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팔지성도(八支聖道)의 순서 3가지 (20160319. 서울법회)

담마마-마까 2022. 2. 5. 09:00

https://youtu.be/PO3sfHmAMKc

* 팔지성도(八支聖道)의 순서 3가지 (20160319. 서울법회)

 

태국에 있을 때 나는 자띨라 스님을 자주 뵀어요. 그래서 교리적인 것을 처음에 이해를 좀 많이 한 게 자띨라 스님 때문입니다. 항상 오면 한 한달간 태국 방콕에서 머물면서 계속 강의하고 법문하고 하셨거든. 처음엔 그래도 내가 도움을 참 많이 받은 스님입니다. 우 자띨라 스님이.

 

요 교재는 내가 교재를 거의 중복해서 잘 쓰지는 않는데, 이 교재는 저번 주에 대구에서 썼던 교재입니다. 그걸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이.

 

아까 칠각지 부분 얘기하면서 로켓의 비유를 들어놨습니다.

로켓이 자동적으로 궤도를 순회(진입)할려고 할 거 같으면 1단 추진체 2단 추진체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궤도에 잘 돌고나면 그 추진체는 필요 없는 것이다.

칠각지라고 하는 것은 그 로켓의 추진체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실제로 해탈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것이지만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칠각지라고 하는 것들을 개발시켜 나가야 된다 하고 했고.

 

그러면은 팔정도는 뭘까?

칠각지(satta sambojjhaṅgā) 그렇게 했죠? 일곱 가지의 부품, 쉽게 얘기합시다. 그걸 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품이라고 봅시다. 편하게. 앙가(aṅga)라고 하는 것 가지 이런 것들을 부품이라고, 하나를 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품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수월할 겁니다.

그러면 일곱 가지 부품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인데, 해탈에 이르려고 하면 일곱 가지 부품은 다 버려버리게 되는 거고,

 

그런데 그러면 팔정도도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Ariya Aṭṭhaṅgika Magga) 그렇게 하니까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라는 거라. 팔지성도(八支聖道) 그렇게 되는 거죠?

아까는 칠지가 되죠? 칠각지! 칠각지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일곱 가지 부품이 되는 거고,

팔지성도는 뭐라? 성스러운 도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 부품,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부품인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칠각지는 성스러운 깨달음에 이르고나면 버려버리는 것이 되는데,

팔정도의 여덟 가지 부품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깨닫고 나서도 그것은 다 존재를 해야 하는 부품이라는 뜻이라. 그러면 이해가 됩니까?

그러면 여덟 가지 부품을 보통 팔정도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스님은 되도록이면 팔정도라고 안 하고 빨리어 용어 그대로 팔지성도(八支聖道) 그렇게 풀이를 합니다.

 

성스러운 도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 부품들을 보통 정견부터 해가지고 쭉 해놓은 걸 여덟 가지는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체계들이 정견부터 시작해가지고 쭉 진행이 돼서 다시 정견으로 온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이 여러분들한테 법문을 한다. 그러면 처음엔 여러분들이 법문 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일어나야만이 여기 와서 그 법문을 듣습니다. 그 법문 들어보니까 어, 좋거든. 좋으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해요? 내가 저대로 따라해볼까?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인제 그걸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 해보니까 자기가 그 원리를, 스님 법문한 것들을 인제 이해를 하게 되는 거라. 이해를 하고 나서는 그 길을 그대로 계속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거라.

그러다가 보면은 그것들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를 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걸 완전하게 이해된 것을 '정견'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정견이 생겨나기 위해선 먼저 뭐가 우선이 돼야 돼요?

내가 저거 한번 해볼까? 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법문하는 거는 나쁜 거, 여러분들한테 해코지하는 거 해줄 거는 아니잖아. 그렇죠? 도움되는 것들을 할 거 아니라.

그러면 아, 저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나야만이 그걸 들을려고 할 거 아니라? 그것도 정견인 거라.

 

쉽게 말하면. 그것도 들을려고 하는 것들, 도움이 될만한 바른 것들을 들을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정견인 거라. 그래서 처음에는 그렇게 해가지고 들었는데 나중에는 완전하게 이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래서 "팔정도는 정견부터 시작해서 정견으로 도는 쳇바퀴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팔정도를 표시할 때 수레바퀴로 표시'를 하죠.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가지고 들어볼까 해서 듣고 그거 들으니까 어, 말도 바른말을 해라고 한다, 그다음에 행동하는 것도 나쁜 행동 하지마라 한다 하면 그걸 그대로 따라 하게 되는 거고, 그러다 보니까 점점 기쁨도 생겨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나중에는 자동적으로 말을 할 때 바른말을 하게 되고 바른 생각도 하게 되고 그렇게 돼갑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이다 하는 것들에 대해서 견해가 완전하게 탁 확립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완전하게 이게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조금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수행으로, 수행을 통해서 그걸 증명할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하다 보니까 진짜 설명한 그대로 아, 이게 무상한 성품이고 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하니까 아, 진짜 청정해지고 깨끗해지고 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집중하는 힘으로 인해서, 그리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마음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더욱더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무상·고·무아를 알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완전하게 부처님이 말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 탁 알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된 상태를 정견이라고 그럽니다.

