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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빡낄레사(upakkilesa) - 마음의 오염원 세탁 (20140404)

담마마-마까 2022. 3. 13. 09:00

https://youtu.be/pdeFizX2nDY

* 마음의 오염원(upakkilesa) 세탁 (20140404)

 

오늘 주제는 '우빡낄레사(upakkilesa)' 라고 합니다.

낄레사(kilesa)-번뇌, 우빠-낄레사(upa-kilesa) - 번뇌에 휩싸여있다, 번뇌에 오염되어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번뇌에 휩싸여있고 오염되어 있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 경전에 설명해놓은 세 가지 방법을 얘기하겠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하면 '아디찟따(adhicitta)'라고 합니다.

마음을 훈련시켜가지고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그걸 아디찟따 아홉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가장 대표적인 게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악한 것들을 짓지 않도록 자꾸 노력하는 것. 가장 하기 쉽죠? 그게 세 가지 부분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 된다 싶으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하나씩 잡아나갑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나는 것들, 그다음에 악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 그다음에 남을 해꼬지 하고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 그러니까 마음에서 일단 일어나야 그다음에 말하고 행동하는 거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잡는 것들을 중점적으로 합니다. 마음에서 아예 이것들이 못 일어나도록 할 것 같으면 아까 첫 번째 말한 세 가지보다는 훨씬 뛰어난 방법이 됩니다.

 

그다음에 아디찟따 세 가지는 뭐냐하면, 참 잘 안 끊어지는 것들이 뭐냐하면 자기 가족이나 친척들에 대한 생각들, 그게 참 잘 안 끊어집니다. 그래도 어쨌든 그것도 끊어내야 되는 것들이라.

그다음에 하나가 뭐냐 하면 지금 우리나라가 만약에 불평등한 것이 있다고 그러면 불평등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들, 이런 나라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그래서 보통 보면 사회운동을 하고 이런 것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들, 좋게 평가하기도 하고 나쁘게 평가하기도 하고, 그것에 휩싸이는 것.

이 세 가지를 끊어내면 사실은 저 아디찟따 라고 하는 것이 완성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앞에 세 가지, 세 가지는 어느 정도 할 수가 있는데, 마지막 뒤에 세 가지는 참 하기 힘듭니다. 그래도 강제적으로라도 시킵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같은 경우에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일체 관여 못하게끔 합니다. 그다음에 자기 가족들이나 이런 것들 할 일들은 해야 되겠지만 그것에 연연해가지고 사회에서 하듯이 그 할 일들을 하고 이런 것들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자기 출가한 스님들의 평판에 대해서 연연해하고 하는 이런 것들을 끊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게 보통 '우빡낄레사' 마음이 오염되었을 때 그것을 세탁하는 가장 낮은 단계의 수행법 중에 하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도 참 힘들죠? 그런데 어떡하나? 그거라도 먼저 해야 되는데.

 

그다음에 두 번째 하는 것이 호흡. '아나빠나 사띠 가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호흡의 종류를 열여덟 가지로 분류해서 그것에 대해서 낱낱이 알도록 하는 것.

호흡이 길면 길다고 알고 짧으면 짧다고 분명히 알고, 그리고 호흡이 거칠면 거칠다고 알고, 호흡을 전체적으로 시작부터 해서 끝나는 것까지 알면 안다고 하고 멈춤이 있으면 멈춤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고, 이런 식으로 호흡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려고 하는 것.

 

오히려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게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이게 두 번째에 들어가 있을까? 우빡낄레사의 두 번째의 방법으로 분류하는 것은 첫 번째의 방법이 안 될 거 같으면 두 번째의 방법으로 호흡을 아무리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시 또 제자리로 돌아가진다는 거라. 다시 제자리로.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부처님이 경책을 한 것이 있어요.

삼매 열심히 잘 닦고 삼매 다섯 가지를 자재롭게 할 수 있는 상태까지 이른 스님이 있었어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삼매에 들고 원하는 만큼 들고 또 언제 삼매에서 깨어날지 하는 것도 알고 어느 정도의 깊이로 들어갈지 하는 것도 알고 그런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까지 돼있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은 평상시 때는 만날 스님들하고 다투고 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 합니다.

