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2. 택법각지(擇法覺支)-전반부 (담마위짜야=조사·분별) (20160618. 서울)

담마마-마까 2021. 7. 4. 09:10

https://youtu.be/ek3G0oGbSrc

 

2. 택법각지(擇法覺支)-전반부 (20160618.서울)

 

오늘은 칠각지의 두 번째, 칠각지 처음 수업할 때 그런 얘기했죠! 사띠가 안되면 담마위짜야가 안되고, 담마위짜야가 무르익지 않으면 위리야 삼보장가도 안된다, 순차적인 것이지 그것들을 빼먹고 할 수도 없고, 또 순서를 뒤집을 수도 없고, 그런 것이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번 시간에 사띠가 능숙해지는 방법에 대한 것 네 가지 방법을 쭉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잘했을거라고 보고, 오늘은 담마위짜야 부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보통 이걸 한자로 택법(擇法)이라고 적어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해하기 쉽습니다. 택법 할 거 같으면 법을 택한다는 뜻입니까? 뭘 택한다는 거죠? 나도 처음에 담마위짜야를 이해를 하고 있다가 한국에서 택법이라고 적어놓은 걸 보고 이해가 조금 안됐습니다.

 

담마위짜야는 어떻게 일어나질까?

사띠가 능숙해지지 않는 사람은 일어날 수 없죠! 어떤 경우든 사띠가 능숙해져서 법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으면 택법각지가 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일부러 자기가 택법각지를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게 무상한 성품인지 무아의 성품인지 그거 알려고 그 법을 가려서 본다?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방법으로 진행되는 법은 없기 때문에 이걸 지식적으로 이해해가지고 택법각지를 내가 하겠다 해가지고 한다, 그것은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념에 계속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현상을 본인이 알고 나서 그 현상이 뭔가 해가지고 살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인터뷰 할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터뷰 뭘 할까 생각해가지고 '어떤 현상을 봤지' 하고 본인이 생각해가지고 인터뷰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와가지고 "스님, 그런 경우 내가 그걸 어떻게 경험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것이 택법각지에 해당됩니까?"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택법각지 맞습니까? 아닙니다!

 

택법각지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택법각지는 빨리어로 얘기해서 담마위짜야라고 얘기했습니다.

여기서 담마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합니다. 드러나 있는 사실, 내 앞에 지금 현재 탁 드러난 것.

내가 만약에 호흡을 하고 있다, 그러면 호흡이 지금 현재 내가 알아차릴 대상이고, 드러나 있는 대상입니다. 그러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있을 거 같으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담마입니다. 지금 현재로써는.

 

지금 현재 드러나 있는 것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는데, 그전에 사띠를 할 때는 이것을 들이쉴 때는 들이쉰다고 알고, 내쉴 때는 내쉰다고 아는데,

"사띠"가 아니고 "위짜야"가 될 것 같으면 들이쉰다고 할 때,

이것이 들이쉬는 것이 시작이 되고 끝나는 것을 분명하게 내가 인식하게 돼는 것, 그래서 끝나고 나서 다시 숨을 내쉬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거는 '아, 이게 끝났네' 하고 생각하고 나서 그다음에 숨을 내쉬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끝난 줄 알고 그다음에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띠가 조금 더 예리해져 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들이쉬는 숨하고 내쉬는 숨은 분명히 구별된다 하는 걸 사띠로써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택법각지의 시작이다 하는 겁니다. 그건 하고 있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을 것 같으면 택법각지가 그렇게 어렵진 않겠지.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가 택법각지가 시작된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압니다.

지금은 위빳사나 수행 방법에 대한 것을 하고 있으니까 위빳사나 수행방법에 대한 것만 얘기하겠습니다.

