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빤닌드리야 (paññindriya, 지혜의 기능, 慧根)-전반부(20070127)

담마마-마까 2020. 10. 5. 18:20

https://youtu.be/Hrl4KgPBPYc

[[ 교재 부분

《 지혜의 기능을 하는 심소 : 혜근심소(慧根心所 paññindriya cetasika)(빤닌드리야 쩨-따시까)1가지 》

 

25. 빤닌드리야(paññindriya : 지혜의 기능)

불교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빤냐-(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란 무상·고·무아·업과 인연의 법칙 등의 진리를 올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즉, 지혜의 기능은 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청정심소입니다.

지혜는 진짜 자연적인 성품을 이해할 때에 생겨나서 그로인해 무지(amoha, 아모-하)를 극복하는 것이므로, 무지를 제어하는 능력인 지혜의 능력, 빤냐- 인드리야(Paññā Indriya)라고 이름이 붙여집니다. 모든 것이 영구적으로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밖에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는 무상의 진리를 이해하여, 그런 체험을 실천하는 방법은 지혜를 발달시키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상냥하고 자애로운 것이 좋은 것이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길러 주어야만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좋은 일을 실천해도 「이것은 이 순간만의 일이다, 모든 것은 곧바로 사라져 간다.」라고 하는 무상의 방향으로 생각하면, 지혜가 일어납니다. 사람에게 상냥하고 자애롭다고 해도, 그 사람을 영구적으로 살려 준 것은 아니고, 자신이 영구적인 무엇인가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저녁식사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사람이 기뻐했다고 해서, 볼 때마다 그 사람에게 「 나는 당신을 옛날에 기쁘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만족합니까?」라고 계속 말하는 것은 이상할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의 행동은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확실하게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없습니다. 비록 큰돈을 보시해도 그 뿌리가 무지하면, 몇 안 되는 선한 결과로 끝나 버립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확실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끔 지혜는 일어납니다. 「세상은 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기능은 좀처럼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대단히 넓고 깊게 뿌리가 뻗은 무지라고 하는 거대한 나무가 있어서 지혜의 뿌리는 여간 노력해선 안 됩니다. 우선 무지의 나무 곁에 지혜의 나무 씨앗을 심읍시다. 씨앗을 심어도 무지란 큰 나무의 곁이니까 일조량도 나쁘고 자라기 어려워서 좀처럼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쭉 지켜보고 해가 비치도록 해 주거나 물을 주거나 다양하게 거름을 주어봅시다. 그렇게 하면 싹이 나오고 조금씩 뿌리를 내려갑니다.

 

지혜의 나무는 많은 청정심소가 있기 때문에 강력합니다. 무지의 나무는 크지만 지혜의 나무보다 약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어느 정도 커지면, 무지의 나무는 넘어져 버립니다. 그 대신에 지혜의 뿌리가 제대로 정착합니다. 그처럼 지혜로 무지를 쫓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무지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지의 큰 나무도 머지않아 약해지고 죽어 버립니다.

모든 것은 아주 대단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머리만으로 이해하면 마음속으로 「모든 것은 항상 있는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마음의 파동은 너무 빠릅니다.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다」라고 생각됩니다. 「영혼이 있다」 「내가 있다」 등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은 마음이 너무 무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인간의 마음도, 모든 현상도, 흐르고 있는 강과 같이 순간순간 계속 변화하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빤닌드리야는 그런 것이 머리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의한 체험으로 확실히 이해하는 것에 의해 생깁니다.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자연적 성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바른 집중으로 꿰뚫는 특징을 가집니다.

(Yathā sabhāva paṭivedho va akkhalita paṭivedho : 야타- 사바-와 빠띠웨-도- 와 악칼리따 빠띠웨-도-).

아비담마에선 빤냐-(지혜)가 아모-하(어리석지 않음), 냐-나(지혜, 통찰)와 상응합니다. 이 Paññā는 āmoha와 ñāna에 의해 3가지 도덕적 뿌리의 어느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빤냐-는 신통력의 하나(Iddhipada : 잇디빠다)로 가장하기도 하므로 선법이 일어나도록 허물이 없는 능숙함만이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지금 살아있는 동안 수행을 하여야 하고 가르침을 마주하는 동안 담마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 빤닌드리야 (paññindriya, 지혜의 기능, 慧根)-전반부 (20070127)

 

자! 시작해 봅시다. 빤냐인드리야(paññā indriya)

반야(般若) 많이 들어 본 거죠? 아마 불교인들 치고 반야 모르면 간첩이지. 우리말로 지혜인데, 그러면 지혜가 과연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우리가 소리를 많이 듣느냐 하는 거라.

