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支聖道의 순서 3가지) (20160311.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28. 09:00

https://youtu.be/4vno02p7B_I

*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支聖道의 순서 3가지) (20160311. 대구)

 

오늘은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 팔지성도(八支聖道), 보통 팔정도라고 하는 것, 그 팔지성도의 순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팔정도는 잘 알죠? 그래서 팔정도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압니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Ariya Aṭṭhaṅgika Magg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원어 그대로 할 것 같으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라 해서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 한자로 써야 사실은 맞는데, 그 여덟 가지들에 보면 전부 삼마사마디, 삼마사띠 이렇게 해가지고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번역할 때, 아리야앗탕기까 막가에는 삼마(sammā)라는 용어는 없죠? 그러니까 팔정도라고 하면 사실은 안 되죠? 그런데 뒤에 주 내용에는 보면 바른 집중, 이런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팔정도라고 하는 것으로 널리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덟 가지 길이 있습니다.

이거는 부처님이 고(苦)에 대해서 얘기할 때,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들은 늙고 있는데 안 늙을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거고, 죽어야 되는데 안 죽을려고 하고 이렇게 한다는 거라. 어쨌든 인위적으로 붙잡게 된다는 거지. 붙잡으면 어쨌든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이 생기는 거라. 그걸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들에 집착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오취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서 당연히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거라. 가고 있는 걸 안 갈라고 이렇게 할 것 같으면 힘이 들잖아.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나에게는 또 괴로움들이 일어나게 돼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들은 어쨌든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되는데, 우리가 보통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뭔가를 붙잡고 자꾸 살아가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살아가는 것들이 괴로운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괴로운 것들이 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한 거죠.

 

놓아버리고 살 수 있어요? 잘 안되죠?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괴로움이다 얘기를 하고 나서 그 괴로움을 넘어서는 길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넘어서는 길이 여덟 가지로써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와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것만 얘기했다 하고 얘길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부처님의 수행법 자체가 다 팔정도에 포함이 되어있고,

그래서 팔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납니다.

실제로는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거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것은.

고의 소멸에 이른다는 것은 해탈에 이른다는 거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통 팔정도를 그걸 수행이라 생각 안 하고, 그냥 지식으로 알려고 그럽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여덟 가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 없잖아. 대부분 알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알고 있어도 뭐할 거라? 머릿속에만 잔뜩 있어봐야 아무 의미 없는 것을 그렇게 알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걸 조금 더 쉽게 여러분들이 수행에 접목하는 것들로서 풀어놓은 게 오늘 프린트물 내준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팔정도가 유일한 길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왜 이게 유일한 길일까? 다른 종교에서도 그렇게 얘길 하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팔정도 실천해가지고 만약에 바른말을 실천한다 하고 예를 들어봅시다.

잘못되는 법 없죠? 잘못되는 법 없습니다.

어떤 항목, 전체를 다 실천하면 좋겠지만 그중에 하나라도 실천을 할 것 같으면 그래 참 좋다 하고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비난받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누군가 괜히 나한테 와서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죄가 있으니까 죄를 회개하시오 이렇게 얘기한다 할 것 같으면 그럼 나는 아마 코웃음 칠 거라. 내가 뭔 죄를 저지른지도 모르는데 뭘 회개해야 된다는 거라. 참 어리석은 일이잖아.

회개를 했다고 칩시다. 회개를 하면서 막 통곡도 하고 마음은 씻은 듯이 깨끗해진다고 하는데 돌아서고 나면 내가 뭘 회개한 거지? 뭘 잘못했기에 내가 이래야 되지? 하고 의문이 남게 된다는 거라.

또는 이슬람에서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다섯 번씩 신에게 기도하라. 신을 찬양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왜 꼭 다섯 번 해야 되는데? 신은 내가 다섯 번 자기에게 경배를 안 해줄 거 같으면 삐치는 신인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있겠고.

그래서 어떤 다른 기독교든 다른 교리를 보더라도, 아니면 사후에 천국 간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걸 하면서도 그걸 왜 해야 되는가 하는 의문들도 생겨나는 거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만약에 그게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얘기하는 신을 완전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런데도 불교는 하나하나 얘기한 것이, 아 그래도 부처님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 뭐냐면, 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더 좋은 이익들이 자꾸 생겨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살아가는 사람들 존재들이 행해나가야 될 유일한 길이다 하고 얘기를 했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처음부터 살아가는 것들은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한 거라?

