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해탈은 존재에 대한 거대한 혁명이다. (20160318. 대구)

담마마-마까 2022. 2. 4. 09:00

https://youtu.be/C_0S7ithU1g

* 해탈은 존재에 대한 거대한 혁명이다. (20160318. 대구)

 

오늘은 "해탈은 존재에 대한 거대한 혁명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해탈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가야 되겠죠!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알아차리는 것들을 그냥 아는 수준으로 자꾸 할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보고 있죠? ‘보고 있다’ 하고 알고 있고, 걸어가면 ‘걸어간다’ 하고 알고, 또는 호흡하고 있으면 들이쉬고 내쉬고 있다 하고 알고, 자꾸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나버릴려고 하는 거라.

그냥 끊임없이 그렇게 알아차리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있다는 거라.

실제로는 보고 있을 때는 스님 소리가 안 들려야 되는데, 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거든. 걸어가면서도 앞에 거 다 보고 가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서 본인은 “끊임없이 사띠하고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뭐라고 얘길 해야 될까 그걸?

 

그걸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그리 뭐 해탈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단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선한 것들, 나쁜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방어하고 그러면서 실수 안 하고 잘 살아가면 된다’ 이런 생각들을 많이 가진다는 거라.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해탈하고 싶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렇게 해가지고는 해탈은 안 되겠지.

 

단편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칠각지가 있습니다. 칠각지는 그거 하나만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요인들이 됩니다. 그 칠각지는 일곱 개가 다 드러나져야만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염각지부터 해서 택법각지 정진각지로 쭉 진행이 되는데. 그런데 그거는 내가 만약에 택법각지가 됐다고 해서 그게 깨달음은 아니죠? 그리고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는 택법각지가 있습니까? 없죠? 그걸 어쨌든 다 갖추기는 갖추어야 되는데,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마지막 해탈에 넘어갈려고 할 때는 그것들을 다 놓아버려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그 다리에 넘어갈 때 곰곰히 생각해봐가지고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 부분을 칠각지 중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만이 그게 완전해져야만이 징검다리가 완전히 다 놔지는 거라. 그럼 인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럼 건너가고 나서는 그 징검다리는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러면은 지금 현재는 적어도 해탈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런 칠각지를 개발해야 되는 거고. 마찬가지로 오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럼 뭔가 균형잡히는 부분들이 있어야 되는데 내가 과도하게 뭔가 집중하는 부분들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좀 산란해지고 하는 것들은 방어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대상이 변하는 것들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균형을 좀 잡아줘야 됩니다.

오력 같은 것도 그것 자체만으로도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그것도 잘 조화롭게 만들어야 됩니다.

 

이렇게 자꾸 노력을 하게 될 때, 그게 칠각지 부분에 대해 노력하는 것이든 아니면 오력에 대한 것이든, 사념처 부분에 대한 것이든,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을 하게 될 때, 인제 열반으로 해탈로 나아가게 되는데,

실제로 해탈에 이르르고 나서는 사실은 그와 같은 거는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 됩니다. 그런데도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되고.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대표적으로 하고 있는, 사념처를 하고 있다.

몸에 대한 관찰 열심히 한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깨달음에 이르게 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굉장히 더디 가는 거라. 그래서 느낌에 대한 관찰들도 해야 되는 거고, 마음에 대한 관찰들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법에 대한 관찰들 여러 가지 정신적인 현상들에 대한 관찰들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골고루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취사선택을 하게 됩니다. ‘뭐 나는 마음에 대한 관찰만 하면 돼’ 또는 ‘나는 느낌에 대한 관찰만 하면 돼’ 이럽니다.

그런데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든,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든 그것으로 인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은 틀림없지만, 더디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지를 해가지고,

빨리 갈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다가도 뭔가 느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걸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애써 무시를 해버리는 거라.

느낌에 대한 거를 할 때도 꼭 마찬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돌이켜보면은

, 내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는 하기는 하는데,

진지하게 아, 내가 요 숨 한번 가지고 내가 해탈에 이르겠다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지는 않고 있다는 거라.

그게 어찌 보면은 참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있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합니다.

