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재 부분
7. manasikāra (마나시까-라 : 마음새김 作意) : 마음(인식)을 일으켜 작동시키는 기능, 자발적 주목, 마음새김.
마나시까-라는 마음에 대상을 새기는 것으로, 마음부수를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기능입니다. 마나시까-라는 반응에 속하며, 마음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7가지 마음부수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제일 처음에 ‘대상을 직면하는’ 것이며, ‘관련되는 마음부수들을 마음에 묶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백 개의 나무기둥을 가지런히 세워 놓았을 때, 맨 앞의 나무기둥을 넘어뜨리면 모든 나무기둥이 넘어집니다. 마나시까-라는 그처럼 모든 심소의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방아쇠와 같은,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은 기능을 합니다. 웨-다나-, 산냐-, 쩨-따나- 등은 각각 자신의 기능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마나시까-라가 작동해 그러한 심소를 움직입니다. 어찌보면 쩨-따나(의지)의 기능과 닮아 있는 것 같지만, 바르게 설명하면 쩨-따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에너지고, 마나시까-라는 「자, 하자」라고 작동시키는 키와 같은 기능입니다.
마나시까-라는 위딱까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위딱까는 궁내에 근무하는 신하가 마을 사람(마음)을 왕(대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을 사람이 왕궁을 처음 방문할 때에는 궁내에 근무하는 신하의 안내가 필요하지만, 다음번에 갈 때에는 그러한 안내가 필요 없습니다.
마나시까-라의 기능은 어떤 것을 마음으로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 있는 감각대상을 마음 안으로 데리고 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 혹은 몇 가지 감각대상이 마음에 지속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마나시까-라의 주목하는 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말하면 마음으로 어떤 것을 데려 오는 것이 마나시까-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나시까-라의 주요 특징은 마음을 대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를 똑바로 목적지로 가게 하는 키와 같아, 마나시까-라가 없는 마음은 키가 없는 배와 같습니다. 또한 마나시까-라는 두 마리의 잘 훈련된 말(마음과 대상)이 리드미컬하게 달리고 있는 것을 면밀히 관찰하고 앉아 있는 마차의 마부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어느 심소도 마나시까-라가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더위가 신경이 쓰일 때는 신체의 감각에 마나시까-라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야기 소리에 마나시까-라가 일어나야,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마나시까-라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잘 사용되고 있던 말로, 경전에도 자주 나옵니다. 부처님은 「법에 맞게 잘 이해해 둔다.」라는 의미로 마나시까-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yoniso-manasikāra’는 ‘적절하고 현명한 마음새김’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수다원에게 바른 견해가 생기게 하는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ayoniso-manasikāra’는 ‘현명하지 않은 마음새김’인데, 이것은 괴로움과 다섯 가지 장애를 일으킵니다.
공통되는 심소(접촉, 느낌, 지각, 의지, 심경일성, 생명력, 마음새김) 7가지는, 모든 마음에 항상 일어납니다. 이 7가지가 갖추어지면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무엇인가를 볼 때, 눈을 뜨는 순간에, 「보고 싶다」라고 하는 의지가 있어, 대상으로 집중하고 대상을 접촉합니다. 대상을 접촉하면 그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느낀 것을 지각, 식별합니다. 「보자」라고 하는 의지도 일어나, 거기에는 생명력이라고 하는「살아 있다」라는 기능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보았다」라고 생각하여 인식하기 이전의 일순간의 기능입니다. 물리학에서 소립자 레벨로 물질을 이해하듯이, 마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은 기르는 일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산냐-를 기르면 발군의 지식인이 되고, 팟사를 기르면 민감하고 예리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마음은, 그 때 그 때 자신에게 강렬한 대상을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컨트롤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가는 삶의 방법을 그만두고, 스스로 살아 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고 있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인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컨트롤해서 인식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식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면 마음은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않은가」하는 문제는, 마음을 방치하면 마음의 자유는 없고, 올바른 방식으로 컨트롤 하면 마음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은 자유롭다고도, 자유롭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과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
* manasikāra (마나시까-라 : 마음새김, 作意) (20070413)
오늘 해야 될 게 마나시까라(manasikāra) 부분이죠!
마나시까라 뭔지 아는 사람? 수행할 때 경험해 본 사람?
웨다나, 산냐, 이런 것들은 수행할 때 가끔씩 경험을 하죠? 그런데 마나시까라는 좀처럼 경험하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 이 법문이 처음 오신 분은 좀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진도가 좀 나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나시까라도 꼭 마찬가지로 마음에 공통적으로 항상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단지 그것을 내가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하는 그 차이가 날 뿐입니다.
