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난다. (20180825)

담마마-마까 2021. 8. 5. 09:00

https://youtu.be/OdDpiVXope4

*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난다. (20180825)

 

사람들이 수행하는 목적에 따라서 조금 패턴들이 틀립니다.

스트레스 쌓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것이 있어가지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든지 그러는 분들도 있고, 또는 완전하게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는 분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아마 한국도 앞으로는 수행하는 목적에 따라서 가는 곳들이 조금씩 조금씩 다르게 바뀌어질 겁니다. 전자의 예는 아직은 한국에 많이 대중화되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많이 대중화가 될 겁니다. 그래서 뭐 자기 목적에 맞게끔 성냄을 다스리기 위해서 어디 가서 그걸 수행하는 법을 배운다든지, 아니면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기 위한 방법을 배운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이 서구 쪽에서는 많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고 간편하게 접할 수가 있고, 또 그것을 가르치는 분들은 꼭 출가자가 아니어도 되기 때문에 그냥 똑같은 재가자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들을 서슴없이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많이 각광을 받고 있는 편입니다. 아마 한국도 그런 것들이 많이 도입되겠죠? MBAR 이라고 그러나? MBSR 인가 그런 것도 그런 종류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패턴들이 많아지는 것은 참 좋은 부분이기는 한데, 중요한 부분을 하나 자꾸 까먹습니다. 수행을 해서 해탈에 이르러야 된다, 수행을 해서 윤회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그런 위험성은 항상 존재를 하는데도 그부분은 자꾸 간과를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우리 같은 선원 특히 스님들이 지도하는 선원들은 입지가 앞으로는 점점 더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접근성도 용이하지 않고 딱딱하고, 또 집중수행을 자꾸 시킬려고 그러고, 그리고 해탈을 목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계속적으로 인도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그런 부분보다는 지금 당장의 행복한 것, 당장의 뭔가 해결하는 것들을 바라는 것들이 많아지게 돼있습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많이 바뀌어집니다.

 

여러분들에게 경책이 될 만한 것들은 과연 뭐가 있을까?

내가 수행이 어떤 부분에서 걸림이 있고 수행이 잘 안 되어나갈 때 무엇으로 인해서 경책을 삼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죠? 경책하는 부분들은.

어떤 경우에는 마음속으로 경책할 때 '아,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 '조금 더 열심히 수행해야지' 하는 마음을 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대상을 가지고 해서 자기가 존경하는 분이라든지 스승님에게 얘기를 함으로 인해가지고 그 부분을 넘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경전을 통해가지고 '어, 그래 이 진리를 따라가야지' 하는 마음을 다시 일으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본적인 수행들, 자애수행이라든지 붓다눗사띠라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가지고 '아, 수행하니까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고요해지고 편안해지는데 왜 내가 이걸 등한시할려고 하지?' 하는 그런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래서 참 다양합니다.

 

어떤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과거를 돌아보면 조금 효율적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법을 만나기 전에 과거에, 특히 오늘 같은 때는 백중입니다. 백중인지 몰랐죠? 스님은 백중날이 제 속가 모친의 기일이기도 하고, 또 새로 태어난 날이기도 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거는 항상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테라와다 불교를 만나기 전에는 여러분들이 아마 습관적으로 백중 때는 가서 제사올리고 이렇게 해왔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한번 돌아보십시요. '그때 내가 왜 그랬지?' 하는 마음이 이 법을 만났기 때문에 '아,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는 마음을 다시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방식에서도 지금 많이 바뀐 것들을 여러분들이 확인할 수가 있고, 또 문제에 부딪쳤을 때 화가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든지 이럴 때는 그때는 외부적인 것으로써 풀려고 했는데, 그걸 잊어버릴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일부러 피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술이나 이런 것으로써 달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수다로써 해결할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그거보다는 화가 일어나면 '어, 화가 일어났네' 하면서 화가 일어난 것을 분명히 알아차릴려고 하고, 망상부리는 것들을 분명히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렇게 바뀐 것들을 보면서 '아, 그래도 내가 많이 바뀌었구나. 조금 더 해야지' 하는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과거의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올려가지고 내가 지금 하는 것들이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 하는 경책을 자꾸 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점검을 받고, 저기 자신이 조금 더 스스로를 경책할려고 하고, 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사띠를 자꾸 유지할려고 하고 그런 경향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게 맞습니다.

