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탈한 자에게 일어나는 마음과 능력 (20160129)
◉ 열반(닙바나)이란 어떤 경지일까?
불교 수행으로 완성에 이른 사람은 어떠한 인간이 되는지를 알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집니다. 오근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의해 만들어 낸 지식을 구사해서 사물을 생각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른 사람 밖에 부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그리 현명한 대답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설명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부처님은 가끔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행복」, 「안락」이라는 말은 개개인이 자신의 주관으로 이해하는 것이므로 열반의 경지를 알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조사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는 마음을 일으키게는 합니다.
◉ 허무라고 착각한다.
신이 만들어 주는 낙원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인간이 목표로 해야 할 목적이라고 말하는 서양의 신학자들 중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배워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는 것은 괴로움이고, 집착을 버려야 하고, 천상에조차도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되고, 무상이라면 나의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 등이 장애가 되어 「붓다는 허무를 추구하고 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경지, 존재도 비존재도, 유도 무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넘어선 것입니다. 생명이 사용하는 어떤 개념을 사용해도 말로서 얻지 못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 시험해 볼 생각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말하면 일반 지식인에게는 불안이 생깁니다. 그래서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라고 하는 말이 필요하게 됩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가능한 한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단언적으로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일신교에서 말하는 상주론에 빠져 버립니다. 열반이야말로 궁극의 행복한(긍정적인) 경지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모든 존재는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라고 말하셨습니다. 이러한 간접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질려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 해탈자의 마음을 알고 싶다.
그럼 해탈에 이른 성자의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를 이해해 봅시다. 해탈에 이르러도 성자는 일반인들과 같이 자신의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의 마음과 해탈에 이른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라고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해탈에 이른 사람이 말해 주지 않으면 모릅니다. 부처님이 「해탈에 이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가끔 나옵니다. 다음의 게송들은 해탈에 이른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마음은 끄떡도 않는다.
Niṭṭhaṅgato asantāsī(닛탕가또- 아산따-시-) : 목적에 이른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목적에 이른 사람이란 해탈에 이른 성자입니다. 그런 분의 마음에는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무서움이 생기지 않는 마음은 일반사람들의 마음과는 극단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하길 위해서 주석서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친자식인 라훌라존자의 이야기입니다. 기원정사에 많은 장로들이 들어와서 밤을 보내기 위한 방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장로들은 나이가 어린 라훌라존자의 방도 사용하게 되었기에 있을 곳이 없어진 라훌라존자는 부처님이 계신 곳 앞에 앉아 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마라가 이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아마 고따마 사문은 자신의 아이가 손가락을 찌르는 아픔을 느낄 정도로 학대받으면, 자신이 괴롭힘을 당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라훌라존자를 학대하자」.
그래서 마라는 거대한 코끼리로 변하여 거대한 코로 존자의 머리를 휘감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여기서 일단 마라의 개입을 생각하지 맙시다. 어두운 곳에서 좌선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에 코끼리가 코로 짓누르는 것을 상상해 봅시다. 밤이 아니라 낮이라도 무서울 것입니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코끼리라도 코로 자신의 몸을 휘감으면 위축됩니다. 코끼리에 맞으면 인간은 아마 죽을지도 모릅니다. 라훌라존자의 경우는 밤에 어두운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길들여진 코끼리인지 야생의 코끼리인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라훌라존자는 무서워하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기는커녕 끄떡도 않았습니다.
이 일화에서 말하고 싶은 요점은 「흉폭하고 거대한 코끼리가 큰소리로 외치면서 공격을 해도, 해탈에 이른 사람의 마음에는 무서움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그만두세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야생 코끼리라면 발길질에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해탈에 이르면 마음은 이렇게 안정됩니다. 불안·무서움·고민 등은 모두 없어집니다.
◉ 채울 수 없는 욕구
성자의 마음에 무서움이 없어져 절대적인 안심 상태가 되는 이유를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Vītataṇho anaṅgaṇo(위-따딴호- 아낭가노-) : 갈애를 떨쳐버려 더러움이 없다.
자신의 생명에 갈애가 있으면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지진이 무섭고, 해일이 무섭고, 수입이 없어지는 것이 무섭고, 병이 드는 것이 무섭다 등 우리에게는 무수한 「무서움」이 있습니다. 이것들 모든 것이「무섭다」는 것은 죽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마음이 갈애로부터 해방되면 「무섭다」는 전부 없어집니다.
또한 생명에 대한 갈애가 있으면 욕구·분노·질투·미움·침체·오만·후회·인색함 등의 여러 가지 더러움이 일어납니다. 해탈에 이른 사람의 마음에는 이러한 더러움이 일체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시다. 욕구·분노·질투·불안 등의 더러움에 의해 우리는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더러움이 모두 떨어져 버리면, 얼마나 평온함·안정감을 느끼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행복하지 않을까요?
◉ 무서워하는 것이 사는 것
Acchindi bhavasallāni(앗친디 바와살라-니) : 그는 생존의 화살(속박)을 끊었다.
「돈은 얼마가 있어도 충분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구는 채울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도, 갖고 싶다고 하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치하며 풍족하게 살아도, 「 이제 충분하다, 좋다」라는 기분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장수하고 싶어 합니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좀 더 살아있고 싶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경우는 모든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살아가고 싶다」라고 하는 기분이 있는 한 괴로움으로부터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사람의 이 기분이 속박인 것입니다. 속박이란 번뇌입니다. 이런 경우는 화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상상해 봅시다. 매우 깊은 골짜기의 밑바닥으로 용암이 흐르고 있습니다. 벼랑 위에 있는 사람이 발이 미끄러집니다. 골짜기의 밑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그 사람의 몸에 창을 찔러 벼랑의 벽에 세워 둡니다.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은 그는 이 창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골짜기 밑바닥의 용암이 눈에 들어오면 자신의 몸을 찌르고 있는 창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번뇌는 이 창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을 윤회에 찔러 붙여 두는 번뇌라고 하는 화살과 창입니다. 깨달은 자에게는 없습니다.
