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3. 정진각지(精進覺支) 후반부 (20170908. 대구)

담마마-마까 2021. 7. 10. 09:06

https://youtu.be/5J5dSZvdwRg

 

3. 정진각지(精進覺支) 후반부 (20170908. 대구)

 

오늘은 칠각지 중에서 정진각지 후반부 부분입니다.

사실은 저번에 정진각지를 하면서 정진각지에 대해서는 다 얘기한 것입니다. 순조롭게 사띠 삼보장가부터 해서 담마위짜야로 인해서 위리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고,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에 개발하는 방법에 대한 것을 분리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은 부언 설명 같이 들리겠지만 어쨌든 정진각지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보통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이 잘되면 생겨나는 병 중에 하나가 뭐냐면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경우,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내가 이 과정을 이수했다고 하는 걸 증명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게 자칫 잘못하면 상업적으로 이용해가지고 조계종과 마찬가지로 1급 포교사 자격증, 2급 포교사 자격증 같이 자격증을 받을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 지도과정 이수했다는 수료증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받을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들 대부분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어디에서 막혀가지고 그러느냐 하면, 정진각지에서 막혀가지고 그렇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분명하게 대상들이 변하고 하는 것들이 보여지거든. 그래서 수행이 참 잘되고 있다고, 아! 인제 나는 수행 잘하고 있다고. 또 거기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서 남에게 얘기를 하면서 또 그것들에 대해서도 지도를 해줄 수도 있고, 이렇게 되면 생겨나는 병이 거기서 수행을 더 빨리 진척해나가려고 하지를 않게 됩니다.

 

그런데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분들은.

그게 수행의 끝이 아닌 것은 본인이 더 잘 압니다.

수행이 만약에 잘 되어나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런 장애들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면 뭔가 맛있는 게 있다 그러면 그 특별한 그것만 먹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 거라. 또는 요즘 스님은 거의 죽으로 살아갑니다. 어제, 그제였죠? 스님들이 와가지고 스님들하고 얘기하고 이러다 보니까 힘이 딸리는 거라, 나중에 되니까. 그래서 스님들 보내고 나서는 힘이 거의 소진이 돼가지고 앉아가 있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더라고. 그래서 그냥 가만히 앉아가지고 한참 동안 수행을 하면서 몸의 기력을 회복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일반인들 같으면 그럴 경우에는 도저히 힘이 딸려가지고 안되겠다, 밥 좀 먹어야 되겠다 해서 밥을 아니면 죽이라도 먹어야 될 거라.

 

그런데 수행이 잘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런 마음은 안 일어나야 되는데, 분명히 현상에 대해서는 무상·고·무아로써 보고 있는데, 그러한 마음들은 때때로 일어나고 아니면 수시로 불쑥불쑥 일어나고 있다는 거라.

 

그럴 때 주의해야 되는 것이, '! 내가 아직은 정진각지를 더 일으켜야 될 때다' 하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참 그럴 때 유용한 게 스님 법문을 가끔씩 그럴 때마다 듣는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수행에서 '아! 결코 지금 내가 해나가고 있는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다시 일으키도록 만들어준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가지고 그걸 극복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수행에서 대상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내는 거라. 마음이 그 대상을 못 쫓아가는 거라. 그전에는 그냥 단순하게 호흡이면 호흡 아니면 걸음걸이면 걸음걸이 그것을 할 때는 변해가는 것이 보였는데, 굉장히 많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다 보니까 그걸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리는데, 그래서 그걸 알아차릴 때 다른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에 오롯이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것이 변하는 것들은 보지를 못하는 거라.

 

예를 들어서 빠른 속도로 경보로 걸어가면, 달리듯이 걸어가는데 무상한 성품이 보여야 되는데 안 보이고 있는 거라. 대상이 많기 때문에. 그럼 내가 좀 더 노력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지, 으레 그런 것이다 하고 만족해버릴 것 같으면 수행은 거기서 더 발전을 못해나갑니다.

그게 인제 첫머리에 적어놓은 겁니다.

 

뭔가 자기 자신에게 좀 위로를 받고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럴 때는 반드시 여기서 말하는 정진각지를 일으키게 하는 열한 가지 방법이나, 아니면 정진의 요소들 중에 어떤 요소들이 지금 나에게 있고 어떤 요소들이 없는가 하는 것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지금 얘기하는 것이 그걸 중심으로 해서 써진 것들입니다.

