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cetanā ( 쩨-따나-:의지, 思 ) 1. (20070302)

담마마-마까 2020. 11. 2. 15:04

https://youtu.be/QzRPZUZ6kj8

[[ 교재 부분

4. cetanā ( 쩨-따나-:의지 思 ) 행위의 동기기능. 의지, 의도, 자극.

마음에는 항상 「마음이 하나 일어났다 사라지면,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는 잠재력, 의지력과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손을 들면, 그대로 계속 올리든지, 멈추든지, 내리든지, 무엇인가 이어집니다. 어떤 것을 할 때 거기에는 「~을 하고자함」이라고 하는 의지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언제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심소로써의 쩨-따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쩨-따나-는 모든 마음에 일어나니까, 거대한 힘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눈을 뜨면 자동적으로 무엇인가가 보입니다. 그 때라도 마음이 보고 싶은 의도가 있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과 눈이 만나며 거기에는 쩨-따나-의 기능이 있습니다. 인식해 보려고 할 경우에도 상당한 쩨-따나-가 일어납니다. 「서고 싶다」라고 생각하자 마자 서는 경우는 쩨-따나-가 강하게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수록 쩨-따나-가 강하지는 않습니다.

 

그처럼 행동을 일으킬까, 일으키지 않을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쩨-따나-가 결정합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는, 그것을 생각하고 싶기 때문에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둘 때는, 그만두고 싶기 때문에 그만둡니다. 어떤 경우에도 쩨-따나-라고 하는 심소가 일어납니다.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쩨-따나-인 것입니다. 마음은 항상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식하고 싶기 때문에 인식하고 있는 것에서 만나며, 거기에 의지가 일어납니다. 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대담한 행위만이 업이고 보통 일상의 행동은 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볼 때,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손을 들 때, 손을 내릴 때, 우리는 업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므로 행동하는 의지가 업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있다면, 「책을 읽고 싶다」라고 하는 의지가 쭉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읽고 있습니다. 거기에 업의 기능이 있습니다.  

 

쩨-따나-에는 업이 되는 쩨-따나-와 업이 되지 않는 쩨-따나-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쩨-따나-는 업이 되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있자 무엇인가가 보였을 경우는 업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보려고 보면 거기에 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인식한 순간에, 의지도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 의지가 강해지면 업이 됩니다. 약한 쩨-따나-는 일으키는 것만으로 사라져 버려 행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강한 쩨-따나-는 마음에 에너지로써 축적되어 갑니다. 그 축적된 에너지가 업이 됩니다. 그래서 의도로써 자극, 격려하여 몸과 말과 마음이라는 문으로 업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행위가 일어나기 위한 기초가 되는 행위를 업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부딪쳐 굴렀다고 합시다. 「아프다」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쩨-따나-가 일어나 아픔을 느끼지만, 그것은 업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욕구나 분노의 감정이 들어가자마자 업이 됩니다. 같은 것에서도 나쁜 업이 되는 경우도 있고, 좋은 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딪친 사람에게 화를 내면 나쁜 업이 됩니다. 「상처를 입었으니 변상하라」라고 고함치거나 하면 욕구나 분노로 인해 나쁜 업이 됩니다. 반대로 상대를 배려하여 걱정했다면 좋은 업이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는 경우는,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이런 쩨-따나-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좋은 업을 만들까, 나쁜 업을 만들까」라고 객관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좋을 방향으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좋은 쩨-따나-의 에너지는 자꾸 길러 강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심소를 이해하는 것은,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증장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의 기능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밤낮은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바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 cetanā ( 쩨-따나-:의지, 思 ) 1. (20070302)

 

오늘은 쩨따나 부분을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쩨따나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서 한다고 저번 시간에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쩨따나(cetanā)가 뭡니까? (대답)

'상카라(saṅkhāra)' 맞습니다. 한글로 말하면? (대답) 예.

