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제6청정) (20151219.서울)

담마마-마까 2022. 3. 10. 09:00

https://youtu.be/98S05lYkt0U

*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제6청정) (20151219)

 

오늘은 칠청정 여섯 번째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부분입니다.

저번까지는 자기가 갈 길과 가지 말아야 될 길을 분명하게 구분을 해서 아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그냥 쭉 가면 됩니다. 쭉 그길을 가다가 보면 끝이 보이게끔 되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걸 행도지견청정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자기가 뭘 잘하는지를 모를 경우에는 이것저것 해보고 그렇게 하는데, 잘하는 게 딱 선택되면은 그냥 대학입학에 무슨 과를 지원하듯이 딱 지원하게 됩니다. 그러면 대학에 들어가서는 그 공부만 할 겁니다. 요즘 대학은 그거 말고 무슨 교양도 배우고 그렇게 하기는 하죠. 하지만 그럼 대학원을 비유를 해야 되겠구나. 어쨌든 그길만 쭉 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길 간다고 해서 장애 없는 경우는 아닙니다. 대학원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하다 보면 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을 하기도 해서 그걸 뛰어넘어가기도 하고 그럽니다.

오히려 자기 길을 가면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훨씬 많습니다. 왜 그러냐면 인제는 다른 걸 선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대학원 다니다가 다른 대학원으로 다닐 거 같으면 이미 늦어버리는 거라. 그럴 수 있는 상황들이 못 되기 때문에 그냥 그 길을 계속해서 가게 됩니다.

그게 행도지견청정이다 하는 겁니다.

 

수행에서는 어떤 상황들이 일어날까? 그전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대상을 알아차림이 잘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있었죠? 빛도 보이기도 하고 부처님이 보이기도 하고 그랬는데, 인제는 그런 상태는 뛰어넘어 나가야 되는데 행도지견청정에서도 아직 그게 보입니다. 사실은.

사실은 그 앞의 단계 도비도지견청정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행도지견청정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게 반복적으로 한참 진행이 좀 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생멸지 단계까지 이르고 나면은 그 단계 이후에는 그런 것들이 안 나타납니다.

생멸지까지 이르는 게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리고 시간이 참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생멸지에 이르고 나면 나머지 단계 부분이 순식간에 쭉 진행이 돼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름만 바뀌어지는 것뿐이지 똑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찌보면 이 행도지견청정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이 생멸지 부분입니다.

 

76페이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지혜가 아홉 단계다, 어떤 경우는 여덟 단계다, 어떤 거는 열 단계다 이렇게 구분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의미는 없습니다. 같이 일어나는 것들이고, 그다음엔 순차적으로 한 번 다음에 그다음에 바로 일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경우들이기 때문에 몇 단계로 나눴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단지 내가 생멸지에 이르렀는가 아닌가만 분명하게 자신이 알면 그다음 단계는 순차적으로 쭉 진행이 되어나간다 생각을 하시면 될 겁니다.

 

① 생멸지(生滅智 udayabbaya ñāṇa).

생멸은 우다야 아바야, '일어나고 사라짐을 아는 지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알겠지. 그런데 어떻게 아는 것이 이 생멸지의 단계일까? 쉽게 말하면 일어난 것을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는 것들은 이미 그전 단계에서 끝났고, 일어난 것을 알면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내가 이해하게 되는 거라. 또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고 이해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 이해가 앞의 단계하고 지금 단계하고는 다릅니다. 그전에는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냥 사띠의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띠의 수준은 물론 사띠는 사띠인데 그것보다도 훨씬 강도가 더 깊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걸 생멸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질 거 같으면 어떻게 될까? 이거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대상이 어떻게 알아지느냐면 우리가 보통 대상을 볼 때 내가 보잖아. 그리고 내가 듣는데, 이때는 어떻게 되느냐면 그냥 보여져버리게 됩니다. 그냥 들려져버리게 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은 배가 불러오고 꺼진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저절로 그것이 나에게 탁 와닿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쉽게 말하면 지가 와서 닿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없고 지가 안 오면 내가 모르는 거라. 그런 상태로써 이해를 하게 되는 거라. 그걸 생멸지의 단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전의 단계들에서는 사실은 업이 됩니다. 선한 것도 업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들입니다. 왜 그렇게 업이 될까? 내가 볼 거 같으면 그걸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형상'으로 보든지 아니면 '좋다 싫다'로 보든지 이렇게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같이 일어나게 돼버립니다. 그 뒤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은 행하면 업이 돼버리는데,

생멸지의 단계에서는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지가 와서 나를 보는 거라. 지가 와서 나에게 들리도록 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라.

