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제5청정) (20151121.서울)

담마마-마까 2022. 3. 9. 09:00

https://youtu.be/wrcoxl2d9q8?si=iFPMZsupmT08gqtO

 

 

*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제5청정) (20151121)

 

54페이지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입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고, 이것은 청정에 이르지 않는 길이고, 그걸 분명하게 구분해서, 지가 갈 길이 아니면 안 가면 되는 거고, 지가 갈 길이면 가면 되는 거고, 그런 견해가 완전하게 서서 그런 단계에 도달한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경험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스님도 가끔 밥 먹는 게 고문이다 하는 그런 것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왜냐면 어떨 때는 나는 조금 먹고 싶은데 자꾸 사람들이 옆에서 계속 먹으라고 자꾸 떠다 줘. 그럼 이것을 다 먹을 수도 없고 그럴 때는 그 먹는 게 괴로워. 그러니까 그 괴롭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겠지만 "나 그만 먹는다" 소리를 못하니까 그럼 어쩔 수가 없으니까 계속적으로 먹어야 되니까 그게 괴로움이라는 거라.

만약에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진짜 싫은 사람들 그걸 안 봤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이 봐야 될 경우에 어쩔까 마음은? 그걸 단편적으로 간단하게 얘기해봅시다.

남편이 미워 죽겠어, 남편은 매일 집에 들어와야 돼. 어쨌든 봐야 되는 거라. 남편을 볼 때마다 괴로워, 힘들어 죽겠어. 그런데 평생 그렇게 가야 된다면 그사람 마음은 어떨까?

 

지금 도비도지견청정에 이르면 그런 마음이 듭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것들이 힘들어. 괴로워죽겠어. 왜 괴롭게 될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먹는데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것이 안 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알아차리는 게 자유롭게 되어가지고 저절로 알아차려지고 있는데, 그 알아차려지고 있는 대상이 괴롭게 느껴지면 어떻게 되겠어?

안 알아차리고 싶은 거라 나는. 그냥 알아차림을 놓아버리고 싶은데, 이건 오토매틱이 되어서 놓을 수도 없어. 자동적으로 알아차려지는데 너무 힘드는 거라. 그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에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게 인제 "도비도지견청정의 입구에 이르렀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를 들면은 배를 관찰하는데,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고 있는걸 보는데 쭉 하다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의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고, 그다음에 물질적인 현상의 원인에 대한 결과가 있고, 결과가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원인·결과로써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것도 원인·결과의 조건이 달라지면 그 결과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이렇게 계속 지속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데,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있는데, 혹시 여러분들 그거 해봤어요? 여기 종이 있으면 종을 '땅' 치죠? 한 번 '땅' 쳤어요. 치는 행위는 딱 한번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어떻게 되요? 계속 울려서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일어나는 것은 원인이 있어가지고 탁 일어났는데, 사라지는 것은 조건이 없는 거라. 조건이 없이 그냥 사라져버리게 되는 거라.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원인이 있어서 탁 분명히 알아차렸는데, 사라지는 것은 내가 콘트롤이 안되는 거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게 크게 쳤으면 크게 울리면서 천천히 사라질 거고, 작게 쳤으면 빨리 사라지게 되는 거라.

 

그냥 그대로 그 조건대로 일어난 원인에 따라서, 한 번의 원인에 따라서 그냥 사라져버립니다. 배가 불러왔으면 불러온 것은 분명하게 파악을 했는데, 사라지는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는 거라. 그런데 그냥 사라졌는데 사라지면 다시 또 일어나야 될 거 아니라?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원인이 있어야 일어나 질 거 아니라? 그런데 원인은 안 보이고 뭔지는 모르겠는데 알지는 못하고 그것은 있는 상태에서 다시 뭔가가 일어나는 상태가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사라짐의 끝에 '멈춤'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그러고 나서 멈춤이 그것을 원인으로 인해가지고 다시 일어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또 일어나지고 다시 또 사라지는데, 사라지고 나서 탁 멈춤이 있다고 알게 될 때, 이것은 내가 알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아지게 되는 거라.

그게 도비도지견청정의 상태에 이르고 있는 거라.

그럼 인제 이해하기가 좀 수월하죠?

