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사고·망상은 번뇌의 산물이다. (20160226.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25. 09:10

https://youtu.be/pNo6_8Yikcc

* 사고·망상은 번뇌의 산물이다. (20160226. 대구)

 

오늘은 「사고·망상은 번뇌의 산물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옛날에 교단 홈페이지에 「망상을 멈춰보자」 해가지고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땐 "망상을 멈추기 위해서 사용하는 다섯 가지 방법"에 대한 글을 쭉 적어놓은게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는 "사고·망상이 일어나는 체계"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경전에는 "사고와 망상을 멈추도록 노력하라"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전에 내가 '모네이야(Moneyya)' 설명하면서 그 얘기를 했을 겁니다. 거기서 '무니(muni)'라고 하는 말, 침묵하는 것, 말의 침묵, 몸의 침묵, 마음의 침묵 그 얘기를 했었죠? 안 했어요? 기억을 못하는 거 아닌가? 여기서 안 했나, 다른 데서 했나?

그거 하면서 "마음의 침묵은 2선정에 들었을 때 그때 마음에 침묵이 일어나진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해탈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멸진정에 들었을 때 완전하게 마음의 침묵을 하게 된다 하는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있는데.

 

수행에서 수행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릴 때 처음에는 어떻게 알아차려요?

대상이 있으면 대상에 마음이 다가가지게 되죠?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그럴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사고를 하게끔 돼있다는 겁니다. 뭔가 말을 할 때 생각을 안 하고 말을 할 수는 없죠? 그와 같습니다. 대상을 향해서 내가 다가가지게 될 것 같으면,

예를 들어봅시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있다. 그럼 불러오고 꺼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여기에다 두어야 됩니다. 그러면 대상을 향해서 마음이 다가가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뭔가 사고를 자동적으로 되는 건 아니죠?

그러다 보면 수행이 순일하게 좀 잘 돼나가고 있다 할 거 같으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일부러 내가 힘을 들이지 않아도 그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상을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일부러 대상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그리고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는 마음들도 없고 하는 상태가 되고,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그냥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가 돼나가게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리게 될 건데, 그래서 그렇게 되니까 대상이 변하는 성품들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거고, 대상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아, 이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하는 것도 알게 되는 거고,

 

그리고 대상 그 자체는 그전에는 내가 숨쉰다고 알아차렸는데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거고, 대상이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며,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런 상태가 됐을 때를 보통 인제는 "생각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수행에서는 보통 2선정 정도 이르게 됐을 때 그렇게 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참 열심히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망상을 하게 되고 내가 뭔가를 생각을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생각없이 사고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죠? 있습니까? 있어요? 생각없이 사고하는 방법이?

부처님은 사고를 하셨을까? 살아계셨을 동안에?

(수행자 : 계속 일어나는 것은 하셨지만 거기에 욕구 욕망을 가지는 그런 게 없는, 저는 해피스님한테 그렇게 설명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사고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저번에도 그런 얘기 했죠?

길이 두 갈래가 있다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은 어느 쪽으로 선택할까? 다른 사람들은 이걸 판단을 하는데, 부처님은 그냥 어느 길이든지 걸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사고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렇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2월 달이 지나고 나면 몇월 달이 와요? 3월 달이 오죠? 그거 일부러 생각할 필요 없죠? 생각을 안 해도 자연스럽게 3월 달이 오게 돼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고하는 사람들은 2월 달이 가면 반드시 3월 달이 온다는 것을 생각을 해야만이 2월 달이 가고 3월 달이 오게 됩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2월 달이 가면 3월 달이 돼있는 거고, 숨을 들이쉬면 그다음에 내쉬게 된다는 것을 알고 발을 한 발 뗐으면 그다음 발을 들어올려야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고 없이 그냥 행위 자체를 계속 할 수 있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럴려면 얼마만큼 집중을 하고 얼마만큼 열심히 수행을 해야 될까?

일반인들은 사고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밑에 보면 「사고를 멈출 수 있습니까? 예라고도 못하고 노라고도 못한다」고 그렇게 돼있거든. 왜 그러냐면 여러분들에게는 귀가 있습니다. 귀가 있으니까 스님 말을 듣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귀가 있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듣지마라" 할 것 같으면 안 들을 수 있어요? 소리가 지금 여기서 나오고 있는데 귀가 있으면 당연히 여러분들은 그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죠? 이쪽에서는 뭔가 소리가 있는데 내가 못 듣는 경우들, 어떤 경우에 그래요? (망상하고 있을 때요) 망상하고 있든지 다른 거에 집중하고 있든지 그럴 때는 소리를 못 듣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게 맞아요?