 

하나의 길은 조금 전에 얘기한 그와 같은 수행, 사념처 수행이든 칠각지를 개발하는 것이든, 이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수행에 관계된 것들을 쭉 열심히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그것이 다 갖춰졌을 때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도 있고.

또 하나의 길은,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배우고 습득하고 해가지고 그거에 대한 이해가 완전해졌을 때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아, 인제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하고 하는 것들은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러고 나서 수행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있고, 이렇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대부분 좀 빨리 그래도 해탈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후자의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어느 정도 이해가 완전하게 되고 나서 이거는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확신이 탁 들고 나면은 그다음부터는 그거 그냥 쏙쏙 빨아들이게 된다는 거라.

왜 이렇게 얘기했지? 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수행을 하더라도 아, 이것들은 필요한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그걸 그대로 필요한 것들을 그대로 섭취할려고 하는 거라. 그걸 다 개발할려고 하는 거라.

그러다 보면 수행 진척이 빠를 수밖에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진행이 돼야만이 바른 방법이라고 스님은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스리랑카에 그런 논쟁이 있은 적이 있어요.

교학이 먼저냐? 수행이 먼저냐?

어떤 게 먼저일까? 어떤 게 먼저예요? 동시에 해야 되는 거라?

(수행자 대답 : 교학을 먼저 알아야지 확증이)

그렇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교학이 먼저고 교학이 바탕이 돼서 수행이 되고. 그러면 교학 안 하고 수행하는 사람은 틀린 거라?

(수행자 대답 :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수행자 대답 : 스승이 있으면 괜찮겠지요)

그럼 만약에 여러분들은 계·정·혜가 있다. 그럼 어떤 게 먼저라? 계율이 먼저라, 선정이 먼저라? 아니면 수행하면서 지혜 닦는 게 먼저라?

(수행자 대답 : 계를 먼저)

계행이 먼저라? 그럼 계행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도와 과에 이를 수가 없겠네? 그냥 수행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그건 아니죠!

 

수행을 해도 되긴 되는데 단지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계행이 뒷받침이 되어야 됩니다. 계행이 뒷받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만 해나간다. 그래서 계행은 아예 무시를 해버리고 안 지킨다.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거라.

병행을 할 수는 있습니다. 병행을.

그래서 선정과 위빳사나 수행을 병행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바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에 것만 한다 이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교학을 하면서 수행을 한다. 동시에 같이 한다. 그거는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교학이 밑바탕이 안 된 상태에서 수행만 열심히 한다? 참 어렵다는 거라.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어렵다는 거라.

 

계·정·혜도 마찬가지로 계행이 바탕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삼매에 들 수도 있고 아니면 일정한 지혜에 이를 수는 있지만, 그게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또 내려와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허다하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순서를 지켜서 되는 게 있고, 동시 병행적으로 되는 것들이 있고, 그렇습니다.

 

칠청정 같은 경우에는 그래서 순서가 딱 정해졌습니다. 계청정, 심청정 해가지고 이렇게 그것들이 순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들이 청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 같으면 그다음 단계에 넘어가는 것은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는 수행만가지고 마음이 청정하게 돼있지 않은 상태, 아니면 계율이 도덕적인 행위들이 청정하게 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만 가지고 한다? 그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런데도 그런 걸 모르고 사람들은 자꾸 "그냥 수행만 열심히 하면 되지" 이렇게 하는 거라.

그런데 그것도 좋다는 거라. 그것도 어쨌든 해탈에 이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수행하는 방법의 문제라는 거라. 분명히 자기는 ‘해탈에 이르면 되지’ 하고 하는데, 실제로 수행하는 거 보면 지가 좋아하는 대상만 알려고 그러는 거라. 나머지는다 놓쳐버립니다.

수행은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은 분명하게 어떤 식으로든 알아차려야 되는데, 자기가 하는 게 심념처다 할 거 같으면 마음에 대한 것만 알아차리려고 하지, 다른 것들은 움직임에 대한 것이든, 느낌에 대한 것이든, 뭐 이런 것들은 그냥 애써 무시를 해버리고 다 놓쳐버린다는 거라.

어느 세월에, 지금 현재 대상들을 다 놓쳐버리고 어느 세월에 해탈에 이르게 되겠어요? 그게 인제 문제라는 거라.