수행에서 그런 것은 조금은 알고 경험해봤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아차리지 못해 갖고 멈추는 것하고, 실제로 알아차리고 있는데도 뭔가가 멈춰가지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걸 아는 것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걸 헷갈려버리면 안 돼.

 

그런데 저번 시간에 얘기했듯이, 일어나는 것이 그전의 단계에서는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지면서 다시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지고 이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하나의 일어나는 현상에는 그렇게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서 쭉 이어지는 것이 보이는데, 지금은 일어났을 때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에 이게 그냥 괴로운 것뿐이라. 빠르게 변하는데 이것이 너무나 괴롭게 다가와지는 거라. 그러니까 알아차리는 것이 괴로운 거라, 안 알아차리고 싶어지는 거라. 그때는.

이렇게 변하는 것이 파도가 왔다가 꺼지고 왔다가 꺼지고 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 그전보다도 속도가 훨씬 빨라져갖고, 인제는 이것이 왔다가 꺼지고 왔다가 꺼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부 고(苦), 고, 고로 보여. 괴로움으로.

 

그런데 그거 안 멈추고 싶겠어? 마음이? 멈추고 싶은데 인제는 알아차리는 것이 그냥 자동적으로 되게끔 되는 거라. 이걸 멈출 방법이 없는 거라. 그래서 그 전체가 그냥 괴로움의 덩어리로만 탁 보여버립니다.

일어나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사라지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모든 것이 괴로움의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이게 된다는 거라.

또는 어떤 사람은 그것들을 관찰할 때 그냥 이거는 아무것도 실체가 없는 무상한 성품으로만 보이게 되는 거라.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됐을 때 인제는 사람들은 더 이상 수행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아까 어떤 분이 수행하고 싶다고 수행하는 것이 너무 좋다고 그러던데, 이 상태가 되면 수행하는 것이 힘들어. 수행 안 하고 싶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하는 것은 고다 하고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것만 고(苦)입니까? 일상생활 할 때 알아차리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려지는데, 모든 것이 고로 인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을 하든 아니면 수행을 하고 집중수행을 하고 있든 모든 것들이 그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만 다가와지지 다른 것으로 다가와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글자가 있습니다. 어떤 글자를 읽어볼까? 위빳사나 수행 맨 위에 여섯 번째 줄인가 보면 「위빳사나 수행에도 닮은 상태가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진리라고 스스로 이해하고 있고」 그까지만 읽었다고 칩시다.

 

다른 때는 이걸 읽을 때는 앞에 「위빳사나 수행에도 닮은 상태가 있습니다.」 할 것 같으면 그걸 이해를 해야 됩니다. 닮은 것을 읽었다면 닮은 것이 있다고 그것이 이해되는데, 이 상태에서는 그렇게 읽히지 않아. 「위」 하고 읽고 나서 「빳」이라고 읽을 것 같으면 「빳」만 읽고 앞에 「위」는 내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조차도 모르게 그냥 아예 사라지고 없어. 「빳」만 있어. 그러고 나서 「빳」이 사라지면서 「사」가 있어. 「사」만 읽어. 그러니까 그 글자는 분명한데 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냥 「위」 「빳」 「사」 「나」 이것밖에 없어. 지금 현재 모든 것들이.

그러니까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그냥 그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 순간 순간밖에는 없는 거라.

그러니까 우리도 책을 읽을 때 그냥 그렇게 읽을 거 같으면 되게 힘드는 것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힘들어져.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괴로움으로 다가와진다는 거라.

 

