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2. 택법각지 추가법문 (20170318. 서울)

담마마-마까 2021. 7. 5. 13:31

https://www.youtube.com/watch?v=lIjN8XCadNk

 

2. 택법각지-추가법문 (20170318. 서울)

 

자! 칠각지 부분입니다. 저번에 택법각지 한 시간 했죠! 이 프린트물까지는 다 나간 거죠? 그래요. 오늘은 택법각지 두 번째 시간 들어가겠습니다.

택법각지는 사띠가 분명하게 되고 나야만이 되는 거라고 얘기했죠!

무조건 자기가 아,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스스로 구분해가지고 아는 것들이 아니고, 사띠가 잘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이 그것들을 구분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 소리가 들리죠? 들리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죠. 들리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죠. 누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해봐요. 택법각지 입장에서 얘기해봐요.

 

택법각지가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압니다.

'소리가 있으니까 들리는구나' 하고만 압니다.

'소리가 있으니까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만 압니다.

그걸 저  소리는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걸 아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택법각지에 대해서 잘못 이해할 것 같으면 그걸 무슨 분석적으로 분해하듯이 하는 것처럼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소리가 있으니까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만 아는 것뿐인 것이지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하는 것은 없죠. 그 소리도 당연히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고 그리고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게끔 돼있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도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뿐입니다. 어떠한 현상이 있든지 간에 그것들을 무덤덤하게 그냥 알아차려 나가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아는 마음도 그와 같이 아는 상태를 택법각지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한다는 겁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아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움직임으로써 아는 것이 있고, 느낌으로 아는 것도 있고, 또 마음으로 아는 것도 있습니다.

그럼 택법각지가 조금 더 발전되어 나간다, 그럴 때는 그럼 어떻게 알까?

조금 전에 소리를 예로 들었는데, 어떻게 알게 될까? 물질적인 소리는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건 내 일이 아니죠? 말하는 스님 일이지 듣는 여러분들의 일이 아닙니다.

그럼 물질적인 현상 소리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은 내가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듣는 것은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안 들을 수 있죠? 그렇죠! 딴생각한다든지 귀 막아 버리면 못 듣는 거지. 그래서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은 어디에서 생기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어디에서 생겨요? 소리 들리는 것이 지금 어디에서 들리고 있어요?

귀에서 들리고 있어요, 아니면 가슴에서 들려요, 아니면 스님이 있는 여기서 음파로 인해서 알게 돼요? 마음이 어디에 있어요? 그걸 구분하라는 겁니다.

택법각지가 진행이 되면 알아차리는 그 마음이 어디 부분에서 알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게 택법이라. 다른 것이 택법이 아니고.

아까 총무님이 얘기했죠. 귀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마음이 귀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마음이 가슴에 있으면 가슴에서 그 소리가 들려요. 안 들릴 것 같죠? 들립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들립니다.

 

또는 알아차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를 완전하게 사띠로써 알아차리는 사람이 아니고, 지식적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는 게 스님이 말하는 여기에 마음이 와 있습니다. 실제 마음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 마음이 전부 다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것들은 마음이 전부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을 한번 봐봐요. 어떻게 보여요? 잘 생겼어요? (예) 사띠를 놓쳤습니다. '조금 어제보다도 볼록 부어있는 것 같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 오늘 말랐네요' '뭐 어쩌네요'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뭐가 안 되고 있는 겁니까?

사띠가 안 되는 것이지, 택법각지가 아닙니다 이!!

이걸 구분하는 것을 택법각지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잘생겼네요, 말랐네요'하는 것들은 분별하는 거죠.

 

자기의 생각으로 인해서 이것들을 분별해가지고 그것들을 아는 것입니다. 그거는 수행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분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적어도 여러분들이 수행자라고 할 것 같으면 스님을 보고 '스님 조금 여위어 보입니다' '스님 잘생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공부 안 하고 만날 책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알았죠?

 

대상을 볼 때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거 같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에서 보이면 보인다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러면 예리한 사람들은 볼 때, 내가 보인 사람이잖아. 여러분들이 많이 본 사람이잖아. 그러면 요렇게 생긴 분은 스님이란 거는 압니다. 그럼 스님인 줄만 알게 됩니다. 적어도 요까지는 수용이 돼.

