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자의 마음 (20160122)
마음에 어떤 고민이 있거나 불안이 있거나 하면 우리는 위빳사나 명상이라도 하면 밝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몸에 생긴 병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을 때도 명상이라도 하면 빨리 건강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요컨대 「명상」을 하는 것으로 「행복한 인생」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목적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이라고 하는 모든 것의 행동은 마음의 사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밝은 인생을 위해서 명상을 하고,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고, 사고를 명확한 상태로 하는 것이 지름길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명상이라고 하는 행위는 항상 괴로움만 있는 특별한 인간만의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인간에게도 필요한 행동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알려져있는 여러 가지 명상법 중에서도 위빳사나 명상은 특히 간단하게 사람의 마음을 직시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효력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가르치신 위빳사나라고 하는 실천법이 사람의 일상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카운셀링 방법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괴로움을 없애는 길」이라고 말했으므로 일상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그저 「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덤」을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위빳사나 본래의 목적을 이해하여 존재의 괴로움을 모두 없애서 궁극적인 지혜를 맛보려고 노력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완성하면 「사는 것이라고 하는 「모험」도 끝납니다.」 평상시의 우리는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관념에 계속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모르지만, 이 강박관념에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불안이 있어서 한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산다고 하는 사막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사막을 넘을 때까지는 마음 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현재의 인생에 대해서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이해할 수 있지만, 무서운 것은 윤회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끝없이 생사를 반복합니다. 윤회가 만약 사실이라면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것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어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은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산다고 하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넘지 않으면…과 필사적으로 살기 위한 싸움을 계속합니다. 만약 현세라고 하는 사막을 넘었지만 또 다음 세상이라고 하는 사막이 있다면 대단한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산다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여 모험의 여행을 끝냅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의무감, 사명감, 책임감, 개인의 의욕, 희망 등으로 항상 불타고 있어서 항상 속박되어 있습니다. 개인, 일, 가족, 사회, 그러한 여러 가지 속박으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속박」은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위빳사나의 성취자는 마음에 어떠한 속박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맛보고 있습니다. 속박이 있는 사람은 사는 것이 즐거운 것이어도, 괴로운 것이어도, 어쨌든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체험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이 생활을 하지만, 어떤 스트레스도 없는 삶의 방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우리 안에서 길러지는 새와 야생에서 살아가는 새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고민, 괴로움, 불안, 불만 등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위빳사나를 통해 진리를 체험한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괴로움이 전혀 없습니다. 이따금 병이 들어 몸의 아픔이나 부자유는 있을지라도 마음의 괴로움은 없습니다.
마음에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은 4가지가 있습니다.
① 불필요한 욕구
② 불필요한 분노
③ 습관, 고행, 초자연적인 일에 대한 동경 등에 사로잡히는 것
④ 자신의 견해에 단단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것으로 마음의 고민과 속박을 일으키는 원인을 풀어버리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모든 괴로움의 불길이 사라집니다. 덤으로 위빳사나를 하는 것보다는 위빳사나의 진정한 목적인 해탈을 목표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실천을 계속하면 마음은 확실히 맑고 깨끗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해탈자의 마음 상태를 설명하는 경우 욕구가 사라진 마음, 무집착의 마음,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 등의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존재, 윤회, 생명, 삶 등의 말로 생각하고 있는 생의 세계는
불만족(Dukkha)이며 그 둑카로부터 탈출한 마음상태가 「해탈」입니다.
그래서 「해탈」은 본래 밝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모든 것을 우선 말에 의해 이해하기 때문에 그 말의 벽을 넘을 수 없는 우리에게 있어 해탈이라는 것을 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고 말로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해 봅시다.
