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온다. (20160219)

담마마-마까 2022. 2. 16. 09:10

*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온다. (20160219)

 

불교를 배울 때 많이 듣는 용어가 있습니다. 집착은 버리는 것입니다. 집착으로부터 완전하게 마음이 자유롭게 된 상태를 열반·해탈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집착을 끊는 것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의 수행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모든 집착을 끊는 길이다」라고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이란 무엇인가, 어느 정도 있는가, 어떻게 하면 끊을 수가 있는가라고 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이 「불법」이 됩니다.

 

■ 여러 가지 집착

 

돈에 집착하는 것, 음식에 집착하는 것, 자식을 너무 좋아하는 것 등 집착의 대상은 무수합니다. 집착은 물질적인 대상에 있는 특색이 아니라, 마음의 성질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통 어른이 길에 떨어진 돈뭉치를 본다면, 「큰돈이구나! 이렇게 큰돈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등의 기분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같은 돈뭉치를 아이가 본다면, 「이것은 재미있는 공이다!」라고 생각해서 장난감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아이의 마음에 일어난 집착입니다.

 

그런데 만약 돈뭉치가 집착이라면, 누구의 마음에도 같은 기분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은 욕구가 아니다. 그것들에 대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애착이 욕구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싶다고 하는 희망은 욕구의 집착입니다. 그리고 살아나가고 싶은 것, 죽고 싶지는 않은 것이라고 하는 존재욕구도 있습니다. 존재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허무적인 욕구도 있습니다. 이 3가지를 부처님께서는 갈애라는 말로 말씀하셨습니다.

번뇌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욕구의 번뇌, 계속 살고 싶은 번뇌, 견해에 대한 애착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무명이라고 하는 4가지로 분류합니다.

 

■ 집착과 괴로움

 

인간의 모든 고민,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윤회하는 원인도 집착입니다. 해탈에 이를 수가 없는 이유도 집착입니다. 죄를 범해 불행에 빠지는 원인도 집착입니다. 그러나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집착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 착각도 있습니다. 이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재산, 명예, 권력 등에서도, 동반자, 아이, 친척, 친구 등에서도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러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즐거움도 강해집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악을 듣고 있다고 합시다. 음악에 집착이 강한 사람은 즐깁니다. 음악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즐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상 경험이므로 집착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일본 대지진 때 어느 사람이 2억을 들여 지은 집이 부서져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친지들이 3억을 들여 새 집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의 슬픔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1억을 벌었다는 기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늙는 것, 병이 드는 것, 죽는 것, 자연재해가 있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늙어가면 슬퍼집니다. 병에 걸리면 슬퍼집니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집니다. 자연재해를 만나면 몇 년이 지나도 그 공포감으로부터 마음은 해방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를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마음의 상처」란 무엇입니까? 불교에서는 그것도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기르고 있는 애완동물이 나이를 먹어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슬퍼서 참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애완동물과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애완동물의 수명은 10년 길어야 15년이라고도 알고 있었는데도 왜 슬퍼하는 것일까요? 애완동물에 대해서 집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있으면 현실이 안 보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재산이 없어지는 것, 사람들이 죽는 것, 늙는 것 등이 사람에게 고민과 슬픔을 만들 리는 없습니다. 집착이 문제입니다. 집착이 있을 때는 현상의 얼마 안 되는 변화에도 마음에 큰 고민을 만듭니다.

 

■ 집착과 속박

 

집착은 사람을 전면적으로 속박합니다. 자유를 빼앗고 지혜에 뚜껑을 씌웁니다. 집착하는 대상으로 자신의 인생을 맞추지 않으면 갈 수 없게 됩니다. 사랑스럽기 때문에 개를 기르면 개의 생활 습관에 맞추어 자신의 삶의 방법도 바꾸지 않으면 갈 수 없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인생은 아이 중심으로 돌게 됩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와 싸웠다면 우리 아이가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당의 당원이 되면 그 정당이 하는 것은 무엇을 해도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정당이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다고 하게 됩니다. 지식은 강한 집착의 대상입니다. 지식인은 재산보다, 가족보다, 「자신의 지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여러 가지 집착 가운데 자신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력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은 무엇이든 합니다.

사람은 기뻐하며 대상에 대해 집착을 가지지만, 자신이 기뻐하며 집착하는 대상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정신적인 노예와 정신적인 자유는 결코 병존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자유에의 도전

 

부처님은 출가 제자들에게 소유물을 가지지 않는 생활을 추천했습니다. 필수품인 가사 3벌, 탁발에 사용하는 발우, 물 거름망, 면도칼, 바늘과 실만이 사유재산입니다. 이 8가지 필수품이 갖추어져 있으면 혼자서도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조그만 토굴이라도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인정했다면 그 출가자는 그 처소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되어 유행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선배 장로들과 함께 만행하는 일도, 배우는 일도, 수행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출가자는 설령 탁발한 양이 많아도 그날 먹고 남은 것을 다음날 먹기 위해서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계율에 의한 어려운 삶의 방법이라고 오해받고 있지만 이것은 계율이라고 하는 것보다 집착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여분으로 남은 밥을 쓸데없게 하지 않고 다음날에 먹어도 좋다고 결정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당연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인간은 조금 넉넉하게 탁발하여 2일분, 3일분, 일주일분으로 보관하여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기분입니다. 그리고 보관하고 있는 음식을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대단한 집착이 됩니다.

