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빠군냐따/우주까따 : 몸과 마음의 능숙함/정직성 (kāya ca citta pāguññatā/ujjukatā) (20070106)

담마마-마까 2020. 10. 4. 00:11

https://youtu.be/Ast56ygxR_U

[[ 교재 부분

16. Kāya-pāguññatā (까-야빠-군냐따- : 몸의 능숙함)

17. Citta-pāguññatā (찟따빠-군냐따- : 마음의 능숙함)

 

빠-군냐따-는 숙달성, 능숙한 것, 연습이 끝난 상태인 것, 일을 제대로 하는 상태란 뜻입니다. 그처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일을 하는 것만 아니라, 능숙하게 하는 기능입니다.

그 주요한 특징은 마음과 그 부수물인 심소의 불신이라는 병의 억제입니다.

 

담마상가니에 이 한 쌍은 kusala가 일어나기 적당하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앗타살리니-에는 마음과 마음부수가 정신 장애 즉 나쁜 일들을 초래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kusala에 대한 신뢰감이 부족할 때 정신적 병인 불신이 생겨납니다. 즉 마음이 불선심일 때 장애가 생겨납니다.

마음의 능숙함은 kusala citta를 돕습니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 citta와 cetasika는 건강하고 능숙합니다. 즉 능률적이 됩니다.

바른 이해가 있을 때, 여러 가지 kusala에서 숙달과 능숙함의 상태를 조절합니다.

 

수다원은 틀린 견해, 의심과 남을 해꼬지 할려는 것들을 근절했습니다. 그리고 수다원은 다섯 가지 도덕적 지침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능숙함이 있는 사람은 관용이 있고 순수해지며 어떤 틀린 견해도 가지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신뢰감은 더욱 견고해져서 그로인해 "힘"이 됩니다.

그는 바르지 못한 것들과 비교해보고 kusala에 관해 능률적이고 더 많이 행하게 됩니다. 또한 다른 유능하고 효율적인 길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수행자는 모든 일에서 빈틈이 없고 정력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능숙해지는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 멧따-자-나(자애선정)를 닦았던 수부-띠(수보리) 장로의 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이 성숙되어지고 번뇌가 근절되어지면 더 높은 능숙함이 따라옵니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능숙함은 완전해집니다.  ]]

 

 

* 빠-군냐따/우주까따 : 몸과 마음의 능숙함/정직성

(kāya ca citta pāguññatā/ujjukatā) (20070106)

 

요즘은 오후 두 시 돼서 30분 간은 매일 법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 기초부분을 잘 모르시는 분들, 시간나시는 분들은 그때 동참하면 같이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같이 다 2시부터 수행을 쭉 해도 좋고.

매일 두 시부터 법문하고 나서 수행하고 그렇게 이어집니다.

 

오늘 할 거 한번 봅시다. 오늘은 깜만냐따부터 하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항상 수행자는 부드러워야 된다, 무두따(mudutā) 해야 되고, 빳삿디(ppassaddhi)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야 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깜만냐따(kammaññatā)부터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깜만냐따 했죠? 적응성 했고. 오늘은 빠군냐따(pāguññatā) 하겠습니다.

 

빠군냐따(pāguññatā)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풀이를 해놓은 것은 '능숙함'이라고 해놓았습니다. 매주 목요일날하고 일요일날 탁발을 하러 절에 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탁발하러 오는데 인제는 으레 목요일날하고 일요일은 탁발하는 날이니까 그날 아침되면 자동적으로 스님들께 공양 올릴 거 음식 만들어가지고 아무런 부담 없이 절로 쓱 오는 사람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 또 오늘 만들어가야되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음식을 해서 절에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빠군냐따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런 선업을 쌓는 일, 다나(dāna)든 실라(sīla)든 바와나(bhāvanā)든 어떤 것이든 '선업을 쌓는 일에 마음에 부담이 없이 자연스럽게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빠군냐따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몸으로 익어야 되고 마음으로 익어야 자연스럽게 되어 나갑니다.