수행은 sati(알아차림)의 실천이기 때문에, 수행의 완성자는 sati의 완성자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Sati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sati의 실천을 모든 것을 확인하며 천천히 행동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보통 우리는 몹시 서둘러 행동하지만, Sati 실천의 경우는 반대로 극히 슬로 모션으로 행동합니다. 이 방법을 소개하면 「이렇게 슬로 모션으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라는 불평이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그런데도 그렇게 하세요라고 권합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상시의 행동을 잘 보십시오.
서두르는 것, 당황하는 것, 걱정하는 것, 어떻게 하지, 잘될까라고 고민하거나 걱정하거나 하는 것,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신이 없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거나 하는 것으로 상당한 시간이 쓸데없게 사라져 갑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민하고 망상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게 되고 있습니다. 불교적 입장으로 보면 여러분들은 일이 빠른 것도 바쁜 것도 아닌, 고민하거나 망상하거나 하는 것으로 시간을 쓸데없이 사용하고 있다고 진단내립니다. 그 때문에 행동할 시간이 없어져 버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로 모션의 실천을 다짜고짜로 권합니다.
분명히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면 어떤 행동에도 꽤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면 서두르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입니다. 서두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고민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 시간의 낭비가 없어집니다. 그 말은 행동을 슬로 모션으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평상시의 행동보다 효율적으로 빠르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바쁠 것 없이 한가로이 행동해도 바쁜 사람보다 효율적이라면 불평은 없을 것입니다.
수행을 완성한 아라한의 경우는 어떨까요. 아라한은 항상 행동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낭비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을까를 생각하거나 고민하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목적 달성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거나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조건을 배제하거나 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달성하면 감정적으로 들뜨거나, 실패하면 낙담합니다. 게다가 확실히 스트레스도 쌓입니다. 일반적으로 확실한 목적만 있으면 순조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목적이 있으면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아라한의 행동의 경우는 자아에 근거한 목적은 없습니다. 그 순간순간 실천할 뿐입니다. 스트레스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 완성자의 행동은 세상 누구의 행동보다 효율적으로 빠릅니다. 게으름 피우거나 쉬거나 또 고민하거나 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슬로 모션의 실천은 세상의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방해하는 정신적인 상태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집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있는 곳, 자신이 있을 곳입니다. 무엇 때문에 노력하고 행위하는가 하면 자신의 집, 가족, 회사나 조직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인해 우리는 힘껏 노력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것에도 또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행동의 중심이 되는 집이라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따라 행동이 제한됩니다. 회사, 가족, 자신의 입장 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으면 그것을 넘어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라한은 이 정신적으로 근거하는 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완전하게 자유롭습니다. 돌아갈 집은 없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디에도 집인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라도, 어떤 경우라도, 강력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근거가 없으면 우선 행동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행동을 방해하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 아래에서 행동할 수 있게 될 뿐입니다.
sati를 완성한 아라한의 경우는 행동의 방해가 되는 고민이나 괴로움도 없고, 행동에 의한 스트레스도 없고, 행동을 제한하는 근거(집)도 없기 때문에 최고로 자유로운 행동 인간이 됩니다. 그 행동도 결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행복을 위해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멈추는 일 없이 계속됩니다.
사람은 모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모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모으고 저장해 두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만 모으는 것을 좋아해서 까닭 없이 모아둔다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사람이 어디엔가 살고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것이 쌓여 버립니다. 우리의 주거라고 하는 것은 필요한 것도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도 무분별하게 모아두는 쓰레기의 수집소입니다. 소중하다고 생각해 집에 여러 가지 것으로 가득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과 사용했던 적이 전혀 없는 것과 앞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것 등으로 나누어 보면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득 모아두고 불필요하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아두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값비싼 것, 추억의 것,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 버리기 아까운 것, 모두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 이와 같은 이유로 모아둡니다. 모아두는 것은 물건만이 아닙니다. 많은 친구나 아는 사람을 만들거나 하는 일도 모아두는 것입니다.
공부하여 지식과 능력도 모아둡니다.
