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1. 오력의 균형
우리가 수행을 할 때 함께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나 정신적 요인이 있습니다. 이 정신적 요인에는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한 우리의 수행은 즐겁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조화롭게 작용하지 않거나 어느 요인이 지나치게 뛰어나면 수행은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요인들이 조화롭게 작용하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각각의 요인들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게끔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많은 정신적 요인으로 마음의 상태가 복잡하게 되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5가지 제어하고 있는 요인입니다.
이 다섯 요인(pañca indriya)은 믿음(삿다-), 노력(위리야), 알아차림(사띠), 마음집중(사마- 디), 지혜(빤냐)입니다. 우리가 수행이 잘될 때 이 5가지 제어하고 있는 요인은 조화롭게 일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는 보통 불안정한 행동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방 지루해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건성으로 관념적인 알아차림을 하고, 빛이나 색깔 같은 것에 집착하며, 고요함에 안주하려 하고, 쉽게 법을 의심하고, 통증 등 불쾌한 감각을 싫어하여 두려워하고, 막상 담마가 드러나려는 순간이 올 때는 알아차리는 마음을 풀어버리고, 결국 해이해져 수행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란 생각으로 자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수행은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여 정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균형 잡힌 힘으로 수행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수행을 도와주는 37가지 요인들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다섯 가지 원리, 힘이라는 발라-니(balāni)입니다.
인드리야는 정신적 요인이라는 능력(五根)이고, 그 능력을 실제로 알아차리며 힘(五力)을 갖추는 것을 발라-니라고 합니다.
즉 정반대의 것을 제어하거나, 길들이는 능력을 인드리야라고 합니다.
믿음은 신뢰(또는 의심)의 부족을 통제하고,
노력은 나태를 통제하고,
알아차림은 부주의를 통제하고,
마음집중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통제하고,
지혜는 어리석음을 통제합니다.
이런 능력이 실제로 강화될 때 제어하는 능력은 정반대의 것을 정말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심, 행복과 하나의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집중이라는 3가지 요인의 존재에 의해 강화될 때 믿음은 단지 제어하는 능력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집중, 북받쳐주는 집중과 날카로운 집중에 의해 강화될 때 지혜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5가지 제어하는 능력(五根) 내에서 서로 균형을 잡는 요인이 있습니다.
믿음과 지혜는 서로 한 쌍입니다.
만약 지혜가 약하여 믿음의 지배를 받으면 비판적인 능력과 분석, 조사하는 지적인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만일 지혜가 믿음을 지배하면 이것은 불확실성으로 수행하려는 마음이 부족하여 자신감이 줄어듭니다.
똑같이, 노력이 마음집중을 지배하면 이것은 불안함과 뒤흔들기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만일 마음집중이 노력을 지배하면 나태와 마비 상태를 가져오게 됩니다.
믿음, 노력, 마음집중과 지혜는 높여져야만 하고, 균형 잡힌 상태에서 지탱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사띠(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나머지 4가지가 적당하게 상호 균형잡힌 관계를 확실하게 하는 파수꾼입니다.
수행으로 이 5가지 능력이 튼튼하고 굳으며 강력하게 되기 때문에 이 5가지 요인을 힘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5가지 제어하는 능력과 5가지 힘은 같은 물건의 2가지 외형이라고 하셨습니다. 강의 중앙에서 보는 동쪽과 서쪽 측면인 것입니다. 즉 5가지 제어하는 능력과 5가지 힘은 동일합니다.
5가지 능력은 제어되고 강화되어야만 하는 잠재성이고, 5가지 힘은 그 5가지 요인들의 조합을 통하여 발달합니다. 5가지 요인들의 능력이 굳게 안정되게 될 때 그를 5가지 힘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류과에 이른 사람은 의심의 족쇄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믿음은 꿈쩍도 않는 힘이 됩니다.
그 다섯 가지 힘은,
❶ 믿음의 힘(saddhā-balāni : 삿다- 발라-니)
❷ 노력의 힘(viriya-balāni : 위리야 발라-니)
❸ 알아차림의 힘(sati-balāni : 사띠 발라-니)
❹ 마음집중의 힘(samādhi-balāni : 사마-디 발라-니)
❺ 지혜의 힘(paññā-balāni : 빤냐- 발라-니) 입니다.
