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4. 희각지-탈세간에 성공하는 점검법 (20180413. 대구)

담마마-마까 2021. 7. 14. 08:42

https://youtu.be/jqgAwvQTkCc

4. 희각지-탈세간에 성공하는 점검법 (20180413. 대구)

 

오늘은 칠각지 중에 네 번째 희각지 부분인데, 요거는 저번 달 서울 법회의 프린트물을 나눠준 겁니다.

이번 달은 서울에서 다음 주 되면 경안각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너무 늦어지면 안 될까 싶어서 프린트물을 내드리는 겁니다. 서울에서 한 내용들 하고 중첩되지 않게끔 설명할 테니까 그 부분들을 참고를 해서 들으시면 될 겁니다.

 

'삐띠(pīti)' 부분입니다. 기쁨이라는 삐띠인데, 하도 많은 것 중에 왜 여기서는 삐띠 삼보장가(pīti sambojjhaṅga)라고 했을까?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는 굉장히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뭐가 있어요?

사무량심에 멧따(mettā), 까루나(karuṇā), 무디따(muditā), 우뻭카(upekkhā) 중에 '무디따(muditā)'도 기쁨이죠! 무디따 삼보장가라고 안 하고.

또는 기쁨을 나타내는 게 빠못자라는 게 있습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아, 이게 삐띠다' 하는데 사실은 보면 빠못자가 많습니다.

 

'빠못자(pāmojja, 희열)'라는 건 어떤 거냐면, 대상을 알아차려갖고 기뻐가지고 막 이렇게 떨리고 하는 게 있죠? 어떨 때는 몸이 둥실둥실 떠가기도 하고 막 몸이 움직이기도 하고 그거는 사실은 삐띠라기보다는 빠못자에 가깝습니다. 그것도 기쁨의 영역에 속합니다.

 

또는 '우다까 찟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처음 법을 듣는 사람들은 '환희심'이 난다고 그러죠? 여기 스님도 부처님 같이 느껴진다고 막 기뻐하고 환희심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걸 우다까 찟따라고 합니다. 환희심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도 기쁨의 종류입니다.

 

또는 보통 스님들이 많이 하는 게 '아누모다나(anumodana)' 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보통 '회향한다'고 그러죠! 아니면 '축복한다'고 그럴 때 스님들이 공양을 받고 나서 아누모다나 게송을 합니다. 그래서 "이 공양 공덕으로 행복하고 건강해라. 수행 열심히 해라" 하고 하는 게송들이 있습니다. 그런 거 할 때 스님들 마음이 아누모다나, 진정으로 기뻐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회향해주는 것, 그걸 아누모다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난디(nandi)', 그다음에 '나띠', 또 '소마낫사(somanassa)' 그렇게 얘기합니다. 정신적인 기쁨. 정신적으로 막 기쁘고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삐띠(pīti)라고 적혀있습니다. 왜 삐띠여야 할까? 무디따 삼보장가라고 하든지 빠못자 삼보장가라고 하든지 그렇게 안 하고 왜 삐띠라고 그렇게 얘기했을까?

삐띠 삼보장가, '삐띠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명확하게 보였을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삐띠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을 통해서 체험을 해가지고 대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일어났으면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보였을 때,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기쁨이 일어났을 때.

쉽게 말하면 그 기쁨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느낌이 아닙니다.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삐띠 삼보장가의 삐띠는 항상 '행온'에 속합니다. 색수상행식의 행온에 속하지, 수온이라고 하는 느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이 일어났을 때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아세요? 행온은 심장이 토대가 됩니다.

마음에서 뭔가 벌떡벌떡 뛰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마음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아, 이게 내가 삐띠가 일어났는가 안 일어났는가 확인하는 걸 보통 심장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가슴! 가슴을 통해서 확인들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를 들어서 가슴이 지나치게 쿵쾅쿵쾅 뛴다든지 그런 느낌이 있다든지 아니면 가슴에서 찌릿한 느낌들이 있다든지 그러면은 삐띠가 아니고 빠못자구나 하고 판단을 하면 됩니다.