누가 나에게 뭔 물건을 줬다. 그걸 내가 안 받으면 그건 내 거 아닌 거하고 마찬가지라.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업이 되는 현상은 아니게 됩니다. 내가 안 받으면, 내가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왜 그럴까? 주는 것이 너무나 빠르게 되는 거라. 내가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지혼자 줬다가 가져갔다가 줬다가 가져갔다가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것도 다른 것이 여러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아주 빠르게 나에게 가져갔다가 받았다가 줬다가 가져갔다가 이렇게 할 것 같으면 내가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받는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게 되는 거고.

 

비유를 들어보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저번에 종소리 얘기들었죠?

종소리 '땅' 치고 나면 그 뒤에 울림이 있습니다. '우우우웅, 우우웅, 우웅, 웅, 웅' 이런 식으로 울려집니다.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합니다. 파동이 그렇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우우웅, 우우웅, 우웅, 웅, 웅'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굉장히 빠르게 진행이 됩니다.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생멸지의 단계에서는 1초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1억 번 한다" 그렇게 주석서에서는 나옵니다. 1억 번 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해요? 실제로 그렇게 알게 됩니다. 생멸지의 단계에서는.

그래서 너무나 빠르게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하는 것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단지 내가 하는 거는 뭐가 있겠어요? 그냥 '줬다 뺏었다' 하는 것 요놈이 하나 '줬다 뺏었다' 하고 요놈이 '줬다 뺏었다' 하는 그것만 알고 있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를 생멸지라고 보면 딱 맞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는 게 힘이 드는 것이지 이 단계에 이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조금 수월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안 되더라도 여러분이 할 일은 지금 현재는 끊임없이 그냥 알아차려나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고나면 그렇게 됩니다. 지금은 적어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일어나는 것을 한 번 일어나는 것만 아는 것은 아니죠? 적어도 일어날 때 그것이 똑같은 것이 아니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두세 번은 된다, 아니면 어떤 사람은 한 열 번은 된다 이렇게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게 많아지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여러 대상에서 일어나게 됩니까?)

여러 대상이 아니고 하나의 대상, 하나의 대상인데 다른 대상, 쉽게 말하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니까 대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 대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내가 분명하게 이해하는 상태가 있고, 그러고 나서 사라지는 것이 있고 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마음을 또 알게 되고,

그래서 앞에 일어난 거와 그 뒤에 일어난 거 물질적인 현상도 분명히 다른 것들이다, 마음들도 다른 것들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가 됩니다.

하나의 일어나는 현상들이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물질적인 현상도 일어나는 것을 보면 똑같은 부분이 하나도 없이 1억 번이나 일어나지게 되고, 마음도 똑같은 것이 없이 다 다르틀리게 1억 번이나 일어나지고 있다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명히 구분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개입할 상황이 됐는데 이제는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돼. 그렇게 알면 됩니다.

 

이럴 때는 망상들이 일어날까? 망상들이 일어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보면은 그 중간에 탁 망상들 생각이 미미하게 일어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것도 일어나는 현상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딱 보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보이고, 가끔씩 그렇게 보입니다.

단지 그전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가지고 망상이 너무 많아가지고 일어나는 것들을 볼 상황조차도 안됐다가, 이제는 퍼센티지로 따질 것 같으면 실재하는 현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들이 거의 99%를 차지하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상태인 걸 자신이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생멸지에 이르렀을 때는 참 좋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제는 진리에 대한 것들은 분명하게 탁 확신이 서서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인 걸 본인이 알게 됩니다. 그런 상태라고 알면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아마 빠르게 뭔가 변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은 어떨까? 굉장히 불안할 거라 아마.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내일이면, 1초에 1억 번 일어나고 사라지는 건데 내일까지는 몇억 번 해야? 엄청 긴데도 당장 나는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데 마음은 고요해져 있지 않다 라는 거죠.