 

해탈에 이르겠다고 진지하게 탁 마음을 먹을 거 같으면 어떠한 식으로든 내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은 어떠한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되는 거라.

자기 앞에 나타나는 게 마음에 대한 대상만 나타난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 거라?

그렇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봤을 때는 느낌에 대한 관찰하는 법을 모르고 아니면 몸에 대한 관찰하는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고 있다. 그럼 그거는 힘들어진다는 거라.

 

그래서 어느 정도 일정하게 배움을 이룬 상태가 되고 나서 그러고 나서 자기가 수행할 때,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그걸 느낌에 대해서 관찰할 건지 아니면 마음에 대해서 관찰할 건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수행을 할 때는 빨리 되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경행을 이렇게 쭉 한다. 느낌에 대해서 관찰하고 있을 때는 그 움직이는 걸 모릅니다. 단지 느낌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겁니다. 움직이는 걸 모르니까 앞에 가서 벽에 탁 부딪치더라도 움직이는 걸 모르는데 어떻게 벽에 부딪치는 걸 알 거라? 단지 벽에 부딪칠 때 느낌만 아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멈추게 되는 거고.

진지하게 할 것 같으면 그런 식으로 진행이 돼나가게 되는 거라.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수행할 때 경행하라 할 것 같으면 여기서 저기까지 쭉 가다가, 그게 느낌에 대한 걸 하든 몸에 대한 걸 하든 하다 보면 벽이 있으면 그건 언제 봤는지 보고 딱 멈춰. 자기가. 그럴 때는 이미 대상을 놓쳐버린다는 거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들을.

 

그러니까 수행을 하더라도 진지하게 그냥 죽자사자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거 그냥 어설프게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어설프게 아는 거는 수행이 아니라도 태어날 때부터 사람 같은 경우는 인식하는 기능들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거 조금 더 개발하는 것뿐입니다. 그거 조금 더 개발해 놓은 거 가지고 어디다 쓸 거라?

 

가끔 스님들이 그럽니다. 차가 이렇게 쭉 지나가면서 보면 여러 가지 글자들이 있고 아니면 숫자들이 있습니다. 내기를 합니다. 삭 지나가면서 얼마만큼 많이 읽었는가. 삭 지나가고 나면서 너 한번 외워봐. 그러면 어떤 사람은 돌돌돌돌 외우고, 어떤 사람은 얼마 못 외우고.

그걸 가지고 보통 뭐라고 하느냐면 어느 정도 그때 순간적으로 알아차림이 강한가 하는 것을 판단을 합니다. 툭 지나가는데 글자 한 두세개밖에 모른다. 아니면 숫자를 거꾸로든지 잘못 알고 외우고 있다 그러면 사띠가 적은 거라.

그런 사람은 쉽게 말하면 현재 있는 것들을 놓쳐버리는 상태에서 그중에 몇 개만 알고 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꼭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럼 잘못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걸 한번 해봐요. 차를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이렇게 쭉 지나갈 때, 그런데 천천히 가가지고는 안됩니다. 천천히 가면 다 외워지지 못 외우겠어? 그냥 휙 빨리 지나가는데 전화번호가 요즘 여덟 개라, 일곱 개라? 일곱 개가 있다.

빨리 확 지나가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탁 지나갔는데 볼 수 있는 상황일 때만 그건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상황이면 그건 할 수 없는 거고. 탁 보였으면 그것을 탁 지나가고 나서 탁 돌아보니까 그 번호가 분명하게 머릿속에 착 찍히듯이 이렇게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순간적인 사띠는 일어나는 상태라는 거라. 이렇게 해서 순간적인 사띠들이 지속이 쭉 되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떨 때는 스님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아주 모르는 장소에 갈 때는 그 거리 자체를 통째로 다 외울려고 합니다. 그 거리를.

처음에 할 때는 모르는 거리 간다고 할 거 같으면 중요한 포인트만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그러면은 그 중요한 포인트를 내가 미처 못 봤을 때는 헤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그 거리 자체를 통째로 쫙 다 외웁니다. 요거 다음에 요거, 요거 위치를 쭉 대중교통을 타고 가면서 아니면 차를 타고 가면서 그걸 순서적으로 쭉 다 외우고 갑니다. 한 1킬로를 외워버렸다고 할 거 같으면 그다음엔 십년이 지나도 거기 가더라도 그 건물이 바뀌었으면 바뀐 것을 알아요. 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언제 왔다는 것이 분명하게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거라.