"위험한 것으로부터 피해서 도망간 사람이 맹수 호랑이 굴에 들어간 거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위험한 것을 피해서 있을 것 같으면 오히려 호랑이 굴에서 멀리 벗어나야 되는데 오히려 호랑이 굴에 들어가 있는 거와 같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호흡의 열여덟 가지를 분명하게 안다고 하더라도 말과 마음과 행동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삼매에 들었어도 고요하고 평온하기는 하지만 그것에서 깨어나고 나면 일상생활에 돌아왔으면 일상생활에서 삼매에 들 수는 없는 거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이게 잘 조절되고 몸과 말과 마음에 대해서 조절하는 법들도 알고 그것이 악한 것이 안 되도록 할 수도 있고, 또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한 생각들 악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훈련하고, 그러다가 보면 내가 해선 안 될 것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아예 안 하고, 뭐 정신적인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근심 걱정 이런 것들은 하지 않고 해야 될 일만 할 수 있는 것들을 길들여놔야만이 일상생활에서 깊은 삼매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삼매와 근접한 것들을 유지해나가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첫 번째로는 아디찟따가 들어가 있고, 두 번째가 호흡에 대한 관찰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빡낄레사를 제거하는 세 번째 방법으로는 '위빳사나 우빡낄레사'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관찰을 해서 그것을 자기가 체험하도록 하라. 그러면은 번뇌에 오염될 수 있는 근원을 갖다가 끊어버린다 하는 거라. 번뇌가 일어날 수가 없는 거라. 즉각즉각 알아차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들, 일어나는 것들은 무상·고·무아의 범주에 들어있거든. 그래서 즉시 알아차리기 때문에 적어도 그속에 빠져 헤매지는 않는다는 거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고 일상생활할 때도 마찬가지고 똑같이 그렇게 된다는 거라.

 

이게 인제 보통 우빡낄레사를 제거하는 방법 세 가지로써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 할라다 보면 이생에서 다른 거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거라. 그래서 보통 주석서에서는 이 방법을 다 설명을 하지 않고 지금부터 예를 드는 이것만 자꾸 개발하도록 한번 해봐라. 그러면 적어도 마음이 오염되는 것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오염되지 않게끔 자꾸 훈련할 수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뭐가 있을까?

(수행자 대답 : 출가) 출가? 다 출가해버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지게?

 

마음에 '기쁨'을 가지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어떤 일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아무리 나쁜 것들을 보더라도 기쁨이 자꾸 일어나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적어도 마음이 기뻐있는 상태에서는, 물론 그것이 감각적인 것으로 빠질 우려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 자꾸 기쁨을 일으키도록 하라는 거라. 뭘 봐도 항상 싱글벙글하고 자꾸 기뻐할 수 있도록 하라는 거라. 적어도 그거 하나만 해도 마음이 크게 오염되는 일은 막을 수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하나가 기쁨과 마찬가지로 '행복함'을 자꾸 가지도록 하라는 거라. 나는 행복하다. 다른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한 마음들을 자꾸 가지는 것, 적어도 이거 하나 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예방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조금 더 넘어가면 '우뻭카(upekkhā)'라 해서 평온한 마음들을 가지도록 하. 이거는 다 하라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이 중에 하나씩만 해도 마음이 오염되는 것으로부터 조금씩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방어를 할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아디목카(adhimokkha)'라 해서 뭔가 하나에 빠져들어서 집중하는 것. 사실은 사마디(samādhi)에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아디목카가 없으면 사마디에 들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마디와 아디목카의 차이는 사마디는 선한 영역에만 일어나는데 아디목카는 나쁜 쪽에도 빠져들어간다는 게 차이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빠져들어서 집중하는 것, 골똘하게 그것을 집중하는 힘이 없을 거 같으면 사마디 형성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키워도 괜찮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알아차림(sati)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 '우빳타나(upaṭṭhāna)' 마음이 현재에 있도록 자꾸 할 것. 다른 데로 벗어나면 자꾸 끄집어들어와서 현재에 있도록만 자꾸 할 것.

