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온다. (2016021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21. 09:00

https://youtu.be/8HdYfhVjWtA

*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온다. (20160219. 대구)

 

원래가 내일인데 ‘마가 뿌자(Māgha Pūjā)’라 해가지고 '상가의 날'입니다. 원래 정월, 음력으로는 1월 보름이니까, 사실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날 다음으로 큰 행사가 상가의 날입니다. 그마만큼 크게 치는 행사인데, 사실 한국에서는 상가의 날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상가(saṅghā)는 스님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상가가 되는 것은 아니고, 상가가 해야 될 일들을 하게 될 때 상가라고 그렇게 얘기하게 됩니다. 스님들이 모여서 빠띠목카라고 해서 계율독송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잘잘못에 대해서 판별들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해제할 때는 해제하는 게송들도 있어야 되고, 까티나 할 때는 까티나 인정하는 의식도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들을 해야 되는 것이 갖추어졌을 때 그걸 상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일하고 모레 일요일날 모임이 있으니까 경주에서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시마홀 인증의식도 해서 그게 갖추어지면 인제는 정확하게 상가가 구성이 됩니다. 그전에는 사실 스님들이 모이기는 하는데 절름발이였거든.

그래서 시마홀 이름도 스리랑카 상가라자 스님한테 받고, 돈이 좀 많으면 그 스님들 초청해가지고 앉아계신데서 그런 의식하면 좋은데 돈이 없어가지고 초청은 못하고 이름만 받아왔어요.

 

어쨌든 그 의식을 행해서 인제는 거기가 상가 스님들이 여러 가지 포살들이나 여러 가지들을 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됩니다. 만약에 잘못돼서 불교가 좀 타락하는 것들이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논쟁거리들이 있다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결집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제1차 결집, 제2차 결집하고 쭉 하고 제6차 결집까지 한 게 그런 시마홀이 있는 곳에서 시마홀에서 그렇게 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를 유지시켜 주고 전하는 역할로써 가장 중요한 곳이 시마홀이다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행사가 경주에서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날이 이번에는 마침 상가의 날하고 같이 겸해가지고 돼서 오히려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상가의 날에는 뭐 하는지 알아요? 몰라요?

보통 보면 상가의 날 때는 버마 같은 경우에는 한 10일 전부터 아비담마 중에 24가지 빳짜야라고 해가지고 원인조건에 대한 것, 아비담마 게송이 있습니다. 그걸 매일 십일간 독송을 합니다. 쉐다곤 사원에서 보통 크게 이루어지죠. 태국 같은 경우에는 계절이 바뀌는 계절이니까 부처님 사리를 모셔놓은 에메랄드 사원에 있는 부처님 가사를 새로 입혀주는 의식도 하고, 대부분 사원에서는 공통적으로는 저녁에 촛불켜가지고 그 시마홀 주위를 뺑뺑 세바퀴를 돌면서 그런 촛불행진들을 하고 법문 듣고 그렇게들 행사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날 보통 우리 같으면 물고기 방생하겠지만 새 같은 걸 방생하고 이렇게 방생하는 의식들도 하고, 행사가 다채롭게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 재가자들은 스님들한테 탁발올리고 공양물을 올리고 하는데, 이때까지는 스님들이 재가자한테는 아무것도 안 줬거든. 그런데 그날 만큼은 상가의 날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재가자들한테 선물을 줍니다. 대부분 자신이 펴냈던 책이나 법문집 CD 같은 이런 것들을 재가자들한테 나눠주기도 하고 그런 날이 상가의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재가자와 출가자들이 같이 교단을 이루고 있다는 걸 실제로 보여주는 날이 상가의 날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상가의 날이 스님들한테는 생일날입니다. 그래서 생일밥 먹으러 가야 돼요.

스님도 이번에 재가자들한테 뭘 해줄까 해도, 스님이 책 펴놓은 것도 없고 법문해놓은 거 CD도 가져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가지고 뭘 할까 지금 고민중이라. 그래서 탁발할 때 누가 한푼 두푼 준 거 모아놓은 것 그것 가지고 뭔가 선물 하나 사긴 사야 되겠는데 뭘 살까 고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내일 시간이 있으니까 생각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서로 조화롭고 화합하는 형태들을 띠어야 됩니다. 시마홀의 규정이 지역으로 나누어졌던 이유가 화합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독단적으로 거기에만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여기 대구에 모였으면 대구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잘 조화롭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온다」 하는 내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아마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그 소리일 겁니다. "집착하지마라." "집착을 버려라."