그래서 좀 더 레벨업 시켜볼려고 할 때 머리에서는 알고 있는데 그것이 원활하게 잘되지 않을 때, 그럴 때 정진각지, 더욱더 정진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더욱더 정진해나가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해보니까 어때요? 고요해지면 더 번뇌들이 많이 일어나죠! 훨씬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은 그걸 빨리 끊어낼려고 하는 생각들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지, 아! 이거 수행하니까 너무 번뇌가 많다 해가지고 번뇌를 가볍게 여겨버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사라지는 것을 완전히 보지 않고 그냥 또 대충대충 넘어가버리면 끊임없이 그러한 번뇌들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은 주의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거라.

 

만약에 그럴 경우에 정진각지가 일어났으면 어떻게 될까?

번뇌가 끊임없이 일어날 것 같으면 우선 마음이 귀찮습니다. 그럼 귀찮으면 아마 대충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으로 흘러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도 그걸 끝까지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으로 진행이 되어지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가 될 겁니다.

져버릴 것 같으면 그냥 대충 '일어났네' 하고 놔버리고, '일어났네' 하고 놔버리고 이런 식으로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대충대충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것들을 끝까지 계속 알아차려서 사라지는 것까지를 보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굉장히 괴롭습니다.

사라지는 것을 보자마자 또 다른 게 또 일어나는 것이 보이거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볼려고 하니까 굉장히 힘이 드는 거라.

 

그런데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육체적으로 힘든 건 아니죠? 그럴 때는 육체적으로 힘든 건 없습니다. 이미 몸은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져 있는데, 마음이 그걸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괴롭고 힘든 겁니다. 그 사실을 알면 마음이 괴로운 것은 빨리 바꿀 수가 있습니다. 몸이 힘든 거는 어떨 때는 어쩌지 못해갖고 쉬어줘야 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는데, 마음이 괴롭고 힘든 것은 마음을 전환시켜 주는 것이 훨씬 수월합니다.

 

! 이렇게 괴롭고 힘든 것이 마음이 괴롭고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으면 마음을 오히려 더 편안하게 가집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내가 뭐 그것으로 인해서 육체적으로 괴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내가 받을 수 있다는 거라. 그건 왜 그러냐면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도 마찬가지지만,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한결 수월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번뇌들을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돼야만이 정진각지가 지속적으로 쭉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어떻게든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마음을 막 갖다붙이려고 합니다. 적어도 대상하고 떨어지지만 않으려고 막 이렇게 하다가,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순조롭게 돼나가고 나면 갖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면 그 장애들이 많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극복해나가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대상을 처음에 알아차릴 때는 노력하는 힘들이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다가, 어느 정도 수행 장애도 좀 극복해나가고 순조롭게 되어나가면, 거기서 번뇌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면서 그 상황에서는 그걸 지속해나가는 힘이 없어져버립니다.

 

사실은 그때도 앞에 거와 마찬가지로 정진각지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할려는 마음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럴 때는 그것이 '마음의 괴로움이다' 하고 마음을 가볍게 가지고, 그리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려는 마음을 가질 때, 그리고 대상을 떨어뜨릴려고 할 때, 그 번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변하는 것들이 탁 보여버립니다.

그럴 때 이 지속할려고 하는 노력의 힘들이 계속적으로 있게 돼나갑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이 너무 힘들다는 걸 압니다. 안 나타나면 좋은데, 번뇌들이! 그런데 번뇌들이 안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때 사실은 필요한 게 어느 정도 그전부터 확신하는 힘들이 어느 정도 키워져나갔으면 자기 수행에 대해서 꿋꿋하게 계속 지속하는 노력의 힘들을 유지해나갈 수가 있는데, 확신하는 힘들이 아직 없을 때는 계속 힘들어져 버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할게요.

확신하는 힘들을 키울려고 할 거 같으면,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그게 뭐냐면,

 

법을 자주 들어야 됩니다. 그것도 바른 법을 들어야 되는 것이지, 자꾸 엉뚱한 소리하는 그런 법은 안 되는 거고, 경전에 근거하고, 그리고 그게 수행에 도움이 되고, 또 내 생활을 바르게 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법문들이어야만 됩니다. 바른 법을 자주자주 들어야 됩니다. 법을 자주 듣는 외부적인 요인이 하나 있고,

또 내부적으로는 수행을 통해서 무상하게 변해가는 성품을, 그것이 얕은 앎이라고 하더라도 무상하게 변해가는 성품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이 두 개가 딱 결합하게 되면 확신이 탁 들게 됩니다.

