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phassa ( 팟사:접촉, 接觸 )(20070209)

담마마-마까 2020. 11. 2. 15:03

https://youtu.be/CI16QbNJI0Q

 

[[교재 부분

《 AÑÑASAMĀNA-CETASIKA : 동타심소(同他心所) 》

 

인간의 삶의 방법을 말하는 불교 심리학은 마음 기능의 선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이나 악의 입장에서 보면, 선도 악도 아닌 심소가 있습니다.

바로 안냐사마-나 쩨따시까, 이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다른 심소의 성질을 받아 선으로도 악으로도 되는 심소로써 이 동타심소는 13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정심과 연결되면 삿다 와도 같을 수 있고, 불선심과 연결되면 웃닷짜 와도 같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동타심소는 기본적인 마음의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동타심소는 모든 마음에 반드시 있는 최소한 필요로 하는 마음의 기능인 심소 7가지와 모든 마음에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닌 잡심소 6가지의 2종류로 크게 분류되고 있습니다.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심소, 즉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심소 7가지부터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심소 (삽바 찟따 사-다-라나 쩨-따시까) 7가지>

1. phassa ( 팟사:접촉 接觸 )

 

6가지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마음에 그 각각의 대상인 모양․소리․냄새․맛․접촉․법이라는 6가지가 부딪치는 것을 말합니다.

팟사는 접촉하는 것, 맞닿는 것입니다.

 

각각의 감각 기관에 닿는 대상은 각각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은 색깔과 형태라는 모양에만 접촉합니다. 밖에 있는 감각대상 전체는 아니고 그 아주 일부분인 모양만 접촉합니다. 보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도 필요합니다. 대상에 너무 가까워져도, 대상으로부터 너무 멀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정량의 빛도 필요하고, 빛의 종류나 본인의 시력에 의해서도 보이는 방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간의 눈은 자외선이나 적외선에는 접촉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귀는 소리, 코는 향기, 혀는 맛, 신체는 열이나 딱딱함, 뜻(마음)은 법(개념)으로, 한정된 조건아래에서 접촉합니다.

 

눈으로 무엇인가 대상을 볼 때는 반드시 마음(viññana:윈냐나:인식 작용)이 일어납니다. 눈(cakkhu)과 물질대상(rūpa)과 인식(viññāṇa) 이라는 3가지가 갖추어진 것에 팟사(phassa)라고 하는 심소가 생깁니다. 즉 마음이 대상을 알려고 하면 접촉이라는 연결고리로 인해 알게 됩니다. 「인식 작용」은 「살아 있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로 살아 있는 눈을 뜨면 무엇인가가 보인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순간순간 생멸 변화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마음이 발생하는 모든 순간에 반드시 무엇인가의 대상과 접촉을 취하고 있습니다.

 

6개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정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모양과 소리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또, 그러한 정보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계속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모양도 빛으로 흘러 와 눈에 부딪칩니다. 소리도 물결로서 흘러오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맛도, 신체에 닿는 것도, 같습니다. 「고정된 실체가 감각기관에 닿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으로, 접촉하는 것은 계속 흐르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불멸의 영혼」등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개의 채널에 여섯 종류의 데이터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지만, 오관(안이비설신)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인식할 뿐이지만, 다양한 번뇌와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6번째의 뜻(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은 「있는 것」에도 「없는 것」에도 접촉합니다.

 

우리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 모든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 나」 「당신」 「동물」 「집」 「오늘」 「어제」 「내일」등등, 그것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디에 실재하는 것일까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울거나 싸움하거나 기뻐하거나 좋아하게 되거나 싫게 되거나 하고 있는 것은, 마음속에서 만들고 있는 환상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있다」라고 착각하여 분노나 욕구로 많은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머릿속에서 만든 환상을 「좋아한다」 「싫다」라고 자꾸 부풀려, 매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실은 「감정의 메아리」에 접촉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알기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면, 팟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소리」를 느끼면 거기에 팟사가 있었습니다. 잘 마음 집중할 수 있었다면, 거대한 팟사가 나와 부딪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접촉한다」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인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위빳사나에서는 팟사를 매우 중요한 마음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 phassa (팟사:접촉, 接觸) (20070209)

 

오늘은 안냐사마나 쩨따시까(Aññasamāna cetasika, 동타심소) 부분입니다.