 

왜 괴로움이라고 한 거라? 여러분들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잖아.

그런데 괴로운 느낌들이 있고 하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아는데, 즐거움은 왜 또 괴로움이라고 했을까? 아마 즐거운 게 계속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괴로움이라고 모르겠지. 그런데 즐거움이 계속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누군가가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을 열심히 할 때는 되게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그 게임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는 거고 합니다. 그럼 그 즐거운 거를 계속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또 다른 게임을 해야 되는 거라. 아니면 뭔가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야 되는 거라.

 

여러분들 살아가는 것들을 계속 한번 보십시오.

계속 대상만 바꾸어서 즐거움을 찾을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즐거운 거라고 할 거 같으면 그럴 필요가 없잖아. 대상을 바꾸어야 될 이유가 없잖아. 그 대상으로 인해서 항상 즐거움이 일어나야 되는 건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라.

그거는 뭐냐면 대상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변해나가고 있다는 거라. 변해나가고 있는데 나는 변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그걸 항상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이게 사라질 때가 되면 이게 다른 것으로 옮겨야 되는 거고, 그렇지않으면 내가 마음에 싫증이 나서 즐거움이 사라질 거 같으면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야 되는 거고. 어찌 보면 악순환이 계속되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은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사실을 그것은 무상한 것인데 그것들을 집착을 할려고 그런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 누가 집착을 해요? 자기가 집착하는 거지 누가 집착을 해? 다른 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잖아. 자기가 집착하는 거라.

그럼 자기도 어찌 보면 무상한 건데, 변해나가는 거잖아.

그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집착할 것이 없는데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있는 거라.

그 사실을 탁 알고 나면 괴로운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거라.

 

이렇게 한번 봅시다. 원인·결과로 보면,

내가 너를 일평생 키워줬는데 너는 요것밖에 못하나, 아니면 너가 나한테 왜 이리 하나 이렇게 한다고 칩시다. 그래서 괴로웠거든.

그런데 그 괴로운 것은 뭣 때문에 괴로운 거라?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한 것은 뭐가 있어서 집착한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집착하는 거라.

내가 없을 거 같으면 내가 일평생 해줬다는 것도 없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너가 이렇게 밖에 나한테 못하나 하고 할 이유들도 없게 된다는 거라.

그럼 나에 대한 것들을 탁 바꿔버리고 나면은 괴로워 해야 될 것들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나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 원인이 돼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괴롭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나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생각들을 바꾸어버리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나라고 하는 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싹 바꾸지 않으면 항상 어떤 경우든지 괴로움은 있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사는 것이 괴로움이다. 사는 모든 것들은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인제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들도 나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기 위한 것이고,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여러 사람들하고 관계에 대해서도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이 전체 모든 이들이 동일하다고 평등하다고 생각을 가지고 대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기본이 되어야 되는 거고.

그것이 기본이 되고 나서는 자기 스스로 아, 진짜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확인을 해야 되는 거라. 실제로 내가 수행을 해보니까 아, 나라고 하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끊임없이 원인·결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일 뿐이구나.

호흡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고, 내가 생각하는 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고, 느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고, 인식하는 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한순간도 머무는 것이 없구나. 한순간도 동일한 것이 없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서서히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엷어지는 거라.

 

그러다가 집중하는 힘들이 더욱 더 강해질 거 같으면 그게 더욱 더 빨리 변하는 것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마지막에는 아, 나라고 하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구나.

나라고 하는 것은 조건따라 생겨났다가 조건따라 사라지는 대상일 뿐이구나 하고 압니다.

그러니까 나, 나의 것, 모든 것들을 그와 같다 하고 이해를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바른견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게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보통 수행하는 사람들은 수행을 할 때 어떻게 하라고 그래요? 맨처음에?

맨 처음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나서는 그다음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리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나면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뭐로 알아차리라고 그래요? 무상·고·무아로 알아차려라.

이게 수행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팔정도도 꼭 같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말하는 것도 숨겨버리고 말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는 거라.

행동할 때도 남을 해치는 행위 해가지고는 몸이 안정이 안 돼.

생각하는 것도 좋은 생각, 자애로운 생각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생각들도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거라.

