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해탈한 자에게 일어나는 마음과 능력 (2016012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16. 09:00

https://youtu.be/3qTys8zwu3c

* 해탈한 자에게 일어나는 마음과 능력 (20160129. 대구)

 

저번 주에는 스님이 고생을 좀 했어요. 얼어가지고, 보일러가 안 켜져가지고, 그냥 남의 절에 피신 가있기도 하고 그리 했어요. (수행자 : 동파는 안 됐습니까?) 동파는 안 됐고, 보일러는 관계없었는데 위에 옥상에 있는 물탱크가 얼어놓으니까 물이 공급이 안 되니까 보일러는 분명히 돌아가는데 안 따뜻해져. 전혀 안 따뜻해지더라고. 물도 안 나오고 그래서 씻지도 못하고 그래가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 해가지고 이러다 얼어 죽겠다 싶어가지고 남의 절에 가서 신세를 좀 지고 그렇게 했었습니다. 다행히 날이 풀려가지고 괜찮아졌어요.

 

이번 주는 「해탈한 자에게 일어나는 마음과 능력」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저번 주에 「성자의 마음」에 대한 얘기를 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성자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라 하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번에 해탈할 때까지 응급처방으로 항상 가져야 되는 두 가지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뭐 뭐라고 했죠? (수행자 대답 : 자애의 마음하고 계를 지키는 것)

항상 선한 말과 선한 행위들을 할려고 하는 것하고, 그다음에 마음에서 자애를 지니고 그러한 행위들을 할 수 있도록 하라 하는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럼 인제 해탈했다고 치고,

 

해탈한 자에게 일어나는 마음하고 어떤 능력들이 있을까?

 

예를 들어봅시다.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에게는 어떤 능력들이 있을까?

보통 분들은 무슨 신통력이 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편적으로 예를 들면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나는 완전하게 깨달은 붓다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 제자들도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부처님이 “아, 너는 아라한에 이르렀다. 불환과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하면, 그럼 그 상대방도 그 사실에 대해서 시인하는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는 딱 부처님 살아계실 때뿐이라. 그 뒤로는 어떠한 경우든지 불문율화 되다시피 한 것이 뭐냐면, 자신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걸 얘기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거는 불기 2,600년 쭉 지속돼오면서 똑같은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최초로 그 법이 묻혀져 있던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준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외도들에게 와서 이 법을 들어라. 그래서 너희들도 깨달음에 이르러라 하는 의미에서 “나는 깨달은 자다. 해탈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들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은 “너도 해탈했다” 하고 부처님이 증명해주는 형태들을 취하게끔 했습니다.

그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그런 해탈한 자가 됐습니다. 깨달음을 이루어가지고. 그런데 그 뒤로는 한번도 불교 역사뿐 아니라 어디에도 "본인은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거 왜 그럴까? 깨달음을 이루게 돼서 해탈을 하게 되면은 우선 전체적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없어져버립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당연히 내가 명예롭게 되기 위한 어떠한 행위들도 하질 않는 거지.

내가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하고 실제 자기가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없다는 거라. 아라한은 아라한의 행위들을 하게 되는 거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을 굳이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나는 아라한이다 하고 드러낼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럼 부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인 제3자가 저분은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태국에도 가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님은 아라한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논리적으로는 안 맞는 거라. 본인이 아라한의 상태에 이르게 됐을 때 다른 사람이 아라한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저 사람은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할 때는 그렇게 말하는 본인 자신도 아라한이라는 얘기와 마찬가지라.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누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아니면 누구가 깨달은 자다 얘기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안 돼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들이 해탈한 분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그건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그분이 지닌 마음과 그분이 지닌 능력들을 보면서 아, 저분은 해탈한 분이다 아니다 하는 것들을 추측할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다행스럽게도 부처님이 설한 경전에 그렇게 분명하게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은 그것을 근거로 풀어 써놓은 내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해탈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해탈했다는 것은 열반을 이루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를 무슨 구본해탈이니 아니면 세간의 해탈이니, 뭐 심해탈 혜해탈 양분해탈 해가지고 세 가지 해탈이니 이런 거 하고는 조금 거리가 뭡니다. 그래서 통칭해가지고 해탈이라고 하는 건데 실제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 열반에 이르신 분들을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닙바낭 빠라망 수캉(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최고의 행복이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그 열반이란 개념은 상당히 긍정적인 것들로써 작용을 하는데, 왜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를 했을까?

