간에 자신이 인식하고 싶은 측면으로 심소(마음의 기능)를 통일시킵니다. 예를 들어, 교양 있는 사람이 이 그림에 푸른색을 사용한 것이 신비적이군요.라고 말하면, 모두 청색을 조심스럽게 살펴 그림을 그 측면으로 바라봅니다. 사실은, 같은 그림을 봐도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여 집니다. 그 순간 마음이 무엇에 집중했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아이가 떠들며 놀고 있어도 그 아이가 자신에게 있어 좋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있어 나쁜 존재라고 생각하면 시끄럽다고 느낍니다. 자신의 남편도 가끔은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가끔은 없는 것이 나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빨리 돌아오면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여 그 때 그 때 자신이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상대를 봅니다. 정말로 상대를 올바르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비평이나 비판 등은 결코 사실 그대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은 무수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 순간순간에 하나의 면을 인식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 측면의 특색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올바르게 말하고 싶다면, 나의 아이는 귀엽고, 밉살스럽고, 시끄럽고, 즐겁고, 떨어지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지만, 그렇게 하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됩니다. 견실한 지식은 심경일성을 집중력으로서 길렀을 때에게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심경일성에도 강약이 있습니다. 이것이 강해지면 그 때의 그 측면을 철저하게 파악합니다. 그것이 매우 강해진 상태가 사마-(삼매)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심경일성을 강하게 길러주는 수행법입니다.

 

 

6. jīvitindriya (-위띤드리야 : 생명력 命根)

 

살아 있다고 하는 기능, 생명력, 삶의 능력을 조절함.

 

마음에도 살아 있다라고 하는 요소가 있어, 생명이라는 것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 기능을 생명력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순간적인 생명기능이 생명력입니다. 생명력 또는 삶의 원리 때문에 모든 마음과 마음부수는 활발히 작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생명력이 없으면 마음은 전혀 작용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항상 생멸 변화하여 생겨나면 소멸하고, 생겨나면 소멸하고를 반복하여, 계속 새로운 마음이 태어나서 죽어 갑니다. 어떤 순간의 마음에도 생명력이라고 하는 생명의 기능이라는 심소가 있으므로, 이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소멸해도 또 곧바로 생깁니다. 생은 멸의 원인이 되고, 멸은 생의 원인이 됩니다.

 

꽃을 보면 꽃을 본 순간만 그 마음이 살아 있어, 그 마음은 곧바로 죽어 다음의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꽃을 본 다음의 순간에 어제의 일을 생각해 내거나 합니다. 꽃을 본 마음과 어제의 일을 생각해 낸 마음은 완전히 다른 마음입니다. 마음은 그 때 그 때 일순간의 생명을 가지고 죽고 태어나고 또 죽고를 반복해 갑니다. 일반적인죽음의 개념과는 다르지만, 이것이야말로 불교에 있어서의 죽음의 개념인 것입니다.

 

한번도 죽었던 적이 없는데, 죽음이 무섭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무섭다고 하는 것은 감정이며 경험이 아닙니다. 죽음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마음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은 죽음에 기초를 두어 성립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죽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노력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죽지 않는다고 하면,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 회사에서 왜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역시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고당하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아무리 해고를 해도, 밥이 한 톨도 없어도, 잘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눈 덮인 곳에서 자도, 사람이 죽지 않고 건강하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에서 자고 있을 때 화재가 나도, 죽지 않을 거니까 나가기 귀찮고 피곤하므로 1시간 정도 자고 나가자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순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사실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산다라고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동력은 바로죽음입니다. 죽음을 악마 취급해 도망칠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이야말로, 이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에 어떻게 살면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끔 자살은 겁쟁이로 싸움에 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죽음은 자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부는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못에 있는 연꽃이 푸르고 싱싱하도록 지키고 돌보는 것은 물이듯이, 생명력은 대상과 업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몸과 마음만을 지키고 돌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력으로 인해 몸과 마음을 지키고 돌보기에 죽은 시체나 물체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이 단지 잠시 잠깐 계속되는 것뿐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7. manasikāra (마나시까-: 마음새김 作意)

 

마음(인식)을 일으켜 작동시키는 기능, 자발적 주목, 마음새김.