 

그러면 사고한다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의(意)입니다.

지금 얘기하고 있는 귀는 내가 얘기하고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 하나입니다. 감각기관 중에 똑 하나가 마찬가지로 의입니다. 그런데 의가 있는데도 그것으로 인해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귀가 있는데도 소리를 못 듣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소리는 분명히 있고 그 소리는 틀림없이 귀를 통해서 들렸을 건데 내가 소리를 못 듣는 경우도 있고 듣는 경우도 있다는 거라.

고도로 다른 것들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그것을 못 듣게 되는 거고, 또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를 어떤 사람들은 그냥 그 '소리'로만 알게 되는 경우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게 뭐 '달콤한 소리다' 아니면 '누구의 소리다' 하고 알게 되는 사람들도 있고, 각각 틀리게 돼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 사람들마다 사고하는 패턴들이 틀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수행하는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어떻게 될까?

귀가 있으니까 그 소리를 듣기는 들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듣는 것이 가장 좋을까? 「소리」라고만 알면 됩니다. 단지 ‘들린다’고 알고, ‘소리’로만 알게 됐을 때는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더 이상 사고하는 것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보면 ‘보인다’고 하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려라 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소리로 인해서 항상 사고를 하게 됩니다.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들린다고 탁 알아차리는 순간에, 그다음에는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이 작동을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슨 소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 같으면, 그 소리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 하는 것을 아는 것도 더불어 같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거라. 어, 좋은 소리이다, 싫은 소리이다 하는 것도 알게 되는 거고.

그럼 좋은 소리이다, 싫은 소리이다 알게 될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내가 반응을 하게 되는 거라. 거기에 대해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마음이 싫어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또 반응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보통의 인식체계입니다.

 

인식체계인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계속 넘어가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사고는 멈출 수 있기도 하고, 멈출 수 없기도 한 겁니다. 그 대신에 아직 그런 상태가 되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사고가 일어나면 그것을 멈출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눈이 있는데 보지마! 그거는 눈이 있는데 눈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귀가 있는데 듣지마! 그거하고 차이나는 것이 없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마음에서 뭔가 생각이 일어났다, 생각하지 말고 배를 관찰해라, 그런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거는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죠? 생각이 일어났으면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무시해버리고 그냥 배를 관찰하고 있다, 그건 안 된다는 거라.

 

만약에 내가 고요하게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막 떠들고 있다, 그럼 내가 그 떠드는 소리를 안 들을려고 그럽니다. 안 들을려고 하면서 배의 ‘일어남’ ‘사라짐’ 관찰한다는 거라.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소리는 적게 들리고 결국에는 안 들리게 될 겁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강하면 그렇게 되는데 그 힘이 약하면 어떻게 돼요? 그 소리 그냥 다 들립니다.

다 들리는데 그거 무시해버리고 내가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

그거는 수행을 안 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소리들리면 소리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소리가 사라지는 상태를 경험을 해봐야만이, ‘아, 저게 나한테 별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고 알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그 소리가 들리더라도 나는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일어남’ ‘사라짐’만 계속 할 수가 있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을 멈출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라.

그러니까 회피하고 피해버리는 상태가 돼가지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져가지고는 문제해결을 못한다는 거라. 들리면 들리는대로 보이면 보이는대로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거 없이 그냥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을 해서 거기에 끄달려들어가는 것밖에 안 되는 거라. 그렇게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대신에 다른 것들은 하기가 쉽습니다.

소리가 들리고 맛보고 보고 하는 것들은 알아차리기가 참 쉽습니다. 보면 보인다고 분명히 알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릴 수 있고, 그런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거는 좀처럼 하기가 힘들어. 왜 그럴까?

다른 것들은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가지고 나에게 다가와지는 것들이라. 그런데 의문(意門)이라고 하는 이 마음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고 어디라? 내가 일으키는 것들이라.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나는 끊임없이 뭔가 마음이 움직여야 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라.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뭔가 마음이 계속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거라.