사실은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용어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됩니다. 보통 '집착'을 빨리어 용어로 '상요자나' 라고 합니다. '상'이라고 하는 것은 결합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집착을 할 때는 뭔가를 탁 붙잡고 결합을 하고 있다는 거라. 결합한 걸 손을 탁 놔버리면 결합이 끊어져버리는데, 그걸 못하고 그걸 계속적으로 붙잡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붙잡는 걸 떨어지게 하는 것들을 얘기하고, 그쪽으로 가는 길을 얘기하는 것이 사실은 「붓다 담마. 부처님이 가르침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마만큼 집착은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온다」 하고 제목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착하는 것이 많이 있죠? 설명에는 「여러 가지 집착」 이라 해서 집착하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해놓았습니다.

경전에 보면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누이한테서 가사를 선물 받았어요. 가사를 올리는 시기에, 일반 가사보다도 더 예쁜 비단으로 만든 아주 값진 가사를 받았거든.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대부분 스님들은 가사를 여러 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자기 소유 가사는 세 벌밖엔 없습니다. 나머지 가사는 상가 소유거든. 그래서 상가의 누군가 스님이 필요할 경우에는 그 상가소유의 가사를 그 스님들한테 나눠주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받은 것은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은 거라. 그런데 자신의 것으로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가 지금 현재 입고 있는 가사를 버려버리고 상가소유로 만들어버리고 나서 새로 만든 가사를 자기 소유로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새로 받은 좋은 가사를 상가소유로 안 하고 놔둔 거라. 거기에 대한 집착이 있는 상태에서 돌아가시게 됐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뭘로 태어났는지 알아요?

보통 옷에 기생하는 '이', '이'라고 그러나? 이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 옷에 대한 집착이 강했기 때문에 옷에 붙어있는 뭔가로 태어나게 된 거라.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집착하는 대상에 달라붙게 돼있다는 거라. 이게 그마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스님도 사실은 벌써 출가생할 한지가 30년이 넘었으니까 가사를 받은 것이 참 많습니다. 특히 까티나 가사를 할 것 같으면 보통 장로스님들한테 까티나 가사를 드릴려고 하기 때문에, 그 까티나 가사를 받은 것만 해도 수 벌이 넘어 되거든. 까티나 가사를 버리는 시기가 돼서 버려버리고 나서 그것을 상가 소유로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가져가지 않으면 내가 그대로 소유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특별하게 까티나 의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가사는 누군가를 주기가 참 겁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똑같은 가사인데도. 어떨 때는 우리가 물을 들여가지고 만든 가사도 있고, 손수 바느질해가지고 되어있는 가사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럴 때는 누구에게 주지도 못하고 좀 짬지게 공부하는 스님이 있으면 나타나면 주리라 생각하고 이렇게 쌓아둔 가사가 몇 개 쌓여가지고 있는 것도 있는데.

 

그걸 보면서 어떨 때는 상가 소유인데 상가가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있을 거 같으면 저걸 갖다주면 참 좋겠는데 현재는 상가가 시마홀이 없기 때문에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요. 자기 가사 외에 상가 소유 가사도 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볼 때마다 이걸 어떤 식으로든 상가 소유물을 관리할 수 있는 곳들이 있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그게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들을 개인소유 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인제 지내다 보면은 그런 집착들이 자꾸 생겨납니다.

 

특히 예를 들면은 여기 대구 왔다. 만약에 내일 서울 법회는 취소됐는데, 만약에 내일 서울에 법회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거리상으로 봤을 땐 여기 대구 왔다가 여기서 하루 자고 새벽에 일찍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훨씬 수월합니다. 그런데도 스님 같은 경우는 부득불 또 부산까지 내려가. 내려가서 또 새벽에 일찍 그것보다 더 일찍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는 거라.

