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4. 희각지(喜覺支)-탈세간에 성공하는 점검법 (20180413) <법문 교재>

담마마-마까 2021. 4. 23. 09:00

https://youtu.be/nmY9wL6Nlb8

https://youtu.be/jqgAwvQTkCc

<「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그럼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삐띠 삼봇장가(pīti sambojjhaṅga)인 희각지입니다.

 

보통 노력·정진만 하고 있으면 피로해집니다. 스트레스도 쌓입니다. 속세간에서는 죽을둥살둥하는 노력을 평가하지만 결국은 스트레스가 쌓여서 병이 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도록 어떤 대책이 필요합니다.

 

불교의 수행도 전장의 싸움과 같다는 마음으로 정진하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수행할 마음을 잃거나 수행할 마음이 있더라도 수행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붓다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오늘 정진 노력하라. 내일 죽지 않는다고 누가 알까?’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로 하면 ‘죽기 살기로 노력하시오.’가 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고생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면, 행해서 좋았다고 생각하는 기쁨이 없으면 계속할 수 없습니다. ‘행해서 좋았다. 노력에 걸맞은 결과가 있다.’라고 알고 있으면 정진을 할 수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결과가 없다고 생각하면 히스테리로 발전합니다.

그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선, 자신이 차근차근 정진해 나가면 진전이 있다는 적극적인 되살펴봄이 필요합니다.

 

노력하여도 아무런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그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 때도 지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루었다.’라고 생각하면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버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염각지를 시작하여 진전이 없을 때는 택법각지가 생겨나도록 합니다. 거기에서 ‘잘 되었다.’라고 만족하면 수행이 중지되므로 정진각지를 행합니다. 전장에 있는 기분으로 수행하면 신체나 마음이 지쳐버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 가면, 속세간에서 맛보고 있던 번뇌나 괴로움 등이 소멸하면, 집중력이 증가하면, 지혜가 개발되어 가면, 마음에 기쁨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것이 희각지입니다.

 

만약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스럽게 희각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진지하게 노력하는 수행자가 우울하게 되어 가면 스승은 제자를 괜찮다고 따뜻하게 칭찬해 줍니다. 스승이 제자의 수행에 만족하고 있다는 얼굴을 보입니다. 그것으로 희각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스승이 없는 경우는 다른 수단을 사용합니다. 수행할 마음을 잃었지만 죽기 살기로 노력하였고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자기 평가나 만족은 처음부터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하기 전의 자기 상태와 지금의 자기 정신 상태를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됩니다. 상당히 진정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이 생겨납니다. 수행은 헛되지 않았다고 압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됐다.’는 위험합니다. ‘더욱 정진하자.’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정진 없이는 진전이 없습니다. 정진하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작용이 도움이 됩니다. 기쁨을 맛보면 만족하게 되어 또한 멈추게 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정진을 느슨하게 할 것이 아니라 더욱 진지하게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기쁨(pīti)에 대해서도 좀 더 설명하면,

우리의 뇌는 무턱대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뇌는 많은 영양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거의가 당분뿐입니다. 그러나 고민하거나 성냄이 비집고 들어오면 뇌의 기능은 저하합니다. 기쁨을 느끼거나 충실감이 솟거나 즐겁게 되거나 하면 뇌는 얼마든지 노력합니다.

뇌의 이야기는 현대적인 개념이고 불교는 마음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에는 기쁨(pīti)이라는 포상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있으면 정진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 수행은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고행에 고행을 거듭하여 겨우 기쁨에 도달하는 방법은 다른 종교에는 설해져 있으나, 불교는 이것이 비현실적이므로 부정합니다. 불교명상의 경우에 수행이 괴로운 것은 처음 시작할 때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속세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부작용이 없는 기쁨이 생겨납니다.

 

위빳사나에 필요한 기쁨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수행하여 청정한 방향으로 가져가면 탐진치나 무지의 작용에 의한 망상이 거의 기능하지 않게 됩니다.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진지하게 사띠하면 바빠서 망상할 틈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매우 순수하고 완전하게 마음이 오랫동안 깨끗하게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로써 마음과 신체로 대단한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왜 기뻐하고 있는지 본인도 모릅니다. 단지 기뻐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며 사띠를 실천하고 있다면 망상이나 온갖 것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게 되고 남과 즐겁게 이야기할 틈도 없게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구해 먹는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한 세속의 즐거움은 거의 사라져있습니다. 자려고 해도 ‘자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라고 생각하고 수행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틀림없이 괴로울 텐데도 본인은 매우 즐겁습니다. 웃고 싶을 정도로 즐겁게 됩니다. 그 즐거움은 속세간으로부터 떠난 도·출세간의 도에 들어 있을 때에 확실하게 생겨납니다.

