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성자의 마음 (20160122.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7. 09:00

https://youtu.be/t3ArVfQ0R6o

* 성자의 마음 (20160122. 대구)

 

오늘은 「성자의 마음」이라고 하는 걸 하겠습니다.

이거 하고 나서 다음 시간에는 「성자에게 일어나는 마음과 능력」에 대한 얘기를 연이어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자의 마음을 알아서 뭐하게? 왜 알려고 그래요? 프린트물 내주는 거니까 그냥 알려고 그러는 거라? 성자의 마음은 여러분이 성자가 되기 전에는 알 수 있는 게 없죠! 그래도 상자의 마음을 이렇게 글로써 표현을 해 놓은 이유는 ‘아, 이런 마음들이 있으니까 나도 그 마음을 따라가야지’ 하는 걸 배우기 위한 겁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도 꼭 마찬가지죠.

특히 출가한 스님들은 부처님 가신 길을 그대로 갈려고 자꾸 노력을 합니다. 아직은 부처님이 안 됐을지 몰라도 언젠가 나도 그런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하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해야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잘 안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덤벙덤벙 댄다 그러면 수행해가지고 덤벙대는 거 좀 해결하도록 하고, 몸에 병이 있다 그러면 수행 통해가지고 그걸 해결할려고 하고, 이렇게 부차적인 걸 목적으로 해서 하는 경우들을 보는데, 부차적인 것은 덤으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목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해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 공덕 쌓는 것도 공덕 쌓아가지고 뭐하게? 좋은데 태어날려고? 그건 아니잖아! 아니면 지금 내가 공덕 쌓았으니까 마음에 기분 좋아갖고 지금 조금 행복할려고? 그렇게 하면, 공덕 쌓는 게 목적이 돼버려 놓으면 그걸 쌓기 위해서 수단이나 이런 것들은 정당화될 수도 없는 이런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해서 그것들은 부차적인 덤이라.

 

해야 될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그게 공덕이 되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설혹 내가 다음 생에 좋은 조건으로 태어난다, 아니면 지금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진다, 할 것 같으면 부차적인 덤으로 그거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윤회하는 세계에 똑같이 있는 상황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수행 조금 해서 병을 낳았다, 아니면 공덕을 많이 쌓았다, 바라밀을 완성을 했다, 그것으로 인해서 윤회 안 하는 것은 아니잖느냐는 거라.

 

그럼 인제 목적을 분명하게 해야만이 하는 일들을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자의 마음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성자가 되기 위한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리고 지금 성자가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 성자의 마음은 이런 것이다 하고 알 거 같으면 적어도 나는 그 마음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성자들은 성 안 낸다고 한다 그럴 것 같으면 나도 성 안낼려고 어떤 식으로든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지나친 욕심 부리지 않는다, 아니면 여러 가지 집에 모아두는 것들 명예든 권력이든 아니면 친구든 그런 것들 때문에, 그런 관계들 때문에 계속 끄달림을 당한다고 할 것 같으면 ‘어, 성자들은 그런 것들은 쓰레기라고 해서 모아두지 않는데’ 할 거 같으면 나도 그러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전에 그런 얘기를 했죠.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임시 처방전이 두 가지가 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하나가 첫 번째가 도덕적인 행위들을 하는 것. 계율을 잘 지키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들이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첫 번째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제조건은 항상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고 이익이 있는 것이되어야 되는 것이지, 둘 중에 하나라도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도덕적인 행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물에 빠졌다, 그 사람을 구해낼려고 하는 숭고한 마음은 좋지만 자기가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 아니면 그 사람은 구해내고 자기는 죽었다. 한 사람이나 아니면 양쪽에 이익이 없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행위는 못된다는 거라. 도덕적인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그 사람에게도 이익이 있다고 생각이 들 거 같으면 그건 적극적으로 행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바른말을 해가지고 저 사람이 바로 알아듣고 그걸 고쳐나간다고 할 거 같으면 서로 이익이 있는 거지. 그런데 바른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악감정을 가진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꼭 바른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그런 것이 임시 처방적인 것 첫 번째다 하고 얘길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기억합니까? 자비!

