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7. 평정각지(平定覺支)-깨달음의 최종단계 (20180721. 담마와나 선원)

담마마-마까 2021. 7. 19. 08:44

https://youtu.be/bpdEg6cvrFI

7. 평정각지(平定覺支)-깨달음의 최종단계 (20180721. 담마와나 선원)

 

오늘은 칠각지의 마지막 부분 우뻭카 삼보장가 부분입니다.

인제 오늘로써 칠각지가 끝나고, 스님이 서울 나들이도 오늘로써 끝이 납니다. 인제는 서울 선원에서 여러분들이 떼자사미 스님 모시고 통상적인 법회를 진행을 해야 됩니다. 수행지도도 받고. 그래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스님이 올라오고 나머지는 선원장 스님을 의지해서 나아가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칠각지를 정리하다가 보니까 딱 100페이지가 나왔네. 마지막 오늘 해야 되는게 우뻭카입니다.

우뻭카(upekkhā)가 무슨 뜻이에요? 왜 평정(平定)이라고 했을까?

'평온, 평등, 평정', 또 한문으로 하면 '사(捨)' 버릴 사(捨)자. 이런 여러 가지 용어들을 많이 씁니다. 스님도 용어 때문에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게 이 우뻭카의 용어입니다. 사실은 우뻭카를 한글로 번역을 하는 게 참 어려운 겁니다. 우뻭카가 무슨 뜻이기 때문에 그럴까? 무슨 뜻이라요? 그냥 고요하고 평온하면 되는 거라? 그런 의미는 아니죠!

이때까지 여섯 가지 각지들을 쭉 배워왔습니다. 경전에서는 또 수행상에서 들뜸이 많을 때는 어떤 각지를 개발하라, 또 나태나 게으름이 많으면 어떤 각지를 개발하라 하고 얘기들을 해왔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각지들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각지가 어떤 걸까?

그게 이 우뻭카(upekkhā-sambojjhaṅgā)입니다.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은!

 

하나 물어볼게요. 여러분들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만큼 될까?

"믿음과 지혜의 균형을 맞춰라" 하고 나옵니다. 어떻게 맞춰줄까? 지혜부분은 지식부분도 들어갑니다. 이때까지 칠각지를 쭉 배워왔으면 칠각지에 대해서 다 이해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에서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이게 균형이 맞아야 잘 굴러갈 겁니다.

두 바퀴의 수레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쭉 나아가는데 한쪽 바퀴만 잘 굴러가고 한쪽 바퀴는 안 굴러가면 제대로 안 굴러가집니다. 수행이 순조롭게 잘 나아갈려면 두 수레바퀴가 동일한 힘과 동일한 조건들이 돼야만이 잘 굴러가집니다. 그러면 위에서 운전하는 사람은 아주 수월하게 운전할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띠를 가지고 운전해서 닙바나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이걸 균형을 맞춰줘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노력하는 힘과 집중하는 힘도 똑같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어떻게 맞출 거라? (수행자 대답)

오력으로? 그렇게 산술적인 얘기 하지 말고, 책에 있는 얘기 하지 말고.

지금 오력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오력 중에서 두 개, 두 개가 균형을 맞아야 되는데 어떻게 맞출 거라?

부처님이 하신 말씀 다 무조건 믿습니까? (수행자 대답)

그러면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 탁 걸었었다, 그러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했다, 그거 믿어요? 안 믿어요? 그럼 안 믿네. 왜 믿는다고 그래요?

옛날에 스님도 그랬습니다. 그거 안 믿었었어요. 그런데 직접 스님이 그런 걸 경험을 했어요.

태국 같은 경우에는 아기가 막 태어날 때 스님을 초청하고, 물론 무균실 안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딱 죽기 직전에 스님들을 초청을 하고 합니다. 이생의 처음과 이생의 마지막을 스님을 보는 것으로서 장식을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애기가 탁 태어나자마자 말을 해요. 보통은 울잖아. 그런데 울지를 않고 방긋방긋 하면서 옹알옹알 하면서 말을 하는 걸 직접 눈으로 봤어요.

