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재 부분
< 한량없이 펼치는 청정심소 : 무량심소(無量心所 appamanna-cetasika (압빠만냐- 쩨-따시까) 2가지 >
따로 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부수로써 무량심소(無量心所)라 이름붙입니다. 무량심이란, 한량없이 넓힐 수 있어 강력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의미로 자비심의 별명입니다. 또한 한 중생에게 향하든, 한량없는 중생에게 향하든, 제한 없이 펼치는 것이 한량이 없기 때문에 무량심이라고 합니다.
자(멧따- : 慈, 자애) ․ 비(까루나- : 悲, 연민) ․ 희(무디따- : 喜, 기뻐함) ․ 사(우뻭카- : 捨, 평온) 네 가지가 무량심이지만 멧따-의 근본은 아도-사(무진)이고, 우뻭카-의 근본은 따뜨라맛잣따따-(중립성)이므로 앞의 심소에서 보여주었기에 여기서는 압빠만냐-를 두 가지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는 편의상 네 가지 무량을 간략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23-1. 멧따 (metta : 자애, 慈)
멧따는 육체적인 사랑이나 애정이 아니라 친구 간에 가지는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 호의, 친애, 자애를 말합니다.
metta의 직접적인 적은 증오 또는 악의(kodha :꼬-다)이고, 그 간접적인 적은 애정(pema)입니다.
metta는 선에 대한 진실한 서원과 모든 중생에 대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멧따는 악의를 버립니다.
멧따가 능숙하게 계발된 자는 인자한 태도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23-2. 까루나-(karuṇā : 연민, 悲)
바른 연민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슬픔을 달래주는 것, 다른 이들의 고통을 흩어버리는 것이 까루나-입니다.
까루나-는 잔인함을 버려버리고 다른 이의 괴로움을 제거하길 기원하는 것이 그 주요한 특징입니다.
그 직접적인 적은 사악함, 살의(Hiṁsā : 힝사-)입니다. 그리고 그 간접적인 적은 정신적인 슬픔(Domanassa : 도-마낫사)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으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도, 싫어하는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으면 속으로「잘됐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노인이 병이 들었다고 들으면 「불쌍하다」라고 동정하는 사람도, 자신이 시중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귀찮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며 무서운 것입니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해서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상냥한 마음은 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언제라도 자연스럽게는 생기지 않기 때문에, 노력해서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다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에너지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나 자신의 괴로움이 없어지기를!」 「내 자신의 친한 사람의 괴로움이 없어지기를!」이라고 마음깊이 생각하여 그 마음을 서서히 넓혀 갑니다.
다른 생명의 괴로움을 나의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민이나 괴로움을 이해하고 걱정하여「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엇인가 해 주고 싶다」라고 자연스럽고 진실 되게 생각하는 마음을 기릅니다. 그렇게 하면 추악하고 더러운 작은 마음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큰 마음이 되어 갑니다. 이 에너지는 무한하게 기를 수가 있습니다.
24-1. 무디따-(muditā : 기뻐함, 喜)
무디따-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순수한 기쁨입니다.
그 직접적인 적은 질투심입니다. 그리고 그 간접적인 적은 환희(pahasa)입니다.
그 주요한 특징은 중생들이 번영(anumodana)하여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혐오(ārati)를 버리고, 중생들의 성공을 축하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성공하면 왠지 모르게 질투합니다. 무디따-는 질투의 반대로 상대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른 중생이 행복한 것을 공유하는 상냥함입니다.
까루나-와 마찬가지로 무디따-도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억지로 의무감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의 행복을 보면 즉석에서 기쁨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 같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에너지를 기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자신의 행복, 자신의 친한 사람들의 행복을 기뻐해 자연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그 마음을 자꾸자꾸 넓히고 길러 갑니다. 무디따-를 기르는 일도 작은 마음을 크게 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무한하게 크게 할 수가 있습니다.
24-2. 우뻭카-(upekkhā : 평온, 捨)
우뻭카-는 애착도, 혐오감도 없는 마음의 균형 잡힌 상태를 말합니다.
그 직접적인 적은 열정(raga)이고, 그 간접적인 적은 지성이 없는 무관심입니다.
집착과 싫음은 우뻭카-에 의해 제거되기에 공명정대한 태도는 우뻭카-의 주요한 특징이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뻭카-는 단순한 중립적인 감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침착한 것에 가깝습니다.
우뻭카-는 모든 좋고 나쁜 것, 사랑 받고 사랑하지 않은 것, 기분 좋고 불쾌한 물질, 즐거움과 고통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이런 네 가지 무량심은 한없게 자랍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유정에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생명만이 아니라, 범천이나 신들이나 지옥의 생명 등 모든 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생명이 행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자비심은 그러한 무한(무량)의 생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무제한으로 펼쳐 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행동할 때에는 한정된 대상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 상태입니다. 사람은 한없고 넓은 마음을 기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무량심은 4 가지이지만, 그 중 멧따와 우뻭카-는, 공통된 심소에 각각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애의 마음과 평등한 마음은 선행에 항상 필요한 기능이지만, 반드시 다른 행, 불행과 관계있는 것이 아닙니다.