열반에 이를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집착하는 것들은 전부 버려버려야 되는 거고,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어찌 보면은 참 부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잘못 이해를 할 것 같으면, 열반에 이르신 분들은 아무런 행위도 않고 무위도식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덧없다고 하게 되면 내가 허무주의 쪽으로도 빠지기도 쉽고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거는 서양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그런 것이지 정확하게,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열반에 이르신 분들은 더욱 더 적극적인 행동들을 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완전한 해탈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도와 과에 이르신 분들은 자기들의 영역내에서 자기들의 능력내에서는 굉장히 활동적입니다. 굉장히 활동적입니다. 오히려 그러지 못한 분들이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게으름을 부리기도 하지만 이미 게으름을 벗어난 분들은 분명하게 자기 할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할 일들이 많고 판단할 일들이 많은 사람들은 실제 행하는 것들은 적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적은 사람들은 그마만큼 행하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아예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망상하는 것이 아예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들은 행위로써 이루어집니다. 그게 도와 과에 이르면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해탈에 이르는 분들은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아예 존재를 하지 않게 됩니다. 나중에 이걸 쭉 읽어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해탈한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끄떡없습니다.

 

그 마음이 어떤 거냐면 첫 번째가,

Niṭṭhaṅgato asantāsī(닛탕가또- 아산따--) 입니다.

목적에 이른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마음이 어떤 것에도 끄떡없이 굳건하게 유지를 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적정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라훌라가 일찍 출가해가지고 스무살이 됐을 때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때 일화를 경전에 서술해놓은 게 있습니다.

마침 기원정사에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가지고 갑작스럽게 방이 없어졌어요 잘 수 있는 방이. 그러니까 그렇게 될 경우에는, 지금도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내가 만약에 태국 간다. 그러면 기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방을 비워줘야 돼요. 방이 없을 경우에. 주지스님이든 누구든그 자리를 비워줘야 돼요. 방이 없을 거 같으면.

마찬가지로 라훌라도 스무살이었기 때문에 아직 어린 스님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린 스님부터 먼저 자리를 비워주게 돼있으니까 라훌라 스님이 자기 방을 다른 스님에게 내주고 나서 갈 데가 없으니까 부처님 있는 방 문앞에 앉아가지고 좌선하면서 날을 지셉니다.

 

마라가 봤을 때는 이게 참 좋은 기회라. 저 어린 라훌라를 놀래킬 거 같으면, 그 어린 라훌라를 해코지 할 거 같으면 아버지인 부처님이, 부처님이 라훌라 아버지잖아. 친아버지잖아. 그러니까 친아버지가 놀랠 거 아니. 그러니까 극히 인간적인 거지. 쉽게 말하면 새끼를 못살게 굴거 같으면 아버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뭔 행동을 보일 것이 아닌가 해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어디 부처님이 그럴 분인가?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식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은 아닙니다. 할 일을 안 한다는 것하고는 다른 겁니다.

그래서 이 경전에서는 그렇게 해도 라훌라도 끄떡 안하고, 부처님도 마라한테 니가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하고 마라를 나무라는 형태로써 경전이 되어있는데,

사람들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여기에서 빼먹어 버리게 됩니다.

 

뭐냐 하면 라훌라가 보여주는 행동들에 대한 것들을 다 빼먹어버리는 거라.

라훌라가 깨달음, 해탈에 이르신 분이기 때문에 코끼리로 변신한 마라가 라훌라를 짓밟습니다. 그리고 코를 가지고 목을 휘감아가지고 내동댕이 칠려고 힘으로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그렇게 됐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 오기 전에 도망가버리고 없겠지. 또는 코끼리가 직접 목을 휘감고 막 밀어붙이고 할 거 같으면 아마 정신을 잃어버릴 거라.

그런데 라훌라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끄떡 안 합니다. 아무런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한 게송이 뭐냐면 "목적에 이른 사람, 해탈에 이른 사람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서워서 어떤 일을 못하고 하는 법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해야 될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대로 하게 됩니다. 라훌라가 지금 좌선수행을 하고 있다. 좌선수행 하고 있고 또 자기 딴에는 부처님 앞에 있으니까 부처님을 지켜줘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를 합니다.

