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2. 택법각지(擇法覺支) 후반부 (20170526) <법문 교재>

담마마-마까 2021. 4. 19. 09:00

https://www.youtube.com/watch?v=lIjN8XCadNk

https://youtu.be/IFBgVHQsyHM

<「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좀 더 자세한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만약 좌선 수행하고 있는데 소리가 귀에 들렸다고 합시다. 신경이 쓰이는 경우는 소리, 소리 하며 확인해 갑니다. 그런데 간혹 소리에 대하여 스스로 마음에 파동을 만들어 버립니다. 소리를 듣고 무언가를 판단해 버리므로 반드시 거기에는 마음의 진동이 일어납니다. 저것은 새소리라든가 저것은 분노의 소리라든가 저것은 뭐라고 사람이 지껄이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것에 의해 여러 가지 망상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좌선 수행하고 있을 때, 소리를 듣고 있는 경우, 사띠가 잘 되는 수행자는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잘 알아차려 마음이 통일되어 있으면 그때에 같은 소리가 다음에 나타나도, 스스로 희미하게 소리라는 것을 막연히 알 수는 있어도 마음은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귀에 들어온 것은 들어 온 것이지만 결국 듣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이 자신은 일어남, 사라짐에 몰입해 있습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사물의 사실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 과연 들으려고 의식을 기울여야만 들리는구나’ 라고. 즉 들으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면 들립니다. 들으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비로소 들리며, 듣게 되면 들은 대로 분노 질투 욕심 등의 이런저런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 들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소리가 거기에 있든 없든 특별히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파동이 생기지 않습니다.

 

ㅇ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 의식의 정체

 

경행의 경우도 역시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계적인 오토매틱 시스템으로, 자동적으로 우리들 인간은 단지 다리를 움직여서 걷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의식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는 경우는 올림이라는 의식이 작용하지 않으면 다리를 들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보통 사람은 절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쉽게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무의식적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한발 한 발 올리고 싶다! 라는 의식이 있어서 다리가 올라갑니다. 전심전력하고 신중하게 다리에 의식을 가져갔지만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왼발을 내림’이라고 해도 간혹 머리가 멍해져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이 피로해 있을 수도 있고 왼발에 의식이 가 있지 않은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가 있지 않기 때문에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지혜라는 기능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발을 의식하지 않아도 들어 올릴 수 있잖아?”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의 세계이며 이론을 가지고 하는 설명이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이지 지혜는 아닙니다. 말이 튀어나오면 이제 끝입니다. 말로써 그런 지혜가 튀어나오면 이제는 그저 개념일 뿐이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체험에서 나옵니다. “아니 오른발이 올라가지 않잖아?” 라고. 그래서 걷지 못하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거기서 ‘오른발을 들어올림’이라고 의식이 가면 쉽게 오른발이 가벼워지며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럴 때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 그 사람에게는 오른발 들어올림이라는 기능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가에 대한 흐름이 분석적으로 보이게 되며, 의식과 신체의 움직임의 관계가 보이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인과관계입니다. 이것은 수행이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될 때에 한합니다. 어딘가의 벽에 부딪쳐 정지해 있을 때는 그런 것을 모릅니다.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의 수행이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 그런 일을 언뜻언뜻 알아차리게 됩니다. 다리가 올라가는 것만 해도, 과연 의식이 있어 다리가 움직인다, 의식이 없다면 걷는다는 현상은 거기에 없다고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으로 알게 되면 세상의 사물에 대해서도 상당히 마음이 변화합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사람이 화가 났을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일반인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그 화내는 장면은 원인이 있으므로 당연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화낼 만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사람은 제 맘대로 화내고 싶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의식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 들은 사람이 그에 대해 화를 냈다고 쳐봅시다. 그에 대해 어떤 사람은 화를 낼 수도 있고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기분 좋게 웃을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어떤 사람이 내게 당신은 정말로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고 칩시다. 거기에서 나라면 벌컥 화를 내는 일도 가능하며, 아 그래요? 라고 그 말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 싱글싱글 웃을 수도 있고, 다양하게 자신의 의식으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세상에서는 말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본인의 의식에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기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화내고 싶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고 싶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사회 구조가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어 까다롭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인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의식의 기능, 마음의 기능이 명확히 보이게 됩니다.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택법각지라고 하는 지혜는 사띠를 실천하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택법각지에 매달려 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매달려 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알아차리는 것에 있어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해도 이것은 다양해서 언제나 개인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내가 말한 지혜는 모두에게 있어 다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개인이 알아차리는 일, 그 알아차림의 내용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변합니다. 그것을 한 가지 예로써의 알아차림으로 설명했습니다. 일어나는 일로, 사물을 보는 일로, 걷는 일로,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각각 다른 일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르다는 것, 그것을 불설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소리가 귀에 들어와서 자신이 화를 냈다. 역시 그 사람의 소리가 들어와서 화를 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귀에 들린다, 그때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같은 소리에 대해 화를 내기도 하고 화를 내지 않기도 하고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 바보다” 라고 하면 화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것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억양에 따라 듣는 사람이 화를 내느냐, 즐거워지느냐, 짜증이 나느냐 하는 그 감성의 물결의 성질은 변합니다. 진실의 세계라는 것은 불가사의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사회에서는 당신을 비방했으므로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상식의 세계입니다. 비방했다고 하는 것에도 각각의 해석이 있어 예를 들면 바보라고 말하자마자 비방했다고 해석합니다. 비방했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바보라고 한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 면을 이해하는 견해와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화를 낼까, 기분이 좋아질까, 우울해질까, 유쾌해질까, 낙심할까 그 모든 것이 본인 마음 내키는 대로의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그런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것도 인과관계인데 그 인과관계를 발견합니다.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ㅇ 의식은 거대한 에너지라는 증거

