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사고·망상은 번뇌의 산물이다 (20160226)

담마마-마까 2022. 2. 18. 09:10

* 사고·망상은 번뇌의 산물이다 (20160226)

 

「사고와 망상을 멈추도록 노력하라」라고 강조해서 말합니다. 한편 「위빳사나 수행은 사고를 멈추는 수행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고가 일어나면 알아차리는 것이지, 멈추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사고·망상을 멈추어야할 것인가? 그대로 방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고·망상을 멈추는 방법은 사고·망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리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스님의 설명입니다. 사고를 완전하게 멈추는 방법은 단 하나,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표현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 사고를 멈출 수 있습니까?

 

이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스라고도 말할 수 없고, 노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생명에는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6개의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색·성·향· 미·촉·법이라고 하는 정보가 접촉해서 인식합니다. 그중에 의(意)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6개의 기능 조직 가운데 1가지를 멈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있는 것은 상관없지만, 굳이 보지 마」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의(意)라고 하는 감각 기관이 있는 것이, 그것이 일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일이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이렇게 됩니다. 사고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멈출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고를 멈추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행 경험이 필요합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사고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지혜가 성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은 맑고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가끔 멸진정이라고 하는 선정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 사마디에 들어가 있는 동안 성자들의 마음은 정지해 있습니다. 이것이 올바르게 사고를 멈춘 것입니다. 즉 사고를 멈추기 위해서는 해탈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일반인도 도전하면 세속적인 마음에서 서서히 벗어나서 해탈의 경지에 이릅니다.

 

■ 사고는 날조

 

일반적으로는 안·이·비·설·신·의에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일순간만 그대로 인식하지만 눈 깜짝할 순간에 개념을 만듭니다.

하나의 게임이 있습니다. 큰 판자로 만든 벽에 폭 30cm의 네모난 구멍을 뚫습니다. 판자의 저쪽에 있는 사람이 구멍을 통과해 던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합니다.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판자의 이쪽에 앉습니다. 그 사람은 저쪽에서 던지는 것이 무엇인지 맞혀야 합니다. 물건을 빠르게 던지면 맞히는 것은 어렵습니다. 만약 속도 조절 기계를 사용하여 던진다면 어느 정도의 스피드로 던지면 올바르게 맞힐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 스피드에는 개인차가 있습니다. 빠르게 던져도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천히 던지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게임을 불교적으로 해석해 봅시다. 구멍을 통과하는 것은 누구라도 보입니다. 그것은 보였을 뿐입니다. 물건의 이름을 맞히기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조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념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념을 만드는 것은 보고 나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우선은 그대로 보이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이터가 접촉한 후 아주 짧은 시간으로도 개념이 완성됩니다.

 

개념이란 각각의 사람의 주관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여러 명이 같은 것을 보거나 듣거나 해도, 무엇을 느끼는지는 각각의 사람이 다릅니다. 주관인 것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등은 그 생명의 형편에 맞추어 개념으로 합니다. 바퀴벌레를 보는 인간은 「기분 나쁘다」라는 개념을 만들고, 고양이는 「사냥감이다」라는 개념을 만들 것입니다. 각각의 형편입니다. 사고한다는 것은 날조한 개념을 또 주관적으로 휘젓는 것입니다. 사고하면 할수록 현실·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날조가 더욱 늘어납니다.

 

■ 사고와 감정

 

육근에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알지 않고, 현상을 조립합니다. 개념을 만듭니다. 그것은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실행하므로 날조가 됩니다. 자신의 형편이란 존재욕구(갈애)입니다. 쥐의 시체를 보는 인간은 기분 나쁘다고 느낍니다(분노). 까마귀는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욕구). 양쪽 모두 존재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쥐의 시체는 인간의 생명을 지지하는 아군이 아닙니다. 적입니다. 까마귀의 경우는 생명을 지지하는 아군입니다.

감각 기관에 뿔뿔이 흩어져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만드는 것은 감정입니다. 감정은 개개의 정보를 한 개로 연결하는 접착제입니다. 감정은 불교 용어로 「번뇌」입니다. 개념과 감정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사고하는 것·망상한다는 것은 개념의 회전이지만, 동시에 번뇌의 회전이기도 됩니다. 사고·망상을 인정하는 것은 번뇌를 인정하게 됩니다. 마음의 더러움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탈의 길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 사고와 망상의 차이

 

감정을 끼어들게 하지 않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사고」입니다. 예를 들어 수학의 문제를 풀 때입니다. 그때는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이론에 맞추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수 사고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감정이 끼어듭니다. 수학의 문제를 풀 때에도 감정이 끼어들어 옵니다. 그래서 속도가 늦어집니다. 큰 비가 내리고 있을 때는 우산을 쓰고 걷습니다. 몸이 비에 젖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렵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보면 신체가 제법 젖어 있습니다. 감정이 끼어들지 않게 사고하는 일도 그와 같습니다. 사고에 감정이 끼어들지 않는다고 하는 보증은 없습니다. 감정이 끼어들면 사고가 잘 되지 않기도 하고, 결론에 이르는 것이 늦어지거나 잘못된 결론이 되거나 합니다.