❶ 믿음의 힘(saddhā-balāni : 삿다- 발라-니)
삿다-는 다섯 가지 힘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삿다-는 ‘어떤 것’을 믿어 그것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서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로 그 ‘어떤 것’은 삼보인 붓다, 담마, 상가와 업(kamma : 깜마), 그리고 업의 결과(vipāka : 위빠-까)에 대한 믿음입니다.
두 번째로 그 ‘어떤 것’을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분명해지고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시어 모든 탐․진․치의 번뇌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우리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그분께 예경 드리면 우리의 마음도 분명하고 평온해집니다.
담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누구든지 조사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담마를 실천하여 분명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함을 체험하고 담마에 대한 확신이 섭니다.
상가는 부처님의 뒤를 이어 담마를 깨친 성스러운 제자들이며 그분들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그 상가 역시 도와 과에 들은 성자들이라 합장 공경할 대상임을 알고 그 상가가 부처님의 담마를 설하시는 것에 따라 수행하여 분명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체험해 상가에 대한 확신이 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겨났다 우연히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원인 따라 짓고(업), 그 지은 조건 따라 결과를 낳는다(업보)는 사실을 받아들여 그 연기의 법칙을 체험해서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균형 잡힌 위빳사나 수행을 위한 원리 중에서 이런 믿음의 힘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경전공부와 보시, 지계 등으로 공덕행을 닦는 것과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더욱 향상되어 갈 것입니다.
❷ 노력의 힘(viriya-balāni : 위리야 발라-니)
노력이란 수행을 행하는 에너지이며 수행을 밀고 나가는 힘입니다. 믿음의 힘이 기초되어 노력의 힘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마음집중하여 그것의 참 성품을 관찰함으로써 들끊는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어떠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언젠가는 도와 과를 증득할 것이라는 서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확신과 서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노력의 힘은 강화됩니다.
❸ 알아차림의 힘(sati-balāni : 사띠 발라-니)
알아차림의 힘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진행과정을 방심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서 알아차리는 힘입니다. 노력의 힘이 강하면 알아차림의 힘이 향상될 것이고 알아차림의 힘이 좋아지면 대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에 마음을 챙기게 됩니다.
❹ 마음집중의 힘(samādhi-balāni : 사마-디 발라-니)
일어나는 현상에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삼매가 되는 힘을 말합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강하게 되면 이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됩니다. 수행자가 대상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릴 때, 그는 감각대상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인식하고 그 순간에 감각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감각대상의 현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의 작용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것을 찰라 삼매(khaṇika samādhi : 카니까 사마-디)라고 합니다. 이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삼매는 곧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빈틈없이 면밀히 이어져 진행되면 항상 마음집중의 상태에서 현상을 관찰하게 되어 마침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현상의 참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❺ 지혜의 힘(paññā-balāni : 빤냐- 발라-니)
존재의 참 성품, 즉 무상․고․무아․연기 등의 담마를 확연하게 보아 이해하는 것을 지혜의 힘이라고 합니다.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되면 담마를 보게 되어 지혜의 힘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 이런 다섯 가지 힘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① 먼저 믿음의 힘과 지혜의 힘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향상되어야 합니다.
믿음만 성숙되고 지혜가 빈약하면 맹목적인 삿된 수행자가 됩니다. 형식적인 것에 매달리며 의식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잘못된 길로 이끄는 교리나 이론에 빠져버리는 수행자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 신앙에서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 안에서도 부처님을 신격화시켜놓고 신앙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행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지혜를 목적으로 지식만을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면 필경 오만과 자만, 그리고 편견이 슬그머니 자리 잡게 될 것이고, 수행의 과정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려고 하면 그 분석적인 알음알이로 인해 마음집중이 방해받게 되어 알아차림도 약화되어 깨어지게 됩니다. 또한 믿음의 힘도 줄어들게 됩니다. 오직 깨달음을 체험하고 난 후라야 자신의 경험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살펴보면 믿음만 강하고 지혜가 적으면 어떤 것도 바르다고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수행에 관한 바른 정보를 얻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틀린 수행을 계속할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수행을 할 때 믿음의 과잉으로 수행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자의 마음이 산란하게 될 때 집중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대상을 분명하게 볼 수 없어 수행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려서 결국 대상이 자취를 감추어 버립니다.