 

그렇게 움직여야 되는데 뭔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은 뭐 하겠어요? 마음이 망상을 하든지 마음이 뭔가를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마음이 멈추는 법은 없으니까, 죽을 때까지. 그런데 그 마음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한단 말이라. 아주 찰라 간에.

 

그럼 대부분 시간은 그냥 뭔가를 생각하게 되는 거라.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없는 상태일 거 같으면. 그러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사고를 하고 있을 거라? 그래서 거의 90% 이상이 머리, 사고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로 인해서 나는 살아있다고 알게 되는 거라.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살아있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이 머리속에서 굴리는 사고, 생각들로 인해서 ‘아, 내가 살아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멈춰라? 사고를 멈춰라? 아무 할 일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마음이 할 일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될까? 만약에 마음이 사고를 안 한다 치자. 그럼 마음은, 마음은 멈출 수가 없으니까 뭘 하겠어? 지금 일어난 걸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지금 그게 보는 것이면 보는 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들리면 들리는 것들을 알아야 되는 거고, 지금 일어나는 것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실제로는. 실제로는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마음이 생각하는 것으로 가 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난 것들을 자꾸 놓쳐버리게 되는 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것들인데, 그거 알아차리는 것만해도 되는데 마음이, 여기 안 있고 그냥 다른 거 생각하게 되는 거라.

마음이 딴데 가있기 때문에 한시간 동안이라도 일어남 사라짐 하는 거 겨우 1분이나 2분이나 알아차릴까?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나머지는 전부 마음은 딴짓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라.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고, 그것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거고, 그래서 ‘아, 이거는 괴로운 것이다’ 하고 고통스럽게 느끼지도 못하는 거고, 그런 상태로써 그냥 가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실제로는 사고를 하지 않으면 마음은 자기가 할 짓을 하게 되는 거라.

그냥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 훈련들을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항상 마음은 머리 굴리는데 시간을 다 보내버리는 거라. 실제로.

 

그런데 왜 머리 굴리는 것들은 하지마라 라고 그러는가?

어떤 경우든지 사고하는 것들은 지금 시스템 자체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날조를 하게 됩니다. 전부 날조를 하게 되는 거라. 있는 그대로를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전부 자기가 스스로 짜집기를 하든지 아니면 엉뚱한 방향으로 개념화시키든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 밑에는 「사고는 날조한다」 하고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걸 실험한 걸 적어놓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겠네요. 요즘 야구장 실내 야구장에 가면 야구공이 저쪽에서 탁 날아오면 여기서는 탁 칩니다. 그런데 날아오는 게 어떤 경우에는 직구로 날아오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커브로 날아오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이상한 방식으로 날아오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마음이 그걸 빨리 쫓아갈 거 같으면 거기에 따라서 배트를 맞게 휘두르게 되겠죠. 그러면은 탁 맞아떨어지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만날 헛스윙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게 얼마만큼 천천히 와야만이 그것이 직구인지 커브인지 알 수 있어요? 얼마 정도의 속도로 와요? 대부분은 보면 그렇게 던지는 것보다도 더 천천히 와야만이 아, 이게 그냥 오는 게 아니고 굽어져 오는구나, 어떻게 오는 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실험을 한 게 있습니다. 판자를 여기에다가 크게 구멍을 내놓고, 저쪽에 있는 사람이 여기를 이걸 못 봐. 그럼 내가 여기서 뭔가를 판자에 구멍을 뚫어놓은 데로 탁 던질라고 하는 거라. 그럼 저쪽에 있는 사람이 그걸 맞혀야 되는 거라.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공을 던지기도 할 거고, 어떤 경우에는 물을 던지기도 할 거고, 어떤 경우에는 다른 어떤 것을 던지기도 할 건데, 빨리 던지면 저 사람은 모릅니다.

저 사람은 뭘 보고 있어야 돼요?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뭘 봐야 돼요? 그 동그란 구멍을 봐야 되는 거라. 구멍을 봐야 그래도 그걸 맞힐 수가 있는 거라. 그런데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빠르게 던지면 구멍을 보고 있어도 모르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감각기관에 두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이 와서 뭔가 탁 부딪칠 때 뭔지를 몰라. 마음은 항상 내 지금 감각기관에 두고 있어야 되는 것이지, 이 구멍 안쪽에 있는 데다가 마음을 두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게 보여? 안 보여!