 

객관적인 사실에 관계없이 감정의 충동만으로 개념을 휘젓는 것이 「망상」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머릿속에서 회전시키거나 추측으로 개념을 휘젓거나 하는 일도,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 「나는 무엇을 해도 잘되지 않는다.」 등의 감정이 일으키는 생각도 망상입니다. 망상에는 마지막이 없습니다. 결론도 없습니다. 무엇인지 판단도 없습니다. 다만 감정을 휘저어 능력을 파괴할 뿐입니다. 정신병의 근본입니다. 일단 버릇이 되면 의존하는 상태가 됩니다. 망상을 그만둘 수 없게 됩니다. 망상은 단언적으로 나쁜 것입니다. 사고의 경우는 내용에 따라서 좋은 사고도 나쁜 사고도 있습니다.

 

사고에도 반드시 감정이 끼어듭니다. 망상은 감정이 만들어내는 위험한 기능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양의 9할 정도는 망상이 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지혜를 개발하려고 생각한다면 사고도 망상도 그만두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망상을 그만두고, 그리고 사고도 그만두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고에 미련이 있다면 잘되지 않을 것입니다.

 

■ 사고에도 문제가 있다

 

사고에는 문제없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감정이 끼어들지 않아도 사고에 문제가 있습니다. 개념을 만든 시점에서 날조하고 있습니다. 날조란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은 갈애의 기능입니다. 사고한다는 것은 왜곡된 개념을 회전시키는 것입니다. 그 뒤에서 갈애가 번영합니다. 사상가들은 여러 가지 주의나 이론을 만듭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유물론, 일신론, 창조론, 다신론, 생명주의, 실존주의, 현상론,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정신 분석론 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결론」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고가 날조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론이나 주의를 만들면 갈애가 한층 더 강해집니다. 자신의 주의에도 강하게 집착 합니다. 그래서 사고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쉽게 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은 사고도 망상도 멈추려고 노력해야합니다.

 

■ Vitakka(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기능)와 papañcā(망상)

 

경전은 사고와 망상을 명확하게 나누어 사용합니다. Vitakka(위딱까)라고 하면 사고도 망상도 양쪽 모두에 해당합니다. 의문(意門)이 일하고 있는 것이 vitakka(위딱까) 입니다. 요컨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6개의 감각 기관(안·이·비·설·신·의)에 외부의 정보(색·성·향·미·촉·법)가 접하면 각각의 기관에 인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생겨나 그것으로부터 느낌(vedanā)과 안다(sañjānā)고 하는 기능이 일어납니다.

 

안다(sañjāna)고 하는 기능의 뒤에는 vitakka(위딱까)가 일어납니다. 위딱까는 한역으로 「심(尋)」, 의미는 「생각한다」 입니다. 차분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닫고 있던 눈을 번쩍 열면 눈에 색깔과 형태가 들어옵니다. 만약 눈앞에 꽃이 있다면, 그 순간에 「꽃」이라고 압니다. 이것이 위딱까입니다. 순간적인 일이므로 여러분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이 미묘한 기능을 불교에서는 「생각한다.」라고 합니다. 「꽃」이라고 인식한 순간, 벌써 생각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정보가 모아져 꽃과 꽃이 아닌 무수한 것을 비교해서 구별하고 「이것은 꽃이다」라고 그저 일순간에 처리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꽃」이라고 하는 결론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이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위딱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관적으로 마음대로 뜻(意)으로 개념을 만드는 것은 maññanā(사유, 사료)라고 합니다.

Maññanā(만냐나)에서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혼자 사색해서 「인간에게는 도덕이 필요없다.」라고 하는 maññanā(만냐나)를 만들면, 다른 사람은 「도덕은 빠뜨릴 수 없다」라고 하는 maññanā(만냐나)를 합니다. 젊을 때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maññanā(만냐나)의 사람이 나이 들어서는 「신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maññanā(만냐나)로 바뀌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감각 기관에 들어오는 정보를 「갈애」라고 하는 주관에 의거해 현상화하는 것은 날조하는 것입니다. 날조는 경전에서 papañcā(빠빤짜)라고 말합니다. 반드시 갈애가 끼어들어 있는 개념인 것입니다.