그러니까 몸과 말과 마음에 의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거는 꼭 수행이 아니라도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해야만이 잘 살아가게 되는 거지, 남 만날 두드려패는 사람 누가 좋아할 거라?

그게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들이라.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자꾸 고요하게 하는 훈련들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수행에서 앉아있다고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단번에 마음이 고요해져가지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습관되 어 온게 이때까지 만날 집착하고 살아왔거든. 안 죽을라 하고 안 늙을라 하고 뭔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아온 게 괴로움을 만들고 있는데도 그 구조를 모르고 자꾸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라.

이게 습관되어져 왔으니까 수행한다고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그거 안 붙잡을 거 같애요?

 

배를 관찰하는데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고 있다. 자기가 배를 조절해. 숨을.

붙잡고 있으니까 조절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항상 먼저 일차적으로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할 때도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훈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할 때, 바로 수행할 때는 좌선부터 할려고하지 말고 경행을 먼저 하라든지 아니면 밥 바로 먹고 나서는 바로 좌선을 하지 마라든지 이렇게 하는 거라. 그거는 왜 그래요?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 그러고 나서 좌선하고 앉아있더라도 마음이 처음부터 바로 고요해져 가지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자애수행을 해가지고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나서 그다음에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라는 거라. 그러는 거라.

일차적인 것은 마음을 고요하고 가볍게 만들어라는 거라.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들고 그것이 고요해졌을 때 마음은 뭐 하겠어요?

마음은 대상을 압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지가 죽기 전에는 이거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없어 마음이.

그럼 마음이 자기가 할 일을 뭔가 찾게 되는 거라. 그럼 대상을 찾게 돼있는 거라. 그럼 대상을 찾는 걸 내가 알면 돼.

어, 대상이 있네. 숨을 쉬고 있네 하고 알면 되는 거라.

그렇게 수행의 단추를 끼워야 되는 것이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기 전에는 뭔가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만으로서 부처님이 설하는 것을 끝내버렸다, 그럼 어떻게 될까?

잘 살아가기는 하겠지.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참 좋은 사람으로 잘 살아가기는 하는데, 그런 거는 불교 외에서도 많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라. 아, 참 잘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다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서 아마 거기까지, 쉽게 말해서

부처님이 정사유부터, 정어 바른말, 정업 바른 행위 하는 것, 그다음에 정명 바른 생계수단 바른 생활하는 것, 그것까지만 부처님이 얘기하고 딱 끝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데하고 차이나는 게 아마 아무것도 없었을 거라.

그리고 수행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지. 수행을 안 해도 그거는 가능하니까.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고 그다음에 뭐 했어요?

 

바른 노력부터 해가지고 바르게 알아차리고 바르게 집중하라는 거라.

그거는 어떻게 뭘 가지고 할 수 있는 거라? 몸과 말과 마음에 대한 것들이 고요해지고 나면은 편안해지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당연히 마음은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그럼 그것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노력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사띠할려고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자꾸 집중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러니까 밖에다 신경쓰지 말라는 거라. 마음이 고요해지고 나면. 고요해졌는데 뭐 하러 밖에 신경 쓸 거라?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할 때 자꾸 밖에다 마음이 가는 것이지, 자기 마음이 고요해지고 나면은 밖에는 신경 안 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마음이 고요해져가지고 아, 이걸 하는데도 전혀 문제없다. 이렇게 살아가면 그래도 좋은 소리 듣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듣겠다 하는 걸 확신이 탁 들었다. 그럴 것 같으면 굳이 다른 데 가서 기도한다든지 뭘 한다든지 이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거 안 해도 마음이 고요하고 어떤 것에도 관계없이 기쁠 때든 슬플 때든 마음이 고요하게 만들어져있고, 누가 나를 두드려패든 뭘 하든 간에 관계없이 마음 조용하게 돼있다고 할 거 같으면 굳이 밖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러면 뭘 하느냐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거라.

 

어, 내가 왜 살아가지? 내가 어떻게 살면 좋을까? 내가 살아가는데 뭘 목표로 해야 될까? 하는 것들이 분명해져버린다는 거라.

그러고 나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 바른 알아차림과 바른 집중하는 것들이 필요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해보니까 실제로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상한 거니까, 변해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래서 바른 견해가 탁 서버리게 되는 거라.