이럴 때 단지 마음의 속도를 늦추며 느긋하게 하고 '믿음' '믿음' '믿음' 또는 '자신감' '자신감' '자신감' 하며 주의 깊게 알아차리십시오.
잠시 후에 마음은 다시 안정되게 됩니다. 그리고 집중을 얻을 것입니다.
② 또한 노력의 힘과 마음집중의 힘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 향상되어야 합니다.
노력의 힘만 강하고 마음집중의 힘이 약하면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어 항상 들뜸(uddhacca : 웃닷짜)이 있습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너무 열성적이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반해 집중력이 약하여 마음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마음은 산만해지고 들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힘들이지 말고 일어나는 현상을 주의 깊게 알아차리면서 노력을 조금 줄입니다. 즉 한가지씩만 하겠다고 마음먹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점차로 마음집중이 쉬워지고 노력도 안정되고 확고해져 강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음집중의 힘만 강하고 노력의 힘이 약하면 활력이 떨어져 나태와 게으름(kosajja : 꼬-삿자)에 떨어질 것입니다. 수행을 오래도록하면 마음집중이 아주 강해져서 알아차리는 마음이, 별 노력도 없이 대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럴 때 충분한 노력을 가하지 않으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점차 둔해지고 무거워지다가 혼침이나 졸음에 떨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허리가 펴져있질 않고 힘없이 좌선할 경우에 많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는 마음집중과 노력 사이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행수행을 더 오랫동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수행자만이 노력을 능가하는 마음집중을 경험하므로 노력과 마음집중을 균형 있게 성장시켜야 합니다.
노력의 힘을 받쳐주는 수행은 경행이며, 마음집중의 힘을 받쳐주는 수행은 좌선입니다. 따라서 별도의 수행지도가 있기 전까지는 좌선과 경행에 같은 시간을 분배하여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③ 그러나 알아차림의 힘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알아차림은 믿음․노력․지혜의 힘이 강하여 들뜸에 빠지는 것을 지켜주고, 마음집중의 힘이 강하여 게으름에 빠지는 것 또한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알아차림은 모든 경우에 요구됩니다.
마음은 알아차림에 의지해 있고, 알아차림은 감각기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알아차림이 없으면 마음이 노력하는 것도 조절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알아차림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리하여 알아차림이 끊어짐 없이 지속적으로 순일하게 이어지게 되면 깊은 마음집중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음집중이 깊어질 때 꿰뚫어보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며 몸과 마음의 과정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위빳사나의 바탕이고 삼매의 전제라고 합니다. 항상 알아차림의 힘은 지속적이고, 강하고, 한결같고 끊어짐이 없어야 합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들이 강하지만 균형 잡혀있지 않으면, 수행자가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을 수 없어, 번뇌의 소멸이라는 깨달음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런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을 예리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몸이나 건강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인내심 있게 수행해야 합니다.
특히 오력의 균형을 위해서는 좌선과 경행의 비율이 같게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알아야 합니다.
2. 오력을 통한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
선정수행을 전혀 하지 않는 채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이 된 사람 모두가 상수멸정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아라한이든, 단순한 선정수행 범부이든, 수행할 때는 반드시 색계의 하나인 제1선정으로부터 시작되어 서서히 단계를 밟고 올라서 범부는 최고인 제8 비상비비상처까지, 성인인 불환자나 아라한은 상수멸정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들이 상수멸정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수멸정은 다른 선정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상태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에 이른 분들은 상수멸정을 경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마타 수행을 통한 선정수행을 병행 수행한 분들만이 경험합니다.