그런데 요것 이상 가버릴 것 같으면 전부 관념화시키고 망상으로 인해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이 이후부터는 수행의 영역에 속하질 않아요. 그렇게 빠져버릴 것 같으면 구해내 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기 전에 보이면 그냥 보인다고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마음의 속도가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보인다고 할 거 같으면 여기에 보이는 거나 여기에 보이는 거나 어떻게 구분을 할 거라? 보인다고 하면.

그런데 여러분들은 구분이 되죠? 요거 보는 거하고 요거 보는 거하고.

경전에는 '보면 본다고 안다'라고 할 때, '산자나' 고 하는 용어를 쓰는 이유가 뭐냐면 '느낌에서 산자나'가 일어납니다. 보면 본다고 아는 느낌에서 그것을 아는 마음 인식하는 마음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인식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거기서만 그치면 그래도 괜찮은데 이게 자꾸 관념화시키고 망상의 영역으로 속하고, 그래서 다른 자기의 세계로써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요렇게 넘어가버리면 안됩니다.

 

그대신에 여기로 보는 것하고 여기로 보는 것하고는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적어도 택법각지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한 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과 이것이 다른 것을 아는 것뿐이지, '이것은 좋은 사람이고 이것은 나쁜 사람이다' 라고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관념으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사람은 어떻다, 이 사람은 또 어떻다' 하고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속하지 않는다는 거라. 택법각지만 계속하겠어? 보는 것만 하더라도 단지 명확하게 구분해서 아는 것뿐이라.

 

단지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도 이것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는 거라? 대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는 것뿐이라. 그것도 대상도 일어난 것이고 아는 마음도 일어난 것뿐이라. 단지 그것뿐인 거라.

그래서 '이거는 누구, 이거는 누구' 아는 것뿐이라. 그래서 자기의 좋고 나쁨에 이 대상들이나 이 마음들이 끄달려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을 보는 것이나 요것을 보는 것이 평등한 마음으로써 연결되는 거라.

그게 택법각지라고 하는 겁니다.

 

처음에 택법각지를 했을 때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상태가 됩니다. 사띠 잘하면 구분하죠? 배가 불러온다. 불러오는데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조금 더 예리해져가지고 불러오는 게 똑같은 게 아니고 불러오는 게 변하고 있을 때, 물질적인 것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불러오는 것들을 아는 마음이 더불어서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실제 배가 불러오는 물질적인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사띠가 얼마만큼 예리하게 잘 되어야 그렇게 될까? 가능해요?

적어도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적어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써만 구분하고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크게 탐진치에 더렵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크게 다른 대상으로 인해가지고 내 마음이 흔들리고, 또는 좋고 싫은 것에 빠지고 하는 그런 것들은 없어져버립니다. 택법각지에 이르지 않아도 사띠만 잘하고 살아도 사는 데는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단지 문제가 사띠만 가지고 거기서 끝내버리면 좋은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띠를 계속하고 있으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택법각지라. 집착하는 마음이 점점 더 없어지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써 구분이 돼나갑니다.

그런데 앞에 사띠가 일어났을 때 각지의 마음하고, 택법각지가 일어났을 때의 마음하고는 정말 차이가 많이 납니다.

 

앞에서는 사띠를 잘하고 있을 때는 그래도 거기에는 대상에 대해서 많이 휩싸여 들어가버립니다. 기쁨 같은 것들도 많이 일어나지게 되고,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현상들도 많이 일어나집니다. 그럼 그 현상들에 끄달려들어가 가지고 막 헤매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택법각지에만 이르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런 현상이 거의 사라질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헤매는 것들이 없어져요. 오로지 내가 할 거만 그냥 사띠하면서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하고 압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떨어져 놔놓으면, 이게 '나'라고 하는 것이 크게 영향을 못 미칩니다. 번뇌라고 하는 것도 감정적인 것들이 '나'라고 하는 것하고 결합이 돼야만이 힘을 발휘하는데, 이게 결합된 것들이 탁 떨어지고 나면 이것이 있어도 크게 힘을 발휘를 못해요.