 

해탈자의 마음은 그와 같습니다.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걸 해탈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급작스러운 일이 있을 때, 특히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탁 뛰어든다든지, 아니면 사람이 확 나타난다든지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놀래가지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밟고 나서 하는 행동들이 있죠? 저놈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합니다. 그거는 뭐냐면 내가 식겁했다 이거야. 식겁했다는 거를 그렇게 말로 표출을 합니다.

 

그런데 해탈한 사람들은 그게 그대로 그냥 보입니다. 순간적으로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그때 자신이 해야 될 것들, 빨리 브레이크를 밟을 상황이면 빨리 브레이크를 밟아야 되는 거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마음이 그전에 운전했을 때와 지금 그러한 상황에서 마음은 요동치지 않고 그대로 안정된 상태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도 반응하는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죽일놈 살릴놈 하는 일도 없고, 단지 그 사람이 지금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 살필 일이 있을 거 같으면 내려가지고 살펴보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고 전혀 부딪치는 것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냥 편안하게 가면 되는 것들이라. 그것으로 인해서 또 다른 감정들을 일으킬 일들이 전혀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외부에 대한 자극으로 인해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 있다. 혼자 있을 때는 지가 잘 참아내고 뭘 할 수가 있는데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는 대부분 그걸 잘 못하고 반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응이 얼마만큼 어떻게 바뀌어지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 마음이 드러나져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 급작스런 반응들을 한다는 것은 참 공부 안 하고 있다 하는 얘기하고 마찬가지라.

애가 밉고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미운 마음을 관찰해야 되는 것이지 손이 팍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거라. 남이 자기에게 싫은 얘기를 한다 해가지고 자기가 금방 싫은 마음이 확 일어나가지고 뭔가를 표출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조금 전까지는 평온한 마음이었는데, 왜 외부적인 자극 조그만 거 하나 가지고 그게 죽고 살 일도 아닌데, 죽고 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건데도, 그것가지고 그렇게 반응을 하느냐는 거라.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싶고 죽기 싫어하는 것들 때문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래봐야 어차피 여러분들은 좀 있으면 죽습니다. 안 죽는 사람 어디 있어? 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거지. 그럴 것 같으면 살아 있을 동안에 잘 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렇게 반응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잘못 사는 형태들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살아 있을 동안에 열심히 살면서 해탈에 이르도록 해야 되는 거고, 해탈에 이르지 못한 사람도 그런 불선한 마음을 일으키지는 말아야 되는 것이고, 또 선한 마음들을 계속적으로 일으켜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여러분들이 적어도 해탈자의 마음에서 배워야 되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Vītataṇho anaṅgaṇo(-따딴호- 아낭가노-) 해가지고

갈애를 떨쳐버려 더러움이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갈애가 있으면 당연히 뭔가를 하게 됩니다. 뭔가를 하게 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뭔가가 생겨나게끔 된다는 겁니다. 생겨나면은 당연히 그것은 소멸하게 돼있고, 끊임없이 윤회를 하게 되는 것은 이 갈애가 원인이라는 거라.

갈애를 아예 떨쳐내버려서 갈애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번뇌에 휩싸일 일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더러움이 없다는 것, 그것이 두 번째입니다.

 

마음이 뭔가를 갈망하고 하는 것들이 있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번뇌에 휩싸이게 됩니다. 뭔가 남이 옷을 하나 샀다. 나 저거 갖고 싶다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면 남편을 들들 볶든지 아니면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그걸 살려고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자꾸 바뀌게 되는 것이지, 저걸 사고 싶다는 마음만 없을 거 같으면 적어도 그럴 일들은 생겨나지 않는데, 저걸 사고 싶다는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그 갈애가 또 다른 것들로써 바뀌어버리게 되는 거라.

남들이 좋은 옷 입었으면 아, 좋은 옷 입었다 하고만 생각하면 되는 거고, 본인이 다른 옷 입고 있으면 그것에 만족해버리면 그만인데 그렇지 않고 그 옷을 살려고 하니까 갈애가 일어나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 윤회시키는 원인입니다.