그래가지고 그 감각기관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 감각기관에 뭔가가 탁 부딪칠 거 같으면 빨리 그거를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렇게 훈련이 되고 있지 않을 거 같으면 뭐 지나가고 나서 뒤늦게 ‘어, 그것이 왔네’ 하고 알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리 아는 것도 전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날조해버립니다. 지가 관념화시킨 것들을 알고 있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일 거 같으면, 사고를 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걸 지가 관념화시켜가지고 억지로 뭔가를 만들어나가 놓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걸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이미 모르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이미 내가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가 그것들을 날조하고 있다는 거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항상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 된다고?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감각기관에 딱 두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보여지는 대상 들려지는 대상에 두어버릴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도 감각기관에 자꾸 둬야만이 그렇게 자꾸 훈련해야 만이 빠르게 오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자주 오더라도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게끔 된다는 거라. 그러려면 어떻게 돼야 되요? 감각기관은 뭐로 가지고 알 수가 있어요?

 

감각기관에 접촉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뭔가 탁 부딪쳤을 때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려고 해야만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는 것이지, 느낌이 아니고 딴 거로 알게 된다?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들은 느낌으로 살아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느낌이 모든 것들이다" 라고 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도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느낌으로 알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발을 들었을 때 일어나는 느낌, 마음이 발에 딱 가 있다면 발에 가 있으면 발을 탁 들 때 일어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그 느낌을 알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느낌을 알지 않고 발을 들 때 그냥 알고 있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대부분이 이걸 관념적으로 알게 된다는 거라. 그냥 지가 억지로 발을 올리면서 발을 들어올리고 있다 라고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움직임을 안다는 것들은 느낌을 알기 위해서는 전초적으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느낌을 하도 모르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움직임을 알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느낌으로 알려고 하라" 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움직임을 어쨌든 내가 따라가야 된다는 거라. 대상에다가 마음을 두어야 되는 거라. 두기 위해서는 움직임을 분명하게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서 움직임을 아는 것이지, 움직임을 알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움직일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실재적인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움직임을 계속 알 것 같으면 계속 관념적으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대상에 마음을 갖다 붙이기는 하는데, 그리하는데 자기가 뭐 해요? 자기가 조작을 해버리는 거라.

 

실제로 한번 보십시오, 움직임을 볼 것 같으면 발을 들어올릴 때 '발을 내림' 하면서도 발을 들어올릴 수가 있습니다. 지가 조작할 수 있으니까. 발을 내리면서도 '발을 들어올림' 하면서 알 수가 있게 되는 거라.

발을 내리고 들어올리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고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사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조작할 수가 있는 거고, 발을 실제적으로 내리면서도 발을 든다고 알 수 있게끔 되는 거라.

 

그러면은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어떤 경우에는 배를 관찰할 때 “스님, 숨을 들이쉬니까 배가 오히려 쑥 들어가는데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거는 상식적으로 안 맞죠? 고무풍선에다가 바람을 넣으면 고무풍선이 불러와져야 되는 것은 상식적인 겁니다. 그런데 나는 고무풍선 불면서 여기 배가 꺼지고 있다고 알고 있는 거라. 이미 관념화시켜버린 상태가 됐다는 거라.

실제적인 것은 자기는 배가 불러오고 있는데도 '배가 꺼지고 있다'고 아예 관념화시켜서 알고 있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게 사고하는 것들은 그마만큼 위험성이 있습니다. 전부 날조를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고하는 수순까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느낌으로써 자꾸 알려고 하라!

왜 그러냐 하면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감각기관이 있고, 그러고 나서 대상이 감각기관에 접촉을 할 거 같으면 그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느낌입니다. 그 느낌을 알면 되는데 그 느낌 다음에는 뭘 해요?

'뭘 느낄까' 하고, 내가 관념화시켜버리는 거라.

 

보인다고 알면 되는데, 대상이 있고 눈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인식하는 안식이 일어났단 말이라. 그래서 뭔가 보이는데, 그러면 보이면 이미 접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일어났으면, 보여지는 거라. 그럼 보인다고 알면 되는데, 대부분 사람은 보인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는 관념화시켜버리는 거라.

보여지는 것이 ‘아, 요렇게 생기고 이런 형태고 이런 색깔은 장미다’ 하고 아는 거라. 관념화시켜버리는 거라. 그게 장미가 꼭 그럴 이유는 없잖아. 그런데 나는 관념화시키다 보니까 저것은 장미인 거라.

