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2. 택법각지-지식의 세계로부터 체험의 세계로 (20161111) <법문 교재>

담마마-마까 2021. 4. 18. 09:00

https://youtu.be/ek3G0oGbSrc

https://www.youtube.com/watch?v=0NlZF9juI0I

<「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제대로 해나가고 있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택법각지라는 두 번째 단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빨리어로 말하면 담마위짜야 삼봇장가(dhammvicaya sambojjhaṅga)입니다.

 

대체로 첫 번째가 잘 되어 가면 두 번째가 나타납니다. 그런 시스템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대단히 뛰어난 것은 바로 그런 점입니다. 일부러 누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 길로 나아가도록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칙이므로 그렇습니다. 법칙이란 누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상관없이 법칙 그대로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dhamma(담마)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이고, vicaya(위짜야)는 조사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dhammavicaya(담마위짜야)는 「데이터를 조사한다」 라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dhammavicaya는 택법이라기 보다는 조사·분별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수행에서 알아차리는 사띠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잡념의 공격도 받습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의 집중력도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통하여 실천을 계속한다면, 곧이어 잡념망상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의 실천이 가능하게 됩니다.

사띠의 실천이 자신과 일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실천을 계속 해나가야 합니다. 그때에 수행자는 알아차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의 변화도 보이게 됩니다.

 

‘왼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알아차릴 때, 실제로 왼발 등의 현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발은 지수화풍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것에 감각이 있을 뿐입니다.

발의 움직임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과 동시에 신체의 움직임도 쉽게 확인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시점부터는 현상을 보다 명확히 봅니다.

 

택법(dhammavicaya)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확인해 온 그 현상을 이번에는 보다 명확히 보는 것이 됩니다. 이른바 분석해서 보는 것입니다.

‘발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더욱 명확하게 사물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됩니다.

 

ㅇ 분별하는 능력은 사띠가 익숙해지면 자동적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속세간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을 만들고 있는, 왜 현상이 생겨나는가 라는 경지의 세계가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꽃을 보고 ‘장미다’라고 인식할 때는 머릿속에서 만든 현상·개념이 됩니다. 알아차림의 실천이 진전된 수행자는 장미꽃이라는 개념이 머리에 떠올라도 그보다 앞서 눈에 정보가 접촉한 것, 그것에 의해서 안식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세간에서는 장미라고 이름 붙인 것이지만, 실제 눈에 접촉한 것은 ‘色(색 : 색깔)이다’라고 알아차립니다.

 

수행이 진전되면 머리로 만드는 환상이 아니고, 실제로 눈에 접촉한 대상에 사띠를 합니다. 실제 귀에 접촉한 대상에 사띠가 가능합니다. 그럴 때 사실은 장미꽃은 존재하지 않고, 귀에 접촉한 소리는 있으나 음악이나 사람의 음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이나 건물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띠의 실천은 진전된 것이 됩니다.

 

첫 번째의 염각지(sati·알아차림)를 충분히 실천하고 있으면 이와 같이 저절로 2번째의 택법각지가 일어납니다.

지금의 순간의 현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으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데이터가 분명하게 갖추어집니다. 데이터가 갖추어지면 다음에는 그 데이터를 조사합니다. 데이터를 분별하고 구별하는 능력이 자동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지금의 순간을 항상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 데이터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인 dhammavicaya(담마위짜야)는 분별(分別)입니다. 분별능력이 있다는 것은 판단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쓰레기의 비유로 이해해 봅시다. 여러분은 쓰레기를 분별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알아차린 것만으로는 쓰레기를 분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타는 쓰레기, 타지 않는 쓰레기, 대형 쓰레기,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 유해 폐기물 등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 쓰레기는 무엇인가?’라는 이해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쓰레기를 올바르게 보아 두어야 합니다.

첫째, 쓰레기를 올바르게 본다. 둘째, 어떤 종류의 쓰레기인지 안다. 셋째, 어떤 카테고리에 포함될까 하고 판단한다. 넷째, 쓰레기를 분별한다. 이 4가지의 공정은 우리가 순식간에 행합니다.

 