아비담마에는 쩨따시까 부분할 때 이 부분이 맨 앞에 나옵니다.

그런데 왜 스님이 설명하는 방식이 이게 맨 뒤에 갔느냐 하면 여러분들 이해를 조금 편하게 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앞에 한 것은 꾸살라든 아꾸살라든 소바나든 어떤 것이든 그런 것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돼야 만이 사실은 지금 할려고 하는 쩨따시까를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뭐가 나쁜 것인지 뭐가 좋은 것인지 청정심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면,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좀 힘이 듭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이 부분은 수행하고 아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쩨따시까 부분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좀 단단히 차리고 들어야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필요 없는 부분들은 프린트물로 대체를 합니다. 그거 짧은 시간에 다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냐사마나 쩨따시까 읽어보시면 압니다.

 

그중에 팟사(phassa) 부분부터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쩨따시까(cetasika)는 자기 혼자 일어날 수 있습니까? 못 일어나죠. 절대 혼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찟따(citta)가 동반이 돼야 만이 일어나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찟따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팟사도 꼭 마찬가집니다, 찟따가 일어날려고 할 거 같으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 일곱 가지입니다. 그래서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심소'다 하고 풀이들을 해놓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반드시 마음과 같이 함께 일어나는 쩨따시까(심소)라는 그런 뜻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니까 이 쩨따시까를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만 하더라도 수행에서는 큰 진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마만큼 지금 설명하는 이 부분들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팟사(phassa) 부분 보겠습니다.

팟사, '접촉' 하면 보통 어떤 게 떠오릅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손바닥 두 개 탁 마주쳤다. 이걸 팟사라고 합니까? 그러면 손을 갖다가 다른 사람 손에 비비적거리는 것도 접촉이겠네? (예!)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착각하는 부분들입니다. 이 쩨따시까에서 나오는 팟사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접촉이 아니고, 나중에 뒤에 설명할 웨다나(vedanā) 부분에 들어가집니다. 느낌 부분에 들어가지는 부분인데, 여기서 말하는 접촉은 여기 한번 읽어보십시오.

 

'감각기관에 대해서 대상이 부딪치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줄여서 육체적인, 물질적인 접촉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 대상과 만나는 것! 접촉하는 것, 부딪치는 것을 팟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것으로 부딪치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 부분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인식을 해야 됩니다. 신체의 접촉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소리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어쨌든 파동이니까.

그러면 그것이 몸에 와서 부딪치는 것을 팟사라고 합니까? (예!)

조금 전에 그건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또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그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파동이 와서 귀에 부딪치기 때문에 하나의 접촉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접촉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의식! 이것 세 가지가 합해졌을 때가 팟사 입니다.

 

물질적인 것 루빠(rūpa) 두 개가 부딪치는 것은 팟사의 영역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또한 수행에서 알아차릴 영역에도 들어가질 않습니다. 마음이 대상에 부딪치게 하는 기능, 그런 것들이 바로 팟사 부분이다 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그래서 팟사를 경전에서는 뭐라고 해놨느냐면 '정신적으로 만지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물질이 서로 만지듯이 닿듯이 정신적으로 만지는 것이고, 또 이렇게 연락하는 것, 또 컴퓨터로 치면 우리 홈페이지를 어디에다 링크 걸어놨다고 할 때의 그 링크 걸어 놓는 것 같은 그런 형식을 취하는 것이 바로 팟사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것들이 팟사의 영역에 들어가는가?

깡패 두 사람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많으면 별 문제가 안 되는데 나혼자 있다. 깡패들은 막 싸움박질하는데 벌벌벌벌 떨겠죠? 왜 떱니까? 깡패가 나를 직접 때리지도 않았고 욕하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떤단 말이라.