 

'지혜의 등불을 켜자' 하고 얘기들 하죠? 지혜가 과연 무엇이기에 그렇게 불을 켜듯이 등불을 켜야 되는가 하는 거라. 불은 어두운 걸 몰아내기 위해서 불을 켭니다. 지혜를 등불로 비유를 해놓은 것도 꼭 마찬가지로 그런 어두운 것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등불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할 거란 말입니다.

 

뭐가 어두운 것이라는 뜻입니까? '무명, 어리석음을 몰아내자'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삼모하(sammoha)-미혹한 것! 쉽게 말하면 착각하는 거지. 그게 진짠 줄 알고 착각하는 것들도 이런 지혜로써 '아, 이게 진짜가 아니구나' 하는 걸 알아서 그것을 몰아내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라는 단어를 쓰고 그마만큼 우리들도 많이 듣고 있는 겁니다.

 

경전에는 일례를 들어놓은 것이 뭐냐하면, 어느 남자가 여자의 집안의 부유로움이 탐이 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집안에 재산들을 졸금졸금 다 빼먹고 나니까 마지막에 남은 게 이 패물이란 말이라. 몸에 치장하는 패물. 그래서 저 패물까지도 뺏어야 되겠다 싶어서 여자를 죽일 생각으로 산꼭대기로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여자를 죽이기 전에 그럽니다.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게 된 것은 사실은 당신이 좋아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나는 물건들이 필요해서 당신하고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 당신 재산 내가 다 빼먹었고, 그러니까 이제 남은 것은 당신 몸에 찬 패물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패물 나한테 주고 내가 당신을 죽이면 된다.

하고 하니까 이 여자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 그럴 것 같으면 진작 얘기했으면 내가 여기까지 안 올라와도 그냥 줘버렸을 건데 참 당신이 어리석소. 하면서 그러면 내가 마지막 죽기 전에 실컷 원 없이 내 낭군님에게 절이라도 하고 나서 내가 죽겠습니다. 하면서 패물을 옆에 놔두고 낭군님한테 절을 하는 척합니다. 절을 하는 척하면서 그 남편을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퍽 떨어질 거 아니라.

 

그 소리를 듣고 주위에 있는 신들이 "참 지혜롭게 잘 처신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걸 불교에서 지혜를 남용하는 결과로써 비유를 들어놓은 겁니다.

지혜롭습니까? 지혜로운 겁니까? 뭔가 조금 미심쩍죠? 그런 것들은 지혜라고 안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단 남편을 속였거든. 자기가 살려고. 속으로는 생각을 이 남편을 밀어뜨려가지고 저 낭떠러지로 보내야지 하는 생각 떄문에 절을 한 거니까 속인 거란 말이라. 일차적으로는 속인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든 것은 뭐냐하면 내가 살고 싶은 욕망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원망들이 같이 겸해지는 거죠. 그런 상태에서 남편을 밀어버리는 것은 뭡니까? 내가 화내는 마음이 없으면 밀지 못하죠? 그러니까 화내는 마음들도 있게 되는 거고,

물론 그 남편이 지은 업은 자기 남편이 받게 돼있는 겁니다. 받게 돼있는 건데 그 여자 입장으로 봤을 때는 스스로는 지혜라는 이름을 빌린 것뿐인 것이지 탐심이나 진심은 그대로 내버린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부처님이 "가짜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만약에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른 것은 일단 다 그만두고라도 속아서 결혼했든 어쨌든 간에 어쨌든 그렇게 해가지고 마지막 절벽 위에까지 올라왔다, 남편이 그런 얘기를 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지혜롭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겠습니까?

(수행자 대답)

남편을 설득시킨다, 그것도 하나의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걸 보통 말로서 하는 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들으면서 하는 지혜, 그걸 문지혜 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그것도 하나의 지혜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뭔 방법이 있겠습니까?