 

삐띠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가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들이 아주 가볍고 평온한 상태입니다. 왜 그럴까? 수행을 열심히 해가지고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가볍고 고요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삐띠나 이런 것들은 항상 선한 마음입니다. 마음의 심소 중에 선한 마음의 심소에 속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하도 많은 것 중에 그렇게 적어놓은 것은 틀림없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부처님이 무디따라고 쓸 수도 있는데, 무디따는 쉽게 말하면 남이 하는 일들이나 남이 행복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나도 기뻐해주고 그리고 축하해주고 행복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보통 무디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거는 꼭 수행이 아니라도 여러분들이 항상 그걸 갈고 닦아야 되는 마음들입니다. 그래서 그걸 사무량심 중에 하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량없이 닦아야 되는 네 가지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삐띠라고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남하고는 관계없이 내 스스로 진리를 체험했을 때 '아, 내가 마음이 속세로부터 완전히 떠났구나' 했을 때 일어나는 기쁨들을 얘기하게 됩니다.

 

여기에 희각지, 정확하게 얘기하면 희정각지가 됩니다. 편의상 그냥 보통 칠각지를 칠정각지라고 안 하고 그냥 각지라고 보통 쓰기 때문에 희각지라고 썼습니다. 삐띠 보장가라고 안 하고, 삐띠 삼보장가라고 했기 때문에 희정각지가 사실은 정확한 풀이입니다.

 

여기에 보면 「탈세간에 성공하는 점검법」이라고 돼있습니다.

탈세간의 기쁨은 일상적인 기쁨이나 일상적인 행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체험함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기쁨이나 행복감을 얘기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니까 대상을 통해서 뭔가 분명히 알았다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만족감, 그게 삐띠입니다. 자기 스스로 '아, 이게 좋구나' 하는 마음이 분명하게 일어나서 '그걸 얻었구나' 하는 걸 얘기할 때 그때를 삐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얻었으면 보통은 어떻게 해요?

얻은 것은 실제적으로는 정신적인 작용으로 얻은 거거든. 마음으로 인해서 얻은 거고, 그래서 행온에 속하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얻었으면 그걸 즐길려고 그럽니다. ‘내 거’, ‘아이고 좋은 거’, 이렇게 해버리면서 그걸 누려버리면 수카의 영역에 속하는 거라. 수온으로 들어가버리게 되는 거라. 느낌을 즐기게 되는 거라.

그래서 보통 삐띠 다음에 수카로 넘어가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려버리면 수온의 영역에 속하고, 그것을 누리더라도 삐띠의 영역을 정확하게 알아서 삐띠로 인해가지고 평온한 마음이나 가벼운 마음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몸이 충만된 상태에서 그걸 누린다고 할 것 같으면 수온으로 안 넘어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행온에서 수온으로 보통 넘어가버립니다.

진리를 체험했는데도 실제로는 진리를 체험한 것들을, 출세간이 아니고 다시 세간으로 돌아와버리는 경우가 되는 거라. 보통 보면 일반인들이 와서 “아유, 스님 나 삐띠 뭐 경험을 했습니다” 하면서 막 이렇게 할 때 전부 다 수온으로 넘어가버린 상태입니다.

 

삐띠는 보통은 한번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고 여러 차례들 일어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법을 듣고 환희심이 일어나는 것도 삐띠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게 꼭 한번 일어난다는 것이 있어요? 그건 아니잖아. 또는 법을 들으면서 그냥 듣기만 했는데 소리는 명확하게 들리면서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그대로 유지가 돼나가고, 그것도 삐띠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정도의 것들은 삐띠의 영역에는 속하지만은 거기서 탁 돌아서고 나면은 삐띠는 달아나버린다는 거라.

안 그러면은 그걸 붙잡고 자기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즐기고 누리려고 하는 거라. 집착이 따라서 있는 행복으로 그냥 돌아가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삐띠 삼보장가 에서는 삐띠 자체만 봤을 때는 분명히 진리를 체험해가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 해서 일어나는 건데, 이게 한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또 일어나지고 또 일어나지고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다 보면은 어느 순간에 그게 집착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어, 일어났네' 하고 대상은 대상대로 그대로 알아차려버리고, 또 하다 보면 그게 좀 더 강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계속하다 보니까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한데 온몸은 기쁨으로써 항상 충만해 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어제 스님들하고 점심공양을 한 게 있었어요. 그때 스님이 느낀 게 뭐냐면 출가한 스님도 자기하고 의견이 안 맞으면, 그걸 기쁘게 그냥 받아들이고 자기 견해는 놔버리고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면 오히려 기쁨을 쭉 누리면서 받아들이게 될 건데, 그렇지 못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하고 의견이 다르니까 “나는 뭐 이거 안 해. 뭐 어떻게 해?” 이렇게 하면서.