 

확신은 한번 탁 들고나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확신이 그때는 얕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그런 것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확신은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아, 내가 그냥 경전 공부나 법문 듣는 것만으로써 만족해서는 안된다. 또 그걸 무시해버리고 수행만으로써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자꾸 조화롭게 해나가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깊게 확신이 뿌리를 내리게 될 거 같으면 그 힘으로 인해서 정진하는 힘이 지속하는 힘들을 지탱해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수행이 굉장히 괴롭고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하는 것들을 알게 될 때 자꾸 포기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아, 난 아직 확신하는 것들이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다’ 하고 자기가 분명하게 반성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들이 뒷받침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줘야 됩니다.

 

• 확신하는 힘을 키우려면

노력을 지속하는 힘이 있을려면 확신하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1. 법을 자주 들어야 됩니다.

2. 무상하게 변해가는 성품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어느 순간에 그 과정을 탁 겪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수행이 굉장히 순조롭게 돼나갑니다. 내가 이것들을 극복해나갔다는 마음이 들어버리면은 마음은 기쁨으로 확 바뀌어버립니다. 그전에는 억지로 하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해나간다 하는 거고, 자연스럽게 해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백팔십도 바꼈다는 겁니다.

 

가끔 여러분들 그런 얘기들 하죠. 사람 안 바뀐다고 그렇게 얘기하죠?

바뀝니다! 사람은 바뀝니다. 사람의 성품이 바뀔 때가 정진각지에서 그다음에 희각지로 넘어갈 때, 기쁨의 각지가 일어나고 할 때, 그 기쁨의 각지가 무르익게 될 거 같으면 마음이 확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해서 연연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애달파 하지는 않게 된다는 겁니다. 또 마음이 나중에 가면 또 바뀌어져버립니다. 어쨌든 그렇게 될 때까지 노력해나가는 것이 또 하나의 정진의 힘들입니다.

그 기쁨의 맛을 누리다가 나중에는 아, 이것이 내가 완전히 번뇌로부터 벗어났구나 하는 것들을 체험하게 되면 또 다른 정진의 힘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정진각지는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택법각지도 폭이 넓듯이 정진각지도 굉장히 폭이 넓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언제든지 정진할려는 힘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해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힘이 없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하는 힘들도 떨어지게 돼있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지혜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보통 팔정도를 다른 걸 다 빼고 세 가지만 중요한 걸 얘기하라 할 거 같으면 보통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바른 견해가 확립 돼있는 것, 사띠 해나가는 것, 그리고 거기서 노력하는 힘들이 있는 것.

이 세 가지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있어야 됩니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야만이 바른 지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마만큼 정진각지는 중요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 내가 수행 잘하고 있다, 남에게 인정을 좀 받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든다 할 것 같으면 지금 적어놓은 교재들을 참조를 해서 극복을 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43페이지 위에 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많이 하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더 강하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영양분이 된다 하는 얘기입니다.

 

'아람바 다뚜(arambha dhatu)-시작하는 요소'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놓치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벗어나는 요소라는 것은 닉까마 다뚜(nikkama dhatu)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힘들이 일어나야 되는 거고.

그리고 분발하는 요소-빠락까마 다뚜(parakkma dhatu) 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내가 기쁨을 맛보고 그다음에 자유의 맛을 맛볼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힘들을 받쳐주는 요소, 분발하는 요소 지속하는 요소가 일어나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정진을 얘기할 때 이 세 가지를 보통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하는 방법 11가지가 있습니다.

 

11가지의 법이 있어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합니다.

첫 번째, 악처 등의 두려움을 반조하는 것,

두 번째, 이로움을 보는 것,

세 번째, 가야 할 길의 과정을 반조하는 것,

네 번째, 탁발한 음식을 공경하는 것,

다섯 번째, [정법]의 유산의 위대함을 반조하는 것,

여섯 번째, 스승의 위대함을 반조하는 것,

일곱 번째, 부처님의 가계(家系), 태생의 위대함을 반조하는 것,

여덟 번째, 동료 수행자의 위대함을 반조하는 것,

아홉 번째, 게으른 사람을 멀리하는 것,

열 번째, 부지런히 정진하는 자를 가까이하는 것,

열한 번째, 그 정진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 (SA, īi. 158)

 

이렇게 열한 가지가 주석서에 써져있습니다. 그 설명에 대한 것들이 뒤에 쭉 적어놨습니다.