 

예를 들면 산 위라든가 매우 놓은 곳에 집을 지어서 살고 있는데 폭우로 아래는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있는 곳에는 절대로 물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느낌입니다. ‘자신은 떠나있다.’라는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속세간의 괴로움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서 위빳사나의 실천에 들면 이 세상의 괴로움이 반짝반짝 머리에 떠올라도 자신은 그 세계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 떠나있다.’라는 느낌으로 강렬한 기쁨이 생겨납니다.

 

기쁨이 생겨나면 또한 수행할 마음이 생겨나고 더욱 정진하기 쉽게 됩니다. 더욱 정진하면 또한 분별능력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더욱 사띠를 실천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칠각지의 목록의 역순으로도 진보합니다. 순차적으로 나아가고, 또한 역으로도 나아갑니다.

 

단지 사띠에서 멈추어버립니다. 분별능력이 있다고 해서 사띠가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록의 순서대로 나아가고 역방향으로도 나아가, 그것으로 끝납니다.

사띠가 있으면 분별능력(擇法)이 생겨납니다. 분별능력이 있으면 노력하고 싶어집니다. 노력을 하면 기쁨이 생겨납니다. 여기까지 나아가서 기쁨이 생겨나면 더더욱 노력하고 싶어집니다. 노력하면 더욱 분별능력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분별능력이 생겨났다고 해서 더욱 ‘사띠가 생겨난다.’라는 식으로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사띠는 본인이 의도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띠는 토대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은 역시 사띠로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본인의 의사로 행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이고, 제대로 행하면 다른 문제는 깨끗이 자연스럽게 갖추어집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자동적으로 사띠도 발달해 간다.’라는 식은 절대로 없습니다. 사띠가 자동적으로 진전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삐띠는 자동적으로 생겨납니다.

 

다시 살펴보면,

정진각지가 끝나면 다음으로 삐띠가 생깁니다. 지금까지의 위빳사나라는 것은 내내 괴로움과 갈등뿐이라고 해도 될 만큼 혹독한 단계였습니다. 그것은 실로 자신과의 싸움만으로 버텨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정진각지의 엄격하고 정밀한 지도를 받는 경우는 매우 까다로워집니다. 엄격하게 되어버립니다. 그것을 극복하면 정진을 통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자연히 삐띠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지도자에게 꾸중을 듣지 않아도 수행이 짜임새 있고 상세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삐띠라는 것은 일반적인 기쁨, ‘아, 기분 좋다!’ 라거나 ‘아, 즐겁다!’ 라거나 하는 그런 단순한 삐띠가 아닙니다. 들떠서 소란을 피우거나 덩실덩실 춤추거나 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대단히 고요한 삐띠입니다.

 

이른바 진정한 세상이 잘 보여서 무상도 잘 보이며 무아도 보여서 스스로 무상을 뛰어넘으려고 지독하게 노력도 합니다. 그런 순간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세속적인 부분으로부터 자신이 떨어져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탈세간이 이루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세상의 사람들의 흐름으로부터, 윤회의 흐름으로부터 지금 떨어져 있다고 하는 실감은 맛보고 있을 뿐입니다.

 

엄격한 위빳사나를 하면서 자신은 좀처럼 사람들이 하기 쉽지 않은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땅 위에 오르고 싶어 한 물고기는 많이 있겠지만 실제로 땅 위로 올라온 물고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해서 뭍으로 오르고 싶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공부를 하고 실패를 반복한 끝에 파도 사이로 뛰어올라 순간적이지만 윤회의 틀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탈세간의 체험자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땅을 보거나 육상 생활을 조금 맛본 물고기가 그런 경험이 없는 물고기를 향하여 너희들과 나는 좀 다르다 라는 느낌입니다. 물속이 아니라서 힘들고, 파도를 타고 땅으로 갔지만 여기서 이제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한계점에서 다시 물로 돌아왔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기분입니다.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상당히 노력을 했다는 증거로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결코 아만은 아니지만 알기 쉽게 얘기하자면 물고기가 너희들과 나는 좀 다르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윤회의 세계로부터 조금 멀어졌다고 하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체험에 의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충실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삐띠, 진정한 기쁨입니다. 밥을 먹고 아, 즐거웠다! 라고 말하는 수준의 차원 낮은 즐거움이 아닙니다. 밥을 먹으며 즐겁다는 것은 그 순간은 확실히 즐겁고 맛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식사가 끝나면 곧 싫증납니다. 음악을 들어서 즐거워도 듣고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있으면 즐거운 것은 고사하고 지겨워져서 괴롭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삐띠라는 기쁨, 즐거움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속세라는 것에서 떨어져 있는, 윤회의 틀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기쁨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종류의 즐거움, 기쁨입니다.