 

우리나라 속담에도 그런 게 있죠? 지가 할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게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할려고 하는 마음을 먹는 것' 그 자체가 이 쩨따나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죠? 자기가 마음을 먹으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다 이루어나갑니다. 그리고 마음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 말하는 것도 의도가 있어야 말을 하는 것이고, 여러분들 보려고 해도 볼 마음이 있어야 보게 되는 것이고, 모든 행동들도 꼭 마찬가지고, 그래서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모든 것들에는 항상 의도가 따라오게 돼있습니다. 처음에 의도를 냈다고 해서 뒤에 의도가 없어도 됩니까? 그건 아니죠! 어쨌든 몸과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사라질 때도 의도가 있어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것이 일어날 때도 의도가 있어야 만이 일어나게끔 돼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모든 것이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쩨따나라는 것이! 그마만큼 쩨따나가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쩨따나를 번역해 놓길 '행위의 동기 기능. 의지. 의도. 자극'이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저번 시간까지 배운 것들을 한번 간추려 봅시다.

이 마음, 의식이 무엇인가 감각적인 대상을 인식할 때, 감각적인 대상은 아람마나(arammana)라고 합니다. 아람마나를 인식할 때 그 아람마나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는 게 있죠? 그게 뭡니까? 팟사 쩨따시까(phassa cetasika) 입니다. 팟사 쩨따시까가 이렇게 아람마나 하고 긴밀하게 연락을 취합니다. 밖의 대상하고 요놈의 마음하고 딱 만나도록 해준단 말입니다.

 

그 연락을 취하는데도 내가 취할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접촉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접촉이 일어났다.

그럼 접촉이 일어나고 나서 그 뒤에 따라오는 게 뭡니까?

웨다나(vedanā) 느낌이죠! 느낌이 있어도 느낌도 지가 느낄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다음에 하는 것이 '아, 이게 어떤 거구나' 인정하는 산냐(saññā)가 일어나지죠! 그 산냐도 마찬가지 내가 의도를 내지 않으면 절대 산냐도 일어날 수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 에깍가따(ekaggatā)나 지위띤드리야(jīvitindriya)나 마나시까라(manasikāra) 라는 정신적인 요인들도 다 그 속에는 이 쩨따나가 함께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는데, 그 똑같은 쩨따시까에 포함이 되면서도 다른 거하고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죠! 팟사는 팟사 지 기능만 하고 나면 끝나. 산냐도 마찬가지고, 마나시까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지 기능만 하고 끝나버리는데, 요놈의 쩨따나라는 놈은 어떻게 된 놈인지 끝까지 따라와지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증기선이 있습니다. 동력을 넣는 증기선이 있는데, 그 '증기선이 물건을 잔뜩 실은 나룻배 49개를 끌고 가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머지는 전부 줄로 매어져 있는 거라. 이놈 하나 요놈 하나 각각 따로인데 줄로 매어져있기 때문에 증기선이 끌면 그냥 쭈우욱 따라와지게 되는 거라. 쩨따나라고 하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얼마만큼 이 쩨따나가 소중한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말에 마음먹은 것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실은 모든 것입니다. 쩨따나가!!!

 

부처님이 오죽 했으면 "깜마(kamma)가 쩨따나다" 그랬겠어요? 여러분들 짓는 행위들 모든 것, 착한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모든 것은 업(業)이란 말입니다. 그 업 자체가 쩨따나라는 얘깁니다. 꾸살라 깜마는 곧 꾸살라 쩨따나가 되고, 아꾸살라 깜마는 곧 아꾸살라 쩨따나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책임 맡고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이 쩨따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비유를 해 놓기를 여러분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테라와다(theravāda), 테라와다가 뭔 뜻입니까? '장로들이 이끌어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부처님 당시 때도 부처님부터 해서 장로들이 순차적으로 아침에 쭈우욱 탁발을 나가면, 내가 끌고 가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모범이 돼서 나갈 것 같으면 뒤에 사람들은 마 그냥 뒤에 따라옵니다. 줄줄줄줄. 그리고 그 스님들이 행하는 걸 보고 그대로 그냥 따라갑니다.