 

쉽게 말하면 정견부터 해가지고 정견까지 하는데 여덟 가지가 그대로 순차적으로 됩니다. 물론 그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이렇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돌아와지게 되는 거고.

그래서 보통 표시할 때 수레바퀴로 표시하는 게 그런 이유들입니다.

 

또 다른 얘기로 하면 팔정도는 삼학에 비유를 해가지고

'삼학에 팔정도를 계정혜라 해가지고 그렇게 표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 여러분들에게 물어볼게요.

계가 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선정에 들 수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없습니다.) 없습니까?

그러면 다른 말로 하면 계율하고는 관계없이 열심히 수행을 하면 선정에 들 수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없습니다.) 그렇게 드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라?

(수행자 대답 : ···) 칠청정 법을 얘기하지? 저번에 얘기한 거.

계율을 몰라도 선정에 들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선정에 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들을 자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선정은 완전한 것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또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지혜가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도 일정한 단계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계율이 바탕이 안 되어 있으면.

그럴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계율하고는 관계없이 선원에 살고 싶은데, 수행을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수행하면서 계율을 지키는 것들을 자꾸 훈련들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계율이 완전히 확립되게 될 때 그 수행이 무르익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지 계를 빼먹어버리고 수행해가지고 도와 과에 이르른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선정에 드는 것도 일정한 선정 이상은 되지 않고, 그것도 자재할 수 있는 법도 없고,

지혜도 일정한 단계 이상, 상카루뻭카냐나 밑으로 밖에는 되질 안 해. 그 이상은 해나갈 수가 없어요.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를 것 같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진 상태일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의 지금 선정이 어떤지 자기 자신의 계율이 어떤지 하는 것들이 전부 드러나집니다.

그러면 자기가 나쁜 짓 한게 자기가 아는데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 있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그 이상은 올라갈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도와 과는 더더구나 안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꼭 하고 싶다 그러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는 조금씩 어기는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를 지킬려고 하는 것들을 병행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계율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되고 나서,

그다음에 선정, 집중하는 힘들도 생겨나고,

그다음에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들도 되고,

이렇게 돼나가면 가장 순차적으로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렇게 못됐다고 해가지고 자기는 급해 죽겠는데 해야 되겠다고 하면 해. 하는데 반드시 병행을 해나가면서 그것들 토대들을 자꾸 닦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계정혜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계의 영역에는 정어, 정업, 정명 이런 것들이 포함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 네 가지, 세 가지, 이렇게 계정혜의 영역에 속하도록 분류해 놓은 것입니다.

그거는 쉽게 말하면 팔정도에 대한 교리적인 분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수행하는 입장이라면 팔정도는 수행이죠?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아까 칠각지 하고는 다릅니다.

칠각지는 그중의 일부분인데, 팔정도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팦정도 안에는 칠각지도 들어와 있는 거고, 칠각지에는 팔정도가 포함이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안 포함된 것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칠각지는 한 부분이라.

쉽게 말하면 수행하는 사람들한테는 꼭 칠각지가 다 있어야 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자기 스스로 수행을 해나갈 때 내가 어느 부분에서 뭐가 잘못돼나갔다 확인하기 위한 도구이거나, 아니면 가르치는 스승이 저 사람이 어디에서 지금 잘못되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는지 파악하기 위한 도구로써 칠각지를 이용합니다.

 

그런 것은 유용하게 쓰여질지 몰라도 그것이 없다고 해가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는 문제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칠각지에 나오는 항목들이 다른 항목들에서도 다 나오는 부분들이기 때문에 꼭 칠각지만이 갖춰져야 된다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정근도 있고, 오력도 있고, 사념처도 있고 이런 데에 칠각지에 있는 부분들이 대부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수행하고 하는 데에 이것이 갖추어져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닌데, 스승과 같은 지표로 삼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팔정도는 그거하고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팔정도는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이라.

지가 바른말 할 줄도 모르는 상태인데 남한테 만날 싫은 소리만 해쌌는 사람인데, 그 사람 보고 니 참 잘 살아간다. 니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나는 깨달았소 이러면서 성질 바락바락 내쌌는다, 그럼 그건 순 가짜라는 거라. 행위하는 짓들이 영 엉뚱한 짓들을 하면서 나는 뭐 수다원에 이르렀다 할 거 같으면 그것도 순 가짜라는 얘기라.

어쨌든 간에 팔정도는 그 항목 항목들이 순차적이든 아니면 어울려서 되든, 그것들이 전부 갖춰져야만이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든 안 하든 하고는 관계없이 그건 다 갖춰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수행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수행은 어떤 과정을 거친다고 했어요?

스님이 항상 얘기하듯이 수행을 하려면 맨 처음 뭐부터 하라고 그랬어요?

맨 처음에는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라.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게 되고 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들이 익숙해지고 나면,

그다음에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무상··무아의 성품으로 알려고 해라.

이게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패턴입니다.

그게 안 되면 이걸 할 방법이 없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해져있지 않은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 대상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대상이 변하는 속성으로 안다? 그것도 할 방법이 없다는 거라. 이거는 반드시 그 순서를 지켜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것 순서에 의해서 팔정도를 한번 재구성해봅시다.