그전까지는 '설마 부처님이 말을 했을까' 물론 그거는 경전을 쓰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좀더 의인화하려다 보니까 그랬을 수는 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이 탁 가셔져 버렸어요.

 

저만 그러는 게 아니고 보통 사람들 중에서 그런 경험들을 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자기가 죽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나는 언제 죽겠다 하고 탁 얘기하고 죽는 것들, 그리고 언제 어떤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본인이 알고 죽는 걸 직접 옆에서 목격을 하는 경우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경전에 써진 것들이 그냥 단순히 의인화하기 위해서 써놓은 부분이 아니다 하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는 거라. 태국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처음에는 그것들을 반신반의했는데, 어느 순간 이게 바뀌기 시작하더라고.

 

그러면서 태국인들이 스님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하고는 다른 거라. 그사람들은 스님들을 대할 때 아마 실력이 없는 스님들도 훨씬 많습니다. 수행도 안 하는 스님들도 훨씬 많고, 여러분들보다 못한 스님들이 많은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부처님을 대하듯이 하고 있는 걸 보게 되면서 '아, 이게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구나' 하는 걸 인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아는 것들은 많은데, 그리고 수행을 해서 어느 정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들을 구분하는 것들은 잘하는데 부족한 것들이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 부족한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수행을 하다 보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러니까 새로운 것들을 봤을 때 '어! 진짜 이거 재밌네' 하고 마음이 들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일어나질까?

 

아마 한 반 정도는 '어! 새로운 거 스님한테 가서 보고해야지!' '야! 새로운 거 봤다' 아니면 니밋따를 봤다든지 뭘 봤다든지 할 것 같으면 남한테 얘기하고 싶고 그것이 뭔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마 반정도 될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럴 때 '어, 이게 경전의 어디에 있는 거지?' 하면서 찾아보고 숙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조를 해보는 거라.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경전 내용과 대조를 딱 해봅니다.

 

크게 나누면 그렇게 두 부류입니다. 두 부류다 대조를 하자마자 이미 우뻭카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이미 균형이 깨져버렸기 때문에.

 

그런데 우뻭카가 개발된 사람들은 이때 균형을 딱 잡습니다. 그런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면 '어! 좋구나' 하는 마음을, 나를 드러낼려고 하는 마음을 탁 알아차립니다. 그걸 제어를 해나갑니다.

 

믿음과 지혜의 쪽에서,

믿음의 성향이 강한 쪽은 드러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러면 우뻭카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앞에 여섯 가지의 각지를 균등하게 잘 공부를 해가지고 닦아온 사람들은 여기서 우뻭카가 탁 드러나게 됩니다.

'어! 내가 일어나려고 하네' 하면서 탁 제어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대로 그냥 관찰을 해나갑니다. 그래서 생멸하는 현상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해서 고통스러운 것이 오든 아니면 새로운 것이 나타나서 너무 좋든, 그것에 관계없이 마음은 고요한 상태에서 그대로 관찰을 해나가지고 빨리 진도가 나가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보다는 지혜쪽이 강한 사람들은 생멸현상에 대한 것들을 자꾸 대조를 할려고 합니다. 그리고 의심을 합니다. '어! 이게 진짜인가?' 진짜냐? 아니냐? 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이미 우뻭카는 일어날 수 없는 조건이 돼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믿음은 일어나지 않고 '이게 뭐지?' 하는 궁금증만 자꾸 일어나고 의심하는 부분으로 자꾸 넘어가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지혜나 지식이 많은 쪽은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강한 쪽보다도 속도가 훨씬 느리게 진행되는 것들을 많이 봐오게 됩니다.

일정 부분에서는 훨씬 여러분들 보다도 일반인들보다도 많이 알고 속도가 빠른 것처럼 하지만, 딱 막히는 부분이 이 우뻭카 부분에서 안 넘어가지는 것들이라.

 

우뻭카로 넘어가야만이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가족이 되는 '고뜨라부(gotrabhū)'라고 하는 경지에 도달해서 도와 과 쪽으로 빠져들어가지는데, 그게 안 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본인도 한번 잘 판단을 해보십시오.