 

그래서 '보인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장미다' 하고 이미 관념화시켜서 알고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뭐 나는 장미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볼 때 장미라고 안 볼 수가 있다는 거라.

바퀴벌레가 있다. 고양이가 바퀴벌레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참 재밌습니다. 바퀴벌레가 도망을 가면 가서 탁 발로 잡아챕니다. 그러면 거꾸로 바퀴벌레가 될 거 같으면 바퀴벌레가 바둥바둥하다가 좀 있으면 가만히 있습니다. 바둥바둥할 때는 고양이가 탁탁탁 치는데 가만히 있으면서 안 움직이면 고양이도 가만히 있습니다. 거 왜 그렇겠어? 움직이는 장난감이기 때문에. 바퀴벌레를 볼 때 고양이는 장난감으로 보는 거라. 그러다 바퀴벌레는 아 인제 저놈이 나를 안 건드리는구나 해가지고 팔딱 다시 뒤집어가지고 도망가거든. 그러면 또 고양이는 쫓아가는 거라. 장난감이 움직이면 그건 장난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장난감으로 사용을 하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아마 바퀴벌레를 볼 거 같으면 그걸 장난감으로 보지는 않을 겁니다. 저것은 더러운 해충이라고 보는 거지. 그래서 고양이와 같이 그런 행동을 안 합니다. 어떻게 장난감 식으로 놀리고 하겠어? 그래서 그걸 죽이고 그러지는 않는데 사람들은 그게 혐오스럽다고 알기 때문에 그냥 바로 죽여버리게 되는 거라.

실제로는 바퀴벌레는 전혀 그거하고는 관계없습니다. 고양이가 장난감이라고 보든 아니면 해로운 곤충이라고 보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 생명체는 자기는 살려고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생명으로써 살아가려고.

실재적인 것은 그런 것인데 우리는 그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본다는 거라. 그게 인제 관념화시킨다는 거라. 그래서 고양이도 다를 거고 사람도 다를 겁니다. 그거는 실재 그대로를 볼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마음이 만약에 바꼈다, 바퀴벌레를 보는 것이 전에 같이 혐오스럽지 않다, 그럴 거 같으면 어떻게 해요 우리는? 그냥 살려주는 거라. 여기 있지 말고 다른데 가서 살아라 하고 고요하게 떠가지고 다른데 갖다 주든지, 아니면 바퀴벌레가 지금 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것도 생명체라고 생각하고 그냥 놔줘버립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큰 피해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버린다는 거라. 마음이 바퀴벌레를 보는 것도 사람이 그렇게 바뀌어버리는 거하고 마찬가지라.

 

왜 그럴까? 아까 조금 전에는 사고가 날조를 한다고 그랬는데,

사고를 할 것 같으면 감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감정과 결합하기 때문에!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해로운 해충이 되기도, 하고 그냥 일반 생명체로 보기도 하고 그런 겁니다. 사고를 할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감정이 항상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감정 따라서 뭔가를 하게 되고 행위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사고한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스님, 생각 안 하고 어떻게 삽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생각 안 하고 살 수 있어. 살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게 자기는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자기 감정이 일어나야 만이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대신에 그렇다고 해가지고 사고가 감정하고 결합된다고 해가지고, 그 사고가 꼭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수학 문제를 푼다, 그럼 공식에 맞춰서 요거는 A이고 요거는 B고 해가지고 문제를 풀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는 사고를 하게 됩니다. 그건 해야 되니까 사고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사고가 망상이 돼버리고 나면 그 수학문제는 답이 없습니다. 풀 수가 없습니다. 망상이 돼버리면.

 

그래서 사고하고 망상은 분명하게 구분이 돼야 됩니다.

망상하는 것은 아예 안 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사고를 하더라도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내가 만날 멸진정에 들어있을 수도 없는 거고, 그리고 제2선정의 상태에서 내가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라.