이런 상태에서는 굉장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 패턴으로 바뀌게 됩니다. 거기서 누군가가 수행을 잘 지도해주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탁 방향을 틀어주면 열 가지 수행에서 일어나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아니면 자기 스스로 마음에서 좀 더 고요해지고 차분해지는 마음들을 개발시킬 거 같으면 이게 수행에서 여러 가지 결과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기쁨이 일어난다든지 행복해진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현상들로 바뀌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여기서 포기해버립니다. 힘드는데 누가 할려고 할 거라? 알아차림이 잘 되고, 자동적으로 되도 지 스스로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탁 일어날 것 같으면 목숨을 끊든지 그렇지 않으면 계율을 팍 어겨버리든지, 쉽게 말하면 술을 팍 먹어버린다든지 뭘 한다든지 해가지고 이 상태를 깨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될 거 같으면 그사람은 한동안 그 상태에 도달하려면 한참 동안 시간이 걸려버립니다. 그래서 수행 스승이 이럴 때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다행히 좋은 스승이나 좋은 마음들, '좋은 마음'이라 하는 것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바른 방향으로 노력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그리고 거기에는 알아차림과 집중이 같이 있다는 사실이 있을 때, 그래서 이 3가지가 분명하게 균형이 맞을 때 지금 현재 이 상태를 뛰어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균형이 안 맞을 경우에는 이 상태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거라. 그냥 계속적으로 그 상태만 보인다는 거라. 그러니까 대상을 보면 대상은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 그게 고통스럽게 보이고 사라짐의 끝에는 분명하게 딱 멈추는 것만 보이고. 그러고 나서 다시 또 일어나고 사라지고 멈추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일반적으로 인식할 때는 '알고 그걸 버려버리고, 또 알고 버리고' 하는 그것만 하는 거라. 그것만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거라.

그런데 그 '알고 버리고' 하는 것이 이게 구분이 된다든지 할 것 같으면 그게 괴롭지 않을 건데, 이 사람 이 사람이 분명히 구분이 되면 되는데, 똑같으면 무상하면 다 무상하게만 알게 되는 거라. 그냥 무상하고 버려버려지고 무상하고 버려지고 이렇게만 되기 때문에 너무 힘드는 거라. 그래서 그때는 좀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런 적이 많을 겁니다. 아까 지나님도 통증 때문에 괴로울 겁니다. 그럼 누구든지 이 괴로움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겁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이 없어집니까? 어떨 때 괴로움이 없어집니까?

괴로움은 육체적인 병이 나아가지고 괴로움이 아예 없어져버릴 때 그 괴로움이 사라져버리겠지. 그렇게 만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괴로움을 관찰해가지고 괴로움이 변하고 멈추고 하는 것에서 뛰어넘어가지고 이것이 사라지는 것만 계속적으로 일어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괴로운 것들이 있는 것들이 진짜 싫다는 마음이 탁 일어나든지, 그래서 이것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탁 일어나든지 그 3개 중에 하나가 돼야만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는 육체적인 것들을 고치면 첫 번째는 해결이 되는 거고,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는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으로 다스려야 됩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이것은 너무나 싫다고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탁 내야됩니다. 그것이 수행에서 수행 지도하는 사람의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염오심을 일으키는 방법들을 가르쳐줍니다.

 

자! 그래서 괴로움이 상존하고 있는 상태, 괴로움이 계속적으로 있을 경우에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생각이 계속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생각을 안 하고 싶어도 그것이 습관되어져 있는 사람은 생각이 저절로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생각을 끊어낼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하는데 이럴 때는 이 현상들은 어떤 경우든지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아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걸 알 때 무상한 성품으로도 보고 고의 성품으로도 보고 무아의 성품으로도 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상태가 깨져버립니다. 그 밑의 상태로 탁 떨어져버립니다.

변하고 있으면 '아, 변하는구나' 하고 알면서 '이것이 빠르게 변하니까 아, 이것은 괴로운 것이구나' 알고, '이것은 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까 이것이 무아구나' 알고, 그 속에서 지가 머리를 굴려가지고 무상·고·무아를 알려고 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무아는 나한테 다가와져야 되는 것이지 내가 그것을 찾을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착각해버리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만 자신이 알고 있으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혹시 벽돌쌓기 해봤어요? 벽돌을 요렇게 요렇게 쌓아가지고 안 넘어지게끔 쭉 쌓아놓는데, 누군가 한사람이 요걸 탁 빼고, 안 넘어졌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하나 탁 빼고 하는 거라. 그런데 어느 순간에 누군가 하나 탁 뺐는데 그냥 그게 싹 무너져버리는 거라. 이걸 무너뜨릴려면 위에서부터 하나씩 없앨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딱 하나만 잘 빼버리면 이 벽돌은 탁 무너져버립니다. 이 벽은 그냥 무너져버리는 거라.