결국 상수멸정은 수행자가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의 병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단계입니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것보다는 가라앉고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일시적인 소멸로 이끌어 열반을 순간적으로 체험하기도 합니다. 상수멸정을 성취했다고 해서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어렵게 생각되겠지만, 선정의 단계를 오르는 것은 계단과 같습니다. 깨달음의 첫 번째인 예류과에 도달하면 멀지 않은 윤회 동안에 반드시 아라한에 이르지만, 선정수행자는 수행하면서 색계의 하나인 제1선정에서 멈추는 사람도 있고, 무색계 선정의 처음인 공무변처에서 멈추는 사람도 있는데 본인의 흥미나 노력에 따라 다양합니다. 더구나 선정은 깨달음과 관계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도움밖에 되지 않으므로 부처님도 선정은 계발하여도, 하지 않아도 굳이 문제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선정에 들기 위한 준비에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욕구와 불선을 떨쳐버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욕계에의 집착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색계 선정의 세계에는 마음이 향하지 않습니다. 욕구에 근거하는, 분노에 근거하는, 무지에 기초를 두는 불선은 당연히 마음의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욕구와 불선을 떨쳐버리면 색계의 하나인 첫 번째 선정에 들어간다.」. 이것이 가장 간단한 입정의 설명입니다. 아마 이것은 불교 이외의 사람들이 다만 선정에 들려고 할 때에도 최소한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항목입니다.
불교가 아닌 선정의 경우는 다만 무엇인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통일되어 집중이 강해졌을 때 선정에 든다는 정도의 설명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불교가 아닌 경우는 선정으로부터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또다시 욕계에의 집착도 일어나고, 불선도 일어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에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불교에는 선정에 들기 위한 마음가짐이라든지 방식이 좀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고, 일단 선정에 드는 것이 성공하면 더 나아가 깨달음의 일부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성장하여 두 번 다시 욕구나 불선에 돌아오지 않아도 됩니다. 부처님은 그런 불교적으로 올바른 깨달음으로 이끄는 선정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 자신이 선정에 들고 나서 한발 나아가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의 체험을 말한 것과 제자 비구들이 이와 같이 수행해서 깨달았다는 것이 경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올바른 선정을 만드는 방법」은 실은 선정 그 자체의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사용하든 아니든 가능한 한 편하고 빠르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경지를 성취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경험에 의해서 결정되기보다 수행자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자신이 번뇌라는 속박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됩니다.
불교적으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힘이기도 한 믿음·노력·알아차림·집중·지혜의 오근(5력)이 중요함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❶ 믿음(信)
불교적으로 올바른 수행의 첫걸음은 우선 불교의 가르침을 듣는 것과 믿음의 확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붓다가 출현한 대사건이 있어서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이 붓다에 대한 믿음을 얻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빛나고 당당하고 압도적인 온화함이 있는 부처님을 나의 소원을 비는 「신앙」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들어 「아! 이 가르침이라면 진짜다」라고 납득하는 「확신」입니다. 가르침과 세트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수행을 위한 출발지점입니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첫 단계에서도 부처님의 법(가르침·진리) 따라 진행되는 타입과 부처님에 대한 믿음 따라 진행되는 타입의 2종류가 있지만, 올바른 수행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같은 마음가짐으로 시작합니다.
수행이라고 말하면서 수상한 신비 체험 등에 헤매기 쉽지만, 결단코 깨달음의 길을 빗나가지 않게끔 처음부터 진리를 믿고 목표로 하는 길을 확실히 알아서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법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진척되지 않아서 단념하고 싶어졌을 때, 길은 이쪽이라고 하는 이정표가 반드시 나타나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해 줍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5력을 강하게 해 주는 근본입니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노력이 함께 강해집니다. 강한 노력의 힘이 있어야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집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지면 집중의 힘도 깊어집니다. 집중의 힘이 강해져야 지혜의 힘이 성숙합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법인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려놓는 것, 앉아있고 서 있는 것, 밥을 먹기 위해 팔을 굽히고 먹는 것 등, 이런 모든 행위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사악도에 떨어지는 문이 닫힙니다. 이런 알아차림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완전할 때는 수다원에 이르러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자가 이런 법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사악도를 피함은 물론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믿음으로 더욱 더 쉬지 않고 노력하며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을 가지지 않거나 반신반의하면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게 되고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에 바른 법으로부터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부처님의 바른 수행법으로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노력도 포기하게 되고, 더불어 무엇이든 대상을 만날 때 알아차리려고도 하지 않게 되고, 집중할 수 없어 쉽게 포기하게 되어 어리석은 행위들로 사악도에 떨어질 인연만 짓게 됩니다.
