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탈은 존재에 대한 거대한 혁명이다.(20160318. 대구)
비록 부처님의 제자라도 해탈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불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붓다의 수행법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목표로 해서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교도는 좋은 일이기에, 최고의 선행이기에, 덕을 쌓을 수 있기에, 해탈할 수 있기에 실천합니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목적을 잘 모릅니다.
불교는 실천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는 가르침이라고 부처님이 확언하셨습니다. 그것도 sandiṭṭhiko(산딧티꼬-), 눈앞에 결과가 나옵니다. akāliko(아깔리꼬-), 시기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즉 결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뿐만아니라, 어떤 시대라도 실천하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오는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사후, 천국」이야기입니다. 불교는 「지금·여기서 깨달음에 이르는」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명상을 실천하고 있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를 내는 사람들은 적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해탈하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진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지한 의욕은 그렇게 간단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지한 의욕은 지자의 특권입니다.
부처님은 「지혜에 의해 집착을 버려 해탈에 이른다.」라고 명확하게 말하였으므로 지혜와 해탈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완성하면 깨달음에 이르지만, 지혜가 깨달음은 아닙니다. 지혜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 실천으로 현상을 관찰하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또 하나는 불교를 잘 배우고 고찰하여 자신의 인생과 대조하고, 또한 타인의 삶의 방법에도 대조해서 붓다가 말한 것이 진리임에 틀림없다고 납득합니다. 그것도 지혜입니다. 납득한 지자가 이론은 완벽하니까 실천해 보자라고 생각하여 수행을 시작하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를 냅니다.
그런데 수행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법이 진리다고 하는 납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도에게는 불법이 진리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자신만만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성과 지혜에 비하면 조금 격이 떨어집니다. 불교를 배우고 이해해서 납득하고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정한 의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어려움을 부처님께서는 비유로서 잘 설명하셨습니다.
모든 속박을 끊어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를 죽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지만 해탈에 이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의 반항적인 무지의 힘을 부처님은 알기 쉽게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어머니」란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낳았다고 해서 아이가 어머니의 것은 아닙니다. 개개인은 자신의 힘으로 윤회하고 있습니다. 비록 모태에 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머니가 자각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 예약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비집고 들어와 생겨난 사건일 뿐입니다. 태어날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새로운 생을 만든 것입니다. 개개의 생명이 자신의 행위로서 자신의 책임으로 인해 윤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어머니는 지금·여기서 우리를 낳아 길러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를 낳게 하는· 탄생시키는 에너지가 진정한 어머니인 것입니다.
Taṇhā janeti purisaṁ(딴하- 자네-띠 뿌리상)이라고 상응부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갈애가 생명을 낳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갈애입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살아도 아직 부족합니다. 이것이 갈애입니다. 그것이 사후, 새로운 생을 만듭니다.
태어나고 나서도 어머니가 우리를 기릅니다. 진정한 어머니(갈애)도 낳고 나서 계속 성장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살아있음을 좋아합니다. 죽을 위험을 피합니다. 격렬한 집착으로 죽음과 싸우며 살아나갑니다.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삶의 모든 행위는 갈애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죽는 순간에조차도 「죽으면 안 돼!」라고 지지합니다. 이 갈애가 있는 한 생명은 한없이 윤회합니다. 사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윤회도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으로부터 괴로움으로 회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갈애라고 하는 어머니가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살게 합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르러 궁극의 평안을 경험하고 싶다면 갈애라고 하는 어머니를 근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에 부처님은 「아버지를 죽인다.」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붓다의 정의에서 아버지란 태어난 생명을 기르는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안에서 아이를 기르지만 아버지는 겉에서,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만들어 줍니다. 사람은 직함으로 사는 가치를 표현합니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대학생, 회사원, 사장의 아들 등으로 자신을 표현해서 그 직함에 맞추어 삽니다. 그것이 「자아의식」인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만(māna(마-나) 慢)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아버지는 귀여워해 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아의식인 것입니다. 마-나인 것입니다. 마나가 있기 때문에 생에 집착해 악착같이 살아나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마나를 근절하지 않으면 해탈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실제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보다도 훨씬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두 명의 왕을 죽인다.」라고 하셨습니다.
두 명의 왕이란 2개의 정부라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국민이 2개의 정부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나라를 나오면 다음 나라의 정부가 관리합니다. 정부에 의해 관리되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부 마음대로입니다. 정부는 국민이 만드는 것이고 국민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정부의 하라는 대로 국민이 사는 형편이 됩니다. 한사람의 국민에게는 정부에 대해서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올바르게 말하면 자신이 만든 정부가 자신을 노예로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두 명의 왕(2개의 정부)」는 나라가 아닙니다. 죽는 것은 싫어하는 인간이 이 불안감과 공포감을 감추기 위해서 이것저것 개념을 만듭니다. 그것이 2종류입니다. 「생명은 영원하다」라고 하는 상주론과 「생명은 죽음으로 끝난다」라고 하는 단멸론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 2개의 론에 의해 억제당하고 있습니다. 사고의 자유가 없습니다.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이「왕을 죽인다」란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명의 왕 다음에 sotthiya(솟티야) 라고 하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습니다. Sotthiya(솟티야)란 주문을 독송하거나 신을 찬탄하거나 의례를 행하거나 하는 바라문입니다. 그래서 두 명의 바라문 왕을 죽인다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이 경우는 여러 가지 종교철학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징세 공무원이 나라를 파괴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개개인이 하나의 나라입니다. 안·이·비·설·신·의로부터 정보가 들어와 그것을 인식하며 삽니다. 한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나라입니다. 징세 공무원이란 보는 것, 듣는 것, 등에 기쁨과 애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근에 대한 애착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파괴하지 않는 한 해탈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해탈에 이르는 것은 어정쩡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에 도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Veyyaggha pañcamaṁ hantvā(웨이약가 빤짜망 한뜨와-)라고 하셨습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사는 다섯 장소를 파괴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수행해도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나운 호랑이에게 습격당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수행을 멈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위험한 5가지가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불교 용어로 「5장애」라고 합니다. 마음이 성장하지 않도록 5개의 두껍고 무거운 「누름돌」에 억제당하고 있습니다. 약한 마음으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⓵. 오욕에 대한 미련입니다. ⓶. 분노·싫은 기분입니다. ⓷. 들뜸과 후회입니다. ⓸. 혼침과 수면입니다. ⓹. 의심입니다.
먼 옛날부터 우리는 갈애가 조종하는 대로 윤회하여 왔습니다. 지금도 갈애에 의해 제압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함없다고 생각하는 자아의식이 있습니다.
①. Saddhā(믿음) ②. Ruci(경향, 기호) ③. Anussavo(전통) ④. ākāra parivitakko(숙고·사고를 만드는 것) ⑤. Diṭṭhi nijjhānakkhanti(자신의 의견·견해와 맞는·납득)이 바탕이 되어 온갖 견해에 얽매여 있습니다.
⓵. 오욕에 대한 미련. ⓶. 분노·싫은 기분. ⓷. 들뜸과 후회. ⓸. 혼침과 수면. ⓹. 의심에 습격당해 힘들어합니다.
먼 옛날부터 익숙해져 온 삶의 방법을 이번 생에서 완전하게 끊겠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정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입니다. 「불법이 진리 그 자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 이해한다면 이 무리한 일,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해 보이는 해탈에 이르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해탈하고 싶다」는 의욕은 진심이 아닙니다.
• 마음의 갈등은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는」일보다 격렬합니다.
• 해탈은 나라를 통째로 파괴할 정도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 지혜가 있으면 갈등 없이 해탈에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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