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빤닌드리야 (paññindriya, 지혜의 기능, 慧根)-후반부(20070201)

담마마-마까 2020. 10. 5. 18:23

https://youtu.be/n8y4Ntk6bCE

* 빤닌드리야 (paññindriya, 지혜의 기능, 慧根)-후반부 (20070201)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빤닌드리야 중간 부분까지 했습니다.

담마와다(Dhamma vada)는 '법을 논한다, 법을 배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법은 무엇 때문에 논하고, 법을 무엇 때문에 배웁니까?

부처님 진리를 왜 서로 토론하고 배우고 그렇게 합니까?

(수행자 대답) 행복해지기 위해서?

부처님 진리의 궁극적인 것은 지혜를 완성하는 것이죠! 물론 행복해지고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렇게 법을 배우고 논하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그런 행위들을 합니다.

 

부처님 거기에 보면 수빠띠빤나 라고 하는 것이 있죠?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S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빠띠빤나(Supaṭipanna)'라고 하는 것은 실천한다고 하는 것, 좋은 일들 착한 일들을 힘써 행한다는 것, 그런 것들은 이런 지혜들을 실천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행한다는 것이 되죠!

그래서 도달하는 것이 '수가따(Sugata)'-'번뇌를 완전하게 소멸한 자, 목적지에 도달한 자'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 수행합니다. 번뇌를 완전하게 여읜 분, 여읜 단계를 수가따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또 부처님 법을 알게 된 것도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이 법을 공부할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롭게 되기 위한 방편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처님이 수레의 양 바퀴라고 그러죠!

바르게 실천하는 것, 바르게 알아가는 것 이런 것들을 부처님은 분명하게 성스러운 길에 이르는 것이다 해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에 이르는 것・길・팔정성도를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설해놓으셨습니다.

 

보통 처음 불교를 접하면 '아, 이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다'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 믿음을 통상적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이 법회에 동참을 하고 수행을 하고 이렇게 연결돼나갑니다.

그런 믿음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와서 법회 맨 처음에 시작을 하는 것이 삼귀의 오계부터 하죠! 계를 받아지니려고 하고, 또 그렇게 계를 받아지니고 나서는 수행을 하고 또 법을 듣고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법을 듣고 실천하고 하는 것들도 조금 더 명확하게 하면, 법을 명확하게 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부처님 법을 스님 통해서 듣고 또 수행이란 실천을 해나갈 거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것들을 바르다고 얘기하고 지혜로운 자가 가져야 될 것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가져야 되는 것은 믿음을 가져야 되고, 계를 지녀야 되고 계를 지켜나가야 된다는 것이고, 그다음에 법을 보고 흔들리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을 가지는 것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뭘 지혜롭다고 그럽니까?

수행을 이렇게 해보면 뭐만 있습니까? 몸과 마음뿐이죠! 이 세상은 몸과 마음뿐이다 하는 지혜를 알아가는 것. 여기서 이 세상은 여러분들 물질적인 몸과 마음을 다 포함하고 또 모든 세상을 다 포함합니다.

오로지 몸과 마음뿐이라는 것, 그 어디에도 내가 집착할 만한 자만심이라든지 「나」라든지 하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수행을 통해서 알아갈 거 같으면 그런 번뇌를 여의어가겠죠. 그래서 지혜롭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수행을 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저번 시간까지 설명을 한 게 무상·고·무아 입니다. 또한 이 세상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며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나'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그런 것들을 또한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알아감으로 인해서 번뇌를 먹이로 해서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번뇌를 먹이로 해서 살아가집니다. 이 세상은 번뇌를 먹이로 해서 살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도 지혜로운 자가 해나가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다른 동물들 하고 다르게 머리를 쓴다는 얘깁니다.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을 해야 되고, 또 부처님 법을 들어야 되고 그것을 통해서 듣고 실천하고 해서 그 담마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가 나아갈 길이다, 또한 부처님의 제자가 나아갈 길이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세월이 지나고 또 다음 윤회를 하고 할 거 같으면 더 큰 고통, 불행을 당하고 슬픔과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세리와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 분은 요즘말로 하면 동네방네 다니면서 고물 모으는 고물상이라. 어느 집에 아주 가난한 집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할머니한테, 고물상들은 요즘은 엿 바꿔주죠? 그런데 인도 당시에는 엿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장식품들을 그 대가로 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소녀 눈에 머리핀, 머리 이렇게 하는 핀이 아주 예쁜게 있었어요. 그걸 갖고 싶거든. 그걸 사주라고 하니까 집에 돈이 있어야 뭘 사지.