그렇게 탁 외울 때는 대중교통을 타고 갈 때 그걸 외웠다 할 거 같으면 그 1킬로 동안에는 사띠가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 거리 자체를 완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할 동안에는 다른 거 전혀 모릅니다.

 

말소리가 들렸는지 누가 뭘 했는지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전혀 몰라. 단지 나는 보이는 것만 분명하게 탁 보고 기억하고 보고 기억하고 하는 것들이 그냥 그대로 순서적으로 쫙 돼나가고 있는 것뿐인 거라.

그렇게 수행을 해야만이 적어도 1킬로가 넘는 거리를 전부다 십년이 지나도 안 까먹고 있듯이 사띠가 계속적으로 이어져서 있는 그대로 하게 되는 것이지. 해탈이 저기 있는 줄 알면서도 이걸 그냥 외우지 않고 거기에 간다? 어떻게 찾아갈 거라?

방법이 없어, 찾아갈 방법이. 그냥 띄엄띠엄 한다? 또 다른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할 건데? 여기 내가 사띠했던 그 집이 바뀌어버렸으면 어떻게 찾아갈 건데? 그럼 딴 길로 가서 헤매게 되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해탈을 향해 나아간다고 할 거 같으면 그냥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일반적으로 사띠를 해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라. ‘아, 내가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순 가짜구나’ 하고 빨리 판단을 해야 됩니다.

빨리 판단 해가지고 적어도 요거 만큼은 내가 반드시 요것만 한다 하고 마음을 딱 먹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 나아갈 때 아, 그래도 이 알아차리는 게 이런 원리구나 하는 것을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알겠습니까?

 

「부처님은 「지혜에 의해 집착을 버리고 해탈에 이른다」 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아무리 내가 지혜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해탈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하고 해탈하는 것은 다른 겁니다. 지혜가 다 이루어지고 나서 해탈에 이르기는 하지만 그 해탈에 이르렀다 해가지고 그 지혜가 해탈하고 지금 내가 행동하는 상태에서 그 지혜가 나에게 그대로 있다? 그건 아니라는 거라. 단지 그 상황이 될 것 같으면 그 지혜를 이용할 수는 있겠지. 뗏목과 마찬가집니다.

지혜는 해탈에 이르기 위한 뗏목인 것이지, 그리고 그 지혜는 단지 내가 현재 살아가면서 어떤 대상이든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조금 조금씩 키워놓은 힘인 것이지 그 지혜가 해탈 상태는 아니라는 거라. 그걸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무엇 때문에 지혜 얻을려고 그러는데?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왜 그런 거라?

그게 수행의 첫째 단계의 지혜입니다.

아,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구나.

누군가가 나에게 돌을 던졌다. 물질적인 현상입니다.

돌에 내가 맞았다. 맞고 나서 아프다. 아픈 것은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그럼 그걸 구분할 줄 알 것 같으면 정신적인 현상으로 인해가지고 물질적인 현상에 대해서 돌을 던진 당사자에 대한 원한은 가지지 않게 되는 거라.

 

그렇게 구분할 줄 알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그 돌을 던진 사람한테 원망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거라. 그건 왜 그래요? 실제적으로는 그 사람이 돌을 던졌어.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을 거 같으면 지금 현재 내가 나한테 일어난 것은 아픔이라는 느낌이라.

그럼 내가 알아차려야 되는 것은 그 돌이나 아니면 그 사람이라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느낌이라는 정신적인 현상들만 알아차리기도 바빠. 그런데 언제 거 원망하고 할 것이 있어? 그냥 그 느낌을 그냥 알아차리는 것뿐이라.

 

이미 물질적인 현상, 그 사람에 대한 것들은 집착하는 것들은 이미 떨어져 나가버린 거라. 쉽게 말하면 적어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지혜만 있더라도 그런 집착들은 이미 떨어져 나가버린 상태라.