(수행자 대답)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하자고? 그럼 죽는데?

사실은 그렇게 막바지에 이르고나니까 별다른 생각들이 안 떠오르죠? 나쁜 생각으로만 바뀌게 되죠?

(수행자 대답)

뭐라고 질문을 해? 자기를 죽일려고 하고 있는데 뭔 질문을 해?

(수행자 대답)

이미 죽일려고까지 작정을 하고 왔는데 그말이 먹히겠어요? 물론 설득하는 방법도 있겠고,

(수행자 대답)

안 그러면 자기가 스스로 패물 다빼서 줘버리고 스스로 떨어져 죽어버리면 적어도 남편이 짓는 업은 방어를 하겠지. 그럼 그렇게 할까?

(수행자 대답)

이게 왜그러냐 하면 이렇게 문제가 꼬여져버리고나면 참 풀기가 힘이듭니다.

그래서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문제가 꼬이지 않게 만드는게 지혜롭다고 그러는 겁니다. 마지막까지 왔을 때는 도저히 안 풀리죠? 뭐가 꼬여도 꼬이게 돼있는 거라. 이게 안되는 거라. 그러기 전에 우리가 조금 더 지혜롭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결과가 오기 전에 미연에 방지를 해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 지혜를 알아차림이든 어쨌든 빤냐인드리야paññindriya) 라고 그럽니다. '지혜를 강화시켜주는 기능'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청정심소에 놓어놓고 "자기가 스스로 계발하도록 해야 된다" 하고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마지막에 가서 번쩍 지혜가 떠오를 것 같으면 이거 뭐 할 필요가 없지. 뭐하러 쎄빠지게 이걸 계발시켜 나갈 거라? 안 되는 거거든. 막바지에 와서는. 그래서 지혜라는 것들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그것들을 계발시키도록 노력들을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그런데 만약에 지금 막바지에 와있는 사람은 또 어떻게 할 거라? 만약에 그런 결과는 아니라도 생활적인 문제든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서 막바지에 와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른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지나온 시간은 지나온 시간일 뿐이라.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계발시켜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참 우리가 얻기가 힘이 듭니다. 그마만큼 일반적인 접근으로는 어려운 현실을 감지해내기가 어려운 겁니다.

마음이 집중되고 평온해지고 청정해지면서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지혜가 일어난다고 그럽니다. 개인의 수준에 관계없이! 그 사람이 학력이 어떻든 부가 어떻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일단 마음이 집중되고 평온해지고 청정해지면, 그리고 마음이 대상을 자꾸 알아차려나가면 지혜가 일어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등불'이라는 개념을 쓰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면 '내가 나아갈 방향을 그때부터 다시 잡아나간다'고 하는 뜻입니다.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지났으니까 안되는 거라. 그거는 일단 다 놓아버리십시오. 다 놓아버리고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지혜롭게 될 것이냐, 지혜를 계발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서 그걸 자꾸 계발시켜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또 아비담마를 배우는 그런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여러분들에게 세속적인 지혜는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모르니까. 또한 부처님도 가르치지도 않은 거고. 그러면 스님이 여러분들에게 줄 수 있는 지혜롭게 되는 방법들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경전을 통해가지고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줌으로 해서 여러분들이 적어도 마음으로나 아니면 인식하는 것에 따라서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조금 더 지혜롭구나' 하고 아는 것뿐인 것이고, 또 조금 더 나아가서 '이렇게 이렇게 수행해보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보십시오' 하면서 가르쳐주는 것뿐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것을 듣는 것이든 아니면 그런 것을 수행하는 것이든 그것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담당해야 될 몫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고 아무리 좋은 지혜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캐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수행을 하다가 보면, 맨 먼저 알아지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다 보면, 맨 먼저 보통 ‘아! 이렇구나’ 하고 관찰해나가는 것이 '이것이 몸의 현상이고 이것이 마음의 현상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차려 나갑니다. 실제 그리 됩니까? 그거는 적어도 되어나가죠?

예를 들어서 다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픈 것으로 인해서 마음으로 아프다 하는 것을 안단 말이라.