 

그와 같습니다. 하나를 알면은 나머지 것들도 더불어서 같이 탁 다가와지게 됩니다. 무상한 성품을 분명하게 이해를 탁 하고 나면 고, 무아의 성품도 탁 다가와진다는 거라. 고를 알아도 마찬가지 나머지 두 개가 같이 따라와집니다.

그 사람의 습관지어진 것 또 수행해왔던 경험들 이런 것들이 어느 쪽이 강하느냐에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그것 중에 하나가 다가와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걸 그걸 다 알려고 합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거기서 일부러 다시 또 ‘아, 이게 무상한 성품이구나’ 하면서 좋아하게 되고, ‘아, 이게 고의 성품이구나’ 하면서 좋아하게 되고, 이러고 있는 거라. 그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로써 알게 될 때 다른 것들은 더불어 알게 되어지는 상태가 된다는 걸 분명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이제 도비도지견청정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죠? 그런데 왜 '도비도(道非道)'라고 했을까?

이것은 내가 걸어가야 될 길이고, 이것은 걸어가서는 안 되는 길이다. 왜 그럴까? 이 상태에서는 수행이 저절로 잘 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는 거라.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사실은 거기는 걸어가서 될 길이 아닌데 지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거라. 비도(非道)의 길인데.

만약에 부처님이 나와서 아, 니 좋다 이리 해주면 ‘아이고, 부처님 고맙습니다’, 이러고 그 길을 그냥 가는 거하고 같은 거라. '어, 이거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지 이것이 깨달음이 아니다, 이것이 내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다' 하고 분명히 알고 그거 버려버리고 ‘부처님 됐습니다. 노 탱큐’ 하고 지는 알아차림만 딱 유지해나가면 되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그냥 비도의 길로, 그게 청정인 줄 알고 그냥 가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청정하고 진배없거든.

 

똑같이 거기에 번뇌가 있어? 뭐가 있어? 뭐 거기에 알아차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거기도 알아차림이 있고 청정한 거 같고, 다 이루어진 것 같애. 어떻게 보면 도를 깨달은 것 같이 느껴지거든. 그러면 그냥 그 길을 가고 있는 거라. 그래서 도(道) 비도(非道)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갈 길과 가지 말아야 될 길을 구분해서 갈 길만 가는 상태가 딱 확립이 되는 상태.

그렇게 확립이 되고 나면 더 이상은 그전에는 앞에 단계에서는 다섯 가지 장애 부분이 크게 영향을 못 미치는 단계였는데,

이제는 열 가지 수행을 잘해서 일어나는 것들, 맨 처음에 아까 오전에 할 때는 수행을 못할 때 일어나는 다섯 가지의 장애들이고, 인제는 수행 잘해가지고 나타나는 열 가지 단계까지도 딱 뛰어넘어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여러분들 한번 잘 생각을 해봐요.

 

수행 잘할 때 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는가? 뻔합니다. 특히 많이 하는 게 그냥 한 시간 내내 알아차림 하면서 수행 잘하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언제 한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게 한 시간이 휙 지나갔습니다” 쉽게 말하면 무상한 성품을 그대로 알아차려가지고 한 시간이 지나간 것도 아닌데 그냥 게으름에 빠져가지고 그냥 현상이 변하지도 않고있는데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그것뿐인데, 그것을 지가 좋아 갖고 거기에 그냥 빠져갖고 한 시간 지나고 나서 “아, 스님 내가 수행 잘했습니다.” 절대 그러면 안돼!

 

수행을 잘해도 그와 비슷한 상태에 도달을 하기도 합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든 것은 아예 수행을 잘못하는 상태에 있을 때 그런 거고, 수행을 잘해도 대상들이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이면서 한 시간이 훅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무상한 성품으로 보이고 그러면서 한 시간 동안 훅 지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 딱 하나가 빠져버립니다. 뭐가 빠졌을까?

무상한 성품을 완전하게 확 알았으면 뭔가 한단계 탁 뛰어넘었다는 게 탁 드러나져야 되는데 그게 없는 거라. 쉽게 말하면 알맹이가 빠졌어.