 

그럼 바른 견해가 서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다시 바른 사유나 이런 거 할 때는 인제는 일부러 바른 사유할 필요 없이 아예 자동적으로 바른 사유가 되는 거고, 자동적으로 바른말을 하게 되는 거고, 자동적으로 바른 행위들도 하게 되는 거고, 그로 인해서 수행하는데 자동적으로 알아차려지게 되는 거고, 그렇게 진행이 돼나가는 거라. 이게 어떻게 보면 싸이클을 이루게 되는 거라.

그게 팔정도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팔정도를 그렇게 부처님이 설해놨기 때문에 그것 자체만 하더라도, 부처님이 고와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것이 모든 것이 포함이 돼있게 되는 겁니다.

 

이걸 부처님이 「중도」라고 얘기를 하는 것들입니다.

 

고행에 치우치는 것 아니면은 쾌락에 빠지는 것 그 중간 부분이 중도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중도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가끔씩 그걸 비유를 해가지고 이것도 중도라고 부처님이 설한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소나한테 활 줄을 켤 때 활 줄이 느슨해도 안되고 팽팽해도 안 되고 그 중간 정도를 해야 만이 활에 소리가 잘난다 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쾌락이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고행이라는 것 그 중간 정도가 중도가 맞지 않느냐?

 

부처님은 달리 얘기했습니다.

부처님이 중도라고 얘기할 때는 '맛지마'라고 빨리어로 얘기했고,

소나가 활을 켤 때는 그 중간을 취하라고 한 것은 뭐라고 했느냐면 '삿담마'라고 얘기했습니다.

맛지마 하고 삿담마는 다릅니다.

맛지마는 중도를 뜻하지만, 삿담마는 균형을 뜻합니다.

균형을 잡아라는 얘기지, 그 균형은 이쪽 끝에서 균형을 잡을 수도 있는 거고, 저쪽 끝에서도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균형이 맞도록 하라는 거지, 소리 줄이 느슨하지도 않고 팽팽하지도 않게 그 균형을 잡아라는 얘기지, 그 균형 잡는 것은 각각마다 다를 거 아니라?

 

그럼 어디를 중도라고 할 거라? 활시위에 균형잡는 활 팽창감하고, 그다음에 새총 고무줄이 팽창함하고 그게 같을 수는 없잖아. 그런데 그것도 균형이 맞아야만이 새총의 균형감이 맞게 되는 거고, 활시위의 균형감이 맞아야지만이 그게 잘 쏘아지게 되는 거라. 그걸 균형이라고 하고 삿담마라고 하는 거라.

균형을 중도라고 잘못 오해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극단적인 것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냥 뭐 적당하게 살면 그게 중도로 살아가는 거지 하고 오해해버리면 큰일나는 거라.

 

중도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살아가게 될 때, 그걸 중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닥치든 즐거움이 닥치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은 요동치지 않게끔 되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그 대상들은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념처 수행을 대상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도가 되는 것이고, 수행을 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경우에는 밖에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살아가는 것들이 중도가 되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 중도가 중간적인 삶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가 바로 중도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인제는 대충 이해가 됐죠?

 

그다음에 한번 하나씩들 들어갑시다.

그 순서, 나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서입니다. 팔정도라고 하는 것은.

 

처음이, 마음에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생활하는 것.

두 번째가, 망상을 멈추기 위해서 현실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관찰하는 것.

세 번째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해서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하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팔정도 수행이라고 그럽니다.

수행에서도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만들어주고 나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

그 대상을 알아차리니까 당연히 망상도 멈추게 되는 거고, 망상도 하나의 대상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 존재하는 것, 현실적인 데이터 실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것들이 대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관념적인 것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라.

실재하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그대로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수행은 그런 거라는 거라.

그래서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려나갈 때 그 대상들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는 거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알게 되니까 아, 나라고 하는 것이 진짜 없는 것이구나 하고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탁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게 깨달음의 길이라는 거라.

다른 길이 없다는 거라.

 

! 그러기 위해서 첫 번째, 마음에 맑고 깨끗한 감정을 유지하고 생활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바른 사유죠. 올바른 사고를 한다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해서 '성냄, 미움, 해를 주는 것, 감정의 망상을 멈추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남을 해코지 할려고 하는 것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남을 비방할려고 하는 것 그건 자애로서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런데 망상은 탐·진·치가 다 나쁜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도 있는 반면에 성냄이 많은 사람도 있고 게을러빠진 사람도 있고 그런 자기에게 내가 이것 때문에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고 생활하는 게 엉망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먼저 할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거 먼저 딱 멈출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거라.