 

어떠한 경우든지 자비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것도 행하지 말아라.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또는 생각하는 것, 그런 것들도 어떠한 경우든지 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그래서 '자비가 없는 상태에서 심지어 경전독송 조차도 하지 말아라'고 돼있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 경전독송 할 거 같으면 그것은 그냥 공염불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런 거기 때문에 모든 행위, 특히 말을 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는 자비가 따르지 않으면 행하지 말고 자비를 가지고 항상 행하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임시 처방적인 것으로써 생각을 하고 두 개는 반드시 지켜나가라"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내가 수행을 열심히 했다. 그러면 탁 깨달음에 이르렀단 말이라. 내가 성자가 됐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자는 아라한을 얘기하는 겁니다. 수다원의 성자라든지 일래과, 불환과의 성자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도 성자이기는 마찬가진데, 그래도 아직은 부족하고 더 나아가야 될 길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성자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일 경우에 아라한이 되고 나면은, 여기에 적어놨지만 무서워하는 것들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아라한이 되고나면 맨 처음 생겨나는 것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 첫 번째 부분이라.

 

그런데 우리는 그런 무서움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여러 가지들을 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앞날에 대해서 걱정이 되다 보니까 뭔가를 대비를 해야되는 거고, 뭔가를 모아두어야 되는 거고, 이런 형태들을 취하게 됩니다.

그런다고 해가지고 내가 완전한 성자가 되기 전에는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면서 미리 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맞기는 맞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목적이 돼놓으면 죽고 나서는, 아니면 나중에 나이 들고 나서는 살아온 것들에 대해서 후회를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내 아, 내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니면 또 윤회할 거 같다, 아니면 내가 나이 들어서 참 잘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런 후회가 든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그런 오류들은 범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마음은 언제든지 뭔가 하지를 않으면 안되게 된다는 거라. 마음은 뭔가는 분명하게 반드시 해야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이 뭔가를 해야 되는데 목적이 정해지지 않을 거 같으면 자꾸 엉뚱한 걸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지금 마음이 뭔가를 하자 해서 하고 있는 것들이 아, 이게 해탈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지, 성자의 길을 가고 있는 건지하는 것들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뭔가를 하게 될 때, 실제적으로 내가 행한 것들이 그런 죽음으로부터 벗어난다든지 윤회로부터 벗어난다든지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해야 될 때는 하긴 하더라도 꼭 필요한 것들만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 돼서 열심히 하고 그것만 바라보고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거라.

 

열심히 아이 하나만 내 인생에 전부다, 아이 키워놨더니 나중에는 엄마 탁 배반을 했다. 그러면은 아이고, 내가 저놈 때문에 인생을 다 바쳤는데, 내가 왜 이리 살았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들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 것들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자기 스스로 개발을 하고 그래도 뭔가 내가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바뀌기 위해서 행한 것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일을 하면서도 아, 내가 그래도 어느 일정부분은 잘해왔구나 하는 그런 마음들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자의 마음들을 한번씩들 외워보시기 바랍니다.

 

2페이지에 보면은 다섯째 줄, "개인이나 일, 여러 가지 가족사의 그러한 여러 가지 속박으로부터 피할 수가 없다"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성자들은 그런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가족이 없다든지 아니면 책임감이 없다든지 해야 할 일들이 없다든지 이런 것들은 아닙니다. 그러한 일은 틀림없이 있는데 그분들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거라. 적어도 그것에 속박돼가지고 그걸 위해서만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밑에 비유를 들어놓은 게 "새장에 갇힌 새와 자유롭게 날아다는 새", 새인 것은 틀림없는 거고, 또 새이기 때문에 먹어야 될 먹이는 동일한 것인데, 그래도 그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새장에 있는 새가 훨씬 심하다는 거라.

개인의 일들이나 아니면 가족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 이런 것들에 속박이 돼놔 놓으면 그것은 정신적인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내가 뭔가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받고 있다 할 거 같으면 반드시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 밑에 예를 들어놓은 게,

 

불필요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두 번째가 불필요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세 번째가 습관이나 고행, 초자연적인 일에 대해서 동경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네 번째, 자신의 견해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괴로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거 탁 놔버리고 나면 그냥 정신적인 괴로움으로부터 풀려나버리게 되는 거라. 원인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들이라.

