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수행실천 단계 숙달법--
ㅇ 내면의 의식혁명
칠정각지(七正覺支)는 빨리어로 satta sambojjhaṅga(삿따 삼봇장가)라고 합니다. 불교 용어에서 sammā(正)라는 형용사를 자주 사용합니다. ‘자신의 가르침은 올바르다’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에 자화자찬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7각지의 형용사 sam도 sammā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가르침이 올바르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가르침의 특색인 ‘아무것도 빠져있지 않은 것’ ‘완전한 것’을 굳이 나타내고 있을 뿐입니다.
‘봇자(bojjha)’라는 것은 깨달음으로 향하는데 필요한 요소, ‘앙가(aṅga)’는 부분입니다. 즉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7개의 부분이 있으며, 그 일곱 개를 완성하면 깨달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통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해가면 일상적으로는 마음이 깨끗해져서 분별력 있는 성격이 되는 등 그것 나름의 이익이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탈 세속적인 수준 내지는 초월적 깨달음의 경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보통의 수행법으로는 마음이 좀처럼 진전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은 언제나 욕심에 쌓여 쾌락을 쫓기 때문입니다. 쾌락이라고 해도 이런 경우는 자극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그러한 자극을 사람은 누구나 늘 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눈, 코, 귀, 입, 신체로부터 다양한 자극을 받는 것뿐인데 그 자극으로부터 다시 마음속에도 자극을 만들고 있은 것입니다. 이 자극이 들어오면 마음은 의식이라는 파동을 만듭니다. 그것을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 중에서 마음의 작용이 정지해 버리면 그것은 죽는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간단히 죽지 않는 것은 마음이 한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부단히 파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물결로, 파동으로 진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진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마음에 외부로부터의 어떤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가 단절되면 마음의 작용 또한 멈춰버립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무언가에 의해 마음은 자극을 받습니다. 그 자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다시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들은 것만으로도, 본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귀를 통해 무언가 들어도 같은 식으로 자극의 물결이 계속되어 갑니다. 그런 흐름은 여간해서 멈춰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이랑 귀는 활동하고 있지 않은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그렇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뜨고 있는 동안은 보이는 것이고, 보는 동안은 자극이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상태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도 않고 혹은 먹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인간에게는 간혹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입니다. 그때 마음은 자극이 멈추어서 고요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결코 고요하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제외한 5감의 기능이 가령 멈추었다고 해도 마음에는 망상이란 망상은 다 생깁니다. 망상이 생겨서 머릿속은 그 망상의 자극으로 파동이 꽉 차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서운 망상을 하며,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 조용한 망상을 하거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우리들 마음은 언제 어떤 경우든 누구도 그 기능을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자극의 파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ㅇ 칠각지로 수행은 단번에 진전됩니다.
인간은 이 방법으로 진일보한다.
마음에는 이러한 기능이 깔려있으므로 예를 들어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해도 자극을 받고 있는 이 순환으로부터 탈출하기란 대단히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물고기가 물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서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물고기가 물속으로부터 탈출하여 땅에서 생활하려 든다면 이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이 되고 맙니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물고기가 땅에서 생활할 수 있으려면 물고기가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성장한 결과 진화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물고기가 물고기로 있는 한은 땅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 인간도 보통의 생명으로 6감을 자극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므로 그것을 해가면서 해탈을 체험하기란 물고기의 진화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인간을 진화시키는 것입니다. 매우 빠르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겨나게 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엄격한 수련 과정이 있겠지만 그 시련을 뛰어넘으면 세상의 일반적 상식이라든지 결정이라든지 그런 것들의 무의미함을 잘 알게 되어 거기에서부터 점차 탈 세속적인 경지의 마음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대략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메커니즘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메커니즘이지만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앞서 위빳사나를 해도 어렵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실은 이런 얘기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할 때 스스로 꼭 진화해보자는 의욕도 없이, 구태의연하게 새로운 견해나 사고도 전혀 없이, 그저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그것은 진화가 없는 자신이 갖고 있는 대로의 개념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방법으로 사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불교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해서 위빳사나 수행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가르침 없이 수행을 하면 같은 윤회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단순히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결과도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행을 하면 하는 만큼 그 사람의 마음은 성장하여 훌륭한 성격으로 변화해 가며 인생의 일반적 괴로움 등은 수행을 모르는 사람에 비교하여 훨씬 쉽게 소멸되어 갑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에는 그런 이점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을 진짜 목적으로 하여 마음의 진짜 성장을 원하여 수행을 실천한다면 역시 法(법)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편이 우리들 윤회 속에 있는 생명으로서 생명의 진화의 방법이나 윤회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진화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진화 과정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이 칠각지가 있습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한 목적으로써 실제 수행에 힘쓸 때는 그 수행의 과정은 이 7가지의 支(지 : 부품)로 구성됩니다. 인간이라 하면 머리, 양손, 양발, 몸체, 눈, 귀, 코 등의 肢(지 : 부품)로 반드시 구성되어 있듯이, 해탈은 이 7가지의 支(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 개가 갖추어지면 위빳사나는 스텝 바이 스텝 식으로 각 단계 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칠각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빳사나를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칠각지는 이해해도 좋고 이해하지 못해도 특별히 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칠각지에 대한 설명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어 있는지 혹은 그다지 진전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어디에서 균형을 잃어버렸는지 등을 점검하려고 할 경우에 이 칠각지는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생각하여 점검해 보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교정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칠각지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실천은 일반적으로는 계율로부터 시작합니다.