그럼 일상적인 생활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지금 현재 내가 깨달음에 이른 상태가 아닐 거 같으면 사고는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럼 사고는 어떻게 해야 돼요? 바른 사고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사고를 없앨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바른 방법으로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되도록이면 사고하는 패턴들이 없게끔 하기 위해서, 지금 대상을 있는 그대로 느낌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사고가 되기 전의 단계에서 사유를 해야 됩니다. 그 방법으로써 해야 되는 것이지, 그런데 망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나한테 도움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아까 수학문제 풀 때는 사고하는 방식으로 했을 때는 그 문제를 푸는데, 망상하는 방식으로 할 것 같으면 이걸 풀지를 않는 거라. 망상은 그래서 끝이 없는 거라. 그리고 그것의 해결점이 없어. 그냥 했으면 또 다른 망상을 하게 되고 계속적으로 망상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망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반드시 그것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망상인지 사고인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고와 망상의 차이」라고 돼있습니다.

적어도 사고할 때는 주관적인 것도 끼어들지만 객관적인 것들이 됩니다. 그런데 망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인 것이지 그것이 누구든지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뭔가를 할 때는 자꾸 주관적이 아니고 객관화시키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어, 내가 뭔가를 생각을 했다, 그럼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이렇게 볼까?’ 하고 판단했을 때, 그렇게 된다고 판단했으면 그것은 사고의 영역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거 고려하지 않고 내 혼자의 생각만으로 뭔가를 정리를 했다, 그러면 그거는 망상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뒤에도 얘기를 했지만 뭔가를 사고를 할 때는, 이것이 지금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아니면 불행하게 하는가?

그걸 잘 판단해가지고 이익이 있고 행복한 방향으로 간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사고는 필요한 경우로 인정을 하는 거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은 그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해서는 안 되는 걸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전부 망상으로 넘어가버리는 거라.

 

자기가 뭔가가 없는데 그걸 가지려고 한다, 그럴 것 같으면 아, 이걸 가지기 위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어가지고 노력해야 만이 그것이 생겨나는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저걸 가지기 위해서 망상을 하다 보면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거라. 저걸 훔친다든지 아니면 자기는 있다고 상상을 한다든지, 그거는 어떤 경우든지 이익이 없고 행복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고를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이 망상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고와 망상에 대한 것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사고에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사고도 바른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용인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럴 것 같으면 뭐하러 깨달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산다고 얘기를 하겠어? 그 사람들도 사고를 하고 사는 것이라고 해야 되는 거지.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그걸 「사고에도 문제가 있다」는 부분으로 뒤로 쭉 설명이 돼있습니다.

 

사고도 「위딱까(Vitakka)와 빠빤짜(papañcā, 망상)」에 대한 것들로 쭉 애기를 해놓았습니다.

'위딱까(Vitakka)'라고 적어놨습니다.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여러분들 대상을 알 때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가 있어야만 된다 했습니다. '대상이 있는 걸 탁 알고' 그러고 나서 '그 대상을 계속적으로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거, 이걸 위딱까와 위짜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상에 마음이 붙어있어야 만이 그거 대상을 계속적으로 관찰하는 겁니다. 수행에서는 유익한 겁니다 위딱까와 위짜라가.

그래서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은 순간적으로 아는 겁니다. 대상이 있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지 못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개념화시켜버리는 거라. 개념화!

그래서 여러분들은 배가 불러오고 꺼진다, 불러오는 것은 순간적으로 불러오는 것이 계속적으로 있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알 때는 순간적으로 자꾸 알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순간적인 것들이 사라지지 않게끔 계속적으로 노력하는 힘들을 기울여줘야 됩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것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이 보니까 실제로는 그 순간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배가 불러올 때는 그냥 불러와지는 것이 아니고, 파도가 탁 탁 탁 치듯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사라짐과 동시에, 또 뭔가가 다른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로, 그것들이 계속 연결돼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위딱까와 위짜라가 분명하게 작용할 것 같으면 대상에 실재하는 특성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다고 하더라도 위딱까와 위짜라가 있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그 대상에 다가가야 됩니다. 대상이 자기가 와서 다가와지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다가가야 되기 때문에 다가갈려고 하는 마음·사고는 항상 있게끔 돼있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무거운 물건이 있다. 그럼 손으로 딱 잡아봅니다. 손으로 잡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이걸 안 놓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계속적으로 꽉 잡고 있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 이 물건을 안 놓치게 되는 거라. 그런 상태에서는 마음이 고요해지겠어요? 고요해지질 않는다는 거라.

