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3. 정진각지 전반부-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20170617. 서울)

담마마-마까 2021. 7. 8. 08:52

 

https://youtu.be/iq8Eea_dFGo?si=1Xuw6_lylgmdqjCS

 

3. 정진각지 전반부-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20170617. 서울)

 

오전에 할 거는 정진각지(精進覺支) 전반부 들어가고, 다음 번에 한 번 더 정진각지 후반부를 하고, 오늘은 정진각지 중에서 수행에서 순조롭게 잘 이루어져 나가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서 정진각지를 설명을 하겠습니다.

 

위리야 삼보장가(viriya-sambojjhaṅga)죠! 위리야 뜻이 뭐라?

보통 노력, 정진이라고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냥 뭔가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뭘 하겠다 하고 탁 결정을 내리고 나서 그걸 할려고 마음을 움직여가지고 해나가는 것, 그 에너지를 위리야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는 어떤 사람은 큰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약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진하는 힘이 약하면 중간에 포기를 해버릴 거고, 아니면 아예 약한 사람은 할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 그런데 그런 힘이 강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해탈에 이를 때까지 끝까지 계속해나갈 것이고, 그럴 겁니다.

 

빨리어 용어가 참 묘합니다. 비슷하게 '정진'이라는 단어로 쓰는 것들이 몇 개가 쭉 있습니다. '빠리깜마(parikamma)' 부터 시작해가지고 '타마(thāma)', 그다음에 '브야빠다(byāpād)'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정진'을 뜻하는 단어들인데 각각의 의미는 다 틀립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라자왕사님이 히말라야를 등반을 한다, 불가능하죠?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등반하려고 노력한다 그럴 때 용어를 쓸 때는 위리야(vīriya)나 브야빠다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아니고 '빠리깜마(parikamma)'라는 용어를 씁니다. 불가능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뭐라도 해볼라고 할 경우에는 쓰는 용어가 따로 있고,

또는 일상생활에서 그게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것들에 대해서 줄기차게 뭔가를 할려고 할 때 쓰는 용어가 '타마(thāma)'라는 용어가 따로 있고,

 

그리고 여러분이 흔히 알고 있는 팔정도에서 '삼마와야마' 라고 그러죠!

바른 정정진이라고 할 때는 위리야라는 용어를 안 쓰고 '와야마(vāyāma)'라는 용어로서 씁니다. 그 용어를 쓸 때는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를 구분해가지고, 악한 것은 안 할려고 노력하고 선한 것은 더욱 할려고 노력하고 이럴 때, 그래서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일으키게 될 때 이럴 때는 '와야마(vāyāma)' 라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에 얘기했지만 여기서 위리야(vīriya)라고 하는 것은 아비담마에서는 그걸 동타심소라고 얘기합니다. 선한 것도 일어나지고, 악한 것도 일어나지고.

악하게 마음을 먹어서 위리야가 일어날 것 같으면 한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위리야를 일으키면 한없이 선한 일들을 계속하게끔 되는 거고, 그럴 때 이 '위리야(vīriya)'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런데 칠각지에서 쓰는 위리야 삼보장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의미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수행을 해봤으니까 조금 이해를 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택법각지까지 하는 거 참 힘들죠? 염각지부터 택법각지까지 하는 걸 힘들다 하고 아마 느꼈을 건데, 택법각지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실제도 그렇고.

그런데 택법각지를 하고 나면 이제는 수행이 재미가 좀 있어지거든. 무상한 성품도 보이고 또 변하는 것들이 보이고 하면 재미가 납니다.