 

그럼 이것이 원인으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생겨난단 말이라.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지혜들이 생겨납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일반적으로는 그것을 잘 감지를 못해나가죠? 그래서 그걸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수행을 통해서 체험을 해나가면서 내가 알게 돼 나갈 때 그런 것들을 지혜'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알아차림만 쭉 유지해나가면 라고 하는 것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할 때는 보통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통 그런 알아차림이 없을 때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게끔 돼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알아차림 하나만으로도 잘못된 생각들이나 잘못된 견해들을 일시적으로는 제거하는 효과들을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알아차려나가면 부처님 법에 대해서 '아, 진짜 그럴까' 하는 의심들도 생기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진리다 할 거 같으면 진리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적어도

'', 내 것이다, 남의 것이다, 나의 영혼이다, 하는 어떤 개념들로부터 탈피를 해야만이 지혜롭다고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내 것이란 개념이 있을 거 같으면 그 속에는 항상 탐·진·치가 있게 돼있습니다. 탐·진·치를 버려버려야만이 지혜롭게 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호흡 하나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다 잠재워버릴 수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여러분들에게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자꾸 구분하도록 하라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런 구분들이 안 되어나갈 거 같으면 뭉뚱그려져버립니다. 하나로써 뭉뚱그려져버릴 거 같으면 그 속에서는 사물의 진실이라는 것, 실재적인 현상들을 발견해내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항상 수행해나갈 때 맨 먼저 호흡을 관찰하든 아니면 다리로 걸어가든 하더라도 '! 이것이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것이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하는 걸 갖다가 명확하게 자꾸 볼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충분히 구분해 나가집니다.

 

그렇게 구분되어져 나가지면 그다음으로 와지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것으로 인해서 이것이 온다' 하는 인과관계가 반드시 뒤따라옵니다. 다리를 구부림으로 인해서 아프다는 느낌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내가 걸어가겠다는 마음을 냄으로 인해서 다리가 걸어가집니다. '의도로 인해서 그 결과로써 다리가 걸어가지는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원인·결과 관계를 이해를 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이해로 인해서 만약에 몸의 자세가 바뀌어졌다고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몸의 자세를 바꿨을 거라. 그럼 그것을 다시 유추해 볼 수가 있는 거라. '! 내가 알아차리질 못했다는 것뿐이지 틀림없이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구나' 하는 걸 내가 눈치를 채고 그다음부터는 몸의 자세가 하나 바뀔 때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가 하는 걸 갖다가 알아차리려고 노력을 해나가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 물질과 비물질만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이 두 개가 끊임없이 원인·결과로써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차려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어떤 결과가 있다고 해서 '어떤 외부적인 큰 힘들이 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든지 그다음에 '그것이 우연찮게 이렇게 됐겠지' 하는 그런 생각들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하는 거라.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보살님이 와서 “스님! 스님 덕분에 우리 애기가 잘됐습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스님도 가끔씩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해주죠? "항상 건강하기를,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자식이 잘됐다 하는 거라. 그것은 아니죠? 그런 외부적인 힘으로 인해서 그런 건 아니죠? 인과관계를 알 거 같으면, 몸과 마음의 관계를 알 것 같으면 적어도 그런 마음은 들지 않는다 하는 거라.

그래서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알게 돼나간다는 거라.

 

그리고 이 몸과 마음, 물질과 비물질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라고 하는 관념들로부터 완전하게 탈피는 안 되지만 잠재를 해둘 수 있다는 거라.