그러다가 고민하던 끝에 집에 녹슨 그릇이 하나 있길래 그걸 가지고 바꾸어야 되겠다 해서 이 고물상한테 이걸 줄테니까 예쁜 머리핀을 주시오 하는데, 이 세리와가 그걸 탁 보더니 보는 순간 이게 그냥 예사 그릇이 아니란 걸 안 거라. 그걸 긁어보면 표가 난단 말이라. 이게 청동으로 만든건지 아니면 뭐로 만든건지. 긁어보니까 이게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거든. 그런데 이 할머니하고 손녀는 모르는 거라.

그런데 거기서 욕심을 안 부려버렸으면 될 건데 욕심을 부려서 요놈 금덩어리도 내가 차지해야 되겠고, 요 머리핀 이것도 주기 싫거든. 그러니까 꾀를 내가지고 이 그릇을 땅바닥에 탕 던지면서 “에이! 이것 가지고는 이거 못산다. 돈을 더 내라” 그러고 나서 가버렸어요. 그러고 나서는 생각에는 그다음에 와가지고 하면 마지못해서 고마 바꿔줄려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 고물상이 지 하나뿐인가? 다른 고물상이 오니까 이 할머니가 그걸 다시 가져간 거라. 이거 바꿔주시오 하니까, 그 고물상이 정직한 사람이니까 이걸 보고 “아! 할머니, 이거는 내 여기 있는 거 전부를 다 줘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값어치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만 머리핀이라든지 잡다한 것들을 다 주고 몸속에 있는 돈까지 전부 다 털어주면서 그걸 가지고 가거든.

그런데 뒤늦게 그 세리와가 와서 “아이, 그냥 내가 바꿔줄게” 하고 하니까 이미 늦어버린거라. 그래가지고 할머니한테도 욕을 먹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다 욕을 먹고 그래서 갔는데, 그 분한 마음 때문에 결국 이 세리와가 죽고 맙니다.

그러고나서 세세생생 동안 이렇게 태어나고 죽고 윤회를 하면서 나쁜 과보들을 많이 받아가지고 태어납니다.

 

그걸 부처님이 인간에게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좋은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듣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한 자는 저와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분명하게 머리를 지닌 인간으로 지혜로운 인간으로 태어났단 말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인간이 해야 될 길은 딱 정해져 있는데 그 길을 못간다고 할 거 같으면 세리와와 틀린 것이 뭐가 있겠느냐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리 안 할거죠? (예!) 세리와는 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저번 시간에는 지혜 부분을 하면서 단순한 알아차림만이 참된 수행이 길이다 하는 사실까지 한 것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런 단순한 알아차림이 더욱더 성숙해지고 능숙해지면, 경험상으로 여러분들도 그런 것이 있을 겁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굉장히 빨라집니다. 분명하게 호흡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느려진 느낌이 들고 또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알아차리는 것은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캐치를 못해나갑니다.

 

일어나는 사실조차 아무리 관찰을 하려고 하더라도 관찰을 못하게 됩니다.

그냥 대상이 사라짐만 있게 됩니다. 중간도 몰라. 처음도 모를 뿐아니라. 그러니까 어떤 대상을 관찰하면 그냥 사라짐만 딱깍딱깍 느껴지는 거라.