만약에 성냄이 많다 할 것 같으면 어떨 때는 욕심부리는 것이 있다 할 것 같으면 그래 이거는 내가 봐줄게. 그렇지만 나는 성은 절대 안 낸다. 성을 안 낸다는 것은 남을 미워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내 스스로도 성을 안 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것들도 의심하는 것 없이 살아가게 되는 거고, 그래서 성내는 것들만 잡겠다 할 것 같으면 그거 먼저 잡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첫 번째 제일 위험한 것부터 먼저 탁 잘라버려라.

요거는 내가 반드시 잡겠다 마음을 먹어라는 거라. 가장 위험한 것, 가장 위험한 것, 탐·진·치 중에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서 그걸 자꾸 일상생활에서 멈출려고 해야 됩니다. 그거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자기 스스로 고요하게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욕구가 자꾸 확대되는 망상인가?

이것도 탐·진·치의 영역에 속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탐진치에 크게 영향을 안 미칠 수가 있습니다. ‘아, 요거 사고 싶은데’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탐심을 일으키기는 했는데 ‘에이, 나 돈 없어. 그냥 포기해’ 이럴 것 같으면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 요놈을 사기 위해서 무리를 하는 경우들, 그게 뭐냐면 그 욕구가 확대되는 거라.

확대되는 건 뭐 때문에 확대돼요? 그것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니까 그런 거라. 그걸 망상부린다고 그럽니다. 생각을 하니까 그걸 사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맞추는 거라. 요걸 사기 위해서 생활비를 다 아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조차도 없으면 남의 것들을 훔쳐와야 되는 거고, 아니면 자기 자신이 또 뼈빠지게 몸을 무리를 하게 되는 거고, 일을 해가지고. 부작용이 생기는 건 분명한 줄 알면서도 욕구가 확대되는 걸 모르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샀다고 치더라도 이미 욕구가 확대돼있는 상태에서 그걸 했기 때문에 그동안에 벌어지는 것들은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거라. 욕은 욕대로 다 먹게 되는 거고, 또 받아야 되는 것들은 다 받아야 되는 것들이라. 그래서 그걸 멈추려고 해야 됩니다. ‘아, 이거 내가 욕구가 확대되는 거구나, 아닌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보라는 거라.

 

성냄이 확대되는 것이다, ‘어, 성냄이 확대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서 탁 거기서 멈춰야 된다는 거라. 안 그러면 성이 확 일어났다, 확대 안 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말로 튀어나오거나 행동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 되는 거라. 말이나 행동으로 밖으로 표출됐다는 것은 이미 성냄이 확대됐다는 거라. 성내는 건 누가 확대시켜요? 자기가 시키는 거라. 자기가. 누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네가 나한테’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자꾸 되는 거라.

게으름 부리니까 자꾸 게으름 부리게 되는 거라. 확대되니까 인제는 일하는 것도 싫어, 귀찮아. 수행하는 건 더 귀찮고. 왜 자꾸 확대를 시키느냐는 거라. 그래서 이게 확대되는 것을 적어도 막으라는 거라. 그게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온화한 사고를 유지하라.

다른 사람하고 싸워봐야 좋을 게 뭐가 있어? 다른 사람하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데면데면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보면 싫은 상태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애착을 가지는 것도 문제가 되는 거고, 지나치게 싫은 마음을 가지는 것도 문제가 되는 거고, 그냥 편안한 상태 그게 가장 좋은 거라.

다른 사람들하고 그런 관계를 유지할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항상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는 거라. 극단으로 치우치면 항상 낭떠러지가 있듯이 떨어지게 돼있습니다. 당하는 것은 누가 떨어져? 자기가 떨어져, 자기가 상처를 입게 되는 거라. 극단으로 치달으면 상처입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라.

그러니까 신문에도 가끔씩 보니까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마음이 돌아섰는데 자기는 계속 윽박지르니까 그 사람을 해코지를 한다든지 뭘 한다든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상처를 입는 거라. 그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항상 고요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자꾸 찾아서 그렇게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욕구로부터 멀어지는 사고를 실천한다.

이거는 어찌 보면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려고 하는 것, 그리고 모든 생명들은 다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자꾸 하다가 보면 욕구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욕심부리고 하는 것들은 없어지게 됩니다.

