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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정진각지입니다.
위리야 삼봇장가(viriya sambojjhaṅga)인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 즉 마음을 끈질기게 관찰 대상으로 계속 향하기 위한 에너지입니다. 빨리어 주석서에서 viriya는 vīranaṁ bhava(위-라낭 바오-) 즉 「영웅적인 사람들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말로부터 수행하는데 있어서 노력이라는 것이 어떠한 특질을 가지고 어떻게 체험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를 수반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진각지는 먼저 둘로 나누어서 설명하겠습니다.
택법각지에서 자연스럽게 잘 나아가는 경우와, 필사적으로 매달려 노력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우선 위빳사나 수행을 잘하는 사람의 경우, 즉 진지하게 수행하는 사람의 경우는 사띠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언뜻언뜻 지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택법각지입니다. 문제없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진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럼 좀 더 노력해보자’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아! 이것은 재미있구나!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떤 것일까?’라고 보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해나가는 사람의 정진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평소 생각하고 있는 정진과는 다릅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것이 무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화를 낼까 내지 말까 하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마와 루빠 밖에 없다, 그것은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다, 지금의 현상과 다음의 현상은 전혀 다르다, 라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함정도 있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정진하고 싶은 성격의 인간은 그다지 흔치 않습니다. 조금 정진하고 그 결과를 평가받고 싶어집니다. 명상실천으로 마음의 번뇌가 적어진 것만으로, 집중력이 향상된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무엇을 만족해버리면 성장이 그것으로 멈추어버립니다. 재빨리 결과를 즐기고 싶은 사람의 정진은 도중에서 멈춥니다. 환언하면 게으름이 비집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고, 말하자면 욕구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영화도 사실은 거기에 영화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단지 빛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것을 알고는 있지만 역시 영화는 보고 싶습니다. 보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려 보고 싶으며 로맨틱한 기분에도 젖고 싶어집니다.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러므로 다만 무상을 알았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무아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이 테라와다 불교를 확실히 공부한 사람과 태어날 때부터 불교의 세계에서 제대로 자란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보통의 상식으로 무상과 무아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깨닫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놀거나 즐거워하거나 욕구 속에 탐닉하거나 합니다. 불교를 잘 알고 있는 사람, 불교를 잘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놀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놀고 있으면 주위로부터 당신 그렇게 놀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놀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낭패를 보게 된다는 말을 듣게 되고, 그렇게 말을 들으면 그만두어야 한다고 자신도 알고 있지만, 역시 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외도를 좀 하고 싶어집니다. 외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도 깹니다. 그렇습니다. 역시 계율을 깨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좋을 게 없다고 알고 있고, 그렇게 하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합니다.
무상을 알고 있어도, 무아를 알고 있어도, 역시 마음은 욕구에게로 가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수행을 해서 가령 사띠는 잘된다, 택법각지도 일어난다고 한들 거기서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절대 못 나아갑니다. 그래서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진은 일반적인 세속적 정진과는 다릅니다. 어떠한 정진이냐 하면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 변하는 것이며 무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그런 것을 접촉하여 괴로움을 맛보고 있는가? 왜 당신은 번번이 윤회를 반복하는 짓을 하는가? 그런 생활과 인생을 보내고 있으면 아무리 무상이다, 무아이다, 라고 아는 체를 해봐도 죽으면 또다시 어딘가에 환생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겨울 정도로 무상을 보아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싫증이 나서 포기해버릴 때까지 무아를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상이라는 것, 고라는 것을 끝까지 봐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쾌락의 세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러면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지만 그것을 컨트롤해버립니다. 그런 것에 속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고 싶지만 그만둡니다. 자고 싶지만 자지 않고 버팁니다. 졸면서라도, 철야를 해서라도 좌우지간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싫어질 때까지 한다고 하는 그런 혹독한 정진입니다.
주석서에서 말하듯이 정진이란 괴로움이나 곤란에 직면했을 때에 불굴의 인내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를 악물어 끝까지 완수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엄격한 계율의 세계가 형성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설법의 세계에서는 왜 계율이 필요한가 하는 본질적인 면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왜 법문에서 계율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가 하는 이유는 사물의 본질을 여러분은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역시 개개인에 따른 것이므로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만 하는가, 먹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은 본인에게 달렸습니다. 그런 것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계율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을 것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침에 무엇을 먹든 저녁에 무엇을 먹든 그것은 다만 영양만을 취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식에 너무나 집착하는 식도락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하루 한 끼만 먹도록 하시오’ 라고 하면 그것은 지옥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욕망을 끊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내내 괴롭겠지요.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계율의 진정한 의미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적 기능이 이미 말을 듣지 않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노인이 돌연 나는 지금부터 범망계를 지키겠다고 말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좋을대로 하십시오 라고 답해줄 뿐입니다.
