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가 일어나기 위해 담마를 듣고 배우는 방법과 목적
(suta maya ñāṇa, 수따마야 냐나) (20150819)
붓다의 가르침은 담마(dhamma, 法, 진리, 진실, 사실)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배워 실천하는 것으로 다섯 가지 감각(안·이·비·설·신)에 한정된 인식 차원을 넘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정보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차원을 부수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됩니다. 집착, 속박이 없어집니다. 궁극의 행복인 해탈에 이릅니다.
◎ 담마를 배워도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Pañc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suṇanto pi saddhammaṃ
abhabbo niyāmaṃ okkamituṃ kusalesu dhammesu sammattaṃ.
(빤짜히 빅카웨-, 담메-히 사만나-가-또 수난또- 삐 삿담망
아밥보- 니야-망 옥까미뚱 꾸살레-수 담메-수 삼맛땅)
「담마를 듣고 배워도 이해하여 명확히 납득하는 일도, 선을 행하는 일도 불가능한 이유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를 들으면 납득하고,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알아도 마음이 변함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배워도 좀처럼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5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5가지의 이유는,
1. kathaṁ paribhoti(까탕 빠리보-띠) : 가르침을 경시(대수롭지 않게 봄, 존경하지 않음)한다.
2. kathikaṁ paribhoti(까티깡 빠리보-띠) : 스승(설하는 자)을 경시한다.
3. attānaṁ paribhoti(앗따-낭 빠리보-띠) : 자기 자신을 경시한다.
4. vikkhittacitto dhammaṁ suṇāti anekaggacitto(윅킷따찟또- 담망 수나-띠 아네-깍가찟또-) : 집중력도 없고 산만(혼란)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
5. ayoniso ca manasikaroti(아요-니소- 짜 마나시까로-띠) :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지 않는다.
이런 다섯 가지가 없으면 지혜가 일어납니다. 인격이 향상됩니다. 지금부터 한가지씩 자세하게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먼저 ‘경시’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배운다는 것은 마음(뇌)에 무엇인가 새로운 데이터를 집어넣어 새로운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뇌로 바꾸어 생각해도 관계없습니다.
무엇을 배운다고 해도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태리어를 배우려고 생각하면 뇌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훈련을 하게 됩니다.
새롭게 들어오는 정보에 대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별것 아니다, 다른 것과 같다, 라고 생각하면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경시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훈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배워야 하는 것이다, 도움이 된다, 라는 식으로 경시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면 뇌는 문을 열어 데이터를 뽑아 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업을 받고 있을 때에도 마음을 자물쇠를 잠그고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는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시’라는 단어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왜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것은 이 ‘경시한다’ 라는 단어를 이해해 주십시오. 마음의 자물쇠를 열어 주십시오.
무엇이든 경시할 것이 아니라, ‘이것은 무엇이다’ ‘뭐라고?’ ‘아, 그래요?’ 라는 정도의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오픈됩니다.
자물쇠를 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1. kathaṁ paribhoti 까탕 빠리보-띠 : 가르침을 경시(대수롭지 않게 봄, 존경하지 않음)한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에게 풀피리 소리를 드려주면 금방 울음을 그칩니다. 아기들은 그 정도의 소리에도 흥미를 느낍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오는 정보가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기분이 중요합니다.
풀피리 소리에 흥미를 보이는 아기와 같은 기분으로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 분, 능력이 있는 학자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만나보면 놀랍니다.
모두 아이 같습니다. 밝게 잘 웃고, 상대가 학자이든 짜장면 배달원이든 누구와도 사이좋게 말합니다.
또한 모든 것에 굉장한 흥미(호기심)를 가집니다.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훨씬 머리에 데이터가 많이 들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뇌가 배우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무엇이든 즐겁습니다. 긴장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분들은 어떤 데이터라도 경시하는 것이 절대로 없습니다. ‘바쁘기 때문에 빨리 나가주세요’ 라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마음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성인은 아이와 달리 그러한 마음을 가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이라는 단어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억해 두십시오. 무엇이든 ‘처음’ 이라고 생각되면 마음은 잘 성장합니다. 처음으로 듣는다고 생각하십시오. 마음에 강한 임펙트를 줍니다.
그래서 데이터를 마음에 박아 넣습니다. 무엇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져 주십시오. 그래야 배울 수 있습니다.
