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지견청정(智見淸淨) (20151219.서울)

담마마-마까 2022. 3. 11. 09:00

https://youtu.be/t_1GWZJ4Rbg

* 지견청정(智見淸淨) (20151219.서울)

 

88페이지 지견청정(智見淸淨) 부분입니다. 여기는 도와 과에 대한 얘기입니다.

도와 과에 든 사람들은 성자라고 그러죠? 그래서 제수순지까지는 아직은 속인의 영역에 속하는 거고, 그뒤부터는 성인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속인도 종류가 많죠? 어찌 보면 부처님의 수행의 길에 대해서 설명을 해놓은 게 이보다도 정확하고 자세하게 해놓을 수 있을까? 어떨 때는 감탄을 좀 많이 합니다. 어디에서 그 가는 길을 이렇게 자세하게 낱낱하게 밝혀놨을까? 불교 말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아, 참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해서 이렇게 연민심을 내는 것이 참 크구나' 하는 마음들을 빨리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르쳐주면 뭐 하노? 그 길들을 안 가면 뭐 소용이 없는 건데. 여러분들은 그 길을 반드시 걸어가야 됩니다. 그 길은 어떤 방법으로 수행을 하든 그것에 관계 없이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하게끔 됩니다. 그것은 어긋날 수가 없는 거기 때문에 잘 한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게 좋고.

그다음에 그 길을 통과하고 나면 이제는 속인이 아니고 세속인이 아니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을 하게 되는데 그게 인제 지견청정(智見淸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지견청정도 만날 '깨달음' '깨달음' 하는데, 깨달음의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것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세하게 밝혀놨습니다. 가는 길뿐 아니라 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까지 자세하게 얘기해놓았기 때문에 다 성인이라 해서 똑같은 성인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한국에서 얘기하듯이 단박에 뭘 깨달았다, 그러고 나면 그게 마지막 깨달음처럼 되는 법은 부처님 법에는 없다는 거라.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수행은 어떤 경우든지 그게 시간이 짧고 길고의 차이인 것이지, 그 순서는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도와 과가 있으면 도에 이르지 않고 과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거는 만약에 과에 이르르고 나면 그 도는 그다음에 다시 또 그 과에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안 가도 됩니다. 그래서 과에 가서 다시 또 자기 자신이 현재 이 상태에 있다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서 거기에 이를 수는 있어도 반드시 도에 이르렀으면 과에 이르르게 되는 거고, 그것도 도에서 과로 이르는 것은 일순간에 이르기 때문에 도에 이르르고 나면 반드시 과에 이르르게 되고, 그러니까 도에 이르는 사람이 과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꿔 얘기하면 가끔 사람들이 "소예류과에 이르렀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소예류과에 이르고 나면은 소예류도에는 당연히 이르렀겠죠? 소예류도에 이르렀을 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현상들은 반드시 자기한테서 끊어지고 없어야 됩니다. 조금 전까지의 단계에서는 지혜가 일어나긴 하더라도 번뇌가 완전히 떨어진 건 하나도 없었어.

그러니까 뭔가 하나씩 끊어져나가야 되는데, 끊어져나가는 게 언제 끊어지느냐 하면,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끊어져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과에 이르렀을 때는 끊어져나가는 게 없으면 번뇌도 떨어져나가는 게 없어요. 일순간에 일어나는 도의 마음에서 번뇌가 탁 끊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번뇌가 탁 끊어지고 나면 바로 쉽게 말하면 과에 탁 이르게 되는 그런 형태입니다.

그게 성인의 4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단계에서는 반드시 도에 이르렀으면 그것은 탁 끊어졌기 때문에 그거는 다시는 안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안 하게끔 되는 거지.

만약에 다시는 성내지 않는 상태가 됐다 그러면 자기가 뭐 어떤 상태에 있든 간에 다시는 성내지 않는 상태가 딱 돼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것뿐 아니라 "예류과에 이른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도 예류과에 이른 사람 치고는 뭔가 조금 미심쩍은 것들이 좀 보여. 그럼 그 사람은 예류과에 이른 것이 아니다 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지금부터는 그 경지에 이르고 나면 다시는 그 경지 밑으로는 떨어지는 일이 없어.