 

앞서 말한 정진이라는 것은 엄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혼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혼란 상태를 끝까지 꼼꼼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제 엄격합니다. 자신을 다루기 위하여 계율을 지키는 것도 엄격합니다. 심신에 다 엄청난 혼란 상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루 5회 정도 식사를 하던 사람이 2회로 줄이시오 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넘으면 상당히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정진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마음에 격렬함이 생기게 됩니다. 그 엄격하고 격렬함이 무르익고 충분히 닦이면 마음의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삐띠입니다.

 

이 삐띠는 바로 앞의 염각지-택법각지-정진각지를 충분히 닦아 마음의 대전환이 일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감각적 욕망이 너무나 좋고, 끌리고, 매력 있고, 그것을 더 많이 누리지 못함에 서운하고 후회스러웠는데, 염각지-택법각지-정진각지를 열심히 닦으면서 마음이 청정해지는 어떤 임계치를 넘어서게 되면, 마음의 대전환이 일어나면서 ‘아! 감각적 욕망이 사실은 화살이고, 중병이고, 함정이고, 종양이고, 족쇄이구나! 이제 충분히 알겠다!’ 하고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 마음이 한 단계 진화하게 됩니다.

 

이때 위험(감각적 욕망)을 벗어난 안도감에서 오는 기쁨의 희열이 온몸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살인마에게 쫓겨 한참을 도망치다 드디어 그 손아귀에서 벗어난 안도감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 한참을 중병을 앓다가 드디어 병에서 완쾌되어 기쁨이 일어나는 것, 혹은 엄청난 빚이 있었는데 열심히 노력하여 드디어 모든 빚을 다 갚았을 때의 해방감과 후련함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다섯 장애를 제거함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기쁨의 희열입니다.

 

Pīti(삐띠)에는 행복·기쁨·만족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삐띠」란 그 자체에 이러한 마음 상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더구나 「삐띠」는 관련하는 여러 가지 마음 상태에 파급되어, 그것들을 밝게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해서, 깊게 가득 차 충분한 감각을 가져오는 기능을 합니다.

 

「삐띠」는 마음과 신체를 가벼움과 기민함으로 채웁니다. 고전적인 분석에 의하면, 이것이 「삐띠」의 기능입니다. 마음은 경쾌하게 되어, 기운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신체도 기민하게, 경쾌하게, 활발하게 되는 느낌이 듭니다. 「삐띠」는 실제로 신체가 경쾌하게 되는 감각으로서 나타납니다. 신체 감각을 통해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삐띠가 생기면 엉성하고 불쾌한 감각이 유연하고 부드러워지고 매끈매끈하고 경쾌한 것이 됩니다. 신체가 가벼워져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과 같게 느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 감각인 일도 있습니다. 누르거나 당겨지는 것 같은, 혹은 흔들어지고 있는 것 같은 감각입니다. 바다 위에서 물결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낄지도 모릅니다. 불안정하면서 매우 기분 좋은 감각입니다.

 

다섯 종류의 「삐띠」

「삐띠」에는 5개의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작은 기쁨(khuddikā pīti)」이라고 불립니다. 수행의 초기에 있어, 명상을 방해하는 요인을 충분한 시간 억제해 둘 수가 있으면, 수행자는 오싹오싹하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신체의 털이 기쁨으로 곤두섭니다. 소름이 끼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삐띠」의 감각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는 「찰나적인 기쁨(khaṇikā pīti)」이라고 불리는 타입입니다. 찰나에 발생하는 번개와 같이 돌연 옵니다. 첫 번째의 「작은 기쁨」보다 강렬합니다.

 

세 번째는 「연달아 일어나는 기쁨(okkantikā pīti))」입니다. 해변에 앉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삼키려고 하는 거대한 물결을 만나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바야흐로 파도에 휩쓸린 것 같은 감각을 경험합니다. 파도가 해안에 밀려오는 듯이 온몸에서 몇 번이나 충만 됩니다. 가슴이 크게 울리고 압도되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게 됩니다.