 

마나시까-라는 마음에 대상을 새기는 것으로, 마음부수를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기능입니다. 마나시까-라는 반응에 속하며, 마음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7가지 마음부수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제일 처음에 대상을 직면하는것이며, ‘관련되는 마음부수들을 마음에 묶는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백 개의 나무기둥을 가지런히 세워 놓았을 때, 맨 앞의 나무기둥을 넘어뜨리면 모든 나무기둥이 넘어집니다. 마나시까-라는 그처럼 모든 심소의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방아쇠와 같은, 스윗치를 누르는 것 같은 기능을 합니다.

-다나-, 산냐-, -따나- 등은 각각 자신의 기능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마나시까-라가 작동해 그러한 심소를 움직입니다.

 

어찌보면 쩨-따나(의지)의 기능과 닮아 있는 것 같지만, 바르게 설명하면 -따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에너지고, 마나시까-라는 , 하자라고 작동시키는 키와 같은 기능입니다.

 

마나시까-라는 위딱까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위딱까는 궁내에 근무하는 신하가 마을 사람(마음)을 왕(대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을 사람이 왕궁을 처음 방문할 때에는 궁내에 근무하는 신하의 안내가 필요하지만, 다음번에 갈 때에는 그러한 안내가 필요 없습니다.

 

마나시까-라의 기능은 어떤 것을 마음으로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 있는 감각대상을 마음 안으로 데리고 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 혹은 몇 가지 감각대상이 마음에 지속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마나시까-라의 주목하는 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말하면 마음으로 어떤 것을 데려 오는 것이 마나시까-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나시까-라의 주요 특징은 마음을 대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를 똑바로 목적지로 가게 하는 키와 같아, 마나시까-라가 없는 마음은 키가 없는 배와 같습니다. 또한 마나시까-라는 두 마리의 잘 훈련된 말(마음과 대상)이 리드미컬하게 달리고 있는 것을 면밀히 관찰하고 앉아 있는 마차의 마부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어느 심소도 마나시까-라가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더위가 신경이 쓰일 때는 신체의 감각에 마나시까-라가 일어나고 있다. 이야기 소리에 마나시까-라가 일어나야,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마나시까-라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잘 사용되고 있던 말로, 경전에도 자주 나옵니다. 부처님은 법에 맞게 잘 이해해 둔다.라는 의미로 마나시까-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yoniso-manasikāra'적절하고 현명한 마음새김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수다원에게 바른 견해가 생기게 하는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ayoniso-manasikāra’현명하지 않은 마음새김인데, 이것은 괴로움과 다섯 가지 장애를 일으킵니다.

 

공통되는 심소(접촉, 느낌, 지각, 의지, 심경일성, 생명력, 마음새김) 7가지는, 모든 마음에 항상 일어납니다. 7가지가 갖추어지면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무엇인가를 볼 때, 눈을 뜨는 순간에, 보고 싶다라고 하는 의지가 있어, 대상으로 집중하고 대상을 접촉합니다. 대상을 접촉하면 그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느낀 것을 지각, 식별합니다. 보자라고 하는 의지도 일어나, 거기에는 생명력이라고 하는살아 있다라는 기능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보았다라고 생각하여 인식하기 이전의 일순간의 기능입니다. 물리학에서 소립자 레벨로 물질을 이해하듯이, 마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은 기르는 일은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산냐-를 기르면 발군의 지식인이 되고, 팟사를 기르면 민감하고 예리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마음은, 그 때 그 때 자신에게 강렬한 대상을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컨트롤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가는 삶의 방법을 그만두고, 스스로 살아 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고 있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인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컨트롤해서 인식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식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면 마음은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않은가하는 문제는, 마음을 방치하면 마음의 자유는 없고, 올바른 방식으로 컨트롤 하면 마음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은 자유롭다고도, 자유롭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과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 위의 법문내용은 붓다의 길따라 선원 홈페이지에서 복사한 법문 입니다.

       

     모두가 평온하기를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