대상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마음은 고요해지질 안 해. 마음이 고요해져야만이 삼매에 들 건데, 그렇게 되질 못하는 거라.

 

그래서 위딱까와 위짜라가 떨어져나갈 때가 됐을 때, 그러니까 내가 보는 게 아니고 보여지는 상태가 됐을 때, 들리는 게 아니고 들려지는 상태가 됐을 때 그때만이 위딱까 위짜라가 딱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내가 대상을 순간적으로 알고 그것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하는 마음이, 그걸 붙잡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런 작용이 떨어져 나갔을 때는, 그냥 그대로 마음은 고요한 상태가 되고 삼매에 들 수가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위딱까 위짜라가 떨어진 상태를 제2선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경전에는 돼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1선정이라고 하는 위딱까와 위짜라가 있는 상태에서는 실제적인 1선정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알아차리는 건 그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됩니다. 어, 배가 불러올 때 그냥 불러오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할 거 같으면, 그걸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이 되게 기쁘는 거라.

 

그래서 기쁨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면 마음은 어떻게 돼요? 고요해 있지는 않는 겁니다.

그 대신에 대상은 있는 그대로는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있는 그대로'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거라.

'내가 붙잡고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를 알고 있는 겁니다.

지가 저절로 와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2선정에서는 그런 상태가 딱 떨어지고 나면은, 있는 그대로 알아지기 때문에 기쁨의 현상들은 이미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은 이제 즐거운 거라. 그렇게 바뀌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위딱까라고 하는 것들-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기능들에서 망상을 잡는 훈련들을 해야 되는 것이지, 망상이 일어난 상태에서 망상을 잡을려고 해가지고는, 그거는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거라. 안 잡혀!

 

망상이 탁 일어날 때 어! 뭔가가 탁 일어났다고 알아야만이 이걸 잡을 수가 있는 것이지, 내내 그걸 망상부리고 나서 , 내가 망상하고 있네’ ‘망상’ ‘망상’ ‘망상’ ‘망상이게 잡혀? 안 잡혀! 잡힐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딱까(Vitakka)와 빠빤짜(papañcā, 망상)를 얘기해놓은 것이 뭐냐면, 관념적으로 만들어져가지고 망상하는 상태에서는 그걸 잡기가 힘이 들어.

그러면 위딱까라고 하는 순간적으로 탁 사고하는 기능들이 일어났을 때, 그때 그것을 잡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은, 특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은 그것이 일어났을 때 빨리 그것을 잡아야, 얼마만큼 빨리 잡느냐에 따라서, 그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거라.그걸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쭉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만냐나(maññanā)에 대한 사유 부분, 그다음에 닙빠빤짜(nippapañca)로 바뀌는 부분, 그런 것들을 쭉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블라인드가 있다, 탁 보면서 ‘블라인드다’ 하고 알게 되었을 때 이걸 위딱까라고 합니다. 대상을 순간적으로 탁 안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수행하는 사람들은 블라인드다 하고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보인다 하고 알아야 됩니다. 뭔가 보이고 나야만이 이 사고를 해가지고, 이게 블라인드다 라고 알 수가 있게끔 되는 겁니다.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뭐 때문에 알아요? 내가 여러 가지 경험들이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축적된 것들에 의해서 블라인드라고 분명하게 인식했기 때문에, 블라인드다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위딱까가 일어나는 상태일 거 같으면 이미 그것은 사고의 개념으로 바뀌어져버린 상태가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블라인드다 하고 알게 되었을 때 그걸 잡기가 쉽지, 블라인드다 하고 나서는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무슨 색깔이다’ 하고 알게 되고, ‘이건 좀 칙칙하다’ 하고 알게 되고, ‘어찌 이렇게 구멍이 뚫린 블라인드를 해놨을까’ ‘여기에는 안 맞는 것이다’ 이렇게 사고가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될 거 같으면 그거는 잡을 수가 없어! 저거 ‘왜 구멍이 뚫린 블라인드를 여기다가 왜 설치했을까’ 할 거 같으면, 그렇게 알고 나서, ‘어 그런 생각이 일어났네’ 하고 알아차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거는 생각이 한참 일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망상이라고 알고, ‘망상’ 하면서 알아차리고 있다, 그게 돼? 안 잡히는 거라!

