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력을 빼앗는 5가지 장애 (20171124. 대구)
오늘은 이게 하다가 12페이지 정도 되는 건데 스님이 다 완성을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프린트물이 없습니다. 그대신에 스님이 한 것들을 조금 읽어주는 형식으로 그리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겁니다.
능력을 빼앗는 다섯 가지 장애부분입니다.
다섯 장애는 다 알죠? 감각적인 욕망부터 해가지고 의심까지 그 부분들입니다.
거기에 대한 걸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없애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들을 얘길 좀 하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선행을 하는 것이 좋을까, 악행을 하는 것이 좋을까?
(수행자 대답 : 선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복 받을라고? 일부에서도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나는 윤회 안 믿어” 그러니까 설혹 내가 잘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벌 받으면 되는 거지 이생에서. 설혹 이생에서 누군가가 그걸 모르고 내가 벌을 안 받았다고 할 거 같으면 죽고 나면 끝이니까 윤회를 안 믿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나는 내하고 싶은대로 그냥 하고 살겠어.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한테 뭐 큰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 거지.
일상적으로 여러분들 생활에서 가끔 가끔씩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이렇게,
예를 들면 애를 탁 두드려팼다, “너를 위해서 내가 팬 거지, 내가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가지고 두드려팼느냐” 하는 형식으로 얼버무려버리는 경우들이 있고, 이 정도는 내가 일상에서 이탈해도 뭐 그냥 한번 정도 실수니까 괜찮지 하고 무마해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어찌 보면 윤회는 없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크게 피해 안 주면 괜찮지 않느냐 하는 거하고 별반 차이나는 거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윤회에 대한 것들은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살아가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얘기하는 것들은 뭐냐 하면 그러한 것들이 장애가 된다는 겁니다. 장애가 되면 그것이 고정화돼버리면 고치기가 힘들어져버립니다.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믿든지, 아니면 윤회가 있고 없고 그거하고는 관계없다. 선행을 할려면 자신의 마음이 선한 마음이 들어야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아무리 조그만 거라도 악행을 할 경우에는 자신의 마음이 악한 의도, 악한 마음이 생겨나야만이 악한 것들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러면 선한 것들을 하고 나면, 선한 마음이 들고 나면은 자기 자신부터 우선 좋아지고, 또 남들에게도 더 좋은 행위가 되고 그러는 것인데, 반대적인 것들을 할 거 같으면 우선 이생에서도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거라. 여러분이 살아가는 게 오래도록 살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거는 그래도 이생에 살아갈 때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런데도 자꾸 윤회나 아니면 이런 종교적인 이유 이런 것들을 핑계 삼아서 자신이 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꾸 방패막이 삼을려고 한다는 거라.
이생에서 적어도 행복하게 살아갈려면 적어도 선행을 자꾸 해야 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선한 마음이 자꾸 일어나야 되는 것이지 악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가지고는 본인이 어떠한 경우든지 행복하게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어느 종교를 가지더라도 기독교를 가지든 이슬람을 하든 불교를 하든 어떤 것이든 본인이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선한 행위들을 하는 것들에 대해서 칭찬하지 비난하는 것은 없다는 거라. 설혹 윤회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당연히 좋은 결과 받게 돼 있는 거고, 안 되면 당연히 나쁜 결과를 받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선행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또 다음 세상에서도 승리하는 길이다."
그런데 그 승리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항상 선한 것들, 선한 의도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자신을 이겨야만이 승리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능력을 빼앗는 다섯 가지 장애는, 어찌 보면 칠각지의 정반대 방향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칠각지는 사띠부터 해가지고 선한 마음들을 내서 하나씩 하나씩 진행해 나가는 거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거고. 그런데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나아갈 거 같으면 장애들은 자꾸 생겨나고 그것이 오히려 더 본인을 망치는 행위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 장애의 퇴치법이나 그것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첫 번째 까마라가(kāma-rāga)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 경전에 소개되기를, 선이 뭐고 악이라는 게 뭐라?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게 악이라고 그래? 내가 행한 행위가 어떤 사람이 봤을 때는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는데, 또 어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그것이 악한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인도에 가면 버스 지나가는데 10루피씩 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선한 마음 내가지고 10루피를 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반대합니다. 그걸 애들한테 주면 애들이 그게 습관이 돼서 스스로 뭔가를 만들려고 안 하고 자꾸 구걸하는 습관을 가진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나쁜 행위다 그럽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행위라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나쁜 행위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은 선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주석서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본인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는가?
