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2. 택법각지 후반부 (20170526. 대구)

담마마-마까 2021. 7. 7. 08:54

https://youtu.be/6bdLZLYyx48

* 택법각지 후반부 (20170526. 대구)

 

오늘은 택법각지 후반부 부분입니다. 아마 작년 11월달로 기억하는데, 그때 택법각지에 대해서 대충 설명을 했고, 또 서울 법회에서 이 후반부 부분 법문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좀 더 다른 방법으로 들을려고 한다든지 좀 더 자세하게 알려면 거기에 있는 법문들을 참고를 하면 됩니다.

오늘 프린트물로 인해서 택법각지는 인제 다 끝났습니다. 첫 번째 각지와 두 번째 각지가 끝났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각지라고 하는 것은 저쪽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와 같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사다리는 하나 딛고 그다음 단계 딛고 그다음 단계 딛고 이런 식으로 올라가야만 그걸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위에 올라가서 보니까 사다리들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분들이 택법각지를 할 때는 아, 나에게 지금 사띠가 있는가? 택법이 있는가? 노력이 있는가? 기쁨이 있는가? 이런 식으로 다시 관찰만 해도 그것들이 그대로 일어나면서 '아, 나에게는 택법각지가 있구나' 하는 것들로 인해가지고, 여러 가지 병이, 병이라는 것은 속병 같은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좀 완화된다든지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서 다시 또 힘을 얻는다든지 이런 역할들을 합니다.

 

'각지(覺支)'라고 하는 것은 '삼보장가(sanbojjhaṅga)'인데, '삼(sam)'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알다시피 '올바르다' '완전하다'는 그런 뜻입니다.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른 분들한테도 이것들이 있게 되고, 또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서도 이것들이 필요한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런 일곱 가지 부분들이.

그래서 각지 부분을 지금 현재 이것이 나에게 안 일어났다 해가지고 '나에게는 안 일어날 것인가' 하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깨달음에 이를려고 할 거 같으면 이 과정들을 겪게 되고 이것들은 당연히 다 개발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는 택법각지는 다른 것보다도 조금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의 수행이 어느 정도 이르렀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바로 이 택법각지 부분입니다.

부산에 있는 수행하는 분 중에 한 분이 그런 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몸과 마음을 구별해서 분명히 알고는 있는데 어떨 때 가끔은 마음이 자꾸 다른 걸 시킨다는 거라. 다른 걸 시켜가지고 자기는 그걸 하고 있다는 거라.

쉽게 예를 들면 경행을 한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분명하게 관찰하면서 그것들이 변하는 것들을 보는데, 가끔은 마음이 '아니야, 이번에는 세 단계가 아니고 두 단계로 해' 이렇게 시킨다는 거라. 그럼 두 단계로 가게 되고, 어떨 때는 '아니야. 여기 똑바로 가지 말고 옆으로 가' 해서 자기는 옆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 거라.

 

사띠는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아직은 몸과 마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별이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게 마음이 자기한테 시킨다고 자꾸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여기에서 조금만 더하면 택법각지에 이르를 수 있는데 하는 그런 마음이 드는데 그걸 못가고 있는 거라. 거기서 자꾸 헤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한국적으로 생각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배워왔는데, 교리적으로 배워가지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 '조건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고 그걸 배웠다. 그게 미심쩍단 말이라.

그런데 전에 같이 나라는 것이 있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제는 확신은 없고, 그렇다고 그걸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닌데, 아직은 무아(無我)에 대해서 체험을 안 했기 때문에 무아라고 확신을 못하는 상태하고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법에 대한 확신들이 들고 아, 내가 여기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알 수 있는 것은 택법각지가 돼야만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사띠가 잘 무르익었을 때 택법각지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한번 보십시오. 사띠가 좀 잘되고 있는 사람들 같은 경우, 대상이 딱 맞닥뜨려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호흡을 관찰하든 아니면 발을 옮겨놓든, 손을 올리든, 이리 하더라도 대상을 앞에 딱 놔놔놓고 그냥 관찰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걸 언어상으로 얘기하면 "대상과 맞닥뜨린다" 하고 얘기합니다. 뭔가 길모퉁이에서 한 사람은 이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요쪽으로 가는데 길모퉁이에서 둘이 탁 맞닥뜨리는 것처럼 대상하고 딱 맞닥뜨려서 딱 일치하는 상태가 되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이 그렇게 순일하게 될 때는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관찰하고 있는 게 그대로 그냥 대상을 있는 그대로 탁탁 알아맞추는 게 뭔가 이렇게 손 두 개가 탁탁 마주치듯이 손가락 끝이 마주치듯이 탁탁 마주치는 걸 느껴집니다. 사띠가 잘 무르익게 되면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는 사띠가 잘 되고 있으면 외부적인 자극이 있으면 외부적인 자극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걸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대상을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에 대상을 탁 맞닥뜨려서 있는 그대로 보면 적어도 그것에 인해서 휩쓸려가지는 않습니다. 사띠가 완전히 무르익어지면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치고 하는 법이 잘 없습니다. 그냥 '아, 이거는 밖에서 오는 자극이다' 아니면 '이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극이다' 하는, 어떠한 경우에든 대상을 대상으로써만 딱 그대로 알아차려나가게만 됩니다.