어제 밤에 우리 교단 스님 중에 위사난다 라고 하는 스님이 있어요. 위사난다 스님한테서 문자가 왔더라고. 그것도 나는 새벽에 보았는데, 그 스님은 좀 밤도깨비인 모양이라. 저녁에 전화가 한통 왔더라고. “스님, 다음에서 보니까 스님 법문 있어가지고 법문 열심히 잘 듣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얘기를 하더니, 한밤중에 문자가 왔더라고. 그걸 계속 듣다가 보니까, 다음(daum)에 진짜 내 법문이 올라가 있어요? (예) 하여튼 그렇더라고,

그래가지고 전화가 와서, 자기가 이때까지 그래도 잘 살려고 열심히 노력한 게 그게 오히려 속박된 삶을 하고 있더라는 거라. 그래서 아, 내가 속박되는 것이 인제는 뭔지는 알았다는 거라. 그게 목적이 돼있는 거라. 목적이 되다 보니까 열심히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가지고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은 비난하고 이러면서 살아온 것들이 자신은 잘 살아왔는지 몰라도 그렇게 했는데도 수행에서는 크게 진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돼있거든. 그래서 인제는 아, 내 자신에 대해서 내려놔야 되겠다,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려놔야 되는구나,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들을 내려놔서 해야 되는데 그거 안 한 상태에서 그게 바른 것이라고 알고 간 것이 참 잘못됐다 하면서, 그러면서 “스님한테 참회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면서 문자가 왔더라고.

 

출가한 스님도 그렇게 속박되는 것들이 많은데, 여러분들이 속박되어 있는 것이 한 두개 겠어? 그래서 그런데 속박될려고 자꾸 해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뭔가를 동경하고 바란다고 하는 것들은 그것에 속박되게 돼있는 거라. 또 자신의 세계를 확립해가지고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거기에 속박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경우가 있어요. 여기서는 삼귀의 오계를 하잖아. 그거 하기 싫어서 못가겠습니다. 그냥 그거 안 하고 그냥 하면 좋을 건데 그걸 한다고, 그러니까 그거 하기 싫다는 생각이 탁 들어가 있으니까 자기가 못 지킬 거 같으니까 그걸 안 하겠다는 얘기지.

지키고 못 지키고는 그 사람의 문제인데 이미 그 사람은 그 견해에 탁 속박이 돼있는 거라. 속박이 돼있으니까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들어야 될 법문도 못 듣게 되는 거고, 또 수행하는 것들이나 그런 것들을 계속할 수도 없는 거고, 또 자신의 견해의 틀에 매이다 보니까 다른 것에 대해서 자꾸 정(正)과 부정(不正)으로 구분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 형태들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이 네 가지, 욕구를 가지는 것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필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아직 성자가 되기 전에는. 그런데 불필요하게 성낸다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습관가지고 하는 것들 또 열심히 수행해서 할려고 하는 것들, 그리고 뭔가 삼매를 바라고 그리고 내가 신통력이 있으면 좋겠다 해가지고 바라는 것들은 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동경이 돼가지고 거기에 탁 사로잡혀 놔놓으면 그거는 안된다는 거라.

 

그리고 자신의 견해, 견해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매달려가지고 속박되지는 말아라.

 

그런 것들이 정신적인 괴로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 정도만 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속박으로부터는 많이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정신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만이 아, 이게 내가 무엇 때문에 그랬는가 하는 그 원인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원인조차도 탁 놓아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해탈한 사람, 성자의 마음은 욕구가 사라진 마음, 집착하지 않는 마음,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

 

원하는 것이 없어. 원하는 것이. 그리고 집착하는 것이 없고, 그리고 매이는 것이 없어. 그냥 여기 인연이 끝나면 여기 문닫는다고 해가지고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아. 법회에 가더라도 거기에 매여가지고 하고 그러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성자들의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이 얘기는 뭐냐하면 성자들의 마음에 공통적인 것들이,