수행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르고 나면 그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는 이 상태에 이르고 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 나면 다시는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성인의 경지에서 예류도와 과에 이르는 겁니다. 그게 가장 기초적인 상태입니다.

성인하고 일반 범부중생하고 차이점은 뭘까? 크게 한번 구분을 해봐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 이렇게 봅시다. 대표적인 거, 마음 하나만 봅시다.

가장 마음이 가볍고 부드러운 것은 당연히 아라한에 이른 분들이 가장 부드럽고 가볍겠지. 그다음에는 불환과에 이른 사람일 거고, 그다음에 일래과에 이른 사람일 거고, 그다음에는 예류과에 이른 사람일 거고. 그래서 가벼운 것으로 치면은 범부중생들은 아주 무겁고 그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가벼워지는 상태인데, 그런데 범부중생하고 수다원이라고 하더라도 수다원에 이른 사람하고의 마음은 천지개벽할 정도로 마음은 달라져 있는 상태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 왜 마음은 그렇게 진짜 180도로 확 바뀌게 될까?

「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나의 몸에 대한 것들, 내 몸에서 변하는 성품들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나에 대한 무거운 것들을 가지고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미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번뇌가 이 몸에 대한 것들이 탁 떨어져나가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이 몸이 없으면 어떻게 되요? 되게 가벼워지죠? 그와 같습니다. 마음은 그때부터는 굉장히 가벼워집니다.

 

당연히 마음만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고 이 몸과 관계되는 것 어떤 것에도 집착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아파도 그것으로 인해서 싫은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내가 늙어가도 그것에 대해서 거부할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든지 이런 것들은 어떤 경우도 안 일어나게 되는 거라.

이미 예류과에 이르른, 그리고 예류과에 이르기 위해서 맨 처음 일어나는 것, 그것이 끊어지는 것이 유신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몸에 대한 견해는 완전하게 확립이 딱 돼버립니다.

 

조금 전까지 쭉 그 단계를 겪고 오는 것이 뭐였어요 대부분?

이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 이 몸과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점점 엷어져 오는 단계를 거쳐 오는 거라. 그것이 엷어져 오다가 이제는 완전히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집착하는 것들이 완전히 탁 끊어져버리는 단계가 바로 수다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수다원은 어찌보면 참 간단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그런데 그게 실제적으로는 행동하는 것이나 여러 가지 부분에서 굉장히 차이를 보이고 있는 거라. 그래서 수다원에서 떨어지는 나머지 2개 의심하고 그다음에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들은 당연히 나의 몸에 대한 집착이 없을 거 같으면 이 2개는 자동적으로 떨어져나가버리게 됩니다. 그거는 어찌 보면은 수다원에서 떨어지는 것 중에서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렀으면 본인이 압니다. '이 몸에 대한 것들은 어떤 것에도 나는 집착하는 것이 없다' 하는 사실을 자신 스스로가 분명하게 탁 압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태가 이미 많이 바뀌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음에 또 범부중생하고 성인하고 차이나는 게 뭐가 있을까? 어떤 차이가 있을까?

꿈 좀 많이 꾸는 사람? 꿈 많이 꾸어요? (수행자 대답 : 예)

꿈 때문에 자고 일어나도 피곤한 건가요? (수행자 대답 : 아니요)

피곤하지는 않고? (수행자 대답 : 중요한 거는 꿈을 꾸면 그게 현실로 일상생활에 나타나요) 그건 꿈이 연장되는 거네?

꿈을 꾸고 꿈으로 인해서 생활에 지장을 받고 이런 게 대부분 범부중생들입니다.

스님한테 와서 하는 많은 질문 중에 “스님, 나 이런 꿈꿨는데 수행하고 관계된 겁니까?” 그런 질문 좀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무슨 꿈풀이 해주는 사람도 아닌데.

수다원에만 이르러도 꿈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어나기는 합니다. 아라한에서는 완전히 끊어져버리는데, 일어나기는 하더라도 일어나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럼 잘 때는 수다원이 아니라는 얘긴가?