남방에 가보면 수행을 하고 나든지 아니면 이런 다나를 하고 나든지 그렇게 끝나고 나면 뭐합니까? 찬탄들을 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sādhu sādhu sādhu)!!!" 하든지 안 그러면 "오까사 오까사 오까사(okāsa okāsa okāsa)!!!" 하면서 찬탄들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수행 끝나고 나서 또 법회 끝나고 나서도 마지막에 뭐합니까? 이 "사-두 사-두 사-두" 하죠? '훌륭한 일을 해가지고 찬탄 받을만하다' 하는 이런 것들을 빠군냐따 라고 한다고 이해를 하시면 수월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부담이 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능숙하게 하지 못하겠죠?

왜 마음에 부담이 생깁니까?

내가 이 일을 하므로 해서 정말로 좋은 결과가 올까? 아니면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되는가? 하는 믿음들이 없기 때문에 부담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만약에 누가 어떤 일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결과가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 더 좋게 나왔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음에 그런 일을 할 때 적극적으로 합니다.

 

그게 빠군냐따가 생기게 할려면 '우선 믿음이 있어야 만이 가능하다' 하는 얘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요즘 스님이 절에 재정문제나 이런 것들을 전부 다 다른 사람에게 다 맡기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믿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온갖 생각들을 다 할 겁니다. 애가 뭘, 돈을 떼어먹지는 않는가? 아니면 뭐 어떻게 잘못되지 않을까? 이런 마음들이 항상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또 바꾼다든지 그런 방편들을 쓰게 돼있다는 거라.

 

믿는 마음이 생겨나지 못하면 먼저 생겨나는 게 뭡니까? 번뇌가 생겨납니다.

번뇌는 여기도 써놨죠? 번뇌는 병이라는 거라. 이 번뇌라고 하는 것들은 자기 자신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게끔 돼있고 그 번뇌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괴로운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도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는 거라

 

빠군냐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지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불신이라는 것을 억제하고, 이런 것들과 결합을 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결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선업을 짓는데 자연스럽게 능숙하게 하게 된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니소 마나시까라 많이 들어봤죠? '적당하게 숙달돼있는 그런 행동들, 그런 태도들로 인해가지고 나에게서 불선업이라고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이미 나는 무엇이 적당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그 일을 그대로 행해나가기 때문에 나쁜 불선업의 요소들은 나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업을 행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와나(bhāvanā)입니다. 수행입니다. 수행을 해나가는데 빠군냐따가 갖춰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에서 온갖 의심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온갖 장애들이 생겨납니다. 그 밑에 써놨죠?

「수다원은 틀린 견해, 의심과 남을 해꼬지 하려는 것들을 근절했다.」

그러니까 빠군냐따가 갖춰지지 않으면 바른 견해도 생겨나지지 않고 의심을 하게 되고, 남을 해치려는 악한 마음도 품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라. 수행을 해나가는데 자연스럽게 일상생활과 좌선·경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행할 때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용을 씁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수행의 부분은 까먹어버립니다. 능숙한 게 아니죠?

 

적어도 능숙하다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집중수행 하는 것에 갭이 없어야 만이 능숙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능숙해져가고 있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의심도 생기고 악의도 생기고 바른 견해를 갖지도 못하고 그렇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하고 알 것 같으면 빨리 능숙하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런 선업을 짓는 일에 하루빨리 능숙하게 만들어라 하는 거라. 그것이 빠군냐따를 갖추는 길입니다.

 

자세하게 써놨기 때문에 여러분들 한번 쭉 읽어보면 그렇게 어려운 부분은 아닐 겁니다.

밑에 부분에 수행자는 모든 일에서 빈틈이 없고 정력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능숙해지는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물론 내가 수다원이 되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능숙함을 훈련해서 능숙하게 되도록 만들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완전하게 능숙해질려고 할 것 같으면 아라한이 돼야 만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아라한이 될 때까지 능숙한 걸 만들어나가지 못하면 언제든지 우리에게는 그런 번뇌들이 찾아올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제자 수부띠의 예를 스님이 들어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부띠, 수보리를 뭐라고 그럽니까? 해공제일(解空第一) 이라고 그러죠? 공에 대해서 가장 뛰어난 분이라고 그러는데 나는 아직도 이 부분을 이해를 못합니다. 왜 공(空)이라는 개념을 썼을까? 하는 부분은 아직도 스님은 솔직히 이해를 못합니다.

