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재 부분
6. jīvitindriya (지-위띤드리야 : 생명력 命根) : 살아 있다고 하는 기능, 생명력, 삶의 능력을 조절함.
마음에도 「살아 있다」라고 하는 요소가 있어, 생명이라는 것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 기능을 생명력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순간적인 생명기능이 생명력입니다. 생명력 또는 삶의 원리 때문에 모든 마음과 마음부수는 활발히 작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생명력이 없으면 마음은 전혀 작용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항상 생멸 변화하여 생겨나면 소멸하고, 생겨나면 소멸하고를 반복하여, 계속 새로운 마음이 태어나서 죽어 갑니다. 어떤 순간의 마음에도 생명력이라고 하는 생명의 기능이라는 심소가 있으므로, 이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소멸해도 또 곧바로 생깁니다. 생은 멸의 원인이 되고, 멸은 생의 원인이 됩니다. 꽃을 보면 꽃을 본 순간만 그 마음이 살아 있어, 그 마음은 곧바로 죽어 다음의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꽃을 본 다음의 순간에 어제의 일을 생각해 내거나 합니다. 꽃을 본 마음과 어제의 일을 생각해 낸 마음은 완전히 다른 마음입니다.
마음은 그 때 그 때 일순간의 생명을 가지고 죽고 태어나고 또 죽고를 반복해 갑니다. 일반적인 「죽음」의 개념과는 다르지만, 이것이야말로 불교에 있어서의 「죽음」의 개념인 것입니다. 한 번도 죽었던 적이 없는데, 「죽음」이 무섭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무섭다고 하는 것은 감정이며 경험이 아닙니다. 죽음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마음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은 죽음에 기초를 두어 성립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죽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노력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죽지 않는다고 하면,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 회사에서 왜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역시「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고당하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아무리 해고를 해도, 밥이 한 톨도 없어도, 잘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눈 덮인 곳에서 자도, 사람이 죽지 말고 건강하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에서 자고 있을 때 화재가 나도, 죽지 않을 거니까 나가기 귀찮고 피곤하므로 1시간 정도 자고 나가자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순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사실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산다」라고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동력은 바로「죽음」입니다. 「죽음」을 악마 취급해 도망칠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이야말로, 이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에 어떻게 살면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끔 자살은 겁쟁이로 싸움에 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죽음은 자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부는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못에 있는 연꽃이 푸르고 싱싱하도록 지키고 돌보는 것은 물이듯이, 생명력은 대상과 업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몸과 마음만을 지키고 돌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력으로 인해 몸과 마음을 지키고 돌보기에 죽은 시체나 물체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이 단지 잠시 잠깐 계속되는 것뿐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
* jīvitindriya (지-위띤드리야 : 생명력, 命根) (20070323)
오늘은 지-위띤드리야(jīvitindriya : 생명력 命根) 라고 하는 겁니다.
지위따(jīvita)와 인드리야(indriya)가 합성된 거죠. 어떤 면에서는 참 쉬운 부분입니다. 지위띤드리야는 그렇죠? '생명력'이라고 그렇게 그렇게 표현을 해놔 놨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대답) 숨 쉬고 있는 게 생명이다?
과학계에서는 생명과학이라고 하는 게 있죠? 그거는 어떻게 합니까? 생명을 어떻게 하면 연장을 시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할 것인가? 이런 걸 과학적으로 탐구해서 연구하는 데가 이 생명과학입니다. 거기서 보통 하는 것들이 뭡니까? 유전자 연구하죠! 안 그러면 세포연구를 하든지. 유전자든 세포든 어쨌든 육체입니다. 육체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과학은 물질과학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불교에서는 그러면 그 물질을 생명이라고 그럽니까? 그렇게 얘기하진 않죠! 생명이라 하면 물질만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반 과학계에서 말하는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 그게 여러분들이 말하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이 말하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물질만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물질을 통틀어서 생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 우선 물질로만 이루어진 자기 신체 한번 봅시다. 신체는 뭐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물질로 이루어져 있죠! 여러분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탁상, 탁상도 똑같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죠! 그런데 어느 누구든지 이 탁상하고 내 이 몸하고 똑같다고 얘기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거는 없죠! 똑같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틀리다고 분명히 얘기하죠? 그럼 뭐가 그러면 이 물질적인 것들하고 내 이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하고 다르다고 구분을 지을 수 있느냐는 거라.