자! 이렇게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주목!!!” 이리하면 탁 스님한테 마음이 향하죠? 스님의 소리에 내 마음이 탁 향합니다. 이것이 마나시까라 입니다.
소리가 내가 “주목!” 하는 스님의 소리를 듣고 마음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켰습니까? 이 소리가 내 귓바퀴를 통해 들어오는 것을 마음으로 인식하는데, 인식하기 전에 뭐가 먼저 나옵니까? 마음이 그 대상 쪽으로 향해야 이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대상 쪽으로 향하도록 해주는 것이 뭡니까? 이 마나시까라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스님의 소리를 계속 지속적으로 듣고 있죠? 듣고 있는 것은 또 어떻게 해서 계속 듣고 있습니까? 그 소리 들리는 것이 계속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일어났다가 사라졌고, 또 새로운 말이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여러분들이 대상으로 향했던 마음이, 마음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어! 소리다' 하고 마음으로 인식을 합니다. 인식을 할 때, 인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으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탁 붙잡아주는 것, 이것도 마나시까라 입니다.
보통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있다는 얘기를 여러분들도 많이 들었죠?
인식하는 것도 두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감각적인 대상, 소리든지 냄새든지 뭐든지 감각적인 대상이 있으면 대상을 아는 것이 있고, 그 대상을 알아서 그것이 명확하게 뭔가 하고 인식하는 과정이 있고, 이렇게 마음에도 두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상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고,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으로 다시 명확하게 ‘이게 뭔가’ 하고 인식하는 것이 2차적인 과정이고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이 마나시까라는 여기에도 작용하고, 저기에도 작용을 하고 다 작용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에 마음에 이 마나시까라가 없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상 자체를 인식을 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대상이 없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어쨌든 대상으로 인해서 인식은 한다고 치더라도, 마나시까라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인식한 것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나시까라가 꼭같이 "마음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심소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거라. 질문은 항상 법문이 다 끝나고 나서 하십시오.
자! 교재 한번 쭉 보십시오. 'manasikāra (마나시까-라 : 마음새김 作意)'
마나시까라는 스님이 '마음새김'이라고 풀이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로 풀어놓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인식)을 일으켜 작동시키는 기능, 자발적 주목, 마음새김이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과 마음부수가 대상으로 향하는 기능입니다. 쉽게 말하면 요놈의 마음을 갖다가 대상에 뭔가가 일어났으니까 그곳으로 양을 쫓듯이 몰아내는 기능, 내모는 기능이라
그래서 이 마나시까라를 얘기할 때 중요한 단어가 '사라나(saraṇa)' 하고 '상요자나(saṁyojana)' 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이 '사라나'라는 것이 '내몬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마음을 대상으로 향하도록 해주는 것이고, '상요자나' 라는 것은 뭐냐 하면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대상과 마음이 결합하게끔 한다는, 그게 꼭 나쁜 뜻으로만, 그러니까 번뇌에 집착한다는 의미로써가 아니고, 대상과 마음이 결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또 마나시까라 입니다. 결합하고 내모는 역할들을 해주는 것이 이 마나시까라라 합니다.
그런 면으로 봤을 때 맨 처음 일어나는 것이 마나시까라 라고 보시면 거의 맞습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들도 많이 보죠? 나무토막 줄줄이 쭈욱 세워놔 놓고 맨 처음에 있는 나무토막을 탁 자빠뜨리면 이게 순간적으로 쭈르르르르 하면서 전체 다 자빠지는 것. 맨 처음 자빠뜨리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마나시까라라. 마음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넘어지고 나서 그다음 과정, 그다음 과정들이 마음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납니다. 마음은 절대 지 마음대로 요기에 일어났다 저기에 일어났다가 하는 법이 없습니다. 똑같은 패턴으로 순차적으로 쭉 이어집니다. 그것이 없으면 마음은 중단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시작하는 부분이 이 마나시까라 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음의 과정을 연결시켜 주는 것도 이 꼭 같은 마나시까라 입니다.
여기에 스님이 표현해 놓길 「스위치와 같다, 방아쇠와 같다」
권총의 방아쇠와 같고 스위치와 같은 것, 스위치를 눌러야 만이 이 불이 들어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심소 여러 가지가 많이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든지, 내가 자애심을 내든지 뭘 하든지 아니면 마음이 자꾸 이동하는 것이든, 그런 것들을 다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마나시까라 부분이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밑에 구분을 해놨습니다.
