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지혜도 삼매도 깨달음은 아니다. (20160212.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19. 09:00

https://youtu.be/Rwy-nFvInkw

* 지혜도 삼매도 깨달음은 아니다. (20160212. 대구)

 

명절 잘 보냈습니까? (예) 스님은 이번 명절에 떡국을 못 먹었어요. 다른 때는 명절 연휴에 만날 떡국만 주더만 올해는 어떻게 된 건지 떡국은 안 주고 딴 것들만 들어와서 떡국을 못 먹었어. 그래서 한 살 안 올라가게 생겼어.

이런 명절날 때 부처님 가르침 듣고 배우고 한 게 표가 나야 됩니다. 전에 보다도 그래도 내가 마음이 좀 더 너그러워지고 인내할 줄 알고 또 남에 대해서 배려할 줄 알고 하는 마음들이 많이 생겨난다 하는 것이 느껴져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수행하고도 만날 똑같이 지지고 볶고 하고 있다 그랬을 경우에는 ‘아, 내가 조금 더 공부해야 되겠다’ 하고 스스로 마음먹는 그런 계기들이 돼야 됩니다.

 

오늘 주제는 「지혜도 삼매도 깨달음은 아니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분이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부처님의 양대 제자 중에 가장 으뜸가는 제자죠? 사리불 존자입니다.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산자야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부처님 제자인 앗사지 존자를 만나가지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서 부처님 제자가 됩니다. 제자가 되고 나서 목갈라나 존자는 일주일 만에, 또 사리뿟따 존자는 보름 만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고 경전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목갈라나 존자보다 사리뿟따 존자가 활동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왜 깨달음을 더 늦게 했는가는 주석서 같은 경우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여행갈 때 그냥 쭉 가면 되는데 왕이 만약에 어딘가로 여행을 갈 때는 여러 가지 갖춰야 될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마만큼 시간이 늦어진다 하고 주석서에는 비유를 해놓은 게 있는데, 그마만큼 사리뿟따 존자는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여러 가지 것들을 갖추기 위한 동작으로써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고 설명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사리뿟따 존자는 보름 만에 깨달음을 이루면서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주석서를 보든지 아니면 그 뒤에 나오는 대승경전을 보든지 어떤 것이든지 전혀 없는데, 목갈라나 존자가 일주일 만에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는 것은 뒤에 나중에 주석서 같은데 보면 조금 문제가 있다 하고 적어놓은 것들도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알 필요는 없고, 어쨌든 이 두 분을 부처님은 굉장히 많이 칭찬했습니다.

 

“너희들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한다, 출가했다 할 것 같으면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본받아라!” 하고 얘기할 정도니까. 그리고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는 부처님보다 빨리 열반에 들었죠? 그래서 두 스님이 없을 때 부처님은 "허전하고 쓸쓸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아무도 없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거라. 두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마만큼 컸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걸 「쓸쓸하다」 하고 표현을 해놓았는데 부처님이 뭐 쓸쓸하다고 느꼈겠어? 그마만큼 그분들이 차지했던 공간이 너무나 컸다 하는 거죠.

 

왜 그럴까? 보통 초기에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인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뿟따 존자가 담당을 하고 그래서 예류과에 도달을 하고 나면 대부분은 목갈라나 존자가 그다음에 아라한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을 담당하고 이렇게 역할분배가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예류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경전에 곳곳에 보면 이해를 못 할 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로 볼 것 같으면 우리들은 어린아이를 볼 때 어떻게 봐요? “아! 귀엽다! 예쁘다!” 이렇게 얘기할 건데, 부처님은 그 뒤를 보는 거라. 쟤도 크고 성장하고 언젠가 죽을지도 모르고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과 이별해야 되는 거고, 병들고 늙게 돼있다는 것을 보는 거라. 그래서 그 아이들을 볼 때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참 괴로움이 뒤에 따르는구나” 하고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아이가 무슨 괴로워할 일이 있겠나? 하고 생각을 하는데, 깨달음을 이룬 다른 제자들이 봤을 때는 그게 맞거든. 저 아이도 똑같이 생노병사를 겪어야 되는 거고, 윤회를 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해야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 맞다고 그러는데, 초보자들의 입장에선 '참 괴로움의 덩어리다' 이렇게 얘기할 것 같으면 이해를 못하는 거라.

