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3. 정진각지(精進覺支) 후반부 (20170908) <법문 교재>

담마마-마까 2021. 4. 21. 09:10

https://youtu.be/5J5dSZvdwRg

<「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그리고 수행이 조금 잘 되면 들떠버려, 거기서 스톱하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이른바 「명상은 즐겁다, 기분이 좋다」 등으로 판단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스승에게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눈을 반짝이며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스승에게 「대단합니다. 좋습니다. 졸업 증명서를 주세요!」라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교의 세계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행해 온 것으로 어떠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층 더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르게 노력하면 반드시 잘됩니다. 잘되면 어떻게 합니까? 좀 더 노력합니다. 그러면 그만큼 레벨이 오릅니다. 한층 더 노력하면 다음의 스텝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지혜가 나타나는 방법입니다.

 

칭찬받고 싶어하거나 인정받고 싶어하거나 하는 것은 게으름뱅이의 생각인 것입니다. 머리에서는 알고 있는데.....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사띠를 실천해서, 택법각지가 일어나 사물의 인과관계가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TV를 보고 마음이 슬프고, 아침 늦게까지 자고, 수행을 그만두고 놀러가고 싶다..... 등, 즐거운 것에 끌려버립니다. 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욕구에 끌려버립니다.

혹은 어떤 사람에게 무슨 싫은 말을 들으면 머리에서는 화내선 안된다 라고 알고 있어도 곧바로 화가 나 화내버린다...

 

우리는 인과 법칙을 안 것만으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곧바로 욕구나 성냄, 게으름 피우는 쪽으로 끌려가 버립니다.

그래서 「정진」이 필요합니다. TV를 보고 싶어졌을 때에는 억지로라도 TV의 스위치를 끄지 않으면 안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졌을 때에는 그런 것에 속지 않도록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음악을 듣고 싶어졌을 때에도 그만둡니다. 누워 자고 싶지만 자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와 같이 억지로 즐거움의 세계를 차단합니다. 왜냐 하면 욕구를 끊지 않는 한은 계속 괴로워하게 되니까요.

 

어쨌든 인과 법칙을 알고 있는데, 머리에서는 알고 있는데, 유혹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철저히 자신에게 경고해서 욕구나 게으름 피우는 것을 끊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때 매우 괴로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괴로움이며, 자기에게 지는 것이 더 큰 괴로움인 것입니다.

욕구나 성냄, 게으름에 지지 말고 그것들을 넘으려고 모든 노력을 하는 것, 그러한 수행 방법으로써 「정진」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는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더 강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정진을」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많이 하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더 강하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 11가지의 법이 있어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1) 악처 등의 두려움을 반조함

(2) 이로움을 봄

(3) 가야 할 길의 과정을 반조함

(4) 탁발한 음식을 공경함

(5) [정법]의 유산의 위대함을 반조함

(6) 스승의 위대함을 반조함

(7) 태생의 위대함을 반조함

(8) 동료수행자들의 위대함을 반조함

(9) 게으른 사람을 멀리함

(10) 부지런히 정진하는 자를 친근함

(11) 그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임이다. (SA, īi. 158)」

 

참을성이 많게 인내하는 것

 

명상수행이 시작된 순간부터 인내와 만족함은 필요합니다. 특히 집중 수행에 참가하게 되면 일상생활의 쾌적한 습관이나 취미 등의 일은 잊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은 방, 불편한 이불 위에서 짧은 수면을 취하게 됩니다.

 

눈을 뜨면 좌선하는 동안에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수행 그 자체의 어려움에 더하여, 평상시의 쾌적한 생활을 그립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불만에도 강한 인내심을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구나 실제로 명상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아픔 등 어느 정도의 신체적인 거부반응이 있습니다. 가려움, 다리 저림, 목과 어깨의 통증 등을 느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초조해하기 시작합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평상시 너무 신체를 응석부리게 해서 과보호하고 있습니다. 그저 조금의 불쾌감을 느낀 것만으로도 자세를 바꾸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체는 괴로움과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체가 괴로워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괴로워합니다.

불쾌한 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마음을 허약해지게 합니다. 큰 유혹이 몰아치게 됩니다.「다리를 아주 조금만 움직이면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이런 변명으로 가득합니다. 항복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곤란에 직면했을 때에는 거기서 가만히 참는다고 하는 용기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진의 에너지를 높이는 것으로, 마음은 힘을 얻고, 참을성이 많아져 아픔에 참을 수가 있게 됩니다. 정진에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에 마음을 돌이켜 강인하게 유지하는 힘이 있습니다.

에너지를 높이려면 자신의 용기를 북돋우거나, 법의 친구나 명상지도자의 격려를 얻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에너지가 보충되면 마음은 다시 긴장되어 강함을 되찾습니다.