 

그런데 생멸지는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도 마음은 아주 평온합니다.

평정심이 없는 생멸지는 없습니다. 마음이 고요해 있지 않은 생멸지는 없습니다.

어떤 걸 평정지라고 그럴까?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 데서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멀리하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하다 아니면 불행하다 좋다 싫다' 하는 것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거라. 단지 대상임을 알고 그것을 아는 마음만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그 대상으로 인해서 공포감도 안 일어납니다. 두려워하는 것들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평온의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이 생멸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이 더불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보통 일곱 여덟 가지를 평온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 상태를 생멸지의 상태라고 보시면 딱 맞습니다.

안됐다고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그것은 어찌 보면 대상을 내가 어떻게 알아치리는가 하는 그것만 잘하게 되면 어느 순간 순식간에 탁 그런 것들을 알게 됩니다.

지금 안 될 거 같죠?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 같죠?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실제로 마음은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데 사실은 내가 그걸 있는 그대로 그냥 해가지고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대상을 본다든지 뭐를 할 때 뭔가 다른 것이 개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내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 실제로 마음은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거라. 마음이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말은 쉬운데 그렇게 잘 안되지. 잘 안 되어도 그냥 대상을 그냥 놓아버리면 그렇게 보여지게 됩니다. 그걸 생멸지의 단계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게 76페이지 77페이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비유를 들어놓은 게 태풍이 쓸고 간 자리에 여러 가지 쓰레기들이 있으면, 쓰레기봉투에 이건 재활용할 거, 이건 깡통, 이건 음식물, 하고 분명하게 자신이 알기 때문에 재활용 봉투가 여기에 있으면 거기에 맞게끔 주워담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재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엉뚱한 자루에다 다른 걸 담지는 않는다는 거라.

생멸지의 단계에서는 그런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냥 나대어져 있는 것을 그냥 여러 개 있는 봉투에다 주워 담으면 됩니다. 이것은 대상, 이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 이건 또 다른 대상,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 각각 다른 쓰레기마다 다른 것들로 알게 되고, 그렇게 분명하게 쓰레기봉투에 담듯이 알게끔 되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는 그런 상태가 끊임없이 대상이 와서 부딪치지 않을 거 같으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여기에서 이때까지 조금전까지는 사띠만 했는데 알아차림만 있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자동적으로 삼빠자나가 기능을 하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전에는 억지로 쉽게 말하면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마음을 썼는데, 인제는 그럴 필요없이 사띠와 삼빠자나가 딱 균형을 맞춰서 그냥 쭉 연결돼가지고 알아차리고 보이는데, 그걸 알아차리는 것이 분명하게 아는 상태,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쓰레기봉투에 담을 때 실수를 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자꾸 스님은 사띠는 '알아차림'이고, 삼빠자나는 '분명한 앎'이다 하고 풀이를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것이 맞다고는 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수행에서는 그렇게 한글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수행에서는 맞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78페이지 마지막에 보면 "마음이 저절로 현상의 생멸에 붙잡혀버리는 상태를 생멸지(生滅智)라 합니다."

이걸 붙잡혀버린다고 하는 것은 지가 붙잡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와서 부닥치기 때문에 지가 안 해도 당연히 그냥 생멸하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② 괴멸지(壞滅智 bhaṅga ñāṇa).

그다음에 괴멸지는 방가냐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라짐만 있는 단계입니다. 어원상으로 보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거하고 그다음 단계인 '포외지' 하고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괴멸지'의 상태 방가냐나의 부분에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상태를 내가 괴멸지에 이르렀다고 하는가 하면, 조금 전에 생멸지의 단계에서는 상당히 오래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그냥 평온한 상태에서 대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시간이 좀 많이 걸립니다.

그러다가 생겨나는 것들이 있으면 문법적으로 할 것 같으면 생겨나는 것은 안 보이고 사라지는 것만 보인다 하고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상에서 내가 알 때는 그렇게 아는 게 아닙니다. 누가 와서 "스님, 나는 현상이 사라짐만 보입니다. 이게 방가냐나 맞습니까?" 이럽니다. 땡! 틀린 거라. 그렇게 알지 못합니다.