여기까지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쭐라소따빤나(cūḷa sotāpanna) 라고 그럽니다. 그런 얘기 가끔씩 들어보죠? 작은 수다원과에 이르렀다고 그럽니다. 수다원과는 아니지만 수다원하고 비슷한 그런 상태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혜다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이런 것들만 수행을 통해서 끊임없이 훈련을 해나가도 살아가는데 큰 불편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일이 어그러지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이 끊임없이 "와서 보라. 와서 확인하라"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자기 것으로 그렇게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에는 일들이 꼬여버리기 때문에, 풀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기 전에 미리미리 이렇게 자꾸 훈련을 하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서, 끊어지면 다시 돌아오고, 끊어지면 다시 또 돌아오고 이렇게 끊임없이 하다 보면 적어도 여기까지는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쭐라소따빤나가 됐다고 해가지고, 사실은 쭐라소따빤나라는 개념은 없는 겁니다. 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욕망은 일어나고 일은 또 잘못돼나가고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항상 다시 또 돌아와집니다. 돌아와지고 돌아와지고, 다시 또 잡아나가지고 다시 또 잡아나가지고 그렇게 되기 때문에 대상을 놓치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들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가끔씩 수행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수행시간을 더 늘려주라, 또 더 지도해주라" 하는가 하는 것들을 대충 보면, 현상들이 핑핑핑핑 돌아가는 거를 일반적으로는 그걸 인식하지 못합니다. 위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을 또르르륵 떨어뜨려 보십시오. 그럼 밑에 고여 있는 물에 물방울이 끊임없이 뽀르르르 올라옵니다.

그것이 작은 방울들이 하나씩 하나씩 올라오는 것들도 있지만은 끊임없이 여러 개가 차라라락 올라오는데 그것의 상태들을 집어내집니다.

어느 것이 먼저 생기고 어느 것이 먼저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톡 집어나가는 어떤 힘들이 생겨나가면, 그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끊임없이 자꾸 수행할려고 그럽니다. 끊임없이 알아차려 나갈려고 하고.

물론 1초에 적어도 삼십몇 개씩 떨어지면서 일어나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완전하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은 그전에는 그걸 봤을 때 그걸 전혀 감을 못 잡았는데 수행을 해서 알아차림이 깊어지니까, 그래서 몸과 마음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 인과관계를 이해하게 되니까, 조금 더 섬세하게 관찰해나가거든.

 

수행에서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해나가는데 처음에는 그냥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느낌만 알아차립니다.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서 팽창돼나가고 수축돼나가고 하다가, 이게 점점 더 진행되다 보니까 끊임없이 일어나지고 끊임없이 또 사라지는 것이 하나의 일어남 속에 있다는 걸 딱 압니다. 사라짐도 마찬가지고. 물방울들을 다 모르듯이, 물론 처음에는 그 부분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 1점 몇 초에 일어나는 현상들이.

 

그래도 그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니까 더욱더 노력해나갈려고 하는 거라. 그런 마음들이 적어도 생기게 됐을 때를 갖다가 쭐라소따빤나 라고 그럽니다.

다시 돌아온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마음으로 관찰하는 대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을 보통 "무상(無常)을 알았다"고 그럽니다. 항상함이 없이 변해가는 사실을 아는 것.

보통 보면 무상을 어느 정도 체험한 사람들은 자만심이 없습니다.

'내가 최고다', '내가 뭘 해야 된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거의 떨쳐버립니다. 그래서 나를 내세우지 않을 때는 내세우지 않게 되고, 또 물론 나를 내세워야 될 때는 나를 내세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해꼬지를 했다, 당연히 화를 내겠죠. 화를 내는 것은 왜 냅니까? '나'라고 하는 개념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어도 무상의 이치를 깨닫고 나면 그렇게 화내지 않습니다.

내가 탁 자빠져가지고 아픈 현상들이 있어났다, 이걸 관찰할려고 하지 아프다고 마음을 거기에 두지 않는다는 거라. 그거는 하나의 관찰대상이 나타났다고 아는 것뿐인 것이지 아파서 '아이고, 죽겠다' 이걸 싸 짊어지고 몇날 며칠 드러누워갖고 밥해내라 우째라 이러지는 않는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만약에 그런 마음이 들 거 같으면 '아! 내가 조금 더 노력해가지고 무상을 빨리 보도록 노력해야 되겠다'하는 마음들을 가져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그렇게 관찰을 하다 보면 이렇게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참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일 뿐 아니라 불만족스럽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게 보통 어떻게 나타나지느냐 하면 '어느 것에도 내가 마음을 두지 않는다' 하는 거라. 돈을 많이 모으든 쌓여있든 그것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어차피 그것도 무상한 거라. 변해나가는 것이고. 또 여기 계신 부처님, 옛날에 선사들이 그런 얘기들을 하죠? '목불을 태워서 아궁이에 넣고' 그게 바로 무엇때문에 그렇습니까? 저것도 변해나가는 속성이라는 거라. 그래서 쉽게 말하면 이런 것들에 의지처를 구하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그게 뭐냐면 끊임없이 변해나가는 것은 내 것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을 뿐아니라 불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들에 의지처를 구하지 않는 현상들로 나타나진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살아가면서 물론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어서 그것을 의지처로 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의지처로 할 거 같으면 반드시 집착이 생겨나버립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은 내가 하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해야 될 것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의 견해나 나의 의견들을 집착해서 그것에 주입시켜나가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는 겁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배워나가는 사람이라 할 거 같으면 그런 것에 의지처를 구하지 말아야 된다 하는 얘깁니다. 스스로 자신이 그런 것들을 알아차려나가고 깨달아 나갈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그런 것에 의지처를 구하지 말아라. 그렇다고 해서 아기를 기르지 마라 든지 돈을 모으지 마라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것들은 어떤 것도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을 해나가야 만이 일이 꼬여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다음에 대상이 그렇게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운 것들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 무아(無我) 부분이죠.