그런 경험들을 해봤을 겁니다. 그게 대상에 강하게 집중이 돼나가서 그 대상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명확하게 파악해지면 일어나지는 것이 바로 '사라짐만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사라짐만 느껴질 때는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통증을 관찰하면 통증이 굉장히 크게 느껴집니다. 수행을 하더라도 배가 불러와지면서 일어나는 압박감이 굉장히 크게 느껴집니다. 단지 그것이 사라지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뿐이라. 실제로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 압박감이 굉장히 커지기 때문에 어떻게 느껴지냐 하면, 여러분들 감기 걸렸을 때 온몸이 불덩이가 되죠?

 

압박감이 커지기 때문에 몸 전체가 이 불덩이 같이 느껴집니다. 보통 여기서 사람들은 앉아 좌선하다가도 깜짝 놀래가지고 자세를 바꿔버립니다. 경행하다가도 깜짝 놀래가지고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면서 대상을 놓쳐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마디의 힘은 깨져버립니다.

불덩이같이 느껴진다고 하는 것은 사마디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대상을 놓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절대 자세를 바꾸면 안됩니다.

 

그럴 때는 대상을 관찰하면 똑같이 불덩이 같이 느껴집니다. 사라지는 것 자체가. 그럴 때는 개개의 대상을 관찰할려고 하지 말고 전신을 관찰해야 됩니다. 몸 전체! 앉아있으면 앉아있는 전체, 서 있으면 서 있는 전체, 걸어가면 걸어가는 전체를 관찰할려고 해야 이 현상을 깰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지금 하고 있는 포지션에서 자세를 바꾸지 말아라.

 

가끔씩 일상생활하면서 어려운 것에 부딪치면 중도에 대부분 포기를 해버리죠. 그런데 그것이 어려운 줄 알면서 묵묵하게 그냥 침착하게 일을 처리해나가면 보통 그 일은 해나가집니다. 그런데 그걸 분심이 일어나가지고 막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면 절대 그 일은 안됩니다. 평등심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야 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지가 오든 말든 그냥 냅둬버리고 그냥 쭉 해나가면 보통 보면 정신적인 괴로움도 압박감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행해나가는 일도 순조롭게 풀려나가 버립니다.

 

우리 법우님 중에도 가끔씩 그런 경우들이 있었을 겁니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직업에 대해서 참 내가 하기 싫은데 일하기 싫은데, 안 그러면 정신적으로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이걸 못 벗어나겠다 하면 대부분 포기를 해버립니다. '에이, 이 직업 안 해버리면 그만이지. 쉴란다.' 문제해결은 절대 안 됩니다. '고통스러운 거 잊어버리고 할란다' 그거 잊어집니까? 정신적인 고통이 와지는 것이? 안 되는 거라.

이럴 때는 항상 전체를 볼려고 해야 됩니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할 때는 평등심을 자꾸 유지해서 그 일 자체를 주시하지 말고,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밥 먹으면 밥 먹는 거를 그냥 설렁설렁 관찰한다는 생각으로 해나가고, 내가 걷고 있으면 걷고 있는 전체적인 것을 자꾸 볼려고 해야 만이 그 난관을 타개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수행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사라지는 현상만 자꾸 나타나져서 그것만 알아차려지게 될 때는 보통의 마음이 ‘참 무상하구나’ 하는 걸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그 무상으로 인해서 참 고통스럽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 하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몸 자체가 그렇게 깨끗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서 집착을 조금씩 여의어갑니다.

 

보통 사람들은 뭐합니까? '행복하다, 나가 있다, 이 몸은 깨끗하다, 이 몸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항상한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집니다.

그런데 사라짐을 분명하게 본 자들은, 그런 것들을 본 지혜로운 자들은 이런 것들이 엷어져버립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겁니다.

 

팔랑개비가 이렇게 돌아간다고 해봅시다.

이걸 요쪽 시작해서 요쪽 끝날 때까지 쭉 관찰하면 좋은데 빠를 때는 이걸 절대 관찰 못합니다. 그냥 한 점에서 탁탁 와지는 부분만 관찰돼 나가집니다. 마음으로 어떻겠습니까? 요놈을 좀 멈춰가지고 요기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요기 끝날 때까지 한번 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런데 선풍기를 끄기 전에야 저절로 와지게 됩니다.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만 봐지게 되는 거라.