 

다른 하나는 ‘나마 루빠’의 구별이 보이게 됩니다.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나마라는 것은 정신적 에너지의 파동, 루빠는 물질적인 에너지의 파동입니다. 그런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마음이 고요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사띠를 잘 실천하여 고요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마 루빠의 관계를 알 수 있느냐 하면 예를 들면 발이라고 말했을 때 발이라는 것은 루빠, 물질의 덩어리입니다. 물질의 덩어리는 스스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물질의 덩어리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른 물질적 에너지를 투입하든가, 마음 에너지를 투입하든가 둘 중 하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아! 내가 다리를 들고 싶으니까 다리를 들고 옮기고 내린다고 압니다. 그리고 발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 있고 그로 인해 이렇게 무거운 다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다리를 저울로 달아보면 꽤 무겁습니다. 달아 본 적은 없지만 한 쪽 다리의 무게라는 것은 대략 얼마나 될까요? 가령 10kg으로 쳐도 10kg이나 되는 무거운 것일지라도 의식만 들어가면 간단히 움직일 수 있은 것입니다. 손을 올리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손을 올리려고 생각했으면 5kg 정도 나가는 무거운 손이 간단히 올라갑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올리는 경우와 고요한 상태에서 올리는 경우, 그 마음 상태에 따라서 손을 올리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고요한 사람의 경우는 재빨리 손을 올릴 수 있습니다.

 

대개 이 신체의 움직임의 경우 매우 품위 있는 동작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고요합니다. 책을 제자리에 놓아두는 일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일도, 무슨 일이든 매우 부드럽게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당히 마음이 고요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교육이 잘되지 않은 경우, 아이는 먹는 법, 걷는 법, 구두를 신는 법과 벗는 법 등 모든 것을 적당히 해치우는 데 그것은 마음이 극히 거칠고 폭력적으로 되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잘 보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손을 올린다고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손을 올립니다. 그러므로 손을 올리는 방법을 보아도 그 사람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단계인지 어떤 상태의 마음인지 보이게 됩니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바로 압니다. 아! 이 사람은 이런 마음 상태다 라고.

 

손을 올린다고 명칭을 붙이면 마음으로 손을 올라가게 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내린다고 하는 경우, 보통 사람은 손을 내린다고 하면 곧 이것은 지구의 인력으로 인하여 아래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법칙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입니다. 만약 물리적 법칙에 의하여 손을 내린다고 하면 손은 탁하고 떨어져야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손은 그렇게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올린 손은 한 번도 탁하고 떨어진 일이 없다는 것은 손을 내릴 때에도 명확히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제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식이 이 지구의 인력에 역행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상태를 조절해서 조심스럽게 상처를 입지 않도록 손을 내리는 동작을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ㅇ 여러분은 나마와 루빠에 의해 살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기절했습니다. 사람이 서 있다가 갑자기 혹은 뜨거운 욕탕에 들어갔다가 일어서려고 했더니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습니다. 왜 넘어졌는가 하면 현기증이 나서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신체가 서 있다는 것 자체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입선의 필요성은 그럴 때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 인간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선을 시키는 것입니다. ‘서있음, 서있음’이라고.