 

팔정도는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여덟 가지가 완전하게 다 갖추어져야 됩니다.

그걸 적어놓은 게 여기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의 순서」 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거는 어찌 보면은 직접적으로 경전이나 아니면 논서들 하고는 조금은 방식이 다른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수행의 순서입니다.

첫 번째, 마음에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생활한다.

두 번째, 망상을 멈추기 위해서 현실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관찰한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해서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난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볼 거 같으면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수행의 순서입니다.

 

1. 마음에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생활한다.

 

그렇게 봤을 때 첫 번째 마음을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생활한다, 어찌하면 이리 할 수 있을까?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할려면?

마음을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으면 돼지 뭐. 항상 좋은 생각하고 있으면 될거 아니라?

예를 들어봅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는 자애수행을 하고 있는다든지 해가지고 마음에 계속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한다. 그럼 그 마음은 맑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이 다른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지는 시간들 그런 여유를 주지 않게끔 되는 거죠. 그건 팔정도의 어디에 해당이 될까?

정사유에 해당이 되겠죠! 바른 사유.(sammā saṅkappa)

 

또는 수행을 하고 있다. 수행대상을 바르게 겨냥해가지고 수행대상인 줄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항상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는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정사유로 수행에 대해서 어떤 데서는 바른겨냥이다 하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대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대상인 줄 알게 되는 것, 바르게 겨냥했을 때 그 대상인 줄 압니다.

대상인 줄 정확하게 겨냥을 못할 것 같으면 항상 관념화시키게 됩니다.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소리'인 줄 아는 것이 바른 겨냥인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 '어, 왜 저렇게 말을 하지?' 할 것 같으면 이미 개념화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리는 '소리'라고 알든지 아니면 '들린다'고 알아차려야 그것이 바른 겨냥이 되는 거라. 그래서 바른 겨냥만 하더라도 그렇게 알 때는 마음이 성질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마음이 깨끗한 상태가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보면 본다, 보이면 보인다, 아니면 들리면 들린다, 맛보면 맛본다, 걸어가면 걸어간다 하고 그 움직이는 것들 그리고 그 대상 자체를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렇게 알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게 수행의 기본입니다.

 

그게 안 되면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대상에 깊이 몰입돼가지고 마음이 뭘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대상이 일어난 줄 모르면 그걸 어떻게 할 거라? 할 방법이 없는 거라.

그래서 안되면 우리 마하시 갔다 온 스님들도 있지만 명칭을 붙여서라도 어쨌든 대상인 줄 알아라는 거라. 들리면 ‘들림’ ‘들림’ ‘들림’ 하든지. 뭐가 안되니까 그렇게 하는 거라. 자연스럽게 될 거 같으면 뭐 하러 그렇게 하라고 하겠어?

 

수행의 기본은 그거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바르게 겨냥할 줄 아는 것!

그걸 바른 사유라고 합니다.

무조건 선한 생각만 일으키면 그것이 바른 사유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바르게 알게 될 때 그것을 바른 사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은 쉬운데 생각만큼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응용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제일 위험한 것을 먼저 멈춘다.

바른 사유가 안 되는 것들은 뭣 때문에 그럴까? 바른 사유의 반대되는 사유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냥 ‘소리들린다’고 알아차리면 되는데 ‘왜 저렇게 말을 해’ 할 거 같으면 싫은 마음으로 그 소리들을 알아들었다는 얘깁니다. 개념화시켜가지고. 그러니까 바른 사유가 아니라 거친 사유나 아니면 삿된 사유들이 이미 일어난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면 평소에 내가 예를 들어서 내가 성냄이 좀 많다 하는 사람들은 뭔가 소리를 들을 때, 그걸 약간 틀어서 자꾸 듣는다든지 아니면 그것들을 나쁜 방향으로 자꾸 듣는다든지 부정적인 방향으로 듣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대신에 욕심부리는 성향이 좀 많은 사람들은 뭘 볼 때,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보여진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그걸 ‘예쁘다’ ‘뭐하다’ 이렇게 보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것들에 대해서 욕심부리는 것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제일 위험한 것부터 끊겠다.

성냄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부터 잘 알아차려야 되겠어요? 듣는 훈련부터!

그다음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보는 훈련들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루종일 그것만 한다고 처음에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성향들이 강한가 하는 것들을 잘 파악을 해가지고, 만약에 이번에는 내가 한달간 아니면 하루종일, 오늘만큼은 내가 반드시 성냄을 일으키지 않겠다. 아니면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 그리할 것 같으면 감각기관들 중에서 특히 중점을 둬야 되는 것들이 딱 드러나집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성냄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사람은 탐욕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사람은 게으름 부리는 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이 자꾸 방어를 해야 됩니다.

 

제일 위험한 것부터, 제일 큰 것부터 먼저 자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모든 것, 탐진치 일어나는 족족 그거 안 일어나게 다 잘라버리겠다. 공부가 안됐는데 그거 어떻게 다 잘려져 나갈 거라? 안 돼.