괴로움도 고됨도 없는 것은 수행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고 싶으면 역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노력하고 극복해서 정신적 고통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ㅇ 나를 이기기 위한 중요한 점검법
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이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계율입니다. 뽐내기 위해서 하는 것,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하고 있는 계율은 나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계율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그런 것보다도 성품을 고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계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님들의 예를 들어보면 매일 단순히 탁발만 하거나(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무엇이든 신자들이 올리는 공양으로 식사를 하거나), 돈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라고 말하며 그 일을 실행하고 있는 스님들은 다만 그것만의 이유로 훌륭한 스님이라고 나는 보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훌륭하다고 하기 때문에 자만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성품이 고쳐져 있는가! 마음이 고요해졌는가! 자아의식에 집착하는 일은 없어졌는가! 엄격한 계에 의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는가! 등 이른바 santuṭṭhi(산뚯티, 만족, 知足)을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나는 그 스님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높이 평가할 일입니다.
어쨌든 무상은 알고 있는데 깨달을 수 없는 사람들이 결국은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버텨봅니다. 노력해 봅니다. 그것에 의해 또한 위빳사나는 터무니없는 고행이 되어 버리지만 그 고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고통, 자신을 이겨야 하는 고통입니다. 특별히 육체적 고통은 아닙니다. 자신을 이기는 것, 자신을 뛰어넘는 것, 자신에게 지지 않는 것. 그런 수행 방법의 하나로써 계율이라는 것도 포함하여 정진각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상이라는 진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혹은 택법각지가 나타난 사람에게는 정진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과연 모든 것은 무상이구나! 무아이구나! 라든지 생성된 것에 실체는 없다, 나마와 루빠 이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지혜가 생겨난 사람은 과연 그렇기 때문에 깨닫는다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목적이다! 라는 식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깨달음에 흥미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가 생기게 되면 목적이 생기게 되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노력합니다.
그것은 노력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나 기분 좋은 취미생활과 같은 것으로 그렇게 되면 재미있어지므로 누구든지 끝까지 노력합니다. 괴로운 일은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진이라는 것은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괴로운 일과는 다릅니다. 자진해서 하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대단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수행한 것으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어 역시 해탈을 하면 멋지겠구나 하는 실감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매우 간단히 순조롭게 수행을 해나갑니다. 전에 설명한 것은 그런 논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욕구에의 유혹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강제로라도 계율로라도 여러 가지를 지키면서 철야라도 해서 수행을 하는 등 여러 가지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행을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정진이 솟구쳐 나온다면, 그보다 더 고마울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것으로 만족하여 기뻐하면 게으름에 굴복하게 됩니다. 이 경우는 다양한 연구를 하여 자신을 분발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정진입니다.
어쨌든 정진이란 노력하는 것입니다. 택법각지로 분별능력이 생겨나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현상이 보입니다. 얼마간의 지혜도 나타납니다. 분명히 이것은 수행의 성과입니다. 거기에서 기뻐하며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정진하고, 노력하고, 더욱 분발하려는 사띠를 해야 합니다. 수행은 담담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족하고 멈추어버릴 소지가 있으므로 택법각지의 다음에 정진각지가 설해져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정진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마음이 드는 경우는 자신을 분발시켜서 정진각지를 키워야 합니다.
경전에서는「정진」이라는 항목을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자신이 범하고 있는 악행을 앞으로도 범하지 않는 노력, 범한 적이 없는 악행을 앞으로도 범하지 않는 노력, 자신이 행하고 있는 선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력, 자신이 아직 갖고 있지 않는 선을 앞으로 실천해 보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이 설명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당연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는 이 의미가 다릅니다.
수행자는 나쁜 행위를 이미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정이나 망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악으로 보고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이제 시작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집중력이나 이해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의 선으로는 아무짝에도 쓰이지 못하므로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정정진의 가장 심플한 해설은 수행자가 ‘해탈할 때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라는 엄한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는 결코 ‘엉거주춤한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수행이 잘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ㅇ 무상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직 깨달을 수 없다.