 

ㅇ 녹초가 된 마음의 버팀목

 

주석서에 의하면 정진에는 지지한다고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아픔에 노출되어 풀이 죽어버린 마음을 지지합니다.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낡고 황폐한 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넘어져 버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튼튼한 나무나 돌로 보강하면 넘어지지 않고 계속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아픔으로 약해져 버린 마음을 용기 있는 노력으로 지지하면, 새로운 마음으로 주의력을 유지해서 수행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벌써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병이 있는 수행자는 건강한 사람과 같이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몇 번씩이나 병의 증상과 마주보는 것으로, 마음과 신체의 에너지를 소모해버립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이기에 의욕이 꺽입니다.

그래서 지병이 있는 수행자가 인터뷰시에는 절망과 낙담을 호소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습니다. 수행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몇 번이나 똑같은 벽에 부딪치니까 모든 것이 쓸데없다고 느껴집니다. 포기해버리고 싶고, 명상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마다 설법이나 격려의 말, 비슷한 사례를 드는 것 등으로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와 수행을 계속하게 됩니다.

 

용기를 북돋고 격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군가와 수행이 막혔을 때는 다시 궤도에 오르도록 그 사람의 등을 밀어줍니다.

정진은 우려를 알지 못하게 하고, 대담함과 용기로 가득 찬 마음으로써 나타납니다.

 

ㅇ 마음의 더러움을 증발시키는 열

 

붓다는 마음의 에너지를 열의 일종인 ātāpa(아-따-빠)로 말씀했습니다. 에너지로 가득 채워진 마음은 뜨거워집니다. 이 열이 마음의 더러움을 증발시킵니다.

번뇌는 습기와 같은 것입니다. 에너지가 없는 마음은 곧바로 축축이 습기가 차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강한 정진이 있으면 그 열로 번뇌는 마음에 접하기 전에 증발해 버립니다.

마음에 정진의 에너지가 가득차면 정신적인 더러움은 마음에 접하기는커녕 가까워지는 것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열로 따뜻해진 것은 공격할 수가 없게 됩니다.

 

열은 분자 레벨에서의 진동입니다. 붉게 가열한 철의 분자는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연성이 더해지면 가공할 수가 있게 됩니다. 명상도 이것과 같습니다. 정진이 강하면 마음은 진동하고 기민하게 됩니다.

에너지로 가득 찬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대상으로 재빠르고 경쾌하게 점프해갈 것입니다. 그리고 현상에 접한 마음은 열에 의해 그것들이 고정된 것이라고 하는 환상을 녹여버립니다. 그 결과 현상이 생멸하는 것이라고 압니다.

수행이 궤도에 오르면 정진이 스스로 지속하게 됩니다. 철의 봉을 불로 오랫동안 달구어 붉게 열을 가진 채로인 것과 같습니다.

 

번뇌가 멀어지는 동시에 투명함과 밝음이 마음에 생깁니다. 마음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순수하고 명료하게 지각합니다. 마음은 예민하게 되어, 생기고 있는 현상의 세세한 부분까지 강한 흥미를 가지고 파악하게 됩니다.

이 에너지로 가득 찬 사띠에 의해, 마음은 관찰 대상으로 깊게 비집고 들어가, 산란하거나 분산하는 일 없이 거기에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사띠로 집중이 확립되면, 명석한 직관적 지각, 즉 지혜가 나타나는 기초가 생깁니다. 끊임없는 정진을 거듭해가면 알아차림, 집중, 지혜라고 하는 건전한 요소가 생겨 강함을 늘려서, 따라서 다른 건전하고 행복한 상태도 생깁니다.

예민함을 늘린 마음은 진리의 본질에 보다 깊게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ㅇ 나태가 가져오는 손실, 그리고 해방의 기쁨

 

정진하는 대신에 게으름피워버리면, 주의력이 무디어져 유해한 마음의 상태가 비집고 침입합니다.

초점이 희미해지면 수행자의 마음은 건전한 상태에 있는지 아닌지 신경쓰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타성으로 수행이 진행되는 것같이 생각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종류의 대담함, 게으름에서 오는 뻔뻔함은 서서히 수행자를 좀먹어 수행의 진전을 늦추어 버립니다. 마음은 젖고 무거워져, 부정적인 불건전한 경향으로 가득합니다. 비를 맞아 곰팡이가 피어난 모포와 같이.....

 

번뇌는 마음을 관능적 쾌락의 세계로 질질 끌어들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것은 특히 욕망의 하나의 형태인 rāga(라-가, 탐욕)에 대해 적용됩니다.

용기 있는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rāga의 포로가 되어, 되풀이하여 관능적 쾌락의 세계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정진을 마음에 주입하는 것으로서 이 유해한 에너지로부터 피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무중력의 우주 공간으로 탈출하는 것에 성공한 로켓과 같이 가벼워집니다.

욕망이나 혐오라고 하는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마음은 환희와 침착성으로 가득 차 바람직한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스스로의 정진의 불길을 통해서 밖에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해방감이 체험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명상을 하고 있는 한중간에 누군가가 근처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고 합시다. 맛있을 것 같은 향기가 감돌아 와 당신의 코에 닿습니다.