 

어쨌든 꿈이 적으면 적을수록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그리고 꿈으로 인해서 생활하는 것이 장애를 받지 않게끔, 꿈으로 인해서 뭔 꿈을 꿨는지는 몰라도 꾸고 나서 피곤하다든지 아니면 꿈 때문에 괜히 마음이 걸려있다든지 이러면은 아, 내가 지금 한참 내가 공부를 해야되는 사람이구나 판단을 하면 맞습니다.

 

가장 좋은 게 뭘까? 성인이 안 되도 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 어찌하면 꿈으로부터 해방될까? 꾸지마! 안 꾸면 돼! 지가 원하지 않으면 안 꿔! 지가 원하니까 꾸는 거지. 자기 전에 뭔 생각을 한다든지 그럴 것 같으면 반드시 꿈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거는 뭐라? 내가 꿈을 꾸겠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그러면 자기 전에 생각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아예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거라.

그러면 자기 전에 호흡을 관찰하면서 그냥 잠에 들어버리는 거라. 생각 안 하고 자면 밤에 꿈 안 꾸게 된다니까. 그리고 적게 꾸게 되는 거고. 좋은 방법 놔놓고 괜히 하루 일과를 돌아보면서 오늘 내가 잘살아 왔는가 못살아 왔는가? 그거는 내가 꿈꾸고 그다음날 영향을 받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 지가 좋아가지고 지 죽는 줄 모르고 그걸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그걸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잘 때는 모든 걸 다 마치고 나서는 배에다 손을 올리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라는 거라. 배에 손을 올리면 관찰하기가 참 수월해집니다. 그러면서 자라는 거라. 그렇게 자는 버릇을 들여놓으면 잘 때 아주 편안하게 자. 그리고 언제 시간이 지났는가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아침에 깨어나진다는 거라. 깨어나면 개운해. 시간이 얼마를 자든지 간에. 그러면 꿈이 없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시달릴 일도 없는 거고, 그래서 그다음날 생활하는데도 잘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항상 자기 전에는 반드시 수행을 하면서 잠에 들도록 하라.

그래서 성인과 범부중생의 차이 두 번째가 꿈, 꿈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범부중생하고 성인들하고 차이가 뭐 있을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무상··무아 그리고 이 몸이 불결한 것이다 하는 4가지! 이게 지금 엷어져 있느냐 아니면 두꺼워져 있느냐? 이것으로 판단하면 됩니다.

아라한에 이른 분들은 이 4가지가 완전히 떨어져있습니다. 완전하게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몸은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무상한 것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조건따라 일어나는 것이고 무아이다. 모든 현상들은 불만족스러운 것이지 그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모든 현상들은 변하는 성품인 것이지 실체하는 것이 없다 하고.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소중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결한 것이고, 그래서 그런 것들은 빨리 끊어내야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오늘 여기 올려고 하는데 사람들도 만나고 스님도 봐야되니까 좀 예쁘게 단장해야 되겠다, 좀 많이 찍어발랐으면은 마지막 4번째 이 몸에 대한 불결한 것들이 더 많이 있는 거고, 불결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니까 더 찍어 바를 거 아니라. 실제로 불결한 데 그걸 갖다가 미화시킬려고 할 거 같으면 많이 찍어 바르는 거고, 안 찍어바르고 왔으면 그게 조금 더 엷어진 거고.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 그다음에 부정한 것, 이 4가지가 나에게 얼마만큼 엷어져 있는가? 이런 것들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남에게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부처님의 진리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자꾸 알고 있을려고 해야 됩니다. 입으로만 자꾸 무상·고·무아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고 자꾸 체험해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무상한 것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자꾸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이게 또 다른 것들입니다.

 

또 성인과 여러분과의 차이점은 또 있습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 삼보에 대한 확신들은 이미 수다원에만 들어놔놓으면 인제는 확고해서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다원부터는 그다음 아라한까지는 삼보에 대한 확신은 동일하게 쭉 가게 됩니다.

앞에 거 3개 얘기할 때는 그건 순차적으로 제거돼나가고 또 발전돼나가는데, 삼보에 대한 확신은 이미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의 그 확신은 아라한에서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양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의 확신은 더 이상 그거보다 더 크게 변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딱 돼버리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삼보에 대한 것들이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것들을 자꾸 만드는 것이 성인에 이르기에는 좀 더 수월해집니다.