 

그래서 수행을 더 하고 싶어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다른 일 하는 것보다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아. 예를 들면 진짜 해야 될 일조차도 귀찮게 생각이 들고 그것 말고 계속 수행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생기는 게 이 '위리야 삼보장가(viriya-sambojjhaṅga)' 입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이 잘 되어나가서 그대로 진행되어 나갔을 경우에는 택법각지 다음에는 반드시 정진각지가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주의해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순조롭게 각지들이 이루어져 나갔을 경우에 조심해야 되는 게, 정진각지가 일어나서 아! 열심히 수행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해나가는데, 거기에 중간에 뭐가 탁 생겨나느냐 하면, '! 내가 이 정도에 이르렀는데 남이 나를 안 알아줄까' 하는 마음이 탁 생겨납니다. 안 그러면 자기의 상태들을 남에게 내보일려고 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건 어떻게 돼요? 현재를 지금 알아차려야 되는데, 분명하게 사띠해야 되는 것인데, 사띠를 하는 마음하고 그 대상하고 사이에 공백이 생겨버립니다. 거기에서 자꾸 망상이 들어오는 거라.

그래서 '나 좀 알아줘' 그리고 '나는 무상한 것을 알고 있어' 하는 마음이 들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한동안 그렇게 빠져버릴 수가 있습니다. 수행은 재미는 있는데. 그래서 수행을 하면 무상한 성품도 알아지고 하는데 그 이상이 넘어가지를 않게 되는 거라. 정진각지에서.

 

실제로는 알고 보면 정진각지가 일어났는데 힘이 약하니까 그게 매 순간 사띠로써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 간단한 부분인데 그걸 못하고 '음 재밌어' '나는 열심히 잘하고 있어' 하는데 그냥 빠져버리니까 문제가 생겨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택법각지에서 정진각지로 넘어가고 나서 그것이 순일하게 잘되어나가는 경우들, 각지들이 차례로 일어나는 경우에는 그런 문제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우짤꼬?

사띠도 잘 안되고, 택법각지도 잘 안되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정진각지를 못 일으켜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더 열심히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택법각지와 유사한 것들로 자꾸 경각심을 일으켜줘야 됩니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줄을 압니다. 수행을 해본 사람들이면 죽기 며칠 남았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 동안 그래도 내가 수행해가지고 죽음의 순간에 그래도 선한 마음을 일으킨다든지, 아니면 좀 더 좋은데 태어나고 싶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빨리 해탈에 이르고 싶다는 강박관념, 경각심이 확 일어나게 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만 알아도 그렇게 정진각지는 확 일어나게 됩니다. 병이 들은 사람들도, 또 나이 들어가는 것을 아는 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생로병사에서 경각심을 일으켜가지고 그것으로 정진각지를 일으켜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들이 그정도 경각심을 일으킬만한 공덕들을 쌓았을까?

부처님이 처음에 출가했을 때는 어떻게 했어요? 늙은 사람 보고 아! 나도 저렇게 늙는구나. 지금 젊었을 때 빨리 내가 수행하고 해탈에 이르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보고 똑같이 일으켰습니다. 그랬으니까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게 강하게 일어나면 출가를 할려고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더욱더 수행을 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과거생에서 그정도의 공덕들을 쌓았는지. 별로 없죠? 아마 그렇게 많이 공덕 쌓은 분들은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그런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어야만이 적어도 정진각지는 닦아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지금 대체적으로 이렇게 두 가지 경우로 정진각지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잘 되어나가서 염각지부터 해서 택법각지 그다음에 정진각지 이렇게 순조롭게 돼나갔을 경우에, 그리고 거기서 오는 문제점들, 또는 그렇지 않고 앞에 각지들이 없어도 정진각지는 일으킬 수는 있다 하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부처님이 구구절절이 마지막 열반에 이를 때까지도 정진에 대한 것을 굉장히 강조를 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거라.

수행을 해나가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이르렀든, 그렇지 않고 인제 막 생로병사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는 수준이 되든, 그렇지 않으면 아예 시작도 안 한 사람이든, 정진이라고 하는 것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수행자 입장에서 한번 봅시다. 수행이 잘 되어나갈 때 그때 한번 잘 보십시오.

대부분 보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때 마음들은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집중을 하게 되고, 그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림도 있고, 그리고 그 대상이 끊임없이 알아차려진다는 것은 일정하게 노력의 힘들이 분명히 존재를 하게 됩니다.