명예와 권력도 소중하게 모아두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공덕도 모아두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모아두는 것에 목숨 걸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개미가 식량을 모아두고, 꿀벌이 밀을 모아두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아두는 일을 그만두면 개미나 꿀벌도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도 정말로 그럴까요? 모아두지 않아도 괜찮은데 모아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는 정신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라도 불안에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불안한 존재입니다.
물건을 모아두는 습관은 불안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돈을 모아둔다든가, 직업이 불안하기 때문에 확실히 공부해 둔다든가, 사는 목적이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취미를 가지고 시시한 것을 모아 인생을 즐기려고 합니다. 적어도 모아두는 것은 불안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외국여행갈 때 김치를 가지고 갑니까? 그것도 무언가 먹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불안이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것은 뭐든지 변화해 갑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뭐든지 변합니다. 지금 돈이 있어도 그것은 없어집니다. 지금 건강해도 나중에는 그것을 잃습니다. 지금 일이 잘되고 있어도 트러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 변화가 싫다고 해도 변화 자체가 멈추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순간에 불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모아두어 그 변화를 눌러 두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고 있는 사실은 아무리 모아두어도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아두어도 모아두어도 결국은 쓸데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아두는 습관은 「무상」이라고 하는 법칙에 반항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외치는 소리입니다.
마음은 「무상」을 거슬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상」을 거슬리려 아무리 노력해도 사물의 변화를 멈출 수 없습니다. 다만 녹초가 되어 한층 더 불안이 일어날 뿐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순간순간 변화해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가기 때문에 좋아라 손에 넣어 집착해 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무엇을 모아두는 마음이 사라져 갑니다.
모아두어도 모아둔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나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좋다」라고 하는 일도 그때의 자신의 정신 상태와 주위환경 등에 의하는 것입니다. 그 때 조건을 바꾸면 「좋다」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장미를 다른 꽃과 함께 아름답게 가꾸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적당한 장소, 적당한 햇빛 속에 두면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 장미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어두운 곳에 둔다고 합시다. 그러면 방금 전의 그 아름다움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아름답다, 소중하다, 가치가 있다, 도움이 된다, 등의 가치관은 그 순간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나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도 그 순간만 나타나는 환상이며, 가지고 가야 할, 지켜야 할, 모아두어야 할, 변화하지 않는 가치는 하나도 없습니다. 배고플 땐 밥에 가치가 있고, 목이 마르면 물이 가치가 있고, 잠옷의 가치는 잘 때 있습니다.
그 환경이 바뀌면 가치가 없습니다. 잠옷이 값비싼 비단이라도 회사에는 입고 갈 수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하면, 모든 것은 「둑카」이며 실체로서 변화하지 않는 특색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것에도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 것이 안전한 상태, 불안이 없는 상태입니다. 철저하게 무상인 것, 고통인 것, 변화하는 특성, 가치가 없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불교 실천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한 아라한은 아무것도 모아두지 않습니다. 마음에 아무 불안도 없기 때문입니다. 식사마저도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양만으로 한정합니다. 항상 모든 것을 무상인 상태에 눈을 뜨고 생활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 자신의 발자국을 하늘에 남기지 않는 것 같이 그런 삶의 방법이 아라한의 삶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우리 보통 인간의 삶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무엇을 모아두어 인간이 사는 장소는 쓰레기 수취장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있었다고 하는 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책을 쓰거나 사진 혹은 상을 만들거나 이름을 조각하거나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는 묘만이라도 만들어 둡니다.
사람은 매우 바쁩니다. 시계라고 하는 신에게 완전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시계처럼 1초도 고민할 틈 없이 살아간다면 불필요한 일을 생각하고 고민할 틈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있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당신은 한가합니까?」라고 묻고 싶어집니다. 정말로 시간이 없으면 고민할 틈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한가한 사람의 경우 한가하고 지루해서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면 알기 쉽습니다.