그럴 때마다 가끔씩 나를 되돌아봅니다. 내가 무슨 뭐 부산에 껌 붙여 놓은 것도 아니고 혹시 내가 부산에 거주처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가끔 해봅니다. 그런데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 거 같은데, 단지 아직 그럴만한 상황이 아직 못 된다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개연성들도 있다는 거라. 그럴 때마다 자신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거라.

 

과연 내가 부산 선원이 아니고 다른 선원으로 옮겼을 때 옮길 수 있는가? 내 자신이. 그럴 때는 쉽게 옮길 수 있다고 말을 하지를 못하는 거라. 아, 그래도 부산 사람들을 누군가 지도를 해줘야 되는데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니까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거라. 그것이 아무리 바른 것이라도.

그리고 또 그쪽으로 옮길 거 같으면 거기에 있는 스님이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나고, 괜히 쓸데없는 것들을 걱정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것들도 놓아버려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스님이 언제 그걸 느꼈느냐 하면 한국에서 스님이 먼저 출가를 했으니까 한국에도 은사스님이 있습니다. 은사스님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계기가 된 게 은사스님은 자꾸 부르는데 가면 대부분 쓸데없는 것들이라. 쓸데없는 얘기하고, 테라와다 스님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자꾸 시킬려하는 것들이 보이고 해서, 어느 순간 불러도 안 가.

은사스님은 섭섭해할지 모르지만 그래가지고 거기에 대한 집착을 퉁 한번 놔버려 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러고 나서는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법이 없는 거라. 설혹 안 온다 해가지고 은사스님이 나를 보고 죽일놈 살릴놈 하더라도 그냥 듣기만 합니다. 단지 내가 은사스님 생신이나 명절날 이런 때는 가서 인사하고 하는 것은 당연히 존경하는 분이기 때문에 해야 되는 것들이고 그런 것들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출가자들도 은사스님이나 아니면 사형사제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게 됩니다. 하물며 그런데 재가자들이야 집착하는 대상이 얼마나 많겠어? 옷에 대한 것들, 집에 대한 것들, 아니면 명예에 대한 것들, 아니면 자식에 대한 것들, 아마 부지기수일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한번 돌아보십시오. 그 대상이 집착을 만드는 거라? 아니면 내 마음이 집착을 만드는 거라? 대상이 집착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뭉치가 여기에 탁 떨어져 있다, 어른이 봤을 때는 그 돈뭉치를 보고 아, 이 돈뭉치 내가 가져야되겠다고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돈뭉치가 뭐라 하는 것은 아닌데, 똑같은 돈뭉치가 떨어져도 애들이 볼 것 같으면 '어, 공같이 생겼네, 재미난 장난감 하나 있네' 하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것도 하나의 어린아이가 가지는 집착입니다. 장남감에 대한 집착. 집착의 종류는 방법은 다르지만은 어떤 경우에는 장난감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는 재산이 되고,

만약에 집착하는 것이 그 대상물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똑같아야 되는데, 그 어린아이가 보든지 아니면 어른이 보든지 간에 그것을 보는 것이 똑같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어떤 경우에는 돈뭉치로 보고 어떤 경우에는 장난감으로 보고, 그러면은 그것들을 향하는 각각의 마음이 집착을 만드는 것이지, 마음이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지 대상물 자체는 어떤 것도 집착의 덩어리라고 자신이 얘기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럼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대상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이 없을 거 같으면 마음은 거기로부터 자유롭다는 거라. 그것을 사용을 하고 있던 또는 그것이 없든 아니면 그것이 내 곁에서 많이 있든 적게 있든 뭐 어떤 것에 관계없이 하나의 대상으로 볼 뿐이라는 거라. 그것은 필요할 경우에는 필요한 곳에 쓰는 거고, 그것이 필요없을 경우에는 아낌없이 주어버리는 거고, 대상을 대상으로써만 그렇게 보게 될 때는 마음에 대한 집착들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집착을 끊었을 때 ‘아, 내가 인제는 이것에 대한 집착은 끊어졌다’ 하는 것을 스스로 분명하게 압니다. 스님이 은사 스님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고 또 어떤 다른 것들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듯이, 그 집착이 끊어질 때는 ‘아, 인제 내 마음에는 다시는 그 대상물에 대해서 집착이 일어나지 않는구나 ’하고 본인이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과연 여러분들은 집착할 여러 가지 대상물 중에 얼마나 끊어진 것들이 있느냐는 거라. 불교는 그 집착을 끊고 집착을 버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인데. 그래서 집착하는 대상을 보통 부처님이 「갈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안·이·비·설·신으로부터 오는 감각적인 욕망", 눈으로부터 보는 대상, 그럼 대상이 내가 마음으로 그것을 집착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이 마음이 문제인 것이지 눈으로 보이는 대상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대상을 문제 삼는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문제삼기 때문에 대상을 안 볼려고 하고, 대상을 더 볼려고 하고 이렇게 하는 거라.