그러니까 자기에게 피해를 입히고 자기에게 괴롭히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판단해가지고 그것 먼저 자꾸 자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냄 없이 하겠다, 그러면 남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들부터 해서 또 언짢게 마음을 먹는 것들 그다음에 뭔가 할 것을 결정을 하지 못해서 이럴까 저럴까 하고 고민하는 것들 그다음에 화를 내는 것들 모든 것들 그런 것들은 다 자른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세 고리 중에서 딱 하나 먼저 자를려고 해야 됩니다.

 

게으름 부리고 있다. 만약에 만날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 출근할 때는 만날 바빠. 머리도 못말리고 간다, 그러면 내가 이 게으름은 잘라버려야 되겠다 할 거 같으면 지자기도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거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만날 똑같은 패턴대로 일어나면서 어떻게 게으름을 자를 거라? 그건 할 방법이 없어. 패턴 자체를 바꿔야 되는 거라.

그래서 바른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다 안 일어나면, 탐진치의 반대적인 사유가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게 안되기 때문에 바른 사유를 하기 위한 첫 번째가 큰 것 먼저 탁 자를려고 자꾸 연습들을 해야 됩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욕구가 확대되는 망상을 멈춘다.

큰 것들을 자르는 것도 물론 중요한데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탐진치가 일어나더라도 자기 혼자서 옹알옹알하다가 끝나버릴 것 같으면 크게 문제가 안 돼.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것들이 일어나가지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항상 문제인 거라. 성냄이 일어났으면 자기 혼자서 속으로 불뚝불뚝 해가지고 그냥 자기가 삭혀버리면 큰 문제가 안 되는데, 요놈이 문제가 뭐냐면 밖으로 말로 탁 튀어나온다든지 뭔가 행동을 한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문제가 돼버립니다. 확대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확대되는 것들을 멈추도록 해야 됩니다.

 

욕구가 확대되는 것, 성냄이 확대되는 것, 어리석음이 확대되는 것 이런 것들은 극력 막아줘야 됩니다.

탐진치 중에 하나를 끊는 것보다도 오히려 이게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게 되지 않으면, 바른 사유가 되지 않으면, 그다음에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바르게 될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이 똑바르지 못한데 어떻게 바른 행위를 하고 바른 말을 할 거라? 바르게 생활하고 하는 것들을 할 방법이 없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수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만이 그 대상을 끊임없이 쫓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쫓아가서 알 방법이 없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바른 사유를 해야 되는 거라.

그리고 그 대상을 끊임없이 쫓아가기 위해서는 평소에 말과 행동하고 하는 것들이 바른 방향으로 되어있지 않을 것 같으면 알 방법이 없어요.

 

적어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사유에서는 두 번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확대된다고 할 거 같으면 딱 멈추어야 됩니다. 뭔가 성냄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말로 탁 튀어나가려고 할 때는 어쨌든 입을 꽉 잡든지 뭘 하든지, 혀를 꽉 깨물든지 하든 간에 이게 확대되는 것들을 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자꾸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거는 훈련으로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이걸 멈출 수 있도록 아니면 확대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실수하기는 하더라도 자꾸 경각심을 가져야만이 이것들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악사고를 다스리는, 악사고가 확대되는 것을 막는 다섯 가지 방법에 대한 것이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들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은 나쁜 점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없애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점점 작은 나쁜 버릇 등도 없애도록 노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일의 경우도 같습니다. 비록 작은 좋은 일이라도 노력이 없으면 실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은 선행으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행을 늘려 가면 좋습니다.

나쁜 사고, 나쁜 행위를 그만두고 좋은 사고,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에의 길입니다. 신뢰받는 훌륭한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타인에 대해서는 온화한 사고를 유지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항상 사이좋게 지내고 평화롭게 지내고, 화합할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불편한 마음을 스스로 가지면 안된다는 거라. 아무리 원수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그냥 평화롭게 그런 마음들을 자꾸 가질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은 어떤 면에서는 돼있을지 몰라도 대인관계에서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어그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하고의 관게에서 항상 바른 사유를 하지 않으면 또 안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욕구로부터 멀어지는 사고를 실천한다.

이거는 자비희사를 자꾸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할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집착하고 하는 것들, 욕심에 대해서 집착하고 성냄에 대해서 집착하고 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그걸 하라는 거라. 남편이 요번에 보너스를 탔다. 그거 100원을 나한테 줬다. 그럼 그거 100원 들고 가가지고 백화점 가가지고 실컷 구두 사고 할 거 같으면 욕구가 더 생겨나겠지. 그럼 나는 욕구가 좀 많은 사람이라 할 것 같으면 욕구를 떨쳐낼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 그거 내버려야 돼. 100원을. 그것으로 인해서 욕구가 일어나는 것들을 막아야 되는 거라. 자기 성향이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냥 내버려봐야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일 하는 거라. 양로원 가서 그 100원을 쓴다든지, 그럴 것 같으면 욕구가 확대되는 것도 막을 뿐 아니라 자신이 우려하는 욕구들을 막아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리고 자신이 욕구로부터 멀어지는 훈련들을 자꾸 지속적으로 해나가게 되는 거라.

그런 식으로 멀어질 수 있는 것들을 하라는 거라.