그러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한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그사람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이나 또는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럼 내가 느낌을 관찰한다 해가지고 그럼 지금 현재 내가 해탈한 상태에 이르렀느냐는 거라. 아니라는 거라.

 

아, 느낌들이 도저히 못참을 정도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그 느낌들이 사라지는 걸 봐가지고 느낌이 사라졌을 수도 있어. 그래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고 해가지고 그럼 내가 지금 해탈한 자냐는 거라.

분명히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지혜는 열렸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해탈한 상태는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지혜에 의한 것은 지혜에 의해서 집착을 버려서, 그렇게 집착을 버리는 것들이 계속 많아지다 보면은 해탈에 이르른다. 그래서 지혜도 1단계부터 16단계까지 순차적으로 쭉 일어나고 밟아져간다는 거라. 어떤 거는 몇가지들은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들도 있고, 어떤 거는 뒤섞여서 일어나는 것들도 있고, 그것은 집착을 떨어뜨리는 것이 더욱 더 많아지는 상태가 되는 거라.

 

저 사람에 대해서 원망하고 하는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나에 대한 것들이, 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나에 대한 집착은 아직 남아있는 거라. 그러면 조금 더 진행이 되다 보면 나에 대한 집착들이 떨어지는 지혜의 단계까지 이른다는 거라.

나에 대한 집착도 어떤 거 어떤 거는 떨어져 나가고, 어떤 거 어떤 거는 또 남아있고. 분노가 있더라도 분노가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는 사그라들었는데, 아직 분노가 잠재되어 있는 분노가 완전하게 끊어진 건 아니라는 거라. 그건 집착하고 있다는 거지 뭐겠어?

 

그런데 내 몸이 있다 하는 견해는 떨어져버렸다. 그럼 내가 내 몸에 대한 견해가 떨어지는 건 더 이상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상태가 탁 됐을 때 그걸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거는 떨어져나간 거는 안다는 거라.

그렇지만 아직은 나에게는 미세한 번뇌들이나 욕구들이 아직 있구나 아는 거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지 있는 건 분명하게 압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이제는 멀지 않았다는 걸 아는거라. 그러면 더욱 더 노력을 하는 거라.

 

실제적으로는 해탈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욕을 내는 것은,

어느 정도 지혜가 이루어지고 나서 적어도 성인의 첫 번째 단계에 이르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주 그 길만 갈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눈에 보이지를 안 해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그렇게 안됐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어쨌든 그렇게 여러분들이 해탈에 이르르고 싶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은 그건 분명하게 볼려고 자꾸 끝까지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데까지는 자꾸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설프게 ‘일어났네’ 하고 또 다른데 자꾸 마음을 돌려버리고 이렇게 할려고 하지 말고. 알겠죠?

 

자!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이런 것들은 끊어버려야 된다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어머니를 죽여버려라」 「아버지를 죽여버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 어머니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원해서 태어난 거라 아니면 엄마가 원해서 여러분들을 가지게 된 거라? 어떤 거라?

(수행자 대답 : 저희가 원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엄마는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오라 하지도 안 했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이 그 자리로 나 언제 들어간다 하고 예약하지도 안 했어. 그 엄마는 전혀 몰라. 엄마하고 새로 태어난 나하고 전혀 별개의 부분입니다. 누가 원해서 거기 들어간 거라?

여러분들이 원해서 들어간 거라. 여러분들이.

과거생에 여러분들의 업이 내가 거기 태어날 인연이 됐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자기가 거기 간 것이지 엄마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분명하게 언제 오는지를 알아야지.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그래서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살고 싶어하는 갈애', 안 죽고 싶어하는 거라. 안 죽고 싶어하니까 어떻게 해요? 뭔가 영혼이 있다고 불멸하는 것이 있다고 자꾸 엉뚱한 소리들을 해쌌게 되는 거라.

그런데 불멸하는 영혼이나 자아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분들이 지은 업들로 인해가지고 그다음생에 태어나게 되는 거고, 여러분들이 원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엄마가 원해서 된 것은 아니라는 거라.

태어난 것은 여러분 책임이라. 여러분 책임.

