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5rocGDHasQ?si=QWy45nN38NciEWeJ
* 실-라-눗사띠(sīlānussati, 계수념) (20160116.서울)
어쨌든 태국은 잘 다녀왔습니다. 조금 전에 맨 처음 할 때 "상갓사 데마"라고 그렇게 했죠? "상가에 공양올립니다." 그런데 부산이나 대구에서 할 때는 "상갓사 데마"를 안 합니다.
보통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스님한테 보시할 때 그 스님이 물어보거든. “이 공양을 상가에게 올리는 것이냐? 아니면 개인에게 올리는 것이냐?” 하고 물어봅니다. 상가에 올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당연히 상가를 위해서 쓰여져야 되는 거고, 개인에게 올린다고 할 것 같으면 개인 스님이 적절한 데 써야되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산이나 대구 같은 경우에는 우리 선원이니까 대부분 선원에 보시금들은 그것도 상가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따로 자기들 통장으로 돈을 넣습니다.
대부분 보면 스님한테 공양 올리는 것들은, 스님 개인에게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게 별 필요가 없는데, 여기 서울 같은 경우에는 한 달에 한 번 법회이기 때문에 이게 공양 올리는 것이 상가에 올리는 건지 개인 스님한테 올리는 건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대부분 "상갓사 데마" "상가에 공양 올립니다." 해가지고 상가를 위해서 쓰도록 그렇게 책정을 해둡니다. 그래서 이번에 태국갔을 때, 이때까지 쭉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한 250만원 넘어 모였더라고. 많이 모였어요. 그래서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서 천만원을 보조를 하고 해가지고 은사스님 기념관 하는데 보태주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기념관 완공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많이 걸렸어요. 거의 한 3주 좀 넘었죠? 4주 가까이 그렇게 걸렸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잘 다녀왔고, 이제부터는 올해 이 법회에 1년 동안 할 걸 하도록 하겠습니다.
작년에는 칠청정을 가지고 했죠? 칠청정 인제 끝났고, 올해는 전반기 오전에 하는 거하고 오후에 하는 것을 좀 나눠가지고 오전에 하는 것은, 전에 테라와다 불교의범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굳이 필요가 없을 거 같고, 대신에 전에 담마스쿨하면서 테라와다 불교사를 하다가 중간에 끝나버렸습니다. 그 대승불교권에서 말하는 불교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가르치는 불교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싶어가지고, 저번에 아마 3차결집, 4차결집까지 하고, 중간에 좀 띄우고 마지막에 어슴푸레하게 끝내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 교재에다가 조금 더 살을 보태가지고 테라와다 불교사를 올해 전반기 중에 열두 번 중에서 이제 열한 번 남은 거죠? 열한 번 동안에 나눠가지고 마쳐볼까 하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하는 것은 수행문답도 물론 해야 되겠지만, 그것에 더불어서 법문 들어가는 것은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조금 부족한 부분들, 여러분들이 꼭 해야 되는데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 많이 있습니다.
위빳사나 같은 경우에는 법념처 부분들은 조금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법념처 부분, 그다음에 수념처 부분, 신념처나 그다음에 심념처 같은 경우에는 잘 많이 하고 있는데 이 두 부분들은 조금 부족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조금 보완하는 성격을 띄우고, 그리고 사마타 수행 중에서 꼭 해야 되는데 하지 못했던 거, 자세하게 알지 못해가지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좀 보완하고 해서 그걸 가지고 오후 시간을 좀 해볼까 하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스님 개인적인 생각이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걸 얘기를 해주면 그걸 반영해가지고 하도록 그렇게 할게요. 어떻게 할까요? (수행자 대답 : 스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하면 좋아요.) 무조건 따라올라고 하지 말고, 그래도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얘기해주면 (수행자 대답 :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겁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 그럼 그대로 해도 되겠어요? (예).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은 원래 이게 오후에 들어가야 되는 교재입니다. 오후에 들어가야 되는 교재인데, 오늘은 스님이 치료가 좀 있어가지고 오후에는 간단하게 문답만 받고 갈 것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지금 해버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 담마눗사띠(dhammānussati), 상가눗사띠(saṅghānussati)는 전에 교재 프린트물로 다 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주안점들이 뭐냐면 부처님 명호를 그냥 무조건 외울려고 하지 말고 그 의미들을 이해하도록 하라는 것이 원래의 주안점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이렇게 명호를 외울려고 하지 말고, 부처님한테 누군가가 물어봤거든. 부처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서 그걸 수행으로 연결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니까, 그때 얘기한 게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뿌리사담마사라티, 삿타데와마눗사낭, 붓도, 바가와) 해서 부처님 10가지 명호, 9대 명호를 염송하면서 마음 깊이 새기면서 그것을 독송하도록 하라" 하는 경전 구절이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원어를 가지고 하면 좋은데 원어가 안 되는 사람들은 한글로 번역된 것을 가지고 하도록 하고.