자! 그러면 앞에 있는 탁상하고 여러분들 몸하고 차이점을 한번 봅시다.
조금 전에 회장님이 이거 갖다 주려 움직였습니다. 이리 갔다왔다 했습니다.
탁상은 절대 움직일 수가 없죠! 그런데 나는 스스로 움직입니다. 이게 어떤 면으로 얘기하면 참 큰 문제입니다. 애들은 보통 한 살 정도 될 때는, 요즘은 조금 더 빠르다고 그러죠. 한 살 되기 전에 이미 일어서가지고 아장아장 걷습니다.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을 거 같으면, 뉴턴이 말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과는 하늘의 공중에 떠있더라도 톡 떨어지면 땅으로 떨어지지 공중으로 올라가지지는 않습니다. 애들은 어릴 때부터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역해서 거꾸로 올라서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하고는 조금 차이나게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차이 나는 것이 뭐냐 하면 유지관리 한다. 유지관리한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명근(命根)에 들어가집니다.
여러분들 몸 유지관리 합니까? 어쨌든 안 죽을라고 밥도 먹어야 되고, 또 밉게 안 보일라면 씻기도 해야 되고, 어떻게 보면 똥도 싸야 되고, 또 숨은 쉬어야 생명이 유지되니까 숨도 쉬어야 되고, 이렇게 뭔가 유지관리를 하고 있죠 여러분들은. 자연스럽게 유지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귀찮다 해서 호흡 안 하는 사람 있습니까? 간혹 귀찮다 해가지고 밥을 한 끼 안 먹는 경우는 있지만 삼 일 굶어놔 놓으면 귀찮아도 먹게 돼 있습니다. 거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안 하면 죽어버리기 때문에! 이유야 단순합니다. 죽기 싫으니까 먹을 수밖에 없는 거라. 죽고자 하는 사람은 안 먹습니다. 죽고자 하면.
그러면 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유지관리 하는 것이 있다고 말을 해야 만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유지관리 하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이 생명으로써 존재를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 당연히 죽어버린다는 겁니다.
물질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물질적인 것이 스스로가 유지관리 한다고 하는 것은 부서지기 싫다, 죽기 싫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것이 뭐 의식적인 것이든 아니면 잠재의식적인 것이든 어쨌든 그런 것들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뇌세포 같은 경우도 뇌진탕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 의식을 탁 잃어버리죠! 의식을 잃어버리고 나면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뇌세포가 많이 죽어버린다고 그러죠! 보통 뇌세포가 유지를 안 시켜줘 버리면 과학자들이 얘기하는데 2분이나 3분 있으면 그 세포는 죽어버린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뇌세포가 많이 죽어버리기 때문에 회복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기가 힘이 든다 하고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체는 끊임없이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뇌세포도 새로 생성되고 소멸되고 나면 다시 또 생성돼야 하듯이 여러분들도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또 배설하고 호흡을 끊임없이 하고, 이렇게 뭔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일을 해주고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걸 어떤 면에서는 '생명력'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스님이 뭐라고 적어놨습니까?