 

욕구나 성냄, 미움, 슬픔, 후회, 질투 등의 다양한 감정이 솟아올라 일어나 와서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papañcā(빠빤짜)」라고 말합니다. 빠빤짜는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현상」 「망상」이라는 말이 제일 적절하고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해서 실체화, 고정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네 명이 친구의 집에 갔다고 합시다. 방에 들어가면 새로운 커텐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보인 순간, 네 명은 「커텐이다」라고 압니다. 이것은 vitakka(위딱까)의 기능입니다. 다음의 순간, 각각의 사람의 마음에 어떠한 감정이 솟아올라 일어나 지식이라고 하는 이상한 것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A는 커텐을 보고 「밝고 예쁘다」라고 말하고, B는 「색은 좋지만 모양이 안 좋다」라고 말합니다. C는 「색이 너무 화려하다」, D는 「색도 모양도 좋지만 섬유재질이 얇다」 등으로 모두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같은 하나의 것을 봐도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모두 자신의 머릿속에서 합성해서 현상화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밖의 것이 눈에 닿은 순간, 마음속에 「papañcā(망상)」이라고 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에너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망상할 때는 욕구나 분노나 무지라고 하는 감정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감정으로 뒤죽박죽 망상한 것을 「나의 지식」이라고 믿어 버려, 더 나아가 「나의 지식은 올바르다」라고 오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런 일을 알고 있다」라고 당당히 모두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해도 그것은 그 사람이 만들어낸 papañcā(망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의 의사소통이나 삶의 방법의 모든 것이 이 「papañcā(빠빤짜)의 계략」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살아있는 것은 모두 자신밖에 모르고 타인의 일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싸우는 것입니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커텐의 모양은 좋지 않아」라고 말하면, 그 방에 살고있는 사람은 기분 나빠집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산 커텐입니다. 친구가 「모양이 좋지 않다」라고 말하면, 어딘지 모르게 폄하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나빠집니다. 혹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방에 와서 「이 커텐은 조금 수수하다」라고 말하면, 상대는 프로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미적 감각이 없다」라고 망상해서 자신을 잃거나 낙담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그것들은 모두 각자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망상을 현실로 고정하려 하고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어 버리기에 그 때문에 대단한 괴로움을 맛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자신은 세상을 보고 있고,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보고 있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에 닿은 정보에 대해 망상한 것을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vitakka(위딱까)와 papañcā(빠빤짜, 망상)은 다른 것입니다. 위딱까는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기능으로, 순간에 머릿속에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구별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순간 「이 꽃은 예쁘다」든지 「더럽다」든지 「나의 의견은 올바르다」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어 있다」 등 거대한 망상의 세계가 일어납니다.

 

망상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좋고 싫음이 관련되어 나옵니다. 꽃은 예쁘다라고 생각하면 「좋아」라고 하는 욕구가, 더럽다고 생각하면 「싫어」라고 하는 분노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욕구와 분노와 무지로 망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망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여러 가지를 실험해 보십시오.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본 순간 어떤 감정이 일어나올까요? 대개는 「싫다」라고 망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았을 때는 자신과 같은 싫은 기분이 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친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 개인의 주관이며 망상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망상의 세계이지 진실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머릿속에서 멋대로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서 고정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진실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눈을 뜨라.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봐라」라고 말씀하시면서 papañcā(빠빤짜)를 찢는 「닙빠빤짜(nippapañca)」의 세계를 가르치셨습니다. 닙빠빤짜의 세계란 일체의 망상 개념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경지, 이른바 열반입니다. 망상 개념을 찢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마음을 증장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귀에 소리가 접했을 때 어떤 소리가 접해도, 「들렸다」라고 거기서 멈춥니다. 「아, 상사의 소리다 → 싫다 → 또 무엇인가 불평하겠지 → 시끄럽다 → 정말로 화가 난다......」 라는 식으로 마음대로 머릿속에서 망상을 회전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들렸다」, 혹은 「소리」라는 사실에서 멈춥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느슨해지면, 곧바로 망상이 회전하기 시작해서 「싫다」든지 「시끄럽다」 등으로 분노가 솟아올라 일어나 오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도록 마음

을 증장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고의 관리

 

인식하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사고를 멈추어라고 하는 훈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날고기나 회를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술 담배를 그만두었다」. 이것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숨쉬는 것을 멈추었다」 「식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고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고를 멈추기 위해서 도전합니다. 마음이 세간의 차원을 넘어 출세간의 차원에 이를 수가 있다면 사고는 필요 없게 됩니다. 사고는 필요 없게 된 것이지만, 멈추었다·그만두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필요 없으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라고 하는 3가지 번뇌는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 3가지 번뇌를 간단하게 없애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욕심 부리지 않으려고, 화내지 않으려고 해도, 돌아보면 벌써 감정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우선 탐·진·치의 감정이 있어서, 그리고 사고(망상)가 나타나고, 사고가 감정을 기른다, 라고 하는 과정으로 마음은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감정을 기르고 있는가 하면, 탐·진·치의 감정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므로 마음도 항상 영양이 필요합니다. 영양이 없어지면 마음도 죽어버립니다. 이것도 인과 법칙입니다.

