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 처방전 (20160304)
이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관계에서 트러블은 누구에게라도 있는 것입니다.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물에게는 인간관계와 같은 트러블은 없습니다.
인간인 만큼 이 문제가 있기에, 이것은 난문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가 없는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부처님도 인간관계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코삼비의 비구들이 논쟁을 거듭하면서 상가가 내분 될 위기에 처했을 때, 부처님이 이를 조정하려고 했지만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에 질려버린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원의 거주지를 떠나서 숲에서 3개월 동안 혼자서 지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문제없이 살고 싶으면, 혼자서 생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에는 혼자서 사는 것의 평온함을 노래한 게송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기록되고 있는 큰 사건이었지만, 좀 더 세세한 트러블은 부처님 당시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혼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은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취하는 삶의 방법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약점을 보충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自我(자아)를 드러내 버립니다. 관계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안하무인으로 업신여기며 말합니다. 당연히 트러블이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혼자 지내는 평온함을 말하면서도, 사람들이 고민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 사회로 나아갔습니다.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로 나아가서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다툼이 있을 때는 사회의 경험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다툴 때는,
1.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고 현재의 감정만을 말해라.
2.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지 마라.
3. 한 가지의 사건으로 다툴 때는 그 한 가지에서 여러 가지로 확대하지 마라.
4. 가족이나 친척을 들먹거리거나 끌어들이지 마라.
5. 잘못했으면 빨리 인정하라.
6. 합의하여 해결하였으면 다시는 그것을 끄집어내지 마라.
7. 이기려 하지 마라.
8. 삼가해야 할 말은 끝까지 삼가라.
9. 먼저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라.
10. 오래 싸우지 마라.
여기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툼의 해결책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일관된 인간관계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한 포인트는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이라도 바로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비록 가족이라도 그사람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 주세요. 다른 이에게 자신의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괴롭지 않는지를 판단하면 됩니다. 부부 싸움을 한 후에 자신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을 인정하기 위해서 몇 개월 동안 괴로워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벗어나 자신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분노로 고민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소개하는 경전은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다툼으로 초조해 하는 마음, 상대방을 허락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벗어버리는지를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가르쳤습니다.
수행하는 자는 초조함이 있으면 전혀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출가자는 출가의 생명과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출가하여 사는 것의 조건에서 실격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초조함에 질질 끌려 사는 것은 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에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끝나버리는 것과 같기에 치명적입니다.
그럼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의 처방전을 소개합니다.
1.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자애(mettā, 멧따, 慈愛)를 실천합니다.
자애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불교의 답입니다.
“나도, 다른 생명도, 모두 행복하게 되고 싶어 합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이 사는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지혜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최종적인 해탈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깨달음을 이루어도 자신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는 생활해야 합니다.
그럼 실제의 생활 속에서 어떠한 삶의 방법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비의 삶의 방법을 말합니다.
자비와 지혜는 불교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기에, 어느 쪽도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행복의 길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관계들의 연결입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생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 덕분에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애를 실천하는 것은 절대적인 일로, 호흡을 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일입니다. 자비를 호흡에 비유하는 것은 먹는 것보다 더 기본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지혜 있는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가 라는 것은 ‘생명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자애 행위를 할까’ 라는 것으로 측정되어 집니다. 동료를 도와주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편하게 해주는지, 상대방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이와 같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지혜가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아라한이 되고자 생각한다면 자애의 수행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자애롭게 집중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은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을 볼 때도, 인과 관계를 볼 때도 자비를 지니고 보셨습니다.
부처님의 경우는 자비의 기초 위에 선정을 만들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셨습니다.
멧따를 기르는 실천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나의 친한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충만 되게 멧따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다음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를!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를!”이라고 싫은 사람에 대하여도 명상합니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자애롭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나 고양이조차도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상냥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 싫은 사람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은 저항이 있겠지만, 능숙해지면 진정한 자비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애의 명상은 자신이 행복하게 되기 위한 치료법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맑고 깨끗한 자애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특히 애정, 집착, 성냄)을 기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상의 정해진 방식을 지키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든 이들이 도반이라는 마음을 길렀으면 합니다.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하십시오.