 

네 번째는 「흥분되어 날뛰는 기쁨(ubbegā pīti)」입니다. 「경쾌하게 만드는 기쁨」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이 생기면 신체가 너무나 경쾌하게 느껴지므로 앉아있는 신체가 수십 센티미터 지면으로부터 들어 올려져 떠올라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일조차 있습니다. 걷고 있을 때도 공중에 떠있는 것과 같게 느껴집니다.

 

다섯 번째는 「충만된 기쁨(pharaṇā pīti)」이라는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전신의 모공의 하나하나까지 「삐띠」로 채워집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이 일어나는 때는 전신이 삐띠로 충만 되게 느끼기에 앉아 있을 때는 더 이상 없이 기분 좋게 느껴지고, 일어서고 싶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계속 좌선하는 것에 강한 관심이 싹틉니다.

 

최초의 3종류의 「삐띠」는 Pāmojja(빠-못자:희열)로 불립니다. 「약한 삐띠」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나머지의 2개야말로 Pīti(삐-띠)라고 하는 이름에 적당한 「강한 삐띠」입니다. 최초의 3종류는 이 2종류의 「삐띠」에 도달하기 위한 발판이며,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종류의 삐띠가 무르익을 때, 몸과 마음 2종류의 경안을 성취하게 됩니다. 또한 경안이 생겨 무르익을 때, 몸과 마음 2종류의 행복이 원만해집니다. 나아가 행복이 무르익을 때, 찰나정, 근행정, 안지정이 원만해지게 됩니다.

즉 이러한 5종류의 삐띠가 무르익어지면, 본 삼매의 근본이 되어, 강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ㅇ 지혜가 있는 주의력이 「삐띠」를 가져온다.

 

「정진」의 경우와 같이 삐띠를 가져오는 요인은 다만 한가지라고 붓다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있는 주의력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지혜가 있는 주의력을 없애지 않고, 삼보에 관련한 건전하고 기쁜 감정이 일어나도록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삐띠」를 기르기 위한 11가지 방법

주석서에는 「삐띠」를 환기시키기 위한 11가지의 방법이 쓰여져 있습니다.

 

① 붓다의 덕을 계속해서 반조한다.

최초의 방법은 「불수념」, 즉 붓다의 덕을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전해지고 있는 붓다의 덕은 실로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 모든 것을 계속해서 반조하기도 전에 아마도 「삐띠」의 처음 징후가 나타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붓다의 덕목으로 들고 있는 처음에 아라한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번뇌를 근절하는 것에 의해 달성한 맑고 깨끗함입니다. 그러므로 붓다는 모든 인간·신들·범천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에 적합하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붓다의 맑고 깨끗함에 생각이 미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노력」으로 말한 붓다가 완수한 3개의 위업을 반조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의 덕을 계속하여 반조한다」고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생각해 내거나 정해진 문장을 독송하거나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실 그러한 방법은 수행자 자신의 직관적인 통찰에 비하면 초라한 것입니다.

수행에 의해 생멸을 통찰하는 지혜를 획득하면 자연스럽게 「삐띠」가 생겨 붓다의 덕에 대해 깊게 이해하게 됩니다.

 

붓다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담마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본다」라고.

통찰을 얻은 수행자는 우리들의 스승이신 붓다의 위대함을 실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내가 이 정도의 마음의 맑고 깨끗함을 경험할 수 있는데, 붓다의 맑고 깨끗함은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② 담마(법)를 기뻐한다.

「삐띠」를 환기시키는 두 번째의 방법은 담마와 그 덕을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최초의 덕목은 「잘 설해진 붓다의 담마(법), 잘 나타난 붓다의 담마(법)」라고 하는 게로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붓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담마(법)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현재의 지도자들도 그것을 확실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쁨을 가져와 줍니다.

 

붓다는, 계·정·혜라고 하는 삼단계의 수행법을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에서 우선 계율을 지켜 자신의 행동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합니다. 말과 행동을 바로잡는 것으로 높은 레벨의 도덕성을 기르는 노력을 합니다. 이것은 많은 이익을 가져옵니다. 우선 자신을 재판하거나 자책하는 마음에 골치를 썩이거나 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현자로부터 비난되는 일도, 법률로 다투어지는 일도 없어집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음은 집중력을 개발하게 됩니다. 성실하게, 인내력이 강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밝고 온화하며 맑게 갠 행복한 마음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적정의 락」, 즉 집중과 마음의 고요함으로부터 생기는 행복입니다. 더구나 여러 가지 레벨의 선정(몰입 상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번뇌가 일시적으로 억제된 마음 상태이며, 엄청난 평온을 가져와 줍니다.