 

그래서 감각적인 대상도 마음에서 감각적인 대상에 대해서 갈애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라. 또는 더 건강해지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고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들, 그런데 그것들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될 수가 없는 건데도 그것에 집착하니까 갈애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또는 게으름 피우고 싶고 또는 더 이상 뭔가를 하고 싶지 않고 아니면 자신이 죽고 싶다는 것도 그것도 집착하는 것들입니다.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그냥 마음이 편안할 것 같으면 그거 즐기려고 하는 거라. 마음은 그것을 즐길려고 하는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거기에 고정돼있지를 않습니다.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대상을 찾게 돼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거라. 변하고 실체 없는 것들을.

갈애들을 보통 세 가지로 얘기합니다.

'욕애, 유애, 무유애' 그렇게 '딴하 바와 아바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세 가지들도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집착들이 있지만 그 집착들이 집착이 있는 것들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잘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 집착이 있는 사실을 모르면은 단추를 끼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착을 하면 왜 괴로울까요? 그래서 「집착과 괴로움」이라고 그렇게 적어놓은 겁니다. 집착을 하면 할수록 괴로움은 더 늘어난다는 거라. 집착을 하는 것이 좋은 거라고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집착을 끊을 방법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붓다야나 선원이 뭔가 재해를 입어갖고 폭삭 망해버렸다. 그러면은 아, 이 붓다야나 선원의 재산가치가 얼마인데, 만약에 1억이다. 1억인데 하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아니면 정부에서 재해니까 집을 지어주겠다 해가지고 1억의 가치보다도 더 큰 2억의 가치를 가지고 집을 지어줬다. 그럼 그 사람은 1억의 이익이 났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1억이 이익이 나서 좋다고 하는데 실제로 외부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집의 소유자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거라.

 

무엇에 집착하고 있어요? 맨 처음의 집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2억의 집에 살고 있어도 예전의 집에 대한 향수나 아니면 여러 가지들을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은 더 좋은 집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집착하면 할수록 괴로움은 더욱더 늘어나게 됩니다. 과거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든 아니면 미래에 대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든 집착이 있으면 괴로움은 자꾸 늘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괴롭지 않을려면 그리고 지금 현재 행복하게 살려면 적어도 집착하는 것들을 자꾸 끊도록 자꾸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앞의 여러 가지들 집착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아, 이것들은 내가 집착하는 것이구나’ 알게 될 때 그걸 끊을 수가 있는 겁니다.

 