그대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사라짐만 계속 봐질 것 같으면 나중에는 마음이 신물증이 나버립니다.

볼려고 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피해버린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좋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만약에 이렇게 될 때 선풍기에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명칭을 붙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관찰이 돼나가겠습니까? 사라짐만 보이니까 '사라짐' '사라짐'만 명칭을 붙인다 해도 관찰이 되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나가다가 사라짐만 계속 있을 거 같으면 명칭을 즉시 떼버려야 됩니다. 떼지 않으면 지혜와 사마디는 깨져버립니다.

이럴 때는 반드시 명칭을 떼버려야 됩니다. 그냥 그대로 사라지는 것만 그대로 관찰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관찰하다가 보면 틀림없이 사라지는 것도 없어져 버립니다. 아무것도 없이 돼버립니다.

 

착각을 하는 경우가 명칭은 보통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대상이 사라져버리면 보통 여기서 사람들이 벙쪄버립니다. 마음은 어떤 상황이든 대상을 잡지 않으면 벗어나 버립니다. 그럴 때만 명칭을 부여해줍니다. '알려고 함' '알려고 함'이라고 명칭을 부여해줘야 만이 그 대상을 다시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대상을 벗어나버립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그럴 때만 명칭을 부여해주고, 나머지는 사라지는 그 자체만 관찰하도록 해야 합니다.

 

보통 그럴 때 마음을 관찰해보면 거의 무덤덤합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것도 아닌 것이 무덤덤하게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게 정확한 겁니다. 왜 이럴까 하고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을 하면서 관념적인 생각에 빠집니다. 무상, 고, 무아 아니면 '일어남' '사라짐' 실질적으로는 그게 관념인 줄 알면서도 그 관념적인 것에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일어나는 사실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라짐만 연속적으로 계속 이어질 거 같으면 그런 관념이 떨어져 나가버리는 거라.

 

관념이 떨어져 나가버리니까 실체가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마음을 먹기를 이런 것들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무덤덤하게 느끼는 것뿐인 거라. 관념이 떨어져서 그렇기 때문에 그 무덤덤한 것이 나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됐을 때만이 인제는 참다운 지혜가 시작된다 하고 보통 얘기를 합니다.

어려운 것에 부딪치게 됐을 때 그렇게 평등심으로 무덤덤하게 일처리를 해나가면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사라짐만이 연속적으로 관찰돼 나가지면 그리고 관념적인 것이 떨어져버리고 나면,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지가 일어나든 또 사라지든 내버려둬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알아차림은 분명하게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자체가 '참 좋은 것이 아니구나' '싫은 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왜? 내가 알아차림을 유지할 동안에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거든. 내가 안 알려고 하더라도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끊임없이 일어나지고 사라집니다.

이게 좀 없었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됩니다.

 

보통 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진다고 하는 것,

그다음에 이 몸과 마음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것이고 허물이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

이게 어떤 면에서는 순차적으로 일어날 거 같죠? 절대 순차적으로 안 일어납니다. 일순간, 한순간에 확 지나갑니다.

 

경전에는 물론 그걸 단계별로 나눠놨습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순간적으로 이게 다 지나갑니다.

한꺼번에 슉, 그냥 실에 꿰어져있는 구슬을 잡아당기면 하나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몇 개가 그냥 한꺼번에 쭉 올라오듯이 올라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세상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참 재미없다, 지루하다 느껴본 사람? 많이 있네. 세상사는 게 그리 재미가 없어? (수행자 대답)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수행자 대답)

지루할 때는 보통 그것을 벗어날려고 하든지 안 그러면 지루한 것에 그냥 파묻혀버립니다. 지루한 것에 파묻힌다는 거는 지루한 것을 스스로 더 계속적으로 만든다는 거라. 본인은 아니라고 그러죠. 그런데 나중에 보면 실제적으로는 자기가 스스로 그것을 더 만듭니다. 그래서 더 지루해지고 몸과 마음을 학대하는 방향으로 나가집니다.