그런 것들이 팟사 라는 겁니다. 정신적인 영역이 눈에 보이는 대상과 만나졌을 때, 눈을 통해서 그 대상이 들어왔을 때 마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이것이 팟사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것을 도와주는 영역이 뭐냐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 왓투(vatthu, 마음이 생겨나는 장소) 라고 그러죠! 왓투라고 하는 것하고, 밖에 여섯 가지 감각대상들 소리든지 냄새든지 맛이든지 하는 여섯 가지 대상들 드와라(dvāra, ) 라고 하는 것들, 그 물질적인 것들이 이 찟따라고 하는 것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들을 하는 형태들을 취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몸의 감각기관하고 밖에서의 그 감각대상들은 분명하게 차이가 나죠? 그래서 보통 경전에 '안과 밖이다'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안팎으로 관찰하라' 하는 것은 '안과 밖을 갖다가 마음으로 의식하라' 하는 뜻으로 풀이들을 합니다.

 

어쨌든 분명하게 자기 영역이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귀는 결코 소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소리 또한 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소리가 눈을 통해서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틀림없죠? 각각의 감각기관은 각각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따로 되어있습니다. 귀는 소리만 들을 수 있고, 눈은 보여지는 대상만 볼 수가 있는 것이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각각의 감각기관에 따라서 생겨나는 의식도 따로따로 일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크게 구분하면 이렇게 여섯 가지로 나눠집니다. 인제는 대충 팟사라고 하는 것이 어떤 내용이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좀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팟사라고 하는 것은 '접촉'이라고 풀이들을 합니다. 촉(觸)이라고.

(수행자 질문)

뭔가 안다고 하는 것은 이 팟사가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그리고 뭘 느낀다, 지각한다, 내가 의도를 낸다 하는 이런 것들도 꼭 마찬가지로 팟사가 기본적인 조건이 돼야 만이 그다음 단계가 일어나질 수가 있는 겁니다. 팟사가 없으면 어떤 의미로는 죽은 시체와 마찬가지라. 아무것도 못하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이 팟사를 뭐라고 했느냐면 '궁전에 세워진 대들보-기둥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른 것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마만큼 팟사가 굉장히 영향을 많이 미칠 뿐 아니라, 팟사를 명확하게 이해를 할 거 같으면 다른 부분들, 갈애가 일어나는 것들을 미연에 차단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지금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스님이 얘기하고 있는 것 다 들을 수 있습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내용이 어려운 것보다는 이해는 하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미 개념이 생겨난 상태가 됩니다. 이해를 한다는 것 자체는 개념이 형성되지 않으면 완전하게 그 내용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팟사만 있을 경우에는 말소리만 들립니다. 예를 들면. 그냥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이 지가 마무리해서 다시 또 일어나지고 일어나지고 하는 순간순간으로만 접해오기 때문에, 스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모릅니다. 팟사만 있을 경우에는.

 

대상을 볼 때 뭐라고 그럽니까? 볼 때는 보는 것만 알아차려라. 들을 때는 듣는 것만 알아차려라 그러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팟사에서 의식을 중단하는 습관들을 가져라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이러면 대충 팟사의 중요성을 알겠습니까?

 

(수행자 질문)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프린트물을 내줄 때, 운전할 때는 운전하는 것만 관찰하라고 그랬지, 뭐 인식하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해서 전향의식이 넘어오고 하는 그런 것으로 발전시키지 말아라고 그랬거든. 사고 나기 쉽다고! 관찰을 그렇게 해야 될 때가 있고,

그것을 되돌아봐가지고 '아, 이게 무엇이구나' 하고 회상하고 그다음에 완전하게 인식하는 단계가 있고 분명하게 다릅니다. 수행에서는!

그런데 통상적으로 관찰해나갈 때는 전자의 입장을 따르면 큰 무리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이미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경험을 통해서 축적돼있는 상태입니다. 이거 하면 이게 뭔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이렇게 말하면 '아, 저 소리는 스님 소리다' 하는 소리를 이미 다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개념을 이미 다 형성을 하고 있는 상태라.