수행이 잘되어나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이 3가지가, 3가지가 아니고 4가지라고 봐야됩니다. 바르게 겨냥하는 것(위딱까)까지 이 4가지들이 공통적으로 다 균일하게 일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띠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노력의 힘들이나 집중의 힘들이 약하면 사띠의 힘은 그마만큼 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또는 집중하는 힘이 강하고 또 알아차리는 사띠는 분명히 있다고 하더라도 노력의 힘이 그마만큼 강하지 않으면은 그것도 대상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어찌 보면 수행에서 지금 내가 얼마만한 노력의 힘들이 있느냐에 따라서 수행이 잘돼나가고 못 돼나가고 하는 것들이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난다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 정진각지를 보통 뭐라고 그러느냐면 자기 자신의 수행에서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그런 도구로써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참 많이 헤매는 게 이 정진각지 부분입니다.

스님도 처음에 수행할 때 많이 헤맸던 게 이 정진각지 부분입니다. 균형을 맞추기는 맞추어야 되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이 잘 되어나가다가도 대상이 무상한 걸 보기는 하는데, 그 대상이 끊임없이 무상한 것이 보이고, 무상한 것은 알고 그냥 관찰하는 것이 다시 또 배로 돌아오고, 또 대상이 일어나면 무상한 걸 보고 사라지고 나면 다시 또 돌아오고 하니까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하기는 하는데 그 이상 넘어가지를 않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앉아서 배를 관찰하고 있다가 가끔씩은 꼬박 졸음에 떨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계속 그 상태가 반복이 되는 거라.

계속 그래요. 그래서 이게 뭐가 문제인가 해서 오력을 다 균형 있게 맞춰가지고 해도 안돼.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질 때는 참 잘되는 것처럼 하다가도 또 좀 있으면 또 똑같은 패턴으로 빠지게 되는 거라.

왜 그럴까? 뭐가 부족해서 그럴까요?

 

바로 이 위리야라고 하는 노력의 힘들이 강하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나는 노력하는 힘들이 있다고 판단들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은. 사띠가 있었기 때문에! 대상도 변해가고 무상하고 또 무아의 성품들도 보고, 그것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아도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마음도 고요하고 평온해요.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도 없고.

그런데도 문제가 뭐냐하면 이게 완전하게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닌데 떨어져 나갔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뿌리를 봐야 되는데 그 뿌리를 볼 힘이 없기 때문에, 그냥 지금 일어난 것들만 자꾸 제거만 해나가는 것뿐이라. 드러나지는 것만. 그러다 보니까 발전이 안 되는 거라.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주 고요해지면 그 뿌리가 보입니다.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본인이 욕심부리는 것이 많은 성향이다. 그럼 욕심이 일어나면 욕심을 알아차리고 해가지고 욕심을 사라지게끔 만들어가지고 했는데, 그래서 본인은 욕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일상생활을 하다 보니까 욕심이 일어나거든. 그래서 아! 내가 아직 욕심이 끊어진 것이 아니네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수행에서 이걸 뿌리를 볼려고 했는데 안 보이는 거라.

 

그런데 아주 고요한 순간이 되면 그 뿌리가 보입니다.

그 뿌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게 너무 싫어. 욕심이란 게 이게 이렇게 징그럽고 싫고 하는 것들일 수가 없다는 게 탁 드러나집니다. 두 번 다시 그것으로 다가갈 생각을 안 일으키게끔 됩니다. 진저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그 뿌리를 보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야만이 그다음부터는 조그만한 욕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싫고 더럽고 한 건 줄 알기 때문에 다가가지를 않게 되는 거라. 그렇게 진행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보면 아!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욕심이 안 일어나는구나 하고 스스로 알게끔 됩니다.