-따딴호- 아낭가노-(Vītataṇho anaṅgaṇ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갈애가 없기 때문에, 이런 집착할 수 있는 더러움에 물드는 것들이 아예 없어져 버립니다. 갈애 자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내마음은 이미 청정한 상태 그대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는 것뿐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내 마음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게 되는 거라. 그런 상태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게 성자의 마음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뒷 페이지에 적어놨습니다. 물론 성자들의 마음이지만 여러분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들의 공통적인 게 첫 번째, 사띠(sati)의 완성자!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놓치는 법은 없습니다. 알아차림이 놓쳐진 분들을 성자라고 얘기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얼마만큼 알아차림이 연속하고, 얼마만큼 지속되느냐에 따라서 내가 성자로 가는 길에서 어느 단계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집중수행을 하든 아니면 여기서 하는 하루 수행이든 아니면 집에서 하는 여러 가지 일이든 알아차림이 없이 행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모든 것들 먹고 마시고 가고 앉고 모든 것들은 사띠가 연속되도록 해서 아, 내가 자연스럽게 사띠가 되도록, 사띠가 완성됐다 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려고 하면 첫 번째, 그 밑에 얘기했지만 슬로우 모션. 천천히 하라!

왜 천천히 하라고 그럴까? 예를 들어봅시다.

경행을 한다. 일반적으로 걷는 속도보다도 더 천천히 '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알아차린다.

그럴 동안에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떨까? 망상하는 것들이 없어집니다. 고민하는 것들이 없어집니다.

모든 행위들을 천천히 하면 고민하고 망상하는 것들을 제어할 수가 있게 됩니다. 대부분은 보면 거의 80% 90% 정도가 망상하고 고민하는 것들입니다. 실제 행위하는 것보다는. 그런데 그게 행동으로 표출된다든지 하는 것보다는, 그냥 고민하고 망상하는 것으로 그쳐버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러느냐는 거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습관들을 빨리 바꿔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은 자꾸 천천히 하라. 수행할 때만 천천히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도 천천히 하라.

천천히 할 것 같으면 알아차리기도 쉬워질 뿐아니라 부수적으로 고민하고 망상하는 습관들도 점점 없어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뭐든지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행동하고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걸 천천히 하라는 거라. 천천히!

 

당장 급해가지고 뭔가를 해야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천천히 할 수 없지만, 살아가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불과 얼마 안됩니다. 가스 불에 국물이 탁 넘친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천천히 할 수 없습니다. 그거는 빨리 불을 꺼야 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몇개나 되느냐는 거라. 살아가면서.

그런데도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에 자꾸 빨리빨리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자꾸 실수를 하게 되는 거고, 계속적으로 똑같은 걸 반복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천천히 할 거 같으면 실수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보면 그것이 더 빨라. 훨씬 빠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천천히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이 공통적인 특성, 성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시간낭비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괜히 빨리하면서 실패해버리고 다시 또 뭔가를 해야되고, 그리고 한 것들이 정확하지도 않게 되고, 그러면서 시간낭비를 하는 것이 굉장히 많다는 거라. 시간낭비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 시간은 여러분들에게는 딱 정해져 있습니다. 죽는 날이라고 하는 것들은. 죽는 날이라고 하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어진 시간이 똑같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낭비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거라.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려고 해선 안 된다는 거라.

그럴려면 알아차림을 유지를 하는데 천천히 하라는 거라. 천천히 해나가면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알아차림 할 때 두 번째가 천천히 해나가는 것뿐 아니라, 순간순간을 실천하라!

사띠를 오래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보면 그냥 과거를 붙잡고 있든지 미래에 가 있든지 그렇게 됩니다.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순간에 일어났다가 순간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사띠하는 것들은 순간순간 계속적으로 한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을 것 같으면 사띠가 자연스럽게 되는 상태도 아닌데, 그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건 오판이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순간순간이라는 거라.

그러면 순간순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되는 것이지, 그전에 거라든지 아니면 지나갈 미래라든지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뭔가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띠의 기본 원칙은, 항상 순간순간,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

 

사띠를 놓쳤다? 어, 사띠를 놓쳤네! 하는 사이에 이미 그 순간은 지나가버린다는 거라. 놓쳤으면 어때? 지금 여러분이 자연스럽게 사띠가 안되고 지금 현재는 아라한이 돼있는 상태가 아닌데 당연히 놓치게 돼있는 거지. 그냥 놔두라는 거라 그거는.