 

그런데 태어나서 보니까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은 물론 태어나게 만들어준 어머니한테 고마워는 해야 되지. 그렇지만 태어난 것은 아,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생존하고 싶어 하는 이 갈애 때문에 내가 또 몸을 받아서 태어났구나 하는 거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럼 죽여버려야 되는 것은 실제 여러분들 어머니를 죽여버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갈애를 죽여버리라는 거라. 갈애를

더 살고 싶어요? 더 안 살고 싶어요?

갈애를 어떻게 죽이면 돼? 그걸 어떻게 끊을 거라? 그걸 집착하는 걸.

숨넘어갈 때까지도 살고 싶어합니다. 안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갈애를 끊는 일은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지금 현재 내가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무상한 성품을 볼 거 같으면 적어도 그런 갈애들을 방어할 수가 있다는 거라.

눌러둘 수가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내가 아, 이게 지금 살고 싶어하는 갈애구나 하고 아는 거라.

 

아프다.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그건 정당한 겁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한다고 해가지고 고쳐질 때도 있고 안 고쳐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 안 고쳐지는 사람들은 고칠려고 백방의 노력을 합니다. 살고 싶어하는 갈애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안 고쳐진다 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서는 포기를 해버립니다. 아이고, 뭐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갑다. 단지 더 망가지지 않게끔 내가 주의해야 되겠다 해서 그 상태만 유지할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병에 대해서 더 이상 아,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되는 거구나 알 거 같으면 그냥 받아들여 버리게 되는 거라. 그럼 적어도 병에 대한 갈애들은 더이상 안 끓게 되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지.

 

생존하고 싶은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살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이 몸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의식을 해야 되는 거고, 늙어가야 되는 거고, 살아있게 되는 거라. 그냥 그거 받아들이고 현재 해야되는 것은 잘살아가고 있는 것들이라. 잘 살아가면서 지금 현재 할 것은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이라.

알아차릴 때는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들을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나」라고 하는 존재의식 자체가 탁 끊어질 것 같으면 마찬가지로 생존하고 싶어하는 갈애도 같이 탁 끊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를 같이 놔놓은 이유가 뭐냐면 어머니는 생존하고 싶어하는 갈애라고 할 것 같으면, 아버지는 여러분들을 키워준 거잖아. 여러분들을 키워준 것은 여러분들 「존재의식」 입니다. 「앗따(attā)」 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여려분들을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은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나이든 사람한테 할머니라고 부르면 이놈의 자식이 내가 왜 할머니냐 그럽니다. 왜 그래요? 나는 아직 할머니라고 생각 안 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거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그래서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들을 자꾸 끊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아버지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낳게 하는 갈애, 갈애를 끊어야 됩니다.

 

그 갈애는 보통 세 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욕구, 뭔가 더 원하는 갈애. 끊임없이 목말라 하는 것들. 10원 있으면 20원 더 있고 싶어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생존욕구는 금방 조금 전에 얘기했던 살고 싶어하는 것,

그다음에 게으름 부리는 것, 그냥 뭐 대충대충 살지. 이래도 한평생이고 저래도 한평생이고, 여기 가서 뭐 하든 저기 가서 뭐 하든 그건 뭐 나하고는 관계없는 거니까 놔두자 하는 마음가짐. 그래서 어떨 때는 다 그냥 포기해버릴려고 합니다.

 

어제 대학생 하나가 왔어요. 스님, 나는 꼭 시험이 되면 시험기간 마지막에 딱 돼가지고 벼락치기 공부를 합니다. 어쩌면 되겠습니까?

미리미리 준비를 해왔으면 적어도 벼락치기를 안 하는데, 문제가 뭐냐면 뭐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공부하는 거는 마찬가진데 어떨 때는 어려울 거 같으면 벼락치기를 안 하고 그냥 포기를 해버리는 거라. 포기를.

미리미리 준비를 해가지고 열심히 준비를 해왔을 거 같으면, 어려운 것들도 그냥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포기를 안 하고 그냥 조금 조금씩 해왔을 거 같으면 그래도 포기는 안 하는데, 공부를 안 해왔으니까 나중에 가서 할려다 보니까 분량이 너무 많거든. 그러니까 아예 포기를 해버리는 거라.

 

그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왜 그런 갈애들이 일어나느냐? 게으름 부려서 그런 거라. 게으름 부려서.