깔보고 내려다보는 접근은 마음에 철의 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도 내려다보는 것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려다보는, 올려 보는, 그런 구별보다도 ‘이것은 무엇이지?’ 하는 흥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데이터가 전부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무엇이지?’ 라고 물어보는 것으로 좋은 것, 나쁜 것으로 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2. kathikaṁ paribhoti 까티깡 빠리보-띠 : 스승(설하는 자)을 경시한다.
가르침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보통입니다. 독학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런 사람도 책으로부터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진리는 자신 혼자 힘으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신 혼자서 발견하려면 시간이 엄청 걸립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스승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을 기억 해두십시오. 우리에게 지혜가 일어나는 채널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단언적인 조건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경시하면 끝입니다. 배울 수 없습니다.
스승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한 선생님이라고 하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스승에게는 경의, 경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배우고 싶다면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서 존경심이 없다면 머리에 그 가르침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특별히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십시오.
가끔 스승이 젊었다고 존경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데에는 나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승이 젊다는 태도로 듣는다면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14~5세의 미국인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침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영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하는 방법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고 마음먹어야만, 아이로부터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로부터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진리를 전하는 스승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들어오는 데이터를 받을지, 반발해버릴지,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 정밀한 기능을 부처님께서는 누구라도 알기 쉬운 말 ‘경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경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경시하는 것은 마음에 자물쇠를 잠근 것이 됩니다.
3. attānaṁ paribhoti 앗따-낭 빠리보-띠 : 자기 자신을 경시한다.
사람은 처음부터 뭐든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배우지만 잘 안되면 자신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닌가라고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형은 공부를 잘합니다. 동생도 형의 흉내를 내서 열심히 공부하지만 생각만큼 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단단해지고 닫혀버립니다.
왜 마음이 굳어지는 것인가요? 그것은 형은 할 수 있고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은 잘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딪칩니다. 이것은 어렵다, 자신은 머리가 나쁘다, 라고 착각에 빠집니다. 이것으로 자신을 경시하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능숙하게 할 수 없다, 멈추어 버립니다. 모처럼 뇌의 개발을 할 수 있는데 철의 장막을 쳐버립니다. 마음의 열쇠를 잠급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경시하는 일도 무서운 문제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병이 들어버립니다.
태어나면 알고 있는 것은 제로이고 모르는 것은 무한입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거기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흥미를 가져야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라는 자신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는 한 새로운 일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흥미를 가져야 합니다.
4. vikkhittacitto dhammaṁ suṇāti anekaggacitto 윅킷따찟또- 담망 수나-띠 아네-깍가찟또- : 집중력도 없고 산만(혼란)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
사람에게 1~3의 경시의 문제가 없어도 혼란한 마음으로 배워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배워도 마음이 혼란 상태라면 머리가 좋아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혼란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포인트에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망상, 개념이 폭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는 흥미를 가진 것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 같이 여기저기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머릿속은 망상으로 폭주하고 있습니다. 가면을 쓰고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무언가에 초점을 맞추어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카메라와 같아서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경우는 거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거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초점 기능 없이 마음은 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어지면 망상으로 폭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상으로 폭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1~3의 경시의 조건이 없는 사람은 상당히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인류의 99.9999% 정도는 이 망상에 당해 머리가 나쁩니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사시사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정보가 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망상이 회전하면 데이터를 뽑아 넣을 여유가 없습니다. 이것도 마음의 벽입니다. 그것도 철의 벽을 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빳사나 명상은 그것부터 고치기 시작합니다.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데이터를 넣어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데이터를 넣기 위해서는 먼저 망상의 폭주를 멈추고 초점을 맞추는 훈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명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5. ayoniso ca manasikaroti 아요-니소- 짜 마나시까로-띠 :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지 않는다.
배운 정보(데이터)를 머리에서 처리를 해서 정리 정돈하고 이해하여 보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꺼낼 수 있도록 색인도 넣어둡니다. 이것으로 뇌 안에서 상당한 프로세스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서양의 뇌과학책을 읽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신체란 이 몸과 마음을 5온으로 나누어 뇌의 프로세싱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색·수·상·행·식 이 5가지로 몸과 마음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본 것만으로는 뇌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 것을 처리, 정리 정돈, 이해, 보관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스로 생각한다’는 일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프로그램을 정리 정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사고나 패턴이 비논리적, 적당, 애매, 감정적, 선입관 등에 이끌린다면 배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각 개인은 자신 특유의 프로세싱 패턴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개인 생명에 자신 특유의 ‘안다’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사고 패턴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2명의 자식에게 상냥한 인간이 되어라, 손윗사람을 존경해라, 사람에게는 폐를 끼치고는 안된다, 등 똑같이 예의범절을 가르치지만, 성장해 어른이 되면 1명은 좋은 어른으로, 1명은 범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으로 같은 어드바이스를 하여도 해석방법은 각각 자신 특유의 인식 프로세싱으로 합니다.