어떤 식으로든 삼보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여러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참고를 하도록 하고, 수행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경전독송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법문을 통해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그 확신이 들 수 있도록 해나가든지 하고, 안 그러면 바라밀을 닦는 거라든지 해서 그걸 자꾸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 그다음에 탐욕과 성냄, 많으면 많을수록 범부중생에 더 가까운 거고 탐욕과 성냄이 점점 엷어져갔을 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물론 수다원에 이르더라도 탐욕과 성냄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분은 탐욕과 성냄이 없다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이지, 안 그러면 저분은 탐욕과 성냄이 좀 있는 것 같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건 아직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실제적으로 수다원에서는 마음에서는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말이나 행동이나 여러 가지로 인해서 표출되는 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욕심을 차린다든지 그런 것이 눈에 보인다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수다원도 아니라는 얘기라.

 

물론 탐욕과 성냄이 완전하게 떨어지는 상태는 불환과에 이르렀을 때 완전하게 탁 떨어지지만, 실제적으로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거로 칠 거 같으면 이미 수다원에서도 그것이 표출되지 않는 상태라는 거라. 자기에게는 영향을 미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가 돼있는 거라. 그래서 탐욕과 성냄을 줄이는 것도 빨리 수다원, 성인이 되기 위한 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까 여러분은 아직 성인이 아닌 것 같죠? (ㅎㅎㅎㅎㅎ)

 

이 얘기하는 것들이 전체가 다 공통분모로써 해당이 돼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삼보에 대한 확신은 없는데 다른 것들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인이 아니라는 얘기라. 지금 얘기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다 갖추어졌을 때 그걸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게 지금 얘기하는 지견청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인이 돼가지고 나는 더 이상 이 길을 따라가는 거 외에는 더 이상 없다 하는 상태가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88페이지 넘기고, 그다음에 90페이지, 지혜와 깨달음에 차이가 있는가?

앞의 단계에서는 지혜의 단계였죠? 물론 지금 도와 과도 지혜의 단계입니다. 지혜의 단계인데 그런 지혜 하고 깨달음하고는 차이가 분명히 있죠? 그래서 조그만한 지혜가 열렸다고 해가지고 그걸 깨달음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거라. 그럼 내가 수행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 이런 지혜에 이르렀다 해가지고 자기가 그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되는 거라.

 

지혜하고 깨달음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지혜는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득템입니다. 득템! 그런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이 완성될 때 이루어지는 경지입니다. 그 경지는 그 경지에서 더이상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그 경지하고 자기가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지혜 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것들을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지혜를 얻었다고 해가지고 내가 깨달았구나 하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빨리 마음을 돌려가지고 아, 내가 지금 이것이 수다원에 이른 것인가, 이것이 아라한에 이른 것인가 하고 판단해가지고 이르지 않았다고 결론이 내리면 그럼 그 지혜도 버려버리고 지금 오로지 해야 될 것은 그냥 수행하는 것뿐이라.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그런 사람이 한 분 있었어요.

“스님, 내가 어떤 것에도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무상하게 보이고...” 이러는데 수행은 참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지혜는 얻은 것 같은데, 그래서 스님, 내가 수다원인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수다원은 자기가 아는데, 본인은 수다원이라고 생각해요?” 이러니까 그거는 모르는 거라. 그런데 지혜는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착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혜가 이루어지면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지혜 하고 깨달음 하고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는 거라.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한 차이입니다. 아까 그 지혜의 단계들을 봤잖아. 여러 단계를 다 거쳐가지고 그 지혜들이 다 끝났을 때 그다음에 인제 도와 과가 나오는 건데 그걸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지혜가 이루어졌으니까 그때는 내 마음에서는 나라고 하는 견해가 없었거든.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견해가 없는 사람은 수다원이다 하니까, 나라고 하는 견해가 없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거라. 사실은 있는 건데, 유신견이 있는데도 유신견이 없는 거라고 착각을 해버리는 거는 잠재돼있는 것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잠재돼있는 것까지 뿌리를 뽑아서 없애버리는 것들이라. 그래서 드러나는 것이 없다 해가지고 그것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닌데 본인은 그걸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아,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구나, 내가 불환과에 이르렀구나 이렇게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절대 아닙니다.