 

갈애가 일어나면 어떤 경우든지 계속적으로 뭔가가 생겨나게 됩니다. 생겨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사라지고 생겨난 것은 사라지고 하는 그런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는 거라.

살아가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강하게 일어날 것 같으면,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고 할 것 같으면 살아가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살아가면서 뭔가를 하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연결돼가지고 윤회를 하게끔 됩니다.

 

생(生)에 대한 집착들 이런 것들이 전부 갈애를 만든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삶 가지고 여러분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여러분들하고는 관계없이 진행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마음들을 되도록이면 가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갈애가 일어남으로 해서 우리가 얼마만큼 많이 더러워지는가? 만약에 성냄이 일어났다, 성냄은 어디서 일어났어요? 갈애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는 거라. 아니면 욕심이 일어났다, 그것도 갈애로 인해서 일어나는 거라.

그럼 성냄이 일어났으면 성냄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욕심이 일어났으면 욕심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적어도 더러워져 있을 때는 더러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래야 2차적인 것으로는 바뀌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것조차도 안 해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끊임없이 그냥 그 상태를 지속해나가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꼭 눈이 내리막길에 굴러가면은 조그만한 눈덩어리인데 가만히 놔두는데도 자기는 그냥 눈덩어리는 굴러갑니다. 그러면 계속 커지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갈애는 또다른 갈애를 계속적으로 불러온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중단시키는 것은 갈애로 인해서 더러움이 일어났으면 그 더러움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아, 내가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고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런데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은 그런 갈애가 없습니다. 더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어떻게 뭔가를 할려고 하는, 해야 된다는 그런 것들도 없고, 이미 해야 될 일들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뭔가 미련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이 몸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지금 해야 될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렇지만 언젠가는 이 몸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 되든 간에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음은 갈애로 인해서,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다는 거라.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거라, 그냥 항상 청정한 상태로 그대로 유지를 합니다.

 

불교는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게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외부적인 것으로 인해서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각자의 마음에서 청정한 것들이 유지가 돼나갈 때 불교는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청정함이 없어질 거 같으면 그것이 외부적으로 아무리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미 소멸의 길로 들어가고 있는 거라.

번뇌가 일어났으면 반드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윤회의 고리를 계속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런 탐·진·치에 물들지 않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더러움이 없어져버리는 상태, 그러한 평온함들, 안정감들을 느껴보도록 해야 됩니다. 아, 내가 마음에 분노가 사라지고 나니까 아, 이게 얼마나 청정하고 깨끗하냐는 거라. 자꾸 자신이 느껴봐보라는 거라.

분노를 관찰해보니까 분노가 눈 녹듯이 사르르 사그라드는 것을 봤다. 그러면 너무 좋아. 너무 청정하게 느껴지는 거라. 너무나도 깨끗하고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지고.

‘아, 이런 마음이 있구나’ 그러면 알 것 같으면 그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려고 하고, 그것이 청정한 마음을 쭉 유지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Acchindi bhavasallāni(앗친디 바와살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그는 생존의 화살(속박)을 끊었다. 속박된 것들을 끊어버렸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깊은 낭떠러지가 있는 절벽에서 사람이 다닐 수 없으니까 그 길을 가다가는 당연히 낭떠러지에 떨어져버리는 거라. 그 낭떠러지 밑에는 용암이 흐르고 있는 거라. 거기 떨어질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안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붙잡고 있든지 매달려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붙잡고 있고 매달려 있기에는 본인 힘이 너무 약하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요? 창을 가지고 자기 몸을 찔러서라도 떨어지지 않고 있을려고 합니다. 창에 꽂혀가지고 절벽에 딱 매달려 있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지만 뭐라고 생각하느냐면 이 창이 썩어가지고 창이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거라. 밑에 용암으로 떨어지기는 싫은 거라.

속박돼 있다는 것은 그와 같다 하고 경전에서는 비유를 해놨습니다.

 

전부 속박돼있는 것들입니다. 속박돼있다는 것은 그것들을 하지 말고 버려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라.