이럴 때 진정한 사띠가 있으면 이 냄새를 하나의 대상으로 하여 단지 명칭을 붙여 알아차릴 뿐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알고 있지만 애착이나 집착은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다리를 풀고 일어서 고기 한 조각을 받으려는 충동도 생기지 않습니다.

불쾌한 대상이 생겼을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혐오도 생기지 않고, 혼란이나 망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과 물질의 성질을 분명히 관찰하면, 불선한 요소에 컨트롤되어버릴 일은 없습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식사는 매우 귀찮은 영역입니다. 특히 집중 수행 중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음식에 대한 탐욕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음식에 대해서 강한 혐오감을 가지는 일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띠하는 상태가 되면 혀에 닿는 음식은 완전히 부정한 것이라고 하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 있습니다.

한층 수행이 깊어지면 일부의 수행자는 음식을 몹시 불쾌한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해 한입 먹는 것이 매우 힘든 상태가 됩니다. 혹은 명상으로 강한 기쁨을 느끼면 그것이 마음의 영양이 되어 식욕이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라 해도 이러한 초기의 반응을 극복해서 에너지를 유지하는데 충분한 음식을 먹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몸에 영양분이 결핍되면 체력도 지구력도 없어져 최종적으로는 명상수행을 실천하는 기반 그 자체가 무너져 버립니다.

 

위리야(정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을 꿈만 꾸고, 실제로 수행에 힘쓰지 않는 사람은 혐오 속에서 몸부림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을 빨리어에서는 kusīta(꾸시-따, 나태한 자)라고 부릅니다.

세속에서 살며 할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이나 가족을 부양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경멸받습니다. 게으름뱅이로 불리거나 여러 가지 형태로 모욕당하게 됩니다.

 

kusīta는 특히 말로 조롱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너지는 불가결한 것입니다.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힘들다고 포기해버리면 「겁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용기도 과감함도 없습니다.

게으름뱅이는 비참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타인으로부터 업신여겨질 뿐만 아니라 정진이 약하기 때문에 번뇌가 쉽게 일어나 버립니다.

 

그리고 3종류의 잘못된 생각에 습격당하게 됩니다. 갈애, 파괴, 그리고 잔인함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그냥 답답하고 비통하고 불쾌합니다. 나태한 사람은 혼침·수면에도 간단히 당해버립니다. 이것도 또한 불쾌한 상태의 하나입니다. 뿐만아니라 정진의 에너지가 없으면 기본적인 계율마저 지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계를 어기면 계청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잃는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나태는 명상수행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해서 마음을 보다 높은 단계로 성장시킬 기회를 빼앗아버립니다. 이 때문에 붓다는 나태한 사람은 많은 유익한 것을 잃는다고 하셨습니다.

 

ㅇ 지속성

 

정진이 높아져 깨달음의 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성이 없으면 안됩니다. 즉 정진이 중단되거나 막히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계속 증가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정진에 의해 마음은 좋지 않은 사고로부터 지켜질 수 있습니다.

넘치는 에너지에 의해서는 혼침·수면이 생길 수 없습니다. 지계는 강고한 것이 되고, 집중과 통찰이 연속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정진에 의해 마음은 밝고 역동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됩니다.

 

명상수행으로 큰 성취를 경험하면 좋은 정진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격렬한 아픔이 일어났는데 반응하거나 타격을 받는 일 없이 관찰해서 그 본질을 간파할 수가 있으면, 마음은 큰 만족을 얻어 스스로의 영웅적 달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마음이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진의 덕분이라고 알아차릴 것입니다.

 

ㅇ 지혜가 있는 주의력이 정진을 낳는다.

 

정진, 혹은 에너지가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해서 붓다는 간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지혜가 있는 주의력을 가지고 고찰하는 것으로 정진의 3가지 요소를 환기할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의 단계 : 번뇌의 세계를 떠난다.

붓다가 말한 3가지 정진의 요소란 시작의 정진, 해방의 정진, 지속의 정진입니다.

 

시작의 정진은 집중 수행 등으로 수행을 시작할 때에 필요하게 됩니다.

먼저 마음은 새로운 환경에 압도되어 세속에 두고 온 것에 강한 미련을 느끼게 됩니다. 명상수행의 길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서는 우선 명상이 가져오는 혜택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띠를 넣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수행을 시작한 직후면 매우 기본적인 명상 대상이 지정됩니다. 중심 대상만을 보고 알아차리다가 주의가 빗나가 버렸을 때에만 다른 대상을 사띠하도록 지도받습니다.

 

이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방법인 첫 번째의 정진, 시작의 정진을 구성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로켓의 발사 시 지면으로부터 떨어지는 단계입니다.

중심 대상으로 일정 시간 사띠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아직 반드시 순조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픔이나 졸음 등의 장애가 생겨옵니다. 알아차려 보면 통증, 초조, 식욕, 졸음, 의심의 먹이가 되어있습니다.