까루나-와 무디따-는 다른 생명의 행, 불행과 관계를 갖고 있고 심소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까루나-와 무디따-를 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한 예로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로 볼 때,
유아기 때는 자애롭게 대하라.
아픈 아이의 회복을 위해서는 연민으로 대하라.
청년기까지 잘 성장하기 위해 함께 기뻐하라.
성숙한 자식의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하라.
이것이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입니다.
그릇된 것(vipatti)인 악의(vyāpāda), 괴롭힘(vihiṁsā), 싫어함(ārati), 욕망에 찌듦(sineha) 등을 버리고 자․비․희․사를 무량하게 일으키십시오.
복수심에 불타고 있으면 자애를 펼칠 수 없고,
스스로 우울해 있으면 연민을 일으킬 수 없고,
나와 남을 비교하면 함께 기뻐할 수 없으며,
무상함을 모르면 평온을 계발할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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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빠만냐 (appamaññā, 한량없이 스며듦) : 사무량심 (20070120)
오늘은 압빠만냐 쩨따시까(appamaññā-cetasika) 부분입니다.
요렇게 아비담마에서는 두 가지만 설명을 해놓고 있습니다. 그거에 들어가기 전에 <사시 때 하는 게송>을 여러분들에게 좀 들려드리겠습니다. 마음에 경책을 받고 하루빨리 공부하라는 의미로써 게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데와닷따가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읊었던 마지막 게송입니다.
[ 이메-히 앗타-히 따마까 뿍깔랑
데와 띠 데왕 나라담마 사라띵
사만따 짝꿍 사따 뿐냐 깔라낭
빠네히 붓당 사라낭 웁뻬-미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 : 아까 뿔라낭
천신들도 머리 숙여 의지하는 진정한 왕 : 데와 따 데왕
가르칠 기회를 만났을 때 많은 이를 남김없이 가르치신 분 : 나라담마 사라띵
모든 것을 남김없이 알고 보는 지혜를 갖추신 분 : 사만따 짝꿍
과거 선근공덕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신 분 : 사따 뿐냐 락카낭
따를 수 없고 겨를 수 없는 세상의 으뜸가는 큰 스승님 : 빠네히 땅 붓당
이제는 제가 살도 빠지고 피부도 거칠어지고 눈앞에서 삼백 개의 뼈마디가 잡히어지니 : 이메-히 앗티-히
그리고 흔들리고 무너져가는 이 몸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으로 인해 : 이메-히 빠네-히
더 이상 두 손 올려 예경드릴 수도 없이 힘이 다했지만 : 붓당 사라낭
모든 잘못들을 기억하고 참회하며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붓당 웁뻬-미 ]
마지막 죽음 직전에 했던 겁니다. 모든 악한 업들을 부처님한테 참회한다 하는 뜻으로써 읊었던 겁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저지른 죄업으로 인해서 부처님께 차마 가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부처님께 다가갑니다. 다가갔지만 결국 이제는 죽음이 다가와서 피부도 거칠어지고 뼈마디도 앙상하게 드러나지고 더불어서 손 하나 올려서 합장할 힘조차도 없어지는 때가 되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참 내가 잘못했거든. 그래서 인제 마지막으로 "내가 부처님께 참회합니다. 내가 의지할 곳은 오직 부처님뿐이었는데 그걸 내가 몰랐습니다" 하면서 눈물로써 참회하는 게송이라. 여러분들도 그런 때가 언젠가는 옵니다. 죽음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공부할 수 있을 때 공부할 수 있도록 하십시요.
또 스님이 언제까지 여기 태종사에 있다고 보장을 못합니다. 내일이라도 인연이 닿으면 또 떠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또 좋은 스님이 와서 법문을 청해 들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법은 여러분들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법을 스스로 발견하고 법을 스스로 찾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 할 분량 한번 펴봅시다. 오늘 이 분량을 간단하게 하고 나서 여기 이 앞에 있는 우리 적경 스님, 원래 한 달간 휴가한다고 와가지고 벌써 한 몇 달 됐나? (대답) 훌쩍 지나버렸어. 인제 더 늦출 수가 없어. 인제 환계를 하고 학원에 다녀야 돼. 대학에 들어가야 되니까, 공부는 때가 있는 거니까, 또 언제든지 출가할 수 있으니까 잘 공부를 하고, 오늘 여러분들 보는 앞에서 환계의식을 같이 치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한번 압빠만냐 한번 봅시다.