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러고 나서 명상으로 사마디를 이룹니다. 마음의 안정을 느낍니다. 다음으로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완성합니다. 다음으로 지혜에 의해서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근절하고 해탈에 이릅니다. 이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도중에 끼어들어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계율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명상실천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명상실천을 시작하는 순간과 동시에 계율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을 범하면서 명상실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란 해탈에 이르는 도의 최종단계입니다. 위빳사나의 실천을 통해서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후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과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위빳사나는 ‘念(sati, 알아차림)’의 실천으로 출발합니다. 단지 하나의 항목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4염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실천하는 사띠(念)는 하나이지만 사띠하는 대상이 4종류로 바뀐 것뿐입니다. 7각지를 안내서로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라도 사띠를 실천합니다. 사띠가 진전됨에 따라 나머지의 각지도 달성해 갑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이 7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이 7가지의 법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7가지 모두는 우리를 깨달음으로 운반합니다. 로켓 같은 것입니다. 로켓은 천천히 발사되어 점점 스피드를 내다가 제1단계 로켓이 소진되어 떨어지고 제2단계, 제3단계의 로켓도 소진되어 충분히 스피드를 낸 후 우주선만이 우주로 날아갑니다. 각각의 에너지를 제대로 높여서 마음에 전부 갖추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그들의 부품을 모두 버린 시점에서 일어납니다.
1. 염정각지(念正覺支) -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칠각지의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로 염각지라고 하여 빨리어로는 사띠 삼봇장가(sati sambojjhaṅga)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염정각지(念正覺支)입니다. 삼봇장가 의 ‘삼봇자’라는 것은 반야심경에도 ‘삼막삼보리’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오듯이 이른바 ‘정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깨닫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깨닫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사띠입니다. ‘念’이라고 불리는 알아차림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띠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순간의 일만 알아차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향하는 일 없이 현재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지금의 순간밖에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이야기를 듣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모두 「지금, 지금, 지금...」 입니다. 지금을 실패하면 인생은 실패해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을 읽고 있다면 「책을 읽고 있음」,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음」, 차를 마시고 있다면 「차를 마시고 있음」이라고 끊임없이 「지금」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거의 「지금」을 알아차리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걷고 있을 때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대체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제의 일이나 수개월 전에 친구하고 싸운 것, 오늘 밤 저녁은 무얼 먹을까? 내일 일정이나 아내나 남편의 일.....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면서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즉 「지금을 알아차리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사 때는 어떨까요? 먹으면서 TV를 보고, 혹은 신문을 읽고, 혹은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하고, 혹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그러는 편도 많은 것은 아닙니까? 이런 것은 「지금은 알아차리지 않았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슨 프로그램을 보았는지, 무슨 기사를 읽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모릅니다. 무엇을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영양분이나 칼로리를 제대로 계산해서 하루에 필요한 양을 섭취했다고 해도 뇌세포는 건전하게 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신체에 들어온 음식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지 알지 못하고 잘 소화 흡수할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올바르게 소화 흡수하기 위해서는 뇌가 「무엇을 먹는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다지 영양분이 없는 음식이라도 「먹음」이라고 분명하게 알고, 「씹음, 맛봄, 삼킴...」등으로 잘 확인해서 먹으면, 뇌는 제대로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소화 흡수도 적절히 순조롭게 행해집니다. 과식할 것도 없고, 적당량으로 자연스럽게 멈출 수가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면 현재의 일이 소홀하게 되고 현실과 멀어져 마음은 망상하기 시작합니다. 망상하면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능력을 발휘 못 하고 타락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머리가 나빠지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능률이 다운되고, 아름다운 사람은 추악해지고, 체력이 있는 사람은 체력이 점점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망상하면 확실히 타락하며 성장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망상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지금을 알아차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지혜가 일어나 마음의 더러움이나 장애가 없어집니다. 지금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지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7가지의 각지를 완전하게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이때 제일 첫 번째의 염각지, 이른바 「알아차림」을 올바르고 충분히 실천하고 있으면 나머지의 6가지는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즉 「염각지」 하나만을 완성시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와서 지혜가 완성한다고 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의 「알아차림」을 잘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하면, 「지금의 1초만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1초뿐이라면 매우 구체적이고 단순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앉아 있다면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추우면 춥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허리가 아프면 허리의 아픔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빨을 닦고 있을 때는 이빨을 닦고 있는 것을, 얼굴을 씻고 있을 때는 얼굴을 씻고 있는 것을, 걷고 있을 때는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일로 머리를 혼란시키지 않고, 지금보다 1초 전의 일에도, 1초 후에도 걸리지 않고, 다만 지금의 1초, 지금의 1초, 지금의 1초.....로 지금의 1초만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으면 결과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지혜가 있는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다른 능력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반대로 과거나 미래에 걸려서 이것저것 망상만 하고 있으면 마음은 혼란할 뿐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마음은 매우 까다로운 기능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망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곧바로 망상이 일어납니다. 곧바로 불필요한 일을 생각해 버립니다. 특히 좌선하고 있을 때는 망상이 빙빙 돌며 골치를 썩입니다. 명상을 하고 있는지 망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끊임없이 망상이 일어납니다.