 

밥을 먹을 때 어떨 때는 좀 많이 먹고 어떨 때는 좀 적게 먹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밥을 많이 먹었을 때 어떤 불편한 점이 있고, 밥을 적게 먹으니까 또 어떻게 힘들이 안 생기고 어떻게 나에게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밥을 적당하게 먹을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밥이라고 하는 것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좋고 싫음에 따라 밥을 먹지는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밥이라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많이 먹었을 때 '아, 너무 싫다' 또 밥을 너무 적게 먹었을 때 '아, 이것도 너무 싫다' 내가 수행을 계속해야 되는데 힘이 없는데 어떡할 거라? 이것도 아니다. 그래서 좋은 것 싫은 것들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 같으면, 그다음에 적당하게 먹는 법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적당하게 먹으니까 당연히 그 먹는 것으로 인해서 불편한 점들은 더 이상 오지 않게 되는 거라. 그게 굳어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먹는 것에 대해서는 식탐 부릴 일도 없고 어떤 경우든지 먹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번뇌들은 없어지는 걸 분명히 알게 됩니다.

 

노력의 힘이 가장 올바르게 발란스를 맞출 때는 좀 쉽게 말하면 자기가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그러한 번뇌들이 떨어져 나간 것들을 보게 될 것 같으면 아! 인제는 노력의 힘이 충만했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시간 많이 걸리겠죠? 그래서 평상시 때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거는 일반적으로 그냥 수행에서만 쭉 해나간다 해가지고 그것이 해결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처음에 염각지하고 택법각지 부분은 수행에서만 하더라도 계를 안 지키더라도 충분히 그걸 개발할 수가 있습니다.

런데 인제는 정진각지부터 들어가질 것 같으면 계가 뒷바탕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이것들을 완성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강제로 자기 자신에게 뭔가를 '아! 이거는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것들은 반드시 해야 되겠다' 해가지고 그것들을 완성해나갈 때 정진각지는 조금씩 조금씩 더 무르익어 가고 그것이 완성돼나갑니다.

 

정진각지가 돼야만이 그다음에는 대상에 대해서 어떠한 대상이든 그것들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행하는 것들이 너무 좋고 내가 법을 만난 것이 너무 기쁘다는 마음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의 패턴이 180도 딱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부정적인 성향에서 긍정적인 성향으로 확 바뀌게 됩니다. 그것들이 이 정진각지가 좌우를 하게끔 됩니다.

 

여러분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그래서 정진각지의 첫머리에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고 적어놨습니다. 정진각지하고 계율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 중에서도 계율을 중시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자기 방식의 계율만 고집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계율을 안 지키는 스님들에 대해서 혹독하게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 스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은 결코 선한 마음은 일어나지를 않아. 적어도 계율을 지키는 의미가 뭘까 하고 돌아보게끔 되는 거라.

 

왜 계율을 지키는 거라? 마음을 청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마음이 청정해야만이 말하는 것이나 행위하는 것들이 청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청정해질 수가 없습니다. 말하는 것도 함부로 하게끔 되고 행위하는 것들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들을 하게끔 되게 돼있다는 겁니다. 계율은 그걸 방어하기 위한 겁니다. 그럼 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당연히 마음이 청정해져있어야 됩니다. 청정해져 있는데 남을 비난할 이유가 뭐 있어?

 

경전에도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하고 경전에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그 원래의 의미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냥 내가 계를 잘 지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거라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모습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오히려 아만심만 더 높아지는 거고, '나'라고 하는 것들을 더 견고하게 할 뿐인 거라.

 

오늘 오계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첫 번째 받은 것 중에 만약에 남을 해치는 것들을 안 하겠다. 그럴 것 같으면 마음에서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만이 남을 해치는 행위들을 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럼 마음이 청정해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해치지 않는 것들을 잘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에 자꾸 자애의 마음을 쌓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속으로 자애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청정해지게끔 됩니다. 그럼 당연히 남을 해칠려고 하는 것들이 안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자애수행을 할라고 하더라도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계속적으로 그걸 갈고 닦아가지고 자애가 자기 마음에 탁 와가지고 완전히 채워지게 됐을 때 나에게는 남을 해칠려고 하는 행위들을 안 하게끔 됩니다.

 

오늘 하루 계를 받았다 해가지고 평생 계를 안 받고 살아간다고 해서 될 거는 아닙니다. 계는 하루 밤낮 동안 유효하다고 하는 것들이 뭐냐하면 자꾸 되새겨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걸 다시 또 돌아보고 다시 또 더 노력해서 지킬려고 하고,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인제는 일부러 내가 계를 지킬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방어를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럴러면 끊임없이 노력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킬려고 하는 것만 하더라도 정진의 힘들은 충분히 키워나갈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여기 교재를 한번 볼게요.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을 해나갈 때, 자주 수행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앉아서 수행하면 망상이 많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졸음이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를 하면 될까?