만약에 '아라항' 할 것 같으면 아라항이 무슨 뜻이에요? (응공) 응공이라고 하지 말고, 스님이 원래 번역을 하면서 '응공'이라고 안 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나신 분'이라고 하는 원래의 뜻으로, 의미는 그걸로 풀어썼습니다. 그래서 '아라항' 하면서 '아,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참 맑고 깨끗한 분이다' 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다음 '삼마삼붓도' 할 거 같으면 '스스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얼마나 평온하고 고요해? 그래서 평온하고 고요한 부처님 모습을 떠올리고, 그런 식으로 부처님 명호를 전체를 다 쭉 회상하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기쁨이 일어나지고 그래서 집중하는 힘들이 생겨나고, 그래서 삼매에 들도록 하는 것이 붓다눗사띠, 붓다-아눗사띠(Budddha anussati) 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붓다 · 담마 · 상가-아눗사띠 부분은 프린트물로 나간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거는 그것으로 대체를 하고.
이번 시간은 실-라-눗사띠 부분입니다. 실라(sīla)는 계죠!
실라눗사띠(sīlānussati)는 어떻게 하면 될까? 무조건 계를 잘 지키면 되는 거라? 계도 물론 잘 지켜야 되겠지. 그것도 실라눗사띠도 하는 방법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짜가눗사띠(cāgānussati), 데와따눗사띠(devatānussati) 이렇게 다 있는데, 먼저 한번 물어봅시다.
사띠(sati)하고 아눗사띠(anussati) 하고 차이점이 뭐라?
보통 사띠는 알죠?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을 사띠라고 그럽니다.
아눗사띠는 뭐라? 아눗사띠anussati)는 아누(anu)에 사띠(sati)가 붙은 거죠? 그래서 '뒤따라가면서 알아차린다'는 것이 아눗사띠 입니다.
근데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이해가 잘 안 되죠? 사띠도 어쨌든 계속적으로 관찰하는 것들 알아차리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인데, 아눗사띠도 뒤따라가면서 관찰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분하기 힘들 겁니다.
근데 이렇게 보면 됩니다. 아눗사띠라고 붙은 단어에는 반드시 앞에 뭔가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프린트물에 붓다-아눗사띠, 실라-아눗사띠, 짜가-아눗사띠 이렇게 뭔가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아눗사띠면 붓다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걸 따라가면서 알아차려야 되는 거니까, 그거 외에 다른 거는 하면 안 돼. 쉽게 말하면 붓다아눗사띠 하고 마음속에서 그걸 수행주제로써 해야 될 경우에는 그거 따라가기도 바쁜데 언제 절하고 언제 염주 돌릴 거라? 그건 할려고 해선 안 되는 것들이라.
근데 마음은 하나밖에 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적으로 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냥 그것만 해야 되는 거라. 가만히 앉아가지고. 그러니까 염주도 돌리지 말고 절도 하지 말고, 어떠한 행위도 하지 말고 그 명호만 계속적으로 이해하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게 아눗사띠라.
그러니까 실라눗사띠(sīlānussati)도 꼭 마찬가지겠죠? 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걸 따라가면서 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아눗사띠는 그래서 사마타 수행에 속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띠는 보통 뭐라 그럽니까? 사띠(sati)는 아누(anu)를 붙여가지고 빨리어에서 하는 게 '아누빳사나(anupassanā)'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아누(anu)에다가 위빳사나(vipassanā)가 합쳐진 게 아누빳사나(anupassanā)라고 그럽니다.