놔둬버리고 지금 순간에 어떠한 경우든지 순간에 일어나는 것들은 반드시 있게 된다는 거라. 그럼 지금 순간에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후회하는 것도 할 필요가 없는 거고, 돌아볼 필요도 없는 거고, 아, 내가 또 얼마만큼 해야 되겠다 그럴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경행을 한다 그러면 여기서 저까지 간다, 가다가 저 벽에 부딪칠 거 같으면 자기가 딱 섭니다. 왜 그래야 돼? 벽에 부딪치면은 부딪쳤다고 알고, 멈추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알고 나서, 멈추면 되는 것인데 미리 목표점을 설정을 해둬놓으면 목표에 다가가면, 자기는 이미 그 미래에 먼저 가 있어. 미래에 가 있으면 어떻게 돼? 지금 순간에 일어나는 걸 놓쳐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 식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 가 있든지.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는 순간순간 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 순간에 일어나는 것들을 반드시 알아차린다 하고 생각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그렇게 할 경우에 교재 중간 부분에 보면 "사띠를 완성한 아라한의 경우는 행동의 방해가 되는 고민이나 괴로움도 없고 행동에 의한 스트레스도 없고 행동을 제한하는 근거도 없기 때문에 최고로 자유로운 행동하는 인간이 된다. 그 행동도 결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행복을 위해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멈추는 일없이 계속됩니다."

 

지금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들은 사띠하는 것들입니다. 사띠를 지닌 상태는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선한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은 실제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선한 마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선한 마음으로 행동을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를 완성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완성함과 동시에 이미 살아가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들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하게 되는 거라.

그게 순간순간을 알아차려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다음에 사띠하는 세 번째 부분은 여기서 빠졌는데 세 번째는 빼고,

네 번째는 그 밑에 모으는 것! 모으는 거 하지마.

언젠가 한번 했죠? 모으는 것들은 쓰레기와 마찬가지다. 쓰레기다. 쓰레기를 계속 모으고 있는 거라. 집안에 있는 여러 가지들, 실제적으로는 쓰레기입니다. 그렇게 쓸모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아두는 것 중에. 왜 그럴까? 그게 쓰레기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변함이 없어야 되는데 변하거든.

 

얼마 전에 누가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친구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하고 그래서 그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자기한테 사기를 친 것, 약속을 어긴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눈감아주고 친구를 위해서 열심히 했는데, 어느날 친구가 자기 등을 찔렀다는 거라. 그래서 괴로워 죽겠습니다. 나는 그래도 그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엔 배신당했습니다.

 

그분의 한 일은 맞기는 맞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도 쓰레기란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라.

왜? 친구도 변하게 돼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지 무너지게 돼있고, 그리고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럼 그 친구의 마음도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변하게 돼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내가 여러 가지를 한 것들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친구 관계가 유지되기를 바라게 되는 거라. 그런데 안 변하는 것이 어딨습니까? 변하게 돼있는 겁니다.

 

그럼 친구도 엄밀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쓰레기이기 때문에 그 쓰레기 버려버려야 돼? 친구를? 가족도 꼭 마찬가집니다. 가족도 쓰레기입니다. 버려버려야 됩니까? 여러분 재산도 쓰레기입니다. 또는 여러분이 누리는 권력이나 명예도 쓰레기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입니까?

 

쓰레기라고 생각하라는 것은 뭐냐면, 그것들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것들에 붙잡히지 말아라는 뜻이라.

그래서 재산은 바르게 활용을 해야되는 거고, 그리고 친구 관계에 대해서 해야 되는것들은 내가 해야 할 일들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친구가 나에게 뭔가를 해줄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 염두에 둬버려서는 안된다는 거라. 명예와 권력이 높아지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것들이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그런 것들을 모을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딱 자신이 붙잡혀있는 것들은 그것은 쓰레기를 계속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친구나 재산이나 가족이나 이런 것들이 쓰레기가 아니라 거기에 붙잡히는 마음이 쓰레기라는 거라.

붙잡히는 그 마음들을 쓰레기라 생각해서 붙잡지 않도록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렇게 모아두는 마음들을 놓아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수행은 진척이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대상에 붙잡혀버리면 위빳사나 수행하기는 힘들어져버립니다.

 

어제도 누가 와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앉아서 수행하고 있으니까 너무 좋다는 거라. 아주 편안하게 그냥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호흡이 길어지고 가늘어지고 하는 것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니까 한시간이 금방 후딱 지나가버렸다는 거라. 그리하고 나니까 몸도 개운해지고 너무 좋습니다. 스님.

참 잘했어요. 잘했는데, 그래서 물어봤어.