예를 들어서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 과일을 이렇게 툭 갖다 놨다. 이게 뭔지도 모르고 과일인지도 모르고 무슨 맛인지도 모를 것 같으면 이거 먹을려고 하겠습니까? 대부분 먹으려고 안 합니다. 호기심이 생기는 사람이야 먹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것에 대해서 먹을려고 하는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는 그런 것들보다는 경험으로 축적되고 있는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거라. 그래서 이런 것들은 아예 수행대상에서 제외돼 버리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리는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나마와 루빠만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그것이 가장 현명하게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공부를 해나가다가 나중에 부분에서는 회상하는 의식들이 나타나지기도 하고 또 계발시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일단은 무조건 나마와 루빠부터, 두 가지만 있다는 사실만 알아차려나가면 큰 무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수행자 질문)

그래서 지금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빤냣띠(paññatti)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개념이 형성되지 않으면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외국 과일을 예로 드는 거라. 이것을 먹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거거든.

그러니까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지금 완전하게 수행이 진척이 안 됐을 때는 지금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법문 듣는 것으로 인해서 관찰하고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라.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작용을 해서 다음에 수행을 해나갈 때 더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개념을 가지는 것뿐입니다. 여기에 집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집착하니까 어떻게 돼? 와서 수행은 안 할라 그러고 법문만 들을라고 그러는 거라.

 

(수행자 질문)

아닙니다. 팟사가 먼저 일어나지고 개념이 일어나집니다. 반드시 팟사가 먼저 일어나집니다. 개념은 그 먼 뒤에 일입니다. 그 부분은 조금 있다가 스님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수행자 질문)

눈은 오로지 보는 역할만 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듣는 것은 듣는 역할만 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은 할 수 없다는 거라.

그렇게 따질 것 같으면 그렇게만 관찰을 해나가면 듣는 것에 대해서는 이게 스님의 목소리다, 아니면 누구의 목소리다, 남자다, 여자다 구분을 할 수 있는 이치가 전혀 없어져 버립니다. 그렇죠?

또한 듣고 있을 때는 그것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할 것 같으면 다른 대상들은 전부 다 사라져버립니다. 아주 명확한 이치입니다.

그마만큼 팟사가 수행에서는 중요한 역할들을 한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하죠? 어떻게 합니까?

 

소리를 예로 들어봅시다. 소리가 있다.

청각을 통해서 소리를 들으면 '소리들린다'는 의식이 생겨난단 말이라.

의식이 생겨나면 어떻게 합니까?

어쨌든 이 세 가지로 인해서 접촉이 일어났단 말입니다.

접촉이 일어나면 접촉을 조건으로 십이연기가 어떻게 됩니까?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나지죠? 그 느낌이 일어나지면 지각하게 되고, 또 지각으로 인해서 사유하게 되고, 사유한 것에 인해서 망상을 일으키고, 망상을 일으킨 것을 토대로 중구난방으로 인제 넘어가집니다.

 

과거부터 과거에 뭐 어쩌고 저쩌고부터 해가지고, 미래에 뭐 어쩌고 저쩌고, 시간적인 것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고, 또 공간적인 것들도 여기 있다가도 마음먹으면 저기 서울도 올라가집니다. 또 어떻게 됩니까? 나, 너, 여자, 남자, 존재에 대한 것들 이렇게 쫙 퍼져나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면밀하게 하는 사람들은 '팟사 부분에서 끝내라' 하고 그럽니다. 그게 안 되면 나중에 '느낌 부분에서 끝내라!' 느낌까지는 그래도 빤냣띠가 형성이 안 돼! 그런데 그거 딱 넘어가면 인제는 상카라(saṅkhāra)로 넘어가져버리는 거라.

 

자! 밑에 한번 보십시오. 팟사는 접촉하는 것, 맞닿는 것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눈은 색깔과 형태라는 모양에만 접촉하고 밖에 있는 감각대상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분 눈이면 눈의 대상에만 접촉을 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단편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남자들은 면도를 거울 보고 합니다. 만약에 내가 면도하는 부분만 관찰 안하고 얼굴 전체를 관찰하고 면도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면도하면서 음악소리 들리면 음악소리 들리는데 마음을 집중하다보면 베어버립니다. 그래서 대부분 보면 면도할 때 어떻게 보입니까? 여러분들이 집중 안 할려고 하더라도 면도하는 부분만 거의 보입니다. 다른 부분은 거의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인제 이해를 하겠습니까? 각각의 대상은 각각의 현상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인 거라. 단지 우리가 그걸 착각하는 것뿐이라.