이때 가능한 한 빨리 「망상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마다 재빨리 알아차리고 확인합니다. 망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빠르게 망상을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만약 확인을 하지 않고 「또 망상해버려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생각에 빨려들어가 버렸다...」 등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해서 낙담해버렸다면, 그 사람은 수행에서 게으름피우고 있던 것이 됩니다.
명상 중에 망상은 잇달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망상이 나왔을 때 망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망상이 싫다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금 망상하고 있다」라고 명확하게 알아차려서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우선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띠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은 실천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띠를 실천해도 아직 부족하다, 아직 부족하다 하는 것은 흔히 경험하는 얘기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단지 알아차리는 일뿐이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알아차리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위빳사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배가 팽창하고 수축할 때에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확인하는 것으로서 念正覺支(염정각지)의 실천을 시작합니다.
또한 단순히 걷는 것, 앉는 것, 먹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왼발을 위로 들어올리며 들어올림, 옮기면서 나아감, 아래로 내리면서 내려놓음, 오른발을 위로 들어올리며 들어올림, 옮기면서 나아감, 아래로 내리면서 내려놓음이라고 단순히 신체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갑니다.
앉아 있으면 앉아있음, 누워있으면 누워있음, 먹고 있으면 먹고있음 이라고 알아차립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우선 가능한 한 관찰해 갑니다.
그것이 사띠 실천의 시작이며 첫 번째 覺支(각지)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念을 正覺支로써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차리는 작업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잡념의 공격도 받습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의 집중력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래도 체념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통하여 실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명확하게, 보다 정확하게, 보다 정밀하고 세밀하게 사띠를 실천하게 됩니다.
걷는 것부터 말하면 예를 들어 왼발이라고 말할 때, 왼발에 의식을 완전히 가지고 가 왼발을 의식합니다. 그다음에 든다고 명칭을 붙이며 듭니다. 들어올릴 때는 들어올리는 동작을 완전히 의식합니다. 나아감이라고 말하며 옮기며 나아가는 일을 완전히 의식합니다. 내려놓음이라고 말하며 내릴 때도 의식합니다. 그다음에 디딤이라고 의식합니다. 그러고 나서 오른발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의식을 완전히 오른발로 가지고 갑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는 신체의 각 부분에 의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수행은 흔히 보통의 수행을 몇 달간 했다는 사람이라도 이전의 방법은 먼저 잊어버리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수행 시간을 짜서 천천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매우 엄밀히 해야 합니다! 처음 부분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여간 왼발에 대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왼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인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몰라도 좋습니다. 머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누가 물으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상관없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일들은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느낌입니다.
왼발만을 의식하여 들어올림, 옮김(나아감), 내려놓음 합니다. 이번에는 오른발을 명확히 의식하여 오른발하고 명칭을 붙이며 오른발로 의식 에너지를 가지고 옵니다. 그렇게 해나가는 동안에 점차 스스로 이해하게 됩니다. 속을 들여다보듯 알게 됩니다. 의식이라는 엄청난 에너지가 오른발로 가는 감각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때 들어올림이라고 하며 들어 올립니다. 들어 올릴 때도 완전히 의식합니다. 들어 올린다고 하는 것을 들어 올린다고 의식하고 나서 옮김(나아감)이라고 의식하면서 옮기며 나아가고, 내려놓음이라고 의식하면서 내리고, 내려진 것이 완전하면 디딤이라고 의식합니다.