보통 "사띠는 아누빳사나와 동일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뭐냐면, 그 사띠의 대상은 뭐라요? 특정한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죠?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몸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마음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느낌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현상에 대한 것이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지금 현재 일어난 것이 대상이 됩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가도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사띠를 어디로 해요? 생각으로 가는 겁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은 생각이라는 거라. 그러면 호흡하는 것은 놓아버리고 생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나갑니다. 그래서 ‘아, 뭔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또 다른 대상으로 돌아오고.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 지금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신·수·심·법-사념처다 해서 '사념처'가 '사띠'와 같은 용어로 쓰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게 아누빳사나 라고 하는 겁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족족 그대로 계속해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거라. 그리고 일어나는 것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붓다라든지 실라라든지 이런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다 되게 됩니다.
만약에 움직이고 있을 때는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 대상이 되는 것이고, 또 걸어가면 걸어가는 것이 대상이 되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전부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인제 사띠(sati)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띠하고 아눗사띠하고는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구분을 해야 됩니다.
사띠는 위빳사나의 영역에 속하는 거고, 아눗사띠는 사마타의 영역에 속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눗사띠를 할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것들을 따라가버리면 안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대상만 계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수행해라 할 때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마타 수행으로써 어느 정도 힘을 키우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하는 것이 그래도 좀 수월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건 출가한 스님한테 해당이 되는 거지 여러분들이 언제 사마타 수행할 거라? 지금 놀기 바쁘고 다른 일들 하기 바쁘고, 그것들을 알아차리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알아차리는 게 한 몇 퍼센트나 될까? 아마 한 1~20 퍼센트도 안 될걸? 그러니 뭐 만날 다 놓치고 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은 그렇게 움직이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 대상만 관찰해야 되는 건데 안되는 거라.
그래서 사실은 일반인들이 사마타 수행을 하기에는 참 부적절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대신에 반드시 사마타 수행을 먼저 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굉장히 산만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위빳사나로 할 것 같으면 얼마 못 가서 싫증 느껴버리고, 그러니까 싫증 느끼니까 자기가 싫증 느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이 절, 저 절 막 돌아다니는 거라. 거기에 계속 매여버리는 거라.
그래서 수행의 진척은 별로 없이 되고, 그리고 조그만한 것들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매여가지고 확대해버리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결과들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사마타 수행을 어느 정도 하고 나서 조금 안정되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하는 것이 맞는 방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 얘기하는 실라눗사띠나 아니면 붓다 담마 상가눗사띠나 이런 것들을 먼저 하는 것들이 순서에 맞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만날 스님이 강조하듯이 언제 죽음이 올지 모르는데 언제 그거하고 있어? 경각심이 많이 일어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라?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됩니다.
실라눗사띠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무상수념, 무아수념, 고수념으로 바꿔가지고 해버리면 됩니다.
쉽게 얘기를 하면은 수념(隨念, anussati)) 하고 수관(隨觀, anupassanā) 하고는 알죠?
경전에는 보면 내가 깨달음에 이른 것은 '무상수관'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 '무아수관'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수념'이라고 하는 것은 수념으로 인해서, 내가 삼매에 들었다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수념, 무아수념, 고수념이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내가 붓다눗사띠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을 하는데 '아라항' 하면서 아라항의 의미에 대해서 아, 번뇌로부터 여의신 분인데 저 분은 분명히 우리와 같이 살아있다가 돌아가신 분이다. 그러면 저 아라항도 아라항은 위대하고 아라항은 번뇌가 없어서 참 뛰어난 분이지만, 어쨌든 아라항도 이세상에 지금 없는 분이다. 무상한 성품을 지닌 분이다. 그런 식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라항 하면서 아라항의 의미에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무상하다는 성품에 매달려가지고 하는 거라.