입선의 의미는 당신은 서 있다는 의식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라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만일 서 있는 사람이 졸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의식이 자고 싶다, 자고 싶다라고 말하고 그럼 잡시다 라고 하고 잡니다. 그렇게 하면 일어서자, 일어서자라는 에너지 쪽은 없어져 버리겠지요. 서서 내내 자는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은 물리적 법칙으로 일으켜 세우지는 못합니다. 마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전철 안에서 피곤해서 반쯤 잠이 든 때도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으면 서 있지 못하겠지요. 다리가 있으므로 물리적으로는 서 있을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서 있지 못합니다.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두 발로 서 있다는 간단한 행위에 조차 두 종류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작용. 다른 하나는 마음의 작용. 그런 나마와 루빠의 작용이 점차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걷고, 서 있고, 일을 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누구라도 피곤해져서 어딘가에 앉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의식이 일어섭시다, 걸읍시다, 이것 하자 저것 하자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 자체도 조금은 쉬고 싶어집니다.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경우는 몸을 움직여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 쪽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 있어서는 심신이 함께 쉴 수 없습니다. 이 서있다, 서있다 라는 에너지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작용하고 있지 않으면 인간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앉아서 쉬고 있는 상태는 분명히 물리적 에너지입니다. 예를 들면 잠이 들어서 마음의 의식이 앉고 싶다고 느끼지 못해도 의자에 앉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의자에는 앉아 있지만 사람은 자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이면 신체로 가는 에너지는 상당히 적어지기 때문에 마음은 얼마간은 쉴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앉은 순간에 의식은 곧장 다른 곳에서 작용하여 다른 망상 같은 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 순간도 틈이 없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좀 쉬어보려고 하면 곧 망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앉으면 신체로 가는 에너지는 얼마간은 막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쉴 때는 모두들 눕는 것일까요? 어째서 잠잘 때는 한쪽 발로 서서 자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면 쉴 수가 없지요. 누우면 몸을 움직이려고 가는 의식 에너지가 그때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이 나면 모두 눕습니다. 졸리면 다들 눕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체로 가는 의식 에너지는 그만큼 멈추게 됩니다. 멈추어서 마음만 스스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신체라는 물질을 쉬게 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에서는 행‧주‧좌‧와라고 하여 행은 걷는 것, 주는 본래는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선다는 뜻입니다. 좌는 앉는 것, 와는 눕는 것입니다. 서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눕는 것이라는 네 개의 작용에 있어서는 명확히 사띠를 실천하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네 개를 확실히 사띠해 가면 드디어 신체라는 물질의 작용과 마음이라는 정신적 작용의 파동은 언젠가 명확히 따로따로 구별이 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앉고 싶다는 기분이 없으면 앉을 수 없고, 서고 싶다는 기분이 없으면 설 수 없고, 눕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누울 수 없으며, 눕자마자 과연 마음의 파동은 신체에는 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한다라는 나마와 루빠 두 개가 따로따로 보이게 됩니다.

 

ㅇ 수행의 진전 상태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놀라움

 

입선과 달리 앉아서 수행을 하면 엄청난 망상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앉아서 그냥 멍하니 있으면 이것저것 망상이 나옵니다. 그 정도의 얘기는 모두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나치게 여러 가지 쓸데없는 개념이 머리에 떠오르고, 망상이 떠오르고, 화가 나기 때문에 곤란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달리거나 걷거나 무언가를 합니다. 신체를 움직이고 있으면 마음은 신체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작용시키는 쪽으로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쪽이 바빠서 마음에는 망상할 틈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만큼 망상은 대부분 잘라낼 수 있습니다.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고 있으면 망상만 나올 뿐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신체로 가는 마음 에너지는 없어도 되므로 그만큼이 망상쪽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상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마음과 몸의 작용 두 개가 각각 확실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또 다른 택법각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이 보이게 되는지는 그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만 어쨌든 무엇인가가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 주길 바랍니다.

 

여기서 하나 더 알게 되는 것이 하나하나의 현상이 각각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지혜가 곧 또다시 생겨나게 됩니다. 보통 우리들의 행동은 하나하나의 현상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어떤 연계를 갖고 인식되지만, 택법각지에서는 그것이 하나하나 독립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되어 갑니다.

 

소리가 들어와서 의식을 합니다. 그것에 앉아 있는 사람이 소리가 들어와 의식을 할 때 예를 들면 갑자기 얼굴이 가려워졌습니다. 가려움증을 의식하는 그 의식과 소리를 듣고 의식하는 그 의식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 방금 전의 현상과 지금의 현상은 다른 것이 아닐까 하며 강렬한 차이가 보여집니다. 실은 그것은 거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앉아 있어 다리가 아픕니다. 아파와도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가려워도 그럴까요? 생리적으로 말해 가려움증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은 아닙니다. 조금 가렵기만 해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통증인 경우는 격렬한 통증이라도 참으려고 마음먹으면 상당 부분 참을 수 있습니다. 만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려움증을 참아보십시오. 참을 리 만무합니다. 이 통증과 가려움은 서로 전후해서 일어나는 두 개의 현상이지만 현저히 다릅니다.