이것은 힘든 일입니다. 한쪽 발을 움직이는 동작은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힘든 일인 줄을 모르고 있다면 아직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기 힘들다고 느낄 만큼 이 수행법은 까다롭고 벅찬 일이라고 깨닫게 되면, 의식을 발에 확실히 매어 두려고 상당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충하고 있으면 간단하다, 단순하구나 라고 생각하여 그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이라는 식으로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깨달음이 넓어지리라고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성격이 훌륭하게 바뀐다거나, 장사가 잘 된다든가, 여러 가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른다든가, 신체의 건강이 좋아졌다든가, 인간관계가 좋아졌다든가, 등 여러 가지 이익이 되는 일이 나타나지만 그러한 것은 다만 세속적인 이익이며 그런 부분을 불교에서는 그렇게 달가운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어버리면 그런 것은 모두 끝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을 모았어도 죽을 때는 모두 이 세상에 두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세속적인 이익이며 세속적 이익을 뛰어넘는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경우는 꼼꼼히 매우 힘든 일을 해야만 합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근육이 힘들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육은 그다지 힘들지 않으므로 근육을 피로하게 하는 수행은 방법 자체가 틀린 것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근육이 피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걸을 때 발에 의식을 매어 두는 것, 그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어렵습니다. 그런 식으로 왼발 오른발이라고 하며 걷는 것, 그렇게 하면 사띠를 상당히 숙달되게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좌선을 할 때 평상시는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만 관찰하고 있다가, 망상이 생기면 망상, 망상이라고 하며, 통증이 생기면 통증, 통증이라고 하면서 관찰합니다.
그러나 매우 짜임새 있고 상세하게 경행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이라면 좌선하고 있을 때에도 꼼꼼하고 엄밀하게 사띠로 확인하는 작업을 합니다.
앉고 나서도 일일이 다리를 포개고 한 손을 놓고 자세를 고치고 한 발을 놓는 이런 세밀한 것들이 극히 중요합니다. 사띠를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자 라는 굳은 각오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앉고 나서 배가 팽창할 때도 팽창이라고 압니다. 팽창이 시작하면 팽창, 팽창, 팽창이라고 모두 알아차립니다. 끝나면 팽창이 끝난 것을 느낍니다. 팽창이 끝나면 다음의 수축, 수축, 수축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게 됩니다.
우리들이 물을 가지고 어딘가로 운반하려 할 때에 물 그것만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용기에 넣어서 가지고 가야 됩니다. 물만을 가지고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느낌으로 수행에서는 이 신체의 움직임과 사띠가 언제든지 함께 하도록 노력합니다. 특별히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훈련하기 나름으로 노력에 의해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면 팽창, 수축이라는 것은 용기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 용기에 넣는 물이어서 그것들이 분리되면 안 되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도록, 그 정도로 조심스럽게 팽창, 팽창, 수축, 수축이라고 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처음으로 좌선 수행을 하는 사람은 졸리고, 다리가 아프고, 등이 아프고, 안절부절 해지고 등의 이유로 앉아 있기 힘듭니다. 부단히 노력하여 가만히 앉아있게끔 되고, 아무런 통증 없이 앉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더욱 신중하게 팽창과 수축이라고 하는 용기에 사띠라는 물을 넣고 있다는 느낌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가지고 갑니다.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마음은 복잡한 기능이므로 여러 가지 망상이 나타나거나 마음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그럴 때에는 가능한 한 신속히 확인하고, 할 수 있는 한 팽창과 수축으로 돌아갑니다. 이와 같이 높은 단계는 아니더라도 보다 엄밀하게 사띠를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그것이 바로 제 1단계인 염각지를 완성했다고 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숙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곧이어 잡념, 망상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의 실천이 가능하게 됩니다. 환언하면 확인 없이는 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경까지, 또는 몸이 미묘하게라도 움직이면 그것을 자동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지까지 나아갑니다. 사띠의 실천이 자신과 일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실천을 해나가야 합니다. 여기까지 알아차림의 실천이 가능하게 되면 그 실천은 칠각지의 첫 번째인 염각지의 실천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으로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속세간의 인식은 진리의 인식이 아닙니다. 합성된 인식입니다. 실제 눈으로 들어오는 것은 ‘색깔과 모양(色形)’인데도 우리에게는 ‘사람이 보인다. 사물이 보인다. 꽃이 보인다’ 등으로 압니다. 귀가 인식하는 것은 단순한 ‘소리(音)’라는 파동임에도 우리에게는 ‘말이 들린다. 노래가 들린다. 새의 지저귐이 들린다’ 등으로 압니다. 사띠에 의해서 이것을 강하게 잘라냅니다. 제멋대로의 합성을 멈추게 합니다. 합성의 기능이 감소해져 가면 정보 그대로 날조하는 것 없이 인식하게 됩니다.
알아차림을 지닌 수행자는 합성기능이 감소해질 때의 인식에 대해서 그대로 이해합니다. 그때에 수행자는 알아차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의 변화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칠각지의 두 번째인 택법각지(dhammavicaya sambojjhaṅga, 擇法覺支)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경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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