실라눗사띠에 적용을 해보면은 내가 첫 번째 계가 남의 생명을 죽이지 마라. 그러니까 ‘아, 내가 남의 생명을 죽였는가 안 죽였는가? 아, 내가 죽인 일은 없구나. 참 내가 잘했다’ 하는 마음은 일어나긴 하는데, 그대신에 그것으로 인해서 무상한 성품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 생각하기를 다른 대상도 ‘내가 안 죽인 대상도 내가 자애를 보낸 대상도 죽음을 맞이하겠구나,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탁 매여버리면 되는 거라.
그래서 그 무상한 데 쉽게 말하면 진리에 마음이 딱 가 있게 되는 거라.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진리에 딱 가 있으면서 그것이 수행대상이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 될 경우에는 마음이 좀 산란한 부분들이나 아니면 사마타 수행으로 인해가지고 어느 정도 힘을 기르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이미 힘도 길러지고 그리고 바로 위빳사나로 전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돼버립니다.
그대신에 차이점이 뭐냐면 실제로 무상한 성품을 본 것은 아니죠?
실제로 무상한 성품을 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무상한 진리에 대해 관찰한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어떤 식으로든 사마타 수행의 종류입니다.
그대신에 아까와 같이 대상에 매여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한정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빨리 무상한 성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라. ‘아, 나도 죽는 구나’ 하고 관찰을 하면, 마음에 경각심이 더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삼매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무상한 성품이 더해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 실라눗사띠를 배운다고 하더라도 무상수념, 무아수념, 고수념으로 바꾸어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 하는 겁니다.
인제 사띠하고 아눗사띠 하고의 차이점은 알겠죠?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좋겠다 하는 것들은 드러날 겁니다.
실-라-눗사띠, 계수념 입니다. 실라(sīla)하고 위나야(vinaya) 하고의 차이점,
보통 우리는 계율(戒律)이라고 그러는데 계(戒)와 율(律)의 차이점은 뭐예요?
계는 쉽게 얘기하면 강제성은 없는 겁니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고, 여러분들 오계 받았지만 오계 안 지켰다 해가지고 누가 벌주는 거는 아닙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실라(sīla)라고 안 합니다.
스님들 계 항목들은 '위나야(vinaya)'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율(律)을 배운다고 그럽니다. 스님들은 어떻게 해요? 그 계율들을 어기면 반드시 벌을 받습니다. 자기가 참회를 하든 뭘 하든지 뭘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실라가 위나야로 전환을 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마음을 먹기를 아, 내가 이 계를 안 지켰으면 아, 내가 안 지켰구나 마음을 내고, 내가 그 대신에 다른 일 좋은 일을 하나 더 하겠다, 자기 스스로 선한 공덕을 하나 더 쌓음으로 인해가지고 위나야로 전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계와 율은 분명하게 다른 것들입니다. 강제성은 없는 거지만, 재가자들의 계는 어떠한 경우든지 빤짜실라, 앗타실라, 닷사실라 라고 그러지 빤짜위나야 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재가자는 강제성은 없습니다. 강제성은 없는 대신에 부처님이 재가자들에게 오계, 팔계, 십계 이렇게 한 이유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가장 최소한의 기준이 오계(五戒)죠? 왜 오계라고 했을까? 그중에 어떤 것은 중요하고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죠! 동일하게 다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됩니다.
계를 지킨다고 할 것 같으면, 오계를 지킨다고 할 것 같으면 5계 전체를 지켜야 되는 것이지, '3계는 지키고 2계는 안 지키겠다' 그거는 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전체 다 오계를 받았으면 오계를 지켜야 되는 것이고, 팔계를 받았으면 팔계를 지켜야 되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팔계를 받았는데 오후에 불식하기는 하는데,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다, 그러면 그거는 팔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가 받은 계는 그 계 전체를 갖다가 다 받아지녀야 되는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계를 받은 것들은 다 지키라고 하느냐면, 그 효과들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보통 2가지로 얘기합니다.
후회하는 것, 후회하는 습관들을 막아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계를 지키는 것으로. 그래서 뭐 단편적으로 얘길하면 여러분들이 뭔가 잘못을 했다, 그럼 잘못한 것에 대해서 대부분 후회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계를 지키면 잘못하는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왜 그럴까? 부처님이 말한 계는 그게 사회적인 것과 합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회적으로 반드시 이렇게 할 것 같으면 훌륭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 지킨다, 나는 남의 물건 훔치지는 않지만 남에게 만날 거짓말하고 이런 것은 한다, 그럴 것 같으면 그사람한테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얘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는 반드시 그 전체를 다 지켜야 됩니다. 오계면 오계, 팔계면 팔계.