어떤 경우든지 뿌리를 완전하게 파내가지고 없애버리기 전에는 위에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아무리 풀을 짤라봐봐야 그것은 다시 또 올라옵니다.

 

가끔씩 언양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마나 스님한테 전화가 오는데 “스님, 참 내가 수행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뭘 잘못했는데?” “나는 예전에는 이런 번뇌는 내가 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스님은 혼자 고요히 숲속에서 수행을 하거든. 혼자 그 숲에서 무서워 죽겠는데, 거기서 수행하는데, 그런데 고요히 있다 보니까 나는 분명히 끊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스르르륵 올라온다는 거라. 그러고 보니까 내가 끊어낸 게 하나도 없는 거라. 그래갖고 슬퍼갖고 전화를 한 거라.

그래서 “잘했다. 안 끊어졌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도 큰 발전이다. 그걸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거 아는 것이 어디고. 그럼 인제 뿌리를 봤으면 끊어내기 쉽겠네? 열심히 하라.”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거라. 잠재된 것을 끊었다고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렇게 착각 해버리면 거기서 끝나. 자기는 뭐 어쨌다 하면서 자랑질하러 다니기 바쁜 거라. 그래서는 안됩니다.

"지혜와 깨달음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내가 아무리 삼매에 들어서 삼매를 자유자재로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또는 내가 어느어느 지혜를 얻었다고 해가지고 그것도 깨달음이 아닙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분명히 그랬습니다. 지혜가 깨달음입니까? 아니다. 그럼 선정삼매에 이르러서 자유롭게 신통력을 얻는 것이 깨달음입니까? 아니다. 그런 것은 깨달음 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그렇게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92페이지, 도심(道心 magga-citta)과 과심(果心 phala-citta)의 차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도심과 과심, 도와 과! 도의 마음은 일평생 한 번 딱 일어나는 겁니다. 과의 마음은 여러번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수다원 도에 이르는 것은 일평생에 지는 한번 일어나지는 겁니다. 수다원 과에 이르는 것은 수다원 과의 마음은 아, 내가 수다원 과구나 하고 다시 일으키면 또 수다원 과심, 수다원 과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도는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끊어버리고 나면 다시는 그것을 붙일 방법이 없습니다. 끊어진 것은 붙일 방법이 없어. 번뇌는 언제 끊어진다고? 도의 마음에서 도심에서 끊어지는 거라. 그러니까 탁 끊어지고 나면 그것은 다시는 붙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일어날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도의 마음일 때, 그 찰나 간의 도의 마음일 때, 일평생 한 번 일어나는 도의 마음일 때 번뇌들이 탁 끊어집니다. 그래서 탁 끊어졌다고 알 때 '아, 그것이 끊어졌다'고 내가 아는 순간 과의 마음에 탁 들어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은 찰나 간에 그다음 다음 순서로써 일어나지게 되는 거라.

끊어졌으면 지가 끊어진 줄 알 거 아니라. 끊어지는 것은 도에서 끊어지는 거고, 끊어진 것을 아는 것은 과에서 아는 거라. 그래서 그 끊어졌다고 아는 것은 지가 즐길려고 할 것 같으면 '음, 나 이거 없네' 하고 아는 거하고 같은 마음이라. 그래서 과의 마음은 여러번 일어나질수 있는데 과의 마음은 다시는 안 납니다. 그래서 한번 끊어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수다원에서 대표적으로 끊어지는게 세 가지라고 그렇게 얘기했었죠?

그런데 유신견, 의심, 계금취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게 있습니다. 수다원에 이르는 것, 탁 번뇌가 끊어지는 것들을 여러분들의 말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애요?

남을 비방 안 하는 겁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자기의 견해가 만약에 잘못됐다고 뭐라 한다 해가지고 그걸 슬퍼할 수 없는 거라.