 

예를 들어서 대상이 있을 때 내가 저 대상으로 인해서 화가 탁 났다, 그러면 화가 확 일어나는데, 대상 없이 뭔가 화가 탁 일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 화는 크게 영향을 못 미칩니다. 대상이 없기 때문에. 뭔가 내가 화가 일어났을 때 화를 일으켜가지고 내가 뭘 말해야 될 대상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그게 없거든. 쉽게 말하면 나를 내세울 수 있는 것들, 비교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들이 없을 경우에는 그렇게 일어나는 화는 크게 영향을 못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택법각지에 이르면 그러한 상태에 이르는 상태가 됩니다.

 

나마와 루빠로써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써 구분이 돼나가는 상태에서 그러한 것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과 결합을 잘 안 하기 때문에, 완전히 결합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결합을 안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그냥 어떨 때는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소리가 들릴 때, '아, 소리가 있으니까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구나' 하고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어떤 때는 그것을 알아차릴 때 소리가 있을 때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이 '귀에서 아는구나' 하고 알 때도 있고, 소리가 있을 때 내 마음이 참 차분해지고 고요해진다 하는 것으로 알게 될 때도 있고, 각각 다르다고.

다른 상태가 있는데 그것을 아는 마음이 귀에 있든지 가슴에 있든지 아니면 밖에 가 있든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그것이 큰 차이를 보이지를 않는다는 거라. 비슷하게 보입니다.

단지 그것을 스스로 그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아는 것들이 어디에서 알고 있는가' 적어도 그런 구분이 돼나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다리를 구부리고 있으면 통증이 있습니다.

통증이 지금 어디에서 있습니까? 통증을 어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다리에 있는 것으로 알게 됩니까? 택법각지가 돼 있는 사람은 다리에 있으면 다리에 있다고 알게 되는 거고, 가슴에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가슴에 있다고 알게 됩니다.

그런데 차이가 나겠죠? 다리에 있다고 알 거 같으면 이 다리에서 알고 있는 마음이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 조금 덜합니다.

그런데 가슴에 있다고 알 거 같으면,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눈을 감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통증이 여기(가슴)에 있는 것은 아니죠? 여기(다리)에 있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는 거라.

마음이 여기 통증 부위에 가 있는지, 아니면 그 통증으로 해서 일어나는 느낌, 느낌은 가슴으로 아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가슴에 가 있는 건지, 그 느낌으로 아는 건지 그것들에 대한 구분이 딱 가게 됩니다.

 

그런데 가슴으로 가 있는 사람들은 이 통증의 느낌이 변하는 것이 빨리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실제 통증을 아는 마음이 무릎에 가 있는 사람보다도 훨씬 빠르게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통증' 하고 알아차리면 즉시 사라져버린다, 그런 사람들은 통증을 알아차리는 포인트가 '가슴'입니다. 실제 마음은 여기에 두고 있는데 이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들이 가슴으로 알아차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빨리 변하는 것들이 보여집니다.

그대신에 통증 부위에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통증이 갖가지 형태로 자꾸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가 있기도 하고, 아니면 통증이 사라지지는 않고 변하는 것들이 보여지기도 하고, 통증이 양태가 쑤시는 거나, 뜨거운 거나, 이런 것으로 자꾸 바뀌는 게 보이고, 그런데도 빨리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이 부위에 가 있으면.

 

그래서 택법각지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면은 인제는 현상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이거 다 사라지는 것까지 볼려고 할 이유가 없다고 알게 됩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이게 빨리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 이익이다 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냥 통증을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 마음에다 탁 둘 거 같으면 바로 착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통증이 사라지고 나면 당연히 마음은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그 상태가 바로 이 택법각지 상태에서 진행되는 단계입니다.

 

택법각지가 여기까지다 할 거 같으면 재미가 없겠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주 다양하게 택법각지가 일어납니다.

원인·결과로써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원인·결과로써!