2.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연민(karuņā, 까루나-, 悲)을 실천합니다.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싶다고 하는 마음을 연민심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자신의 아이가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했다고 하면, 어머니는 어떤 기분이 들까요? 순수하게, 그리고 재빨리 그 아이를 도와주려고 생각하겠지요. 그것이 까루나의 기분(느낌)입니다. 또한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면, 어머니는 낙담만 하고 있지만은 않고,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병원까지 달려갑니다. 설혹 병원의 문이 닫혀 있어도 굴하지 않고 다른 곳을 찾아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처럼 진심으로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은 매우 밝고 건강하고 활발한 상태가 됩니다. 상대를 도와주고선 “아! 지쳤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았어! 잘했어!”라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합니다.
까루나는 “아이고 불쌍해 …” 라고 감정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이 되면 이성이 없어지고, 연민심에 빠져버려서, 지혜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족을 그대로 두면 밥도 못 먹고 불쌍할 것 같다” 등의 감정적인 이유로 수행을 그만두거나 하는 것은 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희생적인 삶의 방법만을 택하지는 않습니다. 서로 좋은 길을 찾습니다. 감정에 빠지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불교에서는 감정을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바꾸기를 권장합니다. 자비는 지혜가 발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며, 자아(自我)를 없애는 방향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까루나를 기르는 실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나의 친한 사람들이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이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이라고 충만되게
까루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까루나는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사람이 기르기 쉬운 마음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뒷전으로 미루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좋은 약이 됩니다.
따라서 밝고 활발하게 행동하고 싶다면 까루나를 기르면 좋습니다. 까루나를 실천하면 활발하게 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충실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이라고 싫은 사람에 대해서도 명상합니다.
이것은 실생활 중에서도 가능한 한 실천해 보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쪽은 가만히 있는데 왠지 심술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에 대하서 화를 내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이 사람도 행복하기를!”이라고 하면서 충만되게 까루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도와주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싫은 사람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을 기르면 강한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또 그때는 담보(대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기에, 순수한 자비를 기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싫은 사람이 동료가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 화내지 않고, 반대로 걱정해 주는 마음, 상냥한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무지한 바보에 대하여 공격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화내는 사람을 향하여 화내는 사람은 더 나쁘다” 그러한 생각이 아니면 이 세상은 행복하게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싶으면, 미워할 것이 아니라 걱정을 해 줍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자신의 적에 대해서도 연민심을 실천할 것을 말합니다.
어떤 악인이라도 생명이기 때문에 행복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 나쁠까요? 현자는 그처럼 생각하므로 ‘적’ 이 없는 것입니다.
3.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평정(upekkhā, 우뻭카-, 捨)을 실천합니다.
차별이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우뻭카'라고 합니다.
Upa 라는 접두어는 '침착하게, 포괄적으로'라는 의미가 있는데, 거기에 ikkhati 라는 '보다, 관찰하다'가 합쳐진 동사 upekkhati의 명사형이 upekkha 이므로, '침착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 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편견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 의미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뻭카는 지혜와 가깝습니다. '우뻭카가 자란다'와 '지혜가 자란다'는 동의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는 본 것, 들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뻭카의 중국 번역어인 ‘捨(버릴 사)’ 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취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뻭카의 사람은 주관적인 유신견이 사라진 넓은 마음으로 ‘생명은 여러 가지의 형태를 취하여 각각 살아간다. 그러나 모두 똑같은 생명이다. 나도 단지 그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는 동물이나 벌레, 물고기, 천상이나 지옥으로 수없이 반복하며 윤회를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훌륭하다, 누가 훌륭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이해하면 평등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어, 구체적이고 엄밀하게 생명은 평등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바르게 이해한 후, 우뻭카를 기르는 실천방법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빛이 나타나기를!’ 입니다. 이 말을 자기 자신과 친한 사람들,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차례차례로 충만되게 우뻭카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은 마음의 더러움을 지워 없애고, 마음의 작은 그릇을 부수고 무량한 크기의 밝은 마음 상태를 만드는 수행입니다.