 

수행에서 이런 현상이, 싫어하는 마음들이 나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고, 안 할란다' 하고 수행 안 해버려.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해도 수행하다 재미없으면, '일어남, 사라짐' 해봐야 아무런 느낌도 안 오고 하면, 그냥 일반적으로 지루해져도 '에이, 그냥 조금 더 해보지' 하는 마음보다는 딴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수행 안 하고 마음은 천지를 휘돌아다니지?

그런데 수행에서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를 하고 있는데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수행을 포기하는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중단해버립니다. 대상을 놓쳐버리면 일단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이럴 때도 마찬가집니다.

 

지루함들이 일어나지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질 때는 대상을 고루게 관찰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대상을 고루게 관찰하도록.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이. 싫어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나면 만약에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났다. 실제적으로는 고통스런 느낌은 여기저기 온데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거 같으면 그 고통이라는 느낌이 한곳으로 집중돼버립니다. 만약에 내가 배를 '일어남, 사라짐' 할 거 같으면 여기에 다 집중이 돼버립니다. 한곳으로 싹 다모인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이것에 대해서 더욱더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돼버리는 거라. 포기해 버릴려고 하는 거라.

여러분들 일상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그냥 수행 안 하고 있다 치자. 다리 꼬부리고 앉아있으면 아프면 어떻게 합니까? 펴버리죠. 벗어나버리죠.

수행도 마찬가지라. 이렇게 해서 더욱더 한곳으로 쏠리는 듯이 느껴질 거 같으면 대상을 골고루 찾아줘야 됩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1번',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2번', 이러면서 대상을 골고루 퍼지도록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닿음의 포인트 28가지" 얘기를 했죠? 손바닥 닿아있는 것부터 해서 눈꺼풀 오른쪽 닿아있고 왼쪽 닿아있고, 입술 닿아지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닿음 닿음' 입니다. '일어남 사라짐 않음 닿음' 하면서 자꾸 골고루 퍼져나가주지 않을 거 같으면 여기서 수행이 중단이 돼버리는 거라.

 

가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앉음' '닿음'은 언제 합니까?

'앉음'만으로 해서 될 거 같으면 '일어남, 사라짐, 앉음' 하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보통 여기서는 안 돼나갑니다. '닿음'의 포인트를 자꾸 넓혀줘서,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1번',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2번' 이런 식으로 대상을 골고루 퍼져나가도록 만들어줘야 만이 수행을 계속적으로 연결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빨리 오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차려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을 할 경우에는 '일어남, 사라짐' 외에는 모릅니다. 소리가 들려도 모르고 내가 눈을 뜨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어남, 사라짐'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을 거 같으면 눈에 대상이 보이질 않습니다. 대상 외에는 절대 모르게 돼있습니다.

가장 평등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게 이럴 때입니다. 대상을 골고루 퍼지게 해줘가지고 마음이 평등한 마음으로 쭉 가도록 연결을 해줘야 된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세속 생활할 때 싫어하는 마음들이나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날 때는 그렇게 자꾸 대상을 전이시켜주고 평등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죽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해야 만이 살아가는데 의욕이 생겨나가고, 인제 벗어났다 하는 마음들이 생겨나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조금 더 능률적으로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수행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평등심을 유지를 해나가야 만이 그다음에 수행에 대해서 더 강하게 내가 수행해야 되겠다는 추진력들이 생겨나집니다.

 

(수행자 질문)

예, 조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이 필요하다고 그러는 겁니다.

스님이 이걸 설명해주는 이유가 여러분들이 시간 날 때 다음에라도 자꾸 듣고 '! 이런 상태가 왔을 때 이리해야 되겠다' 하고 지침으로 삼으라고 지금 얘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자꾸 수행에 대해서 추진력이 생겨나갈 때 그때 조심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보통 사람들이 지혜보다는 사마디가 강해져버립니다. 몰입이 자꾸 돼버리고.