무상··무아인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

드러나 있는 성품이 아, 이것은 변하고 있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무상한 성품을 아는 겁니다. 숨을 알아차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르다고 알 거 같으면 틀림없이 '아, 이거는 다르다' 하고 알게 되는 거고, 무상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리고 조금 더 예리하게 넘어갈 거 같으면 들이쉬는 숨에 호흡은 그걸 알고 있는 마음이 따로 있고, 내쉬는 호흡이 따로 있고 그걸 알아차리는 있는 마음도 따로 있다는 것을 압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랬을 때 내가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안 알아차려버리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겠어요? 알아차림이 어딘가로 갔어. 그럼 호흡도 정지해버려? 정지한 건 아니죠. 호흡은 자기대로 하고 있는데 단지 나는 다른 대상으로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여기 없을 거 같으면 호흡도 더불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마음이 탁 가버렸다, 그러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호흡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못하는 사람들은 호흡도 있고 소리도 있게끔 됩니다. 못하니까!

예리하지 못하니까, 시작되고 끝나는 걸 분명하게 알아서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대상으로 넘어가더라도 대상들이 중복돼버립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다른 대상으로 갔을 때는 이것은 사라져버리고 저것이 생겨난 것을 압니다. 그것이 생겨난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면은 조금 전에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다음으로 넘어가지는 것이 "인연법"으로, "인과법"으로 분명하게 압니다. "원인·결과"를 안다는 거라. 그 인과법을 아는 것도 택법각지에 해당이 입니다. 그렇죠!

 

이 두 가지 예를 들어보면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사띠가 무르익으면서 드러나지는 형태들을 띠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쭉 적어놨습니다. 그래서 스님 같은 경우는 택법각지를 굳이 다른 용어로 쓴다고 할 거 같으면 "분별"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요즘 야구 계절이니까 알기 쉬운 말로 얘기해볼게요.

야구 구단에서는 각각의 선수들에 대해서 데이타를 다 수집합니다. 수집해가지고 이 선수는 커브볼을 잘 친다. 이 선수는 뭐를 잘 친다 하는 것을 구단은 다 수집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선수가 공을 치는 것에 대해서 낱낱이 다 구분하고 분석해가지고 구별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점수 낼 상황이 될 거 같으면 저 선수에게는 지금 던지는 투수가 안 맞기 때문에 다른 투수를 내보내는 거고, 커브볼이 약하기 때문에 커브볼 던지는 투수, 아니면 왼손에 약하기 때문에 왼손으로 던지는 투수를 내보내게 됩니다.. 그럼 이 타자를 갖다가 잡을 수가 있다는 거라.

구별하고 분별하는 능력만 생기더라도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 사띠를 할 때는 사실은 대상하고 붙어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모릅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를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냥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호흡을 하고 있으면 들이쉬고 있고 내쉬고 있다 하는 것 그 정도는 알고 있는데, 그것이 일상 살아있을 때 내가 살아있다는 거하고 별반 차이 난다고 생각이 안들 정도로 됩니다. 실제 수행에서 그렇습니다. 수행을 해보면.

 

수행에서 사띠를 하고 있지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지속하고 있다는 것뿐이지, 하나의 대상에 지속하고 있다는 것뿐이지 일상생활에서 살아있는 것을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 거와 별반 차이가 안 나는 상태가 됩니다.

사띠만 있다면 그렇게 됩니다. 사띠만 예리하게 돼있을 때는 그와 같이 됩니다.

 

예를 들면 스님이 말을 하고 있다, "사띠만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락으로써 알게 됩니다. 그냥 '가, 나, 다, 라' 이렇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사띠가 예리하게 깨어있다고 하더라도 '가, 나, 다, 라' 는 분명히 알겠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라.

뭐가 있어야 이 뜻을 이해를 하겠어요? 담마위짜야가 있어야만이 이거 의미를 알 수가 파악을 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사띠 다음에 담마위짜야가 나타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사띠가 무르익어가지면 자연스럽게 담마위짜야는 드러나지는 형태들을 띱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담마위짜야를 개발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이 뭐가 있을까? 다른 거 없습니다. 그냥 사띠하는 것! 그냥 사띠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한테 맞는 상태 내에서 죽은 듯이 그거 그냥 계속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 나타나면 할 수 없는 거지 우짤끼라?