 

앉아 있었더니 몹시 졸립니다. 거기서 졸음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신체를 보니, 졸린 마음과 신체의 상태가 각각 보입니다. 그런데 졸음을 쫓으려고 발을 바꾸거나 혹은 소리가 갑자기 귀로 들어 왔다든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변화라도 일어나면 곧 마음은 눈뜨게 됩니다.

그 눈 뜬 순간 졸음이 어딘가로 확 날아가 버린 상태, 졸음이 없는 순간의 신체의 상태를 봐 봅시다. 졸음이 사라진 순간 신체의 나른함, 딱딱함이 순식간에 모두 날아가 버립니다. 시간 같은 것은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 신체가 나른하고 졸리기 때문에 10분 정도 걸려서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해서 졸음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변합니다. 너무 졸려서 머리를 흔들면서 졸음을 쫓으려고 한 사람이 순간적으로 눈이 떠집니다, 신체도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활동적으로 됩니다. 가볍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앞의 현상과 지금의 현상의 차이가 「아! 대단히 격렬한 차이가 있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이전의 신체와 지금의 신체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혹은 좌선을 그만두고 서서 입선을 하거나 걷는 경행 수행을 해봅니다. 경행을 하면 그때의 신체의 상태, 마음의 상태, 좌선 시의 신체의 상태, 마음의 상태, 그리고 지금 서 있을 때의 마음의 상태를 보면 전혀 별개가 아닌가, 즉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순간 그 순간에 다른 물질이 있고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가게 됩니다. 하나하나의 현상은 앞의 현상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것이라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지혜가 나타나면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당신은 여기까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는가?

 

이 택법각지의 경우, 위빳사나 수행으로 무엇을 알아차릴지는 그 사람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흥미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각자 많은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청정도론 등에는 그런 것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모두들 수행이 불가능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일일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어, 복잡하여 그렇게 세밀히 사띠를 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서 자신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상세히 적혀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자신은 알아차릴 수 없다고 체념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씌어 있는 것을 읽어보면 이것은 몇 백년이 지나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릴 필요 또한 없습니다. 청정도론에 씌어 있는 것은 택법각지의 설명으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격적으로 올바르게 수행할 사람에게 필요한 각서입니다.

 

그러면 본격적이 아니라고 해도 택법각지로 진전되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하면 되냐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이른바 사띠는 하지만 그것이 흐지부지한 상태로 오늘은 힘을 내보지만 내일은 게으름 피게 되고 다음 주가 되면 하루 종일 끝까지 수행을 하지 않는 식의 빈둥거리면서 제멋대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인 경우 누가 생각해 보아도 그다지 사띠를 잘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겠지요.

 

사실은 24시간 체제를 설정해 놓고 가능한 한 시간을 정해서 끝까지 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루는 끝까지 잘 해내고 하루는 적당히 하는 등,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사람은 진지한 태도가 아닙니다. 진지하지 못하면 위빳사나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세상사라는 것이 장난삼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수술마저도 시시덕거리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사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아주 간단히 노는 기분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굉장한 정신력으로 힘을 짜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정확히 얘기해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놀이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일이 그렇게 어렵다면 우리들은 일 같은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은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워 보이겠지만 조종사 자신에게는 충분히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정도 일은 이제는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쳐도 조금이라도 비행기의 각도가 틀리면 비행기가 추락하여 모두 죽게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 사람은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비행기의 이착륙도 콧노래를 부르면서 비행기를 제대로 이착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동안에는 대단히 여유가 있으며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수술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생명이 걸린 문제니 힘들겠구나 하고 걱정하지만 의사는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환부를 아무렇지 않게 도려내고 봉합하여 끝내는 식으로 여유 있는 마음으로 수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병이 낫느냐 낫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얘기입니다.