그래서 아, 이것도 잘못된 것들이구나. 적어도 기쁨을 누리면서 기쁨이 마음에 항상 충만된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쓸데없는 짓은 안 한다는 거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라든지, 또는 자기하고 의견이 안 맞다고 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배척한다든지 하는 것들. 왜 그러냐면 삐띠가 계속적으로 일어나서 그게 충만된 상태가 될 것 같으면 그거 알아차리기도 바쁩니다. 언제 잡담하고 그럴 시간이 있고, 맛있는 거 즐길 시간이 있고, 언제 뭐 잠 푹 잘려고 하는 시간이 있겠어? 그냥 그대로 좋은 겁니다. 대화를 하고 있으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항상 기쁨이 항상 충만되도록 하고.

기쁨이 충만된다는 것은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더라도 그거 두그릇씩 먹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필요한 양만큼만 먹게 되는 거라.

 

본인이 지금 현재 탈세간에 성공했다 그러면, 탈세간에 성공한 삐띠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하는 습관들을 보면 압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비난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뭔가 두려움이 있어가지고 그것들을 몰아낼려고 한다든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맛있는 걸 먹을라고 한다든지, 이런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질투가 일어난다든지 할 것 같으면 아직은 삐띠가 완성되지 못한 거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경험은 했을지 몰라도 그 경험한 것이 자기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만이 경안각지 쪽으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경안각지라고 하는 것은 항상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이고 가벼운 상태가 그대로 유지가 돼나가는 상태라는 거라.

 

그런데 삐띠삼보장가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전까지는 열심히 했거든. 죽을동 살동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거라. 열심히 노력을 할려고 하고 열심히 또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 하고, 사띠도 하고 해가지고 기쁨들이 일어났단 말이라.

그런 기쁨들이 일어났으면 그 기쁨으로 인해서 또 더 노력할려고 하게 되고, 노력하다 보면 대상들이 분명하게 구별해서 보이게 되는 거라. 아,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고, 이것이 원인이 돼서 요게 생겨나고 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또 사띠를 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해서 칠각지가 역순으로도 계속적으로 작용을 하기도 하고, 다시 또 순방향으로 작용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계속됩니다. 한참 동안 아마 그렇게 해야 될 겁니다.

대부분 삐띠가 일어난 사람들은 처음에 할 때 삐띠로 인해서 행온에서 수온으로 넘어가지게 되지,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계속 가다 보면 수온으로 잘 안 넘어가집니다. 계속적으로 그걸 가지고 칠각지를 오르락 내리락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삐띠는 대상을 열심히 잘 알아차리면 저절로 일어나집니다.

그렇게 일어나지면 노력할려고 하는 마음도 자꾸 생겨납니다. 대상도 분명하게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띠는 어떻게 될까? 사띠는 그러면 옛날보다도 훨씬 더 증장되어 있을까? 커져 있을까? 사람들이 여기서 착각을 하는 거라.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의도적으로 아직까지는, 지금 탈세간에 성공했지만 의도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달아나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의해야 되는 것은 그럴 때 일수록 사띠를 자꾸 대상에 알아차리도록 하는 마음들을 더욱 더 강화시켜줘야만이 사띠가 자연스러워지게 되고 사띠가 증장돼나간다는 겁니다.

 

이게 삐띠가 수행의 끝이라고 할 거 같으면 굳이 그리 안 해도 되겠지.

그런데 실제로는 열반을 체험을 한 거와 마찬가지거든. 삐띠를 체험했으면. 그게 무르익어가지고 자기 것이 돼있으면.