 

그럼 방가냐나는 어떻게 알게 됩니까? 하나의 현상이 일어났으면 그다음 현상이 따라오는 게 보입니다. 따라오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앞의 현상들은 사라지는 것만 보이게 됩니다. 사라짐이 있어야 따라오는 게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뒤따라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인식이 되는 상태! 그래서 현상은 끊어지는 것이 없어. 그래서 하나의 현상이 일어났으면 그다음 현상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보여.

그거는 왜 그럴까? 조금 전에 생멸지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거의 비슷하게 나아갔기 때문에 가능한데, 이제는 마음이 더 빨라. 물질들이 변하는 속도보다 마음이 빠른 걸 알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있음과 동시에 마음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보여져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 마음이 훨씬 더 변화하는 것이 빠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걸 방가냐나라고 그럽니다. 이걸 착각해버리면 안됩니다. 그냥 사라짐만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아직은 생멸지에도 이르지 않은 상태와 똑같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 조금 전에 생멸지도 지혜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요것도 지혜의 단계입니다. 하나의 대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면 그것을 아는 지혜도 사라지는 상태가 보여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생멸지가 사라지는 것이 생멸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아는 지혜가 사라지는 의식을 봐야만이, 그다음에 이 방가냐나에 이를 수 있는 겁니다.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고 나면 뒤따라서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도 동시에 연결해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다음에 마음은 새로 생겨나는 대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의식은 정지해버립니다.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아는 지혜가 있다는 상태에서만 그쳐버릴 것 같으면 의식은 거기서 딱 정지를 해버립니다. 그렇게 의식은 정지하는 법이 없죠?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반드시 앞서가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는 걸 아는 마음이 탁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어떤 것이 두드러지느냐면 일어나는 것보다는 사라지는 것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아는 것뿐이라. 일어나는 걸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착각해버리면 일어나는 것을 아예 모르고 사라짐만 있다고 알게 되는데 그렇게 알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건데 사라지는 것을 훨씬 강하게 와닿는 거라. 쉽게 말하면, 누가 옆에서 한 사람이 뺨을 때리고 요쪽 사람이 뺨을 때렸다 그럴 것 같으면 이쪽 뺨보다 뒤에 맞은 뺨이 훨씬 강하다고 할 것 같으면 뒤에 뺨 맞은 것에 대해서 그사람한테 화를 내지 앞에 뺨 맞은 사람한테 화를 안 내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렇지만 앞에 뺨 맞은 것을 이거는 단지 묵인을 하고 용서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그거는 분명하게 알고 있는 거라. 단지 이것들보다는 이것이 뒤에 가 강하기 때문에 그 사라짐만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게 사라짐을 아는 지혜인 것이지 '뭔 대상이 뭐 끊임없이 사라짐만 보인다' 그렇게 되는 상태는 아닙니다.

 

가끔 스님이 지도를 할 때 "자꾸 느낌을 알아차릴려고 해라" 그렇게 지도를 합니다.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그다음에 느낌이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들을 알려고 하라."

그전까지 자기가 수행에서 심념처를 했든 아니면 신념처를 했든 법념처를 했든 뭘 했든 간에 이 상태에서는 모든 현상들을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신념처를 하든가 심념처도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때는 무슨 수행을 했다는 것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라. 그래서 그 사라지는 것이 더 강하게 와닿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걸 인식하는 마음도 그 느낌이 분명히 사라졌다는 걸 아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거에서 스님이 자꾸 수행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수행을 하든지 간에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평온하게 '마음이 뭐하고 있는가' 볼려고 이렇게만 할려고 하지 말고, 그건 초보단계에서나 하는 것이지, 마음도 느낌으로 아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 보더라도 느낌으로 아는 것들을 치중하라" 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모든 것들을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앞에 생멸지보다 괴멸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빠를까? 아니면 똑같을까? 훨씬 빠릅니다. 진짜 찰나 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걸 어떤 비유로 해야 되나? 꼭 번갯불이 섬광이 팍 치면 아주 짧은 찰나인데 만약에 번갯불이 치고 나서 뒤에 일어나는 현상이 없을 거 같으면 아마 우리는 보지 못할 거라. 그 번개치는 걸. 그런데 뒤에 일어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번개치는 걸 알게 되는 거라. 그와 같이 순간적으로 탁 일어나는 것은 아는데, 우리는 앞에 것이 있기 때문에 번개 뒤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게 되는데, 우리는 뒤에 것만 알게 되는 거라. 그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 그것만 계속 지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이때는 사라짐만 아는 상태에서는 굉장한 충격이 옵니다 자신에게.