물질적인 것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 되요? 정신적으로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라는 거라. 그래서 자·비·희·사 이것들을 지속적으로 계속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지하는 오계의 이익을 반조한다.

오계를 자주 지키면서 아, 참 계를 지키는 것들이 이렇게 좋구나 하는 것들이 이해하게 될 거 같으면 오계를 자꾸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는 상태가 지속이 되면 마음은 그렇게 좋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깨끗해지고 꺼릴 것이 없는데, 그러니까 마음은 자연스럽게 맑고 깨끗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오늘 만약에 오계를 받았다. 저녁에 집에 가가지고 돌아보는 거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 내가 오늘 계를 잘 지켰는가? 아, 내가 별로 어긴 것은 없거든. 잘 지켰거든. 그럴 거 같으면 잘 지킨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만족합니다. ‘아, 참 좋다 ’하고.

그게 오계의 이익을 반조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꼭 지킬려고 하게 됩니다. 지키니까 좋거든. 좋아야 더하게 되는 것이지 싫은 것들은 안 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는 아까는 자비희사를 마음으로만 실천했으면 인제는 행동으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사에 근거해서 행동으로 해본다.

그래서 말하는 것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행동한다, 행동하는 것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행동하는 것들을 자꾸 실천하도록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바른 사유는 할 수 있는 근거들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사유가 딱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바른말을 하고 바른행위를 하고 바른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해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이걸 지속적으로 카테고리 식으로 계속할 거 같으면 적어도 팔정도의 네 개는 어느 정도 숙달되게 됩니다.

이게 어느 정도 숙달될 때 마음은 고요해지고 청정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가끔씩 수행할 때 스님들이 맨 처음에 하는 것들이 뭐냐면, 맨처음에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너 1분에 숨 몇번 쉬는지 먼저 체크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1분에 숨 몇번 쉬는지 체크해서 뭐하겠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대상이 자기가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놔둬야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자기가 그 대상을 움직여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어있을 거 같으면 그렇게 하고 나서 그다음에 대상을 알아차려야 되는데, 대부분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지 않고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한다는 거라.

 

대상이 자연스러워지고 난 상태가 되고 나서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대상이 자연스러워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걸 알아차리면은 자기가 그걸 조절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숨이 헐떡거리고 할 때는 헐떡이는 걸 먼저 멈추고 나서 호흡을 알아차리라고 그러는 것이지, 그걸 떼어놓고 그냥 알아차리라고 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밥 먹고 나서도 마찬가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행을 한다든지 해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걸어가는 것들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바른 방법들을 택해주는 것들입니다. 그거는 뭐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몸도 마찬가지, 말도 마찬가지, 그다음에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 항상 고요한 상태가 유지되도록 해야 되는 거고, 수행에서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그때 대상을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가만히 놔둬봐봐. 가만히 놔둬보면 고요해지면 마음이 지가 대상을 압니다.

마음 지는 죽기 전에는 도망갈 법이 없어요. 대상을 항상 옮겨다니면서 알아차리게끔 되어있어요. 단지 나는 그것들을 알기만 하면 돼.

그거 쉬운 건데 왜 다들 거꾸로만 할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렇게 수행을 하지 마라라는 거라.

 

왜 그러느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해야 되는 거고 수행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수행도 할 때 앉아가지고 먼저 대상을 먼저 알아차리려고 하지 말고,

아 지금 마음이 고요해져 있는가? 그리고 몸이 편안한가? 뭔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가지고 조급해있지는 않는가?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고요하게 먼저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서 앉아있으면 긴장돼있는 것부터 먼저 알아차려가지고 긴장을 풀고, 그리고 마음이 고요해지기 위해서 멧따 바와나를 하든지 뭘 하든지 이렇게 하면서 고요하게 자꾸 만들고, 이렇게 해서 고요하게 될 때 가만히 놔둬버리라는 거라. 마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러면 마음 지가 뭔가를 압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든 아니면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 있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든, 그때의 마음은 즉시 알아차립니다. 탁 나타나면 그냥 그걸 그대로 압니다.

그럼 여러분들 지금 현재 상태는 그냥 그거 알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어 뭔가 알았네’ 하고 거기서 또 놀래버리면 안되는 거라.

1단계는 그렇게 해가지고 됐다고 할 거 같으면 첫 단계는 일단은 끼우게 되는 거라.

 

「그래서 첫 단계에서 팔지성도의 바른 사유(sammā saṅkappa), 바른 언어(sammā vācā), 바른 행위(sammā kammanta), 바른 생활(sammā ājīva)이라고 하는 4가지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 거라. 두 번째 단계가

 

2. 망상을 정지하고 현실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관찰한다.

 

쉬운 거 같은데 그리 쉬운 거는 아닙니다. 어떤 게 현실적인 것일까?

예를 들어서 수행을 한다. 예를 들어서 고요한 상태가 돼있다고 칩시다.