그런데도 사띠는 별반 그렇게 증장되어 있는 느낌은 없습니다. 대상은 언제든지 큰 대상이 나타나면은 탁 바뀌게 됩니다.

 

어제 바람막이, 넥센이라고 하든가, 넥센 공사를 저번주에도 하고 며칠 전에도 하고, 어제 저녁 늦게 완성이 됐어요. 그런데 그사람이 하면서 보니까 컴컴하게 동네에 불이 아무데도 없거든. 실제로 거기에는 전원주택 단지에 사람이 토요일 일요일 날도 안 옵니다. 그냥 집만 지어놔놓고 울산이나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토요일 일요일 날 자지도 않아요. 보면 잠깐 와갖고 있는 듯 없는 듯 하다가 다 가버리고 아무도 없고 하니까 온데 껌껌하거든.

그러니까 그사람이 “스님, 혼자 있기 안 무섭습니까?”

“난 혼자있으니까 더 좋구만은.” 그런 거라.

그게 왜그러냐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도달하면 두려움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가 누구든지 죽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삐띠가 일어나 있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적어도 그런 두려움은 완전하게 제거되지는 않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혼자 있을 때 해꼬지 당할 두려움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많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게 세간적인 생각하고 출세간적인 생각하고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왜 무서워?” 내가 이랬거든. 그러니까 누가 와서 해꼬지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거라. 글쎄 뭐 해꼬지하면 해꼬지 당해야지 뭐 별수 있나. 뭐. 그래서 그 동네엔 전부다 세콤을 달아놨어요. 우리도 이사해서 처음에는 세콤이 있었기 때문에 그거 치우라고 그랬어요. 그거 세콤 가지고 내 몸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거고, 그 집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돈만 괜히 나가게 되니까 치우라고 그랬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살아가면서 적어도 열반을 체험을 한다. 아니면 세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마음을 분명하게 안다. 할 거 같으면 적어도 그런 두려움들은 없어야 됩니다. 급작스럽게 뭔가가 닥친다든지 특히 길을 건너가는데 저쪽에서 차가 확 온다, 그러면 두렵기 때문에 엄마야 하고 고함을 지르는 거라.

그런 두려움이 없으면 그대로 그냥 바라보면서 자기 할 일 들을 하게 되는 거라. 세간으로부터 벗어나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그 영역의 딱 기준점이 뭐냐면 이 삐띠 삼보장가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삐띠가 얼마만큼 성숙했느냐? 경험해봤다 하더라고 그게 실제적으로는 삐띠가 아니고 빠못자의 영역에 속하는 거라.

기쁨은 다섯 단계로 보통 나누어진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앞의 세 단계는 전부 빠못자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행온으로써의 기쁨들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거기서 만족해버리고, 수온으로 즐거움으로 넘어가버린다는 거라.

 

한 번 여러분들 조용히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수행에서 얼마나 많은 기쁨들이 일어났습니까? 수행뿐 아니라 여러 가지 것들로써.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여러분들 사띠가 깊어졌는가? 아니면 두려움이 사라졌는가? 그러면 아직은 그것을 봤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삐띠 삼보장가는 아니다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더 열심히 자꾸 해야 되겠다' 하고 판단들을 하게 됩니다.

 

칠각지 부분에서 사띠부터 해가지고 쭉 진행되는 여러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면은 삐띠는 금방금방 생겨납니다. 금방금방 생겨나가지고 또 삐띠의 단계들을 차례대로 밟아가서 결국 자기 것이 돼야 되는 겁니다.

안 되면 어떻게 할까? 아직 사띠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택법각지가 뭔지, 정진각지가 뭔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경험을 안 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삐띠를 경험 안 하는 것은 아니죠? 어떨 때 경험합니까? 아까 얘기했죠?

 

법을 들으면서 환희심이 일어난다. 그거는 왜 그렇게 된 거라? 누군가가 따뜻하게 "괜찮아" "어! 그래 잘하고 있어" 이렇게 위로만 해줘도 '내가 그래도 아직은 잘하고 있구나' 하고 마음이 안정되니까 기쁨이 일어나질 수가 있습니다.