수행이 안 될 때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뻭카고 뭐고 간에 그때는 무조건 사띠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택법각지나 정진각지 이런 거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무조건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하는 수밖에 없는 거고.

어느 정도 잘 수행이 무르익어 가지고 대상이 분명하게 보이면서, 그 대상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써 분명하게 보이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때 일어나는 마음이 뭔가' 하는 걸 한번 딱 보십시오.

 

새로운 걸 봐가지고 기뻐하는 것이 착 먼저 일어났다, 그러면 '! 아직 나는 지혜를 더 개발해야 된다'는 마음을 딱 내야 됩니다. 아니면 우뻭카라고 하는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또는 그러한 상태에서 탁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기뻐하는 마음보다도 '어, 이게 뭐지?' 하는 마음이 먼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믿음 부분을 강화시켜줘야 되는 거라.

수행에서 이렇게 자기 스스로 균형을 잡는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은 칠각지를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또 하나, 앞에 두 부분은 차라리 크게 문제가 안됩니다. 몇번 그부분에서 걸려가지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해서 사마디가 깨지든지 아니면 생멸현상에서 다음 현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되든지 하든지 간에, 어쨌든 거기까지 가가지고 또 몇번 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들면 이걸 탁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 이 두 부분은 어찌보면 크게 문제는 안되는데,

 

그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면, 노력과 집중하는 것, 이거 균형 잡는 것이 굉장히 힘이 듭니다.

 

하나 물어볼게요.

수행을 할 때 먼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합니까? 아니면 대상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보입니까?

어떤 게 먼저가 돼요? 대부분은 보면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수행을 하라니까 앉아서 수행을 하기는 하겠는데, 내가 의도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으면 대상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모르는 거라.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날까? 왜 그럴까요? 왜 노력의 힘을 과도하게 더 가지게 될까? 노력을 과도하게 한다 해가지고 대상을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집중하는 힘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라. 그냥 가만히 놔줘버릴 거 같으면 대상이 탁 드러날 수가 있는데 일부러 집중하지 않으면 뭔가를 하지 못하는 거라.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들 여자분이 많으니까, 칼로 가지고 오이를 썬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대부분 숙련된 사람들은 착착착착 썰어나갑니다. 손을 안 베이면서. 그게 어떻게 돼나가요? 하나 썰 동안에 손은 들어가지게 되고 그다음에 펴면서 조금 밀게 되고 하는데, 그래서 이거는 계속 썰고 있지만 손은 조금 조금씩 움직여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발란스가 잘 맞아야만이 손도 안 베고 써는 속도도 빠르게끔 됩니다. 크게 노력 안 해도 되죠?

이렇게 크게 노력 안해도 되는데, 처음에 하는 사람들은 되게 노력을 해야만이 이걸 썰 수가 있습니다. 그 속도를 맞출 수가 있고 또 손을 안 벨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상이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노력하는 힘이 과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거라. 무조건 대상을 봐야된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거라. 그리하지 말아라는 거라. 수행은.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이 드러나져야 돼. 대상이 있는지를 먼저 마음이 알아차리도록 만드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마음으로 자꾸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먼저 마음이 고요하게 되도록, 지금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탐심이 있는지, 아니면 망상이 있더라도 어떤 종류의 망상이 일어났는지를 한번 그냥 가볍게 한번 보라는 거라. '어 망상이 일어났네' 하고 그냥 살며시 보고 그대로 놓아주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마음이 또 뭘 하고 있지' 하고 볼 거 같으면 마음이 뭔가를 찾는 게 보입니다. 그게 호흡을 보고 있으면 그때 호흡을 보도록 해야 됩니다.

그때의 포인트가 올바른 노력의 포인트입니다. 지금의 여러분들 수준에서.

 

그런데 각자마다 그 포인트들이 다 다릅니다. 빨리 노력의 포인트를 찾아야만이, 수행할 때 어떠한 방법으로 해야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안되면 어떻게 할까?

그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더라도 마음이 대상에 자꾸 가지 않고 계속 망상으로 간다든지 아니면 생각이 일어난다든지 이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럼 수행 지금 못하는 거라. 자꾸 마음을 일으켜서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그때는 수행을 딱 중단을 하고 자신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노력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에너지의 포인트는 이 정도 수준입니다.