또 지혜와 관계되는가?와 관계있는 겁니다. 선과 악이라는 판단은!
예를 들면 본인의 능력이 100이다. 그럼 100을 다 발휘할 것 같으면 그것은 선한 행위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지혜와 관계되는 것이어야 되는 것이지 지혜와 관계되지 않으면 또 안 된다는 거라.
그런데 악한 행위를 할 때는 보면 본인의 능력이 퇴보된 상태에서 악한 행위들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참을성이 있는데 성내는 것을 참을 수 있는데, 본인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확 화를 내버린다든지, 그러니까 자신의 능력을 다 못쓰는 경우라.
선과 악의 판단은 이렇게 주석서에는 돼있습니다.
그것이 객관적이어야 될 것!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아, 이것은 도덕적이고 객관적이다 하는 것. 그래서 객관적이어야 될 것.
그다음에 그것이 구체적이어야 될 것! 두리뭉실하게 '이것은 바른 것이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해야 될 것!
그다음에 마지막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일 것!
요 네 가지가 갖추어지면 그것은 선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악한 것이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우유부단한 것, 판단력이 없는 것, 그다음에 남이 말하는 것 그냥 통째로 믿어버리는 것, 아니면 통째로 부정해 버리는 것, 이런 것들은 악이라고 규정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많이 하죠? 그게 악인지 선인지 모르고, 남이 말하면 그냥 그대로 싹 믿어버리고 자신이 그걸 확인하려고 안 하고 그냥 믿어버린다든지, 아니면 뭔가를 행하는데 행하지 못하고 할까말까 할까말까 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것, 불교에 근거하면 그건 전부 악이 되는 거라.
그래서 선과 악이 판단기준에 능력과 지혜가 관계 돼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 이게 누구든지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게 구체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인지 하는 그런 것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들입니다. 그것들에 근거한 것인지 잘 판단해가지고 선한 것들을 자꾸 행하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걸 하지 못할 때 이런 다섯 가지 장애들, 능력을 빼앗고 지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난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첫 번째가 '까마라가(kāma-rāg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거죠? '감각적인 욕망', '애욕'들,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게 일어나면 자신이 하는 것들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을 못하고 그냥 행해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애욕이 일어나면 자신도 불행하게 되는 행위를 하고 타인도 불행하게 되고 모두에게 불행하게 되는 행위를 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가끔 요즘 신문지상에 그런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존경받는 대학교수가 제자들을 성추행했다든지 아니면 전철 타고 가다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안 좋은 행위를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거는 애욕에 마음이 지배당하기 때문에 지금 해야 될 것이 뭔지를 판단을 못하게 된 경우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꼭 그런 것이 아니라도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욕심을 참 많이 가집니다. 남들 좋은 집 가지고 있으면 나도 그거 사고 싶어지고, 좋은 옷 가지고 입고 있으면 나도 그거 입고 싶고 그럽니다.
자신의 능력이 거기에 미치면 그거 사면 애욕 없이 바로 문제해결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경우들이 허다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인은 나중에 잘되기 위해서. 좋게 되기 위해서라고 변명을 하게 됩니다. 본인이 애욕에 지배당했다 하는 생각을 일차적으로 하질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거라도 그런 욕망이 탁 일어날 거 같으면 그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도 일어나는 것들이 이 애욕 부분들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남들과 비교하려고 하고,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고 잘살게 될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 일어나지는 것들입니다.
사실은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건데 두 번째 얘기할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이게 지배당해놓으면 바른 판단을 하는 근거가 없어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의 해독법은 경전에 이렇게 돼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애욕은 위험하다' 하고 분명하게 인식하라.
내가 불에 직접 손이 닿아가지고 불에 데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불 가까이 손을 대는 것은 위험하다고 알아야 되는 거라. 지금 당장 결과가 안 나타났다 해가지고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을 안 할 것 같으면 그러한 현상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버린다는 거라.