 

그 후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3번째의 행복을 경험할 기회가 찾아옵니다. 보다 깊게 담마(법)에 정통하게 되어, 현상의 생멸을 통찰할 단계에 이르면, 들뜨는 것 같은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계속 나아가면 명료함에 의한 행복이 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행사지로 불리는 형성된 모든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평온을 통찰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렇게 되면 고요한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기쁨입니다. 흥분이나 스릴은 없지만, 매우 섬세해서 조화를 취할 수 있던 행복을 느낍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수행방법에 따르는 사람들은 붓다가 약속하고, 보증한 대로, 여기서 말한 3개의 행복을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을 모두 스스로 경험하는 것에 성공하면 붓다의 말이 진실한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잘 설해진 붓다의 담마(법), 잘 나타난 붓다의 담마(법)」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이 3개의 행복을 초월하는 궁극의 행복이 「적멸의 행복」입니다. 「고요한 행복」을 넘어 계속 나아가는 수행자는 열반의 통찰을 순간적으로 경험합니다.

이것은 「성스러운 길의 의식(도심)」을 얻는 것과 동시에 생깁니다. 그러면 수행자는 그것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깊이로 담마(법)를 이해하게 됩니다.

 

붓다는 확실히 「이와 같이 명상하면 괴로움의 지멸에 이를 수가 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대로가 일어납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마침내 그것을 알 때 마음은 기쁨과 감사로 크게 울리게 됩니다.

 

ㅇ 수행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

 

붓다의 셈에 담마(법)가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의 고마움을 알려면 3개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명상 수행이 가지는 커다란 가능성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담마(법)에의 칭찬으로 채워지는 것과 동시에 강한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아마 원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담마(법)에 대해 듣거나 읽거나 할 때마다 강한 기쁨과 흥미로 마음이 채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담마(법)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의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실제로 수행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 붓다가 약속하고 보증하셨던 것이 확실히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계와 선정에 의해 인생은 좋은 방향을 향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담마(법)가 얼마나 잘 나타나고 있는가를 몸소 이해하게 됩니다. 수행에 의해 여러분 자신에게 맑은 마음과 깊고 섬세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방법은 지혜의 수행에 의해 담마(법)의 훌륭함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열반의 행복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때 생기는 「삐띠」나 감사의 생각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보십시오.

 

③ 상가의 덕을 기뻐한다.

주석서에 기록된 「삐띠」를 기르기 위한 주요한 방법의 세 번째는 상가의 덕을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상가는 담마(법)에 몸을 바치며 살면서 열심히 인내심 있게 노력하는 성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방법으로 곧게 길을 걸어서 각각의 목표에 이릅니다.

 

수행에서 마음의 맑고 깨끗함을 경험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상가는 보다 깊은 레벨로 자신의 경험을 아득하게 넘은 맑고 깨끗함에 이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경험했다면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간 성자들의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실로 맑고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④ 여러분 자신의 덕을 생각한다.

「삐띠」를 불러일으키는 네 번째의 방법은 자신의 행동의 맑고 깨끗함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악의가 없는 행위는 강력한 덕이 되어 그 사람에게 커다란 만족감과 기쁨을 가져옵니다.

맑고 깨끗함을 유지하기에는 대단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 점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깊은 성취감과 고양심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만약 행위의 맑고 깨끗함을 유지할 수 없으면 자책하는 마음이나 자기비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되어 수행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덕은 집중과 지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맑고 깨끗하게 계를 지키는 것으로 생긴 「삐띠」를 사띠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예는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덕행에 생각이 미치는 것은 비상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⑤ 자신이 행한 보시에 생각이 미친다.

「삐띠」를 불러일으키는 다섯 번째의 방법은 자신이 행한 보시를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동기가 조금도 없이, 다른 사람의 번영과 행복,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며 베풂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공덕으로 가득 찬 것이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에 커다란 기쁨이 생깁니다. 보시가 유익한가 어떤가를 판단하는 결정적 수단은 동기입니다. 보시의 뒤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보시는 금전적인 것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친구를 격려하는 것만으로도 보시가 됩니다. 궁핍할 때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것이 소중합니다. 적은 것으로 나누는 것은 큰 만족을 가져옵니다.