쩨따시까(cetasika) 중에서 압빠만냐(appamaññā) 부분입니다. 맨 처음에 스님이 적어놨어요. '따로 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부수'이다. 어떤 것은 공통되는 청정심소가 있고, 또 분발해서 노력하는 그런 청정심소도 있는데, 이 압빠만냐 라고 하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없어도 그만이고 있어도 그만인 그런 청정심소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이 압빠만냐가 형성이 안 되면 일상생활하는데도 불편할 뿐아니라 수행하는데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빤짜인드리야(pañca indriya)-오력이라고 하는 것도 균형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힘써서 길러야 할 것이지만은 반드시 넓히고 또한 펼쳐나가야 될 그런 것이다 하는 인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스님이, 청정도론에는 두 가지만 나와 있고 나머지 두 가지는 앞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을 안 해놨지만 네 가지로 구분해서 스님이 설명을 해놨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비·희·사가 네 가지 무량한 것이다. 무량하게 펼치고 또한 무량하게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합니다. 그래서 브라흐마위하라 바와나라고 하면 네 가지 한량없는 거룩한 마음들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브라흐마위하라 압빠만냐(brahmavihāra appamaññā)라고 할 것 같으면 이 네 가지 한량없는 것들을 갖다가 넓게 펼쳐나가는 것들입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스며든다고 얘기할 때는 브라흐마위하라 파라나(brahmavihāra pharana)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에게도 스며들어야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스며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압빠만냐(appamaññā)라고 하는 용어를 다른 말로 하면 바와나(bhāvanā)가 되고 파라나(pharana)가 되고 그렇습니다. 조금 의미는 다르지만 비슷한 의미로써 쓰여집니다.
결국은 수행으로써 이 네 가지 자·비·희·사라고 하는 것을 계발시켜나가야 되고, 또한 몸과 마음을 다해서 내 것이 되도록, 스며든다고 하는 것은 내 것이 되는 겁니다. 내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은 작용하는 범위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일반인들에게도 미치는 영향들이라는 뜻입니다. 나혼자 미치는 것도 있고 또 다른 분들에게 미치는 것도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사랑하는 마음 자애 멧따(metta : 자애, 慈)를 펼치는 것은 나혼자 해도 됩니다. 다른 사람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까루나(karuṇā : 연민, 悲) 한번 볼까요? 비(悲)라고 표현이 돼 있습니다. 까루나는 어떤 겁니까? 다른 사람이 슬퍼할 때 그 슬퍼하는 것들을 연민을 가지고 내가 거두어 주는 형태입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다른 대상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자·비·희·사라고 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거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들을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네 가지들은 내 독립적인 것이든 아니면 나와 남에게 다 영향을 미치는 것이든 이 네 가지는 압빠만냐라고 그럽니다. 한량이 없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배타적이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누구에게는 해당이 되고 누구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또한 어느 특정한 부분을 선택해서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 이것을 기를 때는 특정한 부분을 선택을 해서 기릅니다. 내가 한량없이 전체를 다 펼쳐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해서 합니다. 선택해서 하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완전하게 길러지고 나면 압빠만냐, 그냥 편애되지 않고 일으켜나가야 되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량심이 다 중요합니다. 다 중요한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뻭카(upekkhā : 평온, 捨)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 네 가지는 긴밀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이 하나씩 하나씩 보면서 그것을 설명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네 가지를 닦는 데는 닦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분명히 닦을 겁니다.
어떤 효과가 있겠습니까? 네 가지를 닦는데? 여러분들 멧따 바와나는 가끔씩 해봤죠. 그렇죠?
보통 멧따바와나 할 때
'삽베 삿따 수키앗따낭 빠리 하란뚜
(Sabbe sattā sukhī attānam pariharantu)'
그런 걸 합니다.
그러면 만약에 '내가 행복하기를' 했다. 아니면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고 나면 어떤 효과들이 있습니까? 내가 먼저 자비로워지죠! 내가 자비로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원장님한테 멧따를 방출했다. 그러면 내가 멧따를 충만되게 해서 방출했으니까 나의 얼굴도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을 거란 말이라. 그럼 이제 원장님도 그걸 보고 성질나 있다가도 그 멧따를 받으면서 성질을 죽여버리고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나에게도 편안한 것들이 있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편안한 것들이 있다는 거라.
자 · 비 · 희 · 사 라는 네 가지는 똑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이런 효과들이 있어야 만이 내가 자·비·희·사를 닦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쎄가빠지게 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런 자비로운 마음이나 연민의 마음들이나 함께 기뻐하는 마음들이나 평온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내가 안 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안 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멧따 바와나를 하면서 얻어지는 이익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멧따 바와나를 할 때 균형을 잃어버리든지 아니면 한쪽으로 치우쳐버려서, 감정적인 욕망을 멧따(metta)로 착각을 한다든지, 아니면 우울하게 돼있는 소까(soka, 근심)를 갖다가 까루나(karuṇā)로 착각을 하고 있다든지 이렇게 서로 어긋나 있는 형태들을 띠게 돼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또한 조심해야 만이 됩니다. 그래서 해야 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 될 때를 부처님이 구분을 해놔놨습니다.