 

밑으로 좀 내려가 봅시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정보는 완전히 다르다.」 하는 거하고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영원불멸의 영혼'이라고 인식하고 자꾸 문제를 만들어나간다」 고 하는 것입니다.

쭉 읽어보면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마지막 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면 팟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소리가 귀에 들려올 때 소리를 느끼는데 팟사가 있다.

어떻게 됩니까?

와 들리는 대상인 소리(rūpa)가 부딪칠 때 이식(耳識)이 생겨납니다.

그렇죠? 이 이식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거 같으면 수행을 좀 잘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하죠? 대부분 이식이 일어나면 이식이 일어난 만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보통 수행을 할 때는 이 '이식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라'고 그럽니다. '마음을 마음으로 알아차려라'고 얘기합니다.

 

마음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니까 어떻게 돼요? 먼저 일어났던 이식은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이 이식에 들어가지는 게 아니고,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전환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 이식 부분은 급히 일어났다가 급히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연결이 돼나가고, 또 그래서 들리면 '들림' '들림' 하면서 알아차려 나가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명칭을 붙여도 되지만 명칭을 붙이지 않고 그냥 들리는 현상에만 알아차림 할 거 같으면, 들린다는 이식 자체를 알아차리면, 들리는 실제적인 이식 자체는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들림'이라는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원인·결과로써만 계속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렇게 되면 이 이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접촉, 세 가지가 접촉하죠?

, 소리, 이식 세 가지가 접촉하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이렇게 알아차리면 이렇게 급격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거라. 아주 찰나 간에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이 고(苦)구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구나 하는 사실을 아는 거라.

그렇게만 관찰해나가면 큰 무리는 없어지는데, 그런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느낌으로 발전돼나간다는 겁니다.

 

자!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잘 마음집중 할 수 있었다면 거대한 팟사가 나와 부딪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안에 있는 여섯 가지 문을 통해서 밖에 있는 여섯 가지 대상이 부딪침으로 인해서 일어나집니다, 마음은. 그게 의문(意門)이든 아니면 이문(耳門)이든 여섯 가지 마음은 부딪침이 없으면 일어나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소리가 귀를 통해서 들어와져서 의식의 흐름으로 일단 들어와지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왕가라고 하는 것은 잠재해버립니다.

 

바왕가(bhavaṅga, 有分心)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의식이 생겨나버리면 수면 아래로 잠재해 버립니다. 바왕가가 없으면 살아있지 못하죠! 그렇지만은 잠재해버린다는 거라. 그 자리를 다른 의식에 내어줘버리는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흐름으로 딱 들어가 버리면 이 바왕가가 잠재하고 그 대신에 소리를 인식하는 이식(耳識)이 생겨나버립니다. 그래서 새로운 접촉이 그 속에서 태어나집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봅시다. 소리가 들렸다. 그럼 보통 어떻게 합니까? '이 소리가 뭔 소리지?' 하고 생각을 하죠? 한번 듣고 모르면 두 번째 들리면 '아! 이 소리가 스님의 소리지' 하고 나중에는 인식을 하는 과정이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 소리에 대해서 '아, 참 좋은 소리구나' '나쁜 소리구나' 이렇게 발전이 돼나갑니다.

 

마음도 꼭 그와 마찬가지로 순차적으로 발전을 해나갑니다. 이식이 생겨난 것은 소리가 그냥 와닿은 것뿐입니다. 닿아서 마음이 발동을 한 겁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냥 부딪친 겁니다. 물질적인 대상이 마음에 와서 부딪친 겁니다. 아! 그것은 틀렸습니다. 물질적인 대상에 마음이 가서 부딪친 겁니다. 부딪친 것뿐입니다. 거기에서 인식하는 것이 생겨난 것뿐입니다.(耳識, 五門引轉心)

 

이식(耳識)이 생겨나고 나면 그다음엔 반드시 이 이식이 뭔가? 내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조사하는 의식(領受心)이 반드시 생겨나집니다.