지루해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하는 것이 없든지 혹은 무언가를 할 능력이 없는, 의지가 없는,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귀찮은 것은 그만큼 바쁘지 않은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든지 혹은 일을 완수하는 능력이 없든지, 자신의 상황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이것도 하지 않고 저것도 하지 않으면서 고민하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고민거리가 됩니다. 이제 정리해 보면, 사람은 바쁘지 않으면서 자신을 계속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최대의 문제는 이 자기모순입니다.
바쁜 사람이든 한가한 사람이든 어느 쪽이든 침착성이 없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침착성이 없으면 초조함이 나타나 한층 더 자신이 괴로워집니다. 마음이 괴로워 몸까지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인관계도 나빠지고 타인에게까지 폐를 끼치거나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의 망상으로부터 태어나는 괴로움, 고민을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우선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이룬 성자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특색은 철저하게 침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사람밖에 모르는 것이지만, 「이분은 완전하게 침착하다」라고 하는 것만은 누구라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주한 세상, 항상 모든 문제의 그물에 걸리는 생활 속에서 잘 그렇게 침착해 있을 수 있는 성자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성자의 마음속에는 적극적인 욕구의 에너지도, 부정적인 분노의 에너지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마음에 욕구가 있으면 여러 가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집니다. 분노가 있을 때는 싫은 것을 부수거나 부정하고 싶어집니다. 양자 모두 자주 일어나지만 마음이 눈치 챌 사이도 없이 감정에 취해 버려서 무책임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자는 모든 것을 「지금의 순간」으로 한정합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기에 욕구나 분노의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에 망상이 없기 때문에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대로 자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지금 순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만 확실히 완전하게 실천하기에 과거의 망상에 방해받아 혼란할 것도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망상에도 행동을 침범당하는 일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은 목적이 있어서 행동하기 때문에 지금 순간의 행동은 앞으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준비와 같은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집중력은 지금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장래의 목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장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므로 지금 살아있다는 실감을 좀처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지금 순간에 하고 있는 것은 그다지 소중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인생은 어중간한 것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괴로움을 낳는 원인입니다. 장래 실현되어야 할 목적이 있으니 침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자의 마음에는 「사는 목적」이라고 하는 괴로움의 원인은 없습니다. 지금 순간만을 충실히 살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완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욕구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에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망상입니다.
에고이스트는 행동하기 전도, 행동할 때도, 뭐든지 비교해 봅니다. 좋은가 나쁜가, 손해인가 이득인가, 모두가 하고 있는가 하지 않은가, 칭찬받을 수 있을까 비난받을까 등, 끝이 없게 됩니다.
마음의 이 기능을 불교에서는 māna(아만)라고 합니다. 에고를 버리면 māna는 사라집니다. 인간의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하면 모든 것이 mâna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나 사람이 신경이 쓰이는 것, 자신이 없어지는 것, 자신감이 충만하게 되는 것, 과거의 삶의 방법을 고민하는 것, 장래가 신경 쓰이는 것 등의 모든 것이 자신이라고 하는 에고를 비교하는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자는 진리를 체험하므로 에고라고 하는 망상 개념은 사라져 버립니다. 마음은 자유롭고 활발합니다. 고민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침착합니다. 우리와 같은 사회에 살아 있기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이나 친한 사람이 돌아가시는 것, 천재지변을 당하는 것, 타인으로부터 비방과 중상도 받지만 에고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일로 고민할 것은 없습니다. 대지와 같고 산과 같이 침착합니다. 마음이 탁해지지 않고 거대한 호수와 같습니다.
신구의의 행위는 터무니없게 침착해 평안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자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혼란한 사람도 성자를 보는 것만으로 안정됩니다. 이 혼란한 사회에 필요한 것은 혼자라도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의 존재입니다. 일반적 사람이 성자를 발견하는 방법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안정하게 할 정도의 인화성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마을이든, 숲이든, 산골짝이든, 산등성이든, 성자가 사는 곳은 언제나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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