통증이 있다, 통증은 무엇 때문에 일어났어요? 통증이라 하지 말고 쑤시는 것이 있다고 칩시다. 쑤시는 것들은 왜 일어났어요?

다리를 구부려서 일어난 거에요? 그거는 사띠를 안 한 사람이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쑤시는 것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싫어하는 마음이 원인이 돼서 쑤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싫어하는 마음을 관찰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통증 부위를 알아보면 통증도 사라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인·결과를 알기 때문에 그 가운데 어느 한 고리를 끊어버릴 것 같으면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조절하기가 쉬워져.

통증뿐 아니라 누가 나를 욕하는 말을 하든 아니면 어떤 상황이 오든 그것들을 끊는 고리를 알기 때문에 끊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게 택법각지가 진행되면 원인·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런 응용하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택법각지가 조금 어렵습니까?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 그정도까지는 해야 됩니다.

그래야 수행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고 그냥 계속 “스님, 나는 사띠는 잘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그냥 사띠하고 있는데, 성질은 나고 있고, 욕심은 부리고 있고, 그러면서 “나는 사띠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할 경우에는 마음이 그 대상으로부터 떠나서 고요한 상태가 돼 있지 않으면 그거는 사띠가 아닙니다. 그거는 그냥 아는 것뿐입니다.

뭘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사띠하고 있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사띠하고 있다는 것은 변하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이 사띠를 하고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대상을 무조건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그것들이 변하는 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들이 오히려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택법각지는 그렇다 하는 것들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보면 진행과정을 적어놨습니다.

오늘 스님이 이걸 저번 시간에 안 한 줄 알고 요부분을 가져왔는데 이거 한 거네? 택법각지.

(수행자 : 저희는 항상 새롭습니다.)

나도 옛날에 태국에서 공부할 때 어제 거 해줘도 새로웠어요.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택법각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쉽게 이게 뭔가 하는 것들을 알게 될 때. 그런데 그걸 알게 되는 것들은 집착하는 것들이나 붙잡는 것들이 아예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사띠가 예리하게 잘 되어가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응용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망상! 망상할 때.

망상이 일어난다, 그냥 단순히 그냥 '망상' '망상' '망상' 하지 말고, 이게 무슨 망상인지를 보라는 거라. 그게 성냄·분노의 망상인지, 아니면 탐욕의 망상인지, 아니면 게으름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망상인지, 그 종류를 보라는 거라. 망상을 다스리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택법각지도 조금 더 예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망상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냥 '망상' '망상' 하지 말고, 이게 무슨 망상인가 하는 겁니다. 분노에는 여러 가지 친구들이 있고, 탐욕에도 여러 가지 친구들이 있고, 어리석음에도 여러 가지 친구들이 있습니다. 유사한 것들이 있습니다.

경전이나 주석서에는 이게 세 부류나, 네 부류로 이렇게 돼있습니다. 아비담마에는 불선심소가 열네 가지라고 돼있죠! 그런데 그 부류에 속하는 세 가지, 네 가지는 대부분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티나(thīna)하고 밋다(middha)하고, 그다음에 위찌낏차(vicikicchā)라고 하는 것, 그 세 가지는 비슷한 그룹 성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냄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성냄뿐 아니라 남을 미워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그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 일어날 거 같으면 그것들을 낱낱이 구분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는 건지, 대상을 싫어하는 것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는 건지, 아니면 내 안에서 뭔가 대상이 일어났는데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성냄이 일어나는 건지, 그거는 구분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걸 그냥 '망상'이라고 하지 말고, '이것은 성냄의 망상이다' 하고는 구분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이게 탐욕의 망상이다' 하고 구분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된다는 거라.

 

그걸 구분할 수 있게 되면 그다음에는 이걸 다시 조금 더 쪼개어 봅니다.

성냄의 영역에서 4가지가 있는데, 그 4가지로 쪼개라는 것이 아니고, 성냄이 없는 마음일 경우, 그것을 알아차리면 당연히 성냄이 없는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성냄이 없는 마음이, 탐욕이 없는 마음인지 성냄이 없는 마음인지 아니면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구분을 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 앞에 일어나는 마음을 보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이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성냄이 일어났다고 알고, 성냄에 대해서 망상하고 있구나 하고 알 것 같으면, 성냄이 사라지고 나면 성냄이 사라지고 성냄이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을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써 알지는 않는다는 거라.