적어도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아, 사띠가 좀 더 자연스럽게 되고 사띠가 인제 무르익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정도가 됐을 때 실제적으로는 택법각지가 일어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어, 내 몸과 마음이 뭐지?' 하는 본질을 이해를 하게 된다는 거라. 본질을 알게 됩니다. '이 몸은 호흡이 있고, 호흡을 관찰하는 마음이 따로 있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또는 외부적인 소리가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 들리는 것이 마음이 내가 저 밖에 가 있을 때 어떻게 내가 반응을 하고, 또 마음이 안에 와있는데 어디에 머물고 있을 때, 만약에 귀에 머물고 있다든지 아니면 가슴에 머물고 있다든지 아니면 다른데 머물고 있다든지 머물고 있을 때 반응들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걸 '담마의 본질을 분명하게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택법각지에 이르렀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걸 구분하는 능력들이 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몸과 마음이 있다는 차원에서 조금 더 나아가가지고 그렇게 알아차리는 마음이 어디에 있을 때 좀 더 순일하게 대상을 알아차려지고, 어디에 가 있을 때 무상·고·무아의 성품들이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나지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상을 알아차리면 탁 그대로 그냥 드러나집니다. 대상이!

그걸 경전에서는 '택법각지에 이르르면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듯이 대상이 보인다' 하고 얘기합니다. 대상이 그냥 드러나져버리는 거라. 배를 관찰하고 있으면 배가 불러온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팽창하는 것들이 있다 '아, 이것은 팽창하는 요소다', 아니면 배가 불러올 때 '어, 뜨거움이 있다' 하고 알아차리고.

쉽게 말하면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요소에 대한 것들을 지·수·화·풍이라고 꼭 구분을 안 하더라도 이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합니다. 뜨거움과 불러오고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또는 그것이 차가움으로 느껴지는 것하고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배가 불러올 때의 느낌들이 각각 다르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걸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대상이 어둠 속에서 탁 드러나듯이 드러나지는 것입니다.

후레쉬를 가지고 있다. 후레쉬를 여기 비추면 여기 것이 드러나지지 다른 것이 드러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에서. 그런데 여기를 비추면 여기 것은 드러나는데 여기 것은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배가 불러올 때는 그 후레쉬를 여기 비추고 여기 비추고 여기 비추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의 대상과 여기서의 대상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많아지면은 힘이 듭니다. 대상이 너무나 빨리, 너무나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수행이 완전하게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그냥 고요했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안 변하고 좀 가만히 있었으면 싶다는 거라. 그런데 지금 자꾸 바뀌거든. 그러니까 수행이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지금은 힘든 시기라는 거라.

그렇게 관찰할려고 안 해도 그것들이 여기 것과 저기 것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어둠에 빛을 후레쉬를 탁 비추듯이 여기 것이 드러나지고 저기 것이 드러나지고 하는 것들이 귀찮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은 사띠도 약해져버리고, 택법각지로 탁 올라갈려고 하다가도 택법각지가 무르익지 못하게 되고, 똑 마음이 조종하듯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마음이 이렇게 시켜서 내가 이렇게 걷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택법각지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면은 그러한 것들이 탁 가라앉습니다.

물을 아무리 구정물을 만들어 놓더라도 언젠가는 그 구정물은 가만히 놓아두면 밑으로 가라앉게 된다는 거라. 그걸 계속 관찰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이 고요해진다는 거라.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이 탁 잠재워지게 된다는 거라.