중심 대상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어 어느 정도의 침착성과 평온함을 맛볼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대상이 갑자기 덮쳐옵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낙담하거나 나태하게 되기 쉽습니다.

시작의 정진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통증과 졸음에 맞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 제 2단계의 에너지는 해방의 에너지입니다.

로켓이 지구의 대기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1단을 분리하고 2단을 점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로부터의 격려가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혹은 스스로 해방의 에너지를 상기시켜야 할 이유에 대해 잘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밖으로부터와 안으로부터의 격려를 무기로써 단호히 아픔들을 관찰하는 노력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장애를 극복할 수가 있으면 마음은 분발하는 에너지가 끓어오릅니다. 의식에 뛰어 들어오는 모든 대상과 마주 보는 마음가짐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등의 아픔이나 덮쳐오는 졸음을 잘 관찰해서 그것이 작은 구름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체험했다면, 마음은 생기를 되찾아 밝게 빛나게 됩니다. 에너지가 고양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해방의 에너지를 직접 경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 수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음은 만족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스승이 과제를 추가한다고 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신체의 여러 가지 접촉하는 부분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 등입니다. 이것은 제3단계의 에너지인 지속의 에너지를 재촉하기 위한 지도입니다. 지속의 에너지는 수행이 깊어져 목표로 가까워지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로켓이 3단을 점화하는 것에 의해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탈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속의 에너지가 증장하는 것에 의해 수행자는 통찰의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비록 수행 중에 일시적인 행복감을 맛보았다고 해도 세속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은 레벨의 평온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 점을 자기 자신에 비추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수행합니까?

적어도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 즉 성자의 길에 들어간 사람이 되어 위험하고 고통에 수반하는 악처에 윤회하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표가 무엇이든 달성할 때까지는 결코 도중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해지거나 지체함 없이 지속하여 정진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하는 정진은 점점 힘을 얻고 마침내 당신을 목적지로 옮겨줍니다. 이와 같이 충분히 발달한 정진을 빨리어로 paggahitaviriya(지지하는 노력, 지속의 정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수행이 완성할 때 ‘달성의 정진’으로 불리는 제4단계가 나타납니다. 이것에 의해 수행자는 감각적 쾌락의 중력을 완전하게 뿌리쳐서 열반이라고 하는 자유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정진하면 스스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정진각지를 일으키게 하는 11가지의 방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① 악처 등의 두려움을 반조한다.

우선 나태해질 가능성이 있으면 apāya(아빠-야, 악처)의 비참함, 두려움에 생각이 미쳐 보는 것입니다. apa는 ‘결핍된, 누락된’ 이라는 의미입니다. aya는 ‘행복을 가져오는 선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인간, 신들, 범천이 경험할 수 있는 행복, 열반에서 맛보는 행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행을 게을리하면 불선업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 윤회할지도 모릅니다. 축생도는 가장 쉽게 관찰할 수가 있으므로 그 존재를 받아들이기 쉬울 것입니다. 육·해·공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선업이나 허물없는 행동이 가능할까요?

동물은 망상의 안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두꺼운 무명과 무지로 덮여있습니다. 예를 들면 곤충은 어느 쪽일까 하면 기계에 가깝습니다. 유전자의 프로그램에 따라 정해진 행동을 실행해 나갈 뿐입니다. 거기에는 선택, 학습, 판별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의 정신의 기능은 번식과 생존과 관계되는 것에 한정됩니다.

 

동물의 세계는 역할 분담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단순합니다. 먹느냐 먹히느냐, 혹은 그 양쪽 모두인가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가혹한 세계입니다. 그러한 무자비한 조건하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의 마음에 생기는 공포와 의심, 망상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다른 동물에게 먹히어 죽어가는 생명의 고뇌와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큰 고통에 찬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 어떻게 선한 삶으로 재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죽을 때의 마음 상태가 어떤 재생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변수입니다. 동물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쉬울까요?

동물이 용서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도덕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계율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명상수행이라고 하는 숭고하고 어려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물이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해서 성장시켜 갈 수도 없습니다. 불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선택사항이 없는 세계에 사는 것은 생각만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당신은 분발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수행자다. 이것이 좋은 기회다. 게으름피우며 시간을 낭비할 수 있겠는가? 다음 생에 만약 축생으로 태어난다면 정진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요소를 개발하는 것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분투노력을 할 때다!」라고.

 

② 정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세간적인 수승함과 출세간적인 수승함에 생각이 미친다.

정진을 일으키게 하는 두 번째의 방법은 그 에너지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에 생각이 미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담마, 즉 붓다의 가르침을 접했다고 하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비할 데 없는 담마의 세계에 들어선 이상, 붓다의 가르침의 진수로 통하는 길을 걸을 기회를 쓸데없이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세속을 초월한 정신상태를 손에 넣어 성자의 4단계의 도와 과를 얻어 열반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의 수행에 의해 괴로움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승에서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게 해탈할 수가 없다고 해도 최소한 예류자(성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류자가 되면 악처에 윤회하는 일은 없어지니까요.