 

이와 같이 끝없이 중단되는 일 없이 마음에 영양을 공급하는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것과 같은 회로를 만들고 있기에, 언제든지 탐·진·치가 있고, 사고할 때에 탐·진·치가 건강하게 됩니다.

 

이 악순환의 시스템을 부처님은 좋은 순환으로 전환시키라고 하십니다. 의도적으로 불탐·불진·불치의 사고를 하는 것으로서, 악순환의 공급을 끊어 탐·진·치에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탐·진·치를 버리게 됩니다. 암세포와 같이 직접 탐· 진·치를 취해서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고의 관리를 시작해 보십시오.

 

⑴ 사고와 망상을 구별한다. 망상은 단순한 감정의 물결입니다. 아무리 계속해도 끝나지 않습니다. 사고에는 감정과 함께 구체적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사고에는 반드시 결론이 있습니다.

 

⑵ 사고·망상에 체크를 한다. ①선인가, 악인가? ②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③행복을 느끼는가, 불행을 느끼는가? 라고 확인해 봅니다. 망상할 때 자신에게 「지금 나는 행복한가?」라고 물어보십시오. 어처구니없고 불행하다고 알 것입니다.

 

소중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행복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저녁밥 메뉴를 생각할 때 본인은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망상하면 불행을 느낍니다. 그렇게 모든 사고·망상에 체크를 해봅니다.

 

⑶ 사고를 옮겨놓는 훈련을 한다. 악사고를 하고 있으면 알아차리고 선사고에 옮겨놓읍시다.

사고의 수행으로 부처님은 「악사고를 그만두는 것」을 추천했습니다. 즉 사고의 선택입니다. 악사고는 3종류입니다. Kāma vitakka(애욕의 사고), vihiṁsā vitakka(공격의 사고), vyāpāda vitakka(분노의 사고)입니다. 이 3종류의 사고·망상을 그만두어 봅니다. 다음에는 행해야 할 사고를 선택합니다.

 

행해야 할 사고, 선사고는 3종류입니다. Nekkhamma vitakka(무집착과 관련되는 사고), avihiṁsā vitakka(연민의 사고), avyāpāda vitakka(자애의 사고)입니다. 이 3종류의 사고를 하면 번뇌의 접착력이 약하게 되어 갑니다.

예를 들어 자비 희사의 사고를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자비의 명상·실천입니다. 머릿속을 그 사고로 가득 채웁니다. 혹은 무상의 사고로 옮겨놓습니다. 시시한 망상은 멈추고, 순식간에 변화해 나가는 무상의 시점으로 무슨 일이든 봅니다.

 

그처럼 사고를 관리하는 것으로 마음은 치유되어 탐·진·치라고 하는 감정이 줄어들어

번뇌에 지는 일도 적어지게 됩니다.

 

■ 감정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인생을 관리하는 주인이 감정이 되어 버릴 우려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정신병을 앓고 자기 파괴에 몰립니다. 예를 들어 성욕이 솟구쳤다고 합시다. 그러면 성욕을 망상하거나 합니다. 생각할 때도 성욕이 사고시킵니다. 애욕의 대상이 된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사람으로 보여 버립니다. 더 이상 없는 아름다운 존재, 이상적인 존재로 보여 버립니다. 보통 욕구에 지배되면 세상을 뭐든지 아름답게 봐 버립니다. 그래서 갈애가 강렬하게 증대합니다. 해탈의 가능성도 사라져 버립니다. 존재에 대한 집착은 끊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 병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부처님은 「사고를 극력 삼가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욕구가 지배권을 잡지 않게 하기 위한 안전 대책은 「대상에 대한 견해」를 바꾸는 것입니다. 욕구가 있으면 그 사람은 아름답다, 목소리가 예쁘다, 웃으면 귀엽다, 등의 견해로 알게 됩니다. 머리카락, 입고 있는 옷, 걷는 것, 먹는 것 등 뭐든지 미화합니다. 이 견해를 바꾸어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의 뒤를 봅니다. 미인으로 보여도 땀을 흘리면 체취가 나고, 입 냄새도 있는 등의 진짜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을 「부정관」이라고 합니다.

부정관 훈련을 하면 욕구가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자애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분노가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무상의 견해로 살아간다면 무지가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견해를 바꾸는 것으로 집착을 끊어 해탈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 이번 포인트

 

• 사고한다는 것은 날조한 개념을 주관적으로 휘젓는 것입니다.

• 개념은 진리가 아니라 존재욕구에 따라 날조한 것입니다.

• 개념과 감정은 밀착되기 쉽습니다.

• 사고·망상한다는 것은 번뇌를 휘젓는 것입니다.

• 사고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 감정에 마음이 지배되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