 

택법각지 영역은 굉장히 넓습니다.

사띠의 영역보다도 오히려 택법각지의 영역이 훨씬 더 넓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혼란스러운 것이 가라앉으면은 어떨 때는 열반을 체험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내가 도와 과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돼나갑니다. 어떨 때는 선명하게 대상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가끔씩은 마음에서 기쁨이 확 일어나기도 하고, 또는 집중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니밋따가 확 드러나서 그것이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니밋따의 영역들은 초창기 때 일어나는 니밋따하고 마지막에 일어나는 니밋따하고는 대부분은 이 택법각지에서 많이들 일어나게 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경우에는. 그런데 위빳사나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은.

어쨌든 지금 현재 혼란스러운 것들은 싹 잠재워지고 가라앉는 느낌들을 받게 됩니다. 마음이 굉장히 고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에 이르렀을 때는 사띠하는 힘들도 있고, 또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고, 집중하는 힘들도 있고, 어떻게 보면 칠각지가 고르게 다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여기에서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잘못하면은 오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들을 탁 놓쳐버리게 됩니다.

'내가 열반을 체험했으니까, 도와 과를 체험했으니까' 하니까 알아차리는 힘들이 어떨 때는 약해져버립니다. 그럼 집중해야 될 때 집중을 하지 못하고, 어떨 때는 좀 더 나아갈려고 하는 힘들을 발휘해야 되는데 힘들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 발란스가 탁 깨져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택법각지에 있기 때문에 다시 또 마음을 가다듬었을 때 그 다섯 가지의 힘들이 균형이 탁 맞춰지는 것들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력의 힘이 어떤 것들이 부족하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상태도 있고, 오력의 균형이 정확하게 맞춰졌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 있는 것들도, 전부 이 택법각지의 영역에 속합니다.

 

또 하나 택법각지에서 중요한 것들은 뭐냐면 궁극적인 물질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내가 무상을 알았다. 나만 아는 것은 아니죠? 누구든지 이 길을 갈 거 같으면 무상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진리는 어떠한 경우든지 보편적인 것들입니다.

또는 내가 아직은 불완전하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 현재의 중생들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도 완전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이해를 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릅니다.

 

적어도 택법각지에 이르게 되면은 이것이 나에게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특성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특성인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보편적인 특성인지를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빠라맛타 담마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구분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특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엔 이해의 폭들이 자신이 겪어왔기 때문에 분명하게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하더라도 적어도 택법각지에 이른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는 것들이 적어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나 화합의 폭들이 훨씬 더 전에 보다도 훨씬 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금의 진척 상태, 수행의 진척 상태, 마음의 진척 상태 이런 것들이 금방 드러나지고 알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택법각지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택법각지에서는 오래도록 머뭅니다 사람들이. 그리고 많이 헤매는 곳들이 여기 부분입니다. 관념적으로 하는 것들, 내가 뭘 법에 대해서 구별하고 하는 것들은, 지식적으로 구별하고 하는 것들은 여기에 해당이 되질 않습니다. 체험적인 것들로 인해서 분명하게 구별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분석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는 것들을 택법각지라고 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택법각지는 이렇게 범위가 넓기 때문에 택법각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는 여러 가지 테크닉들을 많이 쓰게 됩니다.