그런데 무상한 성품으로 분명하게 있었거든. 한 시간 동안.

그게 보통 이 단계에서 빠지는 겁니다. 분명히 대상을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알아차렸고,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 나는 게으름 부리지 않고 집중력도 있었고, 분명히 바른 노력을 했고 잘 해나갔는데 딱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수행을 좋아하고 있는 상태'에 딱 빠져있는 겁니다.

 

그 다음 단계로 탁 뛰어넘어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에 딱 묶여져 있는 거라. 틀린 것은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러도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리고 지금의 단계도 그와 같이 똑같애. 그런데 틀린 것은 뭐냐면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무상·고·무아의 성품들을 분명하게 알아도 거기에는 좋고 싫음이 없어. 그냥 다가와지는 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뿐인데, 그런데 여기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이거는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서 그 도와 과에 이르는 거와 마찬가지의 상태로 딱 있는 거라.

가장 주의해야 되는 게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외 나머지들은 여기에서는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환희심도 일어나지고 기쁨도 일어나지고 또 어떤 면으로 할 때는 신심들도 일어나지고.

 

특히 스님들이 여기서 잘 빠지는 것이 '자기 것만이 최고다' 하는 거라. 자기가 하는 수행법이 최고라. 다른 건 다 틀렸어. 자기는 이 상태를 경험해봤거든. 요걸 하니까 무상·고·무아의 성품들이 분명하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중요한 거는 지는 그걸 좋아하는데 딱 빠져있는 거라. 자기는 모르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거는 틀렸고 이것이 맞다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이 이 상태에 있을 때는 다툼이 있으면 이걸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 니는 니대로, 나는 나대로 이런 스타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여러분들도 조심해야 됩니다. 특히 테라와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빠져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테라와다 만이 진리이고 테라와다 만이 맞다고 딱 한정지어져버리게 됩니다. 그게 맞고 틀리고가 뭐가 중요해? 여러분들한테? 그거 구분할라고 수행하는 것은 아니잖아. 남이 그거 하면 놔둬 그냥. 자기가 그 길을 간다는데 그걸 어떻게 할 거라? 단지 마음에서는 좋고 싫어하는 것은 이미 떠나버린 상태가 되어야 되는 거라.

내 것이 아무리 맞고 내가 가는 길이 맞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다른 것들을 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들은 인정해주고 그리고 그것들을 존중해주는 마음들이 생겨나야만이 자기가 가는 길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갈 수가 있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다른 것들을 배척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날 것 같으면 이 상태에서 빨리 넘어가질 못하게 되는 거라.

 

처음에 수행할 때, 나도 우빤디따 스님한테 배울 때 다마(구슬) 가지고 비유들을 들더라고. 다마를 가지고 요 다마를 맞추려면 바르게 겨냥해가지고 적당한 힘을 줘가지고 탁 던지면 이것이 싹 날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싹 날아가는 걸 보면서 그 다마가 탁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명중했을 때는 내가 겨냥한 것들이 분명하게 대상에 탁 맞았다 해서 그걸 "아디목카가 맞아떨어졌다" 하면서 "아디목카를 많이 개발을 하라" 그렇게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수행할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수행대상에 분명하게 마음이 탁 가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걸 '아디목카'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아디목카를 지나치게 개발을 하다보면 문제가 생겨나는게 딱 요 상태에서 또 생겨나는 거라. 자기 것은 맞는다는 거라. 만약에 남들이 맞혔다고 하더라도 그건 틀렸다고 하는 거라. 이런 잘못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 것에 대해서 신심이 일어나지만 '협소한 신심'이 돼버린다는 거라. 남의 것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는 그런 신심으로서 바뀌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아디목카는 좋은 성품도 있고 나쁜 성품도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바뀌지는 않도록 해야 겁니다.

 

요 뒤에 보면 "10가지 수행이 잘 됐을 때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쭉 적어놨습니다. 62페이지부터 뒤쪽으로 쭉 돼있습니다.

 

【 ◉ 관찰의 오염 ◉

① 빛(光 obhāsa) ② 지혜(智慧 ñāṇa) ③ 희(喜 pīti) ④ 경안(輕安 passaddhi)

⑤ 안락(樂 sukha) ⑥ 확신(確信 adhimokkha) ⑦ 책려(策勵 paggaha)-정진.