쉽게 말하면 어떤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성인의 경지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나는 수다원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는 틀렸다고 얘기하는 것은 자기는 그거 이루지 못했다고 광고하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다음에 또하나,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 여러분이 판단하기 쉬운 것은, 그 어떤 경우든지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속일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다른 사람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속이지도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자기가 잘못해가지고 "나 잘못 안 했어" 이렇게 오리발 내민다, 그거는 수다원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수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방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속이지도 않고 그것을 감출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감출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감출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게 공통적인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은 한번 끊어지면 그것은 언제 일어난다고? 수다원 도에서 끊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아는 것은 과에 이르른 거거든.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른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는 거라.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할 방법이 없어.

 

그다음에 도의 마음(magga-citta 道心)의 작업.

조금 전에 얘기한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다음에 후(後)의 관찰.

도의 마음에서 그렇게 하고 나면 그후에 '아, 내가 이런 게 끊어졌구나' 하고 관찰을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러면은 과에 탁 이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무상·고·무아와 해탈의 관계에 대해서 있습니다.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 그렇게 해서 수행을 통해서 이런 것이 끊어졌다 하는데, 그것을 아는 것이 '아, 이게 무상하구나' 해서 아는 사람도 있고, '아, 참 이것은 불만족스러운 거구나' '아, 이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으로서 아는 사람도 있고.

만약에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 같은 경우 호흡이 너무나 빨라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롭다고 아는 방법으로써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러면은 고에 인해서 해탈에 이르게 된 거라.

그런데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 그 어디에도 내가 내마음대로 조절할려고 해도 안 된다, 무아인 것을 아는 사람은 무원해탈(공해탈)을 하게 되는 거라. 또 해탈에 이르게 되는 거라.

또 그다음에 내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이 지금 항상 똑같은 것이 없이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으로 무상한 성품으로 알 것 같으면 무상해탈로 무상해탈에 이르게 되는 거라.

 

그러면 만약에 내가 무상으로 인해서 해탈에 이르렀다, 그러면 그사람은 고인 줄을 모르고 무아인 줄을 모릅니까? 무상한 것에 어떻게 내가 있고, 무상한 것에 어떻게 즐길 거리가 있겠어? 단지 무상한 것으로 그게 두드러져 가지고 해탈에 이른 것이지 고와 무아가 없는 상태 그걸 모르는 상태는 아닌 거라. 그런데 그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상이니 무아니 고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라.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삼법인은 그사람에게는 하나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무상한 것으로써 무상·고·무아가 나타나는 거고, 무아인 것으로써 무상·고·무아가 나타나는 거고, 그래서 그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는 실제적으로 삼법인이나 사성제나 이런 것들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것은 가르칠 때나 아니면 책을 봤을 때 글자상으로만 필요한 것들이지 실제 수행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상태일 것 같으면 그것은 다 하나로써 알게 됩니다. 하나로써.

 

고의 진리를 알았다, 그럼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고의 원인은 모른 상태에서 고를 알았을까? 그건 아니잖아. 내고로 인해서 내가 진리에 도달했으면 고로 인해서 이르는 진리에 대한 그 사성제를 모르는 상태일까? 아니라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게 99페이지에 보면, 문에서 문패를 취한다.

자기가 어떤 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느냐에 따라서 무상도심 무상과심, 무원도심 무원과심, 공도심 공과심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로 인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은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에서 공은 대승불교에서 쓰는 그 공(空) 순야타 라고 하는 거하고 테라와다에서 하는 공(空) 하고는 개념이 다릅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공.. 뭐라고 하죠? (수행자 대답 : 공즉시색) 공즉시색, 색으로 인해서 공이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테라와다적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말이 안되는 거죠? 말이 안되는 겁니다. 공은 무아인 것을 알 때 무아인 것들이 공으로써 표현되는 것이지, 그게 색하고는 전혀, 물질적인 것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빅뱅이론 같이 뭐 어떤 것이 탕 터지면 그속에 공간 같은 것이 탁 있어가지고 그래서 '아, 나는 공으로 깨달았다' 그런 거는 없어. 그걸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사향사과(四向四果)에 의한 구별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 그렇게 구분이 돼있습니다. 그것들은 성자들을 구분하는 방법입니다.

