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아로바 (alobha, 無貪) (20060830)

담마마-마까 2020. 10. 3. 10:09

https://youtu.be/T-LjtDx901g

♠ 쩨-따시까(cetasika 心所) - 마음의 작용

 

《 청정심소(淸淨心所 sobhana-cetasika(소바나 쩨따시까) 25 》

< 공정심소(共淨心所 sobhana-sādhārana-cetasika) 19가지 >

 

* 아로바 (alobha, 無貪) (20060830)

 

교재 한번 펴보십시오. 아로바(alobha) 할 차례죠?

저번 시간에 히리·옷땁빠(hiri-ottappa) 부분은 했습니다. 악행 짓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악행 짓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이러므로써 나쁜 행동을 하게 될 때 점점 더 멈칫멈칫해지게 됩니다.

오늘은 그 뒤를 이어가지고 아로바(alobha) 부분입니다. 로바(lobha)는 전에 스님이 설명을 했죠? 그때 설명할 때 스님들도 탁발을 하면서 로바가 작동을 하는 경우들도 많다 하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맛난 음식들 찾아다니고 또 조금 더 탁발 많이 해서 그중에서 더 맛있는 거 골라 먹을라고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까 점점점점 시간이 늘어나더라 하는 얘기를 하면서, 그런 것들이 로바에 들어간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아로바(alobha) 부분입니다.

로바(lobha, 탐욕)가 불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로바(alobha)는 물과 같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물은 흘러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쪽까지 왔으면 또 그다음은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그다음으로 또 흘러가고 하는 흘러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소바나 쩨따시까(sobhana-cetasika, 청정심소)를 하면서 순차적으로 되어나가는 것들도 어떤 면에서는 물의 성질과 마찬가집니다. 히리·옷땁빠가 갖춰지고 나면 아로바, 아도사 부분이 조금씩 생겨나고 또 자리를 잡아나가고 이렇게 되는 것이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로바(lobha)는 달라붙는 성질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로바는 끈적거리지 않고 달라붙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꽃이 피어나면 아무리 진흙 속에서 올라오더라도 연 위에 물방울이 맺히지 않고 또르르륵 흘러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로바도 달라붙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것이 달라붙지 않는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보면 보는 대상에 마음이 가집니다. 달라붙습니다. 들리면 들리는 소리에, 냄새나면 냄새 맡는 것에 달라붙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에 이렇게 일반적인 사람들은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리면 취하게 되고, 아름답지 못한 소리면 싫은 마음을 일으키고, 달라붙는다는 것은 좋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가까이 둘려고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조금 현명하다 싶으면 '아, 이것이 로바(lobha)다' 하고 판단을 내릴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보이거나 들리거나 냄새 맡거나 이런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달라붙지 않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과 우리 재가인들, 또 일반인들의 차이점은 바로 이런 데에 있습니다. 달라붙느냐, 안 달라붙느냐 차이입니다. 부처님 보다도 목갈라나 존자나 사리뿟따 존자가 먼저 열반에 들었죠? 그때 부처님이 사리불과 목련존자 자리를 보고 쓸쓸하게 서 있는 모습들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님이 그런 모습들이 경전에 기록된 걸 보면 참 그것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존경스럽게 느껴질 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목련 존자나 사라불 존자에게 연연해하고 또 하는 일을 안 하시고 하시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 종족들이 눈앞에서 멸망하는 것을 봤고 여러 가지들을 많이 봤지만 그런 대상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달라붙은 적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달라붙지 않는가?

딱 하나뿐입니다. 항상 알아차림이 백프로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달라붙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니까 그 빈틈을 비집고 달라붙게 돼있는 겁니다. 아로바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앗타살리니」라고 하는 주석서에는 아로바를 뭐라고 표현해놓았느냐 하면 "사람이 똥통에 빠졌을 때 느끼는 마음과 같다"하고 얘기합니다.

더러운 것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피할려고 합니다. 멀리할려고 합니다. 아로바라고 하는 것은 탐욕에 대해서 멀리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을 앗타살리니에서는 똥통에 빠지는 것과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찬가집니다. 감각적인 욕망이나 탐욕들이 일어나면 그것이 곧 똥통과 같다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덕이 있는 사람은 결코 탐욕스럽지 않게 돼있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대신에 뭐가 있겠습니까? 자비와 관대함이 항상 자리를 하게끔 돼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그래도 수행을 하고 이렇게 경전공부를 한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생계도 바른 생계를 위해서 자꾸자꾸 연습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 법에 맞지 않는 생활방법이다, 또 살아가는 방법이다 할 거 같으면 그걸 자꾸 바꿀려고 해야 됩니다. 바꾸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아로바가 아닙니다. 물론 뭐 당장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아마 저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또한 감각적인 것들, 즐거움들을 가능한 한 많이 피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소바나 쩨따시까의 아로바가 점점 더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나보다 더 가난한 자, 가난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자꾸 가질려고 하고 나눌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꾸 베풀려고 하는 것들을 가져야 되고, 그리고 그런 나누고 베풀려고 하는 것을 진심 어리게 행동을 해야 됩니다. 가식 없이 그래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나누는 자, 보시하는 자, 그런 자가 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이런 '아로바가 갖춰진 자'를 빨리어 용어로 '뭇따짜기(muttacāgī)'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뭇따짜가(muttacāgā, 놓아버림)라고 하는 빨리어 말이 있는데, 그걸 사람으로 만들어서 '뭇따짜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욕심부리지 않고 나누는 자', '베푸는 자' 그런 의밉니다. 아로바가 갖추어지면 갖추어질수록 이렇게 점점 더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의 정도 가지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피할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하게 되고, 또 진심을 가지고 나눌려고 하고 베풀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뭇따짜기들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명예와 부, 권력이라고 하는 것들의 인연도 끊을 수 있어야 만이 아로바가 점점 더 갖추어져 나갑니다. 참 힘듭니다. 사람들이 권력이나 명예나 부나 이런 것들을 단박에 끊기는 힘듭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여러 자따까(Jātaka)들, 경전들을 보면 초개와 같이 버린 자들이 많습니다. 누군가가 여왕이 욕망을 가지고 덤벼들려고 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왕자라고 하는 지위를 꼭 똥을 피하듯이 버려버리고 숲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여러 가지 그런 것들이 자따까에도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로바를 점점 더 계발하기 위해서는 사띠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띠가 없이는 아로바를 계발할 수가 없고 증장시켜나가 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탐욕이 없는 기질이 좀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또 그렇게 사띠로 인한 노력으로 아로바를 점점 더 키워나가야 됩니다.