내가 농땡이 치고 공부 안 하면 그거는 내가 그대로 받는 거라. 내가 좋은 일 하고 좋은 말 하면 그거는 즉시 나한테 과보로써 드러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것들을 회상을 잠깐 착 해버리면, 그때가 바로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지' 하고 알아차리는 마음하고 거의 동일하게 비슷하게 힘의 에너지를 가지는 조건이 됩니다.

아예 안 될 때는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노력의 힘들의 균형을 맞추는 포인트를 딱 잡아내야 됩니다. 이건 하나의 예를 든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포인트를 찾아내는 법을 스스로 빨리 발견을 해내야 됩니다.

 

크게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아도 대상이 드러날 수 있는 조건들이 되는 상태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안될 거 같죠? 마음을 가만히 놔줘버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가벼워지면 딱 됩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할려고 하면, 대부분은 보면 그냥 용을 쓰려고 그럽니다. 용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좌선 뿐아니라 경행을 하더라도 뭔가 용을 써가지고 천천히 '왼- 발- ' '오른- 발- ' 이러고 있습니다. 왜 그러고 있는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렇게 수행하고 나면 한두 시간 하고 나면 힘들어갖고 몸이 파김치가 되어가지고 있고, 그런 방법은 쓰지 말아라는 거라.

노력하는 힘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포인트를 잡아라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집중하는 힘은 얼마만큼 있으면 될까?

한국 사람들은 집중하는 힘은 조금 더 강한 편입니다. 다른 민족에 비해서는.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보고 처음 초보자라고 하더라도 한 삼십분 앉아서 좌선하라 할 거 같으면 망상을 피우든 뭘 하든지 간에 앉아는 있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민족들은 못합니다, 잘. 처음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집중하는 힘은 크게 여러분들이 신경을 안 써도 됩니다. 만약에 사마디의 수행을 해야 되겠다고 할 것 같으면 집중하는데 굉장히 신경을 써야 됩니다.

그런데 노력하는 힘의 포인트를 자기가 탁 잡아내면 집중하는 것은 그 노력하는 힘들이 끊어지지 않게끔만 만들어주는 조건만 되면 됩니다.

 

대상이 일어났으면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나면, 그다음에 또 일어나면 또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때 중요한 게 바로 이 우뻭카입니다.

노력하는 힘들의 포인트를 잡아낸 사람들은 대상은 탁 알아차립니다. 그다음에 그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우뻭카의 마음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사라져버립니다. 우뻭카가 사라질 뿐 아니라 노력하는 포인트도 또 사라져버립니다. 집중은 사실은 이게 몇 개라도 연속이 될 수 있는 조건만 되면은 집중하는 힘은 충분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경우에!

 

그런데 사마타 수행을 할 경우에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나중에 사마타 수행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칠 때 그 집중하는 힘들에 대한 것을 얘기하고.

지금은 위빳사나 수행법이기 때문에, 그래서 집중하는 힘들은 반드시 그 대상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몇 번이라도 연속할 수 있는 정도의 힘만 되면 충분하다고 마음을 먹으면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사실은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생각해서 탁 수행을 했는데, 자꾸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한다, 그러면 노력하는 힘들을 줄여야 돼요. 그렇지않으면 앉아서 수행만 하면 조분다든지 망상을 한다든지 장애들이 자꾸 일어난다, 그럴 것 같으면 노력하는 힘들을 조금 더 키워야 되는 거라.

대상을 자꾸 놓쳐버리기 때문에 안되는 거라. 집중이 한번 일어나고 끝나버리기 때문에 안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잠에 떨어진다든지 망상이 일어날 때는, 그 대상이 연속하는 것이 두세 개만 보이더라도 그런 현상은 잘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연속하는 현상이 안되고, 자기가 의도적으로 그 대상을 계속 만들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이 한 번 두 번 하고나서 탁 사라질 때 망상이나 잠들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만 포인트를 잘 잡으면 수행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우뻭카 삼보장가라고 하는 것은 오력의 균형을 잘 잡아주는 각지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 균형을 잡는 것을 잘하지 못하면 수행도 무르익지 않을 뿐 아니라 각지들도 분리돼버립니다.