 

단지 담마위짜야가 개념적으로라도 이해되는 사람들은 이게 왜 안 나타나는지를 자꾸 알려고 합니다. 내가 게으름 부려서 그러나? 아니면 잠이 부족해서 그러나? 개념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럼 그걸 바꿔줘가지고 나중에 실제 담마위짜야가 수행의 사띠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되니까 나중에 '가, 나, 다, 라' 할 거 같으면 그것의 의미가 그대로 탁 탁 탁 와지는 거라.

 

처음에 스님이 수행할 때는 경전을 읽으면 경전을 못 외웠어요. 안 외워져요. 마음은 온데 사띠에 가 있는데도 경전에 가 있는데도 이게 안 외워져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가니까 이 경전이 보이는데, 그게 보여요, 경전이. 단락이 탁 보이고 그리고 그 단락이 그대로 그냥 머릿속에 탁탁 와닿게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사띠만 있었을 때 하고 그다음에 담마위짜야까지 개발됐을 때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사띠가 기억작용이 있기 때문에 사띠를 '기억'이라고 풀이를 하는 것이 안 맞습니까? 그러면 스님은 반대를 합니다.

그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는 것이지, 그래서 사띠의 작용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행할 때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거라. 수행할 때는 오로지 대상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돼. 대상만 그냥 끊임없이. 그러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담마위짜야가 되면서 기억할 수 있는 능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띠가 그마만큼 강해졌을 때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걸 일부러 기억할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가끔씩 수행문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왔을 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합니다. 골똘히 생각해가지고 얘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럽니다. 놔둬라. 뭐하러 일부러 그걸 기억 안 나는 걸 기억을 할라쌌노? 그럴 필요 없다는 거라.

 

대상을 어떤 대상이 나타나서 내가 그것을 설혹 기억을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상을 대상인 것으로만 알 거 같으면 그것은 수행 잘하고 있는 겁니다. 대상을 특별한 것으로만 자꾸 생각을 하고, 아니면 대상을 뭔가 다른 방법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왜곡되는 것이지, 그냥 그게 대상이 어떤 것이든 호흡이면 호흡, 아니면 생각이면 생각, 아니면 니밋따면 니밋따, 아니면 삼매면 삼매 어떤 것이든 하나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면 돼.

실제로 그렇게만 할 수 있는 사람일 거 같으면 스님한테 문답 올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자꾸 와서 스님한테 찐빠 먹어가면서 바꾸고 바꾸고 그렇게 하는 것들이라.

 

그렇기 때문에 사띠는 그런 영역에 속한다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분명하게 내가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은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고 있겠다. 마음이 거기에 있어서 그것인 줄 분명하게 알겠다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이익 취할려고 하지 말고, 좋고 나쁜 것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만 알아차린다고 생각을 하고 지속적으로 쭉 하다 보면 틀림없이 담마위짜야는 여러분들에게 사띠에 이어서 다가와지게 됩니다.

 

사띠 할 때는 좀 힘들죠? 일부러 마음을 거기다 내야되니까. 안 그러면 달아나버리는데 우짤끼라. 그런데 거기다 붙잡아 둘려면 힘이 듭니다.

담마위짜야 상태일 거 같으면 안 힘듭니다. 아까 담마위짜야 특징이 뭐라 그랬어요?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난다고 했죠! 변하는 게 보이는데 왜 안 재미있겠어요? 재밌지! 재밌어요! 그리고 내가 마음을 요쪽으로 내면 요쪽으로 탁 100퍼센트 가고 이거는 하나도 모르게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바뀌어나가는 게 보이는데 왜 안 재미있어?