 

그러나 이 길을 걷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에게는 대단한 용기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뛰어난 인간이 아니면 안됩니다.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이 위대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진수로 이끄는 이 길을 걸을 기회를 쓸데없이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 생각이 미치면 힘과 의지가 일어나 더욱 수행에 전념할 수가 있습니다.

 

③ 성자들에 생각이 미친다.

3번째는 이 성스러운 길을 걸은 숭고한 그 분야의 성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이 길은 퇴각하는 길이 없습니다. 과거의 과거불, 독지불, 위대한 부처님의 제자들인 아라한들, 이러한 모든 성자들이 이 길을 걸었습니다.

이 고귀한 길을 함께 걷고 싶다면 존엄을 가지고 자신을 증장시키기 위해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겁쟁이나 게으름뱅이가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이 길은 영웅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있습니다.

이 길을 걸은 그 분야의 성자들은 빚진 자나 마음의 문제에서 도망가기 위해서 이 세상을 버린 부적응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성자들은 유복한 집안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재가생활을 계속했다면 틀림없이 즐거운 인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굳이 세속생활을 선택하지 않고 속세적인 생활의 허무함을 보고 일반적인 관능적 쾌락을 넘은 보다 큰 행복과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또한 낮은 신분의 출신으로 사회 구조나 지배자에 의한 억압, 병 등과 싸워 온 결과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속적인 방법으로 괴로움을 완화시키거나, 자신들이 받는 부당함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 그 자체를 전부 없애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상류계급 출신의 수행자들과 차별 없이 불제자의 일원이 되어 모두 해탈의 길을 목표로 했습니다.

 

붓다는 진정한 숭고함은 내면적인 청정함에 의하는 것이지 사회계급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과거의 부처님, 그리고 고귀한 부처님 제자들은 성스러운 통찰과 보다 높고 보다 위대한 행복에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을 버리고 열반으로 이끄는 이 길을 걸었습니다.

이 길은 성스러운 길이며 낙오자가 걷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해보시길 바랍니다.

「탁월한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왔다. 나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이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여기서 방일할 수 없다. 세심한 주의력을 가지고 용기있게 걸어가자. 이 성스러운 가족의 일원이 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내 자신이 수행할 기회를 얻은 것을 축복해야 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 다양한 단계의 깨달음을 얻었다. 나도 또한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정진이 일어나서 당신을 열반이라고 하는 목표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④ 도움 주는 분들에 대한 감사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4번째의 방법은 식사나 생활필수품을 마련해주신 것에 대한 경의와 감사입니다.

 

출가자라면 재가신자의 보시에 대한 경의를 의미합니다. 보시를 받았을 때는 물론, 그렇지 않을 때라도 수행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관대함의 덕분이라고 항상 자각하고 존중합니다.

 

재가수행자도 다양한 형태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가족은 당신이 집중수행에 참가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거나 당신의 일을 대신해 주거나 할 것입니다. 비록 수행비용을 스스로 지불했다고 해도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수행처에서는 당신에게 비바람을 피하게 해주는 장소가 제공되고, 물이나 전기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식사를 만들어줍니다. 당신에게 아무런 빚도 없는 사람들이 선의와 깊은 자애의 마음으로 제공해주는 서비스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릅시다.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사람들의 선의에 응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 지원자들이 제공해준 선의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겠는가. 나는 사띠하면서 번뇌를 조금씩 제거하여 마침내 완전하게 없애도록 하자. 그러면 보시해준 사람들의 덕행도 그에 상응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붓다는 비구나 비구니 상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율을 제정했습니다. 그중에 선의의 재가 신자로부터의 보시는 받아도 괜찮다고 돼있습니다. 이것은 편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비구나 비구니가 자신의 몸을 적절히 관리해서 번뇌를 없애는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 조건을 마련할 수가 있도록 생활필수품을 받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도움을 받은 것으로 수행자는 모든 시간을 계·정·혜의 실천에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을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후원해 주는 사람들의 선의에 응하는 방법은 열심히 수행에 힘쓸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칩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신의 명상수행 중에 받은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⑤ 성스러운 유산을 계승한다.

정진을 일으키게 하는 다섯 번째의 방법은 성스러운 유산을 계승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는 것입니다. 성자의 유산은 7개의 비물질적인 특성으로 구성됩니다.

즉 믿음(saddhā), 도덕(sīla), 도덕적인 수치심(hiri)과 두려워함(ottapa), 담마에 대한 이해, 관용(번뇌를 단절하는 것은 커다란 너그러움이고, 타인에게 베푸는 일도 너그러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지혜(이것은 위빳사나 수행으로 얻는 일련의 통찰력, 최종적으로 열반으로 돌진하는 지혜)입니다.