또 집착하는 것들이 괴로움만 불러오는 것이 아니고 속박을 불러오게 됩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잘 알 겁니다. 생활 패턴이 아이에게 맞춰집니다. 내 패턴으로 맞춰지는 게 아니고, 아니면 남편이 있다 그러면 남편한테 맞춰야 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해줘야 되고, 딱 거기에 속박되어버리는 거라. 물론 본인들은 그러겠죠. 내가 할 일들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 그런데 할 일들을 하는 거하고 속박하는 거하고는 다른 겁니다. 속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할 일들을 해야 되는 것이지, 속박된 상태에서 할 일들을 할 것 같으면 항상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보상을 받아야 되는 거고, 또 내가 뭔가를 해줬는데 너는 왜 이걸 안 해주나 하는 것을 자꾸 바라게 되는 거고, 그것에 속박돼버립니다. 속박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그냥 할 뿐입니다. 어떤 것이 돌아오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래서 집착할 거 같으면 그런 속박들이 자꾸 생겨나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집착하는 것은 괴로움과 속박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것들을 끊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도전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스님도 느끼는 것이 부처님이 출가자에게는 집착할 수 있는 대상을 아예 만들지 않기 위해서 참 무던하게 노력했다고 하는 것들을 알고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오늘 스님이 탁발을 받았습니다. 공양물을. 그런데 이 공양물이 오늘 내가 다 먹을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거든. 그럼 내일 먹기 위해서 냉장고에 넣어놔 두었다, 그럼 내일은 내가 탁발을 안 해. 냉장고에 들어있기 때문에. 자기가 조리를 안 해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거 그냥 꺼내먹으면 되거든. 계율상으로는 어기는 것이 없는데도 본인은 그 음식에 대해서 속박이 돼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러니 먹고 나서 남는 것들을 냉장고에 넣어놓는 거라.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그거 아깝게 왜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주느냐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주는 것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를 한 겁니다. 그 어떤 대상에도 속박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출가해서 속박을 끊기 위해서 출가했으면서, 속박되는 길을 자꾸 찾아갈 거 같으면 그거 어떡하겠느냐는 거라. 그래서 오늘 아무리 많은 걸 받았더라도 오늘 먹고 나면 음식물은 일단 내 소유가 안 돼. 그래서 깨끗하게 바리때 싹 비우고 나서는 그냥 끝이에요. 그것을 누가 먹든지 뭐 어떻게 하든지 관계가 없어.

 

그래서 경전 주석서에서는 “바리때에 받은 음식이 남은 것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하고 부처님한테 물어보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까이 있는 선원 식구들 갈라 먹어라. 또는 스님 시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렇게 해도 남으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마을에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든지 아이들이든지 그 사람들한테 나누어주어라. 그래도 남으면 어떻게 합니까? 동물이나 가축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렇게 해도 남으면 어떻게 해요? “버려버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깨끗한데 풀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깨끗한데 땅 같은 데다가 버려서 미생물이 죽지 않는 상태가 될 때는 버려버릴 것 같으면 땅에서 그걸 흡수해가지고 땅이 기름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라는 거라.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보관하라고 하는 적이 없다는 거라.

 

그런 걸 보면서 참 부처님이 출가한 스님들한테는 참 야무지게 얘기해놓았다. 그래서 그렇게 가는 길들을 자세하게 일러준 것들에 대해서 어떨 때는 감탄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도 속박돼있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나서 내가 왜 속박돼있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누가 옆에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아니면 컴컴한 밤거리에 내가 혼자 길을 걸어가는데 두려움이 일어난다, 무엇에 속박되어서 그렇습니까? 좋아하는 대상! 대상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친구가 없으면 외로움을 타는 거고, 밤거리를 가다가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내가 살고 싶어하는 것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존재욕구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겁니다.

거기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이지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또 더 노력을 하고 밤길에 혼자 안 가고 무서움을 안 타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건 단추 자체를 잘못 끼우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아, 이것이 나를 속박하는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서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들을 자꾸 택해야 됩니다.

 

사회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친구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되고, 자기를 서포트 해줄 수 있고 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야 된다고 얘기하고, 밤거리가 위험하기 때문에 가로등을 켠다든지 아니면 다른 보안적인 조치를 취한다든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건 사회적인 통념인 거고, 그거는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거기에 대한 속박들은 더욱 더 강해진다는 거라.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그래서 불교는 오히려 반대로 얘기합니다. “그러지 마라”라는 거라. 자신이 거기에 속박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걸 끊는 것이 우선이라는 거라.

 

그래서 3페이지에 보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분노와 욕구와 사악한 견해와 무명을 끊어야 한다.]

분노, 욕구, 자신을 경계해야 되는 겁니다. 그것에 속박돼버리면 집착이 속박을 만들고 그것들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분노와 욕구도 자유롭게 놓아버려야 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가 일어났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될 때, 또는 뭔가를 원하는 마음들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원하는 마음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 속박으로부터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도 없어지는 거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것들이 같이 일어난다는 거라. 세트로써 일어난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위험한 것은 그것이 결합될 때 위험한 겁니다. 결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거기다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무명까지 같이 결합이 돼놓으면 계속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는 거라.