「살아있다고 하는 기능, 생명력, 삶의 능력을 조절함」이라고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그것이 지위띤드리야(jīvitindriya)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지위따(jīvita) 아니면 지위땅 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의미합니다. 인드리야(indriya)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제어하는 힘, 아니면 조절하는 힘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함께 존재하는 것들을 제어하고 돌본다는 의미가 지위띤드리야 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배에는 선장이 있습니다. 자! 이 배를 여기에서 저쪽으로 간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럼 이 배를 선장이 잘 조절을 해가지고 요렇게 피해가지고 저쪽으로 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저쪽에 탁 닿습니다. 그러면 조절은 선장이 했지만 그 배는 저쪽으로 갔단 말입니다. 그럼 선장은 조절만 하고 이쪽에 남아있었습니까? 배하고 같이 갔죠! 배하고 반드시 같이 갑니다. 내가 가기 싫어도 어쨌든 조절을 할 것 같으면 어쨌든 거기에 같이 가게 돼있는 거라.
마음은 마음(citta)과 마음부수(cetasika)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이 지위띤드리야 라는 것은 간단히 생각하면 배와 선장의 관계하고 마찬가집니다. 뭔가가 대상이 일어나면 그 대상이 일어난 것에 따라서 지위띤드리야가 항상 같이 일어나집니다. 대상이 소멸하면 소멸하는데 따라서 이 지위띤드리야도 당연히 소멸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해져 버립니다.
마음은 찰나 찰나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그럽니다. 그 찰나 찰나의 마음을 일어나는 순간, 그다음에 진행되는 순간, 소멸되는 순간 이렇게 카나(khana)로써 찰나로써 얘기들을 합니다.
티띠 카나(ṭhiti khana), 우빠다 카나(upāda khana), 방가 카나(bhaṅgakhaṇa) 그렇게 해가지고 일어나고, 진행 지속되고, 소멸되는 순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당연히 지위띤드리야도 같이 있겠죠! 같이 있지 않으면 그 일어나는 순간이 일어나는 것을 유지를 해나갈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일어나자마자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그 일어나도록 쭉 같이 붙잡아 일으켜주는 것이 뭐냐 하면 지위띤드리야 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에 따라서 마음부수들이 달라붙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달라붙습니다. 그럼 그 마음부수에 따라서 당연히 지위띤드리야도 같이 유지해줘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부수들이 달라붙지 못합니다. 당연히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끝나는 상태가 돼서 이 마음부수들이 떨어져나갈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지위띤드리야도 같이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같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뭔가 특정한 개체가 있어서 지속시켜준다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마음부수가 떨어지면서 지위띤드리야도 같이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 지위띤드리야를 표현을 할 때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함께 일어났다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뭔가 마음이 일어났다. 지금 이 마음이 일어났다 하는 것은 찟따와 쩨따시까를 통틀어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것이 일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첨부되는 것이 지위띤드리야 라는 거라. 같이 일어났다가 같이 사라진다는 거라. 그래서 이걸 갖다가 통상적으로 '공통되는 부수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 '단지 순간순간에 그 상태만을 돌보는 것이 지위띤드리야다' 하고 쉽게 말해서 결합되는 담마, 결합되는 현상들만 현상들의 상태만을 돌보는 것이 지위띤드리야다.
그 얘기는 지위띤드리야는 독립해서 존재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쩨따시까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듯이, 쩨따시까의 한 종류로써 지위띤드리야가 존재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바왕가 하고는 틀립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유지하는 지위띤드리야가 없이 찟따나 쩨따시까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위띤드리야는 마음에 결합하는 쩨따시까 없이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뭔가 봤다. 여기 있는 회장님을 봤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보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지위띤드리야 입니다. 보는 것이 있으면 보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 반드시 같이 일어나진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는 것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한다든지 아니면 내가 다른 데로 눈을 돌려버렸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당연히 보는 것이 사라지면 이 지위띤드리야도 같이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이 표시를 할 때 보통 어떻게 표현들을 하느냐면 여러분들 애기 있죠? 애기가 크면 유치원에 보내기도 하고 좀 더 크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낸단 말입니다. 애기를 낳은 사람은 여러분들입니다. 내가 당연히 돌봐야 되겠지만은 내가 지금 돌볼 형편이 못되고 어쨌든 간에 유치원이나 이런 데를 보낸단 말입니다.