먼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멧따 부분부터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처음에 어떻게 합니까? 멧따바와나를 할 때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행복해지는 마음이 들고 충만되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다음에 자기의 주변 사람들에게 해나가죠!
만약에 여기 같은 경우에는 태종사에서 했다. 내가 먼저 했다. 그럼 스님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큰스님한테 했다가 또 여기 있는 대중들에게 했다가 이렇게 각각의 대중들에게 또 이렇게 해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넓혀가지죠? 이쪽 태종대에 있는 대중들에게, 그리고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넓게 이런 식으로 넓혀나갑니다. 그렇게 자·비·희·사 똑같이 그렇게 해나가는 방식들입니다.
그렇게 해나가는 방식인데 반드시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내가 금방 죽은 사람한테 '내가 행복하기를, 또 당신도 행복하소서' 이렇게 한다 해서 그게 통합니까? 안 통하죠! 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는 하지 말아라. 네 가지에 다 공통됩니다.
그리고 여자분이 있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갖다가 베풉니다 이렇게 하지마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그것을 멧따로 받아들이지 않고 러브(love)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르익기 전에는 이성 간에는 하지 말아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꼭 금해야 되는 것은 처음에 무르익기 전에는 이 사무량심은 이성간이나 죽은 이들에게는 하지 말아라.
일단 그렇게 기본적으로 할 것 같으면 해나가는 방법은 점차적으로 넓혀나가게끔 돼있습니다. 그런 한 방법이 있고, 나중에 우뻭카를 예를 들어가지고 우뻭카의 경우를 생각할 경우에는 특정한 대상을 정하지 않고 해나갑니다.
예를 들면 동쪽에 있는 사람들 전체, 그다음에 서쪽, 남쪽, 북쪽 그러고 나서 동남쪽에 있는 사람, 이렇게 여덟 방위를 하고, 아래에 있는 사람, 천상에 있는 사람, 이런 식으로 열 방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나가는 이유는 마지막에 가서는 어떻게 됩니까? 그냥 방출하는 거죠. 멧따든 까루나든 벽을 두지 말고 전체를 펼쳐나갑니다. 그때가 돼야 만이 진정으로 내가 멧따나 까루나나 이런 사무량심을 펼쳐나간다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자! 그럼 이렇게 하면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 사무량심을 바와나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을 겁니다. 수행이라 그러죠? 뭘 얻기 때문에 바와나라고 합니까?
(수행자 대답)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대상에 대해서 내가 깊이 생각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아롱아롱아롱 맺히겠죠? 그 대상이 떠나지 않게끔 돼나갑니다. 선정수행 할 때 맨 처음 계발되는 게 뭡니까? 니밋따(nimitta)입니다. 니밋따가 형성이 돼야 되는 겁니다. 니밋따가 형성이 되면서 마음이 그 대상에 오롯이 가 있을려고 한단 말입니다. 물론 그것에 꼭 매달려 있으면 좋은데 안 매달리더라도 그 가까이 가거든.
그래서 근접삼매가 계발되는 거라. 그렇게 되면서 이것이 더욱더 높은 경지로 가면서 초선의 경지로 들어가지고 2선의 경지로 들어가지고 3선의 경지로 들어가지고 그렇게 되어나갑니다.
그런데 앞의 세 개는 3선까지가 가능합니다. 마지막 우뻭카 만이 4선까지 도달해집니다. 그거는 왜 그런지 조금 있다가 설명이 되어질 겁니다.
어쨌든 이런 방법으로 해나갑니다. 공간적인 방법으로써 확장을 해나가기도 하고 아니면 어떤 특정한 대상을 중심으로 해서 확장을 해나가기도 하고 이렇게 해나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왜 수행을 할 때, 그리고 수행을 하기 전에 이 네 가지 바와나를 하라 하고 얘기합니까?
그래서 보통 수행 서적에 보면 본격적인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전에 보통 뭐 하라고 그럽니까? 멧따 바와나를 실천하라 하고 얘기하죠. 왜 멧따 바와나를 실천하라고 그러겠습니까? 바로 위빳사나를 수행하면 가능할 것 같으면 문제가 아닌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할 때 바로 대상에 몰입을 못해나갑니다.