 

너 몇시에 일어나노? 그러니까 아홉시 넘어돼서요. 몇시에 자노? 그러니까 두 시나 세 시 돼서. 너 그럼 아침에 아홉 시에 수업 있으면 어찌 가노? 그래서 힘들어 죽겠다는 거라. 그 아홉 시에 수업이 있는 날은.

바꿔라. 생활패턴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은 그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 새벽 두 시까지 공부하느냐면 공부하는 것도 아니거든. 엉뚱한 짓 계속하면서 시간 그리 보내다가 두시 세시 돼서 자가지고 아홉 시에 일어날려니까 그게 얼마나 힘들어. 아홉 시에 수업이 아니고 열 시에 수업 있다고 하더라도 준비해야 될 것이 많은데. 그러니까 계속 놓치는 거라. 계속 게으름을 부리는 생활 패턴이 돼있는 상태인 거라.

 

여러분도 꼭 마찬가지라.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거 다 놓쳐버리고 여기 와서 선원에 와가지고 한두시간 하고 가는 거라. 애 벼락치기 하는 거와 뭐 틀린 것이 있어? 아무것도 틀린 거 없는 거라.

게으름 부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끔 만들어버립니다.

그러한 것들이 전부 갈애의 영역에 속한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패턴들을 바꿀려고 하고.

 

그런 것들과 더불어서 마나(māna, ) 라고 하는 자아의식도 반드시 끊어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나가 있기 때문에 생에 집착과 악착같이 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마나를 근절하지 않으면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

 

그다음에 부처님이 얘기를 한 것이,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두 명의 왕을 죽여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두 명의 왕은 견해입니다. 견해!

뒤에 적어 놓은 건데,

견해의 바탕이 되는 것은 믿음, 그다음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 그다음에 전통, 그다음에 열심히 머리 굴리면서 하는 것들, 그래서 머리 굴려가지고 뭔가를 형성하고 하는 것들. 그다음에 자신의 견해를 가지는 것들.

「①. Saddhā(믿음) ②. Ruci(경향, 기호) ③. Anussavo(전통) ④. ākāra parivitakko(숙고·사고를 만드는 것) ⑤. Diṭṭhi nijjhānakkhanti(자신의 의견·견해와 맞는·납득)」

 

이런 것들이 쉽게 말하면 여기서 두 명의 왕이라 하는 것은 극단론에 빠지는 것들입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 또는 "내가 지금 열심히 고행을 해야만이 해탈에 이르러." 그 극단에 빠져버리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극단 보다는 조금 전에 얘기한 견해들, 이런 견해들을 가지는 것들이 그것도 하나의 극단들이라는 거라. 극단에 빠지게끔 되는 거라.

만약에 자신의 견해를 가지는 것들이 계속 쌓였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도 하나의 극단에 빠져있는 거라. 자신의 견해와 안 맞을 거 같으면 저거는 적이 돼버리는 거라.

꼭 옛날에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우듯이 그렇게 되는 거라. 자신은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는데도 실제로는 보면 하나의 극단에 빠져있는 상태라.

그래서 그걸 두 명의 왕을 죽여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극단을 만드는 것들, 그리고 여러 가지 견해를 만드는 다섯 가지들은 자꾸 피해야 됩니다. 맹목적으로 뭔가를 믿는다든지 아니면 관습적으로 이렇게 해왔던 것이라든지 이런 여러 가지들도 그것도 하나의 견해로 해석합니다.

그게 맞을 거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것은 개념인 것이지 실재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자신을 확립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두 명의 왕 다음에는 솟티야(sotthiya) 라는 형용사를 썼습니다.

종교의식, 종교의례의 노예가 되는 것, 솟티야 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이 하는 형태들. 쉽게 말하면 요즘 인도 가보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경전 자기들만 아는 비밀스런 게송들을 하고, 아, 한국에도 그런데 있죠.

그리고 여러 가지 의례를 행하는 것, 그건 자기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들이라.

이거는 어찌보면 견해를 가지는 요구보다 더 오히려 안 좋은 형태들을 띱니다.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스님, 누가 돌아가셨는데 스님 와서 의식 좀 해주십시오.