 

이렇게 자꾸 세분화시켜 나가게 되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복잡해지기 때문에 구분을 못할 때도 있습니다.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 이것은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중에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일부러 자꾸 구분해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망상할려고 하는 습관들도 없어질 뿐 아니라 사띠하는 것들이 조금 더 예리해집니다.

 

그래서 사띠가 잘될 거 같으면 택법하는 것들이 수월해지고, 택법하는 것들이 수월해지면 사띠하는 것이 좀 더 성숙해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띠가 다 무르익어가지고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고 나면은 그다음에 택법이 된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 죽을 때까지 해도 잘 안될 거라.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어느 정도 무르익어서 그래도 대상을 자꾸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는 훈련이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성질들을 구분해서 자꾸 알려고 하는 노력들을 하면 택법각지가 일어나게끔 된다 하는 거라.

택법각지가 일어나지 않아도 사띠는 조금 더 예리해진다는 거라. 그게 수행의 방법입니다.

 

이게 끝나고 나서 요다음 것들의 각지가 일어나는 것은 틀림없는데, 완전하게 일어나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게 완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게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또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라.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거라.

택법각지가 잘될 때는 사띠는 옛날에 사띠만 하고 있을 때보다도 훨씬 사띠의 힘이 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 택법각지가 사띠의 힘을 더 키워주게 되는 겁니다. 이것도 하나의 응용방법으로 조금씩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 수행의 도과적인 측면에서 택법각지를 한번 봅시다.

택법각지가 어느 정도 되고 나면 최고 먼저 떨어져나가는 번뇌들이 뭐가 있을까?

예를 들어봅시다. 요렇게 앞에 있는 것이 줄이 아니고 뱀인 줄 알고 있다, 그럼 그사람은 요 줄에 대해서 새끼줄이라고 오해하지는 않겠죠? 뱀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걸 구분할 수 있을 거라. 전에는 이게 있는 게 어두운 상황이나 아니면 조금 더 다른 상황 조건에서는 이게 뱀인지 새끼줄인지를 구분을 못했는데, 인제는 분명하게 이것은 안다는 거라. 이게 뱀인 줄은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그러면 이것이 새끼줄이나 다른 것으로서 오해하는 일은 없을 거라.

 

그래서 택법각지가 되면 가장 먼저 '아, 나에게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더 이상의 의심을 할 것은 없다' 하는 것이 탁 들어오게 됩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지금 현재 어느 정도의 상태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스스로 본인이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적어도 법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면 마음에서는 굉장한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본인이 어떤 때는 그러한 택법각지가 일어나서 한참 성숙되는 단계에서는 환희심이 일어나가지고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들이 원인·결과로써만 보여집니다. 그냥 하나의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이 원인·결과가 보여.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또 다른 원인이 일어날 것들을 추측해서 알게끔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택법각지에서 잘못 나아가면 자신을 망치는 경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 틀림없는 것은 굉장히 재밌고 환희심이 많이 일어난다는 거라. 환희심이 많이 일어나야만이 더 이 길을 가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 다음에는 노력이라고 하는 각지가 일어난다 하고 얘길하게 되는 겁니다. 수행도 재미가 있어져야 더 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집니다.

그런데 사띠 부분에서는 수행이 그렇게 재미가 없습니다. 억지로 그냥 어차피 해야 되니까 하게 되는데, 사띠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면 이게 변하는 것들이 보이고 할 거 같으면 재미없어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재미가 있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냥 보여지니까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이게 진행되다가 택법각지로 탁 넘어가면은 조금 있으면 굉장히 수행이 재미가 있어집니다.

그래서 이때는 인제는 발란스를 맞추게 됩니다.

아, 내가 지금 현재 이것들을 알차라리는데 노력의 힘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집중하는 힘이 부족한 건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칠청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칠청정은 사띠를 빼고 나면 3가지 3가지로 묶여집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는 집중하는 힘이고, 하나는 노력하는 힘입니다. 집중하는 힘이 부족하면 집중하는 힘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것들을 내가 조금 더 해야 된다는 것이 보여지게 됩니다.