 

그래서 그걸 부처님이 장군에 비유를 해놓기도 합니다. 장군은 직접 가서 전쟁에 참여를 합니다. 참여를 하더라도 모든 걸 격려하고 모든 걸 조정을 하죠. 그렇지만 그 장군도 꼭 마찬가지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급여 받을 때 장군 급여하고 졸병 급여하고 똑같습니까? 안 같죠? 원장님도 다르죠? 간호사하고 급여 똑같을 거 같으면 '에이, 나 이거 안 한다' 하지 누가 하겠어요? 쩨따나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모든 것을 앞서서 인도를 하고 모든 것과 연관을 맺기 때문에 그마만큼 중요한 것들이 쩨따나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아람마나(arammana)라고 하는 감각적인 대상을 인식할 때, 거기에 사띠(sati)가 첨가됐다, 아니면 삿다(saddhā)가 첨가됐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꾸살라가 되죠! 꾸살라 깜마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로바(lobha)가 첨가 됐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아꾸살라 깜마가 됩니다.

그런데 삿다가 될 것이냐 로바가 될 것이냐 결정하는 것은 누가 합니까? 바로 이 쩨따나 라는 거라. 쩨따나!!!

내가 저렇게 간다고 하더라도, 애들 같은 경우에 물가로 간다고 할 거 같으면 “너 이리 가지마! 거기 위험하니까!” 하고 탁 잡아가지고 부모가 끌어주죠. 그와 마찬가집니다. 쩨따나는!

 

그러면 보통 우리가 세 가지 닦을 것이 있다고 그럽니다. 실라(sīla)와 사마디(samādhi)와 바와나(bhāvanā) 그렇게 얘기합니다. 크게 구분해가지고 세 가지!

그러면 이 세 가지를 닦게 하는 것도 쩨따나인 것이고, 또 탐·진·치라고 하는 것을 닦아서 습관으로 익혀지게 하는 것도 이 쩨따나가 하는 것이다 하는 거라.

모든 것은 이 쩨따나이고, 쩨따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해도 사실은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나머지 쩨따시까라고 하는 것은 쩨따나를 따라오는, 그냥 선례에 따라서 쭉 묶여오는 것하고 마찬가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부수물들, 정신적인 요소들은 그거 외에는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웨다나도 지 기능 외에는 못합니다. 절대 다른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쩨따나라고 하는 것은 모든 기능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모든 기능에 일어나지고, 그렇지만 이 쩨따나도 결국에는 찟따와 함께 일어났다가 찟따와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찟따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느냐,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주느냐 하는 것은 이 쩨따나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마만큼 이 쩨따나가 모든 것을, 여러분들의 모든 존재 행태, 모든 행동들을 결정한다고 보시면 딱 맞습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부처님은 쩨따나를 뭐라 그랬냐면 '쩨따나(cetanā)는 곧 깜마(kamma)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깜마하고 쩨따나는 사실을 다른 부분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런데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한 것은 분명히 목적이 있죠?

깜마를 짓도록 만드는 것은 쩨따나로 인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깜마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쩨따나일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깜마가 곧 쩨따나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짓는 행위 자체가 깜마가 아니고 이 쩨따나 자체가 바로 깜마다 하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스님 법문 들을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장 먼저 되는 게 뭡니까? 내가 들을려고 마음을 내야 듣습니다.

도둑질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도둑질할 때도 훔칠려고 하는 마음을 내야만이 훔쳐집니다. 어떤 거 할래? 어떤 거 하고 싶어? 그때그때 달라요? 그때그때 다르다면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럼 뭐 그렇게 살아야지.