 

그러면 블라인드다 하고 알게 될 때, 내가 ‘블라인드다 라고 알았다’ 하고 알게 되었을 때는 그다음에는 그걸 탁 내려놓을 수가 있는 거라. 그러고 나서는 그다음에는 ‘보인다’하고 알 수 있게끔 되는 거라.

눈하고 대상하고 탁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느낌만 분명하게 알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이걸 블라인드다 라고 알려고 안 하고 ‘보인다’하고 알게 됩니다. 보이기 때문에 그럽니다! 실제로는 나는 어떻게 보여요? 이게 블라인드다 라고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도 자꾸 그렇게 훈련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보인다했을 때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렇지 않고 이게 블라인드다하고 아는 상태에서는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걸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망상은 끊어내야 되는 거고, 사고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관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고를 관리하는 수행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사고의 관리」 부분에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뒤에 7페이지에 보면 "사고와 망상을 구분하라."

이게 망상일 거 같으면 그거는 떨쳐내버려야 되는 거고, 일으키지 말아야 되는 거고, 사고는 사고인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기 때문에 "사고인가 망상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라." 그래서 그게 첫 번째라.

감정과 섞여있는가, 아닌가? 그리고 이것을 했을 때 원인·결과로써 연결돼 있는가? 그것들을 잘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서 망상이 아니고 사고다 하는 경우 사고가 일어났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 첫 번째라.

 

그다음에 두 번째 "사고는 어떤 것인지 체크를 하라." 이게 내가 좋은 사고를 하는 건지 나쁜 사고를 하는 건지, 이게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지, 아니면 행복하게 하는 건지 아닌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고 도움이 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고는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증장을 시켜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사고는 바꿔줘야 됩니다. 남에게 원한심을 가지는 사고를 하고 있다, 그러면 원한심을 내려놔야 되는 거라. 그래서 뭔가를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한 마음인지 악한 마음인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는 그다음에 세 번째 해야 되는 것이,

"사고를 옮겨놓는 훈련을 하라." 그 사고에는 악한 사고가 세 가지,

까마 위딱까(Kāma vitakka, 애욕의 사고), 위힝사 위딱까(vihiṁsā vitakka, 공격의 사고), 브야빠다 위딱까(vyāpāda vitakka, 분노의 사고) 욕심부리고, 해칠려고 하고, 성내고 하는 사고.

어, 내가 남을 해코지 할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럼 해코지 안 할려고 마음을 바꿔주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선한 사고로 바꿔주어야 됩니다.

 

그게 넥캄마 위딱까(Nekkhamma vitakka, 무집착과 관련되는 사고), 아위힝사 위딱까(avihiṁsā vitakka, 연민의 사고), 아브야빠다 위딱까(avyāpāda vitakka, 자애의 사고)입니다.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다음에 남을 해치지 않고 연민하게 여기고 뭔가 도와줄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마음에서 자애의 마음을 계속적으로 가지는 것 그것으로 바꿔주고.

그렇지 않으면 무상한 마음들을 가지는 것, 그렇지 않으면 부정한 것이다 하고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 이러한 방법으로 바꿔주어야 됩니다.

 

사고는 이렇게 분명하게 3단계로 구분해가지고 관리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사고를 관리하지 않으면 그 사고는 망상으로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고를 관리하지 않으면 항상 사고에서 말과 행동으로 바뀌어져서 나와버린다는 거라. 그럼 실수를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 마지막에 「감정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감정이 주인이 될 거 같으면 꼭 술이 자기 자신을 먹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뭘 했는지도 모르게 되는 거라. 그래서 감정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이번에 설명한 「사고·망상은 번뇌의 산물이다」

망상은 끊어내야 되고, 사고는 잘 관리해야 되는 것인데, 그 사고조차도 종국에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 포인트는

• 사고한다는 것은 날조한 개념을 주관적으로 휘젓는 것이다.

• 개념은 진리가 아니라 존재욕구에 따라 날조한 것이다.

• 개념과 감정은 밀착되기 쉽다.

• 사고·망상한다는 것은 번뇌를 휘젓는 것이다.

• 사고는 선택을 할 수 있다.

• 감정에 마음이 지배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

감정만 떼어내더라도 사고는 잘 관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에 절대 지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말고 이거 비슷한 거 써놓은 게 「망상을 멈추어보자」 하고 교단 홈페이지에 올려진 게 있습니다. 그것도 같이 참조를 해가지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