위빳사나 실천의 경우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관찰하는 대상의 내용이 보입니다. 어떤 카테고리에 드는 현상인가라고 판단하여 그 그룹에 넣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실천을 막 시작한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천을 계속해 보면 되게 됩니다. 무리하게 분석(분별)능력을 습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이 스스로 생겨날 때까지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세간에는 분석(분별)능력이 없으므로, 서로 상이한 것이라도 정리해서 하나로 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몸에 있는 안·이·비·설·신·의는 서로 다른 대상을 인식합니다. 항상 변화하는 신체도 복수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그것을 함께 종합해서 ‘나(我)’ ‘내가 있다’ 등의 환각을 일으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에게 영원의 혼이 있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환각이 도를 넘어서 ‘나를 창조한 신이 있다’라고 까지 망상합니다. 이것은 분석능력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물을 하나로 종합하면 머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알아차림의 능력이 없는 사람의 눈에 어떤 대상이 접촉하면 즉시 ‘장미꽃’이라고 인식하고 ‘역시 꽃은 예쁜 것이야’라고 감정까지 불러일으켜버립니다.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다니’라고 탄성도 지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와는 다릅니다. 택법각지가 있는 사람은 장미꽃이 예쁜지, 어떤지 하는 것을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때그때 바라본 자신의 어프로치(접근)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장미꽃이라도 보는 순간 그 사람의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거나, 매우 아름답거나 그저 그런 아름다움이거나, 혹은 흥미가 없거나 하는 그 어느 감정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분별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것 모두가 뒤범벅이 되어서 ‘아아, 아름답다’ 라든가, ‘아름답지도 어쩌지도 않다’ 등으로 온갖 철학을 만듭니다. 만약 분별능력이 있으면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다’ 등으로는 말할 수 없고, 분명히 철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띠를 실천하는 사람은 꽃을 보고 ‘보였다’라고, 예쁘게 느꼈다면 ‘예쁘게 느꼈다’라고 따로 인식합니다. 예쁘게 느낀 감각과 꽃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각각으로 인식합니다. 별개의 것이므로 꽃이 원인으로 아름답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 감각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꽃이 ‘예쁘다’라는 감각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압니다.

동일한 꽃을 보고도 다른 순간에는 예쁘게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쁘다, 깜짝 놀랄 만큼 예쁘다, 예쁘지 않다, 재미있다, 재미있지 않다 등의 어느 하나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대상(이 경우는 꽃)이 어떤 것인지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속세간적인 판단은 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세간에 있는 다양한 의견이나 세간에 대한 집착이 서서히 옅어져 갑니다. 거기에는 알아차림(사띠)과 분석능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띠의 실천은 분석능력이 성장하게 합니다. 분석능력이 생겨나면 사띠의 실천도 쉽게 됩니다. 쉬워진다는 것은 더욱 명확하게 사띠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念(염 : 사띠)과 擇法(택법 : 분별)이 떨어지지 않고 기능합니다.

 

ㅇ 7가지의 맛도, 다리의 딱딱함도 분별능력이다.

다른 예로 한 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수행자에게 먹을 때일지라도 명상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그때만이라도 ‘쉬게 해주세요’ 라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명상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무엇을 먹더라도 ‘아, 맛있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밥은?’‘맛있다’ ‘불고기는?’‘맛있다’ ‘절인 야채반찬은?’‘맛있다’ ‘디저트는?’‘맛있다’ 판단능력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각각의 맛이 다름을 그럭저럭 알고는 있으나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이 7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순수한 단맛, 쓴맛, 짠맛, 등은 인간이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음식물을 만들 때는 온갖 맛을 넣어서 섞습니다. 먹는 것은 인간이 대단히 집착하는 대상입니다. 거기에 대단한 노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다량의 번뇌가 솟구쳐 나오는 곳입니다.

 

먹을 때 사띠의 실천을 하면 맛과 번뇌의 관계가 보이게 됩니다. 순수한 단맛도 좋아하지 않고, 순수한 쓴맛도 좋아하지 않지만, 단 것에 적당히 쓴맛 등이 들어가면 맛있다는 착각이 일어납니다. 코코아는 쓰지만, 단맛과 쓴맛이 들어간 초코렛케이크는 맛있다고 착각합니다. 택법각지를 키우려면 이렇게 먹을 때에도 수행실천을 하는 쪽이 좋습니다.

 

한때 의학계에서 ‘혀에는 단맛을 느끼는 장소와 매운맛을 느끼는 장소는 다르다’라고 여겨 왔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고 ‘혀 전체로 신경이 퍼져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어떤 맛이라도 느낄 수 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민감한, 예리한 사람은 ‘이것은 이런 맛이다’라고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먹을 때에 사띠를 실천해야 합니다.

 

경행에서 수행자는 우선 ‘왼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오른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이라고 생중계하듯이 알아차림 하면서 염각지 수행을 시작합니다. 재미없고 시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알아차림의 실천을 계속합니다. 발의 감각도 느끼면서 알아차림의 실천을 계속합니다.

그렇게 하면 걷는 것이 시시하지 않고 다양한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임을 발견합니다.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감각이 각각 다릅니다. 물질적으로는 드는 발과 나아가면서 옮기는 발, 내리는 발은 변한다고 발견합니다. 들고 옮기는 발이 가볍고, 내리는 발이 무겁습니다.