 

이른바 의학에서는 사람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수술을 해도 약을 먹어도 몸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신의 마음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족한 물질을 약으로 조제해 준다든지 혹은 부족한 기능을 촉진시킨다든지 심장의 혈관이 좁아져서 위험한 상태이면 인슐린을 좀 주사한다든지 대게 그 정도의 물질을 투여하는 정도밖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물질을 부여하면 확실히 신체는 다시 기능하기 시작하지만 혹은 아픈 곳의 해로운 부분을 도려내면 그후에는 신체가 스스로 치료해가기도 합니다. 고친다는 것은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세포가 본인의 의지에 따라 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대로 말해 엄밀히 따지자면 병이 나는 것부터가 자신이 병나고 싶기 때문에 병이 생긴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자신이 병이 생기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병이 생기는 경우는 기관적인 고장입니다. 예를 들면 나이를 먹게 되면 당연히 세포가 모두 노쇠해가기 때문에 소화 기능 등이 나빠지겠지요. 목의 근육 등이 굳어지겠지요. 류마티스 같은 것은 의식이 있든 없든 생기는 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돌을 던져 자신의 머리에 맞았다고 해봅시다. 맞은 머리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 경우도 자신이 상처를 입고 싶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처나 병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 늙는 것, 그것은 어찌해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위궤양이나 혈압이나 당뇨병 등등은 사실은 그 사람의 마음이 만들고 있는 병들입니다.

 

어쨌든 의사라는 직업도 조종사라는 직업도 정밀기계를 다루는 사람도 모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기본만 알고 나면 그 후에는 놀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ㅇ 수행자가 함정에 빠지는 최초의 단계

그보다 어려운 것은 위빳사나의 사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어렵습니다.

위빳사나는 편하게는 되지 않습니다. 사띠를 힘주어 진지하게 대하려는 경우는 그것이야말로 바르지 못하고 제멋대로 하는 것으로, 당연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딘가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면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는지 모르고, 그럭저럭 하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해버리게 되어 성실하게 하지 않게 되므로 그것이 버릇이 됩니다.

손을 올림, 왼발 오른발, 앉음, 먹음, 배의 팽창과 수축 등을 확인은 일단 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습관적으로 하기 때문에 버릇이 되고 버릇이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틀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 그 자체가 밝혀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전이라는 것이 어렵게 되므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방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는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다시 한 번 진지하고 엄밀하게 사띠를 하여야 합니다. 그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실하게 한 사람은 지금부터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지는 않습니다.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벌써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갑니다. 진지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흐지부지 해버린 탓에 긴 시간을 낭비한 꼴이 됩니다.

 

이런 사람 중에는 의외로 스스로는 진지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일주일, 이주일, 일 개월, 개중에는 일 년, 이년, 삼년 이상 해 온 사람도 있지만 사띠의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틀에 박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주 수월하게 왼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라고 하고는 있습니다. 앉아도 배의 팽창과 수축을 일어남, 사라짐하면서 아! 수행하고 있다, 수행하고 있다, 지금 화내고 있다, 다리가 아파졌다, 저리고 있다, 라고 확인하는 것은 누구라도 간단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흐지부지한 사띠를 하고 있으면 그 상태에서 마음은 앞으로 전혀 진전하지 못하게 되어 그 결과 슬럼프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택법각지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트리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 경우는 강제로 끌어서라도 택법각지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면 역시 우선 제일 좋은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설법을 끝까지 들을 것, 설법을 듣고 자신의 세속적 개념은 모두 부수고 강제로라도 새로운 시야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ㅇ 망상이 생길 때야말로 재기할 기회

 

그런 사람들은 강제로라도 스님을 믿고 노력을 하지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유감스럽지만 불교는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본래 불교라는 것은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제대로 스님을 믿고 제대로 경을 외거나 해서 거기에서 법문을 많이 들어 여러 가지 자신의 지식의 세계를 바꿔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코 부처님 탓도 가르치고 있는 스님들 탓도 아닙니다. 본인의 하기 나름입니다. 아무런 법을 듣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나아갑니다. 왜냐면 진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없어도 진실을 깨달을 수 있으므로 특별히 부처님 말씀을 듣지 않아도 같은 진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상이라고 하신 것도 그 말에 관계없이 만일 일체가 무상한 것이라면 올바르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상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택법각지가 진전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서 나아가고 있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가 하면 수행 자체, 위빳사나 자체가 슬럼프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불안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과연 어딘가 무언가 변해 있기는 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것을 하여 무엇이 되는 걸까, 그다음에는 무엇이 되는 걸까 라는 기분을 호소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런 사람들은 지금 자신은 위빳사나가 잘 되고 있다, 사띠도 잘 되고 있다고 자기 과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화가 없는 자신, 진전을 실감할 수 없는 자신에게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 사람은 법을 듣는다, 끝까지 불법승을 믿고 끝까지 해내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을 일단 슬럼프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둡시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진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슬럼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지 말해보면, 지금까지 해 온 사띠를 더욱 더 철저히 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왼발 들어올림 내림 이라고 간단히 확인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확하게 확인하는 소재로 가장 좋은 것은 망상이 나타날 때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망상 자체를 그냥 망상, 망상하고 알아차리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슬럼프에 빠진 사람은 망상에 대해서 무엇을 망상하고 있는지를 그 내용까지 분석하는 것입니다. 분석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앉았다고 합시다. 배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망상하고 있음’ ‘망상하고 있음’ 이라고, 그렇게 끝날 때까지 물 흐르듯 해갑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발이 아파졌습니다. 거기서 ‘통증’ ‘통증’ ‘통증’하니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다시 망상이 나타났습니다. ‘망상’ ‘망상’이라고 사띠를 합니다. ‘생각하고 있음’ ‘생각하고 있음’ 하며 명칭 붙이고 있을 뿐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까지의 경우는 이 단계에서 정해진 틀에 빠지게 되면 망상이 극도로 강렬하게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배의 팽창과 수축을 다만 반사적으로 습관적으로 사띠를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마음에 자극이 모자랍니다. 마음은 자극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껏 극렬한 기세로 망상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ㅇ 망상은 여섯 개로 나누어 인식해 보자.