문제는 두 번째입니다. 슬럼프에 빠져 필사적으로 매달려 노력해야 하는 경우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슬럼프에 빠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자신은 택법각지를 하고 있다. 또한 사띠를 하여 그것들을 모두 탐·진·치로 나눌 수 있었다. 불탐·불진·불치로도 그럭저럭 나누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좋은가요?” 하고 질문해 오는 사람들의 경우의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어쨌든 정진하세요, 하루도 쉬지 말고 하세요, 사람들과 얘기하지 말 것, 웃지 말 것, 그런 것들은 안 좋다는 등 철저히 엄격하게 말합니다. 잠자서는 안 됩니다. 자는 시간은 두세 시간 정도로 하십시오. 이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의 경우는 그처럼 혹독하게 말해줘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사띠로 슬럼프에 빠지고, 그것을 간신히 뛰어넘으면, 이번에는 택법각지에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택법각지에서 슬럼프를 맞게 되면 그 수행은 엄격합니다. 지도자가 끝까지 혹독하게 대합니다. 좀 웃어도 나무랍니다. 밥을 먹고 있을 때도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누군가가 곧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접시를 어떻게 놓는지 나에게는 보이기 때문에 당신은 명확히 사띠를 행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고 있지않느냐 라고 확실히 지적합니다. 젓가락 하나라도 명확히 쥐고, 정중하게 다시 놓아 주십시오. 그렇게 대충 대충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도록 매우 까다롭고 엄격하고 귀찮게 대합니다. 지도자가 말하고 있을 때에도 진지하게 듣지 않을 때는 당신 머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망상을 그만두시오. 명확히 사띠를 가지고 해주십시오 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시킵니다. 그것은 시킴을 당하는 쪽은 대단히 싫어합니다. 이제는 끝까지 심한 창피를 줍니다. 옷 입는 법도 아주 약간이라도 틀렸거나 사띠가 염려되면 저것을 고치시오 라고 지적합니다. 이제 심한 잔소리에 질려서 지도자의 얼굴도 보기 싫어질 것입니다. 지도자가 저기에 있다 싶으면 그쪽을 보는 것조차 싫어질 정도로 괴로워집니다.
그 정도로 못살게 굽니다. 실은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만 당하고 있는 쪽은 못살게 군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새 슬럼프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으로 훌륭한 정진이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꾸중 듣지 않기 위하여, 지도자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됨으로써 짜임새 있고 상세하게 알아차리게 되며 그것만으로도 벌써 정진각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두 번째의 정진각지입니다.
왜 정진각지가 생기는지를 비유하면 물고기가 육상 생물이 되고 싶어 한다는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라는 것은 물속에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물고기가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육상 생물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윤회 속에 있습니다. 우주를 파괴하든 또는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든 그 속을 빙글빙글 영원히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괴로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은 그 윤회의 틀을 뛰어넘으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윤회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 평범한 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윤회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결국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상을 아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육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곳이다, 아름답다, 꽃도 피어 있다지 아마, 여러 가지 매혹적인 것들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위로는 갈 수 없습니다. 무상을 알고 있어도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들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열반의 상태로는 여간해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노력,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정진이라는, 조금만 더 노력하시오 라는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면 반드시 할 수 있게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기는 무리이다’와 같은 중얼거림은 부처님께서는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진은 빠뜨릴 수 없는 조건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적절히 정진하면 도달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마음가짐이면 됩니다.
ㅇ 머리는 망상하고 싶어한다.
지금까지 택법각지에서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경우와 필사적으로 매달려 노력하는 경우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염각지로부터 시작해서, 택법각지가 따라서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정진각지가 나타납니다.
이른바 지금 순간을 항상 사띠하고 있으면, 인과관계가 보여져서 사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점점 흥미도 솟아올라, 의지도 나옵니다. 흥미가 솟아올라 오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타인에게 듣지 않아도 스스로 노력하게 됩니다.
진지하게 「사띠」를 실천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의지」는 나타나지만, 그 의지는 이윽고 사라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항상 「좀 더 노력하자!」라고 하는 기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게으름피우기에 곧바로 타락 쪽에 마음이 기울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항상 정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순간을 사띠하기 위해서는 정진이 필요합니다. 정진 없이 지금의 순간을 사띠할 수는 없습니다. 망상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은 정진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망상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이 머리에 「지금의 순간만 사띠하자. 지금의 1초만을 알아차림 하자!」라고 말하면, 그것은 정진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는 곧바로 망상해버리기 때문에 서투른 알아차림에서는 「지금의 순간을 사띠한다」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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