실제로는 성인이 되기 전에는 사실은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삼보에 대한 확신은 삼보에 대한 믿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믿음이 없이 테라와다 불자라고 얘기 안 하는 것은 어찌 보면은 성인이 안 되면 테라와다 불자가 아니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지라. 단지 테라와다 불자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인 것이지.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자! 그렇게 보통 얘기했는데, 성인하고 여러분들하고 아까 차이점에 대해서 얘기했고,

인제는 성인이 되고 나면은 그 성인이 된 사람들이 나아가는 길이 딱 정해져있습니다.

맨 첫 번째가 뭔지 아세요? 수다원에 이르렀든 아니면 아라한에 이르렀든 꼭 마찬가집니다. 법을 지키는 것들입니다. 법을 자신이 어기는 적이 없을 뿐아니라 법을 지키는 것이나 지키기 위해서 법을 설하게 되는 거고, 또 법에 따라서 자기 자신이 행동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법을 지키고 지금 내가 설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경전을 암송 한다든지 그 일들을 하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이 지금 부처님 법을 알고 있는 거는 적어도 수다원에 이르는 사람 이상이 이때까지 쭉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 법을 그대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 법을 지킬 수가 없는 거라. 왜 그럴까?

수다원 이상 성인에 이르지 않는 사람들은 그 법을 법 그대로 그냥 지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다 자신의 견해를 넣게 됩니다. 그러니까 경을 만들어도 부처님 말씀에서 자기 말을 집어넣게 되는 거고, 아니면 다른 어떤 경을 부처님 말이다 하면서 만들어내게 되는 거고, 그렇게 돼버리게 됩니다.

 

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어떤 경우든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형할 생각들도 전혀 없는 거고 그것을 뺄 생각이나 더할 생각도 전혀 없다는 얘깁니다. 그거를 그대로 그냥 지킨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지금 그 법을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것은 과거부터 해서 부처님 시절부터 해가지고 계속적으로 끊이지 않고 성인들이 태어나왔기 때문에 지금 그것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법의 소중함을 알아야 됩니다. 법을 지켜왔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성인이 됐을 거 같으면 또 두드러진 특징이 또하나 있습니다.

자신은 더이상 미끄럼틀을 타지 않는다. 더 밑으로 떨어질 일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딱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거는 내가 확신이 들어서 인제는 안심하는 단계가 됩니다. 인제는 아무리 낮은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4가지 악처에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지금 상태보다는 어쨌든 다 좋아진다는 얘기라. 그러면은 이생에서 자신이 태어난 것에 대해서 얼마나 내가 잘했는가 하는 거라.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안심하게 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탁 들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 안심하는 마음이 그거보다도 크기 때문에 그거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살아가면 재가자들도 있을 거고, 그런데 얼마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잖아. 그리하더라도 전혀 그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안 가는 거라.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더이상 나빠질 일이 없는데 지금까지도, 뭐 하는데 그거 걱정을 해싸. 그런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차이가,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즐거워하는 일이 많겠어요, 괴로워하는 일이 많겠어요? 아마 삐까삐까 한다고 하겠지만, 괴로움의 시간들이 딱 제한돼버립니다. 괴로움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고, 아프면 아프다고 아는데 그것이 정신적인 현상으로 발전되지 않기 때문에 그게 제한돼버리는 거라.

육체적인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육체적인 아픔도 아픔이지만 시간이 딱 제한이 돼버리는 거라. 거기서 딱 끝나버리는 거라. 그 어떤 경우든지 괴로움은 제한-자물쇠를 딱 채우는 역할들을 하는 거라.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그렇게 괴로움에 대한 자물쇠를 반드시 채우는 거라. 그래서 그것이 발전이 되지를 않는 거라.

어떤 성인이든 수다원이든 불환자든 똑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건 성인이 아닌 상태라. 그리고 그 괴로움의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닦아나갈 것이 훨씬 더 많다고 보면 됩니다.

괴로운 조건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겁니다. 괴로운 조건은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건데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은 나하고 관계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자기하고 관계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은 조건하고는 무관한 겁니다.

그 조건에 인해서 일어나지만 뭐 성인들은 어디 안 다치고 어디 안 아프고 하나? 그래도 그거는 다 제한적이라는 거라. 딱 그거 그냥 알아차리는 것으로써 끝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도 일반인들은 계속적으로 그것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것은 자신이 만든 그물에 자신이 걸려있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남 탓하지 말아라는 거라!