그 조사하는 의식도 찰나 간에 사라집니다. 조사하는 의식도 이식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지는 겁니다. 이식이 없으면 조사하는 의식이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그럼 조사하는 의식도 조사하는 의식에 따라서 '아! 이것은 무엇이다' 하고 결정하는 의식(推度心)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결정하는 의식도 마찬가지로 조사하는 의식으로 인해서 일어나지게 됩니다.

 

결정하는 의식이 생기고 나면 인제 마음으로 '아! 이것은 무엇이다' 하고 확인하고 등록하는 의식(確定心, 意門引轉心)으로 바뀌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등록하는 의식이 생겨나니까 어떻게 돼요? 이걸 보통 우리는 뭐라고 그럽니까?

 

이제 완전하게 인식했다(viññāṇa, ) 그럽니다. '아! 이것은 무엇이지' 하고 말하게 되는 거라.

 

이렇게 이식(耳識)하고 인식(viññāṇa, 識)하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좀 납니다.

똑같은 윈냐나(viññāṇa, 識)라는 단어를 쓰지만 이렇게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순차적으로 오는 것이지만 찰나 간에 확 지나가기 때문에 이 과정들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냥 들리면 다 그냥 인식하는구나 하고 판단하는 것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뭐가 있어가지고 이렇게 발전하고, 이렇게 발전하고 하는 것은 전혀 없다는 거라. 아마 이번 주 일요일날 이 바왕가(bhavaṅga, 有分心) 하고 자와나(javana, 速行心) 부분에 대한 얘기가 들어가질 겁니다.

 

어쨌든 마음으로 그렇게 등록을 하고 나면 등록한 것에 따라서 어떻게 됩니까? 마음은 상카라(saṅkhāra)를 일으킵니다.

여기부터가 인제 문제인 거라.

상카라가 안 일어나야 이놈의 윤회를 멈출낀데 상카라가 일어나버리거든. 그래서 마음에서 취하고자 하는 욕망이든지 배타하고 싶은 마음이든지 이런 것들이 생겨나니까 상카라가 일어나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 상카라로 인해서 어떻게 됩니까? 윤회를 하게 되는 형태를 띠게 되는 거라.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 말할 때는 말하기만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까지 얘기를 하고 나면 "수행할 때 어떻게 수행해야 되겠다" 하는 것들이 대충 떠오릅니다. 두 가지뿐입니다.

수행의 대상은! 듣는 놈하고 들리는 것하고 두 가지뿐이라는 거라. 이것만 체험해버리면 게임은 끝나버립니다. 물질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 두 가지!

 

그래서 수행을 할 때 포인트는 어떻게 잡으라고 그럽니까?

 

먼저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맨 처음 하는 게 뭐라 그럽니까? '나마와 루빠를 분리하라'고 그럽니다. '아!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고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그거 분리 안 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뒤섞여버리면 수행 안은 되게 돼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의 맨 처음 포인트는, 바른길로 들어섰다고 하는 포인트를 잡는 것이 나마와 루빠를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돼는 것들이라.

들리는 것하고 듣는 것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나마와 루빠는 다릅니다. 그래서 듣는 것-의식 자체도 조건 따라서 일어났다가 앞에 의식이 사라지고 그다음 의식이 또 생겨나고 이렇게 조금씩 자꾸 생겨나지는 거고, 물질적인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물질적인 것도 그렇게 조건 따라서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서 사라집니다. 계속적으로.

 

그러니 수행에서는 맨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물질과 비물질을 구분하는 것들이라.

그리고 조금 더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이 잘 될 것 같으면 '이식에서 그냥 스톱을 시켜버려라'는 거라. 의식을 갖다가. 스톱해버릴 것 같으면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다는 거라.

그것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상카라 이전에 느낌에서 끝내버려라.' 그래야만 적어도 상카라-업을 짓는 행위들은 발생을 하지 않게끔 된다 하는 거라.