(수행자 질문)

금강경이나 이런 데 보면 그렇지만, 어쨌든 수보리 존자, 수부띠의 일생을 보면 수부띠가 출가를 어떻게 하게 됩니까? 부처님 법문 한마디 듣고 그냥 출가를 하게 됩니다. "너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뭐 그리 집착할 것이 있느냐" 이 한마디 듣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수행법에 대한 것들 공부를 지도를 받고 나서 깨달음을 이루게 되는데, 여기에 나와 있듯이 이 수부띠 존자가 가장 많이 했던 게 이 멧따 자나(metta jhāna)입니다. 멧따 자나. 자애, 선정상태에 들어서 자애를 널리 방출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아주 능숙하게 했던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정 부분에서 최고다 할 것 같으면 스님이 이해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공(空)이라고 하니까 스님이 어떨 때는 의아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화는 있습니다. 저도 빔비사라 왕인지 빠세나디 왕인지 정확하게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두 왕 중에 한 분입니다. 아마 빔비사라 왕일 겁니다. 활동무대가 그쪽 마가다국이기 때문에. 이 마가다국에서 가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수부띠 존자가 멧따 자나를 아주 능숙하게 한다는 얘기를 대중들이 다 알고 있었고 이 빔비사라 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빔비사라 왕이 수부띠 존자를 초청합니다. 그래서 초청을 해와서 지낼 방사를 마련하고 수부띠 존자를 모시게 됩니다. 수부띠 존자가 그 방사에 들어가서 하늘을 관찰합니다 멧따 자나(metta jhāna)로써. 선정상태로써 허공에 대고 멧따를 방출을 합니다.

 

멧따를 방출하다 보면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걸 아주 능숙하게 잘했다 그럽니다. 만약에 내가 여기 있는 분들에게 멧따를 쭉 방출을 하는데 마음에 그런 자비로운 마음이 없고 악한 마음들이 있고 할 것 같으면 그 부분에 가서 걸린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멧따를 더 방출하고 이렇게 하는 걸 아주 능숙하게 하는 거라.

 

이 수부띠가 허공에다 대고 멧따를 방출하다 보니까 허공에 뭐가 있습니까? 구름이 있습니다. 그 구름의 방향이 이쪽으로 이동을 하는데 오늘 오후 되면 구름이 이쪽에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왕에게 “왕이시여, 오늘 오후가 되면 이 가뭄이 해결될 것입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선정상태에 들었다가 좌복, 옛날에는 스님들 좌복이 '삐띠야' 라고 하는 풀로 만든 좌복이었습니다. 좌복에 앉아서 발을 이렇게 드는 상태에서 ‘아, 인제 비가 내리겠구나’ 하는 걸 알고 “비야, 어서 오너라” 하면서 말을 방출합니다. 그걸 밖에서 왕하고 대신들이 보는데,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거든. 그런데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비가 와르르 쏟아지는 거라. 그래서 이 가뭄을 해결했다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공(空)에 대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허공에 대하고 멧따를 방출한 것인데.

 

어쨌든 그 얘기는 뭡니까? 멧따 자나만 충실하게 하더라도 이 능숙함은 갖출 수 있다 하는 겁니다. 내가 필요할 경우에는 이런 선업을 자기 스스로 쌓고, 다른 사람들이 쌓는데 용이하게끔 해줄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성숙되어지고 번뇌가 근절되어지면 더 높은 능숙함이 따라오게 된다 하는 겁니다.

몸과 마음에 번뇌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업을 쌓는 일에 더욱더 노력을 하게 됩니다. 또한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뿐 아니라 남을 돕는 일에 더욱 힘쓰게 되게 돼있고, 또한 출가자들 같은 경우에는 법을 설하는데 더욱더 힘쓰게끔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뭐라고 그럽니까? "법을 설하는데 아주 능숙하신 분"이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이라는 아라한은 이런 능숙함을 완벽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빠군냐따 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바와나, 그것이 설혹 사마타 바와나(samatha bhāvanā) 일지라도 닦도록 하십시오. 위빳사나 바와나(vipassanā bhāvanā)일 것 같으면 더더구나 더 좋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런 멧따 바와나(metta bhāvanā) 멧따 자나(metta jhāna)는 여러분들이 항상 닦아나가서 내 스스로 선업을 쌓는데 자연스럽게 능숙한 자가 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빨리 진행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주까따(ujjukatā 정직성) 부분입니다.