수행은 어쨌든 진척이 있어가지고 참 잘했는데,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질적인 현상을 과연 몇 번이나 알아차렸느냐? 선뜻 대답을 못하는 거라.

그러면 그렇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물질적인 현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들이 몇 번 일어났다가 사라지는지는 알고 있었느냐? 모르는 거라. 그냥 똑같은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진행이 된 것으로 알고 있고, 물질적인 호흡도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평소보다도 조금 더 길고 가늘어졌고 편안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 이상은 모르는 거라.

 

원인이 뭘까?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거라. 물질적인 현상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고, 그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이라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편안하고 고요하고 좋으니까 거기에 딱 매여져버리니까 그 뒤부터는 편안하고 고요하기는 한데, 정신적인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니까 물질적인 호흡도 느려지고 가늘어지고 한 것은 틀림없는데 그런데 그것뿐이었다는 거라.

편안하고 고요함에 딱 매여놔버리면 현상 자체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모아두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할 거 같으면 수행에서도 그와 같이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모아두는 습관들은 버려버리라는 거라.

 

누군가 나에게 사기를 쳤다. 1년전에 사기친 건데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다, 그건 지금 모아두고 있는 거라. 지금 마음은 그때 마음하고는 완전히 다른 마음이고, 조건도 그 친구라는 조건도 달라져 있는 데도 나는 그걸 모아두고 있는 거라.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은.

그래서 마음이 변하는 것들을 모아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것만 하면 좋은데 좋은 일을 했을 경우에 공덕도 모아둘려고 합니다.

목요일날 와서 스님한테 공양올렸으니까 공덕이 된다. 한 주 빠졌다. 그럼 조바심이 나는 거라. 아, 이번 주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빠졌다. 그러면 내가 스님한테 공양 못올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또 힘드는 거라.

공덕은 순간순간 짓는 것이고, 순간순간 지은 공덕들은 그 공덕들에 대해서 반드시 결과들을 낳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그런데 본인은 자기가 관장하고 자기가 할 일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거기에 딱 매여 있는 거라.

 

다른 비유를 할 것 같으면 내가 너한테 십원 줬는데 니는 와 내한테 아무것도 안 주노? 하고 거기 매여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십원 준 일은 십원 준 일에 대해서 뭔가 다른 방법으로 결과가 나타나게 돼있는데, 그 결과를 그 사람한테 받을라고 하는 거라. 자기가 관장을 할려고 하는 거라.

업의 법칙은 자기가 관장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 거기에 매여있는데? 그 공덕에 매여 있어도 안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도 매여버리는 순간 다 공덕들도 쓰레기와 마찬가지 상황이 돼버리는 거라.

 

공덕 자체가 쓰레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매여버리고 붙잡히는 마음들이 쓰레기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라.

선한 일들을 할 때도, 자애의 마음을 지닐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거기에 매이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해도 이러한 것들은 변화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들에 대해서 붙잡히는 마음이 없어야 만이, 내가 하는 일들에 설혹 내가 재산을 모으고, 공덕을 쌓고 하더라도 바른 방법으로 하게 된다는 거라. 그걸 잊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6페이지 중간 정도에 보면, "어떤 것에도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 것이 안전한 상태, 불안이 없는 상태입니다. 철저하게 무상인 것, 고통인 것, 변하는 특성, 가치가 없는 것을 반드시 체험하라."

그래서 그렇게 체험해서 분명하게 안 사람들은 성자인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그 길을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달성한 아라한들은 아무것도 모아두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성자에게 보이는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침착한 것!

 

그런데 저 분이 사띠를 완성한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잘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잘 모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데 성자의 마음 중에 두 번째 특색이 침착한 것입니다. 침착한 것은 다른 사람들한테 금방 드러나집니다.

그런데 성자의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참착해있습니다. 그래서 놀래는 거라든지, 아니면 침착하지 못해서 성냄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은 전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거기 보면, '괴로움, 고민을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우선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뭔가 문제 때문에 괴로움이 있다, 예를 들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가지고 다리를 꼬고 있으니까 다리에 괴로움이 일어난단 말이라. 그러면 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 다리를 펴야 됩니다. 이게 일반적인 사람입니다. 그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그래요? 다리에 통증이 있다. 그럼 ‘통증’ 하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통증’하고 관찰해야 됩니다. 그런데 ‘통증’하고 관찰할 때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안 될 때는 통증을 바라보는 마음이 고요하고 침착해져있지 않을 경우에는 그 통증을 관찰하는 것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고요하고 침착해져 있을 거 같으면 그냥 그대로 그 통증을 관찰합니다. 그럼 통증이 싹 사라지는 거라.