 

그리해도 모든 행동에는 쩨따나가 우선이 된다는 것은 이제 여러분들이 알 겁니다. 그럴 거 같으면 세상에서 살아가고 또 수행을 하고 또 좋은 행위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는 분명하죠! 조금 더 행복해지고, 또 조금 더 부처님 길을 따라가고, 그렇게 노력한 성과물로써 내가 설혹 죽고 나서 다음 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좀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거고, 안 그러면 당장 이생에서 내가 깨달음을 이루도록 할려고 할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할려면 조금 전 같이 도둑질할려는 의도를 내서는 안 되겠죠! 그건 오히려 지금 현제도 나쁜 상태로 이끌 뿐아니라, 다음에도 더 나쁜 상태로 이끌기 때문에 그렇다하는 겁니다. 그럴 거 같으면 그것도 의도에 인해서 일어나지는 겁니다. 법문 듣는 것도 의도에 의해서 일어나듯이. 그러면 우리는 당연하게 해야 되는 것이 좋은 쪽으로 쩨따나를 자꾸 계발시키는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목표는 인제 정해졌습니다. 쩨따나를 계발시키는 부분. 절대 아꾸살라 쩨따시까는 될 수 없다 하는 것! 그러면 어차피 여러분들은 꾸살라 쩨따나, 꾸살라 깜마를 쌓아갈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 가지를 얘기해놨죠? '신구의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열 가지 착한 행들' 이래놨습니다. 그럼 그걸 자꾸 닦아나갈 수밖에 없는 거라. 쩨따나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강화시켜 나갈려면 그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오늘 얼마만큼 꾸살라 쩨따나를 쌓은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대답) 수행, 맞습니다. 그것도 꾸살라 쩨따나죠. 그래도 어쨌든 아꾸살라 쩨따나 지은 사람들도 있죠? 그러면 앞으로는 그것을 안 짓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 밑에 한번 봅시다. 「마음에는 항상 「마음이 하나 일어났다 사라지면,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는 잠재력, 의지력과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손을 들면, 그대로 계속 올리든지, 멈추든지, 내리든지, 무엇인가 이어집니다. 어떤 것을 할 때 거기에는 「~을 하고자 함」이라고 하는 의지가 일어납니다.」

 

이 얘기는 뭡니까? 내가 꾸살라 쩨따나를 일으켰다 해가지고 그것이 연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언제든지 상황조건에 따라서 바뀔 수가 있다는 겁니다. 누가 손 올렸다 해가지고 그대로 가만히 있지는 못합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언제든지 이것은 바뀌어나가게 돼있는 것인데 그럼 이 바뀌어나가는 것도 쩨따나에 의해서 일어나진단 말입니다. 어차피. 그러면 내리든지 다시 올리든지 멈추든지 하는 것은 여러분들 의지력이라는 거라.

 

그러면 그 의지력을 쌓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그 의지력은 어디로 인해서 일어나집니까?

보통 색 성 향 미 촉 법(色聲香味觸法) 이렇게 얘기하죠! 여섯 가지로 인해서 다 일어나집니다.

루빠(rūpa) 물질적인 색(色), 이 몸, 대상입니다.

그다음에 삿다(sadda) 성(聲).

그다음에 간다(gandha 香) 냄새 맡는 것.

그다음에 맛-라사(rasa 味), 미(味) 그러죠.

그다음에 접촉-폿탑바(photthabba 觸) 신체적인 접촉, 정신적인 접촉은 빼고 신체적인 접촉.