예를 들면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나면 그 대상이 생멸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택법각지가 당연히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택법각지가 안 일어나는 거라.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정진각지는 분명히 일어나는데, 다른 사람들은 현상들을 보고 기쁨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몸에서는 나는 분명히 생멸은 보고 있는데 기쁨은 안 일어난다는 거라.

각각의 각지들이 분리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게 뭐냐면 아직은 수행이 무르익지 않아가지고 이 다섯 가지 힘 중에서 두 개 두 개들이 균형을 못 맞추기 때문에 각지들이 분리되게 됩니다.

 

물론 가끔씩 와서 “스님 저는 어떤 게 좀 부족합니까? 저는 아무리 수행해도 희각지가 안 일어납니다.” 아니면 “경안각지가 안 일어납니다.” 하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희각지나 경안각지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가지고 자꾸 공부를 하고 그 방법대로 또 수행을 해야 되는데 그거는 안 하면서 자꾸 그거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아마 열명 중에서 한명 정도가 삐띠부터 해가지고 마지막 사마디까지 순차적으로 쭉 일어나지게 됩니다. 나머지 아홉 분은 순차적으로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한두가지 각지 아니면 서너가지 각지 하고 나서 끊어져버리고 또 다른 각지가 일어나기도 하고 그럽니다.

 

아니면 다시 또 처음부터 한두 각지가 일어나고 또 끊어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연속해서 일어나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그러면 끊어지는 각지에서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그걸 공부를 조금 더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만약에 사마디 부분이 부족하다, '사마디 각지가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하는 마음을 더욱더 강하게 가지고 수행에 임해 나가야 되는 거고, 그리고 사마디 각지가 일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동원을 해가지고 자꾸 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각각의 각지들 여섯 개의 각지들이 잘 무르익게 됐을 때 마지막 우뻭카라고 하는 것들이 착 드러나기가 쉽습니다. 가장 그게 좋은 방법입니다.

 

얼마 정도 하면 이 우뻭카가 일어나지게 될까? 수행에서 무얼 경험해 봐야만이 우뻭카가 일어나게 될까?

우뻭카 경험해 본 사람?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대상이 끊임없이 생멸하는 현상이 보이지 않으면 우뻭카는 안 일어난 겁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대상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는 분명하게 구분된 상태에서 그 물질적인 현상을 볼 것 같으면 물질적인 현상이, 정신적인 현상을 볼 거 같으면 정신적인 현상이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 상태가 되면 우뻭카 각지는 틀림없이 일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일어난다는 것은 우뻭카 각지가 아직 안 일어나는 조건이 돼있다는 거라. 그러면 다섯 가지 힘 중에서 균형을 잡는 것들이 균형이 안 잡혀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빨리 살펴봐가지고 균형을 잡아줘야 되는 거라.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고.

 

당연히 다섯 가지 장애 부분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스님이 그런 적이 있습니다. 수행만 했다 그러면 장애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한번은 그런 적이 있어요. ‘아, 이거 수행하는 동안 단 몇시간 동안이라도 장애없이 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어요. 그게 잘 안 돼요.

그런데 한번 돌아보십시오.

수행 잘 못할 때 장애들이 일어나던가? 장애들은 영향을 안 미칩니다.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그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발전해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꾸 장애가 일어났다는 생각만 하는 거라.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장애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돼있는데. 수행은 하면 수행이 무르익어 갈 동안은 아직 우뻭카가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장애들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장애를 자꾸 대상으로 삼는 상태를 만들어야되는 것이지 장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다.

 

호흡을 알아차리면 호흡이 끊임없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 좋거든. 그런데 대상이 일어나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면서,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왜 그렇게 관찰할 수는 없는 거라?

잠이 온다, 잠을 몰아낼려고 하지 말고 그걸 대상으로써 보라는 거라. 그러면 그 잠이 오는 것이 길이 보입니다. 뜨거움이 있고 쑤심이 있고 찌르는 것이 있고 무거움이 있고 이런 것들이 각각이 보입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잠이 오는 것이. 호흡을 관찰하는 거와 똑 마찬가지로 장애도 그렇게 재미있어!