예를 들면 대상과 탁 맞닥뜨리게 됐는데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서 알아차리니까 그 대상이 사라지기는 했는데, 좀 있으니까 또 똑같은 대상들이 탁 나타나는 거라. 만날 그것만 잡고 알아차리고 또 여기 대상 나타나는 거 알아차리고 이렇게 해가지고 그 상태에서 계속 머물러 있느냐는 거라.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택법각지에서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여기서 넘어갈 수 있는 테크닉들을 분명하게 발휘하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예를 들면은 다리에 통증들이 있다, 좌선을 하고 있는데. 그럼 일반적으로는 '통증' '통증' 하면 통증이 사라집니다. 한 5분이나 10분 있으면 통증이 또 나타납니다. 나는 지금 배를 관찰하고 있는 게 참 잘되고 있는데, 이게 자꾸 나타나니까 마음이 또 그쪽으로 가니까 이게 어떤 면에서는 수행에 방해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걸 관찰 안 할 수도 없고. 사띠가 무르익어져 있을 거 같으면 자동적으로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럼 그걸 또 알아차려서 사라지게 만드는데 그것이 점점 더 사라지는 속도가 오히려 더 느려진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떤 식으로든 이걸 테크닉을 써가지고 이것들에 대한 성품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통증이 있어도 '통증'이라고 알아차릴 때는 통증의 완전한 성품을 본 것은 아닙니다. 통증의 성품은 어떠한 경우라도 여러 가지 성품들이 있게 됩니다. 쑤시는 성품이라든지, 누르는 성품이라든지, 아니면 뜨거운 성품이라든지 여러 가지 성품들이 있게 돼있다는 거라. 그러면은 '아, 내가 조금 더 사띠를 강하게 해서 그렇게 구별해가지고 이 통증들을 볼려고 해야 되겠다'는 마음들을 일으켜야 된다는 거라. 대상이 있으면 대상을 무조건 알아차린다고 해가지고 수행이 다음 단계로 탁 뛰어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럼 이걸 구별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통증이 일어나면 ', 이게 통증이 어떤 성품이지?' 하는 걸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은 이것이 쑤시는 것이 나에게 강하게 다가와진다고 할 거 같으면 '쑤심'이라고 알아야 됩니다.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 것과 '쑤심'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천양지차가 납니다. 쑤시는 것은 실재하는 성품이지만 통증이라고 하는 것은 그걸 뭉뚱그려가지고 아는 관념적인 알아차림입니다.

사띠로 알아차릴 때는 관념적으로 알아차리더라도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올 때 '일어남' 하고 알아차릴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일어나는 것이 보입니다. '사라짐'하고 알아차릴 때 배가 꺼지고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어남' 하고 '사라짐'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명칭을 붙여서 관념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성품은 아니라는 거라. 일어나는 성품은, 실재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 불룩해졌네' 아니면 '뜨거워졌네' 여러 가지 성품들이 있는데 그냥 우리는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라. 물론 마음은 그렇게 알아차린다고 해가지고 대상을 안 알아차리고 있고 사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음 단계로 뛰어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재하는 성품들을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실재하는 것들을! 뜨거움이 일어났으면 뜨거움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쑤심이 일어났으면 쑤심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에서 택법각지로 인해서 빨리 성숙되게 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걸 자꾸 실재하는 성품으로써 구별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도 '망상' '망상'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무슨 망상인지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성냄으로 인해서 일어난 망상인지, 아니면 내가 뭔가 욕구가 일어나가지고 아니면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나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망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나 미래로 가가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망상하는 건지 뭔지를 분명하게 구별하게 될 때 그 망상들을 잡기가 쉬워집니다.

 

그래야만이 택법각지가 분명하게 성숙하게 되고, 그렇게 또 계속 훈련을 해나가야 그다음에 이 성품으로 인해서 실재하는 성품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 참 이게 진짜 몸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것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더욱더 노력할려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택법각지를 탁 뛰어넘어서 그다음에 노력하는 마음들이 분명하게 확립되게 되는 계기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택법각지가 어떨 때는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각지와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사띠가 무르익었을 때 택법각지가 일어나기도 하고, 또 택법각지에서 여러 가지 단계들이 있는 것들이 분명하게 보여지게 됐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개의치 말고 지금 현재의 실재하는 성품들만 자꾸 볼려고 노력하게 될 때 택법각지로부터 빨리 뛰어넘게 되게 됩니다.

 

그게 프린트물에 쭉 써놓은 것들의 대충적인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물질적인 현상도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것들로 구별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이라 하는 것도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접촉이 일어났다. 느낌이 일어나기 전에 접촉이 있어야 됩니다. 접촉은 뭔가가 충돌하는 것으로써 알아지게 됩니다. 아, 이게 충돌로 인해 접촉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피부가 있으면 피부에 손가락이 탁 닿아야 느낌이 일어나집니다. 이것이 닿기 전에는 여기서 느낌은 안 일어납니다. 그러면은 여기에 뭔가 탁 부딪치는 것이 있어야만이 거기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부딪치는 충돌과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을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느낌들은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들이 있고,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들이 항상 하는 것이 아니고 변해가고 있다는 것으로써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의 작용도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을 해서 보이게끔 될 수 있어야 만이 그걸 착각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걸 문자적으로만 자꾸 해석을 하다가 보면은 식(識)이라고 하는 것들이 특정한 개체가 있다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거는 다른 조건들 없이 지 혼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진아(眞我)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진아는, 특정한 개체는 다른 조건 없이 지 혼자서 성립할 수 있는 것들이라? 없는데도 자꾸 그것이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교리적으로 안 맞으니까 이것들을 다른 방법으로 자꾸 또 뭘 만들어 낸다는 거라.