⑧ 안주(安住 upaṭṭhāna) ⑨ 냉정함(捨 upekkhā) ⑩ 미욕(微欲 nikanti) 】

 

어찌 보면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체험하고 비슷하지만 물론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 신비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그 신비체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의지하는 대상들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걸 강하게 의지했을 때,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대상을 의지했을 때 '하느님 하느님' 하면서 하느님에게 의지한다든지 다른 대상을 의지했을 때 무슨 빛을 본다든지 이런 식으로 다가와지는데, 그래서 그거는 일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더 이상 찾지 않게되면 안 나타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수행해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시시때때로 나타나집니다. 시시때때로, 계속적으로. 그게 어떨 때는 한 달, 석 달 이렇게 계속적으로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런 적 있죠? 밥 안 먹고 잠 안 자도 몇 달 동안은 그냥 성성하게 알아차려지고 있는 상태. 그게 이 단계에서 일어납니다. 그냥 자기는 깨어있는 것처럼 깨달음에 도달한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면서 지내는 때가 있습니다.

그게 대부분 다른 종교하고 차이나는 것들이 자기 자신이 체험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조금 오래도록 갑니다. 그때는 이것들은 반드시 해탈은 아니다 하고 인식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계속적으로 이 상태로 수행해야 되는 길은 아니다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을 강하게 내야 됩니다.

 

처음에 스님이 수행할 때 어디에 딱 잡혔냐면,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잣땅 웨디땁보 윈뉴히 띠" 라고 하는 경전 게송이 있습니다. 수행 열심히 하고 수행 잘되고 환희심이 나서 진짜 너무 좋아. 지금 이 상태에 딱. 그런데 그렇게 수행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 게송이 머릿속에 탁 박히는 거라. 이게 떠나질 않는 거라. 이게 어디를 가든지 뭘 하든지 잠을 잘 때도 이 생각이 떠나질 않고 있는 거라. 잠을 자도 실제로는 잠을 잔 게 아니라. 그렇게 해가지고 잠에서 깨어나도 지가 깨어난 줄조차도 몰라. 그냥 이 생각에 딱 매여가지고.

그러니까 남들이 아침에 탁발나간다 그러면 아, 내가 지금 탁발나가야 되는 시간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정도로 몰라 자기는.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뭐 하는지 조차도 모르게 되는 거라.

이럴 때는 자기가 평소에 잘 알고 좋아하고 하는 게송이 탁 머리에 박혀질 때가 있습니다. 집중력이 굉장히 강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이럴 때는 충분히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할 수 있는 것 첫 번째, 지금 현재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일시적인 것이지 그것이 계속 지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자신은 모든 것은 일시적이라고 압니다. 무상하다고 알기 때문에. 일시적이라고 아는데 그냥 일시적인 것이 계속 항상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일시적인 것, 일시적인 것, 일시적인 것은 알지만 그것이 그냥 계속 오토매틱화돼고 있기 때문에 항상하는 줄 알고 있는 거라. 그래서 자꾸 한 찰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그리고 지금의 이런 상태가 깨달음은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자꾸 머리에 되뇌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해나가면 될 겁니다.

 

집중이나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강해지고 그리고 뭔가에 대한 이해들도 굉장히 깊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모르는 글자라도 그게 내용이 확 머리에 다가와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수행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거기에 끄달려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럴 때 좋은 것이 있습니다. 보통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 그리고 뭔가에 감정의 기복이 좀 심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대부분 그것들이 어느 정도 치유돼버립니다. 되도록이면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이 상태를 딱 지나가고 나면. 생각을 안 하고 바로 그냥 실행을 합니다. 보면 그냥 보인다고 하지 그걸 가지고 생각을 굴리고 그러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뭔가를 하나 실행을 하더라도 생각을 많이 해가지고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해버리게 됩니다. 그런 좋은 점은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에서 지나치게 기뻐한다든지 지나치게 우울해진다든지 하는 것은 그냥 이것은 거의 사라져버립니다. 거의 대부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되게 기쁜 상태 아니면 되게 우울한 상태에 빠져갖고 빠진 그것이 안 없어지는 사람들은 현상을 관찰할 때 "고의 성품으로만 관찰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 도달했을 때는 수행하는 스승들이 대부분 무상한 성품이나 무아의 성품으로 자꾸 보라고 그럽니다. 고의 성품으로 보지 말고. 자기가 습관되어진 게 고의 성품으로 더 잘 알아진다고 하더라도 고의 성품으로 보지 말고 무상한 성품으로 보라는 거라. 그렇지 않고 고의 성품으로 많이 보게 될 거 같으면 우울한 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주의를 해야 될 부분입니다.