그럴 것 같으면 대상에 몰입하기 위한 수단들을 쓰는 것이 이 멧따 바와나, 아니면 천천히 절을 하는 절수행법, 아니면 아수바 바와나(asubha bhāvanā, 不淨觀)라 해서 죽음에 대해서 수행하도록 하는 그런 것들을 하라 그럽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수행을 해나가면 적어도 들뜨고 하는 부분은 잠재울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 들뜨는 것만 잠재워진다 해도 큰 이익입니다.
전에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앞에 와서 탁 치였는데 그 치이는 사람이 와서 내 머리 바로 앞에 있는 유리창을 탁 치고 옆으로 지나가는 모습, 아주 찰나지만 그것이 선명하게 탁 보인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겠습니까? 갑자기 일어난 대상이지만 내가 거기에 놀램이 없이 들뜨지도 않고 대상을 그대로 관찰해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이 일어난다든지 들뜸이 일어날 거 같으면 “엄마야!” 해버립니다. 눈을 탁 감아버립니다.
일상생활하는 데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고 고통스러운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적어도 그런 들뜨는 것이 없이 대상을 그대로 바라만 보기만 하더라도 적어도 일어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더 나쁜 상황으로 만들어나가지는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펼쳐나가야 되고 스며들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멧따(metta : 자애, 慈) 부분 한번 봅시다.
멧따는 어떤 것입니까? 거기에 호의, 신애, 자애 이런 얘기들을 해놨습니다.
직접적인 적은 증오 또는 악의를 가지는 꼬다(kodha)라는 것이고,
간접적인 적은 뻬마(pema)라고 하는 애정, 이성 간의 애정이든 이런 애정들이라는 얘기들을 해놔 놨습니다. 그럼 멧따라고 하는 건 뭡니까? 애정이 없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들이면 어떤 것들입니까?
(수행자 대답) 그렇죠.
'우정'과 유사한 겁니다. 친구 간에 가지는 감정들하고 비슷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우리 소꿉놀이할 때 친구이다. 누가 뭐가 필요하다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냥 줍니다. 대부분 계산 안 할려고 합니다. 내 것이라는 어떤 소유의식들을 안 가진다는 거라. 니가 필요하다니까 나는 있으니까 그냥 주는 거라. 설혹 내가 없어도 니가 우선 더 급하니까 니가 먼저 해라.
'소유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들' 이런 것들이 멧따의 기본적인 성격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줬다는 생각을 가집니까? 대부분 그리 안 합니다. 그냥 '나를 내세우지 않고 그냥 행하는 행동들'입니다.
멧따를 행할 때 반드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를 내세우는 것인가 아닌가?
그다음에 내 소유라고 하는 것들, 욕망을 가지고 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이 판단기준으로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또한 그런 것을 할 때 뒷일을 생각하고 하는 것들,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배재하고 하는 부분이 있는가 없는가
이것들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래서 멧따를 방출할 때는 절대 이런 것들이 없이 그냥 용기를 내서 실천하는 것들이 돼야 만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멧따는 어떤 것입니까?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이 말한 사성제의 진리를 그냥 보여주는 겁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만큼 더 큰 멧따가 없습니다. 이것이 고(苦)고 이것이 집(集)이고 이것이 멸(滅)이고 이것이 도(道)다 하는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최고 좋습니다.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 이런 것들을 여실히 드러내게 됐을 때 이것이 가장 큰 멧따 입니다.
누가 그거보다도 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없습니다. 그 진리를 체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다들 꼬이고 비틀어지고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체험하게만 해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방출하는 것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자! 그러면은 멧따 바와나를 하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일체중생들에게 하는 것들을 해보겠습니다.
삽베- 삿따-, 아웨-라- 혼-뚜 Sabbe sattā averā hontu
모든 중생들이 악한 마음이 없어지기를
아브야-빳자- 혼-뚜 abyāpajjhā hontu
모든 중생들이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아니-가- 혼-뚜 anīghā hontu
모든 곤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수키- 앗따-낭 빠리하란뚜 sukhī attānam pariharantu
모든 중생들이 항상 평안하기를
맨 처음에 자기 자신에게 내가 악한 마음이 없어지기를 행복하기를 하는 겁니다. 그다음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정신적인 두려움들입니다.
그다음엔 육체적으로 겪는 곤란들 고통들이 사라지기를.
그래서 내가 항상 평안하게 평온하게 지내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다음엔 다음 대상에게, 다음 대상에게 하고.