그런데 유치원 보모 입장에서는 자기가 낳은 애는 아니지만은 오니까 돌봐줍니다. 이 애기가 없으면 여러분들 유치원 보낼 일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애기가 있기 때문에 유치원이 있고, 유치원에 보내는 겁니다. 그 보모, 유치원 선생님 입장에서는 애기가 왔기 때문에 내가 돌봐주는 것이지 애기가 오지 않으면 내가 돌봐줄 일도 없습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이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대상이 내가 없으면 당연히 생명력이 일어날 일이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생명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에서는 생명력이 지 혼자서 그대로 다시 또 일어나서 만들어나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유치원 선생이 애들도 없는데 지 혼자서 가르칩니까? 절대 그러지는 않습니다. 애들이 있을 때 가르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 현상에 포함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 왜? 대상이 있어야 만이 반드시 일어나지고 대상이 소멸되면 더불어서 소멸되는 것들이기 떄문에.
그래서 이 지위띤드리야는 보통 우리가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삶을 지속시켜주는 것 그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도구가 뭐냐 하면 바로 이 지위띤드리야 입니다. 조금 이해하겠습니까?
자! 밑으로 한번 내려가 봅시다.
「마음은 항상 생멸 변화하여 생겨나면 소멸하고, 생겨나면 소멸하고를 반복하여, 계속 새로운 마음이 태어나서 죽어 갑니다.」
꽃의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해놨습니다.
그 밑에 죽음의 개념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생명력을 이해하려면 죽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생명력도 완전하게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죽어본 적이 있습니까? 꿈에? 꿈에는 어쨌든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쨌든 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라.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합니까? 죽는 걸 두려워하죠! 무서워하죠! 거 왜 그런 겁니까? 죽어본 적도 없으면서 어째서 두려워하느냐는 거라.
안 죽어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죽기 싫기 때문에 그런 거라. 쉽게 얘기하면. 죽기 싫다는 거는 살고 싶다는 얘기라. 살고 싶은데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거든. 그런데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또 싫거든. 어떤 면에서는 참 이중적이라. 지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지가 먼저 잘 알면서 죽기는 싫다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니까 죽음이 두려운 거라. 나에게 닥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아! 요놈이 언제 닥칠까’ 하고 두려운 거라.
그런데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했어요? ‘에이! 나도 죽는다’ 맘 편하게 탁 받아들이는 거라. 받아들이고 나니까 생로병사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된다는 거라. 그거 아직은 잘 모르겠죠? 그쪽을 쭉 써놔 놨으니까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래서 생명의 원동력은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연꽃의 비유를 스님이 거기에 적어놨습니다. 연꽃이 나기 전에는 줄기가 올라와야 되고 잎이 나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꽃이 피게 됩니다. 잎이 나고 줄기가 나는 것들을 돌봐주는 것은 물이 있어서 그것을 자라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걸 돌봐줄 수는 없죠? 일어나야 만이 돌봐줄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과 업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몸과 마음만을 지키고 돌볼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은 맨 처음 서두에도 얘기했지만 물질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 같이 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두 가지. 물질적인 생명력, 정신적인 생명력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보통 분류를 합니다.
이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생겨난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것을 지탱하는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사라지게 한다. 생기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일어나지 않는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일어나지 않는 현상들을 일어나도록 하는 능력은 없죠? 지가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일어나지 않은 연꽃잎을 일어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거라. 생기게 하는 역할만 합니다. 물이 일정한 조건을 맞춰주면. 그런데 생겨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물은 영향을 미치는게 아니다. 그래서 그런 만들어지게 하는 능력, 일어나게 하는 능력은 이 생명력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는 거라.