 

왜 그런가 좀 봅시다. 여러분들이 대상에 대해서 확고하게 주시를 한다고 해봅시다. 배가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움직이는 물질적인 요소에 마음을 집중을 하고 있을 때 탐욕이 일어납니까? 안 일어나죠! 그게 아로바입니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해서 나마(nāma)와 루빠(rūpa)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 그로 인해서 로바는 근절되어나가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숨을 쉴 때도 숨을 쉬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또 숨을 쉬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나마(nāma)를 어디에다 두는 것이 빠릅니까? 숨을 쉴려고 하는 의도하는 마음에다가 실어야 됩니까? 아니면 움직이는 물질적인 배의 움직임에다가 두어야 됩니까? 예. 배의 움직임이 확고하게 빨리 내가 캐치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확고하게 캐치를 해나가다 보면 숨을 쉴려고 하는 의도들을 알아차려 나갑니다. 그럼 나마(nāma)를, 그쪽으로 일어나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끔 됩니다. 이렇게 전환을 자꾸 시켜나가주면서 하게 돼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에 대해서 확고하게 마음을 집중하면 아로바는 생겨나갑니다. 또한 일상적인 생활에서 히리와 옷땁빠가 갖추어지면 점점 더 나쁜 행동들이나 나쁜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탐욕 부분이 줄어듭니다. 그것을 통상적으로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이 아로바라고 하는 것은 연꽃과 같이 둘러붙지 않는 작용들을 하게 돼있습니다. 마음이 대상에 일치를 하다 보면 어떨 때는 과도하게 마음을 쓸 때가 있고, 어떨 때는 무기력하고 나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균형을 맞추기가 참 힘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로바하고 아도사가 계발이 돼나가서 잘 활용이 되면 치우침이 없어지게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지나치게 과도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균형이 깨지는 것들이 없어집니다.

 

이런 것이 아로바를 잘 계발하면서 일어나지는 특성들입니다.

 

부처님은 세상에는 많은 슬픔과 비탄, 고통, 절망 그런 것들이 있다. 그런 것은 애욕에서 생겨나고 애욕에서 시작된다 하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걸 가끔씩 자주 잊어먹습니다. 마음고생 하는 것 이런 것은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씩 잊어먹습니다. 그래서 '나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하는 생각들을 가끔씩 일으킬 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탐욕이 뿌리를 내리지 않을 거 같으면 마음고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번뇌를 만들고 마음에서 고통이 일어나고 하는 것들이 있을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부처님도 두 양대 제자를 잃었지만 마음으로써 슬픔이나 고통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는 얘기를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애욕으로부터 이런 것들이 시작된다 하는 사실을 알고 하루빨리 탐욕-로바 라고 하는 것들을 떨쳐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교재에 보면 「로바의 부정형으로써 아로바 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다」 하는 부분입니다.

청정심소(sobhana-cetasika)입니다. 청정한 마음이 생길 때는 아로바가 항상 일어나집니다. 아로바가 일어나지 않으면 청정심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아로바 하나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얘기를 마지막에 써놨습니다. 물질적인 베풂이나 이런 여러 가지들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아로바를 잘 길러주면 해탈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하는 사실을 알고, 여러분들도 점차적으로 이 아로바를 기르기 위해서 항상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면 그 속에서 위빠까(vipaka)가 생겨나고, 위빠까로 인해서 위리야(vīrya)라는 노력의 힘들이 길러지고, 그로 인해서 사띠(sati)가 더욱더 강화돼 나가질겁니다. 그런 사띠의 힘에 인해서 사마디(samādhi)-집중하는 힘들이 커지고, 그런 집중의 힘들로 인해서 빤냐(paññā)가 생겨나지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니까 아로바를 항상 길러서 수행에서 좋은 보탬이 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아도사(adosa) 부분입니다. 아도사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로바, 아도사는 나중에 묶어서 한번 더 설명을 할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청정심소에는 아로바, 아도사는 있는데 아모하는 없습니다. 그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2년 12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