이렇게 실천해 나가는 것이 멧따 바와나 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멧따를 실천할 때는 악의를 버려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멧따를 능숙하게 계발한 자는 인자한 자, 인자한 태도를 지니는 그런 자가 된다"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참 인자한 자가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부처님 법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 부처님 법을 열심히 전해줄려고 하고, 그 부처님 법을 그 사람이 따르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멧따 입니다. 나도 실천해야 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자꾸 그런 것들을 권하고 이끌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멧따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까루나(karunā : 연민, 悲) 부분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까루나만 나와 있습니다. 까루나는 '연민'입니다. "다른 이들의 슬픔을 달래주는 것, 다른 이들의 고통을 흩어버리는 것이 까루나이다" 하고 돼있습니다. '달래주고 흩어준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들은 다 내 과거 전생에 가족이었습니다. 맞습니까? 어느 생에서든지 나와 연관을 맺지 않은 분들은 없습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데와(deva)든 지옥이든 어떤 경우든 육도 윤회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나의 친족일 뿐입니다. 윤회의 친족입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 윤회하는 자들은 항상 서로 간에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지금 누가 다리가 부러져서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나는 내 할 일 바쁘다고 휙 가버린다. 여러분들 가족일 것 같으면 그리하겠습니까? 그리 못합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일단 멈추고 그 다리 부러진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가게 됩니다.
남의 고통을 아파하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고 그것이 부족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런 고통을 받게 돼있다는 겁니다. 윤회의 고통을 받게 돼있다는 겁니다. 나에게 다리 부러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을 하느냐는 거라.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이것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는 거라.
언제든지 내가 그 슬픔이나 아픔들을 달래주고 함께 가야 될 의무가 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내가 스스로 그런 고통을 당해서 이런 연민의 마음들을 배울려고 하지 말고 지금 내가 성한 몸을 지니고 또 바르게 살아갈 때 연민의 마음들을 가지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윤회하는 세계에서의 철칙입니다. 이생은 그것으로 인해서 돌아가집니다. 자애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 까루나로 인해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들입니다.
단지 그런 까루나라고 하더라도 재물이 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슬퍼한다고 가서 같이 엉엉엉엉 울어주고 하는 그것이 까루나는 아닙니다. 거기도 나와있죠.
간접적인 적은 도-마낫사(Domanassa) 정신적인 슬픔입니다.
직접적인 적은 힝사(hiṁsā)입니다. 아힝사(ahiṁsā) 얘기 많이 들어봤죠? 해치는 것, 남을 해꼬지 할려는 것, 살의를 품는 것들, 이런 것들이 직접적인 적이지만, 그것은 드러나는 것이지만 정신적인 슬픔이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더 큰 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아픔을 같이 하지만 그 재물은 되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나?
말을 할 때나 행동할 때나 마음속으로 이런 연민의 마음이 충만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충만되지 않으면 그 노예가 돼버립니다. 마음이 슬픈 것에 따라서 내 마음도 흔들려버리고 같이 슬퍼져버린다는 거라. 다른 얘기로 할 것 같으면 똑같은 놈들 둘이서 뭘 하겠느냐는 거라. 안 된다는 거라.
이런 것들은 고(苦)에서 해탈할려고 스스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 스스로 이기적인 갈애에서 해방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나의 이익이나 남의 이익을 갖다가 자꾸 구분할려고 할 것 같으면 까루나는 생성될 수가 없습니다.
까루나 하는 방법은
삽베 삿따 둑카 빠뭇짠뚜 (Sabbe sattā dukkhā pamuccantu)
모든 중생들이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들, 정신적으로 겪는 괴로움들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하는 마음들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화롭고 의연해야 만이 까루나를 충만되게 하고 스며들게 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무디따(muditā : 기뻐함, 喜) 부분
동정이 아니라 기뻐하는 것을 '더불어서 기뻐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기뻐하는 것도, 만약에 내가 누굴 태종사 가서 같이 수행해보자 해가지고 데리고 왔다. 그런 그 사람이 법을 듣고, 법을 이해하고, 법을 또 체험해서 기뻐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듣고 내 입장에서는 참 기쁘겠죠? 내가 기쁜 겁니까? 사실은 내가 기쁜 일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으로 인해서 내가 같이 기뻐해 주죠? 그것이 바로 무디따(muditā) 입니다.
내가 그 사람 여기 데려온다 해가지고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런 겁니까? 그건 절대 아니죠? 법을 이해하고 듣고 법을 따르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기쁨은 우리에게는 더욱더 고귀한 기쁨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에게 법의 이익을 나눠 줄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무디따(muditā)라고 그럽니다. 누가 복권 당첨됐다고 해서 아, 좋다 하고 기쁘다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기쁨을 향유하는 것, 이것을 자꾸 인도하도록 해야 됩니다.
삽베- 삿따- 얏타 랏다 삼빳띠또- 마-위갓찬뚜
(Sabbe sattā yattha-laddha-sampattito māvigacchantu)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 얻은 공덕들, 그런 공덕들이 그 자신으로부터 떠나지 않기를 하는 마음을 가져라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들 공덕 많이 쌓죠?
스님들께 탁발을 하기도 하고, 계를 지키기도 하고, 이렇게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내가 무디따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그 공덕이 떠나지 않기를, 그 공덕이 그대로 드러나서 그 사람이 기뻐하는 일이 생기기를' 그것이 무디따입니다.