여기에도 그래놨지만 백만원이 생겼다, 예를 들어서 생일인데 가족들이 누군가가 십만원 주고 이십만원 주고 해가지고 백만원이 생겼다 그럴 것 같으면 백만원 가지고 자기가 지 욕심부릴 것 같으면 자기가 뭔가를 산다든지 쓰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욕심 안 부릴 것 같으면 백만원 이때까지 생일 아니었으면 없었던 거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좋은데 쓰는 거라. 그게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욕구로부터 멀어지는 거라.

이걸 가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꾸 뭔가를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나 아니면 더 좋은 것들을 위해가지고 뭔가를 할려고 하게 되는 거라.

 

테라와다 불자들이 참 잘하는 것들이 뭐냐면 우리보다 욕심이 적다 하는 것들이 뭐냐면 뭔가 특별한 날이 될 것 같으면 특별한 이익들이 자기한테는 생깁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법을 가르쳐준 이 불교에 대해서 절에 보시를 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참 잘해요. 그래서 무슨 우리 같으면 사월초파일이 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자기 욕심채린다고 등 켜러 가기도 바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거 안 합니다. 그거 안 하는 대신 뭐 하는지 알아요? 이 좋은날 나누자는 생각을 하는 거라. 집 앞에다가 밥이고 음료수고 이렇게 갖다놔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다 그거 먹입니다. 오히려 지나가면서 그거 안 먹으면 미안할 정도로. 그런 마음들을 자꾸 가지는 거라. 그거 먹이는데 그렇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날에 그렇게 할 생각들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냥 ‘우리 자식 잘되게 해주고, 뭐 어쩌고’ 하면서 등 키러 가기 바쁘다는 거라. 욕구를 자꾸 더 가지게 되는 형태라.

그래서 그거는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 못 된다는 거라. 욕구로부터 멀어지는 사고를 자꾸 실천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오계의 이익을 반조하는 것.

오계를 지키면 참 좋습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들을 지니게 되는구나 압니다. 그 이유를. ‘아, 내가 남한테 해코지 안 하니까 내가 이렇게 마음이 편하구나, 또는 내가 술 안 먹고 정신 흐리멍텅하게 생활 안 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일들이 있구나’ 실천해보면 압니다. 그러면 내가 이 이익들이 참 좋고 나에게는 나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니까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되는 거고, 실천을 안 하니까 그걸 못하는 거라. 그래서 자꾸 그걸 실천하면서 그 이익들로 인해서 ‘아, 마음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비희사에 근거해서 행동을 하라.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라고 하는 것을 홈페이지에 보면 법문해놓은 것도 있고 그 자료들을 전부다 올려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자꾸 실천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섯 가지로 크게 나누는데, 다 하면 좋겠지만 그래도 그중에 몇가지는 반드시 선택해가지고 실천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게 먼저 맑고 고요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활이라고 그럽니다.

그게 일상생활에서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리고 수행하기 위해서도 이게 필요한 부분들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큰 카테고리가 망상을 정지하고 현실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관찰한다 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큰 대목만 읽어 볼게요.

첫 번째 먼저 쓸데없는 망상은 삼가한다.

망상하는 것은 필요없습니다. 과거, 미래에 관한 것, 어떠한 경우든지 과거나 미래로 가는 것은 용납이 안됩니다. 현재라고 하더라도 현재에 대해서 계획하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천할 수 있을 때는 그것을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실천되지 않는 것은 현재 사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망상의 범주에 들어가버립니다. 그걸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에서 자꾸 살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생각은 그렇게 했고 말하는 것,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는 멈춘다.

남의 말 옮기는 것, 비방하는 것, 입증할 수 없는 것, 증거가 없는 것, 그거는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들입니다. 그거는 계속 망상하는, 사고하는 것들로 치달릴 수가 있기 때문에, 특히나 신비적인 이야기들, 수행하는 사람들은 수행해서 가끔씩 그럽니다.

“스님, 이선정에 들면 어떤 상태가 됩니까?” 자기가 들어보면 될 건데 꼭 그걸 물어봐. 그러면 자기는 그걸 가지고 듣고 나서는 그걸 가지고 망상하는 거라.