 

그럼 그걸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면 사리뿟따 존자라. 사리뿟따 존자가 누군가가 물어볼 거 같으면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경전 곳곳에는 사리뿟따 존자가 한 일화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아파가지고 힘들어하고 있을 거 같으면 자기 수행하는 시간을 쪼개가지고 와서 그 환자를 간호해주고 몸을 닦아주고 씻기고 이렇게 하면서 간호를 해주고, 누군가가 아파가지고 탁발을 못나갔다 할 것 같으면 내가 탁발해온 것을 가지고 와가지고 그 스님한테 나눠주고, 이런데 방사가 없어가지고 잘 방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가 최고 상수제자인데 자기 방 기꺼이 내주고 자기는 숲에 들어가서 좌선하고 앉아가지고 밤을 지내고 그렇게 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 입장에서는 참 큰형같이 따를 수 있는 분이 사리뿟따 존자라. 사리뿟따 존자는 실제적으로는 성격이 굉장히 소심했다고 그럽니다. 물론 겸손하고 자상한 것은 있지만 굉장히 소심해가지고 누가 물어보기 전에는 절대 자기가 먼저 얘기하는 법이 없대요.

그런데 어쨌든 제자들 입장에서는 사리뿟따 존자한테 “부처님이 이런 말을 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는 거라. 그러면 사리뿟따 존자가 그걸 자세하게 풀어가지고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대한 이해가 금방 오고 그걸 이해를 해가지고 깨달음의 첫 단계인 예류과에 탁 이르르게 됩니다.

 

실제로는 예류과에 이르는 것은 번뇌가 소멸한다기 보다는 올바른 이해로 바른 견해들이 생겨나가지고 그래가지고 거기에 대한 것들이 확고하게 딱 정립이 됐을 때 예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류과에 이르렀을 때는 없어지는 번뇌가 세개 밖에 없다 하고 그렇게 나와 있죠, 경전에도. 그 세 개를 다 통틀어 가지고 얘기를 하면 바른 견해가 딱 확립된다 하는 거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심하는 것들이 없이 ‘아, 이것이 내가 진리따라 갈 때의 내 길이구나! 이게 맞구나!’ 하는 것이 견해가 성립됐을 때 예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럼 예류과에 이르고나서는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돼요? 선정삼매도 닦아야 되고 위빳사나수행도 해야 되고 열심히 해가지고 예류과 다음에 그다음 길을 쭉 밟아가지고 아라한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그 길을 담당하는 것은 목갈라나 존자였습니다.

목갈라나 존자는 신통력이 뛰어났을 뿐아니라 수행력의 힘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목갈라나 존자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힘이 있다 하고 표현들을 합니다. 그 단계에서는 목갈라나 존자가 아주 핵심적인 부분을 탁탁 찔러서 얘기를 해주면 금방 사람들이 아라한까지 이르르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두 스님이 담당을 한 것이 거의 부처님이 법에 대해서 인도를 해주면 그다음에는 그 두 스님이 그 분들을 쭉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인도를 해주는 역할들을 한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그 두 스님이 완전히 열반에 들고나니까 얼마나 허전했겠어? 그리고 항상 제자들한테도 그래서 너희들은 목갈라나와 사리뿟따를 본받아라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런데 여기 일화를 설명한 것은 뭐냐하면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를 얘기할 때는 '지혜제일'이라고 얘기하고, 목갈라나 존자를 얘기할 때는 '신통제일'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은 사리뿟따 존자는 위빳사나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고, 목갈라나 존자는 사마타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그런데 상수멸을 경험한 분은 오히려 목갈라나 존자보다 사리뿟따 존자인데. 또 사선정부터 해가지고 팔선정까지 이르르고 구선정 상수멸까지 자유롭게 얘기를 할 수 있고 한 분도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물론 그 뒤에 부분은 많이 다릅니다. 두 분이 나아가는 길들은.