그전에 생멸지의 단계에서는 아주 평온해졌는데, 지금 현재 사라짐만 아는 상태일 것 같으면 굉장히 충격이 옵니다. 어찌 보면은 이게 오래도록 지속하게 되면은 수행하기가 싫어져버립니다. 그래서 포기를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반드시 스승에게 가서 문의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③ 포외지(怖畏智 bhayā ñāṇa)

그다음에 세 번째 바야냐나 포외지입니다. 아까 사라짐만 보는 지혜도 오해하기 쉽다고 그랬는데, 여기 포외지도 사람들이, 쉽게 말하면 포외지라고 할 것 같으면 두려움을 느낀다는 거거든. 그러니까 수행하는데 두려움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두려움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내가 없는데 두려워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 나하고 두려움하고 결합이 돼있다는 건데, 지금의 상태는 절대 나하고 결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생멸지의 단계에서 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것이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더 진행이 된 상태에서는. 그래서 두려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두렵다고 그럽니다. 그런 상태는 아닙니다.

단지 사라짐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위험한 것을 압니다. 그것이 위험한 걸 아는 것이지, 그것이 두렵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사라짐만 있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위험한 거라.

 

그걸 이렇게 비유하면 됩니다. 호랑이를 숲에서 봤다. 그럼 위험하고 그 호랑이가 나에게 가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덮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은 일어납니다. 그런데 창경원에 가가지고 호랑이를 볼 거 같으면 우리가 있기 때문에 호랑이가 위험한 줄은 알지만 호랑이가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죠! 그와 같은 거라. 그런 상태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호랑이를 봤다고 해서 호랑이로 인해서 두려움이 확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그렇게 비유를 하면 여러분들도 알게 될 겁니다.

 

여기는 비유를 해놓기를 도둑이 집에 들어온 것을 들었는데,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는데, 누가 친한 친구가 내 좀 여행하고 올테니까 돈하고 통장하고 맡겨놓고 갔어요. 그런데 어느날 와보니까 친구가 전화와가지고 내가 니집에 돈하고 통장하고 니 없는 사이에 내가 가져갔다. 그럴 것 같으면 집에 와서 보니까 진짜 집에 돈하고 통장하고 없거든. 그런 상태일 거 같으면 어떻게 되요?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은 안 일어나죠?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친구한테 그런 전화가 안 오고 집에 갔는데 돈하고 통장하고 없어졌다, 그럼 어떻게 되요? '어, 도둑이 훔쳐갔나' 해가지고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모를 때는 그런 두려움이 일어나는데 아는 상태에서는 그런 두려움은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미 생멸지를 아는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그런 두려움은 이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걸 착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여기서는 수행에 재미가 없어져요. 하기가 싫어져. 그 위험한 걸 왜 해? 안 그렇겠어요? 그래서 마음이 수행해가지고 별 이익도 없을 거 같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④ 과환지(過患智 ādīnava ñāṇa) ⑤ 염리지(厭離智 nibbidā ñāṇa)

그래서 이 두려움이 일어나는 단계 다음에 과환지, 그다음에 뒤에 염리지 부분은 실제적으로는 순차적으로 그냥 바로 연결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이걸 착각해버리면 두려움만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서 끝나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두려움이 일어나는 단계가 아니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개는 반드시 그다음에는 그다음 단계로 반드시 연결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이름만 바꿔놓은 것뿐이지 이 3개는 동일한 것이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런데 수행상에서는 사실은 이게 과환지인지 아니면 포외지인지 염리지인지 이런 구분을 사실은 잘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굳이 구분할 거 같으면 포외지는 그런 위험을 아는 상태라고 보면 되고,

이 과환지라고 하는 것은 이익되는 것도 없고, 행복한 것도 없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그런 것도 없다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염리지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그런 것들은 어떤 것도 기쁨도 일으키지 않는 상태이고 되게 지루해.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떠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수행 안 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마음의 상태만 조금씩 다르다는 것뿐이지 쉽게 말하면 동일한 상태라고 보시면 딱 맞습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과환지는 생멸이 있을 거 같으면 어떤 경우든지 이익이 없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멸이 있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하다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거고.