앉아서 어느 정도 수행하다 보면 반드시 그것이 찾아오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노력의 힘들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그것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경전 주석서에는 정진각지에 대해서 설명한 주석서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이 굉장히 몸이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걷는 것도 힘들고 하는 그런 상태였는데 그래도 끊임없이 수행을 하려고 그럽니다. 다른 스님들이 보기에 굉장히 안타깝거든. 조금 쉬어야 될 때 조금 쉬고 몸이 좀 괜찮아지면 또 수행했으면 좋겠는데, 이 스님은 그래도 줄기차게 수행을 하고 있으니까, 다른 스님들이 봤을 때는 참 안타까워가지고 그런 얘기들을 자주 하는데.

이 스님 입장에서는 아닌 거야. 매번 똑같은 상황에서 부딪쳐갖고 그냥 그걸 못 넘고 거기서 좌절을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수행하면 꼭 잠에 떨어진다든지 아니면 망상이 많이 일어나서 망상이 좀 안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망상' '망상' 하고 알아차릴 때는 사라졌다가 좀 있으면 또 나타나고 계속 그 패턴을 유지를 하거든.

 

이 스님 입장에서는 본인이 그러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아니다 이거는. 적어도 이거는 넘어서야만이 되겠다 싶어가지고 죽을 각오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산에 올라가서 혼자 수행하고 온다 해가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걷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굉장히 힘이 듭니다. 올라가다 보면 진짜 죽을 거 같애. 그런데도 죽기로 마음을 먹어버리면 올라가집니다. 걸어가지 못하면 두 팔로 기어서라도 올라가게 됩니다. 이 비구니 스님이 딱 그랬거든. 어쨌든 저기 올라가 가지고 수행을 하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죽어도 관계없다고 해서 기어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어느 순간에 산 정상에 탁 올라가서 수행처에 갔는데 이미 자기 자신은 정진하는 힘이 강하게 콱 형성돼있는 상태라. 그런데 그게 강하게 형성돼있으니까 당연히 본인이 전에 수행에서 걸렸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그 뿌리가 착 잡히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만날 걸려서 넘어지는 부분이 있죠? 그런데 내가 죽어도 괜찮으니까 요거 한번 완전히 해결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어본 적이 있느냐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걸 못 넘어간다는 거라.

 

한국에서 참선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뭐부터 합니까?

다리 조복부터 먼저 받죠! 다리 조복 받기 위해서 별것을 다합니다. 다리를 묶어놔 놓고 아니면 몇 시간 동안 해도 안 움직이고 그렇게 있습니다. 요거 조금만 까딱거리면 다리가 편해지겠는데, 그거 안 합니다. 그거 안 하고 버팁니다. 그리해도 다리 끊어졌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 나중에는 어쨌든 그분들은 다리를 어느 정도 조복을 받습니다. 육체적으로.

쉽게 말하면 육체적으로 조복 받는 게 아니고 육체는 동일합니다.

 

옛날 그때나 지금 상황이나 조금 요가적인 부분에서는 편해졌기 때문에 통증이 덜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육체는 어떤 경우든지 고통을 받게 돼있고 고통을 가지게끔 돼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정신적인 부분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메카니즘으로 바뀌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다리 조복을 어느 정도 받게끔 돼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수행을 하면서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내가 진짜 죽을 만큼, 죽어도 괜찮다고 마음을 먹고 수행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거라.

그런데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필요한 부분은 뭐냐 하면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항상 걸리는 부분에서 자꾸 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뛰어넘는 방법은 정진각지를 강하게 만들어줘도 뛰어넘을 수가 있는데, 또 다른 방법으로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하나의 중점이 뭐냐하면 삼매의 힘들이 강할 때! 삼매의 힘이 강할 때 그것들을 뛰어넘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스님이 경험을 해보니까, 위빳사나 수행을 하시는 분들이라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을 하는 걸 너무 터부시하지는 말아라.