「쩨따나 하고, 위딱까 하고, 마나시까라 하고는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쩨따나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의도, 의지입니다.
마나시까라는 스위치와 같이 작동시키는 그런 기능이거든.
그런데 의도하고 그런 작동시켜주는 키 같은 기능하고 어떤 차이점이 나는 것인가?
또 위딱까 라고 하는 것, 위딱까도 대상에 마음을 일치시켜주는 겁니다. 그거하고 이 마나시까라 하고 무슨 차이점이 나는가.
부산에 요트경기장에 가보면 요트 타는 것 본 사람 있어요?
자! 그럼 여기서 출발 해가지고 갑니다. 저쪽에 결승점이 있단 말입니다. 거기가 반환점이다. 거기다 깃대를 꽂아 놨다. 그럼 열심히 가서 깃대를 탁 먼저 잡는 사람이-잡는 팀이 우승을 한단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출발을 할 때 배에는 여러 사람들이 같이 있습니다. 앞에 타고 있는 사람, 중간에 타고 있는 사람, 끝에 타고 있는 사람, 그런데 어쨌든 배가 거기 도착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전부 다 같이 거기에 간다는 얘깁니다. 깃발 꽂은 데까지.
그런데 앞에 탄 사람하고 중간하고 뒤에 탄 사람하고 분명히 역할이 다르죠!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뭐합니까? 깃대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열심히 젓기만 합니다. 지가 할 일은 열심히 젓는 것만이라.
맨 뒤에 있는 사람은 뭐합니까? 노를 가지고 똑바로 가야 빨리 갈 거 아니라! 똑바로 가는 역할만 하는 거라. 저으면서 똑바로 가게끔 만드는 거라.
맨 앞에 있는 사람은 뭐합니까? “영차! 영차! 힘내라 힘내라” 하면서 가가지고 마지막에 가서 깃발 탁 채오는 건 누가 합니까?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채오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앞에 타고 있던 중간에 타고 있던 뒤에 타고 있던 똑같이 결승점에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지금 스님이 설명하고 있는 마나시까라 하고, 쩨따나 하고, 위딱까 라고 하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마나시까라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키와 같다, 배로 봤을 때는 배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하고 마찬가집니다.
위딱까 라는 건 뭡니까? 수행할 때 위딱까는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된다고 그러죠! 그렇죠. 대상을 알아차리려면. 그러면 열심히 배 젓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쩨따나는 그럼 뭡니까? 결승점에서 깃발을 잡는 거와 마찬가지다, 대상을 잡는 것. 그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그렇게 구분 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배를 타고 있다는 것에서는 비슷하죠! 그래서 통상적으로 우리는 마나시까라는 감지를 잘 못해나갑니다. 그런데 위딱까 하고 쩨따나는 여러분들이 구분을 할 수는 있죠! 왜 그렇습니까? 역할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똑같은 거 같지만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차이점들은 알고 가시기 바랍니다.
수행을 한다고 치자. 배를 '일어남' '사라짐' 합니다. 이게 수행대상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그 수행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끊임없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일어나는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것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압니까? 바로 마나시까라 입니다.
마나시까라가 없을 거 같으면 대상에 일치시켜주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감각적인 대상, 생각이든 아니면 물질적인 대상이든 그 대상에 대해서 그 대상이 끊임없이 일어날 때,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든, 아니면 맛을 보고 있는데 그 맛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알든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알 수가 있습니까? 이 마나시까라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마나시까라 라고 하는 것은 일회성은 절대 아니죠! 항상 마음과 함께 공통적으로 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부분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들을 분명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할 때 그래서 이 마나시까라를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마나시까라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설명을 할 겁니다. 세 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그거 할 때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밑에 보면 「마나시까-라의 주요 특징은 마음을 대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를 똑바로 목적지로 가게 하는 키와 같아, 마나시까-라가 없는 마음은 키가 없는 배와 같습니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또한 마나시까-라는 두 마리의 잘 훈련된 말(마음과 대상)이 리드미컬하게 달리고 있는 것을 면밀히 관찰하고 앉아 있는 마차의 마부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마음과 대상에 대해서 면밀히 관찰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마나시까라를 그렇게 풀어서 쓸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보통 경전에서 마나시까라를 설명할 때는 밑에 적어놨지만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라고 하는 복합으로써 설명들을 많이 해놔 놨습니다. '적절하고 현명한 마음새김' 그렇게 해놔 놨습니다.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맞이한 대상에 대해서 철저하고 분명하게 주어진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요니소 마나시까라 라고 한다고 언젠가 한번 스님이 얘기했습니다. 그거는 기억이 납니까? 요니소 마나시까라? 언젠가 한번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요니소 마나시까라(ayoniso-manasikāra)' 라고 하는 것은 일어난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어리석게 관찰하지 못해서 마음이 집중되지 못한 상태를 갖다가 '현명하지 못한 마음새김'이다 그래서 '아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요니소 마나시까라 일 때는 바른 견해가 생기게 하는 조건 중에 하나가 됩니다. 수다원에서.