 

어쨌든 사마타수행을 하든 위빳사나수행을 하든 본질적인 것들을 자꾸 놓쳐버려서는 안됩니다. 사마타수행은 뭣 때문에 합니까? 집중하는 힘들도 물론 키워야 되는 거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들도 키워야 되는 거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 집착하고 하는 욕망에 대한 것들을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오욕락에 대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들을 하는 것이 사마타수행 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게 돼요? 지혜가 일어나면서 번뇌가 사라져버리죠?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마만큼 내가 집착할 만한 것들은 없어져버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집착하는 것은 여러분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집에 대한 집착이든 가족에 대한 집착이든 아니면 경제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든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든 있지만 그보다도 더 큰 것은 뭐에요? 자기 자신!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생존욕구, 살려고 하는 것, 더 이상 하기 싫어하는 것들,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니까 뭔가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에 끄달리는 것들 이런 것들을 갈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게끔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욕락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다음에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게 사마타하고 위빳사나 수행인데,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지혜가 일어나지고 삼매가 개발되어지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와 삼매가 깨달음일까 하는 겁니다.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혜가 깨달음이라고, 그리고 삼매가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와 삼매는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걸 경전에서 얘기한 것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어느날 우빠와나라고 하는 스님이 찾아와서

“사리뿟따 존자여! 지혜 '윗자(vijjā)'에 의해서 완전한 깨달음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보통 위빳사나수행을 통해가지고 지혜가 일어나는 거니까, 그 지혜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냐고 하는 거라.

사리뿟따 존자는 “아니오!”

 

그다음에 여기서는 '짜라나'라고 돼있는데,

“짜라나(caraṇa)에 의해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습니까?” 하는 거라.

짜라나라고 하는 것은 행위를 뜻하는데, 보통 일반적인 행위 도덕적인 삶을 얘기하는 것뿐만아니라, 도덕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계를 잘 지키고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나쁜 일 안 하고 좋은 일들하고 좋은 말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짜라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에서 짜라나라고 하는 것은 삼매를 얘기합니다. 선정삼매에서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겁니다. 그걸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걸 물어봤을 때 근본적인 의미는 삼매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릅니까? 하고 물어보는 거라.

그런데 그것도 사리뿟따 존자는 “아니오!”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우빠와나 스님이 다시 물어봅니다.

“그러면 지혜와 삼매를 같이 겸해가지고, 쉽게 말하면 사마타수행과 위빳사나수행을 통해가지고 지혜가 개발되고 삼매도 얻고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르게 됩니까?”

그것도 “아니오!” 그럽니다.

 

“그러면 사마타든 위빳사나수행이든 그 수행없이 지혜와 삼매없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오!”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우빠와나 스님이 혼란에 빠집니다. 부처님이 이때까지 누누하게 얘기한 것은 위빳사나수행과 사마타수행 법에 관한 얘기인데, 요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두 개 다 해도 안 되고, 그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해도 되느냐고 해도 그것도 아니다 그러고,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질문할 말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한테 물어봅니다. 그럼 뭘 어쩌라는 얘깁니까?

“뭘 어떻게 해야만이 완전한 깨달음 해탈에 이르게 됩니까?” 하고 물어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수행을 하다 보면 지혜가 탁 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아, 이것이 끊임없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해서 자기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저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아는 것이 아니고, '아, 나는 이것이 물질적인 현상이고 저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알았다'고 알게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나라고 하는 것을 배제한 상태에서, 그것을 알았다'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라. ‘아! 나는 그거 알았다!’ 그럽니다.

또는 ‘아, 이게 무상한 것이구나’ '아,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나는 분명하게 알았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위빳사나수행을 통해서 무상·고·무아를 분명하게 알고 어떤 식으로든 지혜의 단계를 밟아가지고 지혜를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는 상태일 것 같으면 그것은 깨달음은 아니다 하는 거라.

지혜는 이뤘을지 몰라도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얘기할 것 같으면, 깨달은 사람이 「나」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욕심도 부릴 수 있는 거고, 성냄도 일어날 수 있는 거고, 남에 대해서 싫고 좋고 하는 마음들도 일어나는 거고,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얘기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지혜가 곧 깨달음은 아니라는 거라. 지혜는 단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도구인 것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조그만한 지혜 얻었다고 해가지고 그거 좋아 갖고 길길이 날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런데도 가끔씩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지혜를 빨리 얻도록 하라." 어느 스님이 만날 얘기하죠. '사띠와 지혜' 두 개가 중요하다고 그럽니다. 사띠와 지혜가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데 거기에 라고 하는 것이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띠와 지혜는 쓸모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지혜가 있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이 '무상하다'하고 '영원하다'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 너희들이 영원하다고 하든 말든 간에 그거 놔둬버린다는 거라.