그다음에 그 해결법 두 번째가, 아이 비유를 들어봅시다. 아이가 뭔 장난감을 가지고 싶다. 그것도 애욕에 딱 지배당해있습니다. 그래서 그거 사줄 때까지 떼를 쓰고 합니다. 달래질 잘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부모들 잘하는 거, 다른 데에다 마음을 두게끔 만드는 것들. 환경조건을 탁 바꿔버리면 애는 금방 이거 잊어버리고 거기에 몰두해버립니다.
본인의 마음이 애욕에 지배당했다고 할 때는 조건을 바꿔라는 거라. 여러 가지 환경조건을 바꿔라는 거라.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조건을 바꾸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게, 그것으로부터 떠나버리는 겁니다. 배제해버리는 것.
애욕이 생겨날 때 그것들을 끊으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났다, 그것을 계속 관찰해가지고 아, 이게 변한다는 것을 알 거 같으면 그것이 싹 사라져버립니다. 그때 당시에는 그 애욕이 끊어져버립니다. 배제돼버리는 겁니다. 이게 계속적으로 훈련이 되다 보면 애욕이 일어날 근거가 생겨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특히 수행할 때 그런 것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남들이 조금 더 잘하는 것같이 보이고, 아니면 남들에게 조금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마음을 쓰고, 이런 것들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본인에게 맞는 수행법대로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남들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남들이 경행할 때 아주 천천히 할 것 같으면 본인은 아주 천천히 할 상태도 아닌데도 본인도 아주 천천히 같이합니다.
본인은 애욕이 일어나서 그것에 지배당했다는 생각을 못하고 남들과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 수행처에서 나도 1년만 수행할 거 같으면 어느 정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해서 조절이 가능하겠지...’ 1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장애들은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 바이러스가 침투했으면 약을 먹든지 주사를 맞든지 해서 면역을 길러줘야 됩니다. 그때는 없어졌지만 또다시 생겨납니다. 그럼 또 약을 먹고 해야 된다는 거라. 일어날 때마다 아, 내가 이것을 퇴치하기 위해서 면역력을 길러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된다는 거라.
끊임없이 반복될 때 그것들에 대한 면역력이 생겨나면은 나중에는 그것들은 일어나지 않게끔 됩니다.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은 그것은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그릇에 얼굴을 비출려고 하는데 물이 굉장히 탁해져 있는 상태다." 탁해져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 애욕이 일어난 상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하지도 못하고,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지도 못한다는 거라. 오로지 자신의 판단, 그리고 이것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도 못하게 되고, 그러면 애욕에 지배당해서 그냥 그 일을 행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애욕의 해독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해서 면역력이 길러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지혜가 생겨나면 애욕은 사라집니다. 실제로 수다원에 이르러도 이 까마라가 부분은 거의 생겨나지 않습니다.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잠재돼있는 것은 있을지언정 그것들이 영향을 미치는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고 그걸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만 되더라도 이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성품들이 무상·고·무아라고 분명하게 알 때 이것들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마음도 무상한 성품이고, 밖에 접하는 대상도 무상한 성품이고,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도 무상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애착하고 집착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도 어차피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경전을 통해서든지 지혜가 일어나지게 되면은 애욕은 점점 더 물러난다는 겁니다. 지혜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애욕은 점점 줄어들어 간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브야빠다(vyāpāda)'라고 하는 것!
보통 '과격한 분노'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얼른 이해를 못할 건데, 사람에 대해서 적의를 가진다든지, 라이벌 의식을 가진다든지, 이유 없이 화가 확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이 브야빠다에 해당이 됩니다.
이유 없이 화가 일어나면 어느 특정한 대상을 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위해를 가합니다. 총기살인이라든지 이런 사고들 보면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이유 없이 저지르는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강한 분노가 일어났을 때 일어나는 행위들입니다.
아까 애욕 부분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안 미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 강한 분노가 일어나는 부분들은 피해가 좀 더 심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성냄을 다스리는 것들은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한 분노가 일어나기 전에 조그만 분노라도 성냄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것은 알아차려서 그것을 없앨려고 해야 됩니다.
언젠가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한테 프린트물로 내준 적이 있습니다.