아니면 노력하는 힘이 부족하면 노력하는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것들을 내가 좀 더 강하게 일으켜야 된다는 것이 보여지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에서 오력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춰지기 때문에, 크게 빠르게 진도가 나아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자기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순일해집니다. 크게 힘이 들지 않아도 서서히 나아가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택법각지라고 보면 됩니다.

 

서두에 얘기했듯이 택법각지는 사띠가 없이 택법각지가 일어날 수도 없는 거고, 그리고 택법각지는 여러분들이 알음알이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거라. 자연스럽게 택법각지의 지금의 상태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들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마와 루빠로 구분하는 택법이 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12연기로 구분하는 택법각지가 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엔 또 다른 것으로써 선한 마음 불선한 마음에 대한 구분하는 것들로써 분명하게 알게 되는 택법각지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자기 수행에서 부족한 것들이 뭔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택법각지가 될 수도 있고,

그래서 택법각지의 영역은 그것에 따라서 많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은 거의가 동일한 수순을 밟게 된다 하는 겁니다.

이게 택법각지라고 하는 전반적인 설명입니다.

 

사띠를 좀 더 무르익게 할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세 가지를 얘기하겠습니다.

1.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을 놓치지 않을려고 하는 것.

대상을 놓쳐버리면 사띠는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들은 어떠한 것이든 그걸 놓치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2. 알아차리는 대상, 사띠하는 대상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딱 그냥 11초만 한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3. 그리고 모든 것들을 천천히 하라.

요 세 가지만 유념할 것 같으면 적어도 사띠 삼보장가라고 하는, 사띠하는 것들은 계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띠하는 것들을 잘 놓치지 않게는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한참은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사띠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면은 택법각지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택법각지에서는 뭘 해야 될까?

사띠에서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되고, 지금 현재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또 조금 더 천천히 해야 됩니다. 택법각지에서는 뭘 해야 될까?

사띠에서는 할 일이 있습니다. 택법각지에서는 여러분이 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대상이 그것을 구분해줍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스스로 구분을 하게끔 되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이걸 구분할려고 해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칠각지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부단하게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렇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다가 보니까 저절로 되는 영역들이 있습니다.

사띠 부분은 내가 의도적으로라도 자꾸 할 수 있는데, 사띠의 영역이 넘어가버리고 나면 그뒤부터는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택법각지 뒤에 노력의 각지라고 하는데 노력의 각지도 여러분들이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악한 것들을 안 할려고 한다. 악한 것들의 위험을 알기 때문에 악한 것들을 아예 안 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더 노력해서 도와 과에 이르러야 된다는 선한 마음들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됩니다. 실제적으로 일상적으로 쓰는 네 가지 노력의 형태와 각지에서 일어나는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분명하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칠각지라고 하는 것의 각지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고리 역할들을 해줍니다. 첫째 고리만 완벽하게 돼 있을 거 같으면 그다음에 둘째 고리가 일어나서 엮이는 거고, 둘째 고리까지가 완벽하게 되고 나면 첫째 고리와 둘째 고리는 서로 상호 보완관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교류들을 합니다. 그래서 두 개가 더욱더 튼튼해지는 역할들을 합니다.

이게 완전히 튼튼해졌다 싶으면 세 번째 고리가 탁 일어나서, 세 번째 고리도 서로 또 연결되고. 이런 관계가 바로 각지의 관계라고 합니다.

그걸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 택법각지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까 택법각지에서 중요한 거 하나 빼먹은 게, 사띠 각지가 잘 형성되고 나면 견해가 바로 성립이 됩니다.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견들이 많이 제거가 됩니다.

택법각지에 이르게 되면 의심하는 것들이 많이 제거됩니다.

쉽게 말하면 예류과에 이르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될 것들이 서서히 무르익어나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예류과에 이르르면 급작스럽게 뭔가가 팍 떨어진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전 단계에서 서서히 형성돼가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단지 속도의 차이가 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걸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