그래서 후회하는 것들을 방어할 수가 있고,
또 하나는 동요하는 것들, 마음이 굉장히 동요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 내가 지금 해야 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고 다른 데 가 있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일정하게 방어해주게 됩니다.
후회하고 동요하지 않는 생활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그래도 편안한 삶입니다. 그래서 "계를 먼저 지켜라" 하고 자꾸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법회든지 법회를 가면 항상 오계를 먼저 받게 합니다. 삼귀의 오계를 먼저 받고, 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걸 하든지 이렇게 합니다. 그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 다른 것들을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후회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뭐냐면, 후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뭔가 한 일에 대해서 내가 후회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한 일에 대해서 자기가 스스로 부정할려고 했을 때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그냥 '부정'이라고 얘길하는데, 실제로는 마음에는 자기는 자기가 그걸 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후회'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오계만 잘 지키더라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거짓말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아, 내가 바르게 잘 가고 있다’는 확신들이 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후회와 동요를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은 한다는 생각을 반드시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걸 전체를 다 할 수는 없고, 한 번 쭉 보십시오, 오계 부분을.
4페이지에 보면, "계율은 출가자를 지킨다."
출가자는 기본이 청정과 화합입니다. 청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출가자가 아닌 거라. 그리고 화합하지 않는 것도 출가자가 아닌 거고. 청정과 화합은 뭐로 가지고 만들어내냐면, 계를 가지고 만들어집니다. 계만 잘 지켜도 출가자는 스스로 출가자들 자신을 지키고, 그리고 그것으로 출가자 집단들을 지키게 되고,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를 어겼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을 청정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해마다 스님이 태국에 가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가가지고 항상 '압바나 마낫따' 라고 하는 것들을 하고 옵니다. 일주일간씩, 어떤 경우에는 보름간씩 이렇게 하게 됩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나도 내가 모르게 저지른 잘못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13가지 승잔죄라고 해서 바라이죄 밑에 큰 중죄입니다. 그래서 그 승잔죄들을 저지른 것들, 특히 인제 우리 한국 같은 경우에는 변방이라고 그럽니다. 변방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을 저지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시내버스를 탔는데 옆에 자리가 비어있는데 누군가 여자가 와서 자리에 탁 앉았다, 그거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스님 자리만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거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저지르게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이 전부 13승잔죄에 들어가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그걸 가서 참회를 하고 오는 거라.
일주일 동안 할 때는 일주일 동안 승적이 정지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정지됐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스무 명의 스님들이 모인 데서 하게 됩니다. 모인 데서 내가 “이 죄를 참회합니다” 할 것 같으면, 그 스님들은 “이제 당신은 정식 승려로서 복권됐습니다.” 하고 인지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든 테라와다 스님들은 항상 1년에 한차례씩은 반드시 이 관문들을 치루게 돼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소소한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거라. 소소한 것들은 저지른 즉시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반성하는 게 있고, 또 아니면 다른 스님한테 가서 ‘스님, 내가 뭐를 잘못했습니다. 참회합니다.’ 하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항상 출가자들은 청정성을 유지를 해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청정성을 유지를 해나가야만이 자신도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화합하게 되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래서 계가 바로 출가자들을 지켜주는 역할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까 출가자들은 계가 '실라'가 아니고 '위나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들입니다. 지키지 못했을 때는 반드시 참회를 해야 되는 거고, 재가자는 그렇지 않다고 그랬죠? 그래서 재가자들은 재가자들 스스로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계를 자꾸 지킬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되게끔 됩니다.