이것으로 개인의 사고 패턴이 비논리적, 적당, 애매, 감정, 선입관으로 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고의 문제가 나옵니다. 배우고 싶다면 자신 특유의 사고 패턴을 반드시 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에 내가 부딪치는 문제는 그 사람들의 사고 패턴입니다. 아직도 그 벽은 있습니다.
이야기할 때는 초등학생 정도의 말로 합니다. 전문 용어, 불교인이 사용하는 빨리어 등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YES 라고 하는 것은 전부 NO 라고 이해합니다.
재미있는 예를 들면,
명상 지도를 하고 있을 때 “눈을 살며시 감아주세요. 또 말할 때까지는 눈을 닫은 채로 있어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하며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리고선 명상을 종료할 때 “눈을 뜬다 라고 3회 의도를 내고 나서 눈을 떠 주세요” 라고 말 할 때까지 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하면 몸을 움직이고, 뭐든 반대로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사고 패턴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찢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3종류의 경시의 문제가 없는 사람은 상당히 있습니다. 4번째는 별로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5번째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사고 패턴의 경우는 꽤 높은 벽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다면 이 개인 특유의 사고 패턴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은 사고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째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사고에 자유는 없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사고의 자유는 없습니다.
연구하거나 조사하거나 하는 것은 한편으로 자유롭게 보이지만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따라 관찰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망상만 멈추면 OK입니다.
부처님은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조건 5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온 사람은 처음부터 경시의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3종류의 경시는 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깨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머지 2가지, 망상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능력, 이것을 불교에서는 위빳사나 실천이라는 말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고 패턴을 찢어 여실히 관찰하는 능력을 주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배우는 경우 개인의 사고 패턴은 안된다고 하는 것만은 기억해 두십시오.
예를 들어 영어를 배우는 경우는 한국어의 사고 패턴에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로 한국적으로 생각한다면 몇 년이 지나도 영어는 말할 수 없고 쓸 수 없습니다.
사고 패턴 그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패턴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뿌리로부터 완고합니다. 이것으로는 머리가 좋아질 전망은 없습니다.
머리가 좋아도 나빠도 아무래도 좋습니다. 유연하다면 뭐든지 들어갑니다.
사고패턴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 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때그때마다 변신합니다.
변신하면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카멜레온과 같이 환경에 맞추어 변신합니다. 그렇다는 마음이 들면 상당히 지혜가 일어납니다.
이것으로 다섯가지의 설명은 끝났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도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쓰여져 있습니다. 겹치는 것은 생략하고 새로운 포인트만 설명하겠습니다.
6. duppañño hoti jaḷo eḷamūgo 둡빤뇨- 호-띠 잘로- 엘-라무-고- : 지식 능력이 갖춰지지 않는 것.
jaḷo eḷamūgo는 입으로부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장해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뇌에 장해가 있는 것입니다. 신체적으로도 장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6번째는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해결책은 없습니다.
7. anaññāte aññātamānī hoti 아난냐-떼- 안냐-따마-니- 호-띠 :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무지 자랑’, 정말로 가슴을 펴고 모르는 것을 자랑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전혀 몰라도 괜찮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면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7번은 이 세상에서 자주 있는 현상입니다. 무지를 자랑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지혜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일단 끝났습니다. 모으면 7가지입니다. 이 안에서 한 가지 항목은 여러분에게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외는 전부 우리가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다음으로 담마를 배우는 목적이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그 목적이 더러워져 있으면 법을 배워도 이해하는 것, 지혜가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 Makkhī dhammaṁ suṇāti 막키- 담망 수나-띠 : 위선, 악을 숨길 목적으로 듣는다.