그래서 오력 가운데 믿음이 우선하는 것이고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바른 수행법에 대한 믿음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바른 믿음이어야지 어리석은 믿음이어서는 아니 되기에 믿음은 지혜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수행법에 대한 지속적인 알아차림과 평등한 마음을 계발해야만 합니다.
또한 사마타 수행을 하는 자는 나는 선정에 이를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좋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자는 삼법인의 특성에 대한 지혜가 강한 것이 좋습니다.
❷ 노력(精進)
경전에는 발심한 사람은 출가해서 완전한 계를 지킨다고 말해집니다. 정확하게는 「계율 조항(빠띠목카)에 의한 방호로 자신을 지킨다.」입니다.
딱딱한 계율을 수행자가 필사적으로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고, 계율에 따른 생활을 하는 것에 의해, 그러한 생활을 하는 수행자 자신이 계율 덕분으로 여러 가지 장해나 곤란을 피할 수 있으므로 계율이 그것을 지키는 사람을 방호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결코 하지 않는 사람, 죽이거나 훔치는 것을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로부터도 미움받지 않고 원망받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신뢰받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계율에 의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재가자인 경우는 갑자기 가족도 재산도 전부 버려두고 출가할 수 없기 때문에 재가 신도 오계를 꼭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마리의 모기조차도 죽이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노력해 봅니다. 무심코 죽였으면 참회하고 또 노력합니다.
「어떤 것도 마음대로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는다.」 「불륜을 저지르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술도 마시지 않는다.」 이런 것을 지키도록 노력하고, 실패하면 참회하고 또 노력합니다. 그 정도만으로도 자신의 세상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계율은 주로 언행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것을 지킬 뿐만 아니라 마음도 계에 따라 온화한 상태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소욕지족의 만족한 마음입니다. 출가자는 몸을 유지할 만큼의 가사와 탁발에 만족하고, 의발만을 소유한 채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생활해야 합니다.
재가자는 가재도구나 의복을 일부러 처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없어도 괜찮아」라고 하는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식사도 배부를 때까지 먹는다거나 마음껏 먹는 것이 아니라, 「아, 이 정도로 좋다!」라고 적절한 곳에서 숟가락을 내려놓고 끝낼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배고픔이 지나쳐도 수행할 수 없지만 만복에서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담마 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번뇌(kilesa)를 근절할 수 없고, 그 담마는 노력 없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모든 악행을 버리고, 좋은 행위를 힘써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세간과 출세간 모두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담마에 대한 인내와 노력 없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세간보다 출세간은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형태와 색깔, 소리, 냄새, 맛과 몸의 감각에서 접촉하는 것을 애착하고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행운, 명성과 행복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분명 매우 긴 시간을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부처님이 과거 보살이었을 때 마하자나까(Mahajanaka)로 태어났습니다.
청년이 된 마하자나까는 배를 타고 수완나부미(황금의 땅, Suvannabhumi)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항해 중에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부서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는 것을 안 그는 먹을 수 있을 만큼 기름진 음식을 먹고, 입은 옷에는 기름을 듬뿍 묻혀서, 나무판자를 부여잡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때 배에서 우왕좌왕하던 모든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마하자나까는 판자와 기름 묻은 옷으로 인해 바다에 뜰 수 있었고, 기름 냄새로 인해 상어의 습격을 피하게 되며, 충분히 먹은 기름진 음식으로 인해 힘을 유지하여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혹독한 조건을 이기며 인내와 노력으로 그는 7일 동안 바다에서 헤엄쳤습니다.
마니메-칼라 천신(Manimekhala deva)이 그런 모습을 보고 그를 시험했습니다.
“너는 7일 동안 육지를 볼 수 없었는데도 끈기 있게 헤엄친 이유가 무엇이냐?”