오늘 법회가 있는데도 뭔가가 다른 일이 있다. 사실은 그것이 나를 선한 마음으로 이끌어주지도 못하고 해탈로 이끌어주지도 못하는데도 거기에 속박되어 있으니까 법회보다는 거기에 가야 되는 거라. 거기에 딱 매여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에 속박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속박되어 있는 화살들은 여러분들이 끊어야 됩니다. 그러한 속박으로 인해서 윤회를 하고 있는데 그 윤회의 고리가 얼마나 질기고 끊기 힘드는데 그걸 끊을 생각을 안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것은 아니라는 거라.

 

밑에 흐르는 용암이 없을 거 같으면 본인은 그 낭떠러지 밑으로 내려가서 안전한 길로 가는 것이 맞다는 거라. 그런데 용암이 있기 때문에 그걸 못하는 거라. 속박돼 있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행동반경은 자유롭다는 거라. 하늘로 날아갈 수도 있고, 땅굴 파갖고 들어갈 수도 있는 거고, 다른 길로 찾아서 갈 수도 있는 건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거라 오도가도 못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딱 거기 묶어져 있는 거라.

그것은 속박되어 있는 것들로부터 자꾸 자유로워질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Antimoyaṁ samussayo(안띠모-양 사뭇사요-)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몸이다.

 

이 몸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몸이 마지막 몸이라고 할 거 같으면, 더 이상 몸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리고 그 삶은 마지막 몸일 때는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번영들을 위해서.

 

그래서 부처님도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에게 전법을 내보낼 때는 세상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나아가라고. 그게 깨달은 사람, 마지막 몸이기 때문에 인제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해줄라고 해도 해줄 수 있는 조건이 안 돼. 이 몸을 버려버리고 나면.

그럼 해야 할 일들 그냥 하는 거라. 내가 필요로 하는 곳은 가서 그냥 하는 거라. 여러분도 이생이 마지막 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해야 됩니다.

실제로는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러분들 그 몸은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똑같은 상태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또 다른 조건인 것뿐 인 것이지.

 

그래서 순간순간 여러분 살아가는 것들이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두번 다시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시간 10분, 1시간 그게 마지막 시간인데도 그냥 헛되이 보내고 있는 거라. 최선을 다해서 살려는 생각을 안 하고.

여러분들도 순간순간을 항상 자기가 할 수 역량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도록 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알아차릴 때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삶은 마지막 삶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몸을 가진 해탈자와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게 해탈자들에게 일어나는 마음이고,

인제 해탈한 자들의 능력에 대해서 네 가지로 얘기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의미·의의·이익이란 뜻입니다.

 

여기 설명된 거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좀 힘들 겁니다.

말룽까뿟따에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말룽까뿟따가 부처님한테 와서 세상은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래는 죽고 나서 어디로 갑니까?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그것에 대답 안 해주면 나는 출가생활 안 하고 수행 안 하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내가 언제 니한테 그런 거 설명해준다고 하디? 나는 이익이 있는 것만 말을 하지 이익이 없는 거는 말 안 한다.

 

세상의 끝이 어디 있는지 알면 그게 무슨 이익이 있어? 그거 알 동안에 시간 다 해버리지. 그게 여러분들 삶에 아니면 해탈로 나아가는데 무슨 이익을 주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세상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라가지고 그 얘기를 안 한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거라. 지금 현재 여러분들한테 유용한 것들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저번에 보니까 선원에 있는데 어떤 조그만한 꼬맹이, 세살이나 됐을까? 스님 돈드릴게요 하면서 돈을 갖다주는데 종이에 자기가 써서 100원 200원 써가지고 그걸 보시한다고 주더라고.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잖아요. 그 마음은 고마웁지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유용한 것들이 되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물론 그 아이 마음하고는 별도입니다. 그런데 그 돈 자체가 유용하게 쓰일 수 없는 조건이라는 거라. 그럼 그럴 거 같으면 그런 것들은 부처님이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 어떤 단어가 나오느냐면 사팔라(saphalā) 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효과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 100원을 가지고 마트에 가서 100원짜리 물건을 살 수가 있는 효과가 있어야 되는데 그런 효과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게 앗타(attha)라는 뜻입니다. 의미가 있어야 되는 거고, 이익이 있어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적어도 그걸 함으로 인해가지고 이 족쇄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이르는 길로 가든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길로 가든지, 아니면 내가 욕심부리는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든지, 아니면 성내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되든지 뭔가 이런 것들이 있어야 그런 이익이나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있지않은 행위들은 이 해탈한 자들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부처님도 하지 않았듯이 해탈한 자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앗타(attha), 의미가 있고 이익이 있는 것들을 하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것들은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앗타(attha)를 보통 여섯 가지로 풀어서 설명을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 것,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움이 있는 것,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있는 것들, 그다음에 이생에서 즉시 이로움 이익이 있는 것들, 그다음에 다음 생에서도 이익이 있는 것들, 그다음에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해탈에 이르는 열반에 이르는 이익이 있는 것들.