 

마음이 이렇게 돼야만이 장애들을 물리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 장애가 탁 사라지는 순간이 되면 아주 고요하고 맑고 바람이 시원하게 확 통하듯이 됩니다. 그게 바로 우뻭카의 상태, 마음이 우뻭카의 상태에 놓여지는 상태가 되는 거라.

 

태국에 있는 우리 스승님 같은 경우에는 '우뻭카'를 번역을 할 때 그냥 우뻭카라는 용어를 쓰는데, 그걸 태국 말로 번역하면 '아주 극도로 냉정한 상태가 우뻭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사실은 그게 맞습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아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때 우뻭카는 일어나는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대상을 봤을 때 대상을 완전하게 탁 떨어뜨려 놨다는 생각이 들면 우뻭카는 일어날 조건이 된다는 거라.

장애들은 실제로 공부를 해보면 일반적으로 호흡을 관찰한다든지 경행을 할 때 느낌들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각각의 장애들이 재미가 있습니다. 망상도 마찬가지고 잠이 오는 것도 마찬가지고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도록만 만들면.

 

재미가 있을려면 그걸 관념적으로 하면 안됩니다. 대부분 보면 잠이 오면 '잠' '잠' '잠' 하든지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 '망상' '망상' 이러고 있습니다. 그거 관념을 가지고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게 알아차려지겠어요? 안 알아차려질 뿐 아니라 재미도 없습니다. 관념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망상이 일어났으면 '어 이게 무슨 망상이지' 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하는 거고, 잠이 올 거 같으면 '잠'이라고 관찰하지 말고 어떤 느낌으로 잠이 오는지를 보라는 거라.

 

실재하는 것들을 볼려고 할 거 같으면 그 길이 보입니다. 망상의 길도 있고 잠의 길도 있고 각각의 길들이 다 있습니다. 그 길목을 차단해버리면 그것은 그 순간에 딱 끝나버립니다. 얼마만큼 빨리 그 길을 찾아내느냐에 따라서 그다음부터는 수행하면서 잠이 온다고 할 거 같으면 아예 그 길목을 가서 기다립니다. 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

고통스러운 것들이 쑤시는 것들이 일어날 때 관찰하기 쉬운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압박감이 있을 때 관찰하기 쉬운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굉장히 무거운 걸 관찰하기 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본인이 그 길이 있는데, 그 길 중에 지금 현재 뭐가 오는데 이걸 내가 관찰이 잘 안된다 할 거 같으면 아예 그 부분은 포기를 하고, 그다음 길목에서 딱 지키고 있는 거라. 쑤심만 나타나 봐라 하고 쑤심이 나타남과 동시에 관찰하면 그게 잠이 탁 달아난다는 거라. 그게 그 길을 알 경우에 가능한 거라.

장애들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대상이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다섯 장애와 다섯 가지의 힘(五力), 이것들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하게 될 때 우뻭카 삼보장가(upekkhā-sambojjhaṅgā)는 여러분들에게 갖추어지게 됩니다.

 

사실은 우뻭카는 한 번 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게 무르익어서 완전히 견고하게 될 정도가 되면 그때부터는 전혀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그때는 외부적인 대상이 어떤 것이 나타나더라도 아니면 안에서 어떤 대상들이 일어나더라도 항상 우뻭카의 마음과 그 비슷한 마음들을 그대로 유지를 해나가게 됩니다.

동요함이 없이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를 해나가게 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크게 도움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뒤에 우뻭카가 삼보장가를 개발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 다섯 가지를 주석서에 나와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94페이지 보면,

 

• 우뻭카가 삼보장가를 개발하는 방법 다섯 가지. 주석서에 나와 있는 방법.

1. 모든 생명에 대한 밸런스가 잡힌 감정.

2. 무생물에 대한 밸런스가 잡힌 감정.