그다음에 '빡가하(paggaha)'라고 해서 뭐든지 친절하게 자꾸 할려고 하는 것들. 남에게 베풀어주고 친절하게 상냥하게 자꾸 할려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개발해도 괜찮고.

그다음에 '니깐띠(nikanti)'라 해가지고 원하는 것, 소망하는 것들, 나쁜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소망하는 것들이 자꾸 있도록 하는 것. 그 소망은 반드시 좋은데 쓰기 위한 것들이 돼야 되는 것이지 나쁘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든지 남을 해치기 위한 것들에 써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 그런 것들은 니깐띠에 든다고 얘길 안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고, 이런 것들 하나씩만 개발을 해나가도 적어도 마음이 오염되는 것은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앞에 둔 세 가지 방법을 순차적으로 쭉 다해나가기 힘들면 적어도 지금 얘기한 것 중에 하나 정도씩은 자기가 자꾸 익혀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기본적인 것들인데,

 

왜 그러면 마음의 오염이 위험한가 하는 것들을 얘기를 해볼게요.

우선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면 괴롭습니다. 남한테 화를 냈다 해서 자기 마음이 시원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고 나면 스트레스 풀린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자기 마음은 오히려 더 답답합니다. 더 힘듭니다. 자신이 괴로웁기 때문에 오염되지 않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뭐 자신만 괴롭습니까? 그런 오염된 마음들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도 다 괴롭지. 그러니까 서로에게 괴로운 일들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이렇게 나쁜 오염된 것들이 붙듯이 불교에도 똑같이 그렇게 나쁜 것들이 기생해서 살고 있습니다. 새해 되면 점 보러 가는 것들, 무슨 기도 있으면 무슨 기도하러 가는 것들, 사실은 이런 것들은 전부 불교에 기생해있는 형태들입니다.

참 재미있는 게 스리랑카에 가면 스리랑카 사원 벽 끝자락에 보면 조그만한 집을 하나 만든 게 있어요. 그 집에는 누가 사느냐면 우리말로 하면 무당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에 가서 탑이나 아니면 부처님한테 참배를 하고 아니면 수행을 하고 법문을 듣고 나서 나와가지고 그 집에 가가지고 점보는 경우들이 많아. 한국식하고 꼭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거 지금 당장 위로해주고 뭘 해준다 해가지고.

 

그런데 절 안에는 스님들이 거주를 하고 있지만 그 절 담벼락 밖에 그 조그만 집에는 스님들이 아니라 일반 재가인들, 재가자들 중에 어떤 능력있는 사람이 거기에 거주를 하는 거라. 만약에 거기에 스님이 거주를 했다고 할 거 같으면 아마 난리가 났을 거라. 만약에 스님이 거기에 거주를 해서 점봐주고 신수를 봐주고 기도를 해주고 이렇게 한다고 할 거 같으면 아마 옷 벗겨가지고 쫓겨났을 거라.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당장 필요한 것은 알지만 그것은 스님들이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못하게 하는 거라. 왜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없겠어? 스님들이. 그래도 못하는 거라.

 

근본적인 것과 그것에 기생해서 지금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 뭔지는 알지만 그것은 기생하는 것들이고, 근본적인 처방약이 안되기 때문에 이것은 못하게끔 하는 거라.