우뻭카는 멧따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뻭카는 멧따보다도 굉장히 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난폭한 자가 수행처에서 시끄럽게 굴고 있다고 합시다.
멧따의 자애가 있다고 하면 “시끄럽습니다” 라고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난폭한 자도 부드러운 자애의 말에 격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뻭카를 지닌 사람은 조용히 “모두 제각기 자신의 삶의 태도를 하고 있기에 좋지 않은가!” 라는 느낌으로 어떤 일도 없이 참착하게 그 난폭한 자를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그 사람을 평정하게 응시합니다.
이것은 무관심과는 반대입니다. 무관심은 무지한 것이며, 침착성은 지혜입니다. 침착성은 사물을 이해함으로써 일어납니다.
누구에 대하여도 조용하고 침착하며 평온한 사람이 있으면, 주변의 사람들도 더불어 고요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생명은 평등하다고 이해하여 다른 생명의 권리·인격을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성을 가지고, 항상 침착하며 평온하게 있는 것, 어떤 문제가 있어도 저 녀석이 나쁘기에 그 범인을 찾아 그 사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이 침착하면 초조함도 사라지고 다른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됩니다.
4.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것을 사고의 대상(visaya)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어?」 라는 느낌으로 놓아버립니다.
우리는 상대의 일을 계속 생각해서 괴로워합니다. 없었던 것으로 하면 상당히 마음은 편합니다. 상대의 일을 생각해 화내는 것은 독침을 감춘 것과 같은 것으로 계속 끝없이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상대를 바로잡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신 자신의 마음의 평온함을 얻는 것입니다. 자신은 다른 일에 집중합니다. 수행자는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면 초조함이나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5.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각 생명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는 것(kammassakatā)이라는 법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렵지만 결정적으로 효력있는 방법입니다. 業(업)은 개인의 재산입니다. 업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업으로 내가 이렇게 되었다」 라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개개의 업은 개별적입니다. 교차하지 않고 공유할 수 없습니다.
업은 자신의 것이라고 아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kammassakatā sammādiṭṭhi).
자신의 행위의 결과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는 자기책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나쁜 성격이나 태도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지은 업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업은 기능입니다. 행위와 결과의 덩어리입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각의 개인의 업은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까 다투면서 화를 내어 나의 나쁜 업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관찰합니다.
「그 사람은 그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다. 자신이 업의 상속자이다.
업으로부터 태어났다. 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업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이 저지르는 행위의 결과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본인이 받는다.」
이러한 업의 법칙을 올바르게 이해해서 냉정하고 침착해야 합니다. 즉 좋은 일을 만나도, 싫은 일을 만나도,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다툼은 사라집니다.
무엇을 인식하고 판단하여 상대방과 다투기 전에 담담하게 알아차림을 하면 적어도 불선업은 만들지 않습니다. 동시에 날카로운 판단능력과 지혜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알아차려만 가십시오. 그것만큼 우수한 방법은 없습니다.
또 다른 경전에는 사리뿟따 존자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양합니다.
1) 몸의 행위는 나쁘지만, 말할 때는 훌륭한 사람
2) 행위는 좋지만, 말은 더러운 사람
3) 행동도 말도 나쁘지만, 이따금 마음을 열고, 이따금 좋은 생각도 하는 사람
4) 행동도 말도 나쁘고, 조금도 마음을 열지 않고, 조금도 좋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5) 행위도 말도 좋고, 마음을 열고, 좋은 생각도 하는 사람
「 … 이런 다섯 종류의 사람들에게 화내는 것은 모두 성립될 수 없습니다.
화낸 사람이 바보스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항상 다툼이 있는 법이지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두 자신이 하기 나름입니다. 自我(자아) 중심의 삶의 방법을 고치는 것으로 다툼은 줄고 인간관계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호전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다섯 가지 처방전을 다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 꾸준히 행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바뀝니다. 분명히 딴 사람이 됩니다. 온화해지고, 항상 기쁨의 물결로 채워진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종교를 뛰어넘는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 > 법문 교재(프린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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