 

떨어져나가는 것이 일선정에서 떨어져나가는 것, 이선정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분명히 다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대부분 수행에서 장애라고 느끼는 다섯 가지 장애들은, 대부분이 1선정만 자유롭게 하더라도 떨어뜨려버릴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마만큼 삼매의 힘들도 어찌 보면 이 정진의 힘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하는 것들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나중에 쭉 이어지다 보면 뒤에 삼매에 대한 각지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정진각지는 자신이 못하는 부분들을 딱 잡아가지고 그것들을 뿌리뽑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낼 때 정진각지를 키울 수 있다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대신에 가장 좋은 것들은 뭐냐 하면 염각지부터 해서 택법각지로 해서, 그다음에 정진각지가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 그 상태가 가장 좋습니다.

공덕들을 많이 쌓았을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갑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수행이 굉장히 힘들었었거든. 달리 힘든 게 아니고 무상한 게 자꾸 보이고 하기 때문에 그게 너무 싫고 너무 힘들어. 안 보이고 안 변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계속 변하니까. 그래서 그게 힘들게 느껴지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상한 걸 보는 게 너무 좋은 경우인 거라. 무상한 걸 보고 있는데도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무상이다' 하면서 되게 기뻐해요.

쉽게 말하면 정진각지가, 자연스럽게 염각지부터 해가지고 택법각지로 해서 정진각지가 일어나가지고 기쁨으로 확 바로 넘어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스님도 수행하면서 그 부분이 참 부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게 가장 좋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고생해서 정진각지를 키워나갔다. 쉽게 말하면 위리야는 강약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강하게 만들어 놓으면 놓을수록 나중에는 더 유용하게 쓰여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정진각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강하게 형성이 된 사람들은 나중에 사마디의 힘들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그런데 정진각지에서 희각지로 넘어가지기는 했는데 정진각지가 강하게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은 사마디의 힘이 굉장히 약합니다. 그런 차이점은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정진각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은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 정진각지를 일으키는 방법

1. 계를 지키는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졸음이나 망상이나 정진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끊을 수 없습니다.

3. 삼매의 힘이 강하면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 부분으로 정진각지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각지들 처음 각지부터 해가지고 세 번째 각지까지 이르는 부분에 대한 것, 그리고 그럴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것들, 또 다른 방법으로 순조롭게 각지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정진각지들을 일으켜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들을 했습니다.

그 부분은 여기에 쭉 적어놨기 때문에 써놓은 것들을 읽어보더라도 충분히 정진각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솔직히 얘기하면은 염각지는 처음부터 해가지고 마지막 끝까지 갔다가 끝에서 다시 또 염각지 부분이 뒤로 돌아가지는데 택법각지나 정진각지는 다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 부분은 버려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도, 택법각지나 희각지나 경안각지나 이런 것들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 바로 이 정진각지와 삼매라고 하는 그 각지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하는 것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자꾸 하려는 마음들을 가져야만이 정진각지는 조금 조금씩 생겨나갑니다.

 

보통 주석서에는 다-뚜(dhātu)라 해서 위리야를 세 가지 부분으로 얘기합니다.

처음에 시작을 하려고 하는 노력들,

그다음에 여러 가지 장애가 일어났을 때 장애를 극복할려고 하는 노력들,

그러고 나서 나중에는 어느 정도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어느 위치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더욱더 마지막 아라한이 될 때까지 노력할려고 하는 dhātu,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해놓기도 합니다.

 

[교재부분 : 「정진은」 시작하는 요소(arambha dhatu 아람바 다뚜)와 벗어나는 요소(nikkama dhatu 닉까마 다뚜)와 분발하는 요소(parakkma dhatu 빠락까마 다뚜)가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많이 하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더 강하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머무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본인이 지금 내가 완전한 해탈에 이르렀다, 내가 아라한이 되었다 하고 확신이 들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정진각지는 끊임없이 키워나가야 된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자! 오전에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