아마 그런 식으로 했을 거 같으면 한국에 있는 많은 스님들이 절 밖에 무당집 차려가지고 살아야 될 판일 거라. 사실은 그것이 불교를 갉아먹고 있는 거라. 기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불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거라. 마음에 오염이 되면 오히려 마음이 오염돼서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고 나쁜 행위들 나쁜 말들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게 자기 것이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뭐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게끔 되고, 조그만 것에도 욕심을 부리게끔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화내고 욕심부릴 일이 아닌데도 자기는 그렇게 하고 있는 거라. 이미 기생해서 그것이 커가지고 그것을 잡아먹어버리는 형태가 되는 거라. 불교에서도 이렇게 기생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지만 주객이 전도돼서는 안 되듯이 마음에도 오염되는 것들이 자신을 잡아먹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되는 거라.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것이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을까? 그걸 경전에서는 열여섯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꼭 열여섯 가지만 있겠습니까? 더 훨씬 많겠지. 대표적인 게 그정도 된다 하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여러분들이 가장 하기 쉬운 것, 9페이지 보면 '막카(makkha)'라고 나와있습니다. 5번부터 10번까지가 가장 하기가 쉬운 것들입니다. 적어도 수다원에 이를 것 같으면 5번부터 10번까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순차적으로는 1번부터 쭉 해나가는 것이 좋겠지만은, 실제적으로 여러분들이 실천하기는 5번부터 10번까지 먼저 하고, 그다음에 다시 2번 3번 4번 16번 먼저 하고, 그다음 나머지들을 하고 이런 식으로 해야 그게 맞습니다.

 

다섯 번째 '위선(makkha, 막카)' 악을 숨기는 것, 자신을 포장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드러내라는 거라.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쁘게 말했으면 내가 나쁘게 말했다고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재가불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대부분이 사찰에 가면 이렇게 기록하면서 사인을 하게 하는데, 사인을 하는데 그 위에 글자들이 뭐라고 돼있느냐면

"나는 진실되게 말하고 진실되게 행복하겠습니다." 그게 그 사찰에 들어가는 입문조건입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사인을 하게끔 합니다. 그 위에는 이름 성명 주소 이런 것들을 쭉 적고 마지막에는 그게 딱 감싸고 있습니다. 거기에 사인을 했다는 것은 어쨌든 그 사원에 들어가서는 절대 거짓말 안 하고 쉽게 말하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할 줄 아는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이 그 절에서는 하룻밤이라도 재워줄 수 있는 입방조건을 채워준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바르게 불교를 알고 또 마음을 깨끗하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우선 이거 먼저 해야됩니다. 막카(Makkha)! 괜히 위선 떨지 말고, 그리고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감추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잘한 거는 잘한 것이고 못한 거는 못한 것인데 그것들을 자꾸 감출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문제가 생겨난다는 거라. 그걸 먼저 하도록 하라는 거라.

그거 하기는 쉽죠? 물론 완전하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수다원에 이르러야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거는 하기가 참 쉬운 것에 속합니다.

 

그다음 여섯 번째 '빨라-(paḷāsa)' 다른 사람의 덕행을 경시하는 것.

자기 자신도 그렇게 감추지 않아야 되듯이, 다른 사람 잘한 것들은 잘했다고 할 줄 알아야 돼는 거라. 그거 뭐 별것 아니다 하고 생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부엌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노력해서 공양을 지어준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덕은 “아, 참 잘했다”고 고맙다고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인데 뭐 당연하듯이 그냥 받아먹습니다. 또는 당연하듯이 시켜먹습니다. 자기가 그냥 커피 타먹을 수 있는데도 “커피 한잔 줘” 하면서 시켜먹습니다.

 

그거는 뭐냐면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하는 것들, 그리고 그러면서 쌓은 공덕들에 대해서 생각하질 않는 거라. 내가 오히려 그사람들에 대해서 “아, 참 잘했습니다” 하는 마음이 들 것 같으면 가서 뭔가 도와줄려고 하는 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하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걸 안 한다는 거라.

부인이면 당연히 집에서 밥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가서 밥 그냥 먹게 되는 거고, 고맙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남편이 열심히 노력해서 월급을 갖다 주면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거라. 그게 얼마나 힘들게 해서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얼마나 존경받을 일이다 하는 것들을 생각을 안 한다는 거라.

 

남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지니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런 마음이 자꾸 우러날 때는 자기가 할 것들은 자신이 더 자꾸 할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이것도 하기 쉽죠? 어려워요?