그래서 "재가자에게는 마음의 향상으로 이끈다" 하고 적어놓은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마음이 좀 더 너그러워지고 또 마음이 좀 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아, 내가 부처님이 가신 길을 꾸준하게 계속 가야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계를 자꾸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 향상되고, 그래서 계·정·혜(戒定慧)라고 그럽니다. 마음이 향상된 방향으로 나아가야만이 그다음에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예를 들어봅시다. 맛있는 거 있으면 맛있다고 마음이 들 거 같으면 마음이 고요해지지를 않습니다. 맛있다는 생각이 없이 그냥 그것을 먹을 때, 그 사람은 마음이 고요해져서 거기에 집중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계의 역할이라고 할 것 같으면, 고요해진 마음들을 갖다가 쭉 이어지도록 해주는 것이 선정의 힘입니다. 그래서 그 선정의 힘들로 인해서 내가 지혜가 일어나는 방향으로 무상·고·무아를 관찰할 수 있고, 그래서 부처님이 가르침은 계·정·혜(戒定慧)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이 쭉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향상되도록 이끌어주지 않을 거 같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선정삼매에 들려고 한다, 아니면 지혜를 개발할려고 한다, 계가 밑바탕이 안 되어 있으면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번 시간에 칠청정 할 때 계청정이 먼저 돼야만이 심청정이 되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진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되는 것이지 그걸 어긋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내가 계를 잘 지킴으로 인해서 ‘아, 내가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구나’, ‘내가 참 그래도 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들이 자꾸 들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재가자에게는 마음의 향상으로 이끈다" 하는 의미들입니다.
쭉 다 넘기겠습니다.
여기서는 오계 항목에 대한 것들을 쭉 풀어놨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오계를 어기는 것이 되는 것이고, 어떤 것은 오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경우들을 쭉 다 적어놨습니다. 그걸 참조를 해서,
그러고 나서 15페이지,
계의 항목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실-라-눗사띠를 할 수가 있습니다.
계가 뭐고 어떤 것이 계에 저촉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하면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염송하더라도 부처님의 명호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가지고 그것을 염송함으로 인해서, 그 의미가 확 떠올라가지고 마음이 기쁨이 확 일어나야 되는데, 의미를 모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실라눗사띠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앞에 부분에 장황하게 계에 대한 것들을 쭉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해가지고 ‘아, 내가 그것들을 지킴으로 인해서 아, 참 마음이 기쁘다’, ‘내가 좀 더 향상됐구나’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여러분들이 "이건 스님이 안 해줬다" 해가지고 넘길 수 있는 부분들은 아닙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나서 그다음에 실라눗사띠를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바로 실라눗사띠를 한다? 그건 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선방에 문제점 중에 하나가 화두를 받았기는 한데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는지를 몰라가지고 한철 그냥 허송세월 보내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가는 길을 자세하게 알려줘야 화두 참구를 해나갈 건데, 그냥 앉아가지고 '이뭣고' '이뭣고'만 하고 있는 거라. 그건 그렇게 해가지고는 죽은 화두가 돼버립니다. 꼭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실라눗사띠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을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실라눗사띠를 해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붓다 담마 상가눗사띠나 앞으로 얘기할 짜가눗사띠나 데와따눗사띠나 이런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그것을 내가 몸으로 실천을 해나갈 때, 그럴 때 '아눗사띠'를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계 안 지키고 살고 싶다 하는 사람은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수행 안 하겠다 하는 얘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냥 경을 들어서 자기 이로운 데로 이용만 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것은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Sīlānussati(실-라-눗사띠, 戒隨念) 보겠습니다.
「"아, 진실로 나의 계행은 이와 같이 깨지지 않고, 구멍 뚫리지 않고, 오점이 없고, 얼룩지지 않고, 벗어났고, 지자(智者)들이 칭찬하고, 집착하지 않고, 삼매로 인도한다네."」
과연 여러분들이 이 게송만 가지고 내가 마음이 너무나 기쁨이 일어나고 해질까? 안 됩니다. 이 계가 밑바탕이 안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깨지지 않는다, 그 뒤에 16페이지 보면 그래서 하나씩 여덟 가지로 구분을 해놓았습니다. 실라눗사띠를 할 때는 이 8가지를 가지고 하는 것들입니다.