무생물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평상시 입고 먹고 하는 그런 것들, 거기에 대한 집착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밸런스가 잡힌다는 것은 집착 안 한다고 해가지고 옷 벗고 살 수는 없잖아. 옷은 최소한 가릴 거는 가리고 추위와 더위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입어야 되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도 남들을 따라간다든지 아니면 남에게 드러낸다든지 이런 것들 없이 본연의 역할들을 할 수 있게끔만 해주는 조건들을 얘기합니다. 그게 마음의 발란스를 잡는 것들입니다. 무생물에 대한 것들은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3. 쉽게 달구어지는 사람들과의 교재를 피합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에게 수행에 도움을 주지 않는 나쁜 친구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전에 망갈라숫따의 첫부분에 "아세와나 발라낭..." 하면서 그걸 쭉 풀어가지고 한 열몇장으로 된 걸 프린트물로 내준 적이 아마 있습니다. 그걸 참고로 하십시요. 어떤 것이 좋은 친구고 어떤 것이 나쁜 친구고 하는 것들을 적어놓은 겁니다. 거기에 본인이 해당이 되지도 않아야 될 뿐아니라 거기에 해당이 되는 친구들은 좋은 친구는 받아들이고 가까이 할려고 하고 나쁜 친구는 멀리 할려고 해야 됩니다.

4. 침착하고 냉정한 친구를 가까이 할려고 해야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 할려고 자꾸하고, 그렇지 않으면 떼자사미 스님한테 가서 자꾸 수행에 대한 것을 물어봐야 됩니다. 스님들도 여러분들한테는 좋은 친구가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고.

5. 밸런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뻭카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하는 그런 의미인데, 단순히 우뻭카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사띠 하려는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일으켜야 되는 거고, 그 사띠가 자연스럽게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조건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오력이 어느 부분이 부족하고 어느 부분이 과잉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보충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참 좋은 게 우뻭카가 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큰 이익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몸과 마음의 치유라고 적어놨습니다.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큰 이로움들을 주게 됩니다, 우뻭카는.

수행에서 큰 재미가 없었다 하면 우뻭카를 개발해버리고 나면 참 내가 이 길을 간 것이 참 좋았다 하는 생각들을 하게끔 됩니다. 한번 쭉 읽어보면서 어떤 이익들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칠각지」는 끝나고, 「칠각지의 실천」 부분이 되겠습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칠각지 다 몰라도 됩니다. 사띠하는 법만 바르게 익히십시오.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연스럽게 사띠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스스로 만드십시오. 마음이 고요하고 탐··치가 없는 마음의 상태가 돼있어야만이 사띠가 됩니다. 먼저 그걸 만들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말하는 것도 싫은 말이나 나쁜 말이나 안 좋은 말을 하는 것보다는 선한 말이나 자애의 말을 하는 버릇들을 들이고 행동들도 마찬가지로 해서 내가 뭔가를 할 것 같으면 선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조건들이 될 때 마음은 선한 마음 쪽으로 기울어지기가 쉽습니다.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영역에 속합니다. 과도하게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영역에 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가지고는 사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먼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조건이 되도록만 만들어주면 됩니다.

고요하게 하고 가볍게 마음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마음이 빨리 움직일 수 있게끔 하고, 움직이는 것은 마음은 굉장히 빨리 움직여지는데 그것들을 단지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늦다는 것뿐입니다.

그 상태가 되도록 먼저 만들고 나서 대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으로 안 다가가질 때에는 대상이 있는지를 알고 나서는 명칭을 붙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상으로 다가가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그거는 각각의 신·수·심·법에 따라서 자기가 하는 수행법들을 계속 해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나가야 되는 것이지 그걸 먼저 대상으로 다가갈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대상을 알아차리고 나면, 어떠한 경우든지 신·수·심·법 어떤 것을 했든지 간에 그것을 아는 것은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면 느낌에 대한 것들이 느낌이 변화하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만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서를 자꾸 밟아나가서 그러한 것들을 자꾸 연습을 하게 되면은 사띠는 정확하게 바르게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칠각지를 다 몰라도 사띠하는 법만 익히더라도 여러분들은 성공을 한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오늘로써 칠각지 부분은 전부 다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스님 법문 듣고 또 수행한다고 고생들 하셨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