그럼 대상이 탁 나타났으면 대상이 나타난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마 지속이 계속 안 될 거라. 나타난 것은 아는데 어디 갔더니 마음이 또 사라져버려. 그럼 또 놔줘야 돼. 놔주면 뭔가 또 다른 걸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게 지금 현실적인 데이터입니다.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그럼 그렇게 먼저 알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어, 스님이 일어난 것은 사라지도록 보라고 하더라’ 할 거 같으면 탁 뭐가 나타난 걸 알자마자 그다음부터는 바로 가서 붙잡습니다. ‘요놈 어디 가노’ 하면서. 그래 하지 말아라는 거라.

현실적인 데이터라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여러분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만 알아차려야 되는 겁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대상이 일어나면 대상이 일어난 것을 즉시 알 뿐아니라 대상이 사라지는 것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또 수행이 더 깊어지면 대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들을 먼저 대상이 일어나기 전에 아, 마음이 먼저 앞서서 대상이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대상이 일어난 것들을 아는 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렇게 순차적으로 바뀌어져나가는 것이지 그냥 무조건 똑같은 마음이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다? 절대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수행력에 따라서 알아차리는 정도는 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걱정하지 말라는 거라.

지금의 상태에서는 내가 요렇게 알 거 같으면 요것만 알면 돼.

그걸 놓치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거 어떡할 거라? 지금. 그거 염려할 필요 전혀 없고 그리고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되나’ 그럴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놔두면 어느 순간에 자연스럽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망상을 정지하고 현실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관찰한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지금 현재의 상태, 지금 현재의 있는 상태 그대로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아는 대로만 알면 돼. 그러고 나서 끊어지더라도 또 그런 상태가 되면 또 그렇게 알고 해가지고 그리하더라도 그 수행을 계속 지속해나가 주기만 하면 돼. 여러분들은. 그것만 하면 되는 것이지 더이상 할려고 하면 안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기 위한 것들이 밑에 쭉 적어놨습니다.

요거는 팔정도의 부분에는 이성편은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의 진행과정으로 봤을 때는 반드시 1단계 영역이 끝나고 나면 요단계가 들어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집어넣은 거니까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첫 번째, 먼저 쓸데없는 망상을 삼간다.

생각하는 거 하지 마.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 지금 대상이 어디에 있을까? 쓸데없는 거라. 수행할 때는 그거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 생활에서도 그거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뭐한다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하는 거 없습니다.

판단하고 선택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뭔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은 그런 거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일어난 것들을 그대로 알고 실행할 뿐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이게 망상인지 바른 사고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은 뭐냐 망상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망상은 그것으로 인해서 뭔가 결과를 나타내질 않습니다. 그리고 망상은 나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망상은 내마음을 더욱더 괴롭게 만들어줍니다.

그렇지 않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지금 현재 뭔가를 계획하고 사고하는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은 일부는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쓸데없는 망상은 반드시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과거를 생각한다 그럴 거 같으면, 이게 망상이 안 될려고 할 거 같으면 과거를 생각했다 그러면 그사람에 대해서 고맙다고 할 거 같으면 고마운 것에 대해서 내가 지금 현재는 아, 그 사람이 잘되기를,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자애수행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뭔가 계도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런데 망상만 부리고 그냥 끝나버린다, 그리고 생각만 하고 끝나버린다 그건 망상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 생각을 항상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여러분들 많이 하는 거,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는 멈춘다.

비방하는 것, 남의 말 옮기는 것, 특히 뭔가를 바라는 것, 수행에서 감딱지가 탁 떨어지듯이 떨어져가지고 나한테 다가와지는 것, 초능력이 생기기를, 삼매 뭐 어쩌고. 왜 쓸데없이 그런 거를 하느냐는 거라.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라. 그것들이 전부 다 쓸데없는 이야기, 쓸데없는 말의 근거가 됩니다.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은 꼭 말을 통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벙어리들은 뭐로 가지고 통합니까? 수화를 가지고 말을 통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팔정도를 옮길 때 바른 말이라고 안 하고, 항상 '바른 언어'라고 쓰는 이유가 말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마- 와-짜-(sammā vācā)라고 하는 것들은 말이 아니고 전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럼 만약에 여러분들이 뭔가 나에게 그런 신통력이 생기기를 하는 것들을 바란다, 그것도 바른 언어가 아니게 됩니다. 생각만 하는 것들이 포함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말의 범주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도 남의 말을 옮기는 거와 꼭 마찬가지로 실증되고 확인된 것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것들을 경험한 것들이 아닐 것 같으면 바라지도 말고 하지도 말고 옮기지도 말아라는 거라. 그런 것들은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망상을 계속 일으키게 하는 거라. 그 패턴들을 빨리 바꿔라는 뜻이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

자주자주 들어야 됩니다. 배우는 목적은 수행을 하더라도 좀더 바르게 하기 위한 겁니다. 배우지 않는 상태일 거 같으면 아까 얘기했지만 가짜 사띠를 사띠라고 착각하면서 살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사띠는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거라.

배우니까 아, 이것은 바른 사띠가 아니었구나. 그럼 지금 현재는 사띠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거라. 좀더 노력을 거기에 기울이게 된다는 거라.

걸어가더라도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지금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더라도 그것만 할려고 그런다는 거라. 그러다가 보면 벽에 퉁 부딪친다는 거라. 온통 집중해있기 때문에 앞에 부딪치는 줄 모르고 집중하고 간다는 거라. 지금의 상태는 그것이 바른 사띠라는 거라.