 

거기에서 그때는 자신이 무엇을 망상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다만 망상, 망상 하고 명칭 붙일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욕구에 관한 망상이며, 화냄에 관한 망상이며, 이것은 무지에 관한 망상이라고 하듯이 탐·진·치(貪瞋痴)로 나누어서 망상을 분석해 봅니다.

 

망상의 종류는 간단히 나눌 수 있습니다. 탐욕에 관한 망상이라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관한 망상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떠오르거나 하면 그런 것은 탐욕에 관한 망상입니다. 싫은 것, 기분 나빠지는 것, 하기 싫은 일을 망상하는 경우는 성냄에 관한 망상입니다. 무엇인지 멍하니 이유도 없는 망상이 나타나는 경우, 이제는 가져 보아도 소용없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요. 그때는 치(무지)에 관한 망상으로, 그렇게 탐‧진‧치로 망상 자체를 나누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위빳사나 자체는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어려워진다는 것은 한 층 더 사띠를 진지하게 행하라는 것이 됩니다. 사띠를 확립하지 않는 한 진정한 택법각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띠를 진전시키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자연법칙이기에 그것에 대해서 탐‧진‧치로 나누어 보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망상을 탐‧진‧치로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으면 불탐·불진·불치 그 세 개도 넣어서 망상을 여섯 개로 나누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또 명상은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여섯 개로 나누니까 여기까지 상세하게 나누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게 되고 맙니다. 즉 탐욕에 관한 수행이 혹은 불탐에 관한 수행이 여간해서는 구별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립니다.

 

왜냐 하면 욕망에 관한 망상은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또 욕망을 멀리하는 불탐의 망상도 기분이 좋습니다. 욕으로 부터 멀리한 상태라는 것이지요. 혹은 아무런 기분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또 상당한 개인차가 있어서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행하는 본인에게 있어서는 꽤나 까다로운 일입니다.

 

분노에 관한 망상은 보다 알기 쉽습니다. 기분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반대의 망상인 불진의 망상, 이른바 사람을 자애하는 기분,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의 기분을 잘 이해해 주며 생명을 귀히 여기는 기분의 망상입니다.

가령 자신의 적의 일이 망상으로써 생각이 나도, 싫은 사람의 일이 생각나도 저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힘든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니까, 활기차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 주길 바라는 기분이 생기면 그것은 불진에 관한, 분노의 반대의 망상이지요. 그때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으며 그다지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싫은 사람이 떠오르면 그것은 분노의 망상입니다. 거기서도 나는 오랫동안 수행해 왔으므로 역시 싫은 사람을 싫다고 해서는 안돼 하며 곧 신경이 쓰여서 저 사람이 싫다가 아니라 저 사람도 나름대로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기분으로 바꿀 수는 있으므로.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느 쪽이냐 하면 자신에게 있어 부자연스럽습니다. 본래 싫은 사람이므로 생각이 나면 곧바로 분노가 나오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감정 쪽이 자연스럽습니다. 분노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좀 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나가면 지금의 예처럼 도대체 어느 쪽에 넣어야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류상의 구별이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그에 대해서 무지의 망상은 이유도 모르는 망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지의 망상이라고 간단히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지의 반대인 지혜의 망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 또한 알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자신의 지혜에 기초를 두고 망상을 하고 있습니까? 지혜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말하자면 냉정하게 사물이 보이는 경우는 지혜의 망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의 망상이 생기게 되면 이것은 이제 훌륭히 다음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해도 됩니다. 여기까지 오면 슬럼프는 탈출했다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 탐·진·치에 덧붙여서 불탐·불진·불치도 넣어서 모든 망상을 분류해봅니다. 그런 사띠를 해봅니다.