절대 번뇌라든지 태만이라든지 성냄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될 경우에는 장애들이 일어나게 하게끔 됩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하는 것은 번뇌나 업(業)을 짓는 행위입니다. 그다음에 태어남, 법, 단순한 지식, 알음알이 이런 것들을 다섯 가지 장애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스님 법문만 들어가지고 알음알이만 잔뜩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그것도 큰 장애가 됩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다섯 가지 장애를 다른 식으로도 얘기합니다.
오력 중에서 믿음을 가질려고 할 거 같으면 삿다(saddhā)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뭡니까? '속임수'입니다. 속임수! 자기 자신을 속이든 남을 속이든. 믿는 것은 속이는 거하고 반대입니다. 속임수가 자꾸 늘어나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수행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다음에 정진(vīriya), 정진하는 것. 나태해지고 태만하면 정진 못합니다.
그다음에 사띠(sati),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들떠있으면 안됩니다. 성내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마음이 이렇게 쭉 올라와버립니다. 그럴 경우에는 사띠가 안됩니다. 성을 내고 있으면서 나는 사띠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순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성내는 것들도 장애가 될 수 있고.
또 사마디(samādhi), 선정에 들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대상에 몰입을 해야 되는데 과거에 대해서 막 생각하고 이럴 거 같으면 절대 못합니다. 과거를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 회상한다는 얘깁니다. 후회를 한다는 것들도 지난 일들을 돌아보기 때문에 후회가 생기는 겁니다. 이런 후회들도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
그다음에 지혜(paññā), 지혜가 일어나도록 해야 되는데 지혜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 내 자신을 원망하고 남을 원망하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지혜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요인들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다섯 가지가 또한 '아요니소 마나시까라'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것들은 일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빨리 없애야 됩니다.
자! 대표적인 거 한번 봅시다. 업(業)!
여기 벌레가 있습니다. 벌레를 보면 대부분 어떻게 합니까? 잡아죽여버리죠!
그게 업은 되죠! 그럼 벌레면 '아! 벌레다' 하고 알아만차릴 것 같으면 적어도 벌레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싫어한다는 것은 이걸 혐오한다는 뜻입니다. 혐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겁니다. 혐오하니까 어떻게 돼요? 멀리 배척할려고 하고 성내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래도 어쨌든 그런 마음이 일어났으니까, 그런 마음들 하고 반대적으로 이놈의 벌레를 그냥 탁 죽여버리는 거라. 살생하게 되는 거라. 결국 업이 되버린다는 거라.
그거는 뭡니까? 내가 마나시까라를, 아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거라. 적어도 그 벌레에 대해서 벌레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그냥 알아차릴 것 같으면 이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지금 이 벌레가 나를 해꼬지를 합니까, 뭐합니까? 그러지는 않죠!
자! 다시 한번 봅시다. 수행할 때 감각기관이 나타납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소리든 냄새든, 지금 향을 피웠으니까 냄새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도 대상들이 나타나집니다. 그 대상들은 끊임없이 '아! 요거는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거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나마와 루빠로 구분해서 마음챙기면 마나시까라를 알아차립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으면 어쨌든 그 대상에 여러분들이 제압당했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나쁜 결과를 일으키게끔 됩니다. 그런데 대상을 알아만 차릴 거 같으면 절대 그 대상에 대해서 자기가 제압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갈애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결과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요니소 마나시까라'와 '아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눈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나 어떤 형상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뭐가 있으면 이 대상이 보입니까? 빛이 있어야 되겠죠! 깜깜한 데서는 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빛이 있어야 만이 대상을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됩니다.
눈과 대상과 빛 이것만 있으면 알아차리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여기에 첨가돼야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마나시까라' 입니다. 대상이 있는 것을, 마음이 대상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어줘야 만이 대상을 볼 수 있는 거지, 빛이 있고 아무리 대상이 있더라도 내가 이쪽을 보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이쪽으로 향하도록 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마나시까라 입니다.