분노는, 성냄은 방사능이 유출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라.
방사능이 유출되면 그것은 지금 당장 영향이 안 미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을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거라.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안전해지게 되는 것이지 그것과 가까이 있어가지고 영향을 안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조그만한 세균이라도 일어나면은 그것이 번식하지 못하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분노의 균이 여러분들에게 번식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분노의 해독제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조그만한 분노라도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이해해서 그것들을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만이 강한 분노,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악한 마음을 가지고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뜬금없이 화가 일어나고 하는 것들이 안 생겨날 수가 있다는 거라.
인터넷에 보면 요즘도 국정원 댓글 해가지고 막 문제들이 되고 하죠. 불교계 내에도 허다합니다. 그냥 꼬투리 잡아가지고 뭔가 말하고 싶어하고, 또 자기주장을 내세울려고 하고, 전부 이게 브야빠다라는 거라.
그게 본인은 아니라고 자꾸 항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분노가 일어난 것들이 이미 그런 쪽으로 표출된 겁니다. 남을 비난한다든지 하는 것도 본인에게 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든 글이든 행위든 나쁜 방향으로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방사능이 유출된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됩니다. 조그만한 화라도 일어나면은 그것은 반드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아까 애욕과 다르게 이 성냄은, 분노는 영향이 굉장히 지대합니다. 본인의 마음이 완전히 지배돼버리게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조그만한 화라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분노에 승리하기 위해서 상대해야 될 게 어디라요? 대상이라요? 어느 게 대상입니까? 밖에 것이 대상입니까? (수행자 대답 : 자기의 마음이 대상입니다.)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조그만한 성냄도 일으켜서는 안된다 하고 자신에게 지지않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겨봐야 그거 의미 없습니다.
저번에 서울에서 해피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다른 데는 참 잘돼가고 있는데 우리는 요렇게 되고 있다.
그래서 '저런 얘기는 스님이 하면 안되는데' 속으로 그랬어요. 왜 그렇겠어요? 남에게 이기기 위한 마음들입니다. 그거 뭐 할 건데? 이기면. 본인한테 이기지도 못하면서 남한테 이겨가지고 뭐 할 거라?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강한 분노는 파괴력이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자신에게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큰 데미지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이 끓고 있으면 그 속에 얼굴 비출 수가 없습니다." 탁해져 있는 물은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화상을 입을 이유는 없습니다. 탁해진 게 묻었으면 싹 닦아내버리면 그만인데, 끓고 있는 물에 얼굴을 대면 데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상은 치명적으로 계속적으로 치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성냄, 조그만한 화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알아차려서 자꾸 없애는 습관들을 가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티나-밋다(thīna-middha)' '혼침·망상·졸음' 이런 것들입니다.
티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힘이 약해져 있는 겁니다. 뭔가 행하고 싶지 않는 것.
수행에서도 일어남, 사라짐, 왼발, 오른발, 크게 마음을 안 먹어도 그것은 압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왼발 오른발 가고 있는 걸 알아차리는 건 뭐 때문에 하는데? 무상한 성품을 보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위한 건데, 그걸 할려는 힘을 내지 않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그것만 하고 있습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편안하거든.
불러오는데 '어, 이것도 변하네' 적어도 그것까지는 가야만이 더 할려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마음의 힘이 둔해져 있다는 거라. 대충해도 그거는 알고 있으니까. 그게 '티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은 걷는 것도 걷기 싫어집니다. 그럼 눕고 싶든지 앉고 싶게 됩니다. 배를 관찰하는 것도 관찰하는 것이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에는 졸음에 탁 떨어져버립니다. 그게 '밋다'라는 거라.
그래서 티나와 밋다는 결합으로써 잘 등장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활동하고 싶지 않고 둔해지면은 나중에는 마음이 그냥 쉬어버리는 거라. 뭘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빠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졸음에 떨어진다든지 자신이 행하는 것들이 뭘 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경우들이 생겨납니다.
가끔씩 경행 짧게 하고 좌선을 많이 하려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티나-밋다'에 지배당해있습니다. 좌선수행을 해도 대상에 대해서 더욱더 마음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티나-밋다'에 지배당하고 있는 겁니다.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그리해도 큰 불편은 없습니다.