그런 착각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이 택법각지의 역할입니다.

 

이제는 법에 대한 확신들은 분명하게 서게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에 이르게 되면 어떠한 경우든지 법에 대한 의심들은 하지 않게 됩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삼보장가(sambojjhaṅga) 삼(sam)이라고 하는 것, 이게 완전하다 하는 것들, 이것이 진리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탁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택법각지가 일어나게 하는 원인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체험하는 것들, 직접적으로 통찰하고 관찰해서 그것들이 드러나지게 될 때 택법각지는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관념적인 것들이나 아니면 자기의 생각으로 인해서 택법각지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 이것이 택법각지구나' 그것은 생각이고 관념인 것이지, 그건 택법각지의 영역에 속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진아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증명을 해내고 자기가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거라. 그것들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어제 진주에, 요즘은 스님이 몸도 안 좋고 해서 진주에 법회를 못 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답답한 거라. 스님이 와야 질문을 하고 뭘 할 건데 못하니까, 다시 연락이 와서 다른 스님들 구할려고 해서 한두번 들어보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해쌌고 해서 안되겠다고, 그래서 스님 제발 좀 해달라고 그래서 그러면 7월달부터 한번 해보자.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다시 또 허락을 해줬어요.

 

그런데 그분이 하는 얘기가 뭐냐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스님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고 해가지고 내가 그건 줄은 분명히 알겠는데 아직 확신이 안든다. 쉽게 말하면 요즘, 올해 윤달이 낀 게 있어요? 그래서 각 사찰마다 생전예수재든지 뭔지 뭘 하는 모양이라. 이게 아닌 것은 알겠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돌아가신 분이 천도된다든지 아니면 내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좋은데 다음에 태어난다든지 이러지 않는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걸 해야 될지 안 해야 될지 이걸 모르겠다는 거라. 안 하는 게 맞겠지요? 그러는 거라.

그럼 니가 확신이 들 것 같으면 안 하면 되는 거고, 확신이 안 들 거 같으면 그냥 하든지 말든지 니가 알아서 하면 되는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 적어도 그 사찰에 보시하는 마음이라도 있어가지고 보시하게 될 거 같으면 그 보시하는 공덕은 니한테 가겠지 다른데 가겠느냐? 그렇게 얘기는 하기는 했어요.

 

그게 뭐냐면 아직 법에 대한 확신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띠하고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법에 대한 확신이 완전하게 탁 들지 않을 거 같으면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부딪쳤을 때 '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이건 긴 거 같은데' 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되는 거라. 대구는 적어도 그런 것들은 아니죠?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확립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스님이 그렇다고 해가지고 윤달이라고 해서 생전예수재를 하지마라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건 보시를 했으면 보시의 공덕도 있게 되는 거고, 생전예수재 하는데 생전예수재 염불만 하겠어? 스님 법문 있으면 그 법문 듣는 공덕도 있는 거고,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있는 거고, 여러 가지 이익들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식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이든 살아있는 사람이든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부처님도 구해내지 못하는 걸 어떻게 그 염불로 가지고 구해낼 거라고 착각을 하느냐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딱 마음에는 두어야 됩니다. 의식으로 그사람을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사람을 쉽게 말하면 좀 더 좋은 곳으로 좀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딱 확립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의 원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사띠가 무르익게 됐을 때, 그것들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통찰하게 되는 것들로 인해서, 그런 직접적인 체험으로 인해서 택법각지는 일어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택법각지가 일어나기 쉽고 좀 더 무르익어 갈 수 있게 될까?

그것은 서울 법회에서 스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서울 법회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부분은 그것을 참조하면 됩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진주의 법회 했던 사람들이나 아니면 부산 사람들과 같이 의문점이 있으면 자꾸 질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아직은 택법각지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일어날 수 있는 원인을 제공을 하게 됩니다.

법에 대한 것들이 어느 정도 지식적인 것으로라도 자꾸 확립이 돼야만이 '아, 이것은 아니다' 해서 마음속으로 자꾸 아닌 것들을 밀쳐내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쪽으로 자꾸 돼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수행은 계속적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놓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띠가 더 무르익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고.