물론 나도 그러한 공덕들이 얻어지는 공덕들입니다. '내가 노력하여 얻어지는 공덕들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기를' 하고 바래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 자꾸 공덕을 쌓아서 그 공덕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바른 생활들을 해나가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들이 바로 무디따입니다.
그다음에 우뻭카-(upekkhā : 평온, 捨) 부분 봅시다.
우뻭카는 '애착, 혐오감 없는 마음이 균형 잡힌 상태를 우뻭카라고 한다' 그럽니다.
칠각지에도 우뻭카가 있죠? 알아차리는 관찰력으로 인해서 마음이 어떤 상황이든지 움직이지 않고 요지부동해 있는 것, 이걸 우뻭카라고 그럽니다.
요지부동해 있다는 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상황 저런 상황에 중도를 딱 잡고 있어가지고 균형을 맞추고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을 되도록 하지 않고 바른길로 균형을 잡게 되고, 수행하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여서 흐지부지 방탕하는 생활들로부터 균형을 잡게 되고, 그러니까 나에게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 악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악으로부터 멀어지니까 나에게 오는 비참함이라든지 불이익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점점 떨어져 나가는구나.
그래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하는 자체가 크게 결점이 없이 살아가고, 청정하게 살아가고 있고 또 그렇게 내가 노력을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갈 것 같으면 미래에는 틀림없이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내가 이런 식으로 나아갈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이것이 우뻭카입니다.
균형 잡힌 마음이라는 것은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행하지 말아야 하고, 행해야 될 것은 더욱더 행하게 될 때 얻어지는 균형을 균형 잡힌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으로 인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또한 더욱더 노력할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 평온한 마음들은 생겨나게 돼있습니다.
이때야만이 모든 대상이 나의 친구가 됩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이든 아니면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이든 이런 것들이 나의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뻭카를 완전하게 계발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앗따(attā) 자아라고 하는 개념을 제거를 해야 만이 가능합니다. 완전하게 제거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제거할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그 앗따(attā)로 인해서 평온이 방해받지 않아야 됩니다.
실질적으로 보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앗따(attā)에서 다 나옵니다. 「나」라고 하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들이 생겨납니다.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질려면 이렇게 앗따(attā)를 제거를 해야 만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사선(四禪)의 경지에서만이 우뻭카를 계발할 수가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또한 그렇습니다.
자! 우뻭카 부분 한번 해봅시다. 회상해야 될 게송에 나와 있죠?
삽베- 삿따- 깜맛사꼼히.
Sabbe sattā Kammassakomhi.
깜마다야도 깜마요니 깜마반두 깜마빠띠사라노
kammadāyā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ṭisaraṇo
모든 중생들은 업을 만든 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 의해 태어나고, 업을 집착하여, 업을 만든다.
양 깜망 까리사미 깔르야낭 와 빠빠깡 와 땃사 다야도 바윗사미띠
Yaṃ kammaṃ karissāmi kalyāṇaṃ vā pāpakaṃ vā tassa dāyādo bhavissāmīti
우리는 우리가 지어놓은 착한 업이든 악한 업이든 그 결과는 반드시 우리가 받아야 할 처지라네.
아침저녁 예불문에 하죠? 우뻭카 하는 게송이 이겁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죄를 받아야 되는 것이고, 내가 업을 쌓았으면 그 업은 다른데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아야 되는 것이다. 업을 짓는 자도 나고, 업을 받는 자도 나고, 그러니까 나쁜 업이든 착한 업이든 어차피 내가 받을 것일 거 같으면 뭘 해야 되겠느냐는 거라.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업을 짓도록 해야 되고, 그리고 업을 짓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 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뻭카 부분입니다.
이것이 자·비·희·사 사무량심입니다.
자애는 연민하고 밀접하게 연관이 돼있습니다.
연민은 자칫 잘못하면 감정의 흐름으로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한쪽으로 편파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뭐로 막아줘야 되냐면 자애로써 막아줘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만 길러버리면 한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해집니다. 그런데 사무량심을 똑같이 길러버리면 한쪽으로 넘어가지는 것들을 방어를 해줍니다. 그래서 자애로 인해가지고 이 연민을 방어하고 한쪽으로 흘러갈 수 있는 것들을 막아야 됩니다.
자애를 계발하면 우뻭카-평온이라고 하는 것에 날카로운 면들을 제거해줍니다.