그대신에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반드시 어떤 것이든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고,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 나은 상태를 바라는 마음조차도 안 일어나는 거라. 참 나쁜 마음이죠? 더 해가지고 닙바나에 이르러야 되는데 그런 마음조차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조금 전의 앞에 단계와 지금의 단계와 그 뒤에 단계는 거의 동시에 순차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다음에 염리지 부분까지도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뻐하지도 않고 지루하고 어찌 보면은 수행하는 것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고 그럽니다. 이 3개의 상태가 당분간 있게 됩니다.

이 3개의 상태가 지속돼야만이 환멸하고 그런 것들이 되게 일어나야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3개는 이름만 바꾼 것이지만, 또 이 상태에서는 또 당분간 이 상태에 그냥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수행을 포기하고 놓지도 못해. 왜 그렇겠어요?

어떤 것이든 나한테 와닿기 때문에 내가 관찰 안 할려 해도 저절로 되기 때문에 그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수행이 싫증이 나고 수행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아이고 똑같은 거 뭐 계속 변해가고 아무것도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는 것뿐이지,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싫증을 느끼고 수행에 대해서 싫증을 일으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대상에 대해서 '아이고, 저렇게 변하는 것 저게 뭔 의미가 있느냐' 하고 생각을 해버리게 되는 상태라고 보면 딱 맞습니다.

 

⑥ 탈욕지(脫欲智 muñcitukamyatā ñāṇa)

그런데 여기서 그다음 단계인 여섯 번째 탈욕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을 하다 보면 아, 내가 여기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탈욕지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죄수가 감옥으로부터 탈옥할려고 하는 마음, 왜 탈옥할려고 그러겠어요? 감옥은 갑갑하고 속박되기 때문에.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걸 탈욕지라고 그럽니다.

사실은 이때는 그렇게 무의미하다 하고 이익이 없고 행복이 없다는 사실이 있을 때 벗어나려면 방법은 마음 하나 딱 일으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수행할 때는 잘 몰라.

그래서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은 이 상태에서 다음 상태인 탈욕지를 일으키는 것이 빠르고, 그러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이 상태를 그냥 좀 오래도록 지속이 되는 단계라.

 

뭐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 상태입니까? 열반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열반으로 마음이 향해야 되는데, 이 찰나에 마음을 일으키질 못하는 거라. 열반으로 향해야만이 지금 지루하고 재미없는 여기로부터 벗어날려는 마음이 탁 일어나서 그다음 단계로 탁 넘어가게 되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도 그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어떤 행복보다도 열반에 이르렀을 때 행복이 크다는 걸 자꾸 인식하고 해야 됩니다. 그 인식이 없을 거 같으면 수행에 직접 이르렀어도 열반에 이를려고 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공부들은 반드시 자꾸 열심히 해야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반드시 그렇게 합니다. 경전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고, 수행을 하고 경전공부를 하고, 이걸 동시에 같이 합니다. 그래서 그걸 "수레의 양바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동시에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수행에서도 진척이 빠르지 않고, 진척이 빠르지 않다는 것은 여기서 탈욕지의 단계로 넘어가지를 잘 못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음 단계 수다원에서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러분도 되도록이면 지 수행한다고 해가지고 공부하는 것까지 등한시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같이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수행하는 걸 등한시 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거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반으로 향하는 순간, 그다음에는 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사라짐만 보이고, 그다음에 그것이 재미없어지고 행복이 없고 이익도 없다는 생각에서 탁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탈욕지의 단계에서는 본인이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여기에도 비유를 해놓았지만 생멸하는 것으로부터 딱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날 거 같으면, 그 탈출하는데 지가 지 몸 하나 빨리 벗어나기도 바쁜데 뭐 가져갈 생각이 있겠어요? 자기 소유물에 대한 것들 아니면 가족에 대한 것들 아니면 자기 몸에 대한 것들 거기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습니다. 누가 그걸 가져간다 하더라도.