 

자! 이 10가지들은 왜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까? 세 가지!

첫 번째는, 거기에 대한 견해가 확립되지 못하는 경우. 좋은 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견해를, '아, 내가 수행해서 삼매에 도달해야지, 삼매에 들었으면 좋겠다' 하고 견해를 딱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행하니까 이런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는데 '나도 그거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을 딱 가져버린다는 거라. 견해에 딱 집착해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은 어떤 경우든지 견해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죠? 그러면 그것은 자신이 일으켜서도 안되고 그걸 가지고 수행을 해서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견해에 집착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현상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이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들을 보면 라고 하는 것이 있을 경우. 완전하게 없을 수는 없습니다. 빠져나왔다 하더라도. 그리해도 나라고 하는 것들에 강하게 붙잡혀버리면 여기서 빠져나오질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현상을 분명하게 봤다. 내가 경험했다' 하는 걸, 조금 전에는 자기가 분명하게 나라는 것이 없이 무상한 성품으로 분명하게 보고 있었으면서도 나라고 하는 것을 떼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다음에 하나는, 좋아하는 것. 이렇게 일어나는 10가지 현상들은 어떤 경우든지 지가 좋아해서 달라붙어 있는 겁니다. 안 좋아하는데 왜 달라붙어 있을 거라? 그래서 지가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거라.

그래서 요 3개들은 분명하게 '아, 지금 여기에서는 내가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나라고 하는 인식을 하고 있는가?, 내가 좋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살펴봐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빠져나오게 되는 거라.

 

자! 그렇게 해서 10가지입니다.

(obhāsa), 지혜(智慧 ñāṇa) 여기에 지혜라고 했는데 지혜라고 보기보다는 조금 번역하기 애매해서 그러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입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무상한 성품으로 봤다, 고의 성품으로 봤다, 무아의 성품으로 봤다 하고 자기 스스로 알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상한 성품으로 분명히 보일 것 같으면 그다음 단계로 뛰어넘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뛰어넘어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냥 매여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걸 그렇게 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그 상태에 매여있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기쁨 (pīti) 라고 해서 세 번째. 기쁨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경안(輕安 passaddhi) 빳삿디, 아주 가벼운 상태를 얘기합니다. 이럴 때는 어찌 보면 몸이 솜털같이 가볍습니다. 아주 대상이 일어나면 마음도 그렇게 솜털같이 닿기 때문에 바로 즉시에 잡아채듯이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아도 그것이 분명하게 무상·고·무아의 성품 중에 어느 하나로써 보여. 그렇게 되게 됩니다.

 

사실은 좋은 성품인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이게 아라한의 상태와 마찬가지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이제 수행의 목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게 되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견해와 나와 좋아하는 것 셋 중에 하나에 딱 매여져 있는 집착하고 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좋은 거지만 빠져나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즐거움(sukha)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아까 얘기한 아디목카(確信 adhimokkha) 라고 하는 확신, 그것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일곱 번째 책려(策勵 paggaha) 책려라고 하는 것은 노력한다는 것들인데, 브레이크 없는 노력을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차도 가속페달 하고 브레이크가 있는데 가다가 곡선 구간에는 브레이크를 밟고 돌아야 되는데 계속 가속페달을 밟고 곡선 구간을 가버리는 거라. 그럼 어떻게 되요? 그냥 사고가 나게 돼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가속페달을 밟게 되는 것들입니다. 쉬어야 될 때는 쉬어야 돼. 잘 때는 자야 되는 거고. 그런데 성성하다 해가지고 계속적으로 하게 되는 거라. 나중에는 그러고 나면 몸이 딱 망가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 상태를 책려라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우빳타나-안주(安住 upaṭṭhāna) 거기에 딱 정착해가지고 있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이 상태에서도 분명하게 빠져나와야 됩니다.