괴로움을 없앨려고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먼저 침착해지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먼저 고요해지도록 해야 됩니다.

 

화가 확 일어났다. 말로써 확 뱉어내기 전에 어, 내가 마음을 좀 더 고요하고 편안하게 만들고 나면은 화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적어도 화가 일어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말하는 것으로 해서 화를 일으키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마음을 고요하고 침착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들을 먼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러면 화가 일어났으면 당연히 그것을 그냥 뱉어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에서는 반드시 그 길이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벼워지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된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

그 조건들이 채워지지 않을 거 같으면, 그냥 대상을 알아차릴 것 같으면,

지금의 마음 상태에서 대상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거라.

화가 나있으면 화가 나있는 상태에서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고,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는 상태에서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자꾸 대상을 붙잡고 밀어내고 하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마음을 먼저 고요하게 하고 침착하게 만들어라는 거라.

 

아라한이 공통적인 게 그렇게 마음이 항상 침착해 있고 고요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밑에 보면, "마음에 욕구가 있으면 여러 가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집니다. 분노가 있을 때는 싫은 것을 부수거나 부정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에 욕구가 있고 분노가 있는 것들을 먼저 알아차려서 마음을 먼저 고요하고 침착하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뭔가를 해도 늦지 않다는 거라.

 

그게 성자들의 공통된 마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첫 번째, 알아차림이 자꾸 끊긴다고 하더라도 항상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침착해지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침착해야만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그 대상으로 인해서 분노와 욕구의 감정이 따라오지를 않는다 는 겁니다.

 

그다음에 성자들의 마음 공통적인 것들 세 번째, 마나(māna)- 아만이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

 

수다원부터 불환과까지는 아만(māna)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돼서는 이것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수행의 정도에서 내가 성자의 그룹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했느냐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은, "존재할려고 하는 욕구"가 얼마만큼 남아있느냐? 그 존재하려고 하는 욕구가 아예 없어져버렸으면, 자기는 인제는 더 이상 윤회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나는 이게 마지막 생이다. 나는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게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그전에 성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조금 조금씩 남아있는 상태에서 엷어지면서 마지막에는 그것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아만(māna), 남을 비교한다든지, 동일하게 생각한다든지, 자신이 좀 못난 존재라든지, 이런 생각들은 가져서는 안된다는 거라. 왜? 나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거기 때문에! 없는 걸 가지고 자꾸 비교하고 뭘 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에고(ego)를 가지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없도록 해야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게 뭐냐면 그렇게 자꾸 노력을 해야만이 감정하고 나라고 하는 것이 결합이 안되는 거라.

문제가 생기는 것은 감정만 가지고는 그것이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적습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감정하고 결합이 돼버리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폭발력이 굉장히 커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나라고 하는 것들이 사라질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밑에 보면, "병이 드는 것, 친한 사람이 돌아가시는 것, 천재지변을 당하는 것, 타인으로부터 비방과 중상도 받지만 나라고 하는 에고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일로 고민하고 괴로움 당할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설혹 내가 병이 들었다, 내가 죽음을 맞이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괴로할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자꾸 그렇게 노력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마지막에 보면, "이 혼란한 사회에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의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지만 바르게 진리를 전해줄 수 있다는 거라.

 

"일반적 사람이 성자를 발견하는 방법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안정하게 할 정도의 인화성의 위력(위신력)입니다 "

그래서 그사람 옆에만 있을 거 같으면 상당히 편안하고 좋아. 그래서 그분이 계속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보면, "마을이든, 숲이든, 산골짝이든, 산등성이든, 성자가 있는 곳은 언제나 즐거움이 있다."

성자만 바랄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그 즐거움이 있는 장소로써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렇게 만들 때 여러분이 있는 곳이 곧 즐거움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즐거운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인제 성자의 마음이고 여러분들이 따라서 배우고 나아가야 될 마음들이다 하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자에게 일어나는 마음과 성자의 능력」에 대한 것들을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