물질적인 거 한번 예로 들어볼까요? 스님이 가끔 다이아몬드 예를 들죠?
아주 단단한 다이아몬드입니다. 그 다이아몬드를 지탱하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것은 뭡니까? 물레큘(molecule 미립자)입니다. 운동작용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레큘이라고 하는 미립자의 운동작용이 없으면 다이아몬드는 부서져버립니다. 거짓말인 거 같죠? 실제 그렇다고 그럽니다. 그걸 아주 초미립자로 과학자들이 측정을 해보니까 다이아몬드에 끊임없이 운동작용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냈어요. 어쨌든 다이아가 있기 위해서는 이런 운동작용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하기 위한 이 생명력이 없을 것 같으면 나는 와르르 무너진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밥을 먹었습니다. 식도에 들어가면 소화시키기 위해서 막 타는 듯한 느낌들이 들죠? 이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게 물질적인 것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거라. 이건 내가 뭐 마음으로 생각을 해갖고 배에 음식이 들어갔으니까 '이놈 소화해라, 소화해라' 해가지고 이놈이 이게 탑니까? 그건 아니죠! 그건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것들이 있고 또 정신적인 것들이 따로 있다는 거라. 그래서 정신적인 것들로 인해서 물질적인 것들이 다 지배되는 상태는 아니다 하는 거라.
마음은 찰나 간에 수십 번 왔다갔다 합니다. 물질이 한 번 일어났다가 사라질 때 마음은 보통 몇 번 일어났다 사라지는 줄 아십니까? 보통 열일곱 번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질 때 생명력도 일어났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렇죠? 정신적인 게 모든 물질적인 거를 지배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거라? 조금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생명력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을 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옛날에 초심지를 가지고 있는 초롱불에 심지가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기름이 없으면 불꽃이 없습니다. 또 기름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초심지가 다 타버리고 나면 불은 꺼져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집니다.
조건이 만들어졌으면 일어나지는 것이고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일어나지지 않고, 조건이 또 사라지면 당연히 같이 사라지는 것이 이 지위띤드리야 라는 사실을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부분 보십시오. 「이렇게 생명력으로 인해 몸과 마음을 지키고 돌보기에 죽은 시체나 물체와 다름을 알아야 한다.」 하는 사실입니다. 끊임없이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을 지키고 돌봐야 되는 것은 여러분들 자신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 「생명력은 우리의 삶이 단지 잠시 잠깐 계속되는 것뿐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절대 연속하는 것은 없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단지 미화시킬려고는 하지 말아라는 거라. 사람이 죽으면 여러 용어를 씁니다.
'타계했다' 아니면 '성불했다' 아니면 큰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열반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 용어들을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용어가 주는 의미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죽음 자체를 인간이 스스로 미화시키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참 간사하죠? 죽는 데는 순간인데, 순간에 꼴까닥 죽습니다. 내가 아무리 ‘요놈의 거 꼴까닥 안 하고 잠시 요거하고 나서 죽겠지’ 죽을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안 되는 거라. 아무리 재산이 많든 뭐 하든 간에 꼴까닥 하고 나면 딱 그 순간일 뿐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순간일 뿐입니다. 그 순간순간이 연결되는 것 뿐인 것이지 그 순간순간이 계속 지속하는, 내가 가만히 있더라도 지속하는 법은 없습니다. 죽기 싫어서 발버둥치고 사는 거와 마찬가지로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끊임없이 부단하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노력해야 됩니까? 나쁜 짓을 안 하고 좋은 행위 하면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일계(一戒) 지키는 사람보다 이계 지키는 사람이, 이계 지키는 사람보다 오계(五戒) 지키는 사람이, 오계 지키는 사람보다 팔계 지키는 사람이, 또 팔계 지키는 사람보다도 227계 지키는 사람이 더욱더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 세상을 더욱더 잘 생명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오늘은 지위띤드리야는 그렇게 어려운 부분이 아니니까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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