가장 수행의 포인트는 두 가지 수행의 대상을 분리하도록 하라 하는 거라.

 

(수행자 질문)

그렇죠. 그런데 일단 와 닿아버리면 이미 물질적인 것하고 정신적인 것하고 섞여버리는 형태가 돼버립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은 이미 그런 느낌이 탁 그냥 오면 느낌이 바로 와집니다. 느낌이 바로 와질 뿐만아니라 바로 또 욕망까지 바로 넘어가져버립니다. 그런데 수행을 자꾸 하다 보면 자꾸 더 세분화돼 나갑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거라. 지금은 거의 보면 안됩니다. 그래서 자꾸 분리를 시키는 훈련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물질과 비물질을.

(수행자 질문)

그것인데 여러분은 아직은 안될 거라. 그리하더라도 자꾸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물질과 비물질에 대해서 삼법인을 자꾸 통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떤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갖다가 자꾸 캐치를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의식의 흐름도 지금 여러 개로 자꾸 분리를 해주고 물질적인 것도 분리를 해주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지금은 단순히 듣는 것으로만 아마 만족을 해야 될 겁니다. 그러더라도 그런 과정을 반드시 겪게 돼있습니다.

 

왜 그러면 이렇게 접촉하는 중간에 일어나는 의식을 관찰하라고 할까?

만약에 접촉을 하고 나서 발전을 안 하면 별로 이런 거 관찰할 필요도 없겠죠? 대부분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연속적으로 일어나서 번뇌가 일어나집니다. 그러면 수행의 목적은 그 번뇌를 갖다가 끊어버리고 없애버리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이 이 팟사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거라.

 

뽓틸라,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어떻게 수행했습니까? 일곱 살짜리 사미한테 수행지도 받을 때 사미가 뭐라고 했어요? 오소리를 잡을 때처럼 나머지 문 다 막아버리고 의문 마음의 문만 열어놓고 고놈의 오소리가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를 관찰하듯이 하라고 그렇게 했거든. 오소리는 굴이 여러 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면 한 굴에다 연기를 피워놔 놓고 다른 굴의 구멍들은 다 막아버리면 오소리 지가 매워가지고 그 굴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오소리를 잡듯이 마찬가지로 수행도 나머지 문들을 다 이렇게 막아버려야 되는 거라. 막혀줄 수밖에 없죠. 대상에 일치시킬 것 같으면 다른 것은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자연히 막혀지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의 문만 열어놔라" 마음의 문만! 쉽게 말하면 "팟사를 명확하게 관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일곱 살짜리 사미가 가르쳐주는 수행법이.

 

난다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자기 결혼식장에서 부처님이 바리때 들려가지고 졸졸졸 따라오게 해서 출가를 하게 되죠?

부처님이 자나빠따 깔르야니가 예쁘냐 이 처녀들이 예쁘냐 하니까 이 처녀들이 예쁘다 하니까 그러면 니가 수행 잘하면 내가 이 처녀들을 상으로 줄게. 난다가 이래가지고 수행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 그리고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들을 알아차린 거라. 그래서 대상에, 그 소리에만, 다른 건 다 막아버리고 소리에만 마음을 관찰하다 보니까 깨달아버리는 거라.

수행은 아주 단순한 부분입니다. 단지 순간적으로 훅 지나가기 때문에 못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뭐라 그럽니까? 빛의 파동의 열일곱 배나 빠르다. 실제로 열일곱 배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찰나적으로 진행돼나갑니다. 그마만큼 마음은 진행속도가 빠릅니다.

 

어쨌든 팟사는 인제 여러분들이 개념정리가 됐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다른 후회들을 하지 않고 '아! 나도 언젠가는 팟사가 뭔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려봐야지' 하는 마음들을 내야 됩니다. 간단합니다. 행위가 시작되는 첫 부분을 알려고 하면 됩니다. 팟사는 맨 처음에 일어나집니다. 그 부분을 자꾸 알려고 하다 보면 팟사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웨다나(vedanā) 부분을 하겠습니다. 팟사 못지않게 웨다나는 더 중요한 역할들을 해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