그걸 가지고 ‘아, 이걸 지혜로 봤을 때 영원한 것이 아니고 무상하다’하고 그걸 가지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틀렸다고 분명하게 얘길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알아차림을 할 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생겨난 것들은 생겨난 것대로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상태에서는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설혹 지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 내가 성을 냈구나’ 성을 냈다는 것만 있는 것이지 '내가 성을 냈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성냄이 일어났구나’ 하고, 성냄이 사라졌으면 ‘성냄이 사라졌다’고만 아는 거라.

 

그게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지, 지혜가 있다 해가지고 ‘아, 성냄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알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거는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성내는 것들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지혜는 소용이 없는 지혜라는 거라.

그래서 지혜도 하나의 도구가 돼야되는 것이고,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획득되어지는 것들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 뭘 한다? 그거 어디에다 쓸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완전한 깨달음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라는 게 이 사리뿟따 존자의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얘기를 합니다.

 

우빠와나한테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단지 네가 수행을 하다가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인 것이고, 그리고 수행하기 위한 도구인 것뿐인 것이지 그 지혜가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다. 그래서 지혜에 인해서 깨달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나」라고 하는 것들을 버려버렸을 때 그런 집착하는 것들이 없을 때 깨달음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설혹 내가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지 않을 때는 그것은 참 청정한 상태 깨달은 자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려라"

뭔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그 뒷페이지 한번 넘겨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에 집착하지 않는 것」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사리뿟따 존자가 얘기한 겁니다.

[ 「만약 내가 지혜(vijjâ)에 의해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면, 집착이 있어도 「깨달았다」라고 하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 된다.」 「지혜가 있다」 즉 「모든 것이 보이고 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

[나는 무상한 성품으로 알았다. 나는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봤다. 그렇게 돼버립니다. ]

 

[ 즉 「그 점이 지혜가 있는 자신이 있다」 상태인 것이다. 자신이 있어서 그 자신에게 「지혜」가 있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무상」에 대한 지혜이므로 자신을 초월한 지혜입니다. ]

 

지혜도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혜가 단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앞에 있는 지혜는 전부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똑같이 그 두 개가 같이 생겨나가는 법은 없다는 거라.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더 높은 지혜가 일어났을 거 같으면 그 밑에 지혜는 당연히 없습니다. 그 단계를 뛰어넘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버려버리게 되는 거라. 거기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을 버려버리기 때문에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 지혜가 번쩍였다고 하는 자체는 깨달음은 아니다. ]

"뭔가 번쩍해서 지혜가 일어났다" 그걸 사람들이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건 깨달음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 지혜가 있어도 「나에게는 지혜가 있다」라고 하는 상태로 알면 거기에 얽매이고 집착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집착의 상태이며,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

집착하는 것도 없고, 나라고 하는 것, 나의 것도 없는 상태가 깨달음이다.

 

그래서 지혜가 있어도 괴로움은 있습니다. 왜? 지혜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속박되어 있는 것들에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속박되어 있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속박, 물건이든 아니면 집이든 뭐든 그와 마찬가지로 지혜도 하나의 대상일뿐입니다. 거기에 속박이 되어있으면 괴로움은 일어나게 돼있는 겁니다.

 

또 하나는 뭐가 속박되게끔 할까? 시간입니다. 과거에 대한 것, 미래에 대한 것, 망상하고 있을 때나 아니면 과거에 내가 삼매를 체험했는데 삼매를 다시 경험해보고 싶다, 과거에 대한 것들 그런 것들에 다 속박되어 버리면 괴로움들은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기만 하라" 하는 겁니다.

 

시간에 대한 속박은 수행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지혜를 이루었다, 뭔가 번쩍였다' 하는 것도 놓아버려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넘어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것들에 속박되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나는 깨달음을 이루었는데 너는 왜 나보고 깨달았다고 얘기를 안 하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남이 나를 깨달았다고 하든 말든 간에 자기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을 거 같으면 그것으로 족해 합니다. 진리에 머물러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진리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남이 뭐라 하든 간에 자기 할 일들을 그대로 하게 되는데, 과거에 그런 지혜가 일어난 것들을 가지고 딱 속박돼있을 거 같으면 그것들을 가지고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집착이 없을 때 괴로움이 없다“ 하고 경전에서 기록을 하게 됩니다. 괴로움은 대상과 시간의 속박에 의해서 일어나지고, 그러한 것들에 집착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게 됩니다.