그래도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거는 뭐냐면 한번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계속적으로 해가지고 자신에게 물들듯이 옷에 염색이 돼서 물들듯이 해서 완전하게 정착되도록 해야 됩니다.

이 가사도 원래 이 색이었겠어요? 흰 천이지! 물이 들어놔놓으니까 이게 안 빠지는 거라. 처음에는 빠집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런데 1년을 입고 2년을 입어도 색은 조금씩 빠질지는 몰라도 이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완전하게 염색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조금 물들이다 말 것 같으면 그냥 좀 있으면 다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 '잇사-(issā)' 질투하는 것. 질투는 많이들 해봤을 거라.

다른 사람들이 잘한 것에 대해서 질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질투하지는 않죠? 잘한 것들에 대해서 참 잘했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 법회 마치고 나면 마지막에 뭐해요? "사-두! 사-두! 사-두!" 합니다. "잘했어! 좋았어!" 하는 얘깁니다. 잘했다는 거라.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한 것들에 대해서 참 잘했다 하고 칭찬해 주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잘한 것들은 잘했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아, 참 잘했습니다.하고 말할 줄 아는 것들.

 

그다음 여덟 번째가 인색함, '맛차리야(macchariya)' 라고 하는 것들.

아까는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고 칭찬할 줄 아는 것인데, 이번엔 자기가 그렇게 잘한다고 할 것 같으면 대부분 내세울려고 합니다. 내가 부엌에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자기들은 커피 하나도 자기가 타먹을 줄 모르고 시켜먹을려고 한다는 거라. 그 마음은 인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잘한 거는 잘한 거지. 잘한 건데 잘한 것에 따라서 저 사람도 그거에 대한 보답을 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거라.

그럴 필요없습니다. 다른 사람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내 일은 내가 하면 돼! 내가 공덕 쌓고 열심히 한 일에 대해서 그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오는데, 요걸 보답이 오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인색한 것이 먼저 일어나버리는 거라. 그럼 그 결과는 훨씬 후에 일어나버린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일어나겠지만 아니면 그것이 더 펴버리게 된다는 거라.

인색한 마음은 자기가 많이 가지고 자기가 잘한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걸 보답을 받을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라. 그리고 자기가 많이 가지고 잘한 것들에 대해서 같이 베풀어줄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부엌에서 내가 열심히 했다. 그럼 내가 공덕을 많이 지었단 말이라. 그러면 인색함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오늘 참 좋은 일 많이 하고 이런 공덕들을 쌓았으니까 이 공덕들이 저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똑같이 공덕이 나누어져서 그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는 거라.

대부분 제사를 지내든지 어떤 법회가 끝나고 나면 공덕회향 게송들을 합니다. 그것들이 같이 나눌려고 하는 마음들을 만들어주는 거라. 하루가 끝나고 나서 아니면 어떤 일이 끝나고 나서 그런 마음을 가지면 인색함들은 점점 더 없어진다는 거라.

그게 꼭 자신이 한 거라서, 자신만의 공덕이었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 인연들과 여러 원인들과 여러 조건들이 만났기 때문에 그 공덕을 자기가 쌓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같이 나눌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아홉 번째가 '--(māyā)' 사기치는 것을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속여가지고 내가 이익을 얻고자 하는 거라. 생활하는데 속여가지고 이익을 얻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참 좋은 결과는 안 일어납니다. 나에게 조금 더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라. 노력한 만큼의 결과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지금 안 나타나도 언젠가는 나타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받는 거기 때문에, 속이는 것들은 속이는 것들의 결과는 반드시 나타난다는 거라.

갑작스럽게 내가 백만장자가 됐다. 갑작스럽게 복권에 당첨됐다. 그리하더라도 정당한 노력의 댓가를 받은 것이 아닐 것 같으면 그에 대한 부작용들은 반드시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을 속여서라도 내가 더 많이 가질려고 한다는 거라.