초능력 기적 이런 것들도 꼭 마찬가지라. 자기가 생겨나면 되는 것들인데 그것들이 생겨나면 어떨까 하고 자꾸 바라게 되고 그것들을 망상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팔정도를 설명할 때 바른말이라고 안 하고 바른 언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면 언어의 범주에는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전부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바른말이라고 할 것 같으면 말은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그걸 번역어로 할 때 와짜를 바른 언어라고 적어 놓은 게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벙어리들은 말 못하는 건가? 그건 아니잖아? 여러분들 생각들을 남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거는 말이 됩니다. 글로 써가지고도 말로서 전해질 수 있는 거고, 그런데 그게 꼭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 신비적인 이야기, 신탁 초능력 기적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언어를 선택할 때 바른말이라고 안 하고 바른 언어라고 적는 이유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어쨌든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는 멈춰라.

 

그다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꾸 배우도록 하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사해가지고 확인해가지고 배울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배울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맞나?’ 하고 조사하고 확인해봐가지고 ‘어! 그거 진짜 맞네! 그럼 한번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배우게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럴 때 진짜 배우게 되는 것들이라. 그냥 무조건 배우는 것이 아니고.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고와 개념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밑에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입증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지 안 되는지, 인격향상 마음이 더 증장되는지 아닌지 하는 것을 조사해보고 그렇게 되는 거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사고나 개념들을 해도 관계없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필요 없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을 안 배우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것은 더불어서 나의 사고나 개념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계기들이 된다는 거라.

그렇게 준비를 해나가다 보면, 이까지는 거의 수행의 단계에 들지만 실천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그러고 나서 인제는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배웠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실천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실행하는 편이 악사고와 악행을 멈추고 선사고와 선행을 하도록 한다. 바른 노력이라는 거라. 열심히 노력하는 것들.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는 악한 사고들은 안 한다는 거라. 그리고 악한 행위들은 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조심하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끊임없이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내가 일어나는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자꾸 노력을 하게 될 때, 그럴 때 악한 사고나 악한 행위들은 일어나지 않고 선한 사고와 선한 행위들이, 그래서 걸어가는 행위들이 일어나더라도 선한 행위들이 있고 뭔가를 행한다고 하더라도 선한 행위들을 하게 되는 거고,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더라도 선한 마음을 품고 말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일 거 같으면 바른 노력은 끊어져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바른 노력을 할려는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알아차림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정보는 접하는 대로 그대로 두고 사띠하라.

대상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조작해가지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집착하든지 아니면 벗어날려고 한다든지 해가지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싫은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이 나하고 원수 같은 사람이다, 그럼 그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냈다, 그 수행을 한다. 처음엔 잘 안 되겠죠? 어떻게 해요? 대상을 대상으로 보지 못하니까 싫은 대상으로 보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걸 밀어낼려고 하는 거라. 그러면 그거는 ‘행복하기를’ 하는 것들이 그냥 언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진짜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경우 어떻게 해야 돼요? 그것도 싫은 사람도 동등한 똑같은 평등한 대상이다 하는 마음을 품게 될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거라.

 

그래서 가끔씩 싫은 대상에 대해서도 ‘아, 저렇게 싫은 저 사람도 언젠가는 바뀌겠지, 또 좋은 일도 하는 것들이 있구나’ 하는 걸 떠올리면서 그 싫은 대상에 ‘아, 네가 행복해라’ 하는 마음들도 내기도 하고. 그거는 싫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니까 억지로라도 자꾸 다른 것들을 만들어가지고 있는 그대로 보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있는 그대로 보지 않을 거 같으면 대상에 대해서 뭔가를 하게 될 때는 그것은 그냥 개념이 돼버리고 구호가 돼버린다는 거라.

배를 관찰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자기가 만들 수밖에 없는 거라. 자기가 만들 거 같으면 그 대상은 변하지 안 해.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게 돼있는 건데 변하는 걸 보지를 못하는 거라. 그럼 뭔가를 내가 밀쳐내든지 붙잡고 있든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얘기라.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접하는 대로 그대로 두라는 거라. 대상은 대상이 있는 것을 알았으면은 있는 걸 있는 그대로 그냥 알고 그냥 사띠해야 되는 거라.