 

특히 여러분들은 현상에 대한 집착!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현상에 대한 집착은 돌이켜 생각해보십시오. 그걸 내가 머릿속으로 개념으로 만들어가지고 회상하기 전에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전부 개념에 대한 집착입니다. 개념에 딱 매여가지고 있는 겁니다.

"나는 불교도다." 그러면은 어떻게 돼요?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불교도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개념입니다. 개념! 전부 개념입니다.

내가 이걸 경험했다? 그것도 경험한 것은 그때 실제 사실이었지만 그걸 경험했다고 아는 것은 전부 개념입니다. 그걸 '빠빤짜'라고 그럽니다. 개념에 인해서 착각해버리는 거고 그래서 괴로움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개념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그걸 경전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상카라 사삿다 낫티' 라고 얘기합니다. 모든 현상들 개념이든 뭐든 간에 '모든 현상들은 변하게 돼있다' 항상 변하게 돼있다. 영원하게 존재해 있는 것들은 없다는 거라. 변하게 돼있는 것들이면 변하게 되는 대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변하게 돼 있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도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나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들도 변하게 돼 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것들을 붙잡고 집착하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게 지혜에 집착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구인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는 거라. 조그만한 지혜가 열렸다, 지혜를 이루었다, 그것으로 여러분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걸 본인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 우짤건데? 그럼? 알고 있을 뿐이라. 그래서 거기에 매여버리게되면 괴로움은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사마디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사마디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조금 더 남들보다 잘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나의 개념입니다. 실제 잘 살아가고 있는 거하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아는 것은 틀린 겁니다. 또는 내가 삼매를 경험했다? 경험한 것은 실재지만, 경험한 것들을 아는 것은 개념화시켜버린 겁니다. 그래서 사마디에 대해서 삼매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아야 됩니다. 내가 이런 니밋따를 경험하였다, 이런 삼매를 경험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착각을 해버리면 안 됩니다.

 

사마디의 단계 8가지 단계에 대한 것들을 간단하게 얘기하면,

처음부터 1선정부터 4선정까지는 몸과 마음에 대한 완전한 희열이 일어납니다. 기쁨이 일어나고 행복이 일어나고 평온함이 일어나고 그것은 이 몸과 마음입니다. 마음이나 몸에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 일어나는 단계에서는 몸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마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기쁨들 희열감들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무색계선정이라는 5선정부터 8선정까지가 됩니다. 그래서 무색계 8번째 선정에까지 이르르면 마음조차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정도로 집중력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이 최고의 위치다 하고 착각을 해버립니다. 8선정까지 된다고 치자. 아니면 4선정까지 된다고 치자. 그런데 그것은 뭘 하기 위한 겁니까?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그때는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디 상태에서 돌아오고 나면은 다시 몸과 마음에 대해서 속박하게 됩니다.

 

사마디는 그런 겁니다. 삼매라고 하는 것은. 몸으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 마음으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사마디 상태에서는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디 상태로서는 계속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러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아, 내가 좋고 싫고 하는 느낌들 그리고 감각적인 쾌락들은 그것으로부터는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더욱 강하게 일어나서 수행을 할 때 그런 것들을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으면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것들이 무상한 것이고 어디에도 집착하는 것들이 없게 된다고 알게 될 때 그것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이지 사마디 삼매가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해버려서는 안 된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삼매를 통해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은.

그래서 삼매를 자재로 한다? 다섯 가지 자재를 해서 자유자재로 한다, 또는 그 삼매가 수행을 통해서 삼매에서 그것이 공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완전하게 깨달았다, 열반을 체험했다? 그러한 법은 없다는 거라. 그걸 착각을 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지혜와 삼매 양쪽 모두를 완성했다고 해가지고도 마찬가지로 깨달았다고는 안 한다는 거라. 그것에 대한 집착이 있을 것 같으면 깨달음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거라. 깨달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어떠한 집착들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수행을 하다가 그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떠오른다, 그건 거기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겁니다. 그럼 그 집착을 버려버려야만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가지는 것이지, 그걸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게 인제 세 번째까지의 얘기입니다. 네 번째 질문은 간단합니다.

 

그러면 지혜도 없이 삼매도 없이 깨달을 수 있는가?

그럴 것 같으면 수행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깨달은 사람이게? 그러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것은 수행은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속에서 지혜가 일어나든 삼매가 열리든 그거하고는 관계가 없는 겁니다.