오히려 나쁜 일들을 저지른 것들은 그 결과는 두배 세배로 더 크게 일어납니다. 아니면 두번 세번 일어나게 됩니다. 왜? 우리 마음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원인들을 더 많이 짓기 때문에 잘못한 것들에 대한 결과들은 두번 세번 받게 된다는 거라. 그거 하지 말도록 하라 하는 거라.

 

그다음에 열 번째, '-테이야(sātheyya)'라고 하는 겁니다.

아첨하고 교활하게 하는 것들. 그거 하지마라 하는 겁니다.

 

이게 인제 다섯 가집니까? 여섯 가지네. 이 여섯 가지를 먼저 자꾸 닦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게 완전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수다원에 이르르게 됩니다.

수다원에게는 이것들은 안 일어납니다.

 

가끔씩 그런 게 있습니다.

법회가 있어가지고 내가 갈 형편이 못돼서 다른 스님한테 "스님, 그 법회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어떤 스님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 몇명 오도 안 하는데 뭐하러 가느냐?" 안 간다고 그럽니다. 거 사람 몇 명 보고 가서 법문 하나? 아직 그거조차도 안된 스님이 어떻게 법을 설할려고 자꾸 하느냐는 거라. 사람이 많다고 해서 거기 가서 법문하면 그냥 막 해주고 하나? 어데 쓸려고? 지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리고 수다원에 이르는 조건들을 스스로 자꾸 만들어갈려고 하지를 않고, 자꾸 그런 쪽으로만 휩싸여들어간다는 거라.

법사비 안주면 안가. 사람 적어도 법사비 많이 주면 또 가. 참 우스운 얘기라.

법을 설하는 데는 어떤 조건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 이 법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느냐 안되느냐만 따져야 되는 것이지, 법을 설할 수 있는 부차적인 조건들은 따져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법을 들을 때는 내 이익을 위해서 법을 들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는 이것을 내가 알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법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법을 들을 때는 또 법을 실천할 때는 그것으로 인해서 확신이 들고 또 그 법을 듣는 것이 나의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또 나의 생활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위한 것으로써 법을 들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법은 들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단순히 많이 알기 위해서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법을 듣지 말아라는 거라.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절집에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어지고 고집만 세어지고 오히려 성질은 더 나빠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법을 잘못 들어서 그렇다는 거라.

 

법을 듣는 자들도 마찬가지고 법을 설하는 자도 마찬가집니다. 이 여섯 가지가 먼저 갖춰지도록 하라는 거라. 점점 그렇게 물이 들도록 만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보십시오. '브야--(byāpāda)' 지나친 성냄입니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 여기서 지나치다는 것은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것들을 얘기합니다. 화가 일어나는 거는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공부한 사람이고 불교를 배운 사람이면 화가 일어났으면 빨리 잠재울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화가 일어나면 그냥 딱 나간다는 거라. 말로서든 행동으로 하든. 그럼 그것을 후회하는 것들은 나중에 굉장히 크겠죠? 지가 잘못했으니까.

물론 상대방이 잘못한 것들이 있으니까 그게 원인이 돼가지고 내가 화를 내가지고 손찌검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자신을 돌아볼 것 같으면 애 잘못한 거보다는 자기가 손찌검 한 것이 더 후회스러워. 그걸 브야빠다라고 그럽니다. 적어도 그거는 하지 말아라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일단은 화를 내면은, 속에서 화가 일어나든 어쨌든 간에 표출이 안 되면 괜찮은데 이것이 표출돼서 화가 일어난 게 보여지면 그거는 승려 취급을 안 합니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고 태종사에 있는 제 은사스님인 노스님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태종사에 있는 노스님도 화가 좀 많은 편이거든. 화를 벌컥벌컥 내싸니까 어느 날 태국에서 온 스님들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간다는 거라. 생각하기를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참 잘해줬는데, 계율에 어긋난 것을 한 것도 아니고, 왜 그럴까 해서 왜 갈려고 그러느냐 하니까 성내는 스님들과 같이 못산다는 거라. 물들기 때문에.