 

그래서 열반이 가장 큰 이익인데 그 길로 나아가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나에게도 이익이 있어야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나 아니면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그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들, 그리고 그러한 이익들이 이생에서도 이익이 있어야 되는 거고, 다음 생에서도 이익이 있어야 되는 거고.

 

이런 것들일 때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그 일은 행해야 되는 거라.

해탈한 자의 능력은 그건 거라.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쓸데없는 것들은 안 한다는 거라. 그거 왜 해? 시간 낭비하게.

지금 마지막 순간들을 살고 있는데, 그 시간이 아까워죽겠는데 오히려 나에게는 그 시간이 두배로 주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시간은 한정돼 있는 건데 왜 이익이 없는 일들을 하느냐는 거라.

그런 것들을 안 하기 때문에, 그걸 분명하게 아는 것들이 해탈자의 능력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담마(dhamma), 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사성제를 얘기합니다. 그걸 보통 부처님은 뗏목에 비유를 많이 했습니다. 진리는 뗏목과 같다. 여기서 저기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다는 거라. 그럼 뗏목을 의지해가지고 여기서 저기까지 그 강을 건너가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 강을 건너가고 나서는 그 뗏목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 뗏목을 지고 갈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러면 그 뗏목조차도 버려야 되는 거라.

바른 진리조차도 그래야 되는 것인데 진리가 아닌 것들을 행한다는 것은 그거는 어불성설이라. 그거는 아예 처음부터 버려버려야 되는 것이지 가져와야 될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게 담마의 의미입니다.

 

이게 고통이 뭔지를 알고 고통이 왜 생겼는지를 알고, 그다음에 고통을 해결하는 길로 가고, 그다음에 고통이 완전히 해결되는 상태까지 가는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그거는 안 하는 거라. 그거는 아담마 삿담마라.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거라. 진리가 아니라는 거라. 진리가 아닌 것은 안 한다는 거라.

 

그러면 그 진리라고 하는 것도 진리가 맞다고 해가지고 아무 때나 그러면 내가 누구에게나 진리를 설해야 되나? 그건 아니라는 거라. 조건이 맞을 때만 진리는 설해지는 거라. 진리에 대한 것들을 딱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때와 상황에 관계없이 그 진리를 설할려고 하고 진리를 강요를 하게 됩니다.

진리 그것들은 강요해서 되는 것들인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라. 해탈에 이르고 나서 뗏목을 버려야 되듯이 그것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져야 됩니다.

 

담마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담마에 맞게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게끔 됩니다.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또 흩어지기도 하는 거고, 이번에 좀 많이 왔으면 다음에 또 작게 오기도 하는 거고, 조건 따라서 이것이 생겼으면 이것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저것이 사라졌으면 또 다른 것들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법이 없어집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하는 법이 없어집니다. 여기에 만약에 한 2~300명 모였다 그럼 내가 법문을 한 두세시간 해? 안 그래요. 여기 다섯 명이 모였다 그럼 법문 한 5분 해? 그건 아니라는 거라. 여기에 정해진 거는 정해진대로 그냥 합니다. 사람이 적든 많든.

 

왜? 외부적인 조건에 대해서 담마는 변하지를 않습니다. 담마를 이미 지닌 사람들은 그 담마에 따라 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일반인들과 다른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해나가게 될 때 그것이 바르게 바뀌어져 나가는 것이지, 조건을 자꾸 바라고 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조건은 언제든지 바뀌게 돼있습니다. 그럼 좋은 조건들이 있으면 일이 잘 되나? 그럼 그 일이 잘 된 것은 안 바뀌나 또? 또 조건에 의해서 바뀌어버리는 거라. 그럼 자기 할 일은 좋은 조건이든 나쁜 조건이든 할 일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해야 될 일 같으면 그냥 묵묵히 해나가면 되는 거라. 그 목적을 이루었든 안 이루었든 그게 뭔 의미가 있어?