 

정진의 요소는 시작부터 해서 마지막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것들니다.

그럼 그 사이에 얼마만큼 내가 무던하게 견디면서 지속해나가야 되겠어요? 계속 노력을 해나가야 되겠어요?

그럴려면 끊임없이 인내해야 되는 거고, 또 상황 상황에 맞게끔 내가 만족하는 것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항상 다른 걸 바라게 됩니다. 다른 것을 바라는 순간 그것은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은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지, 실재하지 않는 것 관념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재가 벽에 붙어있다고 해가지고 그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거라. 여러분이 읽고 그것이 여러분들 것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교재를 내가 아무리 쌓아놨다 해가지고 그것이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거라. 상장을 아무리 가지고 있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그 사람을 대변해주지는 못하는 거라.

그래서 실재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를 자꾸 바라게 될 거 같으면 마음은 자꾸 대상으로부터 벗어난다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해나가는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괴로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느낌을 관찰하면 느낌도 괴로운 느낌 밖에는 잘 관찰이 안 되어져나갑니다.

몸을 관찰하더라도 몸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을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고요하고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들이 자꾸 보입니다.

대상들이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들도 힘들게 느껴집니다. 힘들면 보통 사람들은 수행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포기를 할려고 해버립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마음으로 넘어가는 것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정진하는 힘들이 끊임없이 그렇게 되어가고 일어나야 됩니다. 그럴 때 만약에 수행 안 하고 도망갈려는 마음이 있어도 자꾸 옆에서 '야! 같이 수행하자' 하는 도반이 있든지, 아니면 그럴 때마다 법문을 자꾸 들으면서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주든지, 아니면 대상을 자꾸 알아차리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 그래도 이것이 참 의미있는 일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든지, 어떤 요소들이 자꾸 있어야만이 정진할 수 있는 힘들을 지속시켜나갈 수밖에 없는 거라.

 

힘들 때 녹초가 된 마음의 버팀목은 정진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정진하는 것에는 그 수행을 지지해주고 지탱해주는 기능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수행을 계속적으로 해나가지 못할 때는 정진하는 힘이 없습니다. 정진하는 힘이 없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까지 도달했다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지금 7페이지 하다가 이거 다 하지도 못하고 끝나겠다, 그냥 뛰어넘어버릴게, 한번 읽어보세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 옛날 수메다 였을 시절에 그런 원을 세웁니다.

내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서 이 많은 사람들을 그 고통의 바다에서 빨리 구해주기를 하는 원을 세웠는데, 꼭 대승 불교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죠?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럴 때 보살이었을 때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사람들도 그와 같은 원들이 기억이 납니다.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내가 이 사람들을 지옥으로부터 전부다 구원해주겠다는 마음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일어나지는 않고 그대신에 자동적으로 그런 일을 내가 실제 행하게 됩니다.

 

그건 왜 그럴까? 과거생 보살일 때 내가 저 사람들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원,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결정심입니다. 내가 이런 결정심을 세워가지고 결정심이 무르익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고, 또는 끊임없이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오는 것, 이런 것들이 원인이 돼가지고 바라밀이 완성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그 바라밀들, 열 가지 바라밀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삼십 가지 바라밀이 됩니다. 그 바라밀들이 완전히 성숙돼서 완성이 되어나갔을 때 부처로써 생기는 원인이 확립이 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원인을 지어놓았을 때, 그리고 그 원인이 바탕이 돼가지고 나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는 것은 함부로, 내가 지금 현재 이생에서 아무것도 지어놓은 것이 없다, 아니면 과거생에서 그것을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 모르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고 했을 때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사람들이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동남아 사람들이 '아이구, 내가 지금 현재 꼬라지를 보니까 아직은 부처되기엔 힘들다' 그러면 지금 해야 되는 것은 언젠가는 내가 깨달음을 이루어서 부처가 되기를 하는 원을 세운다든지, 부처가 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런 바라밀을 쌓기 위해서 내가 지금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그다음에 선정에 들려고 노력하고 하는 그런 바라밀들을 자꾸 쌓는 거라.