쉽게 말하면 탈옥하다가 설혹 간수가 총을 쐈다, 총알에 팔이 상처가 났다 해가지고 탈옥하려는 사람이 탈옥 안 하겠어? 거기가 자유로운 줄 아는데 탈옥을 하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누가 자기 손 하나 떼어가더라도 나는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이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나라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의미가 없는 거라. 자기 것이 없는데 붙잡을려고 하는 마음이 있겠어요?

 

그래서 탈욕지가 이 상태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탈욕지 상태에 이를 것 같으면 적어도 마음은 인제는 어느 정도 성자에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아, 닙바나만이 열반만이 최고구나' 하는 마음이 아주 강하게 와닿게 돼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좀 빨리 할려고 그러니까 좀 이해하십시오,

 

⑦ 성찰지(省察智 paṭisaṅkhā ñāṇa)

그다음에 성찰지, 성찰지의 단계는 사실은 탈욕지 단계의 그다음에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제는 어떤 것도 집착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생멸하는 것들이 그냥 그대로 보입니다. 앞에 거하고는 동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생멸하는 것들을 반복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현상도 생멸하고 정신적인 현상도 생멸하고 끊임없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데, 그 앞에 생멸지하고 이 성찰지 단계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원인·결과에 대한 것들이 분명하게 와닿게 됩니다.

 

여러분들 스님들 밥 먹을 때 앉아가지고 하는 게송 "빠티상카요니소 삔다빠땅 빠띠세와 미" 하면서 쭉 하는데, "내가 지금 먹는 공양에 대해서 바르게 성찰합니다. 이 음식은 나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아니고 단지 지금 내가 배고프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 배고프다는 느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지, 또 먹고 나서 배부르다는 느낌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에서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내가 지금 밥을 먹습니다" 하면서 그 게송을 하고 나서 밥을 먹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요? 밥 먹는 것이 그전에는 욕심부리고 먹던 것이 그냥 그냥 먹게 되는 거라. 그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밥을 먹으면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먹지만 마음에는 끊임없이 맛있다 맛없다 하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성찰지의 단계는 그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그전의 단계에서 생멸지를 보는 단계보다도 마음이 한 단계 더 완전히 탁 바뀌어버린 상태라는 거라. 그걸 성찰지의 단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⑧ 행사지(行捨智 saṅkhārupekkhā ñāṇa)

그다음에 행사지-상카루뻭카냐나 입니다. 성찰지의 단계에 이르고 나서 그다음에 행사지-상카루뻭카냐나는 조금 또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얘기하는 것은 빠르게 진행되는 단계가 있고, 또 좀 시간이 걸리는 단계도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 현재 행도지견청정에서는 시간이 좀 많이 걸린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행사지는 마음에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이고, 모든 현상에 대해서도,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형성된 것들을 '상카라'라고 얘기합니다. '상카라, 우뻭카'를 합한 것이 '상카루뻭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 그전에 평온한 마음하고 인제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그전에는 밖에서 부딪치는 대상에 대해서는 평온했는데 자기 마음에는 평온한 상태는 아니고 평온하게 할려고 무진장하게 노력하고 있는 상태인데, 지금은 밖에뿐아니라 안에서도 평온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이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는 게 어떤 면에서는 성자의 마음과 동일합니다.

그렇게 판단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는 것들을 우선 목표로 잡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고나면 "니 더 수행할래?" 아니면 "니 보살행할래?"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마만큼 인제는 밖으로나 안으로나 항상 어떤 경계에 부딪쳐도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그럴 때는 남을 도와주더라도 「나」라는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도와주기 때문에 진짜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보살행을 하고 싶으면 여기서 보살행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제는 문제가 없다는 거라. 또는 내가 법문할 상태가 돼서 "법문할래" 할 거 같으면 "그럼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때는 전혀 제한조건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더 수행해서 인제 아라한이 될래" 그럼 그냥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수월하기 때문에.

 

단지 여기서는 갈림길에 놓여진다는 겁니다. 상카루뻭카냐나에 놓일 거 같으면 아직은 완전하게 부처님과 같이 남에 대한 연민심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연민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돼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전에 일으키는 연민심은 전부 가짜배기였어요. 가짜배기. 그런데 여기서의 연민심은 진짜 연민심을 일으켜서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태라. 그렇게 보면 됩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냐나에서 만약에 왜 이렇게 보살행을 할려고 하느냐 하고 그렇게 물어보느냐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여기 상태에서는 보살행을 할려고 합니다.