위선은 자신을 훌륭하고 다른 사람이나 무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의 덕을 부수고 싶은 것, 경시하고 싶은 것, 자신에게는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한껏 부풀려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을 숨기는 것은 자신의 나쁜 부분은 숨기고, 상대의 나쁜 부분은 전부 밖으로 흩뿌려 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빨리어에서는 makkhī 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배워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정직하게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2. Upārambhacitto dhammaṁ suṇāti randhagavesī 우빠-람바찟또- 담망 수나-띠 란다가웨-시- : 실수를 찾아내 비난할 목적으로 담마를 듣는다.
겨루기 위해, 실수르 찾아 비난할 목적으로 법을 듣습니다. 가끔 스님에게도 이것을 목적으로 담마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이쪽의 실수를 찾을려고 합니다. 발견되지 않으면 인터넷 등에 비판하는 글을 씁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비판하더라도 인간답고, 지성인답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비판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르침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을 가지고 배우는 경우도 배울 수 없습니다. 따로 배우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도 그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먼저 솔직하게 배우면, 배운 것이 자신의 지식이 됩니다. 그런 것은 쓸모없다고 알면 버립니다. 그래서 배운 것을 나중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배울 때는 정직하게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3. Dhammadesake āhatacitto hoti khilajāto 담마데-사께- 아-하따찟또- 호-띠 킬라자-또- : 가르치는 사람에게 타격을 주고 괴롭힐 목적으로 법을 듣는다.
야유하는 소리를 하거나, 도중에 의미 없는 말을 해서 끼어들거나, 묻지도 않았는데 예정에도 없이 긴 시간 끝없이 말하게 하거나 합니다. 그러면 배울 수 없습니다.
4. Duppañño hoti jaḷo raḷamugo 둡빤뇨- 호-띠 잘로- 랄라무고- : 지식 능력이 없는 것.
이 경우는 설법을 듣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이, 잘 알고 있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상하에 바쁘게 움직이면서 듣고 있습니다. 허세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귀찮습니다. 알지 못하고,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은 알고 있기에 그냥 앉아 졸기라도 하는 편이 낫겠다는 기분입니다.
이것과는 별도로 선천적으로 지식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5. anaññāte aññātamānī hoti 아난냐-떼- 안냐-따마-니- 호-띠 :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무지를 자랑하는 오만함으로 ‘모른다’고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지를 자랑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배우는 것을 방해합니다.
비난할 목적으로 이론을 세워 배워도 올바르게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는 뇌에 입력된 정보를 거두어들이지 않습니다. 뇌가 별도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팔연발 총이라는 무기만은 취합니다. 배우고 있지는 않습니다. 무기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배워도 잊어버리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na sakkaccaṁ dhammaṁ suṇanti 나 삭깟짱 담망 수난띠 :
마음을 담아 정중(공경, 존중)하게 법을 듣지 않는다.
들을 때에는 확실히 데이터를 뇌에 넣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2. na sakkaccaṁ dhammaṁ pariyāpuṇanti 나 삭깟짱 담망 빠리야-뿌난띠 :
정중하게 학습하지 않는다.
3. na sakkaccaṁ dhammaṁ dārenti 나 삭깟짱 담망 다-렌-띠 :
정중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1~3은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간단하지요?
4. na sakkaccaṁ dhatānaṁ dhammanaṁ atthaṁ upparikkhanti 나 삭깟짱 다따-낭 담마낭 앗탕 웁빠릭칸띠 :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 의의를 정중하게 관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유명한 말씀 중에 【분노는 분노로 돌려주는 것으로 거둘 수 없다.】
이것은 화낸 사람에 대해서 성냄으로 되갚아 주어도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관찰해보십시오. 되갚아 준 경우를 보면 분노는 불필요하게 심해집니다.
그래서 분노에 분노로 되갚아 주어도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으로 느낀 것의 의미, 의의를 이것은 사실일까 하고 관찰해 주었으면 합니다.
5. na sakkaccaṁ atthamaññāya dhammamaññāya dhammānudhammaṁ
paṭipajjanti 나 삭깟짱 앗따만냐-야 담마만냐-야 담마-누담망 빠띠빳잔띠 :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도 실천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는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배워도 잊어먹게 됩니다.
◎ 가르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배워야 할 것인가를 설명해왔습니다. 그러나 배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 내용을 따라 확신이 없으면 배우는 사람의 마음에 임펙트를 줄 수가 없습니다.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교사는 미움받습니다.