그 변화는 들고 싶다, 옮기고 싶다, 내리고 싶다고 일으키는 의지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질도 의지에 의해서 변화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발이 무겁고 딱딱하다고 느꼈다고 합시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기보다 자신이 그렇게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중력을 움직이고 있는 발로 이동해서 본다면 무겁던 발은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느끼지 않는 것은 마음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체중계는 같은 수치를 나타내어도 그 신체를 갖고 있는 본인은 자신의 신체를 간혹 무겁다고 느낍니다. 때로는 가볍다고 느낍니다. 때로는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아프다고 느낍니다. 때로는 기분이 좋다고 느낍니다. 모두가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신체가 가볍다고 생각하며 기분이 밝았던 사람이 체중계에 올라가서부터는 무겁다고 느끼고 마음이 어둡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각의 변화, 물질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경행수행으로 발견할 때는 염각지가 택법각지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ㅇ 무상, 소멸까지 분별할 수 있으면 깨달음

택법각지의 완성까지 나아가면 깨달음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마음과 신체는 다릅니다. 신체도 의지에 의해서 변해갑니다. 만약 분석능력이 최종단계까지 나아갔다면 모든 사물은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의 현상이 사라지면 새로운 현상이 생겨납니다. 존재는 무상에 의해서 성립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동시에 존재라는 단어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압니다. 일체는 무상임을 발견하여 확고하게 되면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무상의 발견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택법각지는 지혜를 완성하는 실천입니다.

 

지혜에는 여러 등급이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사물은 무상하다고 알고 있으나,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무상이 싫은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야말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음을 발견한 사람은 지혜를 완성으로 이끕니다.

그것에 이르기 전에 ‘이것이 있으면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진다.’라는 사실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인과법칙의 발견입니다.

이것도 택법각지의 일입니다. 무상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게 되면 수행은 완료하게 되지만, 각 개인은 감정, 주관 등으로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므로 그 발견에 필요한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양합니다.

 

ㅇ 나-마(nāma)와 루-빠(rūpa)의 분별

택법각지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nāma(마음의 작용)와 rūpa(물질의 작용)를 구별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은 마음, 이것은 신체’라고 구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손을 들어올리는 경우, 들어올리고 싶은 것은 마음이고, 들어올리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또한 마음의 작용이고, 어느 정도로 올릴까, 어떻게 올릴까 라는 것은 마음이 컨트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손이 움직여서 올라갑니다. 거기에는 마음이 컨트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손이 움직여서 올라갑니다. 거기에는 물질의 에너지와 마음의 에너지가 잘 조합하여 떨어지지 않게 되어서 ‘마음과 신체는 하나다. 영혼과 신체는 하나다.’ 등으로 말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마음과 신체는 따로 활동하고 있다. 단지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활동하고 있으나 질적으로는 다르다.’라고 아는 것이 택법각지입니다.

 

나-마(nāma)와 루-빠(rūpa)를 따로 구별할 수 있게 되면 더욱 나아가 마음만을 봅니다. 신체를 봅니다. 그러면 마음도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와 같이 택법각지란 사띠를 가지고 현상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팽창이라는 현상, 수축이라는 현상, 걷는다는 현상, 앉는다는 현상,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신체의 움직임, 마음의 움직임, 그것은 모두 여러 가지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보고 있다면,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눈을 뜨고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으며, 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며, 보고 싶다는 기분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며, 보이는 대상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이고 있다는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의 원인이라도 사라지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상이 사라지면 보이지 않으며, 눈을 감아 버리면 보이지 않으며, 그때는 보고 있다는 의식도, 본 것에 의해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띠를 가지고 그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생긴 현상, 온갖 현상을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듯 언제나 물리도록 확인하고 또 확인해 가다 보면 그때까지는 온통 사띠 뿐으로 여유는커녕 걷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던 자신의 마음에 어떤 여유가 생깁니다. 사실은 만일 정성스럽게 사띠를 가지고 걸으려고 하면 걷지도 못하게 될 만큼 까다롭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될 정도로, 사띠를 해서 명칭을 붙여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잘 견디면 사띠를 숙달되게 할 수 있게 되며 그때 여유도 나옵니다. 그러면 쉽게 팽창과 수축,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발의 움직임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과 동시에 신체의 움직임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시점부터는 현상을 보다 명확히 봅니다. 이 택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확인해 온 그 현상을 이번에는 보다 명확히 보는 것이 됩니다. 이른바 분석해서 보는 것입니다.

 

분석이라고 말해도 일부러 분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해 둡니다. 분석에 신경이 쓰이면 또 망상의 세계로 빠지고 지금까지 자신이 공부해 왔던 지식으로 해보려고 하므로. 그런 것은 현실이 아니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이므로 알기 쉽게 말하면 허구의 세계인 것입니다.

몸속에 위가 있다고 말해도 의사가 그렇게 말하므로 믿고 있을 뿐이지 스스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배탈이 나면 배가 아프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결국 그때도 위가 아픈지 위의 근육이 아픈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말하면 배가 아프다 라든가 위의 근육이 마비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일부러 분석을 하려고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사띠를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분석적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별안간 아! 과연 이런 것이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