담마를 설하기 위해서 가는데 거기에 나를 두드려 팰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담마를 설하지 않는 거라? 아니면 나의 팔을 자를 사람들이 있다? 그럼 설하지 않는 거라? 나를 죽일 사람이 있다? 그럼 죽음이 두려워서 담마를 설하지 않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어떠한 조건에 관계없이 담마는 설해져야 되는 것이고, 그것을 따라야 되는 것들이라.

 

그다음에 세 번째, 니룻띠(nirutti), 언어에 정통하다 하는 뜻입니다.

 

그 밑에 다시 설명해놓은 게, '언어능력의 달인'이라는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그거는 뭐냐면 누군가가 말을 한다. 그럼 그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그 말을 끝까지 들어서 저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다 라는 걸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거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자기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든지 안 그러면 자기가 말을 끊어가지고 자기가 말을 하게 되는 거라. 그건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을 잘 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할 걸 일목요연하게 생각을 해가지고 그대로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말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해지는 법은 없어. 그러니까 음성이 높아지는 일도 없고, 소리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일들도 없어지는 거고, 확신있게 그냥 그대로 얘기하는 것뿐이라. 그게 언어에 정통하다는 것입니다.

 

언어에 정통하다가 보니까 분명히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더라도 쉽게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되는 거라. 괜히 어렵게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이미 언어에 정통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언어적인 능력이 많다 해가지고 언어에 정통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어만 쓰고 있다 그러면 한국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특히 듣는 훈련들이 안 된 사람들은 말하는 것도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말하는 훈련부터 할려고 그러지, 듣는 훈련부터 할려고 안 합니다.

잘 들어야만이 자기가 잘 말할 수가 있는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해버린다는 거라. 듣는 거만 잘해줘도 아, 참 저 사람 그래도 좋은 컨설팅을 하는 사람이다 하고 얘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좋은 조언자의 입장을 갖추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 사람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을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니룻띠,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 사람이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고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잘 들을 수 있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 잘 들을 수 있으면 여러분들도 언어에 정통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빠띠바-(patibhāna), 번쩍거림·영감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겨났을 때 고민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할 필요성이 전혀 없습니다.

저번에 그런 얘기했죠? 두 개의 길이 있다. 부처님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요게 좀 괜찮은 길인가, 넓은 길인가 그걸 판단하는데 부처님은 전혀 그거 안 합니다. 그냥 탁 두 길이 있으면 그냥 탁 영감이 떠오르기 때문에 그냥 그 길로 가는

거라.

그 길이 설혹 진흙탕 길이고 뭐고 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부처님은 개의치 안 해.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 길을 가면 그 길이 맞는 길이라. 그런 게 탁 떠오른다는 거라. 번쩍거림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계획을 안 세우고 또 생각하는 것이 없다고 해가지고 틀린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반드시 바른 결정이라.

 

왜? 이미 내가 바르고 틀리고 하는 것은 담마로써 확립이 돼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리고 이익되고 안 이익되고 하는 것들은 확립이 딱 되어있는 상태라. 그리고 내가 행해야 될 것들과 행하지 말아야 될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확립이 딱 되어있는 상태라. 그렇기 때문에 판단하고 할 필요성이 없이 그냥 행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것들이 안 됐을 때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하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들이 맞는 것도 아닌데도.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또 나에게 도움 주는 거고, 나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그것이 맞는 겁니다. 그것을 제쳐두고 뭔가 고민해가지고 다른 일을 하면 더 나은 것들을 할 수 있다?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이 네 가지가 해탈한 분들에게 생기는 능력입니다.

 

특별할 것 같은데도 실제로는 그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그렇게 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닙바나라고 하는 것이 궁극의 행복이다.」 경전은 그 닙바나라고 하는 것을 적극적인 말로 표현을 해놓았습니다.

그다음에 해탈자의 마음은 절대적으로 안온하다. 해탈자는 망상은커녕 사고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 해탈자를 완전 지자라고 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해탈자가 되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해야 되고 그분들이 가는 길들을 그대로 자꾸 따라갈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