 

그래서 인제는 사띠 하는 것이 굉장히 재밌습니다. 수행이 굉장히 편해지는 거라. 사띠하고 담마위짜야 하고 차이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수행이 괴로울 때가 있고 즐거울 때가 있는데 잘 될 때는 수행은 즐겁습니다. 더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다른 시간을 쪼개서라도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더욱 더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야 그다음에 더 할려는 위리야가 생길 거 아니라.

 

담마위짜야가 없이 어떻게 위리야가 생길 거라고 생각을 해? 무조건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위리야 삼보장가라고 하는 것은. 담마위짜야가 형성이 돼서 자연스럽게 됐을 때 그다음 위라야 삼보장가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런 논리로써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 빠뜨린 게 있습니다.

그렇게 담마위짜야가 되고 있는 사람은 마음이 들떠질까, 가라앉을까?

그대로 착 가라앉습니다! 어떠한 경우도 마음이 들뜨는 경우가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밖에 외부적인 것에 끄달려들어가고 아니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서 많이 끄달려들어간다 할 거 같으면 빨리 담마위짜야까지 개발돼버리면 마음이 들뜨는 것이 없어집니다. 그대로 착 대상에 달라붙어가지고 재미가 있는데 거기 붙어있지 뭐하러 딴 데 갈 거라? 그래서 다른데 안 가고 고요한 상태에서 딱 달라붙어 있게 됩니다.

 

여기서 사실은 자칫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이것과 우뻭카 하고의 차이가 뭘까?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그냥 유지가 돼나간다면 어떤 차이가 날까? 구분 못 하겠죠! 사실은 구분이 잘 안 됩니다.

담마위짜야가 돼있을 때의 마음의 상태와 우뻭카 삼보장가가 됐을 때의 마음의 상태가 사실은 구분을 잘 못 합니다. 그런데 구분할 수 있는 거는 딱 하나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도와 과에 가까워져 있는가, 아닌가? 이것만 딱 돌아보면 담마위짜야에서는 아직 도와 과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뻭카에서는 바로 보입니다. 그게 차이납니다.

자칫 착각하면 잘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들뜨지도 않으면 '아, 이게 해탈이 아닌가? 아니면 뭐 무슨 상태가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절대 그래선 안 됩니다.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인제 겨우 두 발짝이나 떼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것만 구분을 하시면 됩니다.

 

• 담마위짜야를 개발하는 방법

 

담마위짜야를 어찌 개발을 할까? 오늘 지금 프린트물 나간 거는 담마위짜야에 반 용량을 프린트한 겁니다. 다음 시간에 반 용량을 더 할지 아니면 그냥 프린트물로만 주고 너희가 알아서 해라 할지, 그다음에 바로 위리야 삼보장가로 넘어갈지 그거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 반은 더 남아있습니다.

어찌하면 담마위짜야가 빨리 좀 개발이 되도록 할 수 있을까?

 

1. 문답을 자주하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진짜 문답 안 합니다. 이놈 죽일놈 살릴놈 해야 와서 겨우 문답 하나 할려고 그러지 안 할려고 그럽니다. 생긴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띠가 무르익고 담마위짜야까지 갈려고 할 거 같으면 자꾸 문답을 해야 됩니다.

스님한테도 문답을 해야 되는 거고, 또 자기 자신에게도 문답을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사띠가 바로 가고 있는지, 사띠가 지금 어느 수준까지 되어 있는지 자꾸 문답을 해야 되는 거지, 그냥 수행하는데 아무것도 발견한 것이 없다,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도 아니고, 호흡하고 있으면 호흡이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이것밖에 모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스님한테 문답을 하든 아니면 자기 자신한테 문답을 하든 문답하는 습관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문답하기 좋은 것이 뭔지 알아요? 경행을 한다, 경행을 이때까지는 자연스럽게 하든 아니면 인위적으로 천천히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든지 그렇게 해가지고 명칭이 있든 없든 하고 있다고 했다면, 이 상태를 모른다고 할 거 같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을 택하면 됩니다.