 

그렇게 할려면,

저번 집중수행 할 때 사람들은 가끔 오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자꾸 벽을 보고 앉아라고 하느냐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러냐면 번잡스러운 것들을 덜어내기 위한 겁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기 여러 가지 어지러져 있다. 여러분들 여기 걸어갈려고 할 것 같으면 똑바로 가지를 못합니다. 요걸 피해가야 됩니다. 피해가는 수고로움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들도 굉장합니다. '누가 이렇게 어지럽혔어? 뭘 어쩌고 저쩌고...'

 

수행을 좀 더 무르익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이 필수 조건입니다.

방석하나 개고 방석하나 옮기는 것들도 수행에는 나중에는 굉장히 장애물로 다가와집니다. 혹시라도 수행하다가 택법각지에 이르르게 된 사람들은 그게 장애의 요인인 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있는 상태, 차라리 없는 상태에서 좌선을 하고 경행을 하고 그대로 계속적으로 그것이 끊임없이 되도록 하는 것들이 맞다고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수행할 때에 아예 가운데 전체를 다 비워두라고 하는 거라. 그게 경전에서는 "몸과 마음에 대해서 청결하도록 하라"고 하는 겁니다. 청결하지 않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굉장히 많다는 거라.

 

수행에서는 그와 같습니다. 필요 없는 수고로움을 자꾸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방석을 개고 또 방석을 옮기고 하는 것들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택법각지에 이르게 될 거 같으면 움직임이 많아서는 안됩니다. 움직임이 많으면 무상··무아의 성품이 드러나지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단지 행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림만 유지할려고 그럽니다. 빠르게 걸어가면서 그것들을 알아차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빠르게 걸어가는 데서 무상한 성품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택법각지를 뛰어넘었을 때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할 때는 그래서 천천히 하라 그럽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되고 나서 어떠한 상황에서든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드러나지면 자신이 훈련을 해볼 수 있습니다. 방석을 개고 옮기고 하는 것들로부터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드러나는지, 경행을 할 때 아주 빠르게 경행을 할 때도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드러나지는지.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 것 같으면 택법각지를 뛰어넘은 상태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굉장히 고요해져 있고 마음은 언제든지 기쁨과 행복감들이 충만해져 있게 됩니다. 노력하는 마음들이 항상 유지돼있고 대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겨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거라.

 

그다음에 어떠한 경우든지 택법각지를 할 때는 마음이 잘 발란스를 잡아야 됩니다. 오력이 균형이 깨져버리면 택법각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발란스를 잘 잡아야 됩니다. 집중하는 힘이 약한지, 노력하는 힘이 약한지, 집중할 때 그속에서 내가 고요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건지, 노력하는 마음들이 있을 때 거기서 내가 조금 더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좀 더 확고하게 되는지, 이런 것들을 잘 살펴봐야 됩니다. 집중하고 노력하는 힘들이 균형이 맞아지는 것들을 자꾸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뭐냐면 그냥 이렇게 수행하면 좋겠다 하는 마음들, 그리고 모든 것들을 수행을 할 동안에는 이것들을 다 받쳐서 할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택법각지는 그렇게 확 쏟아붓기 전에는 택법각지 첫 단계에서 두 단계 세 단계로 넘어가지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이것만 한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꾸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힘드는 거는 압니다.

그렇지만 힘들다고 해서 이 단계들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현재까지는 수행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힘드는 단계가 빨리 지나가면 적어도 수행을 하는 것이 아주 가볍고 기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수행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르기 때문에 그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못견디겠다 싶으면 법에 대해서 자꾸 탐구할려고 해야 됩니다. 아, 부처님이 말한 법은 사성제는 이런 것이지, 삼법인은 이런 것이지, 그걸 닦아나가는 팔정도는 이런 것이지 하는 것들을 자꾸 깊이 있게 되뇌어 보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들을 자꾸 되뇌어 봄으로 인해가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자꾸 마음을 북돋아주고 일으켜줄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대충 무상·고·무아를 보는 방법까지 해가지고 택법각지에 대한 내용들을 적어놨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미처 설명하지 못한 것은 이 프린트물 참조하도록 해서 적어도 빨리 택법각지에 이르러서 그다음 단계로 뛰어넘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