수행에서는 그건 대단한 장애가 돼버립니다.
뭐 때문에 수행하는지를 까먹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고 해탈에 이르도록 자꾸 향상돼나가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머물르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자는 그것은 게으름이다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아, 내가 또 게으름 부리면서 그냥 편안하게 호흡 알아차리고 또 경행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을 하고,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마음은, 우리는 언제든지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찰나 간에 자꾸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게으름을 몰아내는 것은 참 힘이 들기는 합니다. 그리해도 그 게으름은 반드시 물리쳐야 됩니다.
언젠가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것들을 프린트물을 내주고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보고 조금 더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주석서에서는 그것을 "이끼가 많이 끼어있는 물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끼는 더욱더 번식을 하게 됩니다. 게으름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더 게으름에 빠지게 됩니다. 편안함을 추구하면 더 편안한 걸 바라게 됩니다.
그걸 몰아내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마음이 게으름을 부리고 있으면, 티나-밋다가 일어났으면 마음이 활동하려고 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그걸 봐야 됩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가끔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죠.
사띠를 하고 있으면 마음에 약간의 떨림 같은 것들이 있다고.
그런데 티나-밋다에 접하면 아예 그게 없어요. 뭔가 움직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이 가만히 고정돼있듯이 그냥 편안한 상태 그냥 있는 거라. 그러니까 대상이 일어나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라.
두더지 게임을 할 때 그것에 대해서 주시를 하고 방망이를 가지고 있어야만이 두더지가 일어나면 탁 탁 잡을 수가 있는데 그거 안 하는 거라. 마음이 그걸 잡을려는 마음이 안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잡지를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만날 매번 그걸 놓치는 거라.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보아야 됩니다. 그냥 편안하고 싶고, 그대로 있고 싶다는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티나-밋다가 일어났을 때는 그렇게 둔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티나-밋다가 일어났을 때는 쪼개야 됩니다. 그러한 상태들을.
졸음도 '졸음' '졸음' 하고 크게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티나-밋다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쪼개야 됩니다. 따가우면 따가웁다고 알고, 그래서 마음이 분명하게 그 대상에 머물도록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경행을 하더라도 '왼발' '오른발' 하던 것들을 왼발이 어떻게 움직여지는지를 자꾸 쪼개야 됩니다. 어? 여기 앞발부터 닿고 뒷발 닿고, 천천히 닿는구나, 이걸 나는 닿았다고 얘기하고 있구나. 그렇게 자꾸 쪼개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티나-밋다가 일어날 때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웃닷짜-꾹꿋짜(uddhacca-kukkucca)'라고 하는 겁니다.
보통 '웃닷짜'를 한자로 '도거(掉擧)'라고 얘기합니다. 흥분된 상태입니다. 들뜨고 집중 못하고 서두르고 있는 것.
보통 어떨 때 흥분되고 그러죠? 선한 행위 하고 있을 때는 그렇게 흥분되고 그렇게 안 합니다. 나쁜 일할 때 그렇게 흥분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다음에 '꾹꿋짜'라고 하는 것은 '후회' 부분입니다. 행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 '아, 이거 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건 두 번 화살을 맞는 거라. 나쁜 일을 행한 것에 대해서 화살을 받아야 되고, 또 후회한 것들에 대해서 화살을 받아야 됩니다.
세 가지로 보면 됩니다.
후회하고 마음이 들뜨고 하는 것들은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들떠가지고 좋은 거 없고, 그리고 뭔가 행하고 나서 후회해가지고 그것이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잘못이다 하고 분명하게 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본인이 인정해야 됩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또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 거라. 이러한 것을 다시 반복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보통 실패를 거울삼아서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그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어, 내가 잘못했네.' 그러고 나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됩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말아야지. 이런 것들을 반복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만이 똑같은 실패를 안 하고 성공으로 넘어갑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참회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후회하는 것이 아니고 참회하는 패턴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본인은 그것들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 형태들을 띨 때 아, 내가 인제는 바른 참회를 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된다는 거라. 반복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방법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걸 주석서에서는 "물결이 이는 거와 같다." 물결이 소용돌이 차고 물결이 일면은 바르게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들뜨고 하는 것도 안정시켜야 되는 거고, 그리고 후회하는 것들도 안정을 시켜야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집중하는 힘들이 생겨날 때 들뜨는 것들은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위찌낏차(vicikicchā)'라고 하는 것! '의심' 부분입니다.