스승을 대상으로 한다든지 외부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스승은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스승, 저 스승으로. 외부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럼 외부적인 게 이것에서 저것으로 자꾸 바뀔 수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그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마음은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경책을 할 수가 있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려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만 됐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일단은 그래도 바른길로 나아가는 조건들은 갖추게끔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 그런 게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남의 집에 일을 봐주면서 남의 집을 청소해주고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난하니까 옷 한벌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가난하니까서 집 한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분이 있었는데 어떤 스님의 권유에 의해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를 해서 보니까 먹고 입고 하는 데는 크게 불편함이 없거든.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되면 나태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많은 선근공덕을 쌓기 위해서 조금 더 빠르게 해탈에 나아가기 위해서 출가를 했는데도 그걸 잊어버리게 되는 거라.

 

스님들이 자꾸 빠지는 오류가 그겁니다. 자기 자신을 경책할 줄을 모릅니다. 아직 아라한에 이르기 전에는 누구든지 실수를 저지르게 돼있고 잘못을 저지르게 돼있는데 자기 자신을 경책을 하지 않습니다. 자꾸 합리화시킵니다. "이것 때문에 그렇다, 아니면 네가 잘못해서 그렇다" 자기 자신을 경책할 줄 모르니까 자기가 지금 출가한 것들이 방향이 자꾸 어긋나버리게 됩니다.

해탈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속적인 것으로 더 가지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일반인들보다도 더 못한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을 참회할려는 마음보다는 그것을 덮을려고 하고 감출려고 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킬려고 그럽니다. 아마 지금의 조계종 사태들도 아마 그 일환들에 속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 이 스님은 출가하고 나서도 자기가 그 누더기 옷하고 자기가 가진 소지품을 한쪽에다가 놔놓고 항상 그걸 보면서 경책을 합니다.

조금 게으른 생각이 일어나고 수행하고 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면 그걸 보고 경책을 합니다. '아니야. 내가 다시 이 옷을 벗고 나갈 거 같으면 또 남의 살이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야 된다' 하는 거라.

 

여러분이 지금 의식의례들이 많이 바뀌었고 또 마음도 많이 바뀌었지만 한번 스스로들 경책을 해보십시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정신적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면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을 그냥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만 수행을 하고 있는것인지, 아니면 진정하게 해탈로 나아가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있는 건지, 과거보다는 많이 바뀌었지만 스스로를 많이 자꾸 경책할 줄 알아야 됩니다.

 

'아, 이거 조금 더 내가 마음을 다잡고 해탈로 향해서 나아가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다잡아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출가한 스님이 출가한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냥 호의호식하면서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는 거와 똑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꾸 외부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스님 네가 잘못했지", "이거 갈아엎어야 된다." 밖에 것 갈아엎으면 뭐 할거고, 문제해결이 되나?

자기 자신을 자꾸 스스로 경책하는 버릇들을 들여야 됩니다.

 

경전에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대 자신이 스승이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것은 출가한 스님이나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스승이라는 겁니다.

그럴려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아, 이건 내가 잘못하고 있다, 잘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판단할 줄 알아야 되고, 그리고 잘못한 것들은 자꾸 스스로 경책하면서 참회할 줄 알아야 됩니다. 또 사띠를 놓쳤으면 '아, 사띠를 놓쳤다' 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바른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꾸 사띠를 챙길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꾸 보호하게 되는 거라.

악으로부터 보호하게 되고, 해탈이 아닌 다른 길로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게 될 때 자기 자신이 스승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기 자신이 바로 의지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게 됩니다.