“노력은 항상 유익한 것이다. 비록 지금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해도 나는 어딘가에 육지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노력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바다는 너무나 넓다. 네가 끈기 있게 노력해도 무수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고, 더구나 육지에 도달하기 전에 너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마하자나까가 답하기를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노력하지 않고 중단한다면, 나태의 결과로 반드시 고생할 것이고 바라던 목적지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성공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심지어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노력할 것이다.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으며, 기슭에 도달하기 위해 나의 힘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들은 천신은 그의 인내와 노력을 칭찬하며, 그를 미틸라(Mithila)란 도시의 기슭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야하는 불굴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바다를 헤엄쳐서 건너기 위해 노력할 수 없으면, 어떻게 더 어려운 번뇌(Kilesa)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번뇌를 가지고 있다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뇌뿐만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는 번뇌를 버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로-바(lobha)라는 우리의 욕망은 좋아하는 대상을 만나면 일어납니다.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과 마음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일어납니다. 만일 우리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면, 우리는 나쁜 행위(akusala)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의 노력(viriya)이 욕망(lobha)을 비롯한 살아가는 모든 일상생활에서 함께 일어난다는 점에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노력의 특징을 조사해서 노력의 이익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알아차리기 위해 여러분은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노력은 신체적 노력이 아니라 정신적 노력을 말합니다. 즉 노력은 용쓰는 힘이 아니라, 우직하게 인내하는 정신적 노력이며 부드러운 노력을 말합니다.
경행 중에 때로는 게으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하고 또한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경행은 뒤뚱거려지거나 걸음이 빨라지거나 걸음을 통제하게 됩니다. 게으른 마음, 서두르는 마음, 통제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노력이므로 바른 노력은 정신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실제로 수행할 때 노력이 결핍되면 지루해집니다. 여러분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적인 강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끊이지 않고 계속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노력도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 단 한 번의 노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노력으로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고 느슨한 노력으로 나태와 잠을 초래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노력은 단지 알아차림을 끊이지 않게 대상을 향해 순간순간 노력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➌ 사띠(알아차림)
계를 지키며 고요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도 부처님이 발견한 불교 독자적인 수행법인 위빳사나 수행이 필요하고, 선정에 들 때에도 하나하나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며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보가 들어오는 입구는 안·이·비·설·신·의라는 6개의 문(육근) 가운데 어떤 것입니다. 이 6개 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고 파악해 관리하면 고요한 마음, 온화한 말과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육근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어떻게 제어하면 좋을까요?
예를 들어 눈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제어하기 위해서 눈을 감아야 할까요? 그러면 쓰거나 읽거나 할 수도 없고 걸을 때 시궁창에 빠지거나 벽에 부딪히기도 하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해지기는커녕 일상생활 자체가 불편할 뿐입니다. 게다가 눈으로부터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니 귀나 신체 등 다른 입구로부터 정보를 보충하려고 본능적으로 정보를 긁어모으기 때문에 결국 정보량은 바뀌지 않습니다.
만일 휴식 공간 등에서 안·이·비·설·신의 정보를 전부 차단할 수 있을지라도 마지막 의(마음)가 혼자서 활발하게 망상하면 정보는 충분히 만들게 됩니다. 그러한 이유로 들어오는 정보를 차단하려고 해도 아무런 해결이 안 됩니다.
육근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는 들어오게 놓아두고 자신의 마음이 그것에 붙잡히지 않게 하면 됩니다. 그 때문에 끊임없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현상을 다만 있는 그대로 확실히 확인해서 들어온 정보에 의해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눈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는 다만 봄, 봄, 보임이라고 확인합니다. 「미인이다」든지 「붉은 차다」 등과 같이 자세하게 알려고 하나의 정보를 뒤쫓거나 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인이다」라고 보면 「말을 걸고 싶다」든지 「만나고 싶다」든지 망상이 자꾸 일어나 실재로부터 멀어져 버립니다. 그사이에도 실제는 끊임없이 일어나서 사라지고 일어나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망상에 붙잡혀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그사이에 실제를 잃어버려 괴로워하게 되어 버립니다.
눈으로 모양과 형태를 볼 때는 일어나서 사라지는 현상을 다만 봄, 봄, 보임이라고 알아차립니다. 그것이 눈을 지키고 마음이나 업을 지켜 온화하게 합니다.
귀로부터 들어오는 소리는 소리, 소리, 소리 들림이라고 확인합니다.