몰입이 돼버리면 봄날에 몸이 노곤노곤노곤 해지듯이 아지랑이 같이 대상이 느껴져 버립니다. 여러분들도 잠 올 때 어떻게 됩니까? 잠이 온다는 것은 잠에 몰입돼가고 있다는 겁니다. 몸이 그냥 나른하게 퍼져버리죠?

수행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대상에 강하게 몰입을 하고 있는데 지혜하고 사마디 부분이 균형을 좀 맞춰줘야 되는데, 지혜라고 하는 것은 내가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는-앎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요놈은 계속 집중만 돼버리니까 대상이 그냥 아지랑이 같이 느껴져 버리는 거라. 명확하게 와 닿지 않고!

 

그렇지 않으면 일상적으로 좀 둔한 사람이면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데도 그 대상이 눈에 보이듯이 느껴집니다. 꼭 그 대상이 불에 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일어남, 사라짐'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 불덩이가 확 일어나는 것처럼 내가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또 사라지는 것이 불덩이가 확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져 버립니다. 아지랑이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불덩이 같이 느껴지는 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거는 뭐냐면 사마디가 강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대상 자체가 그렇게 느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럴 때는 아지랑이든 불덩이든 이것은 나에게는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명확하게 평등심을 유지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집중력들로 인해서 균형이 깨져버렸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럴 때는 대상을 관찰하면 계속 그쪽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럴 때는 즉시 중단하고 마음으로 '내가 정신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내가 평화롭기를'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강하게 가지는 쪽으로 마음을 알아차려 나가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증들이 와지지만은, 불덩이라고 하는 것은 통증의 일부분 입니다. 그런 것들도 와지지만 그런 것들이 이렇게 '자유로워지기를' 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인해서 마음이 평등심으로 다시 돌아가집니다. 그런 통증들이 와지지만은 일단은 그것을, 통증들을 극복해나가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 이것도 비영속적인 것이구나' 하는 것을 갖다가 내가 알게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이 상태들을 벗어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균형감을 회복해서 끊임없이 대상을 알아차려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냉정하고 꾸준하게, 꼭 여러분들이 잘하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 오토매틱화 되듯이 그렇게 돼 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오토매틱하고 스님이 지금 설명하고 있는 오토매틱하고는 다릅니다. 힘들이지 않고도 대상을 꾸준하게 알아차려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냉정한 마음들로 인해가지고.

그런 형태가 계속적으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그런 냉정함을 계속 유지시켜서 알아차려나가면 두 개의 대상만 와 닿듯이 느껴집니다.

깜빡깜빡깜빡 불이 왔다가 꺼졌다가 하듯이 깜빡깜빡 하고 느껴집니다. 송곳이 맞닿듯이 느껴지기도 하고.

이러다가 일순간 대상이 사라져버립니다. 깜빡거리는 것이 점점 느려지게 와 닿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다 '어', 하는 찰나에 다시 또 깜빡깜빡 깜빡하고 와지고. 어떨 때는 소멸되는 것이 거기서 딱 끝나버리고 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사람도 있고,

보통의 사람들은 스님들의 체험들을 쭉 보면 보통 보면 그렇게 깜빡거리는 것이 몇 번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점점 느려지다가 소멸돼버리고 다시 또 돌아가져서 깜빡거리다가 소멸돼버리고 이렇게 돼나가는 체험들을 많이 해나갑니다.

 

이때가 사실은 닙바나를 체험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닙바나를! 순간적이지만.

(수행자 질문) 들어보십시요.

닙바나(열반)라는 게 뭡니까? 상카라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조건지워진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상카라 입니다.

닙바나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조건지워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라져버린 상태를 닙바나 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보통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그냥 깊은 삼매쪽으로 쭉 들어가 버립니다. 이런 상태를 명확하게 모르면 그 이전에 이미 삼매쪽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지금은 계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왔기 때문에 이 상태까지 와진겁니다.

이럴 때는 분명하게 자기 스스로 알아야 되는 거라.

'! 이것이 조건지워지지 않는 것이구나' 하는 상태를 인식을 해야 됩니다.