◉ 윤회는 진심으로 무섭다
Antimoyaṁ samussayo(안띠모-양 사뭇사요-) : 이것이 마지막 몸이다.
살아가고 싶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창이 없어졌습니다. 살아가고 싶다고 하는 충동이 없으면 윤회는 없습니다. 새로운 육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벼랑에 창에 찔려 붙어있는 사람은 창이 망가져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찔린 창이 심한 괴로움을 주고 있는데도, 떨어지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창에 찔려 괴로워하는 이유는 신체입니다. 용암에 떨어지는 것이 무서운 것도 신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고 싶다고 하는 충동이 없어진 붓다가 죽음을 맞이하면 다시는 신체를 만들지 않습니다. 이 게송으로 부처님은 해탈자의 마음이 얼마나 안온하게 달한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닙니다. 비유를 통해서 추측 할 수밖에 없습니다.
◉ 해탈자의 지혜
이제 해탈에 이른 성자의 지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자는 당연히 무의미한 망상은 하지 않습니다. 사고는 탐·진·치로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굳이 생각해야 하는 필요함도 없습니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의 문제, 무엇인가 모르는 것, 무엇인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서없는 망상을 하기 위해서는 번뇌의 충동이 필요합니다.
모든 의심이 진심으로 없어지면 무엇을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 마음이란 일반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망상도 사고도 없다고 한다면 뇌에는 일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뇌가 망가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염려될 것입니다. 망가지기는커녕 일반 사람들의 뇌보다 완전하고 건강하게 확실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 해탈에 이른 사람에게는 4가지의 능력이 갖춰진다.
• attha(앗타) : 의의·의미·이익. 모든 현상은 어째서 그처럼 있는지 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눈은 어째서 있는지, 귀가 있는 것은 무슨 이익인지, 왜 밥은 먹을 수 있는데 풀은 먹을 수 없는 것인지와 같은 일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왜 존재가 성립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 dhamma(담마) : 법·진리. 하나의 현상이 망가져서 별도인 현상이 성립됩니다. 그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현상이라도,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도 없다. 이것이 생기면, 이것이 생긴다. 이것이 멸하면, 이것도 멸한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연 법칙입니다. 일체 현상의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 nirutti(니룻띠) : 언어. 언어와 어법에 정통합니다. 이 능력이 있으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고 있는지 순간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말하면 상대가 올바르게 이해하는지도 압니다.
• patibhāna(빠띠바-나) : 번쩍임·영감. 이 능력이 있으면 어떤 문제가 일어나거나, 누구도 지금까지 생각한 적도 없는 것에 대해서 질문받으면, 순간적으로 정답이 번쩍입니다. 전대미문의 일이 일어났다고 당황하고 있는 상태는 성자에게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4종류의 능력이 붙어있으므로, 따로 생각하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번뇌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갖춰지는 능력입니다. 일반 사람들과 같이 망상하거나 사고하거나 고민하거나 대답을 몰라서 벽에 부딪히거나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뇌는 최고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혜의 내용입니다.
◉ 언어 능력의 달인
언어 능력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 능력이 갖춰져 있다는 것은 어떤 언어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언어학 능력인 것입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은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어밖에 모르는 사람은 단일 언어를 구사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어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정말로 한국어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상대에게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마음을 올바르게 납득 되도록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와 같이 질문받으면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를 것입니다.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말은 인간이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에 대해서 붙이는 표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선 개념이 회전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부터 정보가 들어갈 때마다 개념이 회전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개념도 일어납니다. 개념에 사람의 기분·감정이 찰싹 들어가 버립니다.
예를 들어 「좋아」라고 하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좋아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같은 기분은 아닙니다. 「여름보다는 가을 쪽이 좋아. 물고기보다는 고기를 좋아해. 우리 아이를 좋아해. 그래서 아이는 아빠가 좋아라고 말한다.」. 그러한 「좋아」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는 완전히 같을까요? 외국인은 사전을 찾아 좋아 = like 라고 이해합니다. 정말 이해했는지요? 좋아와 너무 좋아 라는 말은 자주 사용됩니다. 어떠한 기준으로 좋아하는 크기를 측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예로 말이라고 하는 표시의 뒤에 있는 사람의 개념과 감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언어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말이라고 하는 표시·소리의 뒤에 흐르고 있는 개념과 기분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언어에 정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되면 당연히 어법도 알고 있습니다. 「먹는다.」「먹습니다.」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말을 주관하는 마음의 뒤의 흐름을 아는 사람은 상대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무엇을 의미했는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올바르게 말할 수 있었는지 등을 순간에 압니다. 해탈에 이른 사람은 보통 인간에게는 드물게밖에 갖춰지지 않는 언어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마지막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해탈자는 위대한 지혜자,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열반은 궁극의 행복입니다.
• 경전은 적극적인 말로 열반을 표현합니다.
• 해탈자의 마음은 절대적으로 안온합니다.
• 해탈자는 망상은커녕 사고조차 필요가 없습니다.
• 해탈자는 완전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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