지혜가 일어나지고 삼매가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산물인 거뿐인 것이지 그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깨달음은 분명하게 일어난다. 그걸 사리뿟따 존자는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는 주어가 없다.」

깨달음은 주어가 없습니다. 경전에는 그렇게 돼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에는 없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기독교든 힌두교든 이슬람이든 이생에서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들을 얘기하는 게 있어요? 없습니다! 다 다음 세상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생에서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 외에는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럼 하나 물어볼게요. 깨달음에는 주어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럼 그렇게 완전한 깨달은 사람들은 전부 불교 신자라? 맞아요? 불교 신자입니까? 아닙니까? 대답 못 하겠어요? 그건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불교 신자인지 아닌지는 주어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의지할 대상 자체,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도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의지할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교신자가 되어야 될 이유도 없는 거고, 그것이 불교신자가 안 되어야 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든 아니면 불교를 믿고 있든 아니면 다른 불교의 패턴을 믿고 있든 수행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거 같으면 거기에 대한 확신이 탁 듭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

그전에 자기가 알고 있던 가르침이나 믿고 있던 것들을 버려야 될까? 버리지 말아야 될까? 버려야 됩니다! 버리지 않으면 거기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결국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 나아가는 자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지 그 외에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단지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전부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니까 다른 것들은 믿지 않게 되니까 불교신자라고 봐야되는 것이지, 깨달음에 완전히 이르고 나면은 인제는 불교신자라는 것조차도 떨어져나가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자들은 불교신자이다 아니다 하고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주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런데 추론을 해보건데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전에 쭉 진행되어 오면서, 그러한 사람이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테라와다의 원칙이 부처님 가르침을 변형하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라.」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못한다 하고 규정이 딱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 규정대로 그대로 합니다. 지금 현대에서 부처님이 가르친 계율이 현대에서 안 맞다, 변형시킬 수 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또는 새롭게 부처님이 얘기 안 한 것들을 새롭게 만들어내가지고 이것은 부처님이 사람들이 아니고 다른 어떤 존재들에게 설한 것을 인제사 4~500년 후에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깨달음에는 주어가 없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학자들은 물론 그렇게 합니다. 현대적으로 계율이 안 맞으니까 이걸 조정하자 해가지고 뭔가 학술적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 그런데 깨달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하자고 할 거 같으면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대로 따라서 해보니까 그것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바꾸고 변형시키고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라는 거라.

물론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는 보수적이다 라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마만큼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훨씬 많다는 얘깁니다. 그 외에는 다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없는 걸 어떡할 거라.

 

진리는 경험해본 사람이 그것들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스님 앞으로 이 더운 기운이 나옵니다. 이 더운 것의 원인은 뭡니까? 이 난로입니까? (예) 그러면은 이 더위의 원인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난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알게 될까? 그렇게 알지를 안 한다는 거라. '덥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난로가 됐든 뭐가 됐든 그것이 중요한 부분은 전혀 아니라는 거라.

덥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뿐이라. 그러기 때문에 내가 덥기 위해서 난로가 되어야 된다 하는 이유는 없게 되는 거라.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불교도가 되어야 된다? 이러한 법도 없는 거고, 그래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한테는 불교도이다 아니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예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게 사실을 아는 것과 그렇지 않고 개념을 알고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더위는 여기 밖에 이 난로에서 밖에는 나오지 않는 겁니다. 다른 조건일 거 같으면 다른 더위로 덥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하는 거라. 그냥 이건 난로고 이거는 형광등이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개념일 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이해하면 여러분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그래서 깨달음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에 보면

[ 훈련되지 않은 원래의 마음은 「취한다」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수행하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마음이며, 순간순간의 작용이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이 상태에서는 「주어」가 없고, 「주어」 없이 「해탈」 「열반」이라고 부른다. ]

그래서 이생에서 그러한 상태를 누릴 때는 그사람은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불교만의 특징이 지금 현재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다음 생에서 또 다른 후에 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즉시 할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이번 포인트는

• 지혜도 사마디도 깨달음은 아니다.

• 지혜 없이, 사마디 없이,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사람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 지혜도 사마디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도구」이다.

• 해탈은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이다.

 

집착의 상태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상태를 해탈이라고 한다,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삼매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그것을 얻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