그다음에 법(法) 담마(dhamma)라고 해서 생각·정신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 여섯 가지로 인해서 이 쩨따나는 일어나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하나씩 분리를 해보면 쩨따나가 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루빠를 예로 들어봅시다. 행위입니다. 물질적인 행위들, 내가 말을 했다든지 아니면 이렇게 손을 뻗었다든지 아니면 앉았다든지 하는 모든 행위들입니다. 행위들에는 항상 쩨따나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부처님이 '까야낭 쩨따나' 그렇게 얘기합니다. 신체적인 현상에는 항상 의지력이 일어나지게 돼 있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뭐가 있습니까? 말하는 것. 거기에도 꼭 같이 그런 의지력이 일어나게 돼 있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생각하는 것 정신적인 것 마노(māno), '마노 상 쩨따나 (mano sañ cetanā)'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의지력이 일어나는 것을 '뿌자나라 숫따'라고 하는 데에는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해놨습니다. 이렇게 의지력이라는 것은 항상 신구의 세 가지를 통해서 일어나진다. 사실은 신구의 세 가지만 잘 다스릴 것 같으면 큰 문제는 없어져버립니다.

 

몸에 대해서 일어나는 쩨따나에 대해서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몸 지 혼자서는 절대 독립적으로 뭘 할 수 있는 것은 없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떠난 신체는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못하다고 그럽니다. 그럼 어차피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결합을 해야만이 뭐든지 일어납니다. 그 마음이 일어나게끔 하는 것은 뭡니까? 쩨따나라는 겁니다.

 

말도 마찬가집니다. 말도 뭐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어야 만이 뭘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몸을 가지고 있고 또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말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 말도 어차피 쩨따나에 의해서 조정이 되어진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하죠! 법문할 때, 말을 할 때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데를 집중하라. 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슨 의지력으로 말을 하는 가를 관찰하라.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나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몸도 몸이 행하는 것은 어차피 마음으로 인해서 행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거는 돌이켜서 쩨따나로 인해서 몸으로 행하는 행위라는 거라. 그러면 행위를 할 때 내가 이 쩨따나를 잘 관찰을 해나갈 것 같으면 적어도 몸이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들을 방어를 해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정신적인 것, '마노 상 쩨따나' 그것도 마찬가지죠. 어떤 면에서는 생각이 이 세상을 다 만들어냅니다. 혼자 집을 지었다 뿌수고 하는 것도 요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런데 이 생각을 잘 다스릴 것 같으면 참 편한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말을 하고 신체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생각이 콘트롤 되나가야만이 가능해지는 부분입니다. 그럼 그 생각도 어차피 쩨따나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부분이라는 겁니다.

그럼 생각이 일어날 때 내가 무슨 생각이 일어나는가, 무슨 의도로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악의를 가진다든지 나쁜 생각을 가진다든지 하는 것들은 방어를 해나갑니다. 그럴 것 같으면 신구의를 다스리고 방어해내고 하는 것도 쩨따나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자! 그 밑에 한번 봅시다.

「어떤 것을 할 때 거기에는 「~을 하고자함」이라고 하는 의지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언제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심소로서의 쩨-따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쩨-따나-는 모든 마음에 일어나니까, 거대한 힘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옷 한 벌을 가지고 사는 바라문 부부가 있었습니다. 오늘 부처님한테 갈 때는 남편이 이 옷을 입고 가서 법문을 듣고, 또 다음에 갈 때는 부인이 이 옷을 입고 가서 법문을 듣고 이러거든. 어차피 옷이 한 벌이니까 둘이서 같이 갈 수는 없단 말이라. 그런데 이 남편이 부처님 법문을 듣다가, 그날 무슨 법문을 했는지는 경에는 내용이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참 환희심이 나거든. 그러니까 환희심이 나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뭐든지 부처님한테 해주고 싶다'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러죠! 누가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러면 뭐든지 해줄라고 그러죠! 아마 이 바라문도 똑같았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지가 줄 수 있는 것은 이 옷밖에 없거든. 그래서 궁리궁리를 합니다. 이거 주고 나면은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는데, 자기한테 아무것도 안 남는 거는 문제가 안 돼. 그런데 마누라까지 아무것도 없게 되니까 마누라가 부처님 법문을 들을려고 해도 그렇지를 못하게 되고, 그럼 우리의 마음들은 더 어지러워질 것이고 더러워질 것이고.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궁리궁리하다가, 초경이 지나고 이경이 지나고 삼경이 됐을 때 결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어찌 될 값에 나 이놈의 옷 부처님한테 줘버리겠다 하고 부처님한테 홀라당 바쳐버렸어. 그러면서 바치면서 뭐라 했느냐 “아! 참 잘했다!” “아! 참 잘했다!” 속이 시원하다는 거라. 고민고민하면서 했는데 마음을 갖다가 의도를 내어가지고 탁 줘버리고 나니까, 결정을 하고 나니까 참 잘했다는 거라.