아, 내가 계를 깬 적이 있는가? 다섯 가지 항목을 천천히 되뇌어 봤을 때, 내가 계를 어긴 적이 하나도 없다는 거라. 그럼 내가 계를 깨지 않고 잘 지켜왔다는 거라. 그러면 그것으로 해서 마음은 훨씬 뛰어나지게 되고 훨씬 기쁨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렇게 기쁨이 일어나져야만이 그다음에는 삼매로 인도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지, 그 게송으로 인해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지 않으면 삼매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가 깨버렸을 거 같으면 처음부터 '내가 계를 깨지 않았다' 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기쁨이 일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 할 수 있습니까? 계를 받아지녔으면 강제성은 없는 거라고 하더라도, ‘아, 내가 계는 깨지 않았구나’ 그리고 계는 매일매일 받는 거고, 그리고 매일매일 그것들을 되뇌고.
오늘 하루 만약에 자기가 오계를 잘 지켰다, 저녁에 잠자기 전에 딱 앉아가지고,
'아칸다니' 하면서 '나는 계를 깨지 않았는가' 다섯 가지 항목을 쭉 들먹여보는 거라. 그럼 깨지 않았다면, ‘아, 내가 계를 안 어기고 참 잘 살아왔다’ 하는 마음이 딱 들게 되는 거라.
여기 보면 중간 정도에 「그래서 이 계를 열심히 지키고 살면 후회 없고, 마음을 더욱더 향상되게 하고 행복하며 자유롭게 만들어 삼매에 들게 하고, 해탈지견을 실현하는 결과로 인도한다고 거듭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 보면 그것들에 대해서 풀이를 해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계수념은 명상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계를 지키는 마음이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계를 지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일부러 지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는 물론이려니와 다른 사람과 만날 때에도 계를 지키는 마음이 우선이 됩니다. 다른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훈련되어 나가면 자연스럽게 계수념의 마음이 강하게 되어 몸도 마음도 그 마음에 지배됩니다. 그로부터 선정상태가 일어납니다. 쉽게 삼매에 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술의 예를 들어봅시다.
술 먹는 사람은 처음엔 자기가 술을 먹습니다. 그다음에 술이 취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냥 술을 먹고 있습니다. 술하고 자기하고 그냥 동등하게 돼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 가지고 술이 완전히 취해버리고 나면 어떻게 돼요? 자신은 술을 먹고 있지만 자신이 술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니고 술이 자신을 먹고 있게 되는 거라. 완전히 술에 압도되어 가지고 자신이 술을 먹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못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삼매에 드는 과정들은 그렇습니다. 계를 지키는 경우에 계를 내가 잘 지켰다, 그럼 계를 잘 지켰다는 마음이 내게 먼저 일어납니다. 그럼 술을 먹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럼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집니다. 그러면은 아, 내가 계를 지키는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서 평온해지는 마음이 딱 생겨버릴 것 같으면 계하고 자신하고 동일하게 돼버립니다.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인제는 계를 지킨 것에 대한 생각보다는, 내가 그렇게 일어나는 마음들 그 마음들이 우선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제는 바뀌어버립니다. 그럼 마음은 거기에 딱 고정이 돼버립니다. 기쁨에 고정돼버린다든지 행복한 것에 딱 고정돼버리게 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삼매에 들어가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아까 술을 비유로 들어서 좀 뭐하지만 그와 같은 과정들을 거치게 됩니다. ‘계를 내가 깨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면, 진짜 안 깼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도 일어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아, 내가 앞으로도 계속 이걸 지켜나가야겠다’는 마음들도 강하게 드는 거고, 그래서 부처님이 말한 것들이 ‘아, 이것이 진짜 진리구나’ 하는 사실을 믿게 되는 거고, 그리고 강제성이 없는 거라도 ‘나는 반드시 지켜나가야 되겠다’는 마음들도 강하게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걸 깨지 않는 마음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확 일어날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계를 깨지 않았다는데 마음이 가 있는 게 아니고, 그 기쁨에 마음이 가 있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그 기쁜 마음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기쁨도 조절하게 되고, 그러고 나서 행복해지는 마음들이 일어나고 평온해질 거 같으면, 그 뒤에는 삼매로 훅 들어가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실-라-눗사띠 첫 항목 가지고도 삼매에 들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이걸 하나만 가지고 삼매에 들어라는 것이 아니고 여덟 가지를 차례차례로 하라는 거라. 그래서 어느 정도 기쁨이 일어났다 그럴 것 같으면 그다음 단계로 또 넘어가지고. 왜 이렇게 하는지 압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첫 번째 항목 가지고 삼매에 들 수는 있어도 삼매에 들고나면 그다음에 삼매에서 깨어나는 법을 몰라.