그런데 바른 사띠를 안 할 경우에는 똑같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는데 이미 저기 뭐가 있으면 걸어가면서도 그것이 보여. 그러면 자기가 자동적으로 거기 멈추고 있는 거라. 바른 사띠를 안 하고 있다는 거라.

배워야만이 그렇게 집중하는 힘들도 커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들을 자꾸 배울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는 팔정도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반드시 단계적으로 해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실행편이 인제 팔정도에 연결이 됩니다.

 

그게 됐을 때 그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 네 번째,

악사고와 악행을 멈추고 선사고와 선행을 하도록 노력한다.(sammā vāyāma)

바른 노력이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바른 노력은 뭘 얘기할까?

수행에서 바른 노력은 어떤 것이 해당이 된다고 했습니까? 다른 거 없습니다.

부처님이 대상을 몇가지로 정해놨어요? 사마타 수행에서는 40가지,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신수심법 입니다. 그 대상을 벗어나지 않으면 바른 노력입니다.

그 대상을 벗어나버리면 그건 바른 사유도 안 되고 바른 노력도 안 되는 거라.

예를 들어서 성냄이 있다. 성냄의 바른 대상은 어딥니까? 성냄이 일어나는 내 마음입니다. 그럼 성냄이 일어나는 마음이 대상이 되는 것이지 대상이 밖에 나가버렸다. 밖에서 하는 말이라든지 아니면 그 사람에게 가있다. 그럼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해가지고 내가 그 성냄을 다스린다? 그거 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대상만 봐야되는 거라.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바른 대상이라.

대상의 영역을 명확하게 자신이 인지하지 못할 거 같으면 항상 마음은 대상 밖으로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그것들을 항상 주의해야 됩니다.

바른 노력은 물론 경전에는 일어난 것 선한 것들은 더 일으키도록 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해놨는데 그것들을 다 통틀어서 얘기하면은 바른 말이라는 거라. 대상을 대상이 있는 그대로 지금 현재 분명하게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것이 바른 노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상인 줄만 알 거 같으면 바르게 이끌어져 나간다 하는 겁니다.

그게 네 번째입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 정보는 접하는 대로 그대로 두고 사띠한다.(sammā sati) 바른 알아차림.

팔정도 순서가 조금 많이 다르죠? 보통 정견부터 해가지고 정사유 이렇게 쭉해가지고 오는 방향하고는 조금 많이 다를 겁니다.

이거는 스님의 방식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고, 수행자의 방식으로서 이해를 한 거니까 그렇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꼭 맞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렇게도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하는 그런 정도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 정보는 접하는 대로 그대로 두고 사띠한다.

대상을 그대로 둬야 됩니다.

대상을 왜곡해가지고는 바르게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여러분 보고 뭐라 하든가? 그냥 대상은 대상일뿐입니다. 그런데 대상을 보는 여러분들 마음이 그걸 왜곡합니다.

밥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럼 우리는 그거는 쓰레기라고 봅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먹이라고 봅니다. 대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뿐입니다. 그 떨어진 밥이 뭐라케? 나를 쓰레기라 불러라, 아니면 먹이라고 불러라 그러든가? 그건 아니잖아. 대상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려고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요걸 갖다가 왜곡해서 본다는 거라. 소리들리고 냄새맡고 하는 것들을 내 방식으로 자꾸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라.

 

대상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소리들리면 소리들린다고 알아야 되는 것이지 '무슨 소리'라고 할 거 같으면 안된다는 거라. 나에게는 만약에 그게 ‘아버지 소리’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모르는 사람의 소리가 되는 거고, 각각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왜 자꾸 나는 그걸 아버지 소리라고 하느냐는 거라. 그냥 소리일 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자꾸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정보는 접하는 대로 두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육근을 통해서.

수행대상은 어디라고? 바른 노력은? 신수심법인데 내 몸과 마음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벗어나버려서는 안되는 거라.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은 뭘 통해서 알아요?

육근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그럼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대상을 접하는 그대로 두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보인다 들린다 하고만 알면 돼. 그 이상을 자꾸 넘어갈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이 그리고 집중력을 키운다. (sammā samādhi)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는 하더라도 집중력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그냥 만날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만 하는 거라. 죽을 때까지 그것 닦으며 끝나.

그럼 왼발 오른발 하다가 벽인줄 모르고 퉁 부딪친다고 하더라도 지금 수준에서는 계속 그렇게 밖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왜? 집중하는 힘들이 없기 때문에. 그냥 집중 막 이렇게 해서 볼 거 같으면

집중력이 크면은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집니다.

 

가끔 스님들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특히 스님 같은 경우는 ktx 타고 오잖아. ktx 타고 오면서 밖에 보이는 것들을 착 보면 글씨 뭐라고 쫙 써놔 놨거든. 순식간에 300km 이상 달리니까 싹 지나갑니다. 싹 지나가는데 그게 글자가 뚜렷하게 보여.