의심은 그냥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게 Yes 인지 No 인지 명확하지 않은 걸 의심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집에 예쁜 꽃이 피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걸 보지 않고 예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그런데 왜 남의 말을 듣고 그대로 믿습니까? 전부 의심의 영역입니다.
의심(vicikicchā)이 그냥 남이 ‘그럴까 말까’ 이렇게 의심하는 걸 의심이라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본인이 확인되지 않고 그것들에 대해서 동조를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집 꽃 예쁘다 할 것 같으면 어, 그래? 그럼 가서 봐! 보고 나서 자신이 판단해가지고 예쁘다 하고 yes 할 수도 있고, 아니야 이건 안 예쁜 거야 하고 no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본인이 확인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하는 것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들, 아니면 부정해버리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전부 의심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아라한은 없어” 본인이 아라한이 돼봐야 아라한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데 그거 안 하고, 누군가가 그러더라 그러면서 본인도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스스로 확인된 것들, 그 데이터를 조사하고 확인된 것으로 인해서 판단하는 것은 의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고 판단하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의심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여러분들이 판단해가지고 뭔가 행하는 것들은 대부분은 보면 조사해서 하는 것들이 아니고 머릿속에서 생각해가지고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대부분 의심입니다.
그런데 의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의심도 있습니다.
본인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조사해서 확인하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어? 진짜인가? 부처님 담마가 진짜인가? 조사해보니까 아, 이게 진짜다! 그런 의심들은 좋은 의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조사·확인되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믿어버린다든지 부정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전부 의심의 영역에 속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인제 연말 다 돼가니까 신정되면 사람들이 점칠 겁니다. 스님은 “점보지 마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걸 여러분들이 그대로 믿어버린다든지 그대로 부정해버릴 것 같으면 그건 전부 의심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왜 스님이 점보지 말라고 했을까? 하고 지가 조사를 해봐라는 거라.
이거 점을 어떻게 치는 건지, 이게 어떤 논리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그걸 분명하게 조사를 해보면은 아, 이거 전부 사기네! 하고 알게 되면은 그다음부터는 점을 안 보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스님이 점보지 마라 했는데 맞구나 하고 판단을 한다는 거라.
자기 방식대로 Yes/No 라고 정해서는 안 되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조사를 해서 판단내리는 것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국의 문화가 참 나쁜 것들이 뭐냐면 그냥 애매하게 그렇게 하는 것들, 아니면 자신만의 판단들 이런 것들을 자꾸 존중할려다 보니까 의심들은 처음부터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애매한 것들은 의심의 영역에 속한다 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앞에 있는 것들이 다 포함됩니다. 흙탕물이 돼있고, 물도 끓어오르고, 물도 흔들리고, 물에 이끼가 끼여있고, 그런 상태라는 거라.
가장 안 좋은 것이 이 의심의 영역이라. 그마만큼 여러분들에게 일상적으로 많이 퍼지는 것들이고, 최악이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대부분은 보면 이 의심이라는 병에 걸려있다고 판단들을 하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본인이 행한 것이든 남이 행한 것이든 어떠한 행위든지 자신이 분명하게 조사해서 판단들을 내릴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해서 본인이 직접 이르러야 되는 거고, 그 법도 자신이 직접 조사하고 듣고 해서 판단들을 내릴 수가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일어나면 자신의 능력은 배가되지 못한다는 거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지혜가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이러한 것들에 마음에 지배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것은 수행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든지 욕구가 있고, 또 성냄도 있고, 갖가지 다른 것들도 있고, 의심도 있게 돼있습니다. 본인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판단내려서는 안됩니다.
누구든지 이 다섯 가지 장애는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본인이 쓸 능력들을 채 발휘를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본인의 상태를 '아, 아직은 멀었다' 하는 것을 깨닫고 이것들을 자꾸 제거해나가도록 더욱더 노력을 해야됩니다.
그래서 본인의 능력을 빼앗는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없애도록 더욱더 노력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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