자! 그러면 이 대상을 봤습니다. 이 대상을 봤는데 이 본 대상을 마음에 '아!대상이 있다' 하고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고 나서 만약에 이 대상이 사라져버렸다. 사라져버리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해서 '음, 그 대상이지' 하고 인식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뭡니까? 인식하게끔 마음을 갖다가, 조금 전에는 마음을 대상으로 향하도록 했는데, 인제는 그 대상이 없어지고 나면 그 대상을 마음으로 향하도록 해줍니다. 그래야 마음에 계속 남아있게 됩니다. 대상을 마음으로 향하도록 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또 마나시까라 부분이라.
그래서 마나시까라는 이렇게 크게 봤을 때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마음도 대상에 대해서 일어나는 마음이 있고,
마노(māno)부분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대상에서 일어나는 마음에도 마나시까라가 작용을 하고, 마노(māno) 부분에서 일어나는 것에도 마나시까라가 작용을 하게 돼 있다 하는 겁니다.
자! 하나의 대상이 있습니다. 대상이 소리 같은 경우다.
소리가 탁 들린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들리는 쪽으로 마음을 향하도록 해주는 것, 쉽게 말하면 마음을 그 들리는 쪽으로 일으키게 하는 것, 이것이 마나시까라 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일어나는 것이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마나시까라 부분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대상을 알 뿐인 것이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소리를 들을 것 같으면 소리만, 음절만 탁탁탁탁 자꾸 마나시까라에 의해서 딱딱 끊어지듯이 들어오는 것뿐인 것이지,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전혀 구분을 못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소리를 들으면 거의 대부분 바로 그냥 무슨 소린지 바로 그냥 알아버리죠? 그거는 왜 그렇겠습니까? 그 마음을 대상 쪽으로 계속 향하도록 하는 마나시까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겁니다.
받아들인 대상들을 마음이 그 대상에 머물도록 해주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갖다가 뭐냐 하면 '자와나(javana)를 일으키게 하는 마나시까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보통 그렇게 하지 않고, 대상을 맞이만 하는데 그 의미를 파악을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간혹 어린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태종대 밑에 보면 풍선 터뜨리는 게 있습니다. 나는 이미 태종대 밑에 가면 어린아이가 풍선 터뜨리는 게 있다는 걸 분명히 압니다. 저 저쪽에서 내려오면서 풍선을 보는데 사실은 그게 풍선인지 뭔지를 잘 모릅니다. 멀리 있을 때는. 색깔만 겨우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색깔만 보고도 ‘저게 풍선이다’ 하고 탁 인식을 합니다. 그럴 때도 있죠? 간혹 그렇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색깔을 보고 명확하게 인식하기 전에도 좋고 싫음을 이미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얘기할 거 같으면 명확하게 인식을 하기 전에는 좋고 싫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게 정상적입니다.
저번에 매주 일요일날 하는 것에 설명회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하나의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마음의 과정들 열여섯 가지를 쭉 스님이 설명한 부분이 있었죠? 그렇게 받아들이고 조사하고 확인하고 이렇게 해서 나중에 결정하는 것까지 하고 나야, 이게 뭔지 결정이 되고 나야만이 좋고 싫은 것을 일으킬 수가 있는데, 어린아이들 같은 경우, 특히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여러분들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어렴풋하게 보는 데도 이미 좋고 싫은 걸 갖다가 탁 일으켜버립니다. 결정하기 이전에라도.
그거는 왜 그래요? 습관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또한 내가 경험으로써 저거는 무엇이다 하고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태종대 밑에 가면 풍선터뜨리는 게 있다' 하는 걸 남을 통해서 들었을 경우, 또 내가 저기에는 틀림없이 풍선터뜨리는 것이다 하고 알고 있는 경우, 이렇게 여러 가지 경우에는 내가 명확하게 인식하기 이전의 단계라고 하더라도 좋고 싫음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간혹 여러분들 중에서도 명확하게 인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좋고 싫은 것이 일어나집니다. 그러면 자기의 경험에서 '아! 내가 과거부터 지은 것들이든 아니면 지금 현재까지 쭉 쌓아왔던 것들이든, 나쁜 습관들이 많이 있구나, 아니면 좋은 습관들이 많이 있구나' 스스로 판단을 해서 바꾸어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은 항상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럼 지속적으로 있도록 하는 건 뭡니까? 대상을 일으키게 하는 마나시까라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 가지로써 마나시까라를 구분을 해놓기도 합니다.