 

이 유산의 훌륭한 점은 7가지 모두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부모님이 물려주는 유산은 다양한 의미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곧바로 낭비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유산은 반드시 이익을 가져옵니다. 계승한 사람을 지키고 높여 줍니다. 죽음의 문을 넘어 그 후의 윤회에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속에서는 망나니 자식에게는 유산을 계승해주질 않습니다. 담마(법)의 세계도 같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만날 기회를 얻어도 그 후의 수행에서 방일하고 태만하다면 그 사람은 이 7가지의 성스러운 유산을 계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없는 불굴의 정진의 힘을 갖춘 사람만이 이 숭고한 유산을 계승하는 자격이 있습니다.

 

모든 통찰의 단계를 밟아서 성자의 마음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정진의 힘을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발전한 정진의 힘, 열반을 성취시키는 정진의 힘이야말로 이 성스러운 유산의 혜택을 남김없이 받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수행에 있어서도 정진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7가지의 특성은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상기하면 더욱 열정적으로 수행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⑥ 붓다의 위대함을 반조한다.

정진을 발달시키는 여섯 번째의 방법은 이 해탈의 길을 발견하시고 그 방법을 말씀하신 붓다의 위대함과 능력을 반조하는 것입니다. 그 위대함은 생애 동안 만물의 근원인 대지가 7번이나 진동했다고 하는 일화로부터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미래의 붓다인 보살이 마지막 생을 받고 모친의 자궁에 머물 때에 대지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싯닷따 태자가 궁전을 나와 출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에 다시 진동했고, 그다음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진동했습니다.

네 번째는 붓다가 최초로 설법했을 때, 그리고 다섯 번째는 그가 적을 무찔렀을 때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33천에 태어난 그의 어머니에게 아비담마를 설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붓다가 반열반에 들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조건지어진 존재로부터 영원히 멀어졌을 때 일곱 번째 대지의 진동이 있었습니다.

 

상상 해보십시오. 붓다의 자비의 깊이를! 그리고 지혜의 깊이를! 붓다의 완벽함을 이야기하는 일화는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보살일 때에 오랫동안 모든 바라밀을 완성하고 목표를 향해 수행해서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것, 그 후 깊은 자애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 여러분도 노력을 계속하면 붓다의 숭고한 특성을 나눌 수 있습니다.

 

붓다가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중생은 망상과 무지의 어둠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중생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식대로 수행하거나 진리를 찾았다고 주장하는 누군가를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진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행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생각해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려운 고행으로부터 관능적 쾌락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출현하기 이전, 먼 과거세에 수메다(Sumadha) 선인은 얼마나 많은 중생이 암흑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중생이 안전하게 피안에 건너기 위해서는 인도가 필요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수메다 선인은 그 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소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깨닫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을 보내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도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 정등각자가 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중생을 해탈로 이끄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많은 생을 거쳐 정등각자로의 준비를 완성하고, 실로 뛰어난 인물로서 이 세계에서 고따마 붓다로서의 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에 3가지를 완성했습니다. 그것은 인연, 결과, 봉사입니다.

 

그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인연의 덕분에 완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인연이란 무수한 과거세에 정진에 의해 증장된 바라밀(맑고 깨끗한 마음에서 생기는 힘)입니다. 보살일 때 실천한 놀랄 만한 보시행, 자비행, 덕행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날 때마다 어떤 삶이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증장된 마음의 맑고 깨끗함이 토대가 되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어 일체지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결과의 완성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인연의 완성, 즉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생기는 강한 힘을 개발한 것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봉사의 완성입니다. 오랜 세월 가르치고 이끄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붓다는 스스로 깨달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커다란 자애와 연민으로 가르침을 받게 되는 모든 중생들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쉬는 일 없이 설법을 했습니다. 담마(법)를 이해한 모든 중생들은 그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붓다의 세 가지 위대한 성취의 다양한 측면을 반조하면 자신의 수행에 대해 더욱더 정진할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몸과 마음 다하여 엄청난 노력을 스스로 부과하여 붓다가 되려고 한 수메다 보살의 유일한 동기는 자비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중생이 잘못된 행위에 의해 괴로워하고 있는지 위대한 자비의 눈으로 그것을 간파한 수메다 보살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중생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이끌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를 얻을 것을 맹세했습니다.

 

자비에는 행위가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게다가 그 행위가 결실을 보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에 의해 올바른 길과 잘못된 길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자비가 있어도 지혜가 없으면 도울 생각이 오히려 해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훌륭한 지혜를 얻어 깨달음을 이루었다 해도 자비의 마음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붓다는 지혜와 자비의 양쪽 모두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 보살로서 수많은 윤회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괴로워하는 중생에게로의 커다란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모욕하고 상처입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끈질기게 그것을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식에게 향하는 자비의 마음을 다 합쳐도 붓다의 위대한 자비의 마음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엄청나게 관대한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자식은 때에 따라 어머니를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상처 주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마음에는 무한한 넓이가 있습니다. 이 용서의 힘은 커다란 자비의 표현입니다.