Na kho ānanda sukaraṁ paresaṁ dhammaṁ desetuṁ
(나 코- 아-난다 수카랑 빠레-상 담망 데-세-뚱)
【아난다여! 다른 사람에게 설법을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니라.】
스승의 교수법도 중요합니다. 배우려는 학생으로서의 조건이 전부 갖추어져 있어서 완벽하지만 가르치는 스승이 서투르면 잘 되지 않습니다.
1. ānupubbīkathṁ ānupubbī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아-누뿝비-까탕 아-누뿝비- 까텟싸-미-띠 빠레-상 담모- 데-세-땁보-)
【순서를 올바르게 유지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지식은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마음에 새로운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서에 맞게 잘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의 경우는 특히 차례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마라톤을 하려면 갑자기 ‘달려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차례가 있습니다. 달리는 거리를 점점 늘려나가는 등의 훈련을 거듭하고 나서 마라톤을 하게끔 해야 될 것입니다.
2. pariyādassāvi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ā
(빠리야-닷사-위- 까탕 까텟사-미-띠 빠레-상 담모- 데-세-땁바)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만 이론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모든 예를 이용합니다. 그런 예는 경전 안에 많이 있습니다.
스님은 경전의 비유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체험한 일사의 생활, 그것도 최근의 사건을 예로 들기를 즐겨합니다. 이것은 스승의 의무입니다. 우화가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3. anuddayataṁ paṭi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아눗다야땅 빠띳짜 까탕 까텟사-미-띠 빠레-상 담모- 데-세-땁보)
【불쌍히 여겨(연민심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상대를 걱정해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성장하면 좋겠다고 하는 자비의 마음은 빠뜨릴 수 없습니다.
4. na āmisantaro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나 아-미산따로- 까탕 까텟사-미-띠 빠레-상 담모- 데-세-땁보)
【보수를 목적으로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절대로 금지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분이 많습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대가를 받고 설법하는 사람, 법회에 법사비를 얼마를 정하여 그것이 가능하면 설법하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돈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경우는 돈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박을 끊어 자유롭게하기 위해 설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병으로 쓰러져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면 고쳐줍니까?」 라고 묻습니다. 「1,000만원」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와 같이 완전히 한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신적인 병으로 24시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지, 돈이 아닙니다.
5. attānaṁ ca paraṁ ca anupaha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앗따낭 짜 빠랑 아누빠핫짜 까탕 까텟사-미-띠 빠레-상 담모- 데-세-땁보)
【자타에게 데미지를 주지 않고 가르쳐야 합니다.】
목을 손상시켜가면서까지 설법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듣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조사하면서 설법하면 좋습니다.
세속에서도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을 다음의 세대에게 전해 줍니다. 여러분이 학교에 가면 과거 선배들의 지식을 배우고 있습니다.
100년, 200년 걸려 배우고 연구한 것을 15분 만에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은 거의 200년 정도의 과학 연구 성과를 1년 만에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더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식이 더욱 발전해 갈 것입니다. 이 세대에서 다은 세대로 전하면서.
불교의 경우는 이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진리는 발견되어 있으므로 그 이상의 발전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지킬 의무가 생깁니다.
부처님은 지킬 필요는 없는,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이 이상한 해석을 가하거나 후대에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 다음 세대에 가르칠 의무가 생겨난 것입니다. 불교의 경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경하지도 말고 자신의 견해를 더하지도 말고, 가르침을 함부로 빼어서도 안됩니다.
가르치는 내용이 배우는 자의 성격애 맞지않는 경우도 ‘배움’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능숙하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불교는 배우는 자의 성격을 많이 신경씁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대학에 들어갈 때 성격은 묻지 않습니다. 성적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성적이 아니라 성격입니다.
불교의 진리는 기본적으로 누구의 성격에도 맞지 않습니다. 불교에 꼭 맞는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욕구의 덩어리, 자아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불교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스승이 배우는 자들의 성격의 공통점을 찾습니다. 그것으로부터 교육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취한 수단이 【질문해 주세요】입니다.
불교의 경우는 질문하는 것으로 채널을 열어둡니다.
양자(스승, 배우는 자)가 이상의 결정을 지킨다면 배우면서 지혜가 일어납니다.
불교는 완전하게 말해진 가르침입니다. 편파적인 것은 없습니다.
배우는 측만이 아니라 스승인 가르치는 측도 제대로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상으로 수따 마야(suta maya)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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