 

'정직성',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분명하게 올바르게 하는 것'들을 우주까따(ujjukatā)라고 그럽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속이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속이는 건 전에 아꾸살라 쩨따시까 할 때 했죠?

마야(maya)라고 하는 부분, '속임수'라고 하는 부분, 아꾸살라 할 때 마야 부분을 했습니다. 오디오를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야는 마술사와 같다'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걸 손에 쥐고 “자! 이거 보십시오.” 이러고 나서 손을 탁 감춰서 이렇게 탁 펴니까 황금이 되어서 탁 보인다. 이런 마술은 뭐로 얘기할 수 있습니까? 실제 이게 황금으로 바뀐 건 아니죠? 속인 거죠? 속인 겁니다. 언제까지 그리할 수 있습니까? 언제까지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남을 속이는 것은 한계가 있게끔 돼있습니다.

 

또한 부정직함, 그 밑에 부정직함이라고 있죠? 사뜨야(satya) 라고 하는 것 그것도 스님이 설명을 했습니다.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사뜨야 라고 한다'고 그랬습니다.

마야는 그 사람의 '험을 덮어버리고 숨기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척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사뜨야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걸 있는 것처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말을 하죠? 덕이 없으면서도 덕이 있는 것처럼, 능력도 없으면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돈도 없으면서 부자인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들이 사뜨야라고 합니다.

 

이렇게 "마야와 사뜨야가 없는 상태 이것을 우주까따 라고 한다"고 생각을 하시면 수월합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속이고 사기치고 하는 것들은 반드시 드러나게끔 돼있습니다. 또한 마야와 사뜨야 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욕심부리는 로바(lobha)-탐욕보다도 더 부정한 것들입니다.

탐욕은 드러나는 것이지만, 마야와 사뜨야 라고 하는 것은 감추어져버리고 속이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 부정한 것들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 마음에서 부정직한 것들이나 부정한 상태가 드러나도록 하면 안 됩니다.

 

있는 상태, 경험한 것들을 그대로를 드러내야 만이 진척이 있게끔 돼있습니다. 가끔씩 여기 수행하러 와있는 출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좌선하고 경행하는 걸 봅니다. 스님이 보기에는 경행을 적어도 여섯 단계로 할 수준이 아닙니다.

그런데 천천히 걸으면 남들이 좋게 봐주는지 스님하고 똑같이 천천히 걷습니다. 어떨 때는 더 늦게 걷습니다. 걸으면서도 몸은 몸대로 뒤뚱뒤뚱뒤뚱하고 어떤 경우는 서서 가다가 조불기까지 합니다. 그렇게들 하지? 그것은 정직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경행을 할 때 어떤 상태로 걷는 것이 가장 내가 관찰하기 용이한가 하는 걸 자기가 먼저 파악을 해야 되는 거라.

사물의 특성이 무겁고 가볍고 움직이고 하는 특성들이 드러나는 것이 빨리빨리 걷는 데서 특성이 드러날 것 같으면 빨리 걸어야 되는 것이고, 천천히 걸어서 드러날 것 같으면 천천히 걸어야 되는 거라.

천천히 걷는 중에서 중간에 자꾸 끊어지면서 번뇌가 들어오고 이어지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내가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고 정직하게 볼 수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거기에 맞게끔 걸어야 되는 거라. 수행을 할 때, 좌선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진 거라.

적어도 수행을 하는 사람이면 이 정직한 부분은 반드시 갖추어나가야 됩니다.

 

밑에 「성스러움이라고 하는 것」

우리 상가 부분에 보면 우주빠띠빤노(Ujupaṭipanno) 하는 부분이 나오죠? 그게 뭡니까? '곧고 진실되고 바른 방법으로 실천하는 자'들에게 붙이는 것이 우주빠띠빤노 라는 것입니다.

밑에 쭉 읽어보면 크게 의문 나는 점은 없을 겁니다.

 

오늘 시간까지 마음의 정직성까지 해서 19번까지를 전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섯 개의 쌍이 이제 끝났습니다. 그다음에 빨리 진도를 넘어가서 위라띠(virati)로 넘어가고 해서 소바나(sobhana) 부분 빨리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