 

⑥ 신들의 덕을 생각한다.

「삐띠」를 일으키게 하는 6번째의 방법은 인간보다 고차원의 세계에 사는 신들이나 범천들의 덕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들이나 범천은 일찍이 인간계에 있었을 때 업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를, 안 좋은 행위는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좋은 행위를 하도록 노력해서 철없는 행위는 삼가도록 하고 살았습니다. 명상을 실천하고 있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선한 에너지에 의해 인간계보다 즐거움이 많은 고차원의 세계에 재생했습니다. 선정를 달성한 사람은 범천계에 재생하여 긴 시간 장수를 얻었습니다. 즉 이러한 인간을 넘은 존재가 가지는 덕을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계에서 기른 믿음·보시·정진·인내에 생각을 해보는 것 외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과 자신을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신들이나 범천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알면 만족감과 「삐띠」로 마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⑦ 완전한 평온함에 대해 숙고한다.

「삐띠」를 불러일으키는 7번째의 방법은 번뇌가 지멸했을 때의 평온함에 대해 숙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반에 이르러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깊은 평온함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것에 생각이 미치는 것으로 많은 「삐띠」를 일으키게 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 열반을 경험했던 적이 없으면 깊은 집중, 즉 선정의 정적에 대해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깊은 집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평온함은 세속의 즐거움보다 우수합니다. 몰입 상태에 들어가는 것에 숙달되어 집중 명상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마음이 결코 번뇌에 침범당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남은 인생을 평온함 속에 보냅니다. 이 레벨의 침착성과 명확한 판단에 생각이 미치는 것으로 매우 큰 「삐띠」를 일으키게 할 수가 있습니다.

선정을 경험했던 적이 없으면 수행 중에 마음이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게 느껴졌을 때를 생각해내 봅시다. 번뇌가 잠깐 사이 진정되면 고요함과 침착성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채웁니다. 속세에서 향수할 수 있는 행복과 비교해 보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비교하면 세속적인 행복이 몹시 볼품없고 엉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맑고 깨끗함으로부터 생기는 냉정한 「삐띠」와 달리, 세속의 즐거움에는 불타는 것 같은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에 의해 마음이 「삐띠」로 채워지는 일도 있습니다.

 

⑧-⑨ 거친 사람들을 피하고, 자애로운 친구를 찾는다.

「삐띠」를 불러일으키는 8번째와 9번째의 방법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거칠고 천한 사람, 분노에 물들어 자비(mettā)를 빠뜨린 사람을 피하는 것.

그리고 자비의 마음을 가진 자애로운 사람을 찾아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분노가 강하고, 건전한 행동과 불건전한 행동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은 존경에 적합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고, 담마(법)를 배우는 일도, 명상을 실천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성격이 급해서, 쉽게 분노나 혐오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들의 인생은 거칠고 불쾌한 행동으로 가득 찬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있어도 기쁨의 경험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려 깊고, 애정을 담아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따뜻함이나 애정은 행동이나 말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자애로운 사람들은 섬세하고 배려가 있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과 관련됩니다. 그들과 교류 하는 것은 서로에게 매우 결과가 좋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애의 아우라와 따뜻함에 싸여 그것이 「삐띠」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⑩ 경전에 대해 숙고한다.

「삐띠」를 일으키게 하는 10번째의 방법은 경전에 대해 숙고하는 것입니다. 경전에는 붓다의 덕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독실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경전 가운데 하나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으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대념처경은 담마(법)의 수행이 어떠한 이익을 사람에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 성자의 모임인 상가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경전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을 읽거나 숙고하거나 하는 것으로 마음이 분발하면, 그것이 「삐띠」라는 행복을 가져옵니다.

 

⑪ 관심을 기울인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지속적으로 「삐띠」를 기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면 그 목표는 실현됩니다. 「삐띠」가 생기는 것은 마음이 비교적 번뇌로 더러워지지 않을 때인 것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삐띠」를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는 순간순간의 사띠를 놓치지 않게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에 의해 집중이 생기면 번뇌는 접근하지 않습니다. 앉아 있든, 누워 있든, 걷고 있든, 서 있든, 그 외의 동작을 하고 있든, 각각의 순간에 확고부동한 사띠를 확립하는 일에 매달리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