 

ㅇ 수행은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

 

앞서 말한대로 사띠 수행을 하고 있으니, 이 수행은 편하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좀 걱정이 됩니다. 좋은 것이란 그렇게 쉽게 획득할 수 없습니다. 쉽게 얻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동물을 잡으려고 할 때 접근해서 만져도 전혀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 녀석들이나 항상 쉽게 잡히는 동물은 잡아 보았자 재미는 없습니다. 요리조리 도망다녀서 잡기 어려운 동물을 간신히 잡았을 때 잡았다라고 기뻐합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나 개미 등 별볼일 없는 동물을 잡아도 재미는 없습니다. 바퀴벌레는 잡으면 빨리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개미는 손 위로 잘 기어오르기기 때문에 빨리 털어내고 싶지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자체는 상당히 진지하고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믿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할 필요도 없습니다. 겨울인데도 찬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수행하겠다고 하는 것은 단지 고행일 뿐 수행이 아닙니다. 단식하면서 수행하겠다는 것도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을뿐더러 권유하지도 않습니다. 단식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진지하게 사띠를 해서 진지하게 탐·진·치로 나누어 보거나 불탐·불진·불치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지도하는 방법은 다소 다릅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위빳사나를 하고 있습니다, 배의 팽창과 수축이 잘 보입니다, 소리를 들어도 소리를 확실히 확인합니다, 통증이 생기면 곧 확인합니다, 그런 식으로 쭉 해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 질문은 위빳사나 사띠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다른 하나의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배의 팽창으로부터 무엇을 느꼈는가, 배의 수축으로부터도 무엇을 느꼈는가? 또한 몸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고 있는가? 그 느끼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일부러 감각을 보게 시키는 방법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팽창한다는 감각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팽창하는 감각은 즐거운 기분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 기분인가 하는 식으로 즐거운지, 그렇지 않은지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수축하는 기분은 즐거운 기분인지 괴로운 기분인지, 또 저림이나 통증 등은 어떠한지 보는 것입니다. 또 만약 재채기가 난다고 합시다. 그 재채기하기 전의 기분은 즐거운 기분이었는지 괴로운 기분이었는지 재채기를 한 다음에는 어떠한지, 혹은 그 후에 가려움증이 생긴 경우, 가려움이라는 감각은 어떠한지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불교용어로 말하자면 둑카(dukkha)입니까 수카(sukha)입니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나누어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꼴 때의 감각은 고인지 락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기분이 있는지 어쩐지 나누어 봅니다. 그렇듯이 느낌 웨다나(vedanā, 감각)의 다양한 분류방법을 취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지도 방법이므로 그렇게 시켜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처음에는 반드시 할 수 없다는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도 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 이번에는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게다가 모르는 순번도 정해져 있습니다. 괴롭다는 것은 알겠지만 예를 들면 다리를 꼬고 앉을 때는 고도 아니고 락도 아니고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감각에는 고, 락, 불고불락 이라고 하는 세 개가 더 있기 때문에 그 셋으로도 나누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을 2, 3주일 해보았을 때 그 총체적 결과는 어떠한가, 당신은 무엇을 느꼈는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대충이라도 좋으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한 시간 수행하면 한 시간 동안의 감각은 모두 다 보았는가? 한 시간 동안 얼마나 즐거움을 느꼈는가? 얼마나 괴로움을 느꼈는가를 관찰해 주십시오. 관찰했으면 그 사람의 대답에 따라 다음 지도방법으로 바꿔갑니다.

 

따라서 이 위빳사나 수행법의 지도라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입니다. 설법과는 달라서 어떤 지도방법으로 바꿔 갈 것인지는 각자의 경험에 의해 바꿔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격적인 위빳사나의 세계로 그런 의미로 말하자면 보통 세속에서 말하고 있는 위빳사나가 자꾸 상품이 되어가고 있는 위빳사나와는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위빳사나 교재를 쓰기는 불가능 합니다.

 

그러나 만일 본격적인 교재를 바란다면 그 사람 한 사람만을 위한 교재가 되어 그 사람 이외의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의 예를 보아도 그 사람은 자신이 한 시간 수행하면서 많은 고를 느꼈다고 칩시다. 간혹 즐거움도 느꼈다고 칩시다. 또한 간혹 불고불락을 느꼈다고 하는 경우, 그 예와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거의 없다 아니면 전무하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 사람 한 사람만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위빳사나 수행법이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면 하는 만큼 어렵고 꼼꼼하고 복잡하게 되어 갑니다.