평온은 어떤 면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무기력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날카롭게 관찰하는 대상이든 아니면 행해나가는 대상이든 대상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자애의 힘으로 인해서 통찰하게끔 해줍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무기력에 빠지고 나태에 빠지고 들뜸에 빠지고 하는 것들을 억제해주는 것들은 이 자애가 해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자애는 자칫 잘못하면 한정된 대상에, 그것이 행복인양 빠질 수가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아까도 얘기했죠? 잘못된 사랑도 사랑인양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정된 행복을 즐길려고 하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어떤 면에서는 집착인 거죠. 그런 집착심을 여의게끔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연민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고(苦)는 존재합니다.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법이 있습니까? 괴로움을 바탕으로 해서 태어나는 것이 이 연민입니다. 고(苦)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만 준다고 하더라도 자애는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들어있습니다.
또한 이 연민이 어떤 면에서는 평온이 아주 무덤덤한 감각, 무관심으로 떨어지는 것들을 막아줍니다. 고(苦)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평온-우뻭카라고 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들로 고립되어 버리는 것, 나 혼자서 스스로 고요함만 즐길려고 하는 것들로 빠지는 것들을 막아주는 것이 또한 이 연민입니다.
함께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연민이 자칫 잘못하면 같이 우울에 빠져버립니다. 같이 우울에 빠지는 것들을 막아주는 역할들을 해나갑니다. 왜 그렇겠어요? 함께 기뻐할 때는 항상 에너지가 넘칩니다. 노력할려는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나지고, 그래서 쓸데없이 감정에 빠지는 것들을 막아주는 것이 이 함께 기뻐하는 특성들입니다.
또한 기뻐한다고 하는 것이 우뻭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뻭카는 어떤 면에서는 한편으로는 평온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엄숙하게 흐르게 됩니다. 엄숙하게 흐르게 되는 것들을 방어를 해주는 것이 함께 기뻐하는 부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 네 가지들이 긴밀하게 역할을 해줍니다.
그리하더라도 평온이라는 우뻭카가 다른 세 가지의 안내역할을 하고, 자제하는 것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나아가야 될 방향들을 지시를 해주는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앞에 세 가지가 평등심 평온함을 갖다가 유지를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어떤 것이든 한쪽으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브레이크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이 우뻭카-평온이라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의 안전장치라는 그런 뜻으로써 평온이 있게 됩니다.
자애가 만약에 노력할려는 마음들이나 통찰력이 없을 것 같으면 한쪽으로 흘러가버립니다. 그 자애는 아주 나약해져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행복하기를' 속으로 중얼중얼중얼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실제적으로 행복해지지도 않으면서.
그러한 통찰력을 가지고 또한 집중력을 키워주는 것들도 이 우뻭카가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칠각지에 이 우뻭카가 들어있는 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냥 여기에도 우뻭카가 있고 저기에도 우뻭카가 있는 것이 그냥 단순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연관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우뻭카를 반드시 계발을 해나가야 됩니다.
어떻게 계발합니까? 다른 거 없습니다. 스님이 만날 강조하죠?
사띠 입니다. 사띠! 끊임없는 알아차림만이 이것을 가능하도록 해줍니다.
끊임없는 알아차림은 날카롭게 꿰뚫는 지혜 부분, 그다음에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신심 부분의 조화를 맞춰줍니다. 신심이 강해버리면 한쪽으로 흘러가버립니다. 지혜 부분이 강해도 한쪽으로 흘러가버립니다.
그런데 사띠가 끊임없이 일어나지면 이 두 개는 반드시 균형을 맞춰집니다. 그것이 우뻭카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신심 삿다(saddhā) 부분하고 빤냐(paññā) 부분하고 균형을 맞추는 거고, 그다음에 위리야(vīriya)하고 사마디(samādhi)하고 균형을 맞춰주는 것도 이 사띠(sati) 입니다.
위리야가 넘치면 넘칠수록 반대적인 급부가 생겨납니다. 확 할려고 했다가 안 되면 푹 꺼져버립니다. 그 위리야를 조절해주는 것도 이 사띠인 것이고,
사마디가 강해도 잠겨버립니다. 그것을 제어해주는 역할도 사띠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사띠는 오력 중에서 항상 깨어있도록 만들어라 하고 얘기했습니다.
우뻭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띠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마만큼 이 위빳사나 라고 하는 것이 곧 사띠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고, 그마만큼 사띠가 중요한 겁니다.
이 네 가지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를 다 통괄하고 통제하고 콘트롤 할 수 있는 것도 이 우뻭카 부분이고, 우뻭카를 살려주는 것들도 바로 사띠이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부분을 잘 알아서 사무량심을 항상 계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잘 안되면 마지막 부분만 자꾸 읽으십시오.
복수심에 불타고 있으면 자애를 펼칠 수 없고,
스스로 우울해 있으면 연민을 일으킬 수 없고,
나와 남을 비교하면 함께 기뻐할 수 없고,
무상함을 모르면 평온을 계발할 수 없다.
이것은 간단하게 스님이 정리한 겁니다.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알고 있으면 사무량심을 계발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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