 

“아, 참 잘했다.” 그 소리를 마침 빠세나디 왕이 와 있다가 딱 들은 거라. 누가 부처님한테 저런 소리를 하노? 알아보니까 이 바라문이 부처님한테 옷을 바치면서 그렇게 한 거라.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이고, 참 잘했습니다.” 내가 조금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내 옷 여벌 중에 한 벌 그 바라문한테 줘버립니다. 안 그러겠어요? 이 왕도 그렇게 해가지고 이 바라문한테 옷을 한 벌 줬거든.

 

그런데 이 바라문이 그걸 가져가지고 가버렸으면 아무 일도 없는데 그걸 또 부처님한테 올린 거라. 그러니까 왕이 이번엔 두 벌. 한 벌을 지가 입겠지. 두 벌을 줬는데도 또 이렇게 바쳐버리는 거라. 두 벌 다. 그럼 이제는 네 벌. 그래가지고 서른 두벌까지를 받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사 이 바라문이 ‘아, 그러면 나도 필요하니까’ 의도를 내서 한 벌은 내꺼, 한 벌은 내 마누라꺼, 나머지 서른 벌은 부처님한테 올리고, 상가에 올리는 거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가지고 이 바라문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왕이 생각하니까 참 기특하거든.

예를 들어봅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십 원을 가지고 있다. 그럼 그중에 내꺼 다 제해 놔놓고 나머지 요만큼만 줍니다. 그러죠? 그런데 이 바라문은 어떻게 된 게 지꺼는 하나도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주는 것만 생각하고, 그중에 혹시라도 걸치는 게 있으면 하나 가져갈려고 마음을 먹는 거라.

 

그거 참 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벨벳, 벨벳으로 된 아주 고급 천 두 개를 갖다가 이 바라문에게 내줍니다. 그런데 이 바라문이 그 두 개도 하나는 부처님 침상에다가 싹 깔아버리고 하나는 자기 집 앞에다가 딱 놔놓는 거라. 자기 집 앞에는 왜 놓느냐면 스님들이 탁발을 나왔을 때 거기 위에 올라서라고. 이 왕이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뵙고 침상 곁을 보니까 눈에 익은 벨벳이거든. 그때사 ‘아! 맞다. 이 바라문이 이것 조차도 보시를 했구나’ 해서 더 많은 보시를 하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의도를 내는 데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처음 마음을 먹었을 때, 이 바라문이 부처님한테 주고 싶다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고민고민 안 하고 부처님한테 탁 바로 줬을 거 같으면 더 큰 복이 있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초경, 이경이 지나고, 삼경 때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나마 그래도 요마만큼 복을 가지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지 복은 지가 쌓는 형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착한 의도라고 할 것 같으면, 바른 의도라고 할 것 같으면 의도를 내는 즉시 실천하라.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악한 것에 물들지 않는다. 아무리 바른 의도라고 하더라도 내가 의도를 내는 즉시 행하지 않을 것 같으면 다른 것이 침투한다. 나쁜 의도들이나 나쁜 행위들로 물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자야 만이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다음 세상에서도 행복해질 것이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의도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모든 것에 모든 마음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마만큼 이 쩨따나가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의도를 알아차려서 그것이 바른 것이다 할 것 같으면 즉시 해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고 미뤄버릴 것 같으면 그 의도는 또 다른 의도로써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알겠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그 밑에 부분은 다음 시간에 구분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