눈을 감고 한번 걸어가 봐요. 그러면 금방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것을 압니다. 뭐가 구분할 수 있도록 돼야만이 이게 되어지는 것이지, 그냥 만날 똑같은 패턴으로 할려고 하기 때문에 똑같이 들어올려지는 것이나 내려놓는 것이나 똑같은 현상으로써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눈을 감고 걸어 보든지, 그렇지 않으면 뒤로 걸어봅니다. 거꾸로. 서 있는 상태에서 뒤로 발을 들어올리고 내리고, 이쪽 발 들어올리고 내리고 하면서 그러면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사띠가 약해졌을 때는 그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자꾸 택해야 됩니다.

그게 담마위짜야를 개발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주 문답하고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됩니다. 그걸 개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꾸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 두 번째, 이거는 아마 여성분들이 잘하는 부분들일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여자분들 집안일 하면서 쓰레기 많이 있죠? 특히 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분리수거 안 하면 안되죠? 분리수거를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그리 안 하면 아마 들을거라.

그러면 분리수거를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요걸 보고 요거는 어디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분리수거를 여러 개로 나눠가지고 분명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 걸 내가 잘못 알아가지고 다른 분리수거하는 데다 넣어놨다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잘못돼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안 하고 분리수거가 정확하게 될 것 같으면 그것만 들고 와서 그 분리수거함에다가 탁 버려버리면 깨끗해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걸 경전에서는 뭐라고 비유를 해놓았냐 하면 "청결하라"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처음에 스님도 청결하라는 것이 뭔 의미냐 하고 이렇게 몸을 깨끗이 씨어라 하는 의미냐 이렇게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2. 분명하게 분류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거라. 몸도 마음도 주변도 청결하도록 하라.

분류를 분명하게 해놓으면 그거는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라. 분리수거를 정확하게 하면 되듯이.

그래서 되도록이면 수행을 할 때 들어올렸으면 들어올렸다고 분명하게 알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딱 알고 나면 차라리 거기서 발이 안 나가져도 괜찮아. 끝났으면 끝났다고 분명하게 탁 아는 상태가 되는 걸 자꾸 훈련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나아가면 나아간 것을 알고, 탁 나아감이 끝났다는 걸 분명하게 알고, 발을 하나를 딱 하더라도 분명하게 그것이 끝나고, 그것이 클리어 된 상태가 됐다는 걸 알고 나면은 담마위짜야는 개발된다는 거라.

그게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겁니다.

 

대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하게 따라가는 훈련들을 자꾸 하라는 거라. 그것들이 끝나고 탁 끝나면 그다음 것이 되는 것을 알아라.

수행을 오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분명하게 따라가서 끝나는 걸 봐야만이, 어떠한 대상이든 대상은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사라짐이 있으면 그다음에는 다시 또 새로운 일어남이 있게 돼있습니다. 그 상태를 분명하게 볼려고 연습을 해야 됩니다.

 

3. 오근의 균형

그다음에 세 번째, 오근이 뭔지 아는 사람?

믿음, 정진, 사띠, 사마디, 지혜. 이거 균형있게 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균형 잡으면서 수행하는 사람? 어떻게 균형 잡을 거라? 사띠는 균형 잡을 필요 없다고 배웠죠? 그럼 두 가지, 두 가지인데 두 가지씩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지고 할 거라? 자신있게 나는 이렇게 한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

 