또는 스스로 돌아봐가지고 어, 그래도 내가 전에는 대상만 만나면 벌떡 성질나고, 벌떡 욕심이 일어나고 했는데, 지금은 보니까 그렇게 많이 안 일어나고 또 그걸 스무스하게 잘 넘길 수가 있다. 자기 상태를 앞과 뒤를 돌아봄으로 인해가지고 '어, 그래. 그래도 많이 발전했어' 이런 마음이 들면 삐띠가 일어날 수가 있는 거라.

 

칠각지는 정확하게 그 단계를 밟아 올라가 가지고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게 안 될 때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 「삐띠 삼보장가가 일어나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해가지고 쭉 예를 들어 놓았습니다.

붓다, 담마, 상가 그다음에 계율,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누빳사나(anupassanā)' 따라가면서 지속적으로 그것을 '아눗사띠(anussati)' 한다. 사띠하고 빳사나-관찰한다는 거라.

그러한 방법들 열한 가지 방법들은 나중에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거는 뭐냐 하면, 열한 가지 방법 중에서 앞에 있는 예닐곱 개는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본인은 그게 기쁨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그게 기쁨은 아닙니다. 그것은 수온으로서의 기쁨입니다. 쉽게 말하면 소마낫사 입니다. 그런 것들로는 삼매가 일어나지도 않고 실제적으로는 찰나적인 것들도 안되고, 그런데 비슷하게는 됩니다. 기쁨 같은 비슷한 그런 현상들이 비슷하게는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에서는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게 굉장히 유용하게 쓰입니다.

비슷하게 사마디에 있는 것처럼 되는 상태가 실제로는 사띠하기가 가장 적당한 때입니다!!!

부처님을 회상하면서, 담마를 회상하면서, 삼보를 회상하면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 같은 마음이 됐을 때 대상을 한번 보십시오.

대상이 아주 명쾌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대상을 뭔가 붙잡고 밀쳐내고 하는 것이 없이 깨끗하게 대상이 드러나집니다.

그럴 때 빨리 사띠를 해야 됩니다, 대상을.

호흡이든 걸음걸이든 뭐든 간에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사띠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사띠를 함으로 인해가지고, 다시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그러면 그때 다시 실제적으로 삐띠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겪어야 되는데, 그걸 자꾸 사람들은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아, 이게 삐띠라고 착각을 한다든지 아니면 삐띠가 좋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주석서에는 "육근, 육경에 대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서 집착이 일어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실제로는 그 집착이 가로막아가지고 해탈로 나아가지를 못하는데 대부분 육근, 육경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 그게 삐띠라고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보면 느낌으로 넘어가서 그것을 즐기고 있는 집착입니다.

 

그래서 기쁨에 대한 삼보장가의 다섯 가지 삐띠 종류 중에서 앞에 세 가지는 토대가 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실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거라.

나중에 뒤에 두 가지 부분 항상 충만돼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내가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칠각지는 그것이 완성되어 나갈 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고, 그다음 단계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상황이 됩니다.

경전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기쁨이 일어나면 경안이 일어나지고, 경안이 일어나지면 수카가 일어나지고, 수카가 일어나지면 대상을 분명하게 봐서 해탈·열반에 이른다"고.

말은 쉽지만 삐띠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경안으로 넘어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차라리 낮은 단계의 삐띠들에 대한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서 대상을 그래도 끊임없이 알아차리려고 하는 마음들만 있으면 오히려 전자보다도 훨씬 더 나은 효과들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희각지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해야 됩니다. 대상을 의도적으로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하시 스님 같은 경우에도 "명칭을 붙이라" 하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대상에 대해서 "그것들을 떨어뜨려서 보라" 하고 얘기도 하고, 어떤 스님들은 그것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보라" 하고 얘기를 하고,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을 하는 겁니다.