 

"화를 내는 스님은 스님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거 하나도 못하는 스님이 무슨 스님이 되느냐는 거라. 스님들은 언제든지 어울려 살게끔 됩니다. 언제든지 같은 일을 하게끔 되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섞여버리면 같이 물들어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어서 화내는데 물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간다는 거라.

 

스님도 꼭 마찬가지로 태국에 갔을 때,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인 것이 화를 잘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건데도 화를 내는 거라. 다른 사람들 하는 것이 못마땅한 거라. 좀 더 수행하면 될 건데 똑 수행 안하고 바시락 거려쌌고 아니면 나가버리고, 한시간이면 한시간 하지 왜 안 하느냐는 거라. 성질을 내가 냈어.

나중에는 스님들이 나하고 말을 안 하는 거라.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성을 내는 스님 옆에는 같이 안 있고 같이 머물 수가 없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그 사람이 바시락 거리든 한시간을 채우기 전에 나가든, 니가 그걸 가지고 화낼 이유가 뭐 있느냐는 거라. 오히려 바스락 거리고 수행 잘 안 채우는 것보다도 화를 내는 니가 더 나쁘다는 거라. 정신이 번쩍 드는 거라. 그게 브야빠다라는 거라. 지나친 것들.

 

남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비교하는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화는 일어났으면 잠재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에 대해서 생각하고 비교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일어난 화는 밖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그거 하지 말아라는 거라.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겁니다. 앞에 여섯 개보다도 더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그리해도 마음을 그렇게 먹어보십시오.

 

말은 저번에 내가 뭐와 같다고 그랬어요? "말은 핵연료가 유출되는 것과 같다" 얼마나 큰 재앙을 일으키는 거라? 그런데 그 말로 화를 낸다? 아니면 남에게 해꼬지 할려는 마음으로 말을 한다? 그거 어떻게 할려고 그래?

그게 유출되면 다른 사람도 죽이고 병들게 할 뿐 아니라 나 자신도 못사는 것들이라. 그게 다시 돌아오는 건데, 자기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는다는 거라. 말하는 습관들을 잘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화가 표출되지 않도록, 말로써 표출되지도 않고 행동으로써도 표출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강한 분노, '-((kodha)'

이거는 화가 일어나서 정신이 헤까닥 돌아버리는 경우들을 '꼬다'라고 합니다. 지가 뭘 했는데도 뭘 했는지도 몰라. 그전에는 화가 일어났을 때는 브야빠다가 될 때는 탁 때리면 자기가 그래도 때린 줄은 알아. 그런데 이거는 자기가 때린 줄조차도 모르고 하는 거라. 뭔 짓을 저질렀는지조차도 모르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 원한, '우빠나-(upanāha)'라고 하는 겁니다.

원한심을 가지는 것, 원망하는 것, 굉장히 무서운 일입니다. 여기도 그런 사람 하나 있죠? 엄마가 나를 왜 이렇게 낳아줬을까? 왜 이것밖에 안 키워줬을까? 지가 못했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 생각을 합니다. 다른 집안은 재산이 많은데 우리는 왜 이것밖에 안 됐을까?

 

그다음에 234번 다음에는 16번을 해야 됩니다.

 

16번은 '빠마-(pamāda)' 부주의하고 게으른 것.

그건 쉽게 말하면 물이 펄펄 끓고 있는 냄비가 있을 거 같으면 이게 뜨겁다는 것은 알아야 되는데 부주의할 것 같으면 탁 잡는 거라. 자기 손 데일 수밖에 없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뭔가를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하는 줄 모르면 실수하게 돼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돼있다는 거라. 하물며 걸어갈 때 멍청하게 걸어갈 거 같으면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다는 거라. 왜 그짓을 하느냐는 거라. 뜨거운 냄비에 손잡는 거하고 뭐가 틀리느냐는 거라.

 

살아있는 것은 호흡을 하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호흡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호흡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으면 거 어떡하겠느냐는 거라. 그러니까 자기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거고, 자기 호흡으로 인해서 어떤 상태에 이르르고 어떤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도 모른다는 거라. 참 어리석은 것들이라. 그걸 '빠마다'라고 얘기합니다. 부주의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이것까지 잡으면 불환과에 이릅니다.