'아! 이것이 참 그렇게 평화롭고 고요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럴 때 누가 옆에서 방해를 할 거 같으면 이게 이렇게 찢어지듯이 찢어져버립니다. 아직 완전하게 열반에 들은 것도 아니고 아니면 삼매에 빠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 자극이 있으면 방해가 있을 거 같으면 크게 진동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보통 수행하는 곳에 '떠들지 마시오' 하는 것은 이것 때문에 '떠들지 마시오' 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다른 때도 떠들면 방해를 받기도 하지만 크게 장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럴 때는 크게 장해를 가져와집니다. 그래서 수행지에서는 조용하라, 떠들지 마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것들이라.

 

새가 저 저쪽에 먹이가 있는 걸 발견하고 여기서 이쪽 산에서 휘이잉 날아가지고 저쪽 산까지 갔는데, 가보니까 이놈의 새가, 먹이가 달아나버렸단 말이라. 그럼 이 새는 어떻게 해? 다시 쉬익 여기로 돌아와집니다. 만약에 저쪽에 새가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그쪽에 탁 날아 앉아버리겠죠.

상카라와 닙바나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수행을 하다가 저쪽에 완전히 탁 멈추어야 되는데 멈추지 못하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진다는 거라. 가서 내가 '그 새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알면서 돌아와지게 됩니다. 상카라가 소멸된 것을 잠시나마 보고 돌아와 버리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닙바나를 순간적으로 체험하는 현상이 돼버리는 거라.

그게 수행에서는 큰 힘을 가져와집니다.

잠시나마라도 이런 닙바나를 체험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꼭 바위에 구멍을, 머리를 탁 뚫어버리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이 바로 그런 때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닙바나를 불이 꺼진 상태라고 얘기하죠. 경전에서 참 표현을 잘해놨습니다, 그런 거 보면. 그럴 때 느끼는 마음이 바로 그런 시원한 것들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보통 다시 돌아와지기 때문에 마음에서는 아직도 번뇌가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돌아와지면서 느껴지는 것이 '아, 내가 아직 더 공부할 것이 남아있구나' '번뇌가 아직 남아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그때부터는 더 공부를 해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보통 이럴 때 삼매를 스스로 조절해나가는 능력들이 생겨나갑니다.

한 시간 삼매에 들고 싶다 할 거 같으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갖다가 관찰하고, 관찰하다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고, 그러다 보면 사라짐이 있게 되고, 완전히 사라지고, 그러면서 삼매에 들어가집니다.

 

이런 훈련들을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 내가 한 시간 삼매에 들고 싶다 할 거 같으면 거의 한 시간 후에 삼매에서 깨어나지고, 삼십 분하고 싶다 하면 삼십 분 후에 다시 깨어나지고 이렇게 훈련이 돼 나가집니다.

 

그러면 자유롭게 상카라가 없는 상태에서 있다가 빠져나오기도 합니다.

완전하게 열반을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 상카라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조건지워지지 않는 상태를 자꾸 자꾸 스스로가 체험을 해서 늘려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 상태들을 유지해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경전에 보면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 와야 담미노.

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 vayadhammino.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떼상 우빠사모 수코'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조건지워진 모든 현상은 계속 변해서 오래 머무는 바 없고,

어느 것이나 일어나면 곧 사라지게 되어 있네.

태어남도 죽음도 모두 사라져 버렸을 때,

이와 같이 고요함이 으뜸가는 즐거움이라네.

 

돌아가신 분들에게 가서 스님들이 법을 설하는 것이 이 얘기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항상함이 없이 변해나간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돼 있다.

그렇게 완전하게 사라진 것, 그 열반의 상태만이 진정한 즐거움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이런 것들로 인해서 알아지는 지혜, 이런 지혜들이 일상생활에서 응용되어나갈 때 우리는 조금 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나갑니다. 여러분들도 어려움에 부딪친다고 하더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고 바르게 뚫고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자연적 성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바른 집중으로 꿰뚫는 특징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빤닌드리야 (paññindriya), 빤냐(paññā)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안냐사마나 제따시까(Aññasamāna cetasika) 부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