 

붓다가 과거세에 원숭이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숲속에서 한 사람의 바라문이 바위의 갈라진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쌍한 바라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을 본 원숭이는 자비의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원숭이에게 이러한 마음이 일어난 것은 보살이 지금까지 수많은 생애를 보내며 자비의 바라밀을 쌓아 올려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문을 구하기 위해 뛰어내리려고 생각한 원숭이는 과연 자신에게 바라문을 들어올리는 힘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지혜가 번쩍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큰 바위로 자신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원숭이는 바위를 들어 올려보고 나서 내려놓았습니다. 바라문을 구조해 낼 수가 있을 것 같다고 알았습니다.

원숭이는 바위의 갈라진 곳에 내려가서 힘을 다하여 바라문을 안전한 장소까지 옮겼습니다. 바라문을 옮긴 원숭이는 완전히 지쳐 땅에 쓰러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라문은 감사하기는커녕 돌을 주워 원숭이의 머리를 후려갈겼습니다. 원숭이의 고기를 가지고 돌아가 저녁 식사에 쓰려고 했습니다. 원숭이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해했지만 화내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살인 원숭이는 관용이라고 하는 자질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원숭이는 바라문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구했는데, 나를 죽이는 일은 적절한 일입니까?」그리고 원숭이는 바라문이 숲에서 길을 잃어 혼자서는 집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보살인 원숭이의 자비는 확실히 무한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바라문을 숲속에서 벗어날 때까지 죽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흔적을 남기면서 원숭이는 바라문을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문이 올바른 길에 도착했을 때 숨을 거두었습니다.

붓다는 원숭이로 태어난 과거세에조차 이 정도의 자비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에 얼마나 수승한 바라밀을 완성시키고 있었는지 상상 해보십시오.

 

보살로서 무수한 윤회를 반복한 후, 붓다는 마지막 생존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바라밀을 완성한 후 보살은 해탈의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수행을 시도하고, 마침내 성스러운 길을 발견합니다. 이 길을 걸으며 모든 현상이 무상, 고, 무아임을 깊이 관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이 깊어지고 다양한 깨달음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아라한이 되어 욕구·분노·망상이 전혀 없는 맑고 깨끗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절지와 붓다가 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통찰력이 생겼습니다. 일절지란 붓다가 알고 싶었던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 물음에 대해 생각한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답이 생각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빛을 얻은 결과, 붓다는 「결과의 결실 공덕에 의한 완성」으로써 알려져있는 것을 안게 되었습니다. 이 완성은 붓다가 무수한 과거생에서 쌓아온 특정의 원인과 필요조건이 완성된 것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된 후에도 먼 옛날 수메다 선인으로서 세운 맹세를 잊은 적은 없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열심히 수행을 계속한 그 목적은 모든 생명의 괴로움의 거친 바다를 건너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된 지금, 그 커다란 자비와 지혜는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2개의 자질에 근거해 붓다는 담마(법)를 말하기 시작해서 반열반에 들어갈 때까지의 45년간 계속 설했습니다. 하루 2시간밖에 쉬지 않고 그 이외의 시간은 모두 담마(법)에 바쳤습니다. 중생이 건강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했습니다.

임종 직전에 조차도 다른 종파를 버리고 온 수밧다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에 의해 수밧다는 붓다의 인도로 깨달음을 얻은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생명의 행복을 걱정하는 마음의 완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붓다의 자질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었는데 왜 붓다는 이 세상에서의 생존을 계속했을까요? 왜 사람들과 교류했을까요? 붓다는 생명을 괴로움으로부터 구해서 올바른 길로 이끌고 인도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은 붓다가 나타낸 가장 순수한 자비, 가장 깊은 지혜입니다.

붓다는 완전한 지혜에 의해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를 식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구별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생명을 구제하는 것 등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또한 현명해서 무엇이 행복을 가져오고 무엇이 불행을 가져오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자비의 마음이 없으면 다른 생명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붓다는 자비의 마음의 실천으로부터 해악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악한 행위를 피하도록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혜에 의해 상황에 따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법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비와 지혜의 두 바퀴에 의해 붓다는 비교할 수 없는 스승이 되었습니다.

 

붓다에게는 명예나 명성을 얻고 싶다거나, 혹은 많은 신봉자를 거느리어 칭송받고 싶다는 등 이기적인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교적인 의도로 사람들과 접촉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각각의 그릇에 어울리는 광명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고 중생들을 마주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붓다의 커다란 자비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 의무를 끝내면 붓다는 사람이 없는 숲의 한적한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속인과 같이 청중 속에 머물며 즐겁게 담소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자를 소개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유복한 상인 아무개다. 그는 훌륭한 학자 아무개다.」등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떨어져 고독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의 인간은 완전한 고독을 즐길 수 없습니다.

 

담마나 수행을 지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제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어떠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경우는 붓다를 본받아 반드시 커다란 자비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도자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과 너무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위험을 수반합니다. 명상지도자가 제자들과 너무 친해지면 예절이나 경의가 없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담마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대하여도 붓다를 표본으로 하여 적절한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지도자로서 유명하게 되거나 성공하거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순수한 자애가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신·구·의의 행동을 바로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동기가 이 점으로부터 빗나가지지 않는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수행 방법이든 우선 지도자 자신이 수행에 숙달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경전에 대한 흔들림 없는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순수한 자애와 연민심에 근거해서 앞의 2가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3가지를 감안하여 지도하면 확실히 상과를 올릴 수가 있습니다.