그리고 자신이 가지는 견해들, 사악한 견해들 그것들에 대한 것을 쭉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것들도 전부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신이 가진 주관 선입관 편견들 그것들이 있을 때는 그것들이 끼어들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들을 방해한다는 거라.

 

그렇게 할 때 그런 것들을 끊어냈을 때, 그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사실은 진리를 발견합니다. ‘아‘, 이것은 고라고 하는 것이구나. 이것이 나를 괴로움으로 만들게 했구나. 이걸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겠다. 그렇게 벗어나게 될 때 내 마음은 어떤 상태로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도 전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혜로써 연결이 되는 거라. 사성제를 발견한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삼법인의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성제와 지혜는 동일하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길들을 가야 될까?

그 첫 번째가 「선우」 부분입니다.

선한 친구를 따라가야 됩니다. 여기서 선우는 누구를 얘기할까? 부처님이 친구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를 따라서 자꾸 나아갈려고 해야지, 다른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선우가 항상 내 곁에 있듯이 나는 그 길을 가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 자신도 선우의 모습을 띠어나가게 될 때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아낌없이 버리는 것」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을 자꾸 놓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집착하는 대상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집착하는 대상은 더 많아집니다. 명예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많아집니다. 또는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아집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안 그럴 것 같애요? 처음에 출가할 때는 그렇게 집착할 대상이 없습니다. 옷도 하나밖에 없고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런데 출가한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법문해야 될 상황이 될 것 같으면 법문도 해야 되는 거고, 그러면 여러 신도들에 대해서 알아야 되는 것이고, 또는 그러다 보면 자기 선원이 있으면 그 선원에 대한 집착들도 생기는 거고, 법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착할 대상들은 더 많아집니다.

 

대상을 대상으로써 자꾸 인식하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자꾸 집착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대구에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스님은 아직 여러분이 어디에 사는지 전화번호는 뭔지 뭘 하고 먹고 사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관심을 안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마음에 집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한 겁니다. 그걸 알아놓으면 계속 그 세간살이 일에 휘말려들어간다는 거라. 재가자일 거 같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 그런데 출가자들은 그렇게 해야 됩니다.

여기서 법문한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있다, 그럼 그 법문한 것들은 내 것이 되어야 될 거라.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해야 되는 거고, 그걸 또 수익을 위해서 판매를 해야 되는 거고, 부처님 가르침을 자기가 그대로 전하는 것뿐인데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라. 대상을 대상으로써 보지 못할 거 같으면 출가한 스님들도 계속적으로 집착할 대상은 늘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꾸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그럼 그렇게 살려면 혼자서 살아라는 얘기냐 하면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밑에 보면 「생명관계와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내가 선우의 길을 걸어갈 거 같으면 내 주위에 선우가 자꾸 모이게 되는 거고, 그리고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자꾸 지니고, 까루나의 마음을 지니고 연민심의 마음을 지니고 항상 대하게 될 때 그 인간관계는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에 대한 관계들이 그렇게 풀어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내 주위에 사람이 많이 있든지 적게 있든 간에 선우들이 모여있게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가는 길은 바른 길들을 항상 걸어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포인트를 명확하게 해야 됩니다.

 

[자애를 실천하는 것으로써 모든 생명과의 관계를 쌓아 올려야 된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방법을 향상할 목적으로 대인관계도 실천해야 된다.]

그래서 자신이 그 사람들을 만났을 때 좀 더 마음이 청정해지고 좋은 일들을 많이 하게 될 때, 그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이지 자꾸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들은 자꾸 억제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하는 것들의 포인트가

• 집착은 속박이다.

• 불교는 자유를 목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 속박을 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집착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 자유를 위해서는 분노와 욕구와 사악한 견해와 무명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수행의 정도에 따라서 이것들이 제거가 되고 또 조금 더 지나서 제거가 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차적으로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제거를 해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힘이 필요하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힘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을 알아차리는 힘들,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하는 노력들, 그리고 그것들을 조사해보는 위망사, 아, 그것이 맞구나 하는 확신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정신적인 힘들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힘을 받쳐주는 다섯 가지의 힘 오력들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게 정신적인 힘들입니다.

• 자애는 완전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집착할 대상들도 없고 괴로움은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오게 된다.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런 집착들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