이런 것들이 대부분 성인과 여러분하고의 차이입니다.

 

그다음에 성자들의 사마디(멸진정)

멸진정은 언제 누가 들 수 있을까? 수다원이나 일래자는 멸진정에 들 수가 없습니다. 불환자 이상만 들 수가 있습니다. 왜 멸진정에 들 수 없을까? 일래자는 아직 생존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 생존욕구가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멸진정에 들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생존욕구가 뭐냐면 '나는 좀 오래 살고 싶다' 아니면 '아이고, 이놈의 거 벗어나고 싶다'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멸진정은 자신을 완전히 버려버리는 상태라. 호흡도 안 하지, 의식도 안 하지, 죽은 사람이지 뭐야 그러면? 그렇잖아.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생존욕구를 버리지 않으면 그 멸진정에 들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 일래자 밑으로는 멸진정에 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인을 구분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생존욕구가 얼마만큼 있는가? 완전히 떨어져버릴 것 같으면 아라한인 거고,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일 거 같으면 불환자일 거고, 그래도 생존욕구가 있을 거 같으면 일래자일 거고, 생존욕구는 범부하고 별 차이 없이 그대로 있다 할 것 같으면 예류자가 될 거라. 생존욕구를 가지고 그렇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아예 완전히 떨어져버리는 상태가 됐을 때 멸진정에 들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두드러진 특징인데, 그러면 멸진정에 들려면 순수하게 위빳사나만 수행해가지고 가능할까? 땡! 안됩니다.

왜 그럴까? 만약에 불환자라 했다, 멸진정에 들었다, 들 수는 있는데 죽어버렸다는 거라. 그대로 열반에 들어버렸다는 거라. 열반에 들어서 저 범천가서 범천에서 해탈하겠지. 아니면 아라한이 된 후에 거기서 죽음이 있으면 거기서 그대로 열반에 들겠지.

왜 그럴까? 삼매를 조절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라. 삼매에 들어서 삼매를 조절하는 능력이 생기지 않으면은 거기에 들면 그냥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위빳사나 수행만 해가지고는 멸진정에 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멸진정에서 나오지를 못하는 거라. 생존욕구도 없지, 내가 삼매에 들어가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방법도 모르지, 언제 나올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나올지도 모르지, 내가 마음대로 들었다가 마음대로 나올 수 있는 방법도 모르지, 뭐 어떻게 해서 나올 거라?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멸진정에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열심히 닦아가지고 다섯 가지 선정삼매에 자재할 수 있는 것들을 익혔을 때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게 멸진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위빳사나 수행만 해서는 그래서 멸진정에 들지 않고 아라한이 되는 거라. 그런데 뭐 멸진정에 안 들었다고 해서 아라한이 아닌가? 번뇌가 안 끊어지나? 그건 아니잖아. 사실은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멸진정에 들고 안 들고는.

 

그런데 그 차이는 있습니다. 아라한이 됐을 때 멸진정에 들어서 다른 중생들을 관찰하는 힘들이 멸진정을 경험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저사람이 지금 해탈에 이를 조건이 되는지 안 되는지, 수다원에 이를 조건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걸 알 방법이 없는 거라.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할 거 같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멸진정입니다. 다른 중생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그리고 부처님과 같이 모든 중생들을 두루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멸진정입니다.

그렇게 보시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해하겠죠?

 

그다음에 멸진정에 드는 과정

준비 부분, 그다음에 멸진정의 출정 부분, 이게 전부 사마디-삼매의 다섯 자재 부분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사마타 수행에서 언제 한번 해줬던 거 같은데 안 했나? (예) 음, 여기서는 안 한 거 같아. 요 부분은 언제 기회가 되면, 이번에는 사마타가 아니고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것을 칠청정으로 얘기했지만 다음에는 사마타 수행에 대한 것들을 할 때 그 부분을 자세하게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칠청정은 순서에 따라서 1청정, 2청정, 3청정, 그 순서대로 밟아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순서를 빼먹을 방법도 없고, 뛰어넘을 방법도 없고, 거꾸로 가는 방법도 없다는 거라. 그 부분은 항상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야 됩니다. 알겠죠? (예)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