이게 균형이 잘 잡혀야 됩니다. 다섯 가지 힘은 균형을 잘 잡기 위한 것이지, 그 다섯 가지 힘이 크다고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이 크면 다른 것들도 다 더불어서 커졌을 거 같으면 문제가 없는데 한쪽만 커져 놔놓으면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그거는 균형있게 자라나 있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그런데 사띠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다섯 가지 힘들도 더불어서 강해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럴 거 같으면 사띠는 열심히 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다른 것들은 부족하다. 지혜도 부족하고 아니면 삼보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고 노력하는 힘들도 부족하고 고요해지는 것들도 부족하다 할 것 같으면 부족한 거 채워줘야 돼! 부족한 것을 채워줘야지 그거 놔둬버리고 무조건 사띠만 한다? 그거는 오력에서 균형 잡히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오력은 어떠한 경우든지 균형을 잡아줘서 같이 커나가도록 자꾸 만들어줘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죽었다. '아이고, 슬프다' 해가지고 운다 그러면 그거는 지혜가 부족한 거에 해당 되겠죠! 그러면은 다음에는 그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것에 울지 않고 '아, 무상하다' 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마음을 자꾸 훈련시키는 거라. 그래야만이 지혜가 싹틀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의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은 그것은 성장이 안 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다섯 가지 힘은 균형을 자꾸 맞춰주도록 해야 됩니다.

믿음이 부족 할 거 같으면 삼보에 대한 믿음들을 가질 수 있도록 자꾸 뭘 만들어야 돼. 여러분들 같이 탁발을 하려면 탁발을 잘하고 법문도 듣고, 부처님 말씀도 자꾸 접하고 해가지고 '아, 이게 참 좋구나' 하는 마음들을 일으켜줘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무조건 수행으로써만 사띠의 힘만 키운다? 그거는 참 잘 안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컸을 경우에는 그러한 사띠는 "죽은 사띠"와 마찬가지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이 한국에 와서 참 아쉬운 부분들이 뭐가 있었냐면 수행들은 참 열심히 할려고 하는데 수행하는 방법들을 모르고 수행하는 거라.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오계 준다고 하면 오계 안 받을려고 그럽니다. 그리고 받고 나면 금방 잊어버려. 계가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수행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애써 무시하는 거라.

그리고 스님이 있을 거 같으면 스님 공양이라도 좀 지어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데 전혀... 지들 배부르면 돼. 와가지고 그냥 내가 굶지 않으면 내가 돈내고 하는데 뭐? 하는 식으로 마음을 먹는 거라.

 

이 오력은 그런 식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하고 싶은 만큼 다른 힘들도 더불어서 키워줄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다섯 가지가 커졌을 때는 담마위짜야가 개발되기가 아주 수월해진다 생각하면 됩니다.

 

먼저 부분은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좀 수월한 겁니다.

주변정리를 잘하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여러분들 수행에 도움 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으면 좋고, 그리고 나쁜데 자꾸 가자고 하는 사람은 없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주변 정리를 잘하고, 할 일들이 없어지면 됩니다. 할 일들이. 스님들은 할 일이 없어가지고, 만날 자기 할 일들이 딱 정해져 있거든. 다른 거 없어요 할 일들이. 어떨 때는 스님도 부산에 있으면 아무 할 일이 없으면 너무 좋아. 오늘은 법문할 일도 없고 지도할 일도 없고 이렇게 돼있으면 그것 같이 좋은게 없어. 내 할 일 할 수 있게 되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할일이 많아지면 수행 못합니다. 그거는 '습관 붙이기 나름이다' 하는 생각들을 가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 하면 담마위짜야 대한 이해는 했고, 담마위짜야를 키우는 것들을 조금 이해를 했을 거라고 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나머지 담마위짜야에 대한 부분을 하겠습니다. 담마위짜야가 뭔지는 인제 이해하겠죠? 모르면 할 수 없다. (ㅎㅎㅎ)

 

[ 4. 5. 자꾸 수행할려고 하는 사람들 옆에 있어야 되는 것이지, 엉뚱한 일을 자꾸 하려 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옆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6. 부처님의 진리는 이렇게 깊고 이렇게 나에게 도움을 주는구나 하는 것을 자꾸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7. 모든 것을 내가 여기에 바친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담마위짜야를 개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