 

인간은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화기애애하게 살아가고 싶고, 아는 사람이 증가하면 즐거워합니다. 사교적이라고 자랑까지 하지만 무슨 의미도 없습니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일 뿐입니다. 마음이 약하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감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출가자는 혼자서 생활하도록 훈계받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혐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숫따니빠따의 「코뿔소의 뿔경」은 독립생활의 훌륭함을 읊고 있는 경전입니다. 그러나 이 독립생활은 일반인이 실행할 수 있기는커녕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집착을 완전하게 끊은 사람의 「자유」를 읊고 있는 게송인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분노와 욕구와 사악한 견해와 무명을 끊어야 합니다.

 

대상에 집착하면 욕구와 분노는 반드시 붙어오는 세트입니다. 수행자는 집착을 알아차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분노와 욕구를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은 존재 속에서 평온함이 있으면 착각하여 여러 가지 견해를 만듭니다. 영원한 천국, 영혼의 정화, 신에 대한 기도 등의 견해를 만듭니다. 존재 속에 평온함이 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만들어내는 사악한 견해인 것입니다. 그 사악한 견해에 근거해서 어떠한 종교 철학 등을 만들어도 모두 사악한 견해가 됩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에서는 62종류의 사악한 견해가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사악한 견해는 사물을 관찰할 때 마이너스가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고 해도 주관·선입관·편견 등이 끼어들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람에게는 신앙하는 종교와 같이 명확한 사악한 견해가 없어도 주관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도 있는 그대로 볼 때는 장해가 됩니다.

 

또한 있는 그대로 현상을 관찰하는 것으로 서서히 무명이 없어져 갑니다. 무명이 없어지면 지혜가 나타난다고 하지만, 실은 사성제가 진리라고 발견합니다. 지혜와 사성제의 발견은 동의어입니다.

 

■ 선우

 

수행의 목적은 완전한 자유(해탈)이지만, 실천하려고 하면 조금 문제가 생겨납니다. 인간은 본래 집착의 수렁 속에 있습니다. 무명이라고 하는 어두운 곳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력으로 집착을 끊을 수 있었던 분은 부처님뿐입니다. 인간이라면 모두 좋은 것을 타인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집착을 끊기로 결정한 사람은 누군가의 지도 아래에서 그 목적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도자는 일상 욕구에 빠져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사는 것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말은 해탈에 이를 때까지 인간관계를 완전하게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욕구의 동료는 누구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와 집착을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동료는 적습니다. 불교는 가족·친구 등의 교제는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집착의 동료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는 것의 본래의 모습(괴로움)과 집착을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고 말합니다. 선우라고도 말합니다. 「선우를 만날 수가 있다면, 수행을 완성해 해탈에 이른다.」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여래(부처님)가 인류의 진정한 선우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낌없이 버림

 

「만약 어떤 사람이 선우와 같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그 선우에게 가야 한다.」라고 부처님께서는 역설했습니다. 비록 일국의 왕이라도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일반 사람은 가족에게 집착하고 속박되어 있습니다. 국왕은 나라에 집착하고 속박되어 있습니다. 왕은 오히려 일반 사람보다 비참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대단하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민과 괴로움과 공포감을 안고 있습니다. 경전에는 「전 재산을 버리고 집을 나온다.」는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나라나 가족을 버리는 것은 무책임하고 좋지 않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야말로 자유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가족이나 재산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집착을 끊는 것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명에 대해서 연민심을 안아, 자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생명에 집

착하는 것 자체가 그 생명에 대하여 자애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만약 자유를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 선우와 함께 지낼 기회가 없다면, 나라를 버리는 왕과 같이 무리로부터 멀어져라. 혼자 생활하는 코끼리의 왕과 같이 혼자서 생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독 생활은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나 집착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집착은 나쁘다고 생각해서 집착하는 대상을 버린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인격자인 것입니다.

 

■ 생명관계와 인간관계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생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대인 관계가 골칫거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누구와라도 쉽게 교제하듯이 하는 일도 좋지 않습니다. 악인은 쉽게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 버립니다. 「악인과 교제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생활하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생명관계」와 「인간관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한정하지 않고 우리의 생명은 무수한 생명과 관계가 있어서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아니라 생명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말하는 자애의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애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인간관계를 쌓아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자아 중심적인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인간관계에 대해 상당히 고민합니다.

 

포인트를 명확하게 합시다. 자애를 실천하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과의 관계를 쌓아 올립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방법을 향상할 목적으로 대인관계도 실행합니다. 무비판적으로 누구와라도 교제하면 안 됩니다. 교제하는 경우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인을 선택합니다. 선인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는 당당히 혼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집착은 속박입니다.

• 불교는 자유를 목표로 합니다.

• 자유를 위해서는 분노와 욕구와 사악한 견해와 무명은 제거해야 합니다.

•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 자애는 완전한 인간관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