그래서 삼매라고 하는 것은 드는 법을 알아야 되는 거고, 깨어나는 법을 알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어떠한 상태에서 들어야 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것이고, 또 어떤 상태에서 깨어나야 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또 얼마만큼의 시간동안 내가 삼매에 들어야 되겠다고 했을 때 그 시간 동안 삼매에 드는 것들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걸 갖다가 「다섯 가지 자재」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삼매를 설혹 자신이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순간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삼매는 똑같은 걸 다시 또 체험할 방법이 없어요. 왜? 그때의 마음 상태에서만 그것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혼동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런 삼매를 체험했으면, 그걸 또 자꾸 할려고 노력을 하는 거라. 방법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안 하고. 그거 자꾸 다시 또 삼매를 체험해볼려고 노력하면 그게 되나? 안 되지. 똑같은 마음 상태는 이 세상에 없어. 근데 그걸 또 어떻게 해볼 거라? 비슷한 건 또 체험할지 몰라도 그것도 순간에서 끝나버리고, 그걸 자신이 마음대로 삼매를 콘트롤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질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계수념을 할 때는 반드시 어느 정도 기쁨이 일어나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할 것 같으면 그다음 단계로 바로 또 넘어가야 됩니다. 그다음 항목들 여덟 가지 항목들을 차례대로 하면서 삼매에 대해서 조절하는 힘들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앗찻다니' '구멍이 없는 것'
옷에 구멍 뚫리면 실과 바늘로 깁죠? 그러면 보기는 싫습니다. 그 보기 싫은 것들을 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본인의 마음은 그것으로 인해서 좋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구멍난 것도 없고 어떻게 다른 색이 염색된 것도 없이 변질된 것도 없이 깨끗한 하얀 천이다 할 것 같으면 자신의 마음은 굉장히 기쁘게 됩니다.
사마타 수행중에서 흰 원반을 가지고 삼매에 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꼭 마찬가지 방법입니다. 그와 같습니다. 내가 계를 지키는 것이 꼭 흰 원반,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하얀 그 원반과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원반이 나중에 투명해지고 그리고 그것이 뚜렷해지고 그것이 변함없이 되는 상태가 되고 그러고 나면 삼매에 드는 거라. 그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게 '구멍이 없는 것이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번째 이거는 한번 쭉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반점이 없는 것, 잡색이 없는 것, 자유롭게 지킬 수 있는 것,
이 자유롭게 지킬 수 있는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계가 확립돼서 어기지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누가 술 먹자 해도 술 먹으러 안 가는 것이 아니고, 아예 술 먹자는 상황 자체를 안 만들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돼버리는 거라. 그걸 '자유롭게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현자로부터 찬탄을 받는 것, 부처님이 얼마나 칭찬하겠어요?
그다음에 내가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 것.
그리고 선정으로 기운다는 것.
이 여덟 가지를 차례대로 해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했을 때 실라-아눗사띠, 실라눗사띠가 완성되게끔 됩니다.
이와 같이 했을 때 삼매에 드는 것들을 훈련을 하게끔 되고 또 삼매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삼매가 목적은 아니죠? 삼매가 목적은 아닙니다. 삼매가 수행의 끝이다 할 거 같으면 그것만 하면 되겠지. 근데 그것이 목적은 아니라는 거라.
왜 다섯 가지 자재를 자꾸 연습을 해야 되느냐면, 거기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한 겁니다. 빨리 빠져나와서 위빳사나로 전환하기 위한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실라눗사띠-계수념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부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은 실라눗사띠에 대한 것을 했습니다. 이 항목들을 하면서 내가 ‘아, 삼매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자꾸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 ‘마음이 이렇게 깨끗해지고 이렇게 평화로워지는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체험해볼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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