외부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면은 외부적인 것이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피난처가 되지 못하면 그것을 비방을 하게 됩니다.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피난처가 되지 못한 것도 잘못이지만, 그것을 비난하는 자기 자신도 자기자 신의 의지처나 피난처가 되지 못한 거는 생각을 못한다는 거라.

가장 좋은 것은 자기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가면서 스스로를 경책하게 될 때 그때 사람들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럴려면 지금 현재 과거보다도 조금 더 나은 상황이 돼있어야 됩니다.

조금 더 사띠할려는 마음이 일어나있고, 조금이라도 더 탐·진·치가 일어나있으면 탐·진·치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자기의 마음이 악한 것보다는 선한 것들이 자꾸 일어나는 상태가 돼있을 때, 스스로를 자꾸 경책할 수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향상이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을 경책할 수가 있게 됩니다. '아직은 멀었다'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분은 조금 더 바른 방향 해탈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의 이 스님도 자기 물건을 보면서 스스로를 보면서 자꾸 경책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물어봅니다. “너 또 어디 가냐?” “스승님 만나러 갑니다.” 그분에게는 그게 스승인 거라. 매일같이 스승님 만나러 가는 거라.

그러면서 이 스님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았을 거라. 그러고 돌아와서 다시 또 마음챙기면서 사띠를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관찰을 해나갔을 거라.

 

여러분들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무상··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집착을 하게 됩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 스승에 대한 집착,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인데 이렇게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원망하고 집착하게 된다는 거라. 대상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이 윤회를 만들어 냅니다. 끊임없이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그 집착하는 것들이 바른 것들도 나중에는 놔버려야 되는데 바르지 못한 것은 더더구나 빨리 놓아버려야 됩니다. 의식과 의례에 대한 집착들, 또는 살아가는 것이 그냥 이렇게 살아가도 된다는 것에 대한 집착들, 바르지 못한 것들은 빨리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늘 같은 날 백중 기도하고 염불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법문 듣고 수행하고 하는 거라.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사띠를 할려고 더욱더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바른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집착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그 스님들도 자기의 다 떨어진 옷가지와 물품들에 대해서 집착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스승이라고 여겼고 매일 같이 가서 경책을 했습니다. 경책할 때는 그것이 좋은 방편이 됐는데, 그것도 집착의 대상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마음이 심란하면 선원에 와서 수행하고 싶어할 거라. 수행 안 하면 심란하니까. 그런데 심란한 걸 집에서도 해결할 수 있는데도 꾸역꾸역 선원에 옵니다.

오늘 스님이 법문을 안 하면 마음이 허전해. 법문에 대해서도 집착을 합니다.

 

집착할 대상이 떨어졌을 때 자기 자신이 스승이 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꾸짖고 경책하고 참회하고 그리고 사띠를 계속 챙기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기 자신이 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기 자신이 인제 어느 것도 내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내가 갈고 닦아서 바른길로 나아가야 된다, 해탈로 나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을 때, 자기 자신이 스승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의지처로 해서 그것을 피난처로 해서 끊임없이 나아갈려고 하게 됩니다.

 

깨달음의 맛을, 지혜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은 집착하는 것이 점점 더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이 스님은 이제는 더 이상 그 숲에 있는 누더기 옷과 물품들을 보러가지 않아도 되는상황이 됐습니다. “요즘 왜 스님은 스승님 만나러 안 갑니까?” “인제는 안 가도 됩니다. 그것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을 떨쳐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스승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게 될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스스로를 의지해서 해탈로 나아가는 길,