실제적으로는 그것들은 사띠를 기르기 위한 겁니다. 의도적으로 사띠가 있게끔 만들어주는 방법이라는 거라. 그러한 방법들은 다 기술적인 부분에 속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것이 맞다 어떤 것이 틀리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 봅시다. 삐띠의 종류에 다섯 가지 적어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쿳디까- 삐-띠 「작은 기쁨(khuddikā pīti)」

두 번째는 카니까- 삐-띠 「찰나적인 기쁨(khaṇikā pīti)」

세 번째는 옥깐띠까- 삐띠 「연달아 일어나는 기쁨(okkantikā pīti))」

이 세 가지는 전부 빠못자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네 번째는 웁베가- 삐-띠 「흥분되어 날뛰는 기쁨(ubbegā pīti)」

다섯 번째는 파라나- 삐-띠 「충만된 기쁨(pharaṇā pīti)」

이 두 가지는 실제적인 기쁨의 삼보장가가 완성되어 나가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삐띠가 향상되면 향상될수록 몸과 마음은 어떻게 될까?

가벼워지고 예민해집니다! 예민해진다는 것은 대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바로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민하다고 할 것 같으면 신경이 예민하다고 자꾸 착각을 하는데, 대상에 대해서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가벼워지면서 그런 민첩함, 기민함들이 항상 마음에는 있게 돼있습니다. 그게 삐띠가 완성되어 나갈 때 그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삐띠 삼보장가는 점점 더 완성되어 나간다 생각을 하시면 딱 맞습니다.

 

그다음에 「삐띠를 기르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맨 첫머리에 걸 사람들은 자꾸 빼먹습니다.

「지혜가 있는 주의력이 삐띠를 가져온다」 실제로는 요거 하나입니다.

삐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심소의 영역에 속합니다. 선심소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또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하고, 그리고 그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어디에 붙잡히지 않는 상태의 기쁨을 얘기합니다. 그게 지속하다 보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은 지혜의 영역입니다.

지혜의 열여섯 가지 종류 중에 하납니다. 그런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서 사띠가 분명하게 있는 것, 그게 기쁨을 불러오게 되는 건데, 요거는 자꾸 빼먹어버린다는 거라. 이게 실제적으로는 중요한 건데, 여기에 주석서에도 분명하게 얘기를 했지만 "삐띠를 가져오는 요인은 다만 한 가지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지혜가 있는 주의력이다."

 

실제로는 요겁니다. 밑에 열한 가지 방법은 부차적인 것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일어나는 현상과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자꾸 키워야 됩니다.

대상은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것 같으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붙잡지도 않고, 붙잡지 않으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어지게 되는 거라. 그리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조건따라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죽음을 맞든지 어떠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라.

 

대상과 마음도 그와 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고,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고, 그 대상도 하나가 일어나고 하나가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을 더욱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알게끔 됩니다.

이게 더 강해진다는 거라. 그게 지혜라는 거라.

 

그런데 그 지혜가 있는데 왜 사띠해야 될까?

그런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띠는 많이 증장돼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띠를 어떻게든 자꾸 일으켜가지고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 대상은 반드시 지혜가 있도록,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랬을 때 삐띠는 반드시 생겨나게 되는 거고, 그 삐띠에 붙잡혀가지고 다음 단계에 넘어가지 않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게 안 될 때, 밑에 얘기한 열한 가지 방법들을 쭉 적어놨습니다.

경전 곳곳에는 그런 것들을 많이 적어놨습니다.

“스님 법문 듣고 싶은데 스님 이번 주에는 제가 시간이 안 나요. 그래서 못갑니다.” 삐띠가 개발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가능할까? 여기 올 수가 없는데?

올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 같죠?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해봤죠? 삐띠가 일어나니까 몸이 붕붕붕붕 뜨는 것 같은 느낌들, 그리고 땅을 디디고 걸어가더라도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뒤뚱뒤뚱해지는 것, 초보 단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런데 그게 강해지게 되면 삐띠가 충만되게 될 것 같으면 그냥 붕 떠버립니다, 몸들이.

경전 곳곳에는 부처님 법을 듣고 싶은데 내가 지금 갈 수 없는 상황인데, 날아가지고 부처님 법을 듣는 자리에 나타났다, 그런 것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삐띠가 완성돼서 네 번째, 다섯 번째가 될 때는 그게 충분히 가능해집니다.

괜한 핑계 대지 말고, 또는 여러분들이 지금 수행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다섯 가지 장애가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아주 기민하고 가볍게 되어있는 상태, 그 상태에서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 그것만이 정답이다!!! 하는 겁니다. 알겠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