 

부처님의 연민심하고 이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렀을 때의 연민심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부처님은 되게 따뜻한 연민심인데 여기서는 아주 냉랭한 연민심입니다. 아직은 영글지 않는 상태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연민심을 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요? 보살행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조금 더 해탈에 이르는 길을 조금 더 줄여나가기 위해서 보살행을 할려고 그렇게 합니다. 조금 더 큰 그릇이 될려고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됩니다.

 

지금의 상태에서는 어찌 보면 아주 냉정한 상태, 쉽게 말하면 남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안 가지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아닌 것은 아닌데, 전혀 그것들에 영향받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 볼 것 같으면 그걸 우리말로 뭐라 표현하는지 모르겠는데 '냉정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은 그런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래서 보살행은 스님도 여기서 누가 물어볼 것 같으면 보살행을 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 상카루뻭카냐나에서는 오래도록 가기 때문에 그럽니다.

오히려 그냥 보살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성자들의 마음과 별반 틀린 것이 없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신장들이 나타나는 상태가 사실은 요런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인제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내가 법을 보호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하고 보면 됩니다.

 

⑨ 제수순지(諦隨順智 saccānulomika ñāṇa)

그다음에 아홉 번째 제수순지 삿짜눌로미까. 삿짜 아눌로미까 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제는 집착하는 것들이 모든 것들은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끈은 탁 놓아버렸는데 세속적인 것에 대한 거는 이미 놓아버렸어. 그렇다고 해가지고 성자의 끈은 잡지 못한 상태. 그래서 자기의 상태를 '아, 내가 이런 상태에 이르렀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실은 이것은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고 나서 한참 지나고 나면, 나중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면 알 수 있는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단지 상카루뻭카냐나 하고 제수순지 단계하고 차이가 나는 것이 에너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더 훨씬 활동적인 상태가 이 제수순지라고 보면 됩니다. 마음의 상태는 똑같은데 조금 더 활동적인 상태. 보살행을 하더라도 많이 활동적이게 됩니다. 그 마음도 활기가 있어지게 되고. 그런 상태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더라도 더 활기가 있어지게 됩니다. 보살행을 안 하고 수행만 하더라도 더 활기가 있어지는 상태라고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제는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하나의 현상을 보더라도 무상한 성품을 알더라도 그것이 고이고 무아이고 하는 것을 아는 상태라.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언어상으로만 얘기하는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이런 것들은 사실은 이 제수순지의 단계에 이를 것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냥 지금 현재 무상한 성품을 지금까지 쭉 같이 해왔던 무상한 성품 그거 알면서 그냥 가는 것, 그리고 내가 무상을 아는 것을 다시 돌이켜서 분명히 인식하는 상태에서는 그것만 있습니다. 그거 외에 다른 것들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남이 뭘 어쨌다 하더라도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이 뭐냐면 수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하고 이걸 자꾸 구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연결고리로써 어떤 연결고리로 되어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은 어떻게 보면 언어적으로 끝나버리는 거라. 그게 연결이 돼야 돼.

삼법인이 무상·고·무아다 그러면 그게 사성제 하고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걸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팔정도하고 어떤 관계에 있다, 팔정도에서 만약에 정견을 가지고 있다 아니면 내가 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 바른 생활하고 무상하고 어떤 관계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게 사성제에서 어디에 해당이 된다는 것을 연결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걸 연결을 못하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런데 이 제수순지 단계에서는 자기가 하지 않을려고 하더라도 이건 당연히 그냥 다 하나로써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자꾸 여러분들도 경전을 공부할 때 경전을 자꾸 낱개로써 공부할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라.

스님이 어떤 때는 하나의 경전을 가르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생활법문식으로 자꾸 할려고 하는 것이 뭐냐면 연결시켜주기 위한 과정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어야만이, 그 어디에도 그 생활법문에는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있고 사성제가 있고 팔정도가 있게끔 되도록 돼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경전만 아무리 알아도 그걸 어디다 쓸 거라? 여기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 여기까지가 행도지견청정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그다음에는 도와 과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지견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밥 먹고 나서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