실체가 없다 하면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못 할 것인데 현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스톱” 한다고 해서 스톱이 되지 않는다는 거라. 소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은 절대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통해서도 수행을 해나가면서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그렇게 면밀하게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알 거 같으면 그 소멸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단지 소멸로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그 어느 것에도 집착을 하지 않게 된다하는 거라. 이 몸에 대해서도 집착을 하지 않을 뿐아니라 마음에 대해서도 집착을 하지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생활을 해나갈 때 보통 관념들에 쌓여서 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이런 것이다' 하고 관념들을 쌓아두는 것, '내가 남에게 십 원을 줄 거 같으면 그 사람이 기뻐할 것이다' 아니면 '그 사람이 나에게 뭘 해주겠지' 그것들은 실재적인 것은 아니고 관념이란 말입니다. 그런 관념들이 생각하는 대로 안 되어나갈 때 불협화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적어도 부처님의 진리에서 아낫따(anattā)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또 통찰을 했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 나의 마음이라 하는 것도 실체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를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법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생활에서 삼법인의 진리대로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큰 도움을 받고 지혜롭게 살아가지게 된다 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삼법인을 이해를 하게 되면 '이것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보통 그것을 일반적으로 '초선이 완성됐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상을 놓치지 않을려고 하고 또한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명확하게는 아니더라도 인식을 하게 됨으로 인해서 마음이 조금 더 내가 나아갈 방향들을 바르게 설정해나가는 그런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절대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은 여러분들 주위에 언제든지 있게 돼 있습니다. 그게 아이 문제든 어떤 문제든 그런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이 삼법인의 진리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은 거기에 따라서 안락해지고 평안해지게 됩니다.

보통 이럴 때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앉아서 좌선을 두 시간 세 시간 아니면 네 시간 하더라도 거의 통증을 못 느낍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적 있죠?

혹시 수행이 잘돼나갈 때 몇 시간 했는데도 평온하고 안락하게만 느껴지지, 그전 같으면 다리가 아파서 굉장히 힘들었을 건데도, 그런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이 훅 지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놓쳐서 그럴 수도 있고,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갔을 때도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몸에서 통증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더더욱 노력해야 되겠다는 마음들도 강해집니다. 확신들이 서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가면 내가 끝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들이 강해집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되는 게 뭐냐면 보통 여기서 중지해 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확신들이 서기 때문에 '아, 내가 이걸 빨리 전해야지'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이러 이러한 체험을 했다 하는 것을 전하고 싶은 마음들, 그리고 그 부처님의 진리를 그때부터 막 책을 보면서 비교를 해봅니다. 내가 이렇게 체험했던 게 어떤 것인가? 그래서 그 부처님의 진리를 자기에게 맞게끔 맞춰가지고 전달을 합니다.

대부분 한국의 온라인에서 '내가 깨달았다'하고 동네방네 외는 사람들 있죠? 대부분이 보면 이 상태입니다.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없거든. 그게 지나고 나면. 그런데 그때는 진짜 그게 끝인 줄 안다고. 그래서 마음이 행복해질 땐 행복을 멈추질 못해. 나는 분명히 알아차려서 '행복함' '행복함' 하는 데도 행복이 끊임없이 일어나거든. 그러니까 그게 끝인 줄 아는 거라.