또 하나는 어떤 다른 외부적인 대상을 의지해서 그래도 진리로 나아갈려고 하는 길,

그 나머지 길은 여러분들이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비록 스승이 필요하고 법문이 필요하고 또 부처님 가르침이 필요하고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도 언젠가는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버리고, 법문을 하든 말든 또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수행처이든 아니든 그것에 관계없이 계속적으로 수행을 하고 해탈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많이 힘들고 또는 수행하다 보면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즐겁고 기쁜 경험들, 괴롭고 힘든 경험들, 그런데 그 길은 해탈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면 너무나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대상을 놓아버린다든지, 대상을 알아차리다 보니까 너무 즐겁고 너무 기쁨이 많아서 그것에 집착을 한다든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는 현상은 현상일 뿐이고 그것은 내가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호흡도 내가 알아차릴 대상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알아차릴 때 호흡이 있는 줄을 압니다. 평상시 때는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수행을 안 하면 변해가는 것이 괴롭다는 것도 일어나지 않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기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기 때문에 호흡이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을 지금 바르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쁨들이나 괴로움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꼭 마찬가지 대상이라고 판단을 하고 대상으로써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한다든지 그것에 대해서 멀리 벗어날려고 한다든지, 그럴 것 같으면 호흡도 불안정하게 되고 호흡도 인위적이 되듯이, 수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상들도 인위적으로 바뀌게 되고 내가 조작을 하게끔 됩니다. 똑같은 대상입니다.

호흡이라고 하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수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들도 똑같은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을 대상으로써 자꾸 보게 될 때 사람들은 바르게 자기관찰을 하는 사띠를 해나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깨달음에 이르게 해줄 수 있는 스승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소원을 들어줄 부처님이 안 계시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부처님이 있어가지고 백중날 여러분들의 조상들을 천도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이 있어가지고 여러분들을 해탈로 이끌어주지를 못합니다. 스스로 그런 착각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리는가에 따라서 해탈로 나아가지고, 못나가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관찰을 하다 보면 자기의 잘못된 것들이 자꾸 보여집니다.

남을 자꾸 폄하할려고 하는 것, 남을 비난할려고 하는 것, 자기 자신을 내세울려고 하는 것, 대상을 만나면 금방 성냄이 일어나는 것, 이런 자기의 잘못된 것들이 자꾸 보여집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꾸 남을 비난하고 자기를 내세우고 성냄은 그냥 그대로 밖으로 표출되게끔 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보일 때, 그것이 대상이 됐을 때는 자기 자신이 '아, 내가 또 나를 내세울려고 했구나, 성냄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경험으로 알 겁니다. 머리가 큰 사람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안 바뀝니다. 참 바뀌는 것이 힘듭니다. “너 이런 거는 참 잘못하고 있으니까 바꿔!” 아무리 얘기해도 안 바뀝니다. 왜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스트레스 받아야 됩니까? 자기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을 보고 '어, 그래. 내가 이런 부분은 잘못한 것이 있구나' 하고 스스로 반성해서 바꾸어나가게 되는 거라.

밖에서 “네가 이거 못하니까 잘못한 거 바꿔” 한다고 해가지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알아차려서 고요하게 안정돼있어서 바르게 나아갈 때 그 밖의 대상들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더러움 부분 잘못한 부분이 자꾸 보여서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나가면서 집착하는 부분도 더불어서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모든 탐·진·치로부터 내가 내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딱 들게 됩니다. 그럴 때 자기 자신이 '아, 내가 참 훌륭한 스승을 두고 있구나' 하는 걸 알게끔 됩니다.

 

아무리 다툼이 많아도 그 다툼에 휘말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스스로가 지금 해결해야 될 것이 많아도 정신적인 괴로움 또는 정신적인 질병 아니면 고요함 이런 것이 많아도 그것을 해결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해결하고 나면은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 자기 자신이 해탈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꾸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자기 자신이 보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지, 아직 자기 자신이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 되는 것이지, 외부적인 것을 마음에 두고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가장 큰 스승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자신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그사람은 진정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대상에 신경쓰지 말고 자기 자신이 스승이 될 수 있도록 자꾸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독려하고 참회하고, 또 자기 자신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사띠하면서 알아차리면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난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