보이면 보인다고 접해졌습니다. 그러면 보인다고 알고 나서 그걸 사띠해야 되는 것이지 보인걸 ‘아, 누구다’ 하고 알고 사띠한다? 그건 이미 내가 조작하는 상태가 돼버리게 되는 거라. 배가 불러올 때 배가 불러온다 하고 분명하게 알고 나서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오는구나’ 하고 알아야 되는 것이지 배가 불러오는지도 모르고 먼저 배가 불러온다고 ‘일어남’ 하면서 배를 꾸우욱 이렇게 쉬어옵니다. 그러면 대상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지면은 마음은 대상이 있는 줄을 압니다. 호흡에 마음이 가 있으면 호흡을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뭔가 다른 대상을 보면 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럴 때 ‘아,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되는 거고, 배가 불러오면 배가 불러온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그게 사띠하는 것들이라.

그래서 대상을 정보는 접하는 대로 그냥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져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접해지는 대상을 접해지는 정보를 그냥 그대로 알게 됩니다. 그럼 아는 것을 그대로 ‘음, 안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그게 사띠라는 것들이라.

 

그리고 그렇게 하다가도 여섯 번째 그리고 집중력을 키운다.

집중하는 힘들을 반드시 키워야 됩니다. 집중하는 힘들을 키우지 않으면 마음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다가도 개념화시켜버립니다. 개념화

처음에는 배가 불러온 걸 분명하게 알다가도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 이거를 인제는 자기가 개념화시켜서 일어남 사라짐 하게 되는 거라. 집중하는 힘이 그래서 중요한 거라. 집중하는 힘들이 없을 거 같으면 사띠도 사그라들어버린다는 거라.

 

그리고 또 하나는 집중하는 힘들이 좋은 게 뭐냐면 하나의 대상에 철저하게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에 들어오는 다른 정보를 차단하게 됩니다.

마음은 두 가지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은 집중하는 힘이 없을 거 같으면 두 가지 세 가지를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 마음은 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라. 산만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집중하는 힘이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그 대상에만 계속적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배가 불러오는 것이 있으면 불러오는 것만 계속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집중하는 힘이 있을 거 같으면. 그런데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 하다가 금방 망상들었다가 아팠다가 오만 것들 다 돌아다니게 되는 거라. 마음은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집중하는 힘을 반드시 키워줘야 되는 거라.

 

집중을 하게 되면 그런 힘이 커지면 수행에서 다섯 가지 장애들인 거라.

분노, 욕구, 졸음, 혼침, 망상, 후회하는 것들, 의심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장애가 덮어지게 되는 거라.

선정 삼매에서도 이런 것들이 덮어질뿐아니라, 그냥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이런 것들이 덮어지게 됩니다. 집중하는 힘이 적게 있든 깊게 있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집중하는 힘이 조금만 강해도 이것들은 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집중하는 것들 그걸 「삼매」라고 그럽니다. 삼매가 찰나 삼매가 있고 본 삼매가 있고 하는데 그렇게 나눠놓은 이유가 그런 거라.

삼매가 삼매이지 다 똑같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집중하는 힘들을자꾸 키우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가끔씩 산만한 사람들을 보면 스님이 훈련시키는 게 눈감고 손을 이렇게 대봐라, 눈감고 이렇게 자꾸 하나만. 그리고 눈감고 가만히 서가지고 발하나만 들었다가 내렸다가 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나만 자꾸 하라고 그럽니다. 집중하는 힘이 생겨나야만이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들을 한 곳에다가 둘 수가 있게 되는 거라. 한 곳에 둬야만이 그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해야만이 이 대상이 변하는 걸 알 수가 있는 것이지, 한번 알아차렸다고 해가지고 마음이 찰나 간에 알아차렸다고 해가지고 변하는 걸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무상한 성품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 그 사띠는 깨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이런 식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 세 번째가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발견하여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난다.

 

바른 견해, 그걸 지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는 첫 번째 고정된 변함없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 때

그다음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분명하게 알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지혜가 생겨나면 지금까지 있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걸, 자아는 착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런 과정으로 진행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īti.(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그럽니다.

담마예찬 마지막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분명하게 실천하고 알 것 같으면 뭐한다고 그랬어요?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여러분들도 나중에 그것을 한번 확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지혜있는 사람이 되어서 지혜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스스로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게 된다. 뭘 안다고? 무상한 것들!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들!

그게 팔정도의 진행 과정이고, 팔정도의 사이클입니다.

팔정도에 대해서 이해했죠? (예) 수행이지 팔정도가 경전으로서 그 단어를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