 

붓다의 위대함을 생각하면 존경과 예경의 생각이 샘솟는 것입니다. 그처럼 위대한 존재가 발견하여 가르친 길을 걷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길을 걷기 위해서는 느슨하거나 게으름피우거나 나태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많이 자극을 받아 용감하고 강력하며 참을성 있게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가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⑦ 우리의 위대한 "혈통"을 생각해 낸다.

정진각지를 일으키는 7번째의 방법은 우리가 계승하고 있는 "혈통"의 위대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명상수행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과거 부처님들의 성스러운 "혈통"에 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담마(법)라고 하는 "피"의 "수혈"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붓다가 태어난 땅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든, 인종, 신념, 습관의 차이가 나도 관계없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라(계), 사마디(정), 빤냐(혜)라고 하는 삼학의 실천에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 한, 우리 모두 같은 담마의 가족의 일원입니다. 담마는 우리의 피입니다. 붓다의 시대에 같은 수행을 한 성자들의 몸 안을 흐른 것과 같은 피입니다. 솔직하게 경의를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 위대한 혈통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⑧ 동료의 위대함을 생각해 낸다.

정진각지를 일으키는 여덟 번째의 방법은 담마의 길을 걷는 동료의 위대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빨리어에서 브리흐마짜리야(청정범행자)로 성스러운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이전에는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테라와다 비구니 상가는 그 맥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현대에 있어 정식적 상가는 비구와 사미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붓다가 정한 규율에 따라 수행합니다.

또 남녀의 아나가리까(anāgārika, 재가생활을 떠난자)와 달라신(dasasīla, 10계 수계자)도 있습니다. 이분들은 지키는 계의 수는 적지만, 역시 성스러운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식으로 출가했든 하지 않았든 모든 수행자는 청정, 도덕, 집중, 지혜라고 하는 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수행자의 한사람인 이상 붓다의 직계제자였던 사리뿟따존자, 목갈라나존자, 그리고 마하깟사빠존자 등의 위대한 제자들과 같은 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비구니 상가에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그녀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담마를 추구하는 위대한 용기있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성스러운 생활에 있어서의 우리의 동지인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책을 읽고 그 위대함과 용기와 헌신에 생각이 미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존자들과 같은 높은 수준에 따라 살아가는지 반성해봅시다. 그리고 또 매일의 수행에서 이러한 위대한 동료들에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의욕이 일어날 것입니다.

 

⑨ 나태한 사람을 피하는 것

정정진을 일으키는 9번째의 방법은 나태한 사람과는 교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마음을 증장시키고 맑고 깨끗하게 사는 것에 전혀 흥미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맛있는 것 먹고 자며 기분이 향하는 대로 즐기고 재미있는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냥감을 통째로 삼키면 몇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악어를 닮아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정진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들 무리와 어울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적극적인 한 걸음이 됩니다.

 

⑩ 정진하는 도반을 찾아내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충분히 수행이 진척되고 지속적인 정진을 몸에 익힌 수행자와 어울리도록 하는 것이 정정진을 일으키게 하는 10번째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특히 성자를 만나는 것을 가리키고 있지만, 누구든 법에 완전히 몸을 바쳐 인내와 강고한 의지를 가지고 순간순간 사띠하여 지속적으로나 점진적으로 높은 경지에서 정진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하는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도반인 것입니다. 그런 표본이 되는 수행자로부터는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이나 수행의 방법을 본받으면 자기 자신의 성장으로 연결됩니다.

그들의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에 "감염"되어 봅시다. 좋은 에너지를 가져오고 많이 그 영향을 받으십시오.

 

⑪ 정진의 개발에 의욕적인 것

정진을 환기하기 위한 마지막 그리고 최선의 방법은 어떤 때도 정진을 개발하는 것에 의욕적이고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강고한 의지를 가지는 것이 열쇠가 됩니다.

「앉아 있을 때도, 서 있을 때도, 걷고 있을 때도, 이동할 때도 가능한 한 순간순간 알아차리고 있도록 하자」라고.

반대로 쉽게 자신에게 져버리는 적당한 태도로 임하면 수행은 처음부터 잘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든 순간을 용기있는 정진, 지속력과 지구력이 있는 에너지로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게으름이 침투해오면 곧바로 잡아서 내쫓아야 합니다. 꼬삿자(나태, 게으름)는 명상수행의 토대를 침식하는 가장 파괴적인 요소의 하나입니다. 그것을 근절하려면 용기 있고, 인내하며 지속적인 정진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소개한 11가지 방법의 하나, 혹은 모든 것을 사용해서 정진을 높여 성스러운 길을 순조롭게 진행하여 번뇌를 영구히 근절하는 상태에 도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