그것들이 나쁘다고 자꾸 탓을 하면 안됩니다. 그것들이 완성되는 것이 원인이 돼야만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들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원인·결과로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들이고, 그 결과들이 있게 되면 당연히 그다음에 생겨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러한 공덕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지?' '어, 과거생에 내가 많은 사람들을 괴로움으로부터 구해주려고 하는 원인이 있었구나' 아니면 '내가 이러한 바라밀들을 쌓아왔구나' 하는 것들이 떠오르게 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히 그것들에 대해서 행을 하게끔 됩니다.

 

그걸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그럽니다. 어떤 부처님이든 부처님이 되면 그 부처님의 공덕들이 있습니다. 그거는 쉽게 말하면 자동적으로 법을 설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일들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마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분들이 법을 전해 받고 법을 이해하고 있는 법을 전해주는 부처님이라는 분은 그것만 생각하더라도 진짜 가슴이 메어지는 부분입니다.

힘이 떨어졌을 때는 적어도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냥 '아!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명호만 무조건 외워야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식으로 부처님에 대해서 숙고를 딱 하게 될 것 같으면 '어,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더욱 더 수행을 하든지 바라밀을 더 쌓든지 뭔가 자꾸 바른 방향으로 해나갈려는 힘들이 생겨나가게 됩니다.

그게 정진의 힘들을 일으켜주는 것들입니다.

 

정진은 지탱해주는 힘들도 있고, 일으켜주는 힘들도 있고, 그것을 지속시켜주는 것들도 있고, 그것들이 나중에 완성되는 힘들도 있습니다.

그게 인제 여러분들이 정진각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되는 근거입니다.

 

44페이지 하다가 말아버렸는데, 더욱 더 조금씩 노력을 해야 됩니다.

45페이지 보면 "번뇌는 습기와 같은 것이다" 하고 예를 듭니다.

대장장이 아시죠? 쇠를 불에다 달구어가지고 그것을 두드려서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주게 되는 것들입니다. 왜 그렇게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질까? 유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드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은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경직되어 있는 부분 없습니까?

누군가 내한테 나쁜 말을 했다, 콱 화가 일어났다, 경직돼있기 때문에 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부드러울 거 같으면 그 화에 대해서 적어도 화로써 대처하질 않게 되고, 또 남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거고.

그러면 아직은 나에게 쇠를 달구어질 만한 정진의 힘들이 아직 없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부드러워져야만이 그것을 원하는 형태로써 만들어줄 수가 있습니다.

 

그게 정진도 그와 같다는 겁니다. 정진의 힘이 강하면 마음은 고요해질 뿐 아니라 부드러워지고 가벼워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도 그것을 붙잡을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다른 대상이 일어났으면 즉각적으로 그 대상으로 가서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지, 있는 대상에 머물러 있지는 않게끔 됩니다.

말은 쉽지, 그게 쉬운 것은 아니죠! 이렇게 달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조금 있으면 점심 공양 하실 거죠? 공양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한번 먹어보십시오. 맛있고 맛없고 하는 것들이 있는지 없는지. 만약에 맛있고 맛없고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나는 아직 감각적인 욕망에 취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맛있고 맛없고 하는 것을 먹다 보니까 어느 순간 '어? 내가 왜 이러고 먹지?'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났다 그러면 그 감각적인 마음이 욕망의 위험을 보게 되는 거라. '어,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런 위험을 봐야만이, 내가 지금 아직은 맛있고 맛없는 것들을 자꾸 구별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에이, 그냥 밥 비벼먹자' 하면서 비벼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것들로 인해서 밥을 비벼먹으니까 당연히 그런 감각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부분입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위험성을 분명하게 보고,

그것들의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

이 세 가지가 있어야만이 그것들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더라도 그와 같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 대상이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봐야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분명하게 봄으로 인해서 변하고 있는 것들을 봐야 됩니다. 변하는 것들이 보여지면은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끌어당기고 밀쳐내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수행은 이럴 때마다 노력하는 힘들이 분명하게 생겨납니다.

'맛있다, 맛없다'는 걸 알게 될 때도 정진하는 힘들이 필요한 것들이고, 아! 이것들의 위험을 보게 될 때도 정진하는 힘들은 필요한 것이고, 그것들을 벗어나는 단계에서도 정진하는 힘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고, 완전하게 벗어났을 때도 정진하는 힘들이 분명하게 존재를 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이 정진의 힘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수행이 일정한 궤도에 올라서 아! 내가 다시는 더 나쁜 상태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판단될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힘들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판단들을 자꾸 하려고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다하지 못하고 여기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프린트물로써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