마음을 대상 쪽으로 일으키게 하는 마나시까라,
그다음에 자와나(javana)를 일으키게 하는 마나시까라,
그다음에 다시 대상을 일으키게 하는 마나시까라,
이렇게 세 가지로 크게 구분 합니다.
왜 그러냐면 소리도 마찬가지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 감각대상이 감각기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부딪쳐오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부딪쳐오면 대상에 주의를 돌려주는 것이 있어야 만이 그것을 지속적으로 알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이것이 마나시까라 라고 그럽니다.
밑에 공통되는 심소 일곱 가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스님이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어쨌든 이 일곱 가지는 기본적인 인식을 하는 마음에 생긴다 하는 사실입니다.
보통 기억하는 것, 그다음에 경험하는 것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잘 알죠! 이것이 산냐다, 이것이 웨다나다 하는 부분들도 잘 압니다. 집중할 때 아! 이것이 에깍가따 집중이구나 하는 것은 잘 아는데, 통상적으로 보면 팟사, 지위띤드리야, 그다음에 마나시까라 이런 것들은 잘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잘 드러나지지를 않는데 그걸 구분해서 한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 눈하고 제 눈하고 이렇게 탁 부딪쳤습니다.
탁 만났습니다. '똥' 하고 통했단 말입니다. 그 통한 데는 마주치는 게 있죠! 그걸 뭐라고 그걸니까?
팟사(phassa)라고 합니다. 그럼 마주치고 나면 그 눈에 보이는 대상에 연락을 합니다. 그 연락하는 것이 쉽게 말하면 팟사입니다.
그 팟사가 있고 나면 그것에 향하는 의도가 있게 돼있습니다. 그것으로 마음이 향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무리 부딪친다고 하더라도 그걸 대상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의도가 있게 됩니다. 쩨따나(cetanā)가 있게 됩니다.
그럼 그 의도가 있고 나면 그것에 대해서 느낌이 있죠! 그걸 웨다나(vedanā) 라고 그럽니다. 이 느낌들을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걸 갖다가 '아! 저게 스님인가'하고 체크를 한다는 거라. 체크하고 검증하는 것, 이게 뭡니까? 산냐(saññā)입니다.
그렇게 체크하고 나서는 다시 명확하게 '아! 요렇게 된 것은 스님이지' 하고 인식을 해나갑니다.
어쨌든 그리하더라도 내가 이 대상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이 대상을 알지 못합니다. 그 집중하는 것이 에깍가따(ekaggatā) 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들이 연속적으로 쭉 일어나는 걸 갖다가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뭡니까? 지위띤드리야(jīvitindriya)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들, 이것이 연속적으로 쭉 일어날 수 있게끔 하는 것 이것이 지위띤드리야 이고.
그 대상 쪽으로 마음이 향하고 또 그 대상을 다시 마음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뭡니까? 마나시까라(manasikāra) 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하나의 인식하는 과정에는 이렇게 일곱 개의 과정이 공통적으로 다 일어난다는 거라. 다 일어나는데 여기까지만 있으면 참 좋겠는데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대부분 그다음에 생겨나는 게 욕심, 화냄, 뭐 여러 가지들이 일어나지죠!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바르게 심소가 일어날 것 같으면, 만약에 사띠가 일어났다 아니면 멧따가 일어났다, 그것도 심소들입니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되는 것이고, 요니소(yoniso)가 되는 것이고, 안 그러면 아요니소(ayoniso)가 되는 것이고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일곱 가지는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밑에 부분은 「발군의 지식인이 되고 싶으면 산냐를 기르고, 대상에 대해서 예리하고 민감하게 될려고 할 것 같으면 팟사를 길러라」 했습니다.
어쨌든 기르는 것은 여러분들입니다. 마음은 내가 얼마든지 콘트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사실은 자유입니다.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방치해버릴 것 같으면 내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질 않고 그냥 대상에 따라 가버리는 거라. 그럼 마음은 자유롭게 되지를 못하는 거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느냐 못하게 하느냐는 것은 결국 여러분들 몫이다 하는 겁니다.
자! 오늘은 마나시까라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로 쭉 이어지는 부분을 하겠습니다. 위딱까 위짜라 부분은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지위띤드리야나 마나시까라 이런 것보다도 훨씬 중요합니다. 그거는 실제적인 수행부분에 해당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마나시까라나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사실은 눈치를 잘 못챕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거 같으면 예류과에 들어야 만이 바른 견해로 인해서 이것이 마나시까라 부분이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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