아주 먼 길이지? 아주 먼 길일 거라. 그래도 해야 되는 것들이라.

 

그다음에 아라한이 될려면

1, '아빗자(abhijjhā)' 욕심부리는 것.

그냥 욕심부리는 것이 아니고 아, 저거 예쁘다 하는 것에서 그쳐버리면 아빗자에 해당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욕심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쁘니까 남한테 그럽니다. "이거 참 예쁘네" 하면서 만지작거립니다. 그거는 뭐라? 달라는 얘기밖에 더 돼? 그걸 얘기합니다. 실제로 "이거 내 줘!" 이렇게 할 것 같으면 더 큰 아빗자가 되는 거고.

가끔씩 그런 사람이 있어요. 스님들 간에도 그것을 자꾸 만지면서 "참 좋네" 그냥 달라는 얘기라. 주는 거는 문제가 아닌데, 그 사람은 나쁜 마음에 자꾸 물든다는 거라. 그거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그게 인제 아빗자에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11'완고함(thambho)' 구부러지지 않는 것.

얼마 전에 스님이 담마스쿨을 중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매주 하던 걸. 처음에 생각은 시작을 했으니까 내가 지금 아프고 강의할 형편이 못돼도 다른 사람을 대체해가지고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탁 생각을 돌이키니까, 이거 지금 그러면서 여기에 맞춰가지고 뭔가를 자꾸 하고 있는 거라. 중요한 것들은 잃어버리면서. 그래서 탁 깨지는 것이 이 '탐보'라고 하는 완고함.

중요한 것을 잃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해가지고 목표를 성취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질까? 큰 의미 없습니다. 목표 달성했다 해서 아! 잘했다! 하는 마음은 들지는 몰라도 그동안에 잃어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아. 차라리 중단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려 주는 것들이 오히려 훨씬 낫다는 거라.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이거 못한다" 하는 사람들 "완고함" 들입니다. 세속 일들에 서는 어떤 것이 맞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진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어떤 것이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있지만은,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 꼭 그길을 가야 된다고 할 필요성은 없다는 거라.

어떤 사람들은 느낌에 대해서 관찰할 것 같으면 가장 빨리 간다. 그래서 그 길이 맞다. 다른 건 틀렸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대해서 관찰할 것 같으면 가장 마음을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그것이 맞다. 그래서 다른 거는 거들떠도 안 봅니다. 그런 것도 다 완고함 들입니다. 받아들일 줄 모르고, 그리고 그것들을 감싸안을 줄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완고함 들입니다.

 

그다음에 12'사람보(sārambho)' 다투고 겨루는 것.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것.

 

그다음에 '마나(māna)' 자만, 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는 것.

 

그다음에 '아띠마나(atimāna)' 거만한 것들.

그냥 「나」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고, 나의 것이라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래서 그 마나의 종류 일곱 가지들을 쭉 적어놨습니다.

 

그다음에 열다섯 번째 '마다(mada)' 나태하고 현혹되는 것,

소홀히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은 지금 당장 위험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위험을 항상 불러오게끔 됩니다.

 

이게 열여섯 가지 마음을 세탁해야 되고, 마음이 오염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는 것들입니다.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자신이 먼저 해야 될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해가지고 마음이 깨끗할 수 있도록, 마음이 가벼울 수 있도록, 마음이 어떤 것에도 어떤 작용들에도 변함없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고요할 수 있도록 자꾸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걸 다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성질을 알 것 같으면 일어나는 특질들이 있습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일어납니다. 아! 이게 부처님이 진짜 이런 가르침은 부처님 밖에 못한다 하는 것. 그리고 이 가르침들은 진짜 하면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이 가르침 대로 따라가는 것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가 그걸 갖다가 분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이것들을 조금씩 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어지고 더욱더 강해지게 돼있다는 거라.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