그다음에 아홉 번째 우뻭카-냉정함(upekkhā) 우뻭카는 여기서는 그냥 평온하고 평정한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은 그리하더라도 자기 것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서, 아까도 얘기했듯이 '내 것이 최고다' 하는 것들, '편협된 평정함'을 얘기합니다. 그런 상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이든 평정한 것일 때는 차이는 분명히 알지만 구별은 안 합니다. 그런데 구별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현재 여기 평정의 상태에 빠지고 있는 거라. 자신의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할지 몰라도 어쨌든 구별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상태에 빠져있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 미세한 욕구(微欲 nikanti)

이것은 여기에 한번 보십시오. 이것은 여러분들이 자칫 잘못하면 착각하는 게 이 아홉 가지가 미세한 욕구에 해당이 된다 해가지고 이 9가지에 대한 미세한 욕구로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걸 단일 항목으로 정해놨을 때는 왜 그럼 9가지라고 안 하고 10가지라고 그랬을까?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종류입니다.

 

그래서 장애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니깐띠는 달콤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오랜 시간 관찰실천 해왔다, 상당히 성장해있다, 지혜도 나타난다, 붓다께서 설하신 진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길은 틀림없다. 이것이야말로 가야 할 길, 실천해야 할 길(道)이다. 이것은 당연하고 또한 사실이다." 하는 함정에 딱 빠지게 되는 것.

그러니까 이것은 가지 말아야 되는 길이다, 요 길은 가야 되는 길이다, 그래서 가는 길을 분명하게 발견해서 이 길을 가야되는데, 이것은 당연하다 하고 하는데 딱 빠져있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왜 그럴까? 그것도 쉽게 말하면 미세한 욕구에 해당이 되는 거라. '길이 아닌 것들이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알고 나면 자신은 어떤 길로 가겠어요? 그냥 바른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른길로 가고 있으면 되는데, 그러면서 바른길로 가면서 오로지 해야 되는 것은 그냥 끊임없이 알아차림하는 것뿐이다 하고 알고 그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걸 구분하고 나서 바른길로 가면서 ', 이것만이 진짜 내가 가야 되는 길이다' 하고 욕구를, 아주 미세하지만 욕구를 내고 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이것도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바른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바른길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 그게 미세하든 아니면 굵은 것이든 그런 것들이 끼어들어서는 그것은 바른 것이 되지를 못하는 거라. 그래서 그걸 굉장히 주의깊게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뒤에 뇌의 개발이라 해가지고 원시뇌라고 적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거는 어떤 얘기냐면 그 사람마다 고유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개발하지 않고 쉽게 말하면 이 머리를 자기가 존재할 수 없는 상태일 거 같으면 이것이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상정해가지고 내가 또 다른 머리를 내가 환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서 명령을 내려가지고 여기 지금 실제로 있는 자기 머리에 명령을 내려서 이 머리가 뭔가를 시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현재 있는 머리의 명령을 따라가지고는 대부분 실패를 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성적인 머리 그리고 수행으로 인해서 형성된 머리들이 반드시 존재한 상태가 되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개발되어진 뇌들이 원래부터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이 머리들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로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탐진치에 빠지지 못하도록 뇌를 형성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뇌가 뉴런이라고 하는 연결고리들을 해가지고 지금 실재하는 우리 머리들을 지배해서 통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집중하고 알아차리고 노력하고 하는 것이 바르게 잘 되도록 만들어야 만이 그게 강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바른길로 그냥 끊임없이 나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수행에서 잘 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 단계들을 뛰어넘어서 자신이 가는 길이 분명해질 수 있도록,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확신이 탁 들게 될 때를 도비도지견청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것도 지금 현재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하지만 이것이 수행의 끝은 아닙니다. 끝이라고 착각해버리면 안됩니다.

 

자! 그렇게 해서 다섯 번째 청정까지 전부 마쳤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오전 오후 나눠서 6, 7청정 그냥 연달아하고 올해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