그거 스님이 안 가면 할 수 없는 거라? 아니잖아. 경 독송하는 거 스님 없어도 합니다. 그런데 굳이 왜 스님이 필요한데? 그러면 스님이 가. 가가지고 프린트를 해갑니다. 빨리어 경전 독송 빵수꿀라 같은 이런 것들을.

같이 읽읍시다. 같이 "꾸살라 담마 에꾸살라 담마..." 하면서 이렇게 경전 독송합니다. 빨리어로 하든 한글로 하든 이렇게. 간단합니다. 그거 하고 나서 끝났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대. “에?” 그럽니다.

자신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거를 스님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를 안 했거든.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한다는 거라. 그건 불교적인 게 아닙니다. 불교적인 것은 그런 거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부처님이 비밀스럽게 감추어 놓은 것이 있다고 해야지. 그런 것이 어딨어?

 

그런 식으로 자꾸 그런 의례에 빠져버리게 될 것 같으면 견해를 가지는 것들보다 더 나쁜 요소가 돼버린다고. 그런데 이게 두 개가 결합돼버리고 나면 골치 아파져.

그런 비밀스런 견해는 "누군가가 해야 된다." "나만이 하는 것이다." "너는 하면 안 돼."

그거 참 안 좋은 것들이라.

'불상은 집에 모시면 안 돼.' 그것도 견해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견해에 자꾸 놀아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빨리 끊어버리고 떨쳐버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징세 공무원이 나라를 파괴한다」

 

안·이·비·설·신·의 입니다. 징세 공무원은 끊임없이 세금을 뺏어가는 것들이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눈으로 봤으면 그냥 보기만 해야 되는데 그거 자꾸 뺏어가는 거라. 집착해가지고. ‘예쁜 거’ 할 것 같으면 ‘내 거 만들어야지’ 이렇게. 그걸 얘기하는 거라.

육근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면 할수록, 그것들을 가지고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밀쳐버릴려고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한 행위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육근에 대해서 반드시 방어할 줄 알아야 됩니다. 딱 그대로 알아차려서 알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꼭 세금 거두듯이 그것을 가져와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사나운 호랑이가 사는 다섯 장소를 파괴한다.」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수행할 때 장애들이 있죠?

⓵. 오욕에 대한 미련. ⓶. 분노·싫은 기분. ⓷. 들뜸과 후회. ⓸. 혼침과 수면. ⓹. 의심. 다섯 가지들.

이것들은 반드시 떨쳐버려야 됩니다. 이것들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질 못합니다. 당연히 삼매에 들지도 못하는 거고. 당연히 지혜가 일어나지도 않게 되고.

그래서 그 다섯 가지는 호랑이가 여러분들을 할퀴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상처가 납니다. 그러면 곪아터져서 다르게 다른 상태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싫은 것은 그때였는데 십년 후에도 그 사람 보면은 싫어. 이렇게 바뀌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때 화가 일어났으면 그 화를 다스려야 되는 것이지 그냥 꾹 참는다 해가지고 참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상처가 났으면 상처를 빨리 치료해야 되는 것이지 놔둬버리게 될 것 같으면 그거는 곪아서 다른 방향으로 터지게 된다는 거라. 그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반드시 여러분들이 떨쳐버려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런 것들을 자꾸 배워야 되는 것들이라.

 

거기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불법이 진리 그 자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 이해한다면 이 무리한 일,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해 보이는 해탈에 이르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 이것은 떨쳐버려야 될 것들이다 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거 같으면 그걸 떨칠려고 자꾸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그렇지 않고 그냥 무작정 하게 될 것 같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또 그렇게 해가지고는 해탈에 대한 힘들을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렇게 노력을 하게 될 때 해탈에 이르는 것들은 크게 어려운 것들은 아니게끔 된다는 거라. 그렇지만 해탈은 틀림없이 여러분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준다는 거라.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게 되는 거라.

그것이 존재에 대한 거대한 혁명입니다.

 

벗어나게 해주는 거 얼마나 좋아. 아마 여러분들은 주부들은 한 일주일만 나 자유롭게 해주면 너무 좋아할 거라. 평생 그렇게 해주는데 그리고 영원히 자유롭게 해주는 건데 그게 얼마나 좋은 것들이라. 그 길을 자꾸 갈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