그래서 가끔씩 그렇게 물어봅니다.

“나는 행복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멈추면 됩니까?”

알아차림을 놓아보라고 하면, 놓아버려도 그냥 행복하다는 거라.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전에는 알아차림 하나만 할 거 같으면 금방 그것이 일어났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돼.

그럼 하나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며칠이 걸릴 수가 있습니다. 신물증이 날 정도로 그 대상 하나만 알아차려 나갈려고 해야 만이 그 대상이 사라져버립니다. 평온하다든지 행복하다든지 하는 것들이.

 

경전에서는 일선에서 이선으로 가고 삼선이고 사선이고 가고 하니까 금방 팍팍 넘어가질 거 같죠? 절대 그렇게 안 돼 나가집니다. 대부분 여기서 멈춰집니다. 그 행복한 것들에 대해서 보통 수행자들이 보면 한 일주일 정도는 걸립니다. 그 대상을 극복해나가는데. 끊임없이 관찰해나가면서.

여러분들도 가끔씩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 기분좋고 행복한 것들이 며칠 정도 갑니까? 보통 보면 거의 일주일이 안 넘어갈 겁니다. 길어봐야 고작 일주일입니다. 안 그러면 금방 마음이 휙 바뀌기도 하고 그럽니다.

 

여러분들 마음도 그런데 실제적으로 수행을 통해서 얻은 기쁨이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참 안 바뀌어 나갑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신물증이 나게 됐을 때 그때야만이 평온한 마음들이 들어와집니다. '! 이게 아니구나' '수행이라는 것은 이게 아니고 대상을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해나가는 이게 수행의 전부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행복감이 강하게 일어날 거 같으면 다른 대상들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툭 부딪쳐서 아픔이 일어나더라도 그 아픔조차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대상이 분명히 나타나는 데도! 사실은 그것도 좋은 것은 아니거든.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해서 실망을 느껴야 그다음 지혜로 넘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가끔씩 그런 부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지식으로만 행복감을 느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면 '아! 내가 이런 것으로 인해서 이런 행복감을 맛봤는데' 다른 사람 생각하면 어떻게 돼? '참 저 사람 안타깝다' '참 저 사람이 이 법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 일인데' 하면서 마음이 슬픈 마음으로 향하는 수가 있습니다. 가끔씩 그럴 때 있죠?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야, 가자”하고 끄잡아오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알음알이로써 그렇게 행복감을 아는 것하고 실제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 하고는 이렇게 좀 차이가 납니다.

 

실제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은, 물론 그런 슬픔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법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그렇지만 그 슬픔은 한참 오래갑니다. 그렇게 행복감이 오래가듯이 그런 슬픔도 그렇게 오래가집니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참 힘듭니다. 그런 것들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알아차려서 그것에 대해서 무기력증이 나타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일어나는 현상을 마음으로 알아차려나가는 것이 참된 수행의 길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돼서 '내가 해온 것이 바른 도의 길이 아니구나'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한 팔정도 바른 도에 이르는 길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전에 있어왔던 행복감이나 불행감이나 하는 것들은 거의 떨쳐버리고 평온한 마음이 돼버립니다. 평온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는 마음이 급격하게 안 바뀐다는 얘깁니다. 급격하게 뿐 아니라 거의 요지부동의 상태가 됩니다. 그냥 대상만 즉각즉각 알아차립니다. 즉각즉각!

그런 때는 보통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면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려나가는 것이 꼭 빗방울이 여기 밑에 바닥에 톡 톡 톡 떨어지듯이 느껴지거든. 대상을 알아차려지는 것이. 혹시 수행할 때 그런 경험 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도 틀림없이 해봤을 겁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송곳 두 개가 딱각딱각 닿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평온한 상태를 잠시나마 맛본 상태입니다.

 

그런데 딱각딱각 하더라도 분명하게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면서 알아차려나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단지 그것은 개념일 뿐입니다.

 

이래서 마음이 단순한 알아차림만이 참된 수행의 길임을 알게 돼나가게 됩니다.

시간이 너무 됐는데, 내일 다시 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