코로부터 들어오는 냄새는 냄새남, 냄새남, 냄새남.
혀로부터 들어오는 맛은 맛봄, 맛봄, 맛봄.
신체로부터 들어오는 감촉은 느낌, 느낌, 느낌.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생각은 생각함, 생각함, 생각함.
이와 같이 육근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다만 「정보다」라고 확실히 확인해서 그 어떤 것에도 붙잡혀 끌려가지 않고, 실재하는 현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조심하면 육근을 지켜 신구의(身口意)의 3종류를 지키게 됩니다.
알아차림을 확인하는 사띠에는 반드시 세트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사띠하는 하나하나의 현상을 확실히 알아차려서 분명히 아는 것(sampajāna 삼빠자-나)입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sati-sampajāna)은 하나의 세트입니다.
걸을 때는 걷고 있음을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그 감각을 확실히 느낍니다. 다른 일로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걸음을 알아차리고 걷고 있음을 분명하게 압니다. 무엇을 볼 때는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색깔과 형태에 집착하지 않고 「색깔과 형태이다」라고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편히 쉴 때도, 먹을 때도, 이야기할 때도, 잘 때도, 대소변을 볼 때도, 행주좌와의 모든 행위를 하나씩 확실히 알아차리고 확실히 느껴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현상에 집중하면 그 마음은 선정에 들어갈 준비가 됩니다.
❹ 선정(마음집중)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에 계속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띠·삼빠자나로 마음이 대상에 집중해서 알아차리고 있다면, 다음은 명상을 지속할 수 있는 몸의 자세를 정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시간 편하게 집중할 수 있는 몸의 자세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가자의 경우는 탁발해서 공양을 끝마치고 나서, 재가자의 경우는 공복도 아니고 만복도 아닌 몸의 상태가 정확히 좋은 상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너무 자도 수면 부족도 좋지 않으며, 용무가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그리고선 어딘가 조용한 장소를 선택합니다.
결가부좌 하고,
등골을 곧게 펴서 유지하며,
신체의 전면에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집중합니다.
전면에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집중한다는 것은 마음을 「정면(코끝이나 배)에서 일어나는 대상에 마음을 두어 철저히 알아차려라」는 의미입니다. 호흡을 세는 일도, 배의 수축과 팽창도, 콧구멍에 공기가 접하는 것을 보고 알아차리는 일도, 전부 신체의 전면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정수행의 왕도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집중을 지속할 수 있는 좋은 몸의 대상이기 때문에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결가부좌는 신체를 가장 견고하게 자리 잡게 하는 자세이지만, 반가부좌로도, 정좌에서도, 의자에 앉아도 좋습니다. 다만 어떻게 앉든 등골만은 곧게 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등뼈의 원반 하나하나를 아래서부터 순서대로 쌓아올려 그 꼭대기에 두개골을 둔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 후에 명상이 끝날 때까지 결코 움직이지 않겠다고 마음을 결정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체의 전면에 마음을 집중시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❺ 빤냐(지혜)
몸의 자세를 유지하고 눈앞의 대상에 집중해서 사띠·삼빠자나를 갖추어 믿음·정진·알아차림· 마음집중·지혜의 오근(5력)을 조화롭게 하여 5가지 장애를 없앱니다. 그러면 선정은 물론 깨달음도 눈앞에 다가옵니다.
격렬한 욕구를 없애고,
격렬한 분노를 없애어 자애의 마음을 만들고,
혼침·수면을 없애고 빛에 대한 자각(광명상 ālokasaññā)을 만들기 위해
사띠·삼빠자나를 갖추고,
후회를 없애고 가라앉은 마음을 유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없앱니다.
욕구와 분노는 수행대상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욕구는 단지 가라앉히면 되지만,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정반대의 마음인 자애를 마음에 만들어 간단하게 없애면 됩니다. 자비의 명상을 하면 됩니다.
빛 등에 오래도록 집중하고 있으면 졸음은 자연스럽게 맑아집니다. 머리가 칼날처럼 명쾌하고 주위가 빛납니다. 눈으로 보는 것 같은 빛은 없지만, 눈부신 것도 어슴푸레한 것도 아니며, 다만 분명히 「밝다」고 압니다.