글자가 열 몇자가 있어도. 여러분들도 오늘 집에 가면서 시내버스 타고 가면서 한번 간판에 숫자 아니면 무슨 글자 확 지나가고 나면서 내가 알 수 있는 것, 내가 집중력이 크면 그걸 외우는 것이 열자 외웠다가 스무자 넘어로 늘어날 거고 집중력이 더 크면 삼십자로 늘어날 거고, 늘어나지게 된다는 거라,

 

집중력이 크면 알아차리는 것들이 더 많아져버립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라.

그러면 지금 현재 왼발 오른발 할려면 그렇게 하면 돼. 그런데 이걸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알려고 한다? 집중력이 커지지 않으면 그걸 알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야 되는 거라.

특히 모르는 곳에 간다. 그러면은 이걸 전체를 다 외워야 됩니다. 그래야 십년 뒤에 가더라도 이 거리를 알아. 지나가면서 이걸 쭉 다 해가지고 그대로 입력을 요거 요거 하나씩 하나씩 몇키로를 쭉 외우고 나면 십년 뒤에 갈 거 같으면 그중에 어느 건물이 바뀌었다 할 거 같으면 바뀐 건 뭐가 바꼈다는 건 몰라도 이게 바뀌었다는 것은 알아. 그럼 그전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이 골목을 전부다 유추해내게 되는 거라. 경을 외워도 그렇게 사띠하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집중력이 강할 때는 몇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다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띠를 키울려면 집중력이 없이 그걸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순수하게 위빳사나를 하는 사람들은 사마타수행 필요 없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거는 어떤 방식으로든 집중하는 힘들이 생겨나야만이 그게 가능해지는 겁니다.

물론 순수 위빳사나라고 해가지고 그게 집중하는 힘이 커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해봐도. 스님도 마하시 방법으로 배웠기 때문에 순수위빳사나 방법으로 해왔지 그냥 사마타와 곁들여가지고 하는 방법을 배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굉장히 힘듭니다.

찰나찰나 자꾸 대상을 바꿔줘야 되기 때문에 그 대상을 바꿀 때는 집중하는 힘은 자꾸 깨져버리게 됩니다. 집중은 있지만 집중의 강도는 그렇게 강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가끔씩은 한시간 동안 계속 앉아가지고 코끝 하나만 어떨 때는 한시간 동안 하면서 집중력을 키워줍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순수 위빳사나로 들어서가지고 코의 변화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대상들을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 뒤에 하는 것들은 집중하는 힘이 크기 때문에 알아차려지는 게 훨씬 많아지는 거라. 변화되는 것들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집중하는 힘을 키워라. 그게 바른 삼매 부분입니다.

그게 수행에서 두 번째 부분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그다음 세 번째 부분

 

3.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해서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난다.

 

지혜인 바른 견해(sammā diṭṭhi)를 말합니다.

 

아까 얘기했죠?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알아차려라.

대상에 집중력이 있을 거 같으면 그 대상은 틀림없이 똑같은 것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대상은 항상 변하는 게 보입니다.

숨을 들이쉬는 걸 알아차려도 집중력이 커져있는 상태에서 숨을 들이쉬는 것을 보면 똑같이 들이쉬는 것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변하면서 들이쉬는 게 보입니다.

 

그러면은 이 부분은 지혜를 기르는 부분은 얻어걸리는 것이지, 내가 지혜를 개발할려고 노력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얻으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쭉 하다 보면 이거는 자꾸 따라와지는 겁니다.

그러면 나 자신은 ‘어, 내가 이 지혜를 알았네’ 하고 아는 것뿐이라.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고정된, 변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발견한다.

지혜가 생기면 지금까지 있던 자아라고 하는 착각이 없어진다.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바뀌어져 나갑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이 바뀌는 것은 이 상태가 될 때 자신이 확 바뀐 것을 압니다.

그전에는 바뀌는지 안 바뀌는지 자신이 잘 몰라. 마음이 아, 내 마음이 백팔십도 바꼈네 하고 아는 것들은 이런 상태를 한번 사이클을 겪고 나면은 확 바껴버립니다.

그런데 몇번 바뀔까? 이 팔정도는 사이클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현재는 팔정도의 사이클을 그대로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렇게 정확하게 따라왔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이 한번 착 바뀌어버립니다.

이렇게 바뀌는 것이 계속 끊임없이 바뀌어집니다. 계속.

 

무상한 거 한번 알고 나면 거기서 끝날 거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상의 강도도 훨씬 크게 또 한번 마음이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팔정도는 사이클로 돌면서 바른 견해가 다시 또 확고해지고 또 더 확고해지고 단단해지고 하면서 자꾸 사이클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내가 이 부분은 조금 더 보완해야 되는 것이다, 그럴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꾸 알게 되고, 그것들을 보충할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완전해질 때 아, 인제 나는 도와 과에 들었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게 마지막 부분에 '자아라고 하는 착각이 얼마만큼 없어졌는가?' 그것으로부터 판단하면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집착하는 것들이 얼마만큼 없는가를 가지고 내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했다 하는 걸 스스로 알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자! 이게 팔정도의 끝부분입니다.

쉽죠? 팔정도! 그리고 팔정도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고 또 전부 수행하고 관계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냥 교리적으로 알려고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īti.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스스로 분명하게 이해하여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