 

ㅇ 수행은 괴로울수록 상급으로 올라간다.

 

여러분은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배워 온 위빳사나 수행법과 다른데... 수행은 본래 좀 더 즐거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것은 크게 다르다’라며 당혹해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본질을 모른 채 다만 유행을 쫓듯이 자! 수행합시다, 앉아 있으면 꽤 수행이 됩니다, 감각을 잘 관찰해 봅시다, 관찰해 가면 기분이 좋습니다 라고 아는 척을 하며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초심자가 아니라 상당히 진지하게 위빳사나 수행법에 매달리고 있는 수행자를 상정하여 얘기를 끌어 나가겠습니다.

수행을 즐거운 것,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열중해 있는 사람들이 의의로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행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만 하겠습니다.

 

본격적인 위빳사나를 모르는 사람이 수행을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수행은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한 시간 앉아 있었을 뿐인데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를 모르는 사람이 해탈을 얻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수행에 의해 즐거움만을 알았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욕구의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꾸짖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므로 화내서도 안 됩니다. 화낼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자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지독히 욕구에 집착하는구나, 욕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구나 라고 이해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욕구에 빠져 있으므로 불쌍하게도 지혜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혜가 없는 욕구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 위빳사나의 방법도 다소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그 사람은 팽창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기분 좋은 감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꾸자꾸 팽창해봐 주십시오. 이른바 호흡을 하여 팽창할 수 있는 데까지 팽창시켜 멈추어 보는 것입니다. 감각이 어떻습니까? 이 경우는 그 감각이 무엇인지 묻지 말고 어쨌든 감각을 관찰해 주십시오 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수축할 때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공기를 빼서 가능한 한 멈추어서 그 감각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수축된 감각은 어떤 감각일까요? 그런 식으로 한 시간 해보십시오 라고 하면 이 사람은 힘들어서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수행은 힘들어서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반드시 말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그 감각이 고라고 압니다. 그것을 기억해 두십시오. 결코 수행은 즐거울 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ㅇ 무상, 고, 무아를 보는 방법

 

지금 설명한 것은 수행을 하고 있다가 슬럼프에 빠진 경우이지만, 슬럼프에 빠지면 강제적으로라도 법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무상을 보기를 권합니다.

 

개개의 현상은 이렇게 변해간다는 무상을 봐 주길 바랍니다. 또는 고를 봐주길 바랍니다. 또는 실체는 없다고 하는 것을 봐 주길 바랍니다. 예를 들어 보인다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무언가 보이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알기 쉬운 예로 말하자면 이런 예입니다.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면, 여러 가지가 스크린에 비치고 있습니다.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영화는 그러나 실체는 아닙니다. 그저 빛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그 빛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을 집이다, 사람이다 라는 이름을 붙여 판단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기에 영화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듯이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는 무아입니다. 그저 꿈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 됩니다.

 

내가 지금 화가 나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나 지금의 예에 비춰보면 내가 화를 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는 논리는 바보 같은 얘기가 됩니다. 자신이 화를 낸 일에도 같은 곳에 있는 다른 사람은 화내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나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스크린 상에서 맘대로 화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때에 그렇게 화내지 말고 즐거워하십시오! 라고 말해도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상이므로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맘대로 화내고 있을 뿐이며 스크린 상에서 화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만약 스크린을 걷어버리면 더 이상 영화가 아닌 것처럼 화내고 있는 것은 결코 실체가 아닙니다.

영사기의 렌즈 앞을 손으로 가리면 그것으로 영화가 아닙니다. 단지 손만으로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스크린일지라도 렌즈를 보면 손바닥만한 작은 것입니다. 이것은 손으로 간단히 파손시킬 수 있으며, 그 정도로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혹은 가위를 가지고 와서 필름을 잘라버리면 그것으로 영화는 끝입니다.

 

그러므로 화냄도 마찬가지 얘기로 꿈같은 것이며 화를 낼 것인가 아닌가는 스스로 간단히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인간이 변하면 가능합니다. 그것이 무아라는 것입니다. 택법각지의 경우는 그런 식으로 하여 마음을 자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택법각지에 대하여 꽤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그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택법각지에서는 이 현상을 분할 할 것, 혹은 불교의 진리에 바탕을 두고 무상관, 고관, 무아관 이른바 무상, 고 무아 라는 입장에서 봅니다. 혹은 인과법칙에 따라 사물을 봅니다. 그것이 택법각지의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