선정의 준비가 잘되면 들뜨지만, 그것도 마음의 혼란이므로 주의해서 들뜨지 않게 합니다. 반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기분도 없애어, 「잘 되어가든지 가지 않든지 다만 수행할 뿐」이라고 마음을 정합니다.
정해진 마음은 제대로 결과를 내기 때문에 「역시 이 가르침은 올발랐다」라고 확신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나 불안도 날아가 버립니다.
5장애는 지혜를 약하게 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그것이 제거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나타납니다.
5장애를 없애는 가운데 수행의 포인트인 사띠·삼빠자나를 갖추게 됩니다. 더구나 제거되는 5번째의 장애인 교법에 대한 「의심」도 사라집니다. 「의심」은 예류과로 소멸하는 3가지 번뇌의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5장애 전부를 없앨 수 있으면 선정의 제1단계는 훨씬 가까워지지만, 그뿐만 아니라 위빳사나 수행도 숙달되어져 수행으로 무지의 번뇌를 끊어 깨달음의 제1단계인 예류과에도 훨씬 가까워집니다.
❻ 선정, 그리고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간다.
5장애를 없애는 것까지 할 수 있으면, 만족이 생기고 기쁨이 생겨 신체가 가벼워지고(kāyo passanbhati 신경안), 행복을 느껴 마음이 통일됩니다(samādhiyati).
「아, 이것으로 만족했다」 등으로 간단히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감이 계속 솟아올라 옵니다. 희열감도 계속 솟아올라 옵니다. 신체로부터 「무게감」이 없어져, 무중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서거나 앉거나 하고 있을 때에 느끼고 있던 근육이나 뼈의 부담이 없어집니다. 그 상태는 물론 편하고 마음이 통일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5장애를 없앤 이 단계에서 마음이 통일(사마디)되기에, 아직 욕계 상태이지만, 마음은 선정에 훨씬 가까워져 있습니다. 아비담마나 주석서에서는 이러한 선정 직전의 통일된 상태를 근행정(upacâra-samâdhi)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선정에 근접한 마음 상태입니다.
여기까지 준비를 할 수 있다면 선정까지는 일순간입니다. 그렇게 이 집중 상태를 유지해서, 보다 강하게 하면, 욕계에의 집착과 불선으로부터 멀어진 제1선정에 이릅니다.
제2선정은 제1선정을 달성하기 위해서 더듬은 길을 반복하다보면, 이번에는 훌륭한 제1선정 상태도 번거롭다고 느껴, 하나 더 무엇인가의 접촉인 사고를 없애서, 보다 조용한 마음 상태에 가지고 갑니다.
제3선정 이후도 같은 방법으로 직전의 선정으로부터 한 개씩 요소를 없애어, 보다 조용하고 보다 아무것에도 부딪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갑니다.
불교외의 수행자도 하나의 대상을 계속 집중하고 있으면 선정에는 들지만, 지금까지 말해온 「불교적으로 올바르다」는 선정의 준비과정을 이해하고, 집중하면서 어느 사이 사띠·삼빠자나의 위빳사나 수행도 자기 것이 되며, 끊임없이 생멸하는 현상을 파악하여 무상을 일부라도 관찰하며, 지혜가 나타나 깨달음의 길도 열린다고 하는 구조는 아닙니다. 다만 몰입상태를 체험합니다.
불교적 수행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자질인 믿음·정진·사띠·선정· 지혜의 오근(5력)을 선정에 들기 위해서도 수련하고 성인의 네 부류에 들기 위해서도 수련하기 때문에 깨달음에의 길이 열리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있던 명상수행이나 선정을 한편으로는 다만 이 세상에서 즐길 뿐의 쓸데없는 것이라고 물리치면서, 한편으로는 올바르게 배우면 깨달음에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라고 아셨기에 결코 순서를 뒤바뀔 수 없는 올바른 지도 메뉴얼을 만들어 제자들에게도 권하고 계셨습니다.
「불교적으로 올바르다」는 명상 